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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건국 설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자본
텔레그램 건국 설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자본 by 🍊산디 텔레그렘은 매혹적인 건국설화를 갖고 있습니다. 기개와 시련, 용기, 망명, 이상향을 모두 담고 있죠. 설화는 러시아에서 시작됩니다. 미래에 텔레그램을 설립하게 되는 청년 파벨 두로프(Pavel Durov)는 2007년, 브콘탁테(VKontakte)를 창업합니다. 사실상 페이스북을 모방한 서비스였죠. 브콘탁테는 단숨에 러시아 최대 규모 소셜 네트워크로 발돋움합니다. 2012년 초, 위기가 닥칩니다. 러시아에서 반 푸틴 운동이 벌어진 것이죠. 두로프는 시위 참여자들이 브콘탁테를 활용해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고, 반-푸틴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블로그를 폐쇄하라는 요구에도 불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친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반대 혁명(유로마이단 혁명) 참가자 정보를 제공하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청도 거부합니다. 일련의 결정으로 파벨 두로프는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동시에 시련 또한 시작됩니다. 크렘린과 연관되어 있는 인사들이 브콘탁테의 경영권을 조금씩 잠식해오기 시작한 것이죠. 2014년, 그는 만우절 농담이라며 사의를 밝혔고, 이후 사의를 철회했으나, 만우절 농담은 현실이 되어 그는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잃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세계에 입성합니다. 두로프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당국에 협조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이후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견딜 수 없다”라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이 받은 박해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나아가 “불행히도, 그 나라(러시아)는 현재 인터넷 사업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의 비전을 드높이죠. 당시 그의 용기는 ‘깨끗한 양심’이라 불리며 큰 울림을 전했습니다. 이런 울림은 2013년 감시 자본주의의 속내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트위터, 구글 등 빅테크가 미국의 적대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방국, 심지어 자국민까지도 포함한 전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통신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 NSA)에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전지구적 충격에 휩싸인 시기였죠. 9.11 테러 이후 반테러리즘에 기댄 감시 국가의 부상과 자본주의의 결탁 속에서 파벨 두로프의 결단은 자유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독일 망명 후 그는 본격적으로 텔레그램을 서비스하기 시작했고, 세계는 그의 다음 도전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자유의 공간 텔레그램이 건국됩니다. 이러한 건국 설화를 배경으로 텔레그램은 빠르게 이용자를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텔레그램은 ‘지구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였습니다. 두로프는 자유의 선봉에 있는 신비로운 사람이었죠. 실제로 텔레그램은 반체제 인사들이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피난처로 기능합니다. 많은 한국 이용자들도 통신 자유를 위해 텔레그램으로 ‘망명’했죠. 그가 망명길에 떠난지 10년여가 지난 지금, 텔레그램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문제를 증폭하고 해결을 어렵게 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텔레그램이 약속한 ‘통신의 자유’는 비밀 채널에서 아동성착취물(Child Sexual Abuse Material, CSAM)을 비롯한 성착취물의 거래를 사실상 방조했습니다. 스탠포드 인터넷 감시소(Stanford Internet Observatory, SIO)는 텔레그램이 사적 채널을 통해 아동성착취물 거래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개인 간 통신에 대한 텔레그램의 정책은 다른 빅테크 플랫폼에 비해 너무도 자유로워서, 아동성착취물 유통과 어린이에 대한 성애화, 그루밍 등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텔레그램은 익명성과 보안, 사법 공백을 적극 활용해 수익을 좇는 이용자를 만들어냈습니다. 프랑스 당국은 아동 포르노물 유포, 유해 콘텐츠 방치뿐만 아니라 조직범죄 활동 공모, 마약 밀매 조장 등의 혐의로 두로프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이상은 여성 인권을 적극적으로 희롱하는 이용자들의 피난처로 전락했습니다. 혹자는 범죄를 저지른 이용자의 잘못을 텔레그램에게 돌릴 수 없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통신 자유는 텔레그램이 성장할 수 있는 기폭재이자 수익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텔레그램은 광고 시스템을 도입하고, 활성화된 방의 개설자에게 광고 수익의 50%를 주었습니다. 통신 내용에 대한 규율은 없었습니다. 다국적 해외 사업자로서 국가의 관할권을 교묘히 이용하며 적극적으로 사법 공백을 만들어냈습니다. 두로프는 텔레그램을 통해 20조원이 넘는 부를 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부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되었습니다. 2018년. 두로프는 인스타그램에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포스팅했습니다. 자유를 구하기 위해 내달리는 백마 탄 왕자가 되고자 했던 텔레그램의 신화는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자유를 내세워 쌓아 올린 그의 나라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착취의 구조 위에 쌓아 올린, 철저히 체계적인 억압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전세계가 목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대한 그의 이상은 무너지고 있고, 무너져야 합니다. 🦜 더 읽어보기- 산업화하는 딥페이크 성착취물(2024-08-26)- 딥페이크 성착취물 논의, 어디로 흘러가는가(2024-09-02)- 사진 내리기 말고 할 수 있는 일: AI 기업에 요구하기(2024-09-04)- 정말로 대안이 없을까?(2024-09-11)- 처벌법 개정, 딥페이크 성범죄를 끝낼 수 있을까(2024-10-02) 💬 댓글- (🤔어쪈) 자유라는 가치는 결코 유일하거나 모든 것에 우선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딥페이크 성범죄와 같은 문제에 대해 텔레그램과 같은 메신저 또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책임이 언급될 때마다 종종 표현·통신의 자유를 강조하며 사전 검열, 과잉 규제 등을 우려하는 주장을 접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한 것인지와 함께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이용되거나, 또 다른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feedback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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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 멘 군인이 케이블타이로 결박… “계엄군 떠올라”
청년들이 국방부 후문 앞에 모였다. 그곳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검은 제복의 사내들. 소총을 메고 무장한 모습이었다. 삼엄한 경계 너머 외딴 섬 같은 건물이 서 있다. 청년들은 그날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을 작정이었다. 백륭(22, 남) 씨 등 네 명의 청년은 지난 4일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대통령에게 면담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그들의 계획은 금세 좌절됐다. 양손이 뒤로 꺾이고 케이블타이에 묶인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청년들 중 가장 선두에서 달린 백 씨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군사경찰로 추정되는 사람이 총을 (몸) 앞으로 갖다 대면서 옆으로 확 쳤어요. 그러니까 옆에 주차돼 있던 차에 부딪혀서 앞으로 넘어졌어요. 그는 후문으로부터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얼굴이 뭉개졌다. 까만 제복에 검은 조끼를 입은 남자는 단숨에 백 씨의 등에 올라타 팔을 뒤로 꺾고, 머리와 등을 짓눌렀다.남자는 “왜 왔냐”며 윽박질렀다. “케이블타이 꺼내!”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 옆에 있던 소총을 멘 사내가 손목을 뒤로 고정했다. 케이블타이였다. 저항할수록 통증이 느껴졌다. 백 씨는 그때부터 구호를 외쳤다. “김건희를 특검하라! 거부권 남발 중단하라!”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눈앞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내들이 달라붙었다. 장갑차 여러 대가 도착하더니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네 명의 사내들은 그를 일으켜 세워 후문을 빠져나갔다. “그때 양복 입은 사람들(경호원으로 추정)한테 저를 넘겼거든요. 그러면서 ‘테이저건 준비해. 얘(백 씨) 뒤로 뛰어가면 쏴라.’ 이런 식으로 지시하더라고요. 문을 통과하자 발길질이 쏟아졌다. 벽을 보고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것. 위에서 체중으로 짓누르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쪼그려 앉았다. 양복 입은 남자들은 백 씨의 사지를 들어 스타렉스 승합차에 태웠다. 차 안에는 구한이(29, 여) 씨가 먼저 타고 있었다. 옷이 벗겨져 한쪽 팔에 걸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후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제압됐다. 그를 붙잡고 끌고 가는 과정에서 구 씨는 속옷이 그대로 노출된 채 차에 태워졌다. 현장에는 지나가는 시민들, 군인, 경호원, 경찰들이 있었다. 윤겨레(20, 여) 씨는 진압 과정에서 다리에 멍이 들었다. 그 역시 무릎에 등이 눌리고, 머리가 바닥에 짓눌렸다.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무게였다. 윤 씨의 손목에도 케이블타이가 채워졌다. 이들은 그 상태로 용산경찰서로 끌려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24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김건희 특검법이랑 채상병 특검법이 통과 안 됐어요. 2년 반 동안 (거부권) 24번이라는 숫자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국민들의 목소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면담 요청 하려고 간 거죠.” 이들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일 김건희특별검사법을 비롯한 3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24차례 거부권이 발동됐다. 지난달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조사기관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김건희 특검법’에 65%가 ‘찬성한다’고 답변했다. 지난 6월 여론조사꽃이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62.1%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권력 남용’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계획대로라면 면담요청서 전달하면서 면담하고 싶다 요구하는 거였죠. 그런데 몇 발 떼지도 못하고 붙잡혀서 바로 끌려간 거예요. 달렸다는 이유로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국방부 영내는 ‘경호구역’에 해당한다. 당시 국방부 후문은 서울경찰청 202경비단과 국방부 근무지원단 50군사경찰대 소속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케이블타이로 청년들의 손목을 결박한 건 군사경찰이었다. 이날의 진압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제압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졌는가. 대통령실 진입을 시도했던 이들은 총 4명. 각 서너 명의 병력들이 달라붙어 청년들을 끌어냈다. 현수막을 펼치거나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니었다. 국방부 영내에 뛰어들었다는 이유로 아스팔트에 얼굴이 짓눌리고, 팔이 뒤로 꺾이고, 손목이 케이블타이에 묶였다. 백 씨는 포박 과정에서 “계엄군이 떠오르기도 했다”며 분노했다. 최석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는 과정상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맨몸으로 들어가 아무 폭력행위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물리적으로 제압한 상황이 의문스럽다”며, 특히 “어떠한 장구로 사람들을 무조건 묶어도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고 꼬집었다. 둘째는 ‘케이블타이’가 군사경찰장비로 구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군사경찰의 직무수행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는 군사경찰장구가 명시돼 있다. 수갑, 포승, 경찰봉, 전자충격기, 전자충격총, 방패, 헬멧 등 보호장구 및 고무탄총까지. 여기에서 케이블타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과잉진압’ 논란을 피하려고 수갑 등의 장구가 아닌 케이블타이라는 ‘비공식 장구’를 쓴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못 들어가게 제지를 할 수는 있는데, 수단이 과도했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장구들이 있을 텐데, 케이블타이로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죠.”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도 같은 지적이다. 그는 “케이블타이는 일할 때 사용되는 것이지 상식적으로 사람한테 쓰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후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 병력의 수가 (청년들보다) 더 많았을 텐데, 상식적이지 않은 도구로 사람을 묶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비상식적인 도구로 사람을 묶은 사건. 몇 해 전 크게 이슈가 됐던 이른바 ‘외국인보호소 새우꺾기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2021년 모로코 난민 A 씨는 외국인보호소에서 손발이 뒤로 묶인 채 독방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이 논란이 되자 법무부는 “법령에 근거 없는 방식(‘새우꺾기’)의 보호장비 사용행위, 법령에 근거 없는 종류의 장비 사용 행위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A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나섰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5월 “강제력을 행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보호장비로 케이블타이나 발목 수갑, 박스테이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법령에 근거가 없는 방식으로 장비를 사용한 행위는 위법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이날 국가가 1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2년 헌법재판소도 “과도한 계구사용은 신체의 자유,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의 침해가 될 수 있다”며,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을 한 바 있다. 계구(戒具)란 ‘피고인이나 죄인이 도주, 폭행, 소요 또는 자살을 할 우려가 있을 때에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쓰는 기구’를 통틀어 말한다. “포승, 수갑 등을 사용한 신체의 결박은 자연스러운 거동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매우 불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종종 심리적 위축까지 수반하며 장시간 계속될 경우 심신에 고통을 주거나 나아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인간으로서의 품위에까지 손상을 줄 수도 있다.”(헌법재판소 2004헌마49 판결 2005. 5. 26. 일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진짜 갈 데까지 갔다, 이 정권은 정치적인 목소리 내는 국민들을 무차별하게 탄압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입틀막’은 윤석열 정부의 상징이 됐다. 강성희 당시 국회의원(진보당, 전주을)은 지난해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에서 대통령경호처 경호원들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채 들려 나갔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생 신민기 씨도 지난 2월 학위 수여식에서 R&D(연구개발) 예산 관련 구호를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지난해 대통령 경호처가 용산어린이정원에 일부 시민의 출입을 제한하고, 압수수색에 가까운 과도한 소지품 검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관련기사 : <대통령경호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우리가 요청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단체는 오늘(17일)로 27일째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백 씨는 “윤석열 정권이 위기를 느끼고 대학생들의 목소리까지 틀어막은 게 아니냐”며,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될 때까지 농성장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절차에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지난 8일, “경계 근무자가 폭력을 가했다는 대학생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케이블타이 사용 근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용산경찰서 역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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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 식성부터 성격까지 자신을 꼭 빼닮았던 딸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는 아버지는 딸을 위해 투사가 되었다.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위로도 받는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정민 위원장의 이야기.        -2년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활동을 돌아보면 늘 주축에 위원장님이 계셨어요.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여러 투쟁에서도 앞장서시고 언론 인터뷰도 맡아오셨죠. 이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냥 뉴스만 보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이걸 겪으면서 깊숙하게 블랙홀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겪고 알게 됐어요. 어느 순간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사안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되니까요. 차라리 모를 때가 나은데, 알고서 쳐다보면 너무 괴로운 거야. -위원장님의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참사 당시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퇴직하고 2년째 되는 시점이었어요. 사업을 준비하다가 어느 정도 다 갖춰져서 23년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 거죠. 의미를 부여할 게 없는 거예요. 돈을 벌어서 뭐 할 거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게 돼요. 그게 부모거든요.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너무 허망하죠. 사람들이 돈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분노를 해요. 내가 내 아이 키우면서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알아? 감히 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내가 얼마를 받을 건데?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심리적인 상실감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환산해요? 그렇게 내 사업은 다 접고 포기 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던 사업이 있었어요. 그건 못 없애겠는 거예요. 캐릭터 사업을 했는데, 특허도 내놓고 많은 준비를 했단 말이에요. 그걸 없애는 순간 아이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체 대표를 제가 인수인계 받아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아이가 만들어 둔 상품도 엄청 많은데 한 번씩 찾아와주시는 분들에게 무료 나눔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위안과 위로를 삼아요. -주영 씨가 아버지를 굉장히 든든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무뚝뚝해서 아이한테 위로의 말이나 따뜻한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본인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볼 때마다 나랑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너무 많이 들었죠. 식성부터 생각하는 거나 모든 것들이요. 그래서 많이 다퉜어요. 성향이 같으면 나의 단점이 보이거든요.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죠.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 자리를 몇 번 가졌어요. 보통의 아빠들이 그렇게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작에 친구들 불러서 같이 밥도 먹고 이름도 알고 뭐 이렇게 하면 참 좋았겠다 싶어서 후회가 되더라고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요.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 역할을 했대요. 친구들이 힘들 때 인생 상담도 해주고, 들어주고. 아이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부분이 참 많아요. 내가 좀 더 세심하고 배려 있게 관찰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자녀의 꿈을 마음껏 지지하지 못해 미안했던 아버지 아이가 직장 생활 접고 사업 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 물정도 모르고 무슨 사업을 한다고 그러냐 했어요. 너 굉장히 후회할 거다. 책임 질 것이 많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여러 번 만류 했죠. 설득이 안 될 것은 알지만 ‘너 내가 예전에 힘들다 이야기했지?’ 이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한 밑밥이었던 거죠. 그렇게 실패를 단정 짓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한테 말한 게 있으니 힘들다고 이야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계속 무시했어요. 누구 한 명이라도 좀 져주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정리 하면서 보니까 힘들어했던 흔적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아빠가 돼가지고 딸하고 신경전만 펼치고.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인들한테 자녀들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얘기해요. 자식을 보내고 그런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고 한심한 건가 깨닫는다. 너 힘들지? 너 힘들 거야. 그래도 이제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런 위로의 말을 한마디라도 해줄 수 있으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한테는 엄청나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참사 이후 마음이 지치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실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지친 마음을 다루고 계세요?  처음에 심리상담센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심리 상담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저한테 ‘지금 어떠세요?’ 묻는 거예요. ‘괜찮아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게 끝이었어요. 그 뒤부터는 전화를 안 받았어요. 심리 상담을 받는 다른 가족 분들도 있어요. 아직도 잠을 못 이루고 수면제 같은 거 처방받는 분도 있고 사람마다 달라요. 트라우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원봉사 상담사를 만나봤더니 참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분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한 1시간을 같이 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라우마는 어느 순간 ‘탁’ 하고 왔다가 사라져요. 한 번씩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화도 냈다가 막 울기도 하고. 별의별 희한한 감정이 밀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요, 이런 흐름이 주기적으로 오는 게 트라우마의 특징인데, 지금 아무 이상 없다니까 이상 없는 줄 알면 어떻게 심리 상담을 하겠어요. 결국은 공감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공감하고 있구나 느끼면 그때부터 치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떤 심리 상담사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가족들끼리 앉아서 이야기할 때 훨씬 나은 치유가 된다고 느껴요. 유가족과 많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 속에서 공감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보면 시민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이 받으시는 압박이나 부담이 굉장히 큰 것 같더라구요. 위원장님도 대표자로서 느끼실 무게가 결코 가볍진 않으실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가족들하고 다른 부분이 있어요. 앞장서서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가족보다는 훨씬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어요. 제가 단단하지 않으면 못 하거든요. 못 끌고 나가거든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스스로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습관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인터넷에 위원장님을 검색해보니까 직업에 사회활동가라고 뜬 걸 봤어요. 순간 그걸 보고 위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요? (웃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집회에서 발언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유가족이 아니야, 저 사람은 활동가야, 그런데 유가족처럼 행세하고 있어.’ 이런 댓글들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어처구니 없어가지고. 하하. 도대체 뭘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막 웃었거든요. 저는 ‘깜’이 안 되죠. (웃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 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일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대책위 상황실이나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워요. 저는 제 일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그 분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하잖아요.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인정을 받아야 될 분들이에요.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거든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일본의 아카시시 불꽃놀이 압사사고 유가족들이 우리와 연대하기 위해서 찾아왔었어요. 그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하나가 시민단체였어요. 일본은 그게 없대요.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할 수밖에 없대요. 누군가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국 오니까 정말 많은 단체들이 도와주고 지원하는 거 보고 너무 부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시민단체가 참 잘 작동되는 것 같아요. 시너지를 많이 얻고 또 그렇게 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저런 시민운동가, 활동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요. 스스로에게 이익은 되지 않아도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자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떤 끈끈한 무언가. 이웃에 대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거요. 오지랖이 넓은 민족? (웃음) 그런 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겠다고 결심하시기까지도 큰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다들 나하고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불안하고 노출되는 게 싫으니까. 뒤에서 서포트하는 역할만 하겠다 해서 (처음에는) 부대표를 맡았어요. 처음엔 거절을 했었어요. 왜냐면 제 어머니가 이 일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계시거든요.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알게 되면 안 된다. 나는 초상을 두 번 치러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극구 사양을 했었는데 그땐 나서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죠. 가족들끼리도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애 엄마나 아들이 뭘 망설이냐 무조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게 더 우습지 않느냐고 해서 그렇게 결심한 거죠. 오히려 야단을 맞았어요. 왜 주저 하냐고. 한 번은 어쩌다가 어머니가 뉴스를 본 거예요. ‘저기 나오는 사람이 엄청 많이 닮았네.’ 하고 말했는데. 누나가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왜 뉴스에 나오겠어? 뉴스에 나올 일이 없는데.’ 했었죠. (웃음) 1기 운영진 임기가 끝나고 2기에 들어서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뽑는데, 이제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등 떠밀려가고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는데 사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생전 없던 병이 생기더라고요. 다리부터 시작해서 붉은 반점이 생겨서 올라왔어요. 병원에 가봤더니 자가 면역에 이상이 생겼대요. 외부로 드러나는 것들은 괜찮은데 내부로 나타나면 그때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의사가 충분히 쉬면 가라앉을 거라고 해서 작년 10월 1주기 행사를 끝내놓고 쉬었어요. 쉬니까 싹 사라지더라고요. 1주기 땐 여기저기 불려 다녀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언론이나 각종 행사 등 정말 숨 쉴 틈이 없었어요. 그때 하루에 두 건, 세 건씩 인터뷰 하러 다니니까. 저는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 한 번도 없는 굉장히 건강한 체질이라고 생각 했는데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특별법 통과 이후에는 임기도 끝났고, 이제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해야 되겠다 했더니 주위에서 질타를 하는 거예요. 특조위 출발하는데 지금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떡하냐 무조건 책임을 지셔라. 힘들어도 지금까지 해왔으면 끝장을 봐야 될 거 아니냐. 지금 포기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등 떠밀더니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고 이러니까 이제 안 해도 된다. 고민했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 했느냐, 내가 왜 힘든 고행을 겪어가면서까지 이걸 하려고 했던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다른 거 다 제쳐놓고 그냥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을 한 거예요. 내가 유가협 대표로서 일을 한 게 아니다 거기에 의미 부여 해선 안 된다. 나는 어떤 대표나 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로서 부모로서 내가 이 역할을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요. 앞으로도 내 아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우리 아이가 불명예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 그만둬도 되겠다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족들은 안 그랬어요. 투표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반대표를 찍었대요. 아군이 아니고 적이구나 싶었죠. (웃음)   -역사를 보면 대형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 대책이 마련되고 관련 법안들이 만들어져요. 항상 유족들의 목소리와 노력이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에 이러저러한 법들은 다 피해자들이 만들어놓은 법들이에요. 안전과 관련된 법들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죠. 왜 대한민국의 모든 참사 관련 법안들은 피해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몸으로 던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게 참 안타깝고 답답하죠. -지난 2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해오셨어요. 이태원 참사와 유가족 분들의 여러 활동들로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안전해졌다고 느끼시나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못 느낄 수 있지만 저는 확실히 느껴요. 원래 강서 쪽 지하철이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막 끼어서 탄다. 숨이 막힐 정도로 꾸역꾸역 탔었는데, 참사 이후 인원이 다 찬 것 같으면 안 타는 거예요. 그 변화가 있었다는 걸 제가 듣고 그래도 사람들 인식이 심어져 있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최근 열린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잖아요. 경찰 병력이 2500명 이상이 투입이 됐고, 주최 측 인력까지 합하면 인파 관리 인력이 만 명 정도가 됐어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인식이 잠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참사 이후 주는 영향은 크다고 생각을 해요. 일반 사람들은 못 느끼겠죠. 당연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하나하나 바뀌어갈 거라고 믿어요.   -말씀처럼 하나하나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위원장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아직 남은 과제들이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신다면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 드릴게요. 시민들께 한 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왜곡된 정보와 싸워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글을 보고 판단해요. 왜곡된 정보만 있으면 그것만 보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같이 목소리를 내주시는 분들이 잘못된 정보와 싸워주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파할 수 있게 노력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어요. 진실한 부분과 거짓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거든요. 진실의 목소리를 많이 내 주십사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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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에 적합한 형식으로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오프라인 대화의 장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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