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14일. 새해를 맞아 희망과 기대 속에서 하루를 시작했을 그날, 대한민국은 역사에 남을 큰 상처를 입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 청년이 경찰 손에 목숨을 잃었다. 분주하고도 평화로워야 할 새해의 한복판에서 남영동 회색 벽돌 건물 5층에서 청년은 차가운 타일 바닥에서 온기를 잃어 갔다. 1월 14일을 맞아 박종철 열사의 이름과 그 뜻을 다시 떠올려 본다.
21세 청년, 고문으로 사망하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13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에 의해 불법 체포되었다. 경찰의 목적은 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과 관련된 수배자 박종운(한나라당, 자유공화당에서 활동하던 그 박종운이다)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짜고짜 박종철을 체포한 경찰은 열사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로 끌고 가 고문을 가했다. 물고문과 전기 고문이 쉼 없이 이어졌고, 이튿날 새벽 끝내 열사는 사망했다.
▲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층 고문실.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박배민(2020년 촬영)
경찰은 언론 브리핑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았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치안본부장 강민창과 내무부 장관 김종호를 해임하며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하지만, 부검 결과 물고문과 전기 고문에 의한 살인이 밝혀졌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마티아 김승훈 신부가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며, 경찰 고위층과 정부 기관의 은폐 조작 시도가 세상에 드러났다.
▲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최루탄에 대비해 눈에 비닐을 두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국가기록원
김 신부의 발표는 말 그대로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단순한 분노를 넘어, 억눌린 사회적 울분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그동안 억눌려온 자유에 대한 열망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을 외치며, '우리 종철이를 살려내라!'며 절규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기폭제가 되어 대한민국 현대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열사의 희생은 6월 항쟁으로 이어져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의 초석을 놓는 데 기여했다.
열사의 뜻을 잇다 - 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정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는 2003년부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해 열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 상은 정의와 신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박종철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작년(2024년)에는 군 내부 부조리를 고발한 채 상병 순직 사건의 박정훈 대령이 수상자로 선정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 박종철센터에 벽면에 있는 박종철 캐릭터 ⓒ성찰과성장
2023년부터는 박종철센터(이하 센터)가 개소하여 열사의 삶과 사상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구에 위치한 센터는 열사의 유품뿐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며, 시민들이 열사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돕고 있다. 센터가 개소하기에 앞서 2020년, 관악구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박종철거리’를 조성하였다. 이 거리에는 박종철 열사를 기억하기 위한 야외공간을 마련하고, 벤치와 동상도 설치했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라는 옥중 편지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박종철센터와 동상은 기억의 공간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31년 만의 고백, 남영동의 수사단장
▲ 박종철 열사의 희생 과정과 당시 사회상을 잘 표현한 영화 '1987' ⓒ 배급사 - CJ 엔터테인먼트
박종철 열사를 고문했던 경찰들은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안타깝게도, 법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그들의 삶은 비교적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1927년생인 치안감 박처원(영화 1987의 김윤석 배우)은 1996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후 80세까지 살다 생을 마쳤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영화 1987의 우현 배우)은 징역 8개월을 복역한 뒤, 201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까지 85세를 살았다. 법은 그들의 죄를 인정했지만, 고문이라는 행적에 비해 단죄의 무게는 충분치 않았다.
▲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국가기록원
한편, 반성하며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 사건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사단장이었지만 유일하게 구속당하지 않았던 전 모 씨는 사건 이후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은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2018년, SBS와의 면담에서 전 씨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후회를 꺼내 놓으며, 사건이 터진 날의 긴박했던 상황과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느꼈던 책임감을 상세히 밝혔다.
▲ 박종철 추모제와 관련해 명동성당 입구를 막고 있는 경찰 ⓒ국가기록원
전 씨는 당시 대공분실 내부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고문과 폭압적인 지시들이 조직적이고 정권 차원에서 강요된 것이었음을 증언했다. 전 씨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으로부터 '검거율이 많이 떨어졌다'며 공개 질타를 받는 등 폭력 수사에 대한 강한 압박이 있었음을 밝혔다. 경찰의 폭력과 고문 수사는 몇몇 극단적 행동이 아니라 공권력으로 포장된 정권의 구조적 문제였다. 전 씨의 증언을 통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필연적 결과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아들 곁으로 떠난, 어머니 정차순
2024년 4월 17일, 박종철 열사의 어머니 정차순 여사가 향년 91세로 막내아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정차순 여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막내아들과 함께 마석 모란민주열사묘역에 영면했다.
▲ 남영동 대공분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박배민 (2020년 촬영)
1987년 2월, 정차순 님은 경찰의 저지로 아들의 서울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부산 괴정동 사리암에서 종을 치며 아들의 넋을 기렸다. “종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거라!”라며 통곡하던 여사는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남편 고 박정기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과 막내 아들 죽음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 복도 모습. 각방에서 서로 확인할 수 없도록 문이 교차되어 만들어져 있다. ⓒ박배민 (2020년 촬영)
여사는 생전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곳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그 뜻은 사그라지지 않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박종철기념사업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2020년에 임시 개관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재정비를 마치고 2025년 연내 개관을 앞두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죽음의 공포 앞에서 박종철 열사가 남긴 용기와 정의감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엄숙한 울림을 전한다. 한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버티는 매화처럼,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열사의 의지는 희망의 꽃을 피워냈다. 민주주의가 다시 흔들리는 작금의 시대에 열사의 삶은 우리에게 용기와 연대의 힘을 가르치며,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운다.
▲ 1987년 서울대 언어학과 학우 일동이 발표한 추모 시 ⓒ성찰과성장(이미지 제작)
열사의 삶은 짧지만 강렬했고, 숭고한 희생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박종철 열사 추모 시에서 필자가 좋아하는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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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학습 놀이터
'성찰과성장'
글 작성 및 편집 : 박배민
성찰과성장.com
코멘트
2영화 <1987>을 본 뒤,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대한 자료와 서적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 이전에 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것까지도요. 그 자료들을 읽고, 우리 사회가 얻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공짜로 얻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한편, 최근 백골단 사태를 보고, 어쩌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회에서 조차 과거의 그 고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잊어버렸구나 싶었구요. 써주신 글처럼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분들을 주기적으로 기억하는 게 필요한 듯 보입니다. 또 그런 기억들이 일상이 될 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더욱 일깨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광장에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잘 알지도 못한다 / 알고 나가는 거냐 / 나중에 탄핵 기각 되면 부끄러운 줄 알아라 등의 말을 합니다. 저도 그런 얘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요. 그럴 때면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그시절 청년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에게도 누군가는 비난을 했겠지? 지금 보다 더 많은 억압이 있었겠지? 그런 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거겠지?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