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를 기억하는 법
조금은 잊혀진 참사 1994년 10월 21일. 이 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현재 굳건이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한 날이다. 오전 7시 느닷없이 서울시 성동구외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조금 이른 아침이었지만, 출근과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총 49명이 한강으로 추락, 32명이 사망했다. 건설사의 부실공사,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 감사, 정부의 안전검사 미흡으로 벌어진 참사다.  참사는 또다시 이어졌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지상 5층, 지하 4층 짜리 건물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로 인해 502명의 사망자, 937명의 부상자, 6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해당 인명 피해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원인은 성수대교와 비슷하다. 이 역시 건설사의 부실 공사, 안전 불감증, 공무원 비리가 엮여서 발생한 사고였다. 완공 이후 무리한 증축이 이루어졌고, 백화점은 벽면 균열과 천장 내려앉음 등 붕괴 조짐을 알고 서도 영업을 중단하지 않고, 응급 조치로만 대응했다.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참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나 30년 가까이 된 참사 이외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참사도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다. 이태원 참사 당시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이태원 할로윈 참사, 1995년 삼풍 붕괴 유령을 소환하다”라는 기사를 썼다. 기사는 우리나라가 삼풍 백화점 붕괴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지적, 붕괴 원인, 이태원 참사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는 삼풍 백화점 붕괴를 “현대화 열망 속에 건설업자, 공무원이 안전조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안전불감증과 공무원 무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이태원 참사가 참사 조짐이 보이고 알았음에도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삼풍 백화점 붕괴와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인명 피해를 낸 참사에서 전혀 배운 게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실제 이태원 참사의 경우, 참사 이전에 사람들이 압사할 것 같다고 말하는 신고전화가 11건 이상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이 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됐던 것을 감안하면, 코로나 제한 조치가 풀렸을 때 어느정도 폭발력을 가질지 분명 예측하고 판단하고 대비했었어야 한다. 참사가 발생한 이후,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는 또다시 발생한다.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선,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단순 희생자를 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고, 왜 그 문제를 보지 못했는지 혹은 알고도 외면했는지, 그 문제가 다시금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계속해서 상기해야 한다. 참사가 기록되지 않으면,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처럼 참사의 유령만 계속 떠돌 뿐이다. 참사를 기억하는 법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건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추모시설을 통해 당시 우리가 어떤 참사를 겪었는지 상기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치유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참사 피해자 유족들은 고인을 추모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당장 참사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집 값을 떨어트리는 혐오시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혐오시설이라는 인식 외에도, 공간 부지 마련과 사업비 문제, 행정 절차의 지연 등으로 건립이 안 되기도 한다. 서울시 광화문 광정에 있던, ‘세월호 기억공간'도 행정적인 이유로 철거된 상태다. 다시금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유족들의 외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해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어려운 건 아니다. 해외에서도 오랜기간 논의를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9∙11 테러 추모를 위해 세운 9∙11 추모 광장과 메모리얼 파크다.  9∙11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쌍둥이 빌딩에 두 개의 비행기가 자폭 테러를 한 사건을 말한다. 전 세계가 경악한 사건이다. 두 대의 비행기가 연이어 빌딩에 돌진하고, 쌍둥이 빌딩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게 전세계로 생중계 됐다. 2,996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중 민간인은 2,977명, 테러 주범인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19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25,000명 이상이다. 2006년 3월 13일부터 착공을 시작한 이곳은 2011년 9월 11일 꼬박 10년만에 추모관이 만들어졌고, 2014년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로 기억되는 9∙11테러 마저도 추모관 완공에 10년이 걸린 걸 보면, 어느 나라나 비극을 온전히 추모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 수 있다. 9∙11 메모리얼 파크에는 2개의 사각형 모양의 폭포가 있다. 그 폭포를 둘러싼 테두리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단순히 희생자만 있는 게 아니다. 희생자와 생전에 가까웠던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알파벳순이나 임의로 이름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물어 희생자의 이름을 생전에 알던 동료, 친구, 가족의 이름과 나란히 새긴 것이다. 건축을 맡은 아리드는 이를 ‘의미 있는 이웃들'이라는 개념으로 말했다. 이렇게 조성 된 메모리얼 파크와 박물관은 가족 투어, 현장 학습, 공공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어떤 사건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기억하는 공간이 됐다. 혐오하는 사람도 없고, 혐오 시설이라는 인식도 없고, 집 값이 떨어졌다는 소식도 없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안전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하게 되었으며, 공항 반입 가능 물품 등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테러 이전에 허용되던 조그만 과도를 제한하는 등 물품 하나 하나를 신경쓰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깐깐하게 심사했다. 그 결과 뉴욕JFK 공항은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이 아니다. 어엿한 선진국이다. 9∙11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테러가 발생했다는 건, 선진국이라고 하여 테러나 참사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참사를 받아들이고 다루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슬픔과 악몽, 위험과 재난,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벌어진 참사에 의미를 담는 모습이 선진국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 입장하게 되면 방문자들은 이런 문장을 맞이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시간의 흐름 속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 참사로 희생 된 사람들의 이름은 그 유족들에게 잊혀질 수 없고, 지울 수 없다. 당장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것과 그로 인한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 우리는 다시는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변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온다.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다시금 추모하면서, 부디 우리 사회가 그때의 참사를 다시 기억하고, 사회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출처 : 9∙11 MEMORIAL & MUSEUM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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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
참사,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참사 : 비참하고 끔찍한 일 참사 : 비참하게 죽음 풀이하면 비참하고 끔찍한 일로 인한 인명피해와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근 10년 들어 국민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참사가 있다. 2014년 4월 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 2022년 10월 29일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304명의 사람이 죽었다. 299명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5명의 어른들이었다. 어른들 중에는 학생들을 끝까지 구하려다 빠져나오지 못한 비정규직 교사분들까지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는 총 158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 중에는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명단 공개 논란이 있었지만, 유족의 동의를 받아 명단이 공개된 바 있다. 참사 유족들은 지난 9월에 길에서 두 번째 명절을 보냈다. 한편, 참사의 책임 소재는 아직도 다투고 있다.  또다른 참사를 막기 위해선, 왜 그 참사가 일어났는지, 막을 순 없었는지, 예방할 순 없었는지, 뼈가 으스러지는 그 참사를 겪고난 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뤄야 한다. 떠나간 사람들을 되살아나게 할 수 없다면, 그와 비슷한 또다른 참사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구조적 문제를 찾고, 그 구조를 바꾸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역할은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 당시를 보면, 언론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언론은 참사 원인을 개인에게 찾았다. 개인이 참사의 원인이라는 듯이. 토끼남을 찾아라, 정치 공방으로 어어지는 참사와 잇고 있는 언론 이태원 참사 당시, 토끼띠를 한 남자를 찾아라라는 기사가 많았다. 또끼띠를 한 사람이 앞 사람을 밀치자, 사람들이 줄줄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참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했다. 당사자는 마녀사냥이라고 말했고, 사고 당시 합정역에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 근거로 자세한 교통비 지출 내역까지 공개했다. 토끼띠 남으로 지목된 당사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와 억울하다는 입장을 말한 바 있다. 문제 원인이 어느 한 개인에게 ‘만' 있다면, 그 개인을 쫓고 추궁하고, 책임 소재를 묻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대개의 참사는 어느 한 개인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쌓여온 원인이 있고,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참사의 트리거가 어느 개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원인이 그에게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참사 당시 언론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분석하고, 알려서 책임자의 책임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참사 당시 책임이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 많이 동원됐어도 일어났을 참사"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압사 한 것을 두고 “압사? 뇌진탕 그런 게 있었겠지”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다고?” 라며 참사를 추모하는 모습도,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려는 책임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을 했다. 이러한 막말은 정치 공방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참사 영업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이, 유족들 고통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막을 순 없었는지, 대비책은 없는지를 다루는 기사는 찾기가 어렵다. 언론 역시 이런 정치 공방만을 주목해서 다루고 있다. 참사 당시에도 오히려 해외 언론들이 이에 대한 분석과 원인을 말하는 모양새였다. 해외가 더 분석하고, 알리는 참사 워싱턴 포스트는 이태원 참사 이후, 이 일이 왜 발생했는지 다루는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에서는 이태원 참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시간대 별로 참사 상황을 분석했다. 또한, 당시 투입된 경찰 인력에 대한 내용과 함께 경찰의 수직적 구조로 인해 적절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한국 경찰의 수직적 조직 문화 때문에 적절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경찰 교육 전문가들은 법적 근거나 매뉴얼에 기반한 예방 의무가 불확실한 사건의 경우 일선 경찰이 나설 동기가 적다고 말했다. 또한 매뉴얼에 없는 내용을 예방 목적으로 제시하기 힘든 경직된 구조라고 꼬집었다.군중 전문가인 마틴 아모스 영국 노섬브리아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군중 압착이 이미 진행된 상황에서는, 사망자 규모를 줄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적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정부는 이런 일이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게 예방하는 데 최선을 다했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 역시 기사를 다뤘었다. 기사는 이대로 두면 사람이 죽을 거라는 경고가 몇 년 전부터 있었으며, 당시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에 인력 증원 요청을 했으나 집해로 인해 충원이 어렵다고 거절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용산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시위 집회가 있었는데, 집회 참석 인원은 4,700명이었다. 반면, 1마일 떨어진 이태원에는 13만 명이 모였다.  137명의 경찰 배치 인력 중 마약 전담 형사가 52명이었다는 내용, 그리고 단 한 명의 마약범도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나마 마약 전담 형사들은 10시 48분에 구조에 투입됐고, 11시 1분에 대통령에게 참사 소식이 전해지고, 11시 20분에 행안부가 재난문자를 발송, 11시 40분에 집회 투입 경찰 인원이 현장에 투입됐다는 자세한 이야기를 내놨다. 무엇보다 주목 된 건 이들의 분석이 어느 국내 기사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을 다뤘다는 점과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참사라는 것을 지목했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사고를 인도는 이렇게 다뤘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인도 역시 이태원 참사를 다뤘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건 그 다음날 인도에서 발생한 사고다. 이태원 참사 하루 뒤인 10월 30일, 인도 구자라뜨 주 모르비(Morbi) 다리가 붕괴됐고, 이로 인해 140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사의 영상을 보면, 한 사람이 다리를 흔드는 걸 볼 수 있다. 그 뒤 다리가 무너진다. 연합뉴스는 해당 영상의 썸네일을 “한 청년이 몸을 흔들자 벌어지는 끔찍한 사고"라고 짓고 보도했다. 어느 한 사람이 몸을 흔든다고 해서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부실한 다리였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참사의 원인을 개인에게 몰아가려는 ‘마녀사냥'이 제대로 보이는 썸네일이다. 우리나라 언론이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도 언론은 어떨까? 그들도 참사를 한 개인에게 몰아가는 마냐사냥을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원인 분석을 하고, 해당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무는 방향으로 기사를 썼다. 기사에 따르면, 무너진 다리는 1877년에 지어졌고, 2022년에 7개월 간 다리 보수공사를 했다. 하지만, 안전 우려가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데 주의가 필요했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일어나 결국 참사가 일어났고, 책임자로 지목된 담당 회사 Oreva는 그 책임을 인정했다. 이러한 책임 인정까지 인도 언론은 어째서 보수공사 한 다리가 무너지게 됐는지, 부실 공사는 없었는지, 40년 간 책임을 맡았던 Oreva와 다리가 있던 구자르뜨 주에서 장기 집권하던 BJP 정부와 거래가 있었던 건 아닌지 계속해서 보도했다. 원인을 개인에게 찾기 보다, 구조적인 진상 규명과 구조적 문제 파악에 초점을 맞춘 보도였다. 정치적 이슈화도, 개인의 마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과 시민의 역할은 언론이 원인을 분석하고, 구조적 문제를 찾아 지적해서 바뀐다고 해도 또다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쩌면, 아니 반드시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차피 발생할 것이라며 안일하게 대응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대비하고 예방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 마녀사냥과 정치적 이슈로 몰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참사 원인을 규명하고 예방할 것인가. 진짜 언론이라면 나는 후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사와 재난을 다루는 언론이 부디, 다시는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진상 규명과 원인 분석, 문제 파악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이태원 참사가 곧 있으면 1년을 맞이한다. 1년을 돌아보고 참사 이후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어떻게 바꼈는지, 다시 비슷한 상황에서도 동일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지, 언론은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시민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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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도 기자도 독자가 만든다
돈 때문에 만들어진 기레기? 기레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언론사와 기자들이 기레기를 자처한 것일까? 아니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독자들이 만든 것일까? 어려운 문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혹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냐, 인간이 신을 만들었냐 같은 질문이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있다.<이 글에는 '기레기'가 스물여섯 번 나옵니다> 글쓴이는 기레기를 만든 건 독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 거대한 방송국이나 신문사의 기레기들이 다른 매체들보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돈 받아먹으며 기레기짓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품위 있는 기자들'에게 힘을 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레기는 우리가 키운 셈이다.” 요약하면, 분명 좋은 매체와 기자들이 많지만 독자들이 이들을 모르고, 거대 언론 매체에서 쓰는 기사들만 쉽게 쉽게 접하기 때문에 기레기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구조적인 문제도 지적한다. 독자들이 기사를 공짜로 보는 구조에서 언론사는 광고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광고주에 맞는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론사의 편집권과 경영권은 분명 별개로 되어야 하는 게 맞지만, 100% 별개로 하는 건 말할 때만 쉽다. 돈을 주는 사람에게 대놓고 펜 끝을 들이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밥 그릇 사라지는 데 별 수 없다. 실제 언론들은 포털에 기사 띄우기와 조회수로서 생존을 갈구하고 있다 기사 조회수가 높기 위해선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달아 이목을 끌어야 한다. 조회수 경쟁이며, 거의 유일한 생존 전략처럼 됐다. 물론 생존전략에는 조회수만 있지 않다. 언론사 자체적으로 큰 돈을 받아 컨퍼런스를 열기도 하고, 상금을 내걸고 시상을 하기도 한다. 언론사가 상을 만들어 시상하고, 그에 대한 기사를 써주고. 기업 입장에서는 안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실제 이러한 문제는 다수 문제로 지적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 돈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시민이 바라는 좋은 콘텐츠는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안적인 시도 몇 년 전이다. 예전에 모 단체에서 같이 활동하던 형을 우연히 광화문에서 만났다. 그 형은 영상을 기반으로 사회문제를 말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채널명은 <쑈싸이어티>였다. 당시 포켓몬GO가 유형이었는데, 포켓몬의 주인공인 지우 차림을 했던게 기억난다. 당시 영상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그 채널이 운영되지 않는다. 마지막 영상 업로드가 6년 전이다. 그 뒤 내가 알던 형은 동물권 단체에서 일하다가, 요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을 말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형과 함께 활동하던 분도 현재 모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동물 관련 취재를 중점으로 하고 계셨다. 해당 채널이 만들어진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문과 방송을 보지 않는 시민들을 위한 뉴스를 만들고 싶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이런 시도가 기성 매체의 틀에서 벗어나 다르게 접근하고, 다른 시각에서 알려져야 할 내용들을 대안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시도는 좋지만, 이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기성 언론이 하지 않는 걸 하기 위해선 콘텐츠를 잘 만들어야 하고, 그 만한 투자를 해야 한다. 돈이 든다는 말이다. 기자로 하여금 취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콘텐츠가 잘 나와야 하고 잘 알려져야 한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세상에 보여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좋은 콘텐츠와 대안적인 시도를 위해서 활동하는 대안언론도 돈이 없다면,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인 것이다. 앞서 <쑈사이어티>를 운영했던 형이 동물권 단체로 이직하며 썼든 글에서도, 돈이 가장 힘들었다고 썼던 게 기억난다. 시민들이 후원하면, 대안언론이 설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모 대안 언론사의 방침. 한겨레 21 챕쳐 앞서 독자들이 공짜로 기사를 읽기 때문에 기레기가 만들어진다는 내용을 살펴봤다. 간단하게만 생각하면, 시민들이 후원을 한다면 양질의 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성 언론에서 하지 않는 취재, 기성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내용을 듣고, 말하고, 쓰는 언론이 많아지고 그런 언론을 시민들이 후원한다면 시민이 바라는 양질의 기사와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역시도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기준에 대안언론에서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대안언론에서 주목하게 다뤘다. 기성 언론이라면 광고주 목에 칼을 들이미는 꼴이라며 꺼렸을지도 모르는 일도 기사로 썼다.  나 역시도 대안 언론에 후원했었다. 내가 원하는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세상에 나와야 할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고, 그 작은 돈이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후원한다. 물론 대안언론이라고 해서 완벽하지 않다. 그들도 실수를 하고, 팩트 체크가 미비한 경우도 있다. 그런 잘못을 옹호할 마음은 없다. 기성에서 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더 철저하게 기성보다 잘 해야 한다. 기성 보다 더 잘하는 언론, 기성 보다 더 확실한 언론이 대안 언론으로부터 나왔으면 좋겠다. 기레기도, 기자도 독자가 만들 수 있다. 기자가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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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 그 언론만의 것이길
연이은 안타까운 선생님들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부터 최근 대전의 모 교사의 사망 소식까지 전해졌다. 한 유명 웹툰 작가의 고소로 알려진 장애인 학급 교사의 이야기도 현재 진행 중이다. 서이초등학교에는 한동안 선생님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전국의 선생님들은 거리에 모여 교권 회복을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목소리였다. 구조적 문제 해결을 외친 그날, 수 많은 선생님들은 서이초 교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걸음을 옮겼다. 교사였던 적은 없지만, 젊은 선생님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서이초등학교에 갔었다. 그 날은 비가왔다.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도 선생님들은 우산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국화를 들고 서이초로 향했다. 교문 앞에서부터 울며 들어온 선생님과 입을 다문채 조용히 들어온 선생님들은 모두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때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그때 이 문제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 선배 교사로서 너무 미안하다는 메시지였다. 서이초등학교에 붙어 있던 선배 교사의 메시지 (사진 촬영 일자 23.07.22) 서이초등학교에 붙어 있던 누군가가 남긴 메시지 (사진 촬영 일자 23.07.22) 비 때문에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비 속에서도 모이는 사람은 많았다. 수 많은 메시지와 선생님들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국화를 놓고 합장한 기억이 난다. 수 많은 메시지에서 서이초 선생님에게 악성 민원을 넣었다는 학부모들을 비난하는 글도 있었지만,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룬 메시지는 없었다. 애초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구조를 바꾸는 게 더 나은 해결책이어서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한 언론매체는 구조보다 고인 개인의 사생활을 다룬 기사를 냈다. [단독] 기사였다. 해당 기사에는 서이초 교사의 일기장을 토대로 이미 극단 시도를 하려고 했다는 암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해당 보도가 나간 뒤, 사람들은 분노했다. 고인 개인의 삶을 들춘 내용이었고, 죽음까지 내밀어진 사건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관련 있는 내용이었다처도, 고인에 대한 윤리에 맞는지 지적 받아 마땅한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해당 보도 윤리에 대해 지적한 건 개인들만이 아니었다.  해당 보도에 대해 언론 인권 센터는 유감을 표했다. 인권센터는 “(기사의 내용이) 어떻게 고인의 일기장을 압수했는지, 유가족 허락을 받았는지, 정신과 치료 기록은 어떻게 입수 했는지 언급이 빠졌다” 라며 “이는 고인의 사생활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물론 ‘자살보도윤리강령’에도 어긋난다.”라고 지적했다. 해당 내용 보도에 대해 유족의 허락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유족으로 알려진 사촌 오빠의 블로그 글에는 해당 내용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A씨 유족은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언론 윤리강령 제 3, 4, 5, 6, 7조를 어겼다고 지적했다. 한국기자협회가 말하는 윤리강령과 자살보도 윤리강령은 아래와 같다. 윤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할 도리를 말한다. 이러한 윤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할지 선택할 때 작용한다. 보도 윤리 강령이란, 언론사가 특정 사안에 대해 보도 할 때,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사안들이다. 언론 윤리 강령은, “언론이 공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자유에 상응하는 책임과 윤리의식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두”됐다. 또한, “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은 자율규제의 원칙에 따라 언론기관 또는 언론단체가 스스로 제정하여 스스로의 행동과 활동에 규제를 가하는 규범과 규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강령을 만드는 주체는 언론기관 또는 언론단체 스스로가 될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런 윤리강령을 무조건 따라야 되는 건 아니다. 실제 언론사 중에는 윤리 강령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는 듯 하다. 정확하게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언론사의 윤리 강령을 확인해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윤리 강령 글의 애매모호함 때문에라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강제성 없는 애매함은 실천을 보장하지 않는다. 또한, 십 수년 전에는 언론 취재 윤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취재 윤리 관련 포럼에서 한 교수는 “언론의 목적은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지, 취재 윤리를 지키는 데에 있지 않다"며 "기자는 윤리 규정의 경계를 넘나들며 언론의 자유 신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벌써 십 수년 전의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현실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모든 언론이 이렇게 하는 건 아니다. 쿠키뉴스의 경우, 단독과 기획 기사는 기자의 실명과 함께 윤리강령과 보도준칙을 지켰다는 걸 명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장치들이 기자와 언론사 모두에게 자신들의 기사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고 생각한다. 애매한 윤리를 따르기 어렵다면, 최소한의 보도준칙을 더욱 명확히 하고 보도 전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1980년 대 우리나라 언론에는 보도지침이 내려졌다. 정부에서 언론 통제를 위해 사용한 것들이다. 보도지침으로 인해 각 신문사의 헤드라인과 신문 구성이 동일한 경우도 있었다.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는 보도지침은 없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파헤치고, 본질과 상관없는 문제를 들추는 언론이라면 마땅한 보도지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2023년에 새로운 보도지침을 만들어서 하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좋은 기자가, 좋은 시스템 안에서 강력한 규범과 윤리 지침의 통제 아래 훈련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언론의 정의는 다양할 것이다. 202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는 “좋은 언론이란 강력한 규범 및 윤리 지침의 통제 아래 뉴스룸에서 실행되는 직업적 훈련과 판단의 결과다.”* 라고 말했다. 규범과 윤리 지침을 따르는 직업적 훈련이 된다면, 우리나라의 언론도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처음 기자가 되어 수습 기자 신분일 때, 수습의 수'는 ‘닦을 수修'다. 그 ‘수'가 기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짐승 수獸'가 되지 않도록, 인간이 가지고 언론이 가지는 그 윤리란 것을 잘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훈련된 기자와 언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한 언론사의 [단독]을 보며 추모에 갔던 그 날이 떠오른다. 내가 봤던 모든 사람의 추모하는 마음과 교사와 그 가족의 마음을 매장한 기사였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단독]을 보고 선생님의 죽음을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론, [단독]이 붙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윤리가 없던 해당 보도가, 그 언론사 단독의 모습이길 바래본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다른 언론은, 그 윤리없는 [단독]에 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집논문] 국내외 언론윤리강령의 비교와 제언> (한병구/ 언론중재위원회, 1990) p.3~4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마리아 레사/ 북하우스/ 2022) p.115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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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언론이 없다면, 지역은 어떻게 될까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있기 전, 각 언론사에는 보도지침이 내려졌다. 정부가 특정 사안 보도에 대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 보도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한다면 어떻게 보도를 해야하는지 내려졌다. 언론은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몰랐다. 1980년 대 당시 내려왔다는 보도지침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정권이 보도지침을 만들면서까지 언론을 탄압했던 이유는 중앙 집권적 권력을 더욱 곤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언론은 시민의 눈과 귀였다. 신문에 담긴 기사로 소식을 접하던 당시엔, 이러한 통제가 중요했다. 지금처럼 SNS가 없던 시기였기에, 언론이 통제 당하면 시민의 눈과 귀가 막힌 것과 다름 없었다. 권력은 점점 중앙화됐고, 언론 역시 중앙지라고 부르는 것과 소수 광역 지역 일간지만 존재했다. 언론 통제를 해야 하는데, 신문이 많아지면 통제가 어려우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달라졌다.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뒤, 수 많은 지역 언론이 생겼다. 1988년 12월 1일에 ‘홍성신문'이 창간한 이후, 1996년까지 9년 간 전국적으로 600개 지역 신문이 생겼다. 소수의 신문이 아닌, 신문의 다양성이 갖춰진 것이다. 지역 신문은 지역사회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간 정보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민의 참여를 이끄는 게 지역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또한, 지역의 이슈를 공론화하고 지역사회의 감시와 견제, 지역 정보의 생산과 기록, 지역민과의 교류 및 연계, 공론장 형성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출처 : 청양신문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지역신문 발전을 위한 지원계획 수립 연구(2022)’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지역종합일간지는 129개사, 지역종합주간지는 2021년 기준 575개사로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많은 지역 신문이 있는지 몰랐다. 이렇게 많은 지역신문이 있음에도 잘 모르는 건, 우리나라 언론이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10대 일간지를 우리나라의 대표 신문사라고 한다. 10대 일간지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국민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문화일보가 있다. 벌어졌던 이슈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소위 <조국사태>라고 일컬어지는 일이 있었을 때 7개 일간지에 속하는 신문사들은 하루에도 10개씩 단독보도 했다. 포털이 ‘조국’ 두 글자로 도배되던 때였다.  해당 사태가 있었을 때, 한 사람에 대한 너무 많은 보도로 다른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내용은 전혀 볼 수 없던 게 기억난다.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도 중요했지만, 당시 보도들을 보면서, 중앙에서 하나에 사건에, 하나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보도를 한다면 그 안에 지역 이슈가 들어갈 틈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 지역에 가면 그 지역 당일 신문을 읽는 편이다. 올해 2월에 찍은 사진. 지역신문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게 아니다. 지역의 이슈는 중앙으로 전달되어 알려지기도 한다. 또한, 지역신문은 해당 내용을 계속해서 추적해 알린다. 2007년 12월 7일에 발생한 삼성중공업의 태안바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15년 동안 태안신문은 2,000건이 넘는 보도를 꾸준히 해왔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도 한번의 이슈화로 끝나면 그걸로 끝이다. 꾸준한 보도와 지적이 있어야 반면교사 삼으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이슈를 만들어 공론화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지역의 이슈는 점점 쪼그라들어 소멸될지도 모른다. 지역민의 마지막 민원창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역자치를 위해 탄생한 지역신문이 사라진다면, 그 지역의 이슈는 없고 중앙의 이슈로만 도배되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진 않을까 우려가 된다. 우려가 우려로 남고 현실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중앙에 있는 시민으로서 지역 언론에 대해 말한다는 게 사실 부끄럽다. 지역에 갈때마다 지역 신문을 사서 읽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지역 신문을 응원하는 방법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역 신문의 위기가 비단 그 신문사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 신문의 위기는 지방 소멸과도 연관되고, 지역 이슈와도 연관되며 지방 자치에 대한 문제와도 연관된다. 다양한 문제가 얽히고 설킨 지역 신문의 위기를 이 글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부디 한 사람이라도 지역 신문의 문제가 모든 것과 연결되는 문제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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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신뢰를 받는 언론이 되려면?
28%만 신뢰하고, 58% 비판하는 한국 언론 출처 : 디지털 리포트 2023 p.24 영국 옥스퍼대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가 발표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에 따르면, 한국의 뉴스 신뢰되는 28%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태영퍙 국가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며, 2022년보다 2% 하락한 수치다. 또한, 기자나 언론 미디어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느냐는 응답에도 한국은 58%가 들은적이 있다고 답했다. 해당 수치로만 판단한다면, 대한민국의 언론은 시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쓰레기라 불리는 직업 국민이 언론을, 기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용어가 있다. 기레기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이 말은, 과거 세월호 참사가 있었을 당시부터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에 대한 공감 없이 무작정 단독과 속보를 내비치기 위한 경쟁의 결과였다. 당시 가장 황당한 기사 중 하나는 ‘[단독] “유대균, 소심한 목소리로 뼈없는 치킨 주문" 이라는 기사였다. 299명의 학생과 5명의 어른이 세상을 떠난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 책임 소재 파악만 보도해도 모자랄판에, 뼈없는 치킨 주문 소식을 ‘[단독]’이라며 기사로 쓴 것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해당 기사에 시민들은 “맥주는 안 시키더냐"라며 언론을 비판했다. 물론, 해당 기사의 제목을 [단독]이라며 보도한 건 해당 기자의 작품은 아니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언론사 데스크에 보고만 했을 뿐인데, 데스크에서 [단독]을 붙여 내보냈다고 한다. 언론사 데스크의 과욕이었다. 실제 작성자가 누구든, 해당 기사를 언론이라는 이름하에 내보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같은 과욕은 언론이 스스로 무엇에 집중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단독] [속보] 전쟁 뼈없는 치킨 주문 기사는, 언론이 시민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시민 대신 질문한다는 언론의 속성을 잊은채 단독과 속보에 눈이 멀었다는 걸 보여주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쓰려고 하는 기사를 네이버에 검색해 아무도 쓰지 않았으면, [단독]을 내걸어 작성하고,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기사는 누구보다 빠르게 [속보]를 붙여 쓴다. 이렇게 되면 기자는 이게 정말 시민이 원하는 기사인지, 시민이 듣고자 하는 기사인지, 시민이 묻고 싶은 질문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해당 기사의 팩트가 맞는지도 불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언론의 역할 중 하나는 시민이 갖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시민을 대신해 정부, 기업, 의사결정자, 권력자에게 질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시민의 문제 의식을 정부, 기업, 권력자들에게 말하는 게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기자가 어떤 시민들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하느냐는 소속된 언론사, 기자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최소 이 정도 문제 의식을 갖고 있으면 속도 경쟁만을 위한 [단독]과 [속보] 경쟁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속도 경쟁만 남은 상황에서 기자들이 하나의 문제의식을 깊이 고민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사 하나를 때우려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오후 반나절 정도 있다 가는 기자는 어떤 종류가 됐든 진실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가가는 일이 거의 없다.”* 왜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가? 글을 쓰기 위해 지인 5명에게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 언론에 대한 평소 생각을 물었다. 답변에는 신뢰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고, 평소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특별한 의견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길지 않은 통화에서 얻은 몇 가지 이유를 나열하면 이랬다. “(언론들) 쓰는 거 보면 보도자료 그대로 긁어와서 받아쓰기만 한다. 토씨하나 안 틀린다. 그게 언론이냐?” “(언론사마다) 너무 편파적이다. 보수 언론은 보수쪽만 쓰고, 진보 언론은 진보쪽만 쓴다. 가끔 보면 언론사 기조에 맞게 대변하는 것 같다. 언론이 특정 진영을 대변하는 건가? 언론의 기본은 비판이라고 생각하는데, 비판은 없고 공격만 있다. 어떤 언론사를 보면 그냥 기관지인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일단 뭐가 너무 많고, 그 중에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도 있다. 내가 궁금한 정보를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있다 해도 다른 게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렵다.” 각자의 이유는 다 달랐지만, 짧은 인터뷰에서 들었던 생각은 언론은 진영 논리나 광고주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시민에게 귀기울이는 것이 진정 ‘좋은 언론'으로 가는 길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좋은 언론을 시민은 믿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언론 “좋은 언론인은 증거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의지한다.”** “좋은 언론은 신뢰와 함께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취재 대상이 당신을 신뢰해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당신의 기사를 통해 청중들과 서서히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좋은 언론인은 균형을 찾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지도자가 전쟁 범죄를 저지르거나 시민들에게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도 균형을 찾는다면, 그것은 등가성의 오류로 귀결될 뿐이다. 언론인이 권력자를 대할 때 ‘균형 잡힌' 방식으로 기사를 쓰는게 더 쉽고 안전하다. 하지만 이는 비겁한 사람의 탈출구일 뿐이다.”** 2021년 언론의 자유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의 언론인 ‘마리이 레사'는 자신의 책,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에서 좋은 언론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그에 따르면, 좋은 언론은 증거와 사실에 기반해 기사를 쓰고, 그 기사를 통해 시민들의 신뢰를 얻는다. 또한 그 언론을 신뢰하는 시민들에 의해 더더욱 지도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결국, 언론이 더욱 언론다워지기 위해선 진영 논리를 대변하고, 광고주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서 시민을 위한 기사를 쓰는 것이다. 물론 시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시민이 아니다. 입장이 다르고, 생각하는 게 다르다. 이럴 때 대중을 취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언론인은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귀 기울여 듣고, 그가 그로부터 알게 된 내용을 통합해 대중이 각자의 정보에 입각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다양한 시민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의견을 기반으로 문제 의식을 형성하고, 다양한 차원에서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해서 얻은 정보를 시민에게 전달해 주는 것. 그것이 좋은 언론이라고 생각하고, 시민은 그런 좋은 언론을 신뢰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나 역시도 언론을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진영에 맞춰진, 이익에 맞춰진 언론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서다. 부디 언론이 시민의 편에 섰으면 좋겠다. 어느 한 진영에 있는 시민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언론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더 깊이 시민에게 귀 기울이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보]와 [단독]에 물든 언론이 아니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언론을 신뢰하고, 지지해 힘을 실어주는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언론인과 언론사는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민의 힘에서 나온다.”** *<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엘리/ 2021) p.270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마리아 레사/ 북하우스/ 2022) p.110,111, 114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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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축산을 바꾸기 위해선
전쟁 이후 탄생한 축산법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특히 유럽은 전쟁으로 온 땅이 폐허가 됐다. 삶의 터전이 사라졌고, 수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삶의 고난이 꾸준히 지속됐다. 전쟁이 고달픈 이유 중 하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식량은 부족하고, 먹어야 할 사람은 많다. 해결책은 제한된 식량을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다. 배고픈 만큼 먹는 게 아니라, 주어진 만큼 먹어야 한다. 배급제의 시작이다. 전쟁의 배급을 위해선 인간에게 줄 음식이 있어야 했다.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수를 제한해 인간이 먹을 식량을 확보해야 했다. 가축의 수가 제한 된 이유다. 또한 가축은 군인들의 식량으로 함께 전쟁터로 이동하곤 했다. 육류는 장기간 보관이 어려워서였다. 향후, 이런 부분에서 발전 된 것이 지금의 통조림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가축 수 제한이 풀리자 축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치솟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생산 방식이 필요했다. 같은 공간에 1마리의 닭을 키우던 걸, 3마리, 4마리로 늘려서 키우고, 1개 우리에 1마리 돼지가 아닌, 1개 우리 5마리 돼지로 늘려서 키웠다. 그러자 수요를 맞출 수 있게 됐고, 새로운 축산 방식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1964년, 공장식 축산을 고발하다 공장식 축산은 최소 비용으로 달걀, 우유, 고기 등 축산물의 생산량을 최대화하기 위해 동물을 한정된 공간에서 대규모 밀집 사육하는 축산의 형태다. 이러한 축산 형태는 1964년 영국의 동물복지 활동가이자 작가였던 루스 해리슨의 책, <동물기계>에 의해 최초로 고발된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형태의 축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생산라인 방식의 축산, 공장식 축산이다. 여기서 동물들은 죽을 때까지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는 1960년 대 영국의 공장식 축산 현황을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자라는 소, 닭, 병아리, 돼지가 어떻게 생활하고 고기가 되는지 이야기한다. 인간이 1년 동안 가장 많이 먹는 동물이 닭이라고 한다. 1960년 대, 병아리들은 닭이 되기 전에 이런 모습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벽 안쪽에 더 많은 상자들이 쌓여 있다. 상자 하나에 열두 마리. 상자 안의 병아리들은 도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람석에서 보듯 볼 수 있었다. (중략)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상자에서 꺼낸 병아리의 다리를 컨베이어 벨트에 거꾸로 매달아 묶는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병아리들이 놀라지 않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깃털을 잘 뽑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축자의 손까지 가는 데는 컨베이어 벨트의 배치 방식이나 속도에 따라 1~5분 가량 시간이 걸린다. 병아리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움직이면서 소리 없이 부리를 벌렸다 닫았다 한다. 모두 두려움에 질린 것이다.”* 닭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케이지에 수 많은 닭이 있다보니, 그 안에서 서열이 나뉘었다. 본래 닭은 서열이 있다. 높은 서열의 닭은, 낮은 서열의 닭을 쪼며 공격한다. 넓은 공터가 있고, 피할 곳이 있다면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좁은 케이지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먹이통이 모자라면, 쪼기 서열이 높은 닭들이 서열이 낮은 닭들이 먹이통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지킨다. 약한 닭들이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다는 위험을 제외하더라도, 극도로 과하게 밀집한 환경은 깃털 쪼기와 카니발리즘이라는 악행을 발생시키는 데 이바지 한다.”* 그리고 당시 영국 축산업은 닭이 다른 닭을 쪼지 못하도록, 그들의 부리를 잘랐다. 본능을 자르는 공장식 축산 앞서 영국의 닭 사육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건, 공장식 축산이 동물들의 본능을 죽인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그들의 본능 배출을 위해 가축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능 행동을 없애기 위해 가축의 신체를 잘라 버렸다. 신체가 잘리기 전부터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두려움을 느꼈지만, 소용 없었다. 본능을 자르는 공장식 축산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만큼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렴한 비용에 많은 걸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논리다. 저렴한 비용에 최대한 많은 걸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가 동물에게 진행된 것. 동물이 생물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 받았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한편, 이러한 논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공장식 축산에 대한 고발은 2023년 현재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찬성과 반대가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이슈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한 변화는 없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지만, 구매는 하지 않는 사람들 동물복지연구소 어웨이에 따르면, 국민 중 94.7%가 공장식 축산을 개선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실제 동물복지 인증 제품을 구매했다는 비율은 36.4%로 ⅓ 수준으로 집계됐다. 동물복지 인증 제품을 구매하지 않은 이유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40.5%, ▲‘일반 축산물보다 가격이 비싸서 26.6%, ▲판매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서 21.1%, ▲일반 축산물과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가 14.1%로 나타났다. 출처 : 동물자유연대 한편, 동물복지 인증 계란을 구매한 비율도 7.1%로 나타났다. 현재 계란은 사육환경 표시지에 따라 계란 껍질에 1~4 숫자를 표기하게 되어 있다. 숫자 ‘1’은 닭을 방사해 기르는 사육환경, 숫자 ‘2’는 실내의 평사에서 기르는 환경, 숫자 ‘3’은 기존의 공장식 축산보다는 개선된 케이지, 숫자 ‘4’는 공장식 축산 방식의 좁은 케이지 환경에서 생산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대중에게 표시제가 잘 홍보가 되지 않아서 구매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숫자 4라고 표시해놓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판매하는 업체들도 있다.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판매자가 말하는 방식대로 이해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장식 축산 개선 동의가 높은데 반해, 실제 구매하지 않는 이유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40.5%, ▲‘일반 축산물보다 가격이 비싸서 26.6%가 나온 것은 주목된다. 이는 공장식 축산을 개선해아 한다는 응답이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방관이 공장식 축산을 키운다 “악한 일이 벌어지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동조가 필요하다. 동물을 무한정 착취하는 체제는 경제 관계자들은 물론 이 같은 상품을 소비해 이에 동조하는 공모자들이 있기 대문에 유지가 가능하다. 이에 더해 사회적 방관이 이 체제를 키운다. 대다수 시민은 동물의 적이 아니라, 동물 착취를 못 본 척 방관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성과 정신적 삶에 방어의 울타리를 칠 수 있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저렴하게 고기를 먹겠다는 사람의 욕망은 공장식 축산은 반대하면서 공장식 축산에서 나오는 저렴한 고기는 받아들임으로써 공장식 축산을 일반화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동물정치를 연구하는 코린 펠뤼숑은 책, <동물주의 선언>을 통해 우리 사회의 동물윤리가 어떤 점이 문제인지, 문제 인식을 넘어 실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견으로 동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는 “동물의 삶은 지옥이고 이 지옥은 인류의 작품이며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악행을 보여준다"**라며 동물에 대한 착취는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하는 착취,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착취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물이 행복하면, 인간 역시 행복해질 수 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질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선 변화를 시도할 때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을 위한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동물에게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장애물 중 하나는 동물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저항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이들의 반발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현재 인간 사회는 동물을 도구로 생각하는 종차별주의에 기반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동물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은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다. 따라서 동물의 권익을 옹호하고 동물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는 사람은 사회 각층에서 일어나는 반발, 때로는 매우 폭력적일 수도 있는 반발에 놀라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동물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기반을 마련해 온 사람들의 정체성, 삶, 역사가 문제화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동물의 악독한 고문관이라도 되는 양 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새롭게 도래할 정의로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그가 제시하는 실질적 방법은 공장식 축산 업자들이 자유 방목형으로 변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러한 지원조차 없다면 축산업자들은 경제적 논리로 인해 계속해서 공장식 축산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실제 축산업자 역시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변화를 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도살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에 대한 의무 교육을 실시하고, 이들이 미래에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모든 걸 싸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노동력이라도 상관없다. 값싼 노동력에 의지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한 공장식 축산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면 공장식 축산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폭발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개발됐다. 그리고 그 수요는 점차 커졌고, 공장식 축산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고, 값싸게만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생산되는 환경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 이 인식은 소비자의 행동까지 지배해, 공장식 축산이 잘못된 건 알지만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한다. 아이러니하게 이 공장식 축산을 바꿀 수 있는 건 동일하게 경제적 논리를 펴서 축산업이 바뀔 수 있도록 지원하고, 방관이 아닌 응시와 직접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동물을 시작으로 우리 인간 사회에서 만연해 있는 착취의 시스템도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은 인간이 인간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시스템과 비슷하다. 그리고 동물에게 가해지는 공장식 축산은 그 모든 악행을 한데 모은 곳이다. 그 모든 악행이 모인 곳이 변화한다면,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이 변화를 위해선 오늘의 행동이 필요하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동물기계>(루스 해리슨/ 에이도스/ 2020) p.13, 57, 58, 79, 80 **<동물주의 선언>(코린 펠뤼숑/ 책공장더불어/ 2019) p.15, 26, 94, 111, 117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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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하면 동물권을 보호하는 건가요?
1년 동안 인간이 가장 많이 먹는 동물 순위가 있다. 1위부터 10위까지 동물 중 익숙한 동물도 그렇지 않은 동물도 있다. 간략한 순위는 이렇다. ▲1위 닭 5백억 마리, ▲2위 오리 26억 마리, ▲3위 돼지 13억 마리, ▲4위 토끼 11억 마리, ▲5위 칠면조 6억 4천만 마리, ▲6위 양 5억 2천만 마리, ▲7위 염소 4억 마리, ▲8위 소 2억 9천만 마리, ▲9위 물소 2천 4백만 마리, ▲10위 낙타 170만 마리. ‘닭, 오리, 돼지, 소’ 처럼 익숙한 동물도 있고, 토끼, 염소, 물소, 낙타처럼 익숙하지 않은 동물도 있다.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인간이 수 많은 육류를 소비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실제 1인당 육류 소비량도 상당하다. OECD가 발표한 2021-2022년 1인당 육류 소비량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의 1인 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약 32kg이었다. OECD 평균은 22kg이었다. 닭, 오리 등 가금류의 대한민국은 1인당 18kg을 소비했고, OECD 평균은 31kg이었다. 수치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1인당 닭고기 소비량으로 계산하면 우리나라는 약 900,000,000kg의 닭을 1년 동안 먹는다는 말이 된다. (단순 계산을 위해 우리나라 국민을 5천만 명이라고 했다) 이 수치만 보더라도, 1년에 500억 마리의 닭이 먹힌다는 수치가 이해가 된다. 1년에 500억 마리, 상식적으로 멸종하지 않는 게 이상한 수치다. 인간이 그렇게 열심히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멸종하지 않는 건 닭을 기르는 사육 시스템에 있다. 닭은 먹히기 위해서만 닭장 속에서 길러지고, 자연적인 성장속도보다 더 빨리 길러지고, 알을 낳고, 태어나고, 죽는다. 고기로 태어나서. 어느 작가의 도축장 노동 이야기 몇 년 전 읽은 책을 꺼냈다. 읽고난 뒤, 내가 먹는 고기가 어떻게 내 식탁에 올라오게 되는지 어설프게 나마 알게 된 책이다. 책의 몇 구절이다.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감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동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했는데 얼마나 많은 닭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에 ‘투두둑’ 하고 닭의 명줄이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도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릴 때만큼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었다. 내 발 주위는 무도병에 걸린 것처럼 사지를 흔들어대는 닭으로 가득했다. 잠깐, 정말 찰나의 100분의 1 정도의 순간 동안 예전의 일기에 적어놓은 그런 감정들, 미안함, 불편함, 찝찝함 같은 것들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금세 짜증과 피로에 묻혔다. 이런 식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는 전국 도축장을 돌아다니며 일했고, 글을 썼다. 그가 돌아다닌 도축장에선 닭, 돼지, 개를 길렀다. 식용이었다. 현실은 처참했다. 돼지들은 냄새와 육질을 위해 거세 당했고, 닭들은 알을 낳기 위해 길러졌고, 너무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눈이 없거나, 다리를 저는 등 온전하지 못한 병아리로 태어났다. 그렇게 된 병아리들은 폐사됐다. 온전히 태어났다고 해도, 식용으로 빨리 길러지다 밥상으로 올라갔다. 도축장 어디에도 동물을 동정하는 마음은 없었다. 앞선 글에서 알 수 있듯, 그 곳의 동물이란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감이었고, 냄새나고 역겨운 것일 뿐이었다. 닭과 돼지 뿐만이 아니라, 개도 마찬가지였다. 식용으로 길러진 개의 뒷다리가 30cm 찢어지든, 눈이 당구공만큼 붓든 상관 없었다. “그저 따끔하고 말아"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책을 읽으면서 동물들의 삶과 이유라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도축장에서 태어난 닭, 돼지, 개는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식용으로 길러졌다. 태어난 목적이 먹히기 위함이었다. 동물의 의사는 없었다. 애초 인간과 동물은 언어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강형욱처럼 수년 간의 공부와 수련으로 동물 행동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라면 모를까, 비전문가가 쉽게 동물 행동 의미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는 어렵다. 동물의 식용 사육 환경을 알고난 누군가는 육식을 끊고, 채식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실제, 채식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도축장 환경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애초 육식이 없다면 동물 도축 환경을 말할 이유도 없다. 동물 보호를 위한 채식 채식은 육식과 비교해 장점이 있다. 일단, 앞서 가볍게 살펴본 도축 환경이 없다. 기형아로 태어나는 병아리가 없고, 폐사되지 않는다. 억지로 사료를 먹는 환경도, 한 마리가 있어야 할 케이지 안에 10마리 씩 낑겨서 서로가 서로를 밟는 환경이 없다. 도축 되지 않으니, 돼지와 개의 울부짖는 소리가 없다. 또한, 채식은 육식에 비해 환경적 부담도 덜하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LEAP(Livestock, Environment and People ) 프로젝트 팀 연구에 따르면, 비건 채식은 하루에 100g 이상 육퓨 포함 식단보다 탄소배출, 수질 오염 및 토지 사용이 75%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생물다양성 파괴 66%, 물 사용량은 54%까지 줄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노르웨이 비영리 단체 ‘EAT’가 2020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현재 육식 상황을 유지하려면 지구 2.3개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채식이 정답인 듯 보인다. 실제 국내 채식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국내에 정확한 채식자 규모는 파악할 수 없지만, 실제로 커지고 있고 국내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각종 채식 관련 상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다. 물론 시장의 변화가 무작정 동물을 위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 시장은 수익에 민감하기 때문에, 향후 수익 시장이 될 곳에 미리 진입해 선점한다는 쪽으로 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한편으로는 육식에서 채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채식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채식, 정답일까? 리어 키스(Lierre Keith)는 20년 동안 비건 생활을 하다가 채식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지식에 근거했다는 걸 깨닫고 책, <채식의 배신>(원제 The Vegetarin Myth)을 썼다. 그는 책을 통해 채식의 잘못된 점을 도덕적, 정치적, 영향학적으로 반박한다. 채식주의가 지속가능한 사회, 생명 존중 등 좋은 의미를 갖고 있지만, 무지와 오해로 인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채식은 영향학적으로 인간에게 이롭지 않다. 육류를 줄이고, 곡물식, 채식을 하게 될 경우 인슐린 과다 분비와 고혈당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이어 비건 식단은 우울증, 면역학적 질환, 저혈당, 식이장애 등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극단적인 비건 식단을 하던, 비건 인플루언서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또한, 농업에서도 곡물 수학기에 수 많은 토끼와 쥐 들이 추수기계에 죽는다고 말한다. 채식하는 사람들이 직접 죽이지 않았지, 실은 동물이 죽는 환경에서 먹는 건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어 농업 역시 환경을 파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며, 환경을 이롭게 한다는 게 잘못됐다고 말한다. 알고 먹자 채식을 하면 동물과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도, 동물을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길러저 식탁에 온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도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론 정답 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개인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본인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걸 추구하는 것이다. 채식이 내 몸에 맞는지, 육식이 내 몸에 맞는지, 내가 먹는 곡물과 식물이 자란 환경은 어떤지, 내가 먹는 고기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서 내게 왔고 내가 먹는 것인지 알고 먹고, 알고자 한다면 그게 개인에게 가장 맞고 이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쓴 한승태 작가는 본인의 책을 통해 채식이 옳다, 채식을 하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본 도축 환경이 결코 좋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먹는 고기가 어떻게 내 밥상에 왔는지 알고 먹자라고 말했다.  내게 맞는 게 뭔지 알고자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육식이든, 채식이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육식과 채식 그 어느쪽도 동물권을 보호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깊이 파고들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동물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식단이 어떤 과정과 환경을 거쳐 내게 왔는지 고민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 그 고민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부디, 사람들의 밥상머리가 조금 더 무겁고 고민되길 감히 바래본다. 또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시대의 창/ 2018) p.19, 154, 414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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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실험 없애야 할까요?
코로나19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맞았다. 예방접종 원리는 간단하다. 우리 몸에 병원균을 주사해 면역계에 학습시키고, 실제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면역계가 반응해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방접종 원리를 처음 발견한 건 ‘루이 파스퇴르'다. 파스퇴르 우유가 떠오르는 그 이름이다. 파스퇴르가 예방접종 원리를 생각한 건, ‘닭 콜레라' 때문이었다. 콜레라는 급성 설사, 발열 등을 일으키며 심할 경우 사망할 수도 있는 병이다. 닭과 같은 조류에도 마찬가지다. 조류 콜레라의 경우 치사율이 70~80%로 높다. 파스퇴르는 콜레라에 걸린 닭이 특정 세균에 감염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콜레라 닭으로부터 세균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을 살아 있는 닭에 주입함으로써 콜레라 예방을 할 수 있었다. 홍역, 독감, A형 간염, B형 간염, 코로나19 등등 각종 질병의 예방접종 원리가 태어난 배경이다. 인류가 맞는 예방 접종은 실로 다양하다. 국내 한정으로 제한해도 꽤 많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맞는 필수 예방 접종은 총 18 가지다. 아래 종류다. △폴리오, △백일해, △홍역, △파상풍, △결핵, △B형간염, △유행성이하선염, △풍진, △수두, △일본뇌염, △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 △폐렴구균, △A형간염, △사람유두종바이러스, △장티푸스, △신증후군출혈, △디프테리아 익히 들어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경우에 따라 예방접종을 맞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나열된 질병 예방접종을 맞는다. 그렇다면, 개발된 예방접종 백신을 아무런 실험도 하지 않고 인간에게 접종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몇 가지 시험을 거친다. 대표적 예가 동물실험이다. 동물실험으로 탄생한 백신들 동물실험으로 개발 된 대표적 백신은 소아마비, 결핵, 풍진, 홍역 등이다. 전국민의 70% 이상이 맞은 코로나19 백신 역시 동물실험을 거쳤다. 앞선 필수예방접종 목록에 결핵, 풍진, 홍역 등을 감안하면 최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동물실험의 혜택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동물실험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동물을 무작위로 잡아서 하는 건 아니다. 실험실의 쥐, 강아지,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이 실험의 대상이다.  2021년 동물실험윤리위원회 운영 및 동물실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동안 총 488만 252마리가 동물실험에 사용됐다. 이는 2020년 414만 1,433마리에 비해 70만 마리 이상 증가한 수치다. 가장 많이 쓰인 개체는 설치류로 353만 7,771마리가 사용됐다. 이후 어류 92만 3,772마리, 조류 31만 6,021마리, 기타 포유류가 6만 9,155마리 사용됐다. 설치류 중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은 쥐로 316만 4,837마리가 동물실험을 당했다. 흔히 아는 빨간 눈의 흰 쥐다. 동물실험은 고통 정도에 따라 A부터 E단계까지 나뉜다. 이중 생물을 이용하지 않는 A단계를 제외한 나머지 단계에서 모두 쥐가 쓰인다. 마취,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는 E단계에서 가장 많이 쓰였다. 앞선 동물실험윤리위원회 운영 및 동물실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에 약 164만 마리가 E단계에 쓰였다.  동물실험 연구가 끝나면, 이들 대부분은 안락사 된다. 안락사 방법은 다양한데, 대개 치사량의 약물 주입, 고농도 이산화탄소 흡입 또는 물리적 경추 탈구로 안락사 시킨다. 경추 탈구의 경우 약대에서 실제 실험을 하기도 한다. 가장 손쉽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이다. 백신 개발에만 동물실험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우주로 간 지구 최초의 생물은 초파리였다. 이후, 다양한 동물들이 갔다. 1949년 원숭이 알버트가 발사되어 우주로 갔고, 비행은 성공했지만 착륙 중 사망했다.  1957년 7월에는 소련이 강아지 치간과 데지크를 로켓에 태우고 우주로 발사했다. 이들은 고도 110km까지 비행 후, 무사히 생환했다. 1957년 11월에는 강아지 라이카가 우주선에 탑승했다. 소련은 또다시 우주선을 발사했고, 이번에는 치간과 데지크보다 더 높은 211km까지 비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라이카는 돌아오지 못했다. 애초 소련은 돌아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라이카를 우주선에 태워 보냈다. 이후 미국은 1961년 지구 최초로 유인원을 우주로 보낸다. 침팬지였던 햄은 비행선에 탄 뒤 준궤도 비행에 성공 후 생존 귀환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비행 중 예기치 못한 변수로 우주선의 최대 속도가 빨라졌고, 햄은 예정된 4.9분 대신 6.6분 동안 무중력 상태를 겪어야 했다. 착륙시에도 신호가 잠시 끊기는 문제가 있었다. 다행히 햄은 무사 귀환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과학자들의 실험과 연구 덕분이었다. 물론 닐 암스트롱 개인의 노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을 위해 앞서 진행된 동물실험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는 모든 인류를 화성에 보내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된 동물이 있었고 동물실험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동물이 온 몸을 바쳐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준 것일가? 아니면, 인간이 동물을 아낌없이 빼앗은 걸까? 동물이 인간에게 아낌없이 준 걸까요? 아니면 인간이 동물을 아낌없이 빼앗은 걸까요? 출처 : [차클마스터클라스] '아낌없이 주는 동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의학 발전 뒤의 실험동물?|장구 교수|JTBC 201123 방송 댓글 캡쳐. 2023.08.08 동물실험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두 개의 댓글을 봤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유튜브 채널에 달린 댓글이었다. 두 댓글이 인상 깊다. 첫 댓글은 “아낌없이 주는 동물"이 아니라 “아낌없이 빼앗는 인간" 아닐까요? 였다. 두번째 댓글은 이랬다. “애초에 동물실험이 아예 없었더라면 니들이 유튜브를 보면서 댓글을 달 수 있는 세상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댓글은 동물실험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는 동물실험이 윤리적으로 잘못됐고, 인간의 폭력성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반면, 후자는 동물 실험 덕분에 인류 발전이 있었고, 인류 발전을 위해선 동물실험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엿볼 수 있다. (댓글 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론 아닐 수도 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동물 실험은 불가피하다는 의견과, 동물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어떤 것이 우선되어야 할까? 두 말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가 맞는 백신 역시 동물실험을 거쳤고, 그 덕분에 질병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또한, 동물실험 덕분에 우주라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또한, 글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쓰는 화장품에도 동물실험이 진행 중이다. 물론 이는 최근에 안 하겠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인간의 안전을 책임지는 백신, 인간의 미(美)를 책임지는 화장품, 누군가의 꿈 어쩌면 인류 전체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우주의 꿈 뒤에는 모두 동물실험이 있었다. 이러한 동물실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동물실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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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동물에게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네이버 영화 : <동물, 원> 스틸컷  최근 <동물, 원>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청주에 위치한 동물원을 배경으로,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육사, 수의사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준다. 동물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는 걸 추천한다. 서두에 미리 밝히자면, 필자는 동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어릴적을 제외하곤, 동물원에 가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자연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좁은 우리 안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고, 동물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것을 동물들이 원할까? 라는 의문이 들어서다.  동물과 직접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우리 안에 갇혀 있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내 기분이 어떨까? 좋지 않을 것이고, 기분이 나쁠 것 같다. 동물들도 그런 걸 느낀 것인지 아닌지. 얼마전 서울대공원의 얼룩말 세로가 동물원을 탈출해 3시간 만에 잡혔다. 세로는 진정제와 마취제를 7차례 투여 받았다. 2018년에는 대전 동물원의 퓨마 ‘뽀롱이’가 탈출했고, 4시간 30분 만에 사살됐다.  동물원에서 동물 탈출 소식이 있을 때마다 일부 사람들은 격분해서 말한다. 동물원을 없애야 한다고. 자연에 자유롭게 풀어놔야 할 동물들을 우리 안게 가둬두는데, 기분이 좋겠냐고. 동물원은 전부 없어져야 한다고. 그렇다면, 동물원은 없어져야 할까? 동물원은 필요가 없을까? 동물원은 어떤 역할을 할까? 그리고 시민은 그런 동물원을 소비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동물원의 사전적 정의 네이버 국어사전에 동물원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동물원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현존동물 중 극히 일부의 살아있는 동물을 수집하여 사육하고 번식시켜 일반인에게 관람시키는 사회교육시설이다. 동물원은 동물들을 자연서식환경과 비슷하게 만든 일정한 격리공간에 전시시킴과 동시에 살아 있는 동물들의 관람을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동물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동물원은 일반인들에게 동물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높이는 사회교육시설이다. 교육을 위해 동물원의 사육사는 동물의 습성과 특성에 대해 알려준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들은 동물원이 개장 하기 전, 개장 후에도 지속적으로 동물들의 건강을 살피고, 치료를 하고, 종 번식을 위해서 움직인다. “멸종 위기에 놓인 종의 개체 수를 늘리고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를 위해 동물원에서는 동물의 습성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동물원 환경을 개선하고, 사라져 가는 종을 복원해 방사하고, 서식지를 보호하고, 관람객에게 생태 교육을 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 : <동물, 원> 스틸컷  실제 이렇게 멸종위기 동물들을 보호하고, 증식할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을 ‘서식지 외 보전기관’이라고 한다.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2조 2항에 따르면, 멸종위기 동물이란, 자연적·인위적 위협요인으로 개체 수가 현격히 감소하거나, 소수만 남아 있어 가까운 장래에 절멸될 위기에 처해 있는 야생생물을 말한다. 해당 법률에 따라 환경부는 지난해 말 현재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68종)과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214종) 등 모두 282종을 지정·관리하고 있다.  국내 서식지외 보전기관은 강원지역 6곳, 서울·경기·인천지역 5곳, 전라지역 3곳, 충청지역 5곳, 경상·대구·부산지역 6곳, 제주지역 3곳 등 전국에 모두 28곳이 지정돼 있다. 앞서 사전적 정의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동물원은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훈련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동물원을 통해 동물과 친숙해 질 수 있다. 친숙해진 동물이 있다면,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어떤 동물들이 존재하는지 모르면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가능성도 낮다.”* 물론, 그 중에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사람이 더욱 친숙하고, 자연적으로 살아갈 방법이 없는 동물도 있다. 청주동물원에 있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인간이 더욱 친숙한 동물도 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동물을 다짜고짜 자연에 풀어줄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동물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우리 안에 사는 환경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이런) 동물원은, 없어져야 한다 모든 동물원이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선정되어 운영되는 건 아니다. 과거 체험형 동물원들은 동물학대 논란이 있었다. 거북이 등에 아이가 올라타고, 동물의 꼬리를 함부로 만지고, 천적이 바로 옆에서 울고 있어서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또한, 일부 체험형 동물원은 폐업 당시 쓰레기, 오물이 널부러져 있는 환경에 동물들을 방치했다. 쩝쩝 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루 종일 쩝쩝 거리는 사람과 밥을 먹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병이 날 것이다. 하물며 천적의 소리가 옆에서 울리는 데 스트레스 받지 않을 동물이 있을까. 이런 환경이 계속 될 경우, 동물원 속 동물들에게는 자연에서 나타나지 않는 정형행동이 나타난다. 우리를 계속해서 돈다든지, 털을 뽑는다든지 하는 등 행동이다. 이런 논란이 되는 곳에서 동물들이 계속 살아간다면, 동물은 행복하지도 않고, 동물원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동물원 소비도 없어져야 한다 “동물원은 야생 동물을 동물원에 데려다 놓고, 자연의 위대함을 얘기를 해줘야 하는 곳이거든요. 자연에 대한 경의를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지, 동물을 조그만 우리에 가둬놓고 놀리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동물, 원> 중 한 사육사의 말) 1987년에 방영된 아기공룡 둘리에서는, 둘리가 동물원 코끼리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코끼리는 돌멩이를 주워먹고, 화를 낸다. 직접적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사례가 지금은 없겠지만, 여전히 동물원에서 동물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당장 모든 동물원을 없애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아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동물원은 동물원만의 순기능이 있다.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에게 터전을 제공하고, 건강을 보살펴주고, 먹이를 주며 재활을 돕고 그들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순기능이다. 이러한 순기능이 있는 이상, 동물원을 쉽게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생각이다. 이건 쉽게 알 수 없다. 인간의 말로 아무리로 물어본다 한들, 동물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인간 역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내가 하는 행동이, 과연 동물들에게 이로울 것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해보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내가 주는 먹이고, 내가 동물을 쓰다듬는 행동이 과연 동물로 하여금 행복하고, 이로울 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동물원에 있어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그들의 상황을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물원에 가면 쉬는 동물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바라만 봐야 한다. 동물원을 산책하듯 둘러보면서 생물 다양성의 가치를 느끼고 자연과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동물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에버랜드의 푸바오가 중국으로 떠났을 때, 수 많은 사람이 아쉬워했다. 일본에서도 동물원 판다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수 많은 사람이 배웅을 왔다고 한다. 푸바오에 가졌던 관심의 일부만이라도,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을 볼 때, 먼저 그들이 왜 동물원에 있을 수 밖에 없는지, 그들은 동물원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본래 있던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물원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 그것이 진짜로 동물원의 동물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동물에 대한 진짜 교육을 하고 받는 시설이 되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면 진짜 동물원 나들이가 한층 더 의미있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어떤지 동물원의 동물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동물원은 계속 있어야 할지, 없어져야 할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의견을 듣고 싶다. *<동물원에 동물이 없다면> (노정래/ 다른 /2019) p.46, 47, 48, 157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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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보행통로, 공익과 사익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사진 출처 : 헤럴드 경제 몇 년 전이다. 한참 SNS를 보는데, ‘건물에 통로 낸 부부`라는 글을 보았다. (게시물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사연은 이랬다. 전라북도에 있는 한 부부는 가지고 있던 땅에 주차장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 통행하지 못하도록, 쇠 파이프를 둘러뒀는데 인근 초등학생들이 자꾸만 그 밑을 기어가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유는 그곳을 바로 지나가면 학교로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을 지으려던 곳은, 학생들이 학교 통학로로 쓰던 장소였다.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초등학교(초록색 표시)와 인근 아파트(파란색 표시) 중간(빨간색)이 아이들의 통학로였다. 아이들의 통학로를 그대로 둘 것이냐, 아니면 기존 계획대로 할 것인가. 고심하던 부부는 통학로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건물이 지어지고 난 뒤에도, 힘들게 빙 돌아서 가지 않고 통행로를 통해 쉽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부부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북도교육청으로 부터 감사패를 수여 받았다. 필자는 부부가 뚫은 통행로가 일종의 공공보행통로라고 생각한다.  공공보행통로는 지구단위계획에서 대지안에 일반인이 보행통행에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한 24시간 개방된 통로를 말한다. 아파트 단지 내 주민 및 인근 주민들이 편하게 짧은 길을 선택해 보행 편리성과 연계성 증진을 위한 것이다. 이는 아파트 단지가 폐쇄적으로 조성되고, 단절되는 걸 막아주는 장점이 있다. 공공보행통로를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24시간 개방되어야 한다. 둘째, 보행에 지장이 되는 시설물이 없어야 한다. 해당 지역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이 왕래하고, 혹여 몸이 불편한 사람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통행에 불편을 주는 경사로 등이 없어야 한다. 공공보행통로를 잘만 활용된다면,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건 언제나 어렵다. 공공보행통로의 어려운 점은 사적인 장소에 설치된다는 점이다. 아파트라는 개인적인 공간에 설치되는 터라, 아파트 주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갈등이 있다. 아파트 주민으로서는, 내 아파트 단지에 외부인이 왔다 갔다 하는 게 꺼려질 수 있다. 충분히 들 수 있는 생각이다 지난 2021년,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공공보행통로에 카드키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설치한 사례가 있다. 당시 수원시는 해당 아파트에 문을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아파트 주민들이 항의한 사례가 있다. 사례는 또 있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인근 산에 오르는 등산객 등이 많다는 이유로, 아파트 상가 옆에 담장을 설치했다. 담장 설치는 일종의 건축이기 때문에, 허가가 있어야 하고 해당 허가 없이 설치해 벌금 100만 원이 부여된 것이다. 이외에 강남구 압구정동의 모 아파트에 공공보행통로를 설치에 대해서도 주민과 서울시 간에 마찰이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해당 아파트 주민은 “집 앞이 난장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의 이익이냐, 사적인 이익이냐.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우선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판단도 어렵다. 돈을 내고 해당 입주민 자격을 부여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구를 우선해야 할까? 요즘 처럼 사회가 불안정하고, 안전을 안심할 수 없는 사회일수록 이러한 문제가 더욱 부각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공공의 이익만 부각시킬 수도 없고, 사적인 이익만 추구할 수도 없다. 사회가 변할수록,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변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마다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 따위가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타인에 대한 믿음, 정직성과 상호 신뢰, 그리고 개인의 일상적인 사교까지 줄어들어 사회적 자본이 크게 감소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사회적 유대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 홀로 볼링’이다.”* 과거 아파트 단지 내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던 5일장은 이제 볼 수 없다. 인근 아파트에서 5일장이 있던 날이면, 친구들과, 부모님과 함께 나가서 장도 먹고, 음식도 먹고 왁자지껄 놀았던 기억이 있다. 5일장은 친구를 만나면 같이 놀고, 부모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사교의 장이었다. 이제 그 기억은 찾아볼 수 없는, 잃어버린 사회적 자본이 된 게 아닐까 싶다. 공공보행통로를 보면서 사회가 점점 더 그런 사회적 자본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사연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 한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 통행로를 이용하면,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갈 수 있어서 편한 길이 있다. 해당 아파트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기에 그쪽으로 들어갔지만, 막상 들어가니 나가는 데 문이 있었다. 당연히 열릴 줄 알았던 문이 알고보니 카드키로 열 수 있는 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돌아서 갔다. 필자 옆에는 배달을 하는 배달 라이더 분이 계셨고, 그분도 왔던 길을 돌아서 다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라이더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돌아가던 게 기억난다. 건축학자이자 교수인 유현준 교수는 좋은 건축이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주택 담장에 있던 깨진 유리병을 깬 순간부터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파트 주민과 인근 주민이 함께 어울릴수 있도록 벤치를 놓자고 말했다. 벤치를 아무리 많이 놓는다고 해도, 거기에 앉을 사람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우리 사회에 공공보행통로를 통해 화목해지는 분위기가 생겨나면 좋겠다. 전북의 한 부부가 아이들이 통행할 때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흐믓하다고 말한 것처럼 흐믓해 질 길이 많아지면 좋겠다. * 나 홀로 볼링 (로버트 D.퍼트넘/ 페이퍼로드/ 2009/ p.699)
주거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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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 협력으로, 재난에 대응하다
최근 이상적인 기후가 한국에서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짧은 시간 극한 호우가 쏟아지다가, 무더위가 이어진다. 학계에서는 ‘장마'라는 말 대신, ‘우기'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장마 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쓰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현상 중 하나는 폭우다. 폭우는 실질적인 위협이다. 지난 15일 충북 괴산댐에 월류가 발생했다. 이는 댐에 물이 넘쳤다는 의미다. 컵 용량을 넘도록 물을 부어 물이 넘치는 것과 같다. 갑작스러운 많은 양의 비로 댐이 넘쳤고, 홍수 주의보가 발령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실종자가 나타났고, 일부 사망자로 발견되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됐다. 기후변화가 실질적인 변화와 위협이 된 증거다. 파키스탄 같은 개발도상국과 기반 시설이 부족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에서도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위협이다. 이런 위기는 어느 한 곳의 노력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부 혼자서 해결할 수 없고, NGO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민관협력이 중요한 이유다. 민관협력이란, 공공가치 실현을 위해 정부, 기업, 지역사회, 일반 등이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공공가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정부 혼자선 다양한 사회문제와 빠른 변화에 대처하기 어렵다. 가장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이자,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는 기업이다. 아이러니하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안 좋은 뉴스 중에서 기업 경영으로 인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기후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배출하는 막대한 탄소량, 원유 누출 사고 등 기업이 일으킨 문제를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업과 함께 해야 한다. 기업의 영향력은 크다. 긍정적으로 쓰인다면, 사회와 환경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적 재난 상황을 미리 대비해 대처하는 데 기업의 영향력을 쓸 수도 있다. 버드와이저를 생산 회사인 ‘앤호이저부시’의 경우, 적십자와 긴밀히 협업해 재난에 대비해 맥주 생산을 중단하고, 물을 생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물은, 허리케인 등 긴급 재난이 발생했을 때 이재민에게 바로 배송된다. 지난 2022년에는 허리케인 이안으로 인해 피래를 본 플로리다 지역에 100만 캔의 생수를 공급한 바 있다. CU 편의점을 운영하는 BGF 리테일 역시 긴급구호를 위해 움직인다. BGF 리테일은 행정안전부, 전국재해구호협회와 함께 국가 긴급 재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댐 월류와 홍수 피해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바로 움직여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다. 두 개 사례는 정부처럼 큰 조직이 움직이기 이전에, 전국에 퍼져있는 기업 자원을 이용해 바로 재난에 대응하는 사례다. 또한, 만약 기업과 정부, NGO가 긴밀히 협업한다면 국가적 재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질 수록 어느 한 쪽의 솔루션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조직이 함께 움직이는 게 필요하다. 민관이 협력해 재난에 대응할 체계를 구축하고, 함께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 물론, 본질적인 문제는 애초 저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부당하고 바뀌어야 하는 것에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 기후변화 뿐만 아니라, 불평등, 불공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글에서는 기업들이 협업을 통해 어떻게 환경적, 사회적 비즈니스를 위해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목소리가 높아지고 많아질 때,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원인이 조금씩 제거되고, 사회 연대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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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시대, 주주의 권리를 더욱 행사하기 위해선?
제목 : ESG 시대, 주주의 권리를 더욱 행사하기 위해선? ESG(환경∙사회∙거버넌스)가 여전히 뜨겁다. ESG 붐이라고 할 정도로 거세게 논의 됐던 터라, 이제는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도 없을 정도다. 그만큼 ESG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화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SG는 활황이지만, 비교적 논의가 적고,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이 G(거버넌스) 부분이다. 많은 언론에서 G를 지배구조로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지배구조에 한정해서 보는 건 전체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지배구조보다 거버넌스, 즉 의사결정체계로 보는 편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의사결정 주체에 앞서,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기업의 주인이 의사결정의 주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삼성전자의 주인은 누구일까? 삼성오너일가? 이재용 회장?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틀리다. 이재용 회장이 삼성전자의 주인이라는 것에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그가 삼성전자를 경영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관련 뉴스에 항상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의 경영인일 뿐이지, 삼성전자의 소유자가 아니다. 의사회에서 선출되어, 잠시 경영을 맡은 전문 경영인 즉, 대리인일 뿐이다. 이재용 회장이 경영 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의사회 의결을 통해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에 표를 던지는 것이 바로 ‘주주'다. 삼성전자 주식(보통주)을 사게 되면, 1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가진다. 이 의결권은 주주총회에서 특정 경영 방침, 이사회 선출, 전문 경영인 선출에 표를 던질 수 있다. 기업 경영 방침은 의결권 투표에 달렸다. 누구든 주식을 사게 되면, 이 의결권을 가질 수 있고, 기업에 대한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문제는,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의결권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1주 1 의결권 이기 때문에, 큰돈을 들여 주식을 많이 사면 그만큼 의결권을 많이 갖는다. 때문에, 대주주에 의한 의사결정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소액 주주가 판을 흔들지 못하는 건 아니다. 대표적 사태가 몇 달 전에 있었던, SM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의 사태다. 상황을 요약하면, 소액 주주였던 행동주의 펀드가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에 제동을 건 사건이었다.  이에 SM엔터테인먼트, 카카오, 행동주의 펀드가 소액 주주로부터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 사들여, 주주총회에서 더 많은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기존 소액 주주들은 주식 가격을 높게 팔 수 있으니 수지맞은 기회였다. 상황이 어쨌든, 개인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 사태는, 기업의 의사결정에 주주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또한, 소액 주주들의 기업 경영에 관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한편, ESG 시대에 주주 제안을 더욱 활발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6월 13일 ‘주주가치 제고 및 ESG 강화를 위한 주주제안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논의가 됐다. 논의 내용은 기후위기 시대에, 주주 제안을 더욱 활발히 하는 방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주 제안이 활발히 되어야 하는 이유는, 소액 주주들은 총회에서 의결권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1주에 1 의결권인 상황에서, 돈 많은 사람의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는 삼성전자처럼, 주주가 경영인인 상황이다. 대주주가 경영인까지 맡을 경우, 자신의 결정에 맞는 데 의결권을 행사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ESG 강화를 위한 주주제안의 개선 방안이 논의되는 이유는, 소액 주주들의 생각은 관철되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소액 주주도 제안하고, 안건으로 상장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취지다. 기업 의사결정에서, 어느 한 사람의 의견만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자의 다양화를 이루고, 이를 통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논의되는 것이, 권고적 주주제안이다. 이는 주주 제안을 하되, 강제성은 없는 것이다. 강제성이 없다는 점에서 무슨 효력이 있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다수 주주가 해당 안건에 동의할 경우 경영진은 그 의사결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주주 가치 제고를 노리는 것이다. 만약, 이런 내용이 활발히 진행될 경우 기업의 환경, 사회 문제에 대해서 주주들이 더욱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기업이 일으키는 환경 문제(E), 기업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이슈 등 사회(S) 이슈에 대해 주주들이 목소리를 내고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시스템(G)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풀어야 할 이슈는 많다. 주주가 많다고 해도, 단타를 치는 사람들이 많고, 진득하게 오래도록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다. 그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는 없기에, 주주제안을 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마련하고, 직접 시행에 옮기며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주주제안이 더욱 활성화 된다면, 기업이 일으키는 문제에 제안 안건 상정과 의결권 행사를 통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기업 경영진이 환경과 사회를 더욱 생각하는 의사결정을 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ESG 시대에, G를 어떻게 다를 지가 중요한 이유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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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투자에 국민이 집중해야 하는 이유
국민연금이 한 해 굴리는 돈은 970조가 넘는다. 이중, 140조가 국내 주식, 280조가 해외 주식에 투자된다. 국내 채권은 322조, 해외 채권은 71조, 대체 투자는 약 157조 규모다. 엄청난 규모다. 국민연금은 투자에 큰 손이다. 세계 3대 연기금이며, 국내 주요 상장사 중 국민연금의 투자를 받지 않은 곳이 없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NAVER, 현대차, 삼성SDI, 카카오, 기아 등은 모두 국민연금이 약 7% 이상의 지분율을 가진 곳이다. 2021년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종목별 투자 현황을 살펴보면 국민연금은 약 1,100개 이상의 국내 투자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의 투자금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노후 보장을 위해 낸 돈이 국민연금의 투자금이다. 이 돈으로 투자하고, 수익을 올려 은퇴 후 연금으로 지급하게 된다. 때문에, 국민연금 마음대로 투자할 할 수 없다. 자신 돈이 아니고, 국민의 연금을 잠시 맡아 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 초, 크게 이슈가 됐던 ‘스튜어드십 코드'가 나온 맥락이다. 집을 운영하는 집사처럼, 연금을 잠시 맡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투자에 있어서 왜 그런 투자를 했는지 설명하고, 투자한 기업의 경영에 의결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을 내는 모든 사람의 집사인 셈이다. 국민연금의 주인으로서, 국민연금을 내는 모든 사람이 국민연금 투자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한편, 노후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투자해야 할 국민연금의 투자로, 오히려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지난 6월 20일, 핀란드 대기 환경 연구단체인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와 한국 기후환경단체인 기후솔루션이 발표한, <국민연금의 ‘언행불일치' 탈석탄, 대기오염∙건강피해 요인으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석탄화력발전소 투자로 경제적 손실은 1조 4,000억 원, 사망자는 220명에 달한다. 또한, 새롭게 천식에 걸린 어린이는 67명, 미숙아 출산은 32건, 천식 관련 응급실 진료는 63건이었다.  연구진은 해당 결과가 국민연금의 석탄 투자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며, △공적 연기금으로서 파리기후협약에 도출된 1.5℃ 목표를 위한 적극적인 기후행동 △석탄기업 분류 정량 기준은 매출 비중 기준(발전기업의 경우 발전량 비중 기준) 최소 30%를 설정하고 지속 강화 △석탄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수탁자 책임 활동 기준 수립 및 투명성 강화 등을 제언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2021년 5월 28일 탈석탄을 선언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의 이런 방침이 공공성의 훼손이며, 탈석탄 제한의 구체적인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은 수탁자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민연금법 102조 4항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투자 대상과 관련한 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탈탄소 시장으로 가고 있는 게 전 세계 흐름이다. 현재 비판은 국민연금의 투자가 시대적 흐름과 역행하고 있으며, 장기적인 수익 증대와 국민에게 이롭지 않다고 말한다. 수탁자의 책임이란, 맡은 기금을 잘 운용해 국민의 노후에 이상이 없고, 안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위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의 흐름은 탈석탄이고, 기후변화 문제 해결이다. 이 모든 것은 국민의 안정과도 연관된다.  국민연금의 기금은 국민의 돈이다. 국민의 주머니에서, 국민의 노후를 위해 마련된 기금이다. 국민연금은 마땅히 그 돈을 안정적이고, 국민의 노후와 안정을 위해 써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국민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낸 돈을 어떻게 쓰는지,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탁자가 마음대로 쓰게 된다. 국민으로서, 내가 낸 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할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한 노후가 아닌 치명적 위험에 노출된 노후를 맞을지도 모른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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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의 대화] 공유경제 플랫폼과 노동, 시민이 해야 할 질문은?
안녕하세요, 한량입니다. 지난 7월 1일, 공유경제 플랫폼과 노동에 대한 대화모임을 가졌습니다. 각자 관심사와 배경이 다른 다섯 사람이 모여, 공유경제의 탄생, 긍정적 가치, 부정적 가치, 공유경제 속 노동자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은 무엇일지, 공유경제는 혁신일지 퇴보일지, 더 나은 공유경제 플랫폼과 노동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생각보다 길어진 모임에, 전달 드릴 글도 길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의 대화를 읽고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모임 장소 및 일시 일      시 : 2023. 07. 01. 토. 14:00~17:00 장      소 : 서울시 마포청년나루 참가인원 : 총 5명 주      제 : 공유경제 플랫폼과 노동 진행순서 : 주최자 발표 -> 질문 별 토론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질문 1.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이란?  강해은 : 플랫폼 노동자들이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들처럼 사회적 안전망 없이 일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미 이 부분이 논의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느끼기에 좋은 노동은, 플랫폼 노동의 본질은 살리면서 근로자 권리도 동일하게 받는 게 좋은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때에, 최저생계비, 보험, 퇴직연금을 지원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게 좋은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연지 :  저 또한 해은님과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 일자리를 생각했을 때 유튜버, 스마트스토어 운영 등 다양한 일자리가 있어요. 우리 모두 한 사회 시민으로서 노동권을 갖고 있고요. 그래서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이란, 어떤 형태의 일자리든 기존 일자리와 똑같이 재난재해와 사회적인 멸시 혹은 질타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경제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섭 : 저는 지금 플랫폼 노동자들의 문제가 디지털 시대가 닥쳤기 때문에 새로 등장한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가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는 조선업 등 대기업에서 하청 노동자들에게 하고 있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디지털 플랫폼 경제 역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새로운 수단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새로운 수단이 더욱더 악질적인 것은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디지털화 된 수단을 쓰기 때문에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그래서 앞서 있었던 자본가들과 노동자 간의 착취 구조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플랫폼 기업을 사용자로 규정하고 그 플랫폼 기업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앞서서 가장 필요한 것은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들이 분명히 자영업자가 아닌 노동자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들을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대우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주희 : 저도 해은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플랫폼의 성격을 유지하되 지금 놓쳐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들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좋은 노동이라고 했을 때 좋은 그 개념은 받아들이는 사람 따라 다르다고 생각을 해요. 누군가에게 돈을 많이 버는 게 좋은 노동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돈을 좀 적게 받되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좋다라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정확히 좋은 노동은 이거라고 명확하게 말하기는 사실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권리는 보장되어야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이더분들도 불공평한 상황에 계신 것 같아요. 내 콜이 얼마짜리인지, 다음 콜이 얼마짜리인지 모르는 그 상황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놓인 상황이 불합리하고, 이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운 상황에 계신 게 아닌가 생각돼요. 이런 부분은 목소리를 내도 된다고, 권리를 챙겨야 한다고 말해줘야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것에 목소리를 내고, 마땅히 투명하게 알려달라고 말하는 게 당신의 권리이며 그 권리를 찾기 위해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선, 라이더분들이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관련된 정책이나 시스템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성민 : 말씀 감사합니다. 해주신 말씀들 들어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플랫폼 기업은 자신들을 IT기업이라고 정의해요. 때문에 고용하지 않았다고. 반면, 노동자들은 우리가 그들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하고. 고용관계가 아닌데, 왜 통제를 받지? 이 부분이 가장 큰 이슈 같아요. 그래서 추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플랫폼 기업은 IT 기업일까요? 아니면 라이더를 고용하는 운송업자일까요? 플랫폼 기업이 고용관계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IT 기업이라고 하기 때문이고, 라이더는 그저 우리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용자일 뿐이라고 말하거든요. 우리는 주문을 원하는 소비자와 배달을 원하는 라이더 두 사용자를 중개할 뿐이라고.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노동권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는데, 사회적으로 근로할 기회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더라고요. 사회적으로 근로할 기회란,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회적 질타로부터 자유롭고, 재난 및 재해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인 것 같아요. 질문2. 플랫폼 기업은 IT 기업일까요? 라이더를 고용하는 운송업자일까요? 김동섭 : 저는 우선 고용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미국 판례를 보면, 우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자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했고, 재판이 이루어졌어요. 승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버 기업이 원하는 바를 우버운전자들이 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된 거였어요. 우버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운전했다는 겁니다. 기업에 직접 연관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영업자라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내에는 타다가 있어요. 타다의 경우엔, 택시 기사가 배차를 받았을 때 어디에 도착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도착지를 알면 타다 기사들이 배차 거부를 할 수 있어서요. 이 부분 자체가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를 AI를 통해서 기업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하는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단순히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아니라, 본인들의 이익에 맞게끔 노동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해은 :  파운더라는 영화를 보면, 맥도날드 창업주한테 맥도날드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을 해요. 햄버거를 파는 거냐고 묻죠. 대답은 아니다였어요. 우리는 임대업을 하고 있다고 해요. 대중 인식과는 다르죠. 일반 대중은 맥도날드를 햄버거 파는 곳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처럼 배달의 민족으로서는 우리는 AI를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AI를 움직이기 위해 라이더에게 외주를 주는 거예요. 배달의 민족 앱이 구동되기 위해서. 이런 점에서 저는 AI가 원하는 조건에 맞게 배치가 되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이고, 라이더 분들은 그 AI 구동과 앱 구동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고용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해요. 이주희 : 저 또한 결국 플랫폼 기업은 IT를 이용한 인력 중개업체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고용관계가 아니려면,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관계가 동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하는데 앞서 발표해 주셨듯이 패널티가 존재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알고리즘이 불공평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이것 자체가 수평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IT 회사들이 위에 있고, 돈줄을 쥐고 있다면 그건 이미 수평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깨진거라고 생각해요. 라이더처럼 플랫폼 사용자를 1인 사업가라고 말하려면 책임감과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민과 같은 IT 플랫폼은 존중한다고 하지만, 결국 지켜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실질적인 고용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강연지 : 현재 플랫폼을 보면 단순히 IT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라이더들의 활동으로써 운영되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단순히 IT 플랫폼이다, 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플랫폼이라는 정의가 성립되려면,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실질적으론 계정 사용 중지 등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는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한 것이고, 단순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 고용관계의 갑이 되는 사용자라 보는 게 합당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노동자에 대한 처우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성민 : 말씀 모두 감사합니다. 들으면서 저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주희님이 말씀주신 것처럼, 정말 자유로운 1인 사업가, 1인 사장님이 되려면 플랫폼과 개별 1인 사업가가 평등한 관계가 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연지님이 말씀주신 것처럼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야, 플랫폼 입장에서 라이더들을 고용하지 않았고, 플랫폼 서비스만 제공했다는 말에 힘이 실릴 것 같습니다. 그럼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볼게요. 공유경제가 굉장히 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그렇다면, 이 공유경의 성장은 우리 사회의 혁신일까요? 아니면 퇴보일까요? 질문3. 공유경제의 성장은 우리 사회의 혁신일까? 퇴보일까? 이주희 : 개인적으론 혁신과 퇴보,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위기가 왔을 때, 공유경제가 경제 위기 해결책 중 하나로 등장했어요. 실제 기여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부분이 발전의 한계를 그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발표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다른 쪽으로 사회 문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라이더 업체에 몹쓸 말을 하던 분 영상을 보고 느낀건데, 인권적 비하를 한 건 정말 나쁜일이라고 생각하고,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 분 말씀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면 라이더 안 한다”가 있었어요. 저는 이 부분이 ‘공부를 하지 않고, 더 알아가려는 노력으로 하지 않아도 돈을 벌 방법이 있으니, 결국 교육 받고 싶지 않아하고,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됐어요. 만약, 이렇게 된다면 자기 계발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교육도 멈추게 될 거고, 교육이 멈추면 사람의 가치관이나 생각도 플랫폼이 하라는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생각을 못 드러내게 되고. 때문에 저는 경제 뿐만 아니라, 나라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이 망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어쩌면 너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발전의 퇴보를 만드는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해은 : 저는 사실 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플랫폼 일자리가 생기면서, 문제들이 나타났고, 라이더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면서, 택시 기사에 대한 처우 개선도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처음에는 노동부분에서 살짝 퇴보함에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된다고 생각해요. 실제 파리나, 뉴욕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고요. 더 나은 일자리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수단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희님께서 교육이 무너지는 거 아닌가라고 걱정을 하셨어요. 저는 사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 산업사회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는 일의 형태가 점점 다양화되고, 과거에 획일화 된 기준으로 줄 세워서 일의 기회를 얻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근본적으로 현재 교육 시스템을 유지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있어요. 저는 오히려 스카이 대학 나와서도 배달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듯이, 대학 졸업장의 의미가 퇴색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옅어지면서 정말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교육 혁신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연지 :  저 역시도 혁신이자 퇴보라고 생각합니다. 혁신은 앞서 발표해 주신 것처럼, 나의 유휴 자원을 언제든지 자유로운 시간 혹은 범위 내에서 활용하고 싶은만큼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 또한 경제적 소득을 얻는다는 점 같습니다. 이를 통해 마이크로 사업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 됐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앞서 Poopers 사례를 보여주셨는데, 그걸 보면서 사회적으로 책임감은 결여 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강아지는 키우고 싶지만, 더러운 뒷처리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던 패밀리라는 미드가 있는데, 거기서도 딸이 아버지들을 비꼬는 장면이 나와요. 아빠는 가사 노동도 어플로 다 외주를 주고, 음식도 배달하는데 나는 왜 안되느냐면서. 결국, 공유경제란, 내가 돈만 내면 된다는 사회로 나가게 만드는 발판이 되지는 않을까? 라는 우려가 듭니다. 김동섭 : 저는 우선 키워드 중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공유경제 플랫폼의 성장이 뭔지를 먼저 질문하면 좋겠어요. 공유경제 성장이, 플랫폼의 세를 확장한다는 것인지 혹은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는 걸 말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공유경제 플랫폼이 지향하는 것처럼 수요자와 생산자를 연결시켜 교류의 확장을 이루는 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렇게 다양한 부분으로 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장을 수요자 측면, 생산자 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 앞서 택시에서 가졌던 문제점은 해결되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타다의 경우 택시 기사의 불친절 서비스, 택시 기사 사납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AI를 통해서 몇 km 이동했는지 파악이 되니까. 이 부분은 분명 긍정적입니다. 이처럼 수요자와 생산자들이 겪었던 골칫거리 줄이고, 이득을 넓힌다는 측면에서는 플랫폼의 성장이 혁신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공유경제에서'공유'라는 단어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공유를 좋게 해석하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의미지만, 안 좋게 생각하면 플랫폼을 통해 사람을 상품화 시키고, 이 상품을 공유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민을 예로 들면, 사람들이 상품이 되서 인간을 상품처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고요.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에서 택배 노동자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고, 빠른 운송 시스템하에서 빨리 처리해야 하는 상품처럼 다뤄져요. 사람이 빈사 상태에 이르는 영화입니다. 이처럼 공유라는 개념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어서 상품을 공유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4. 여러분의 공유경제 사용은 이들을 긍정적으로 키웠나요? 부정적으로 키웠나요? 이주희 : 사실 저는 이런 플랫폼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배달 어플 자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직접 사용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보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 사용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커피 하나도 집까지 배달해주는 게 엄청 편리하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험하게 운전하시는 라이더 분들을 보면 물론 다 그러시지는 않겠지만, 너무 사회적으로 논란을 만드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런 부분에서는 부정적으로 느꼈고, 가끔 보면 최소한의 보호 장비도 없이 배달하는 분들도 봤어요. 근데 이 문제를 배달앱도 알고 관련 교육을 한다고 들었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고. 결국, 이 말은 플랫폼이 라이더들을 전국에 뿌렸지만, 관리는 못하고 있는 수단을 쓰기. 알고리즘을 통해, 얼마나 이동했고, 제한 시간 내 완료했다 등은 체크하고, 그 외 부분은 관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용한 건 아니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윤성민 : 주희님 말씀에 덧붙여서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사실 저도, 배달앱을 써본 적이 없어요. 핸드폰에 설치해 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물론, 친구들이랑 같이 밥먹을 때 배달 시킨다고 하면 저도 메뉴 고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써 본 적은 없어요. 첫째, 배달을 원래 잘 안해 먹었어요. 집에서 해 먹고, 굳이 식당에 가서 먹지 배달해서 먹는 것에 익숙하진 않았어요. 둘째, 제가 해 먹는 게 더 맛있어요. (웃음) 셋째, 플랫폼 생태계 자체를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아요. 부정적인 게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과연 이 플랫폼에 돈을 쓰는 게, 부정적인 것을 더 키우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평상시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굳이 내가 안 좋은 면을 키우는 데 돈을 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안 썼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으면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개선하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견이 길었네요. 김동섭 : 공유경제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커진 게 사실입니다. 저는 일단 공유 경제라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봤어요. 예를 들면, 제가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샀어요. 그러면 점원 분과 대화하고, 그 점원 분은 제게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추천하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요. 노동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죠. 단순히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 자체에서 기쁨과 감정 공유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하지만, 공유경제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서 서로가 접할 기회가 단절된 것 같아요. 배달 라이더가 우리 집에 어떻게 도착할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사용자로 규정하고 하면 된다는 생각만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노동 과정 속에 숨겨진 교류, 감정의 교환을 공유경제가 없애버렸다고 생각해서, 공유경제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예전에 카페에서 알바를 할 때였어요. 비가 오는 날이었고, 배달 중에 사고가 생겨서 지연됐어요. 그걸로 한 고객이 컴플레인을 엄청 거셨어요. 분노가 배달 라이더에게까지 미쳤고요. "왜 이 비용을 받고, 빨리 배달을 안 해서 내가 이런 책임을 다 분담하게 하느냐, 왜 빨리 연락을 하지 않아서 해결할 수 있는 걸 못하게 했냐, 빨리 라이더를 교체했어야지" 라면서요. 근데 이 상황에서, 라이더한테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갖더라고요. 라이더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 같았어요. 인감임에도, 대체될 수 있는 상품처럼 여겨지는 것에서 굉장한 거리감이 느껴졌고, 동시에 자영업자 입장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그래서 공유경제라는 게 좀 부정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강해은 : 많은 분들이 공유경제의 부정적인 면을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사실 공유 경제가 편리해요. 배민만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비스가 있어요. 예를 들어, 졸업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예전에는 한번 입을 옷을 20~30만 원 주고 사입었어요 됐어요. 그런데 공유경제가 생기면서 대여 서비스가 생겼고, 언제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됐거든요.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또, 저는 잘 몰랐는데 전화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배달 주문할 때 사람과 대면하는 걸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들에겐 배달 앱이 너무 좋아요. 앱 들어가서 클릭 몇 번 하면 되고, 배달원과 마주칠 필요 없고. 반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배달료의 등장이에요. 예전에는 음식 가격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배달비가 당연한 게 됐어요. 어쩔때는 1만 원도 나오고. 배달비 무서워서 시켜 먹기 힘들때도 있더라고요. 두번째는 일회용 품이에요. 하나 배달 시키면 일회용품이 몇 개씩 쌓여요. 기후위기, 환경문제가 심각한데 이거를 계속 이용해서 먹으면 뭔가 지구한테 죄짓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예전에 중식당에 주문하고 음식 다먹으면, 씻어서 밖에 내놓으면 수거해 가셨잖아요. 이 부분에서는 명과 암이 있는 것 같아요. 강연지 : 저의 경우 공유경제 플랫폼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주로 이동할 때 씁니다. 에어비앤비도 이용하고요. 장점을 보면, 사회 초년생인 가질 수 없는 자차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멀리 여행도 갈 수 있고. 이 부분에서는 정말 큰 장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에어비엔비도 유명한 호텔이 아니라, 지방에서 민박을 운영하고 계신 분들도 오픈 된 공간에서 더 많은 대중에게 시설을 소개할 수 있어요. 장점이죠. 소카, 따릉이, 스윙도 그렇고요. 이런 것들 활용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모두에게 개방된 시설이다 보니까 안전 수칙이나 법 제도가 근본적으로 좀 미흡하다였어요. 소카는 연령만 충족되고, 아마 면허도 1년 지나면 빌릴 수 있는 걸로 알아요. 근데 문자적인 조건들이 그 사람이 정말 이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 충분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까? 싶어요. 모두에게 개방된 공유경제 플랫폼이 어떻게 보면 모두에게 또 해를 가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부분에서 저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성민 : 모두 답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러면 '더 나은 플랫폼과 더 나은 노동 환경 혹시 노동자를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요?'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플랫폼과 노동자가 동시에 좋아질 수 있으려면 뭐가 필요 할까요? 질문5. 플랫폼과 노동자가 모두 좋아지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강연지 :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어려운 건 인식 개선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발표에서 보여주셨듯이, 대학 나왔고,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됐다, 나의 노력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당연한거다. 노력하지 않은 당신들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고, 무시 받아야 마땅한 거라고 보였고 노동이 굉장히 경직되고, 위계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이런 인식들이 무너지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플랫폼 노동을 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거라고 보진 않잖아요? 플랫폼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처우 개선을 확실하게 해준 다음 일반 시민들 내에서도 인식 개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주희 : 저도 인식 개선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공유 경제 플랫폼이 생기면서, 유튜브 처럼 정말 성공만 하면 정말 막대한 수익을 벌 수 있잖아요. 조회수 하나에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한 달 혹은 일주일 하루에 벌 수 있게 된 세상이에요. 물론 쉽다는 건 아니에요, 엄청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부만 하던 사람들은 한 번의 큰 성공을 위해 공부에 청춘을 바쳐요. 저는 이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문에 과거 학위에 대해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던 거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현재는 관계성이 흐려진 것 같아요. 땀 흘려 노동한만큼 돈이 나온 게 아니라, 돈 버는 방식이 변한 것 같아요. 그리고 변한 만큼 논의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가 마땅히 필요로 하는 권리들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것 같아요. 4대 보험 이라든지, 고용관계라든지, 플랫폼에 대한 정의라든지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논의해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업 경영진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힘들거예요. 어쨌든 불편함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런 부분을 잘 개선한다면 오히려 이미지가 더 좋아지는 효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섭 :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첫째, 배달 노동자들이 배달업을 하고 싶을까요? 불황의 해결책으로 공유 경제가 나왔는데, 다르게 해석하면 불황 경제가 만든 '암'이 공유경제라고 생각해요. 원래 생업이 있던 분들이 길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 공유경제 일 수도 있잖아요? 정규직에서 피치못하게 플랫폼 노동으로 온 분들도 계실거예요. 그 때문에, 플랫폼 경제라는 것이 불황의 신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플랫폼 경제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라면, 이는 플랫폼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문제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플랫폼의 활성화를 하나의 위기 신호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둘째,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노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플랫폼 노동자로만 투입되고 사용자 지위에 오르지 못하는 구성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분들은 배민, 요기요 등 앱을 이용 못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앱으로 주문하라는 답변을 받아요. 이건 분명한 소외예요. 플랫폼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실제로 노인분들이 배민이라던가 요기오라던가 아니면 저희가 이용하는 그런 어플리케이션을 사용 못하실 수 있어요 그러면 전화를 했는데 어플로 주문하세요라고 노인분이 대답을 받으십니다. 그러면은 이런 플랫폼 경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등 정보 격차를 느끼는 분들도 플랫폼을 이용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플랫폼 노동자를 위한 산재, 고용보험 등 안전망입니다. 건강 보험이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요. 건강보험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정규직 비정규직 없이 가입합니다. 병원에 가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고용보험, 산재보험은 안 됩니다. 병원에 가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산재, 고용 보험의 경우 모두를 가입시키면 돈을 내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이슈가 있어요. 이런 이슈를 공론화를 통해 대화하고, 탁산공론을 넘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해은 :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편리함을 줄까? 인간의 손이 안 타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자율주행의 경우에도 상용화가 안됐는데, 사고시 책임 소재를 묻는 문제가 나오고 있잖아요? 이처럼 우리 사회 큰 변화에 앞서서, 위험을 어떻게 분담하고, 법과 정책 적용은 어떻게 할지 등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플랫폼 노동 특히 배달 라이더 분들을 통해 이야기 했지만, 사실 드론과 로봇 등이 등장하면서 배달 라이더의 수명도 짧아진다고 생각해요. 이제 정말 사람이 하는 일자리가 별로 없고, 기술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 더 세지는 방향으로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기본소득처럼 사회 안저망을 논할 수 있는 사회적 토론도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성민 : 오늘 참여해 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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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주를 망가뜨렸다
제주는 변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혹시라도 불편하셨던 분들이 있다면, 사과드린다. 강조하고 싶었다. 더는 우리가 알던 옛 제주 모습을 못 볼지도 모른다. 제주 생태계가 달라지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이다.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제주도 푸른 바다는 어쩌면 옛말이 될지도 모른다. 제주도, 푸르렀던 바다 제주도 해안의 갯녹음을 더불어, 기존에 없던 생물 종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갯녹음은 백화현상으로,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탄산칼슘(석회가루)이 석출되어 해저생물이나 해저의 바닥, 바위 등에 하얗게 달라붙는 현상을 말한다. 갯녹음이 발생할 경우, 해조류가 서식이 어렵다. 해조류 서식이 어려움에 따라, 바다 동물의 먹잇감이 사라지고, 황폐해진다. 이 때문에 갯녹음을 바다의 사막화 현상이라고도 한다. 갯녹음 현상 제주도 해안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갯녹음이 나타나고 있다. 2017년 당시 이미 제주 연안 어장 40%에서 갯녹음 현상이 발견됐다. 해조류가 없어서, 먹이 생물이 자라지 않고, 기존에 있던 생물은 먹이가 없어 살이 찌지도, 성장하지도 못한다.  또한, 연안이 아열대화되어 기존에 없던 생물이 출현한다. 독소를 가진 해파리, 바다뱀, 파란고리문어 등이다. 해당 생물들은 기존 생물들이 없어진 자리를 채우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온도 상승이다. 지난 80년간 지구 온난화로 제주 해안 온도가 1.5ºC 상승한 결과다. 해안가 온도 상승 메커니즘은 이렇다. 태양으로부터 열에너지가 들어오면, 지구는 일부는 흡수하고, 일부는 반사한다. 이때 극지방의 빙하는 열에너지를 반사하는 효과를 낸다. 반면, 이산화탄소나 메탄 같은 온실가스는 반사되는 에너지가 우주로 나가지 못하고, 지구 대기에 가둬놓는 역할을 한다. 열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머무르게 되면 그만큼 대기 온도가 상승한다. 상승한 대기는 극지방의 빙하를 녹여 반사 효과를 줄이고, 더 많은 에너지를 흡수하게 한다. 그 결과 온도상승과 기후변화가 더욱 심해지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대기 온도 상승이 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방 안에 차가운 물이 든 컵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입김을 불어야, 차가운 물 온도를 상승시킬 수 있을까? 혹은 얼마나 방안의 온도를 높여야 차가운 물 온도를 상승시킬 수 있을까? 얼핏 봐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해수면 온도는 이미 상승하고 있고, 제주 앞바다 생태계는 이미 변하고 있다. 출처 : http://jeju.ekfem.or.kr/archives/15991  위 제주도 갯녹음 발생 지도와 실제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제주도 해안 생태계는 이미 많이 변했다. 문제는 이것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갯녹음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해조류가 없어지면 이는 또 다른 악순환을 만든다. 해조류는 CO2를 흡수하여 바다의 산성화를 막는다. 해조류가 없어지면, 이는 다시 해양 산성화의 가속도를 높인다. 해양 산성화의 무서움은 해양생물의 껍데기나 뼈대를 녹인다는 점이다. 해양 생물 껍데기나 뼈대가 되는 탄산칼슘은 높은 산성도의 물과 만나면 녹게 된다. 쉽게 말해 소라, 조개, 전복 등이 껍데기를 형성하지 못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해양 산성화는 산호초 부식을 초래한다. 산호초는 해양 생물 다양성의 필수로 뽑힌다. 산호초는 전제 해양 생물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2%에 불과하지만, 해양 서식지의 25%를 제공한다. 즉, 0.2%의 산호초가 전체 해양 생물 25%에게 집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난 2009년부터 2018년 사이 전체 산호초의 14%가 사라졌고, 그 면적은 11,700km²에 달한다. 이는 경기도 전체 면적인 10,195km² 보다 넓은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 변화는 또 다른 파괴로 이어지고, 결국은 우리 인간의 삶에 더욱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단 제주도 앞바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 모두 원인을 제공한다 제주도의 문제가 비단 제주도만의, 제주도민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나 역시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모두 전기를 쓰고, 가전제품을 쓰고, 자동차를 타며, 쓰레기를 버린다. 이 모든 과정에서 탄소 배출은 이루어지고 있다. 다소 과격할 수 있으나, 우리가 하는 일이 탄소 배출이 필연적이라면, 우리는 모두 생태계 변화에 원인을 제공하고, 그 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주도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 만의 생태계 변화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우리가 사는 생태계의 변화라는 생각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두 함께 생각을 모아 생태계 변화 문제에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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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악당 대한민국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목 : 기후악당 대한민국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지난해 11월에 이집트에서 열린 제 27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열릴 당시, 저먼워치, 뉴클라이밋연구소, 기후행동네트워크는 ‘2023 기후변화행동 지수(Climate Change Performance Index, CCPI)’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60위 최하위권에 머물며, 기후변화 대응에서 매우 미흡(Very Low)이라고 평가 받았다. CCPI는 올해로 18년을 맞은 오래된 기후변화 대응 평가 지수로, 온실가스 다 배출 국가 상위 약 60개국의 온실가스 배출(40%), 재생에너지(20%), 에너지 소비(20%), 기후 정책(20%) 총 네 가지 요소를 총합한다. 우리나라보다 낮은 순위 나라는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뿐이었다. 지난 2022년에도 60위, 2021년 53위, 2020년 58위로 전체 61개국 중 항상 최하위에 머물렀다. 기후 악당 대한민국 CCPI세계 최하위, 온실가스 배출 세계 7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이산화탄소 배출량 1위, OECD 국가 중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하위 2위, 석탄발전 비중 상위 4위, 모두 대한민국의 수치다. 이러한 수치로 인해 환경단체들은 우리나라를 기후 악당이라고 부른다. 주저함이 없다. 실제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에 있어 1인당 배출량 변화 추세를 빼면, 모든 항목에서 ‘매우 저조함(Very Low)’을 기록했다. 위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현재 추세를 제외하곤 모두 매우 저조함을 나타내는 걸 알 수 있다.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 재생에너지 비중, 에너지 소비량, 기후정책 모두 매우 저조하다. 해당 통계로 알 수 있는 건, 우리나라의 기후 정책과 활동량이 국제 흐름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이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전 세계는 산업화 대비 온도상승을 1.5ºC 이하로 낮추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온실가스 배출로 이미 1.5ºC 방어는 불가능하고, 이미 깨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이미 올해 6월 1.5ºC 방어선이 깨졌다는 뉴스도 보도됐다. 현실적으로 1.5ºC가 아닌 2ºC를 정하고,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2ºC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만약, 지구 기온이 2ºC 상승할 경우, 동토층 전체 면적의 40퍼센트가 사라지고, 수십억명에게 식량부족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1.5ºC가 되었건, 2ºC가 되었건 인간에게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위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뭘까? 캐나다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 위기에 있어서, 인간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면서,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텀블러 사용, 대중교통 이용 등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연합하고, 연대해서 환경 이슈에 대해 기업에, 정부에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 등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물건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업은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고, 국민의 권한을 잠깐 위임받는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비록 내가 하는 일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개의 촛불은 작은 방을 비추고, 1만 개 촛불은 큰 저택을 비출 수 있다. 그리고 100만 개 촛불은 어쩌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하기 위해선,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마주 봐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질문드리고 싶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각자는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 『최종 경고 :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세종/ 2022) p.117, 127 ** 『미래가 불타고 있다 - 기후재앙 대 그린뉴딜』 (나오미 클라인, 열린 책들, 2021)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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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누가 만들어 주나?
기후난민이란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을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잦은 가뭄과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최근 사례로는 파키스탄이 있다.  2022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간, 파키스탄에는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1,100여 명이 사망했고, 57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후 추가적인 이재민이 발생해 총 1,700여 명의 사망자와 800만 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도로, 교통, 주택 등 삶의 터전이 파괴됐고, 파키스탄은 피해복구 금액 163억 달러 한화 약 20조 원이 필요할 전망이다. 글로벌 사우스 북반구의 저위도나 남반구에 위치한 아시아·아프리카·남미·오세아니아의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을 일컬어 글로벌 사우스라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이며, 전세계 글로벌 기업과 선진국들이 저임금 노동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진출한다. 인간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옷, 커피, 초콜릿, 쌀 등 대부분 생활 필수품은 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만들어진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앞서 파키스탄 역시 글로벌 사우스에 속한다.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이들 나라에는 사회 제반 시설이 부족하다. 사회 제반 시설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그만큼 위기에 취약하다는 의미다. 이들 나라에 홍수와 가뭄 등 환경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나라의 사람들은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은 그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후변화에 원인 제공은 누가하나? 2021년 국가별 탄소배출량을 보면, 중국이 약 100억 톤으로 전체 배출량의 27%를 차지한다. 그 뒤를 미국 약 53억 톤, 유럽연합 35억 톤으로 뒤따른다. 대한민국은 약 6억 톤으로 세계 10위의 탄소 배출국이다. 해당 통계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탄소 배출 대다수가 선진국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도 많은 양의 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인구 때문이다. 실제, 1인당 탄소 배출량을 따져보면 중국은 1인당 7.6톤, 인도는 1.78톤이다. 앞서 홍수로 재해민이 발생한 파키스탄의 경우 0.85톤이다. 반면, 선진국인 캐나다는 1인당 20.62톤, 미국은 19.27톤, 독일 10.62톤, 일본 9.99톤 등을 배출한다.  해당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건, 기후변화의 직접 원인인 탄소 배출은 선진국에서 나오고 있지만, 그 악영향은 개발도상국에서 받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삶은 에너지 소비 삶이다. 지하철, 버스, 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탑, TV, 냉장고, 수도 등등 모두 에너지를 소비한다. 에너지를 소비량은 탄소 소비량이다. 누리는 게 많으면, 배출하는 것도 많다. 이렇게 수많은 걸 누리는 현대인의 삶은 과거 귀족이 노예 30명을 거느린 삶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대는 제국도 노예도 없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삶은 있고, 온갖 수모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 제국적인 삶의 양식이 계속되는 한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제국적 생활양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문제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대인에게 현대의 삶을 포기하고, 과거의 삶으로 회귀하라고 할 수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다만 그 시작은, 내가 누리는 삶의 양식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말하는 것이다. 기업과 정부에게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내게 오는 제품과 서비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흉터를 남기고 오는지 인지하는 것이다. 시민 차원에서 꾸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 더 나아간다면 그런 문제 있음을 인지하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변화를 만들고 있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응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사이토 다케시, 다다서재, 초판 1쇄, 2020)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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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아버지는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해피엔딩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가난한 집에서 살아가는 찰리가 윌리웡카 초콜릿에서 뽑은 황금티켓으로 초콜릿 공장을 탐방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찰리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산 초콜릿에서 전세계 5장 뿐인 황금티켓을 뽑는다. 해당 티켓은 베일에 쌓여 있던 윌리웡카 초콜릿 공장의 입장권으로, 티켓을 가진 사람에 한해서 베일에 쌓여 있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을 보여주는 초대권이다. 티켓을 뽑은 찰리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걸 알았고, 티켓을 팔려고 한다. 하지만, 팔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그와 함께 윌리웡카의 초콜릿 공장으로 향한다. 별난 이벤트처럼, 별난 내부를 탐험하며 초콜릿 공장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그 공장을 빠져 나온다. 쥐구멍에도 볓들날 온다는 말처럼, 찰리의 가정에도 또 다른 빛이 든다. 애초 로봇의 등장으로 실직한 아버지가, 로봇 수리공으로 재취업에 성공한 것. 그렇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노동자 임금, 근무시간 등 다양한 걸 보여준다. 챗 GPT의 대두로 주목되는 건, 찰리가 아닌 그의 아버지 모습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단순 노동이 사라질 것이고 오히려 높은 수준의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영화 속 찰리 아버지가 치약 뚜껑을 닫는 일을 하다가, 로봇의 등장으로 실직했다가 오히려 그 로봇을 수리하는 일로 재취업에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찰리 아버지는 이 두 주장을 몸소 보여준다. 현실은 어떨까? 로봇과 AI가 인간의 일을 모두 대체할까? 아니면, 또다른 일이 생겨나고 그 일을 하게 될까? 찰리의 아버지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로봇과 AI가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말은 너무 오래됐다. 실제 일부는 대체되고 있다. 기계는 커피도 내리고, 닭도 튀기고, 서빙도 한다.  커피를 내리는 카페도 심심치 않게 본다. 이런 내용을 보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건 사실로 보인다. 실제 국내 산업 현장에서 로봇은 활발히 쓰이고 있다. 단순 서빙, 커피 제조, 닭 튀기기만이 아니라 자동자 제도에도 활발히 쓰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로봇 밀집도가 1위다. 제조업 근로자 1만 명 당 로봇 대수는 932개로 2위인 싱가포르 605개의 거의 1.5에 달한다.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나라는 로봇 도입 속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다. 이런 추세 때문에 보스턴컨설팅 그룹은 지난 2015년에 발표한 <The Robotics Revolution: The Next Great Leap in Manufacturing> 보고서에서 한국은 2020년까지 제조의 20%를 로봇이 하고, 2025년에는 40%까지 상승할 것이라 발표했다. 산업 현장에서 로봇을 사용하는 건 위험한 업무에 사람을 투입하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효율성도 높고, 효과성도 높다. 실제 로봇 도입으로 인해 산업 현장에서 산업재해 발생 건 수가 줄었다는 연구도 있다. 더구나 로봇은 파업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효율성, 더 많은 효과성, 경제성 측면에서 산업계에서 로봇을 쓰지 않을 이유가 사실상 없다고도 보여진다. 오히려 인간을 쓸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든다. 로봇의 등장으로 부가적인 서비스도 등장하겠지만, 도입된 로봇의 수만큼 늘어나진 않을 것이다. 931대의 로봇을 931명의 인간이 수리하는 게 아니라, 일부의 사람이 로봇을 수리할테니 말이다. 931명의 사람이 로봇으도 대체됐다면, 수리공으로 재취업 한 찰리의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될까?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는 어디로 갈까? 미래 국가 모습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으나, 실업이 사회혼란과 문제라는 점은 명확하다. 때문에 국가나 시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시민은 대안을 마련하라며 목소리를 낼 것이고, 국가는 그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마련할 것이다. 또한, 틈새 시장을 노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 혹은 산업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나타날 노동의 모습이 결코 질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미래 노동의 질이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말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노동자를 일에서 밀어 낸다면, 어쩌면 별의 별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공유경제가 활성화 되어, 기존 인간이 하던 다양한 일을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개똥 치우는 일도 정말 현실에서 일로 받아들여 질지도 모른다. 실제 2016년 Pooper라는 서비스가 공유경제를 이름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면, 개똥을 치워주는 일이었다. 실제 서비스는 아니고 예술프로젝트였다. 벤베커는 “직접 해도 되는 일까지 긱경제에 맡기는 행태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금의 세태를 꼬집고 싶었다”고 말한다 있다.¹  로봇과 AI의 인간대체, 노동과 질을 함께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미래를 확정할 수 없으나, 로봇과 AI로 인간의 노동에 큰 변화가 생기리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일자리의 수가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노동의 질 역시 ‘인간이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라는 의문이 드는 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건, 인간과 로봇, AI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한계는 어떻게 둬야 할지 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미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의 질 문제 정비도 필요해 보인다. 여전히 사회 어디에선가는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마땅히 법으로 정해진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 미래엔 로봇과 AI를 다룰 줄 알고, 설계할 줄 알고, 개발할 줄 알고,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지 모른다.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가 미래엔 더 벌어지지 않도록, 시민들이 머리를 대고 토론해야 될 것 같다.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 (악렉산드리아J. 래브넬, 롤로코스터, 2020, p.282)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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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창작한다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AI 시대
AI가 뜨거운 감자입니다. 쉽게 삼키기도, 뱉기도 어렵습니다. 쓰긴 해야 하는데, 바로 쓰기엔 챙길 이슈가 많습니다. 오늘은 여러 이슈 중 AI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특별히, AI의 작품을 창작의 영역으로 봐야할지, 도구의 영역으로 봐야할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작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AI와 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지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AI가 그린 그림은 무엇? 먼저 사진을 살펴보죠. 해당 사진은 AI 작품이 위조인지, 예술인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 논문에서 발췌한 사진입니다. 상하단이 비슷합니다. 둘 중 하나는 AI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AI가 학습한 데이터입니다. 즉, AI가 학습한 걸 토대로, 비슷한 걸 창조한 것입니다. 어떤 게 AI의 작품이고, 학습 도구인지 구분이 가시나요? 솔직히 말하면, 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했고, 잘 만들었습니다. 전문가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만, 잘 모르는 저는 둘 다 작품이라 말해도 손색없다 싶었습니다. 정답은 상단 그림이 AI 작품, 하단 그림이 AI가 학습한 데이터입니다.  그림을 잘 그렸냐, 못 그렸냐를 떠나서 향후 인간이 만드는 작품보다 AI가 만드는 작품이 훨씬 많아질 것 같습니다. AI 작업량을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명확하니까요. 지금은 작품성에서 인간이 더 뛰어날지 모르지만, AI의 학습량이 많아지면 부족한 작품성도 보완이 될 거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다보면 AI가 인간보다 더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더이상 알파고를 이길 수 없듯, 너무 멀리 가버릴지도 모르죠. 현재도 AI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고, 실제 현장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그 실상을 살펴보시죠. 활발히 사용중인 웹툰업계 현재 가장 활발한 논의가 있는 곳은 웹툰계입니다. 네이버는 지난 4월 24일 툰필터 상표권을 등록했습니다. 툰필터는 사진을 업로드하고, 원하는 웹툰 작가의 화풍을 선택하면 AI가 작가의 화풍에 맞게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서비스입니다. 즉, AI가 웹툰 작가의 화풍으로 소비자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죠. 위 사진은 네이버에서 운영 중인 툰필터의 한 사진 입니다. AI가 학습한 데이터를 토대로 그림을 그려줍니다. AI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네이버웹툰과 웹툰작가가 계약시, 작가의 그림을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데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했다면 저작권 침해겠지만, 동의했기 때문에 침해는 아닌 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반론도 있습니다. 네이버 웹툰 작가가 되려면, 웹툰 작가의 작품을 AI 학습 데이터로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네이버 웹툰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 영향력 앞에, 어쩔 수 없는 동의를 한 것이고, 이에 대한 불만이 있으나 그 영향력 앞에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고 AI 사용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웹툰 작가의 화풍을 쓸 때 그에 따른 합당한 저작료를 달라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웹툰을 AI가 그린 것 같다는 이슈로 도마에 오른 작품입니다. 지난 5월 22일에 첫 연재가 시작된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이라는 작품입니다. 현재는 수정됐지만, 처음 공개 당시엔 그림 중 일부가 통일성이 없고, 화풍이 일정치 않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AI가 그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웹툰을 그린 업체는 반박했습니다. “AI를 이용해 생성된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며 "3D모델과 각종 소재들을 사용하면서 웹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줄여보고자 작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AI를 이용한 보정작업을 했다.”라고. <툰필터>와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사례를 보고 AI를 창작자로 봐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자는 웹툰작가의 작품을 도구로 AI가 그림을 그린 것이고, 후자역시 논란은 있지만 AI가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 그림, 음악, 영상 등등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저작권이 생깁니다. AI를 창작자라고 본다면, AI에게 저작권이 생길 겁니다. 반대라면 없겠죠. 때문에 저는 AI 작품에 저작권을 부여 하느냐, AI 작품을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슈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성형 AI의 그림 창작일까? 저작권은? 생성형 AI란 인간이 입력한 명령어를 AI가 만들어주는 걸 말합니다. 인간이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이미지를 생성해주는 것이죠. 마이크로소프트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셔터스톡 AI 등등 다양합니다. 저도 실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를 통해 ‘사과 먹는 모습'을 생성한 것입니다. 질문 해보겠습니다. 이 그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제가 이 그림의 저작자일까요? 저는 그냥 명령만 내렸고 그림엔 손 하나 까딱 안했는데도요? 그렇다면, AI가 그런 깃이니 AI가 저작자일까요? 그런데 제 명령이 있어서 AI가 그림을 그린 거 아닌가요? 질문이 헷갈리는 만큼, AI 저작물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AI가 저작권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 AI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작권 법에 따르면,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말합니다. 즉, 설령 AI라 할지라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면 저작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작자를 저작물을 창작한 사람으로 보고 있기에 AI를 저작자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 조연하 교수의 <인공지능 창작물의 저작권 쟁점 - 저작물성과 저작자 판단을 중심으로> 논문에 따르면, 근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문가들이 대체로 AI의 창작물을 저작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합니다. 다만, 저작권 보호 기간을 인간보다 짧게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실제 미국의 경우 AI의 저작물을 저작권이 있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실제 논쟁도 됐습니다. 한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이 알고보니 AI가 그린 작품이었는데, 해당 작품을 출품한 사람은 AI가 해당 그림을 그리도록 미세하게 명령어를 조작한 내 노력이 들어갔다는 입장을 펼쳤습니다. 국내에서도 AI의 저작물에 저작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률 개정안이 나온 상태입니다. 흐려진 경계, 문화는 어떻게 될까?  AI 저작권에 대해 아직 사회적 합의는 없습니다. 앞으로 만들어 가야할 부분입니다. 다만, AI의 등장으로 인간 고유의 것에 금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작품에 한정되던 저작권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흐려지는 것처럼, 인간만이 창작을 한다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AI가 도구가 아닌 하나의 창작자로서 역할을 하게 될지, 아니면 그저 인간의 창작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만 한정하게 될지, 그도 아니면 인간과 AI가 함께 만드는 것으로 흘러가게 될지,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의 창작물이 AI 창작자의 도구가 될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창작의 영역이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주체와 유형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또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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