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빅테크와 민주주의 위기 : 사고의 확장은 어떻게 갇히는가
한나 아렌트의 말 독일 출신의 작가이자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¹을 말했다. 스스로 악한 의도를 품지 않아도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느끼는 일 중 무엇인가는 악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그 악의 평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두고 사방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어떻게 누가 봐도 학살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상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런 점을 어떻게 인류가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냐.” 등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그에 대한 비판들을 다 읽고 난 뒤 명징하게 들었던 생각은 단순했다. 끼리끼리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 당시 노트에 작성했던 메모를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 “아, 끼리끼리가 이렇게 위험한 거구나. 끼리끼리 사이의 대화나 공유되는 정보는 그게 맞냐, 틀리냐가 중요하지 않구나. 그게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그저, 내가 속해 있는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 좋다고 공유되면 되는 거구나. 또 우리 사이에 공유되는 건 다 맞고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또 다른 결론도 있었다. “소위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이 다 맞는 건 절대 아니며, 권위가 정당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특정 개인이 가진 권위만큼 정당성을 부여받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 정치인, 경제인, 선생님, 직장 상사, 회사의 대표라 할지라도 틀린 점은 반드시 있으며, 항상 맞는 말과 옳은 말은 하는 건 아니다. 또한 아무리 유명하고 대중적인 플랫폼에 공유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조차 틀릴 수 있다.  중요한 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해지고, 그들의 의견을 보고,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사고의 확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아이히만이 상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나 말고도 주변에서 다 한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저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 혹은 저 사람이 맞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말이 무조건 옳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가스실에서 수십 만의 사람들이 학살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AI는 사고에 결계를 친다 물론 이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말이다. 나 역시도 주변에서 다 맞다고 하는데 틀리다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런 어려움은 AI가 득세인 요즘은 더욱 그렇다. AI가 내게 보여주는 콘텐츠들은 온 세상이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그 이유는 AI와 알고리즘이 내가 웹상에서 만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AI와 알고리즘은 내 검색 기록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한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 관련한 콘텐츠와 제품, 관련 광고를 보여준다.  당연하지만 이런 AI와 알고리즘을 다루는 건 디지털 플랫폼을 보유한 빅테크들이다. 빅테크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빠르게 분석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비슷한 유형의 콘텐츠나 제품, 서비스를 쏟아내듯이 보여준다. 이런 것이 필요한 제품을 찾을 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특정 정보를 찾을 때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맞춰 정보를 준다는 건, 내가 좋아할 만한 정보만 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고 범위를 한계 짓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림에서는 조금 크게 그렸지만, ‘나’라는 세계관은 전체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전체 세계에는 결계가 없다. 즉,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5천만, 전 세계적으로 80억이 넘는 인구가 존재한다. 또한 각자 삶의 배경과 환경, 경험이 다르다. 때문에 전체 세계는 서로 다른 생각을 접하면서 제대로 교류만 한다면 사고의 확장을 지수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 전체 세계 안에 속한 개인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무수히 많은 사고 확장이 가능하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사고하면서 사고의 확장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전제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자주 접하는 것이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이런 확장이 힘을 얻기가 어렵다. 내가 원하는 정보만 짧은 글과 영상으로 단시간에 쏙쏙 뽑아서 주기 때문이다. 짧은 글과 영상도 훌륭한 게 많겠지만, 여기에만 매몰되면 긴 호흡의 글을 읽고 생각하기가 어려워 진다. 사고의 확장은 생각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생각조차 어렵게 만드니 사고의 확장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점에서 빅테크들의 AI와 알고리즘은 활용 방식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접할 기회는 차단하며, 궁극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생각과 마주하며 생길 수 있는 사고의 확장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사고 확장에 결계를 치고 그 밖으로 넘어갈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건 AI가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해준다는 것 결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더 무서운 건 빅테크들이 보여주는 콘텐츠들이 모두 “네가 맞아”라고 말하는 것들만 보여주고, 이를 통해 마치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 양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계 밖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생각이 있는데도,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내가 보고 듣는 콘텐츠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빅테크의 플랫폼 안에서는 다른 생각을 접할 수가 없다. 이것의 위험성은 확증편향이다. 내 생각만 맞고, 옳다는 착각이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있어야, 내 생각이 나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오는데, 빅테크 플랫폼의 운영방식은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결계를 강화한다. 이런 통로가 없으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한다. 두꺼워진 결계로 인해 내가 보는 세계관이 세상의 전부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플랫폼 안에서 정보를 찾는 사람들은 나와 같거나 비슷한 생각만을 하는 정보만 접하게 되고, 결계 밖으로 나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지워 버린다. 물론 우연히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도 있다. 돌부리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딪혔을 때 불편할 수도 있다. 다른 생각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내가 맞다고 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기대게 된다. 내가 맞다고 해주는 세계관으로 스스로를 넣게 되고, 그런 콘텐츠를 더욱 찾고, 보며, 안심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다. 여초 커뮤니티에서 노는 사람과 남초 커뮤니티에서 노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한다. 여초 유저가 남초에 가서 놀지 않고, 남초 유저가 여초에 가서 놀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대방 커뮤니티로 갈 때는 헐뜯고 맹목적으로 비난하러 갈 때 뿐이다. 또한, 상대방 커뮤니티 콘텐츠를 가져와 비난하기 바쁘다. 이러한 이유로 요즘 빅테크와 그들의 AI, 알고리즘, 플랫폼이 무섭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한 가지 생각만을 강화하게 만들고, 그것이 가장 옳은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한 가지 생각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서로 부딪히고, 부딪히고, 또 부딪힐 때 발전할 수 있다. 그러한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 모으고, 의견을 나누는 곳이 공론장이다. 지금의 AI 빅테크들의 운영 방식은 다른 의견은 틀리고 필요 없으며, 논할 가치가 없고, 그런 것들을 논하는 공론장 역시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한때 SNS가 새로운 공론장이 될 수 있을 거란 시각도 있었다 페이스북이 처음 등장했을 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공론장이 탄생하고 민주주의가 확대될 것이란 시각도 있었다. 더이상 언론사나 정부에서 보여주는 대로가 아니라, 시민이 직접 자신만의 시각대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필리핀의 언론인 마리아 레사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필리핀 두테르테 정부의 언론 자유 탄압에 맞서 싸운 것을 인정받아 2021년에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했다. 또다른 공동 수상자는 러시아 언론인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로 그 역시 푸틴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인물이다. 페이스북이 새로운 공론장과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던 마리아 레사는, 소셜미디어가 여론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몸소 싸워 경험한 뒤 이렇게 말했다.² “소셜미디어는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현장인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뉴스를 전하는 바로 그 플랫폼이 사실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한다.” “기술은 우리를 거짓말 바이러스에 감염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들며, 두려움과 분노와 혐오를 자극하거나 심지어 불러일으키고, 전 세계 권위주의자와 독재자의 부상을 가속화한다.” “기술 기업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저지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공론장이 될 거라고 기대되었던 소셜미디어는, 혐오와 가짜뉴스로 사람들을 자극하는 플랫폼으로 변질됐다. 이렇게 된 건 당연히 돈 때문이다. 사람들은 혐오와 자극적인 콘텐츠에 반응하고 모인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돈이 쓰인다. 광고가 집행된다는 말이다. 광고로 수익을 얻는 플랫폼은 이런 콘텐츠를 더욱 밀어주게 된다. “분노와 선동으로 강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이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³이다. 대안은 없을까. 있다. 플랫폼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 플랫폼을 떠나면 된다. AI가 문제를 만든다면, AI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AI는 현실에서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쓸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기술이 되고 있다. 또한 플랫폼은 그 강제적인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한다. 강제적인 기술이 되어가는 AI  강제적인 기술이란, 사회 속에서 생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이 없는 지역의 주민은 개인용 자동차를 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변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싶지 않아도 사용하게 되는 기술이 강제적인 기술이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빅테크 중 AI를 상용화 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또한 우리 사회는 AI 사용과 개발을 장려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I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현대 기업 활동 대부분은 플랫폼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콘텐츠를 만들든, 광고를 하든 모두 플랫폼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면 확산조차 되지 않는다. 만약 그 플랫폼이 AI를 사용하면 일개 회사원은 일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AI를 쓰는 게 된다. 이렇듯 AI와 알고리즘이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수록 우리는 점차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또한 이들의 힘은 점점 강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광고 정책을 바꾸는 메타에 맞춰 소비자들이 끌려가는 것이다. 점차 플랫폼이 원하는 대로, 플랫폼이 만든 알고리즘대로 콘텐츠들이 유통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서 말했던 개별 사람들의 사고 확장도, 더 나은 대안과 사회, 환경에 대한 담론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 생각을 마음껏 이야기하는 공론장도 더는 존재하기 어려줘 진다. 오히려 일개 개인의 비전과 방향성만 담은 콘텐츠를 확산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 일론 머스크, 일론 머스크의 확성기가 된 X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의 일등 공신은 일론 머스크였다. 트럼프 역시 일론 머스크를 “새로운 스타(New Star)”라며 치켜세웠다. 그는 트럼프 정부의 효율성 위원회에 소속되어 정치권에서도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 기간 동안 일론 머스크는 X를 통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민주당이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있다는 음모론을 퍼트리기도 하고, 트럼프는 총을 맞았는데 왜 해리스는 안 맞냐는 등 믿지 못할 발언을 하기도 했다. 블롬버그는 이런 모습을 “2억 명이 넘는 팔로워를 위한 트럼프 광고판으로 만들었다”며 비판했다. 또한, 일론 머스크 자신의 트윗이 많이 공유되지 않으면 직원들에게 알고리즘을 고치라고 명령하고, 그렇지 않을 시 해고하겠다는 엄포를 놓는 일도 있었다. 실제 직원 한 명은 해고됐다. 당시 자신의 트윗은 910만 명이 리트윗했는데, 조바이든 대통령의 트윗은 2,900만 명이 리트윗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X의 엔지니어들은 알고리즘을 수정해 일론 머스크의 트윗이 가장 우선(first)적으로 보여지도록 수정했다. 일론 머스크의 행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비전과 방향성을 위해 수 억 명이 이용하는 플랫폼을 조작하고, 자신의 비전과 방향성만이 옳다고 말하는 플랫폼으로 변질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플랫폼 이용객의 사고 역시 권위 있는 한 개인의 비전과 방향성에 국한되어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알고리즘 조작으로 묵살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해 SNS를 탈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탈퇴 이후 대안이래봐야 또다른 빅테크가 운영하는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것 뿐이다. 현재 빅테크가 운영하는 플랫폼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설령 대안이 있다해도, 그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과 경영진이 제대로 감시받지 않고, 내・외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같은 문제는 또 발생할 것이다.  AI, 알고리즘, 플랫폼, 빅테크 비전에 대한 공론이 필요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AI 등 기술의 발전이 결코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공유된 번영 즉 모든 사람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기술의 발전은 소수의 배만 불리고, 그들의 의제와 비전만 유통되게 만든다며 아래처럼 경고한다.³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것은 공공선을 향해 멈추지 않고 전개되는 진보가 아니라 강력한 테크놀로지 리더들이 공유하는 비전이 발휘하는 영향력이다. 그들의 비전은 자동화, 감시, 대규모 데이터 수집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공유된 번영을 훼손하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들의 비전은 소수 지배층의 부와 권력을 증폭시키는 동시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는, 그리고 사회에서 담론의 강력한 게이트기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테크 업계의 억만장자와 그들이 말하는 의제에 홀려 있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새 제품과 알고리즘이 얼마나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뿐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을 위해 쓰이는지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빅테크가 만드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운용 방식은 사회에 이로울 게 없다. 생각과 사고의 확장을 막고, 편향적인 생각으로 매몰시키기며, 알고리즘과 AI를 통해 이런 모습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상관않고 말이다. 빅테크가 날로 강화하는 가운데 시민사회에 필요한 건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제안처럼, AI가 도대체 어떻게 쓰이고 있고,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시민과 기업, 정치 모두가 한데 모여 이야기하고 토론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기술 발전의 비전이 무엇인지 정립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다시 한나 아렌트의 말, 디지털 공론장은 가능할까? 안정감이 다양성의 장벽이 되고 있지는 않나? 플랫폼 스스로 “우리 조직은 민주적인가?” 질문해야 할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는 1974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늘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 결과는 당신이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If everybody always lies to you, the consequence is not that you believe the lies, but rather that nobody believes anything any longer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모두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저작들은 모두 사회가 진보하는 기반에 민주주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민주주의가 아닌 착취적이고 소수 엘리트의 지배 상황에서도 일시적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의미의 진보는 아니며 반드시 쇠락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행위는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 개인의 생각과 비전에만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성인데, 특정 개인의 생각과 비전에 머물도록 하는 건 그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가지는 아무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남을 신뢰하지 못하면, 안정감을 얻을 수 없고, 안정감을 얻지 못하면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진심과 사실을 말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대해 터놓고 말하고, 사람들을 마주할 수조차 없게 만든다는 말이다. 내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특정 개인의 생각이 쉽게 득세할 수 있다.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공론장에서는 안정감을 갖고 나의 생각과 의견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공론장을 운영하는 조직이나 플랫폼은 이 다양성과 안정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운영하는 조직 자체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과연 가능할까? 그것도 디지털에서?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공론을 말하는 플랫폼 역시 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에 맞는 콘텐츠가 가득하도록 플랫폼을 운영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플랫폼에도 그런 것을 선호하는 유저들이 모일 것이라 생각한다. 안정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안정감이, 생각이 다른 조직과 개인의 참여를 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환경 옹호 콘텐츠가 절대 다수인 플랫폼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들어올리 만무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결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 플랫폼이 되지, 다양한 의견들이 모여서 부딪히고, 새로운 대안이 나오는 공론장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짜 좋은 공론장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오히려 끌어와서 활발한 논의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해 X로 변경하고 난 뒤 보여준 모습은, 다양성을 가장한 개인적 선호를 확산한 것이었고,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는 독선이었다. 만약, 디지털 플랫폼과 기술을 이용해 공론장을 만들고, 확장시키겠다는 조직이 있다면, 우선 그들부터 다양성을 존중하고, 내부 의사결정이 민주적인지 살펴야 한다. 내부조직이 그렇지 않다면, 그 플랫폼 역시 일론머스크의 X처럼 될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공론장 운영조직 내부에서 의견이 다양하지 않고, 의사결정이 민주적이지 않다면, 일론 머스크의 X처럼 어느 한 사람의 비전과 방향에 맞게 플랫폼이 운영되고 결국, 사고는 갇히고, 우리 사회에 진짜 필요한 안건과 의제는 죽고, 그런 안건과 의제를 논의하는 공론장조차도 없어질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민주주의 부실성 역시 어느 조직에게나 있을 것이다.  플랫폼은 내부적으로 “우리 조직은 민주적인가? 우리 조직은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사회에 “우는 사회는 지금 민주적인가? 혹은 일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야 한다. 그런 내외부적인 질문과 점검을 통해 하지 않으면, 일론 머스크의 X처럼 플랫폼은 망가지고, 민주주의 역시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의 사고의 폭은 점점 좁아져,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무감각해져 소수의 의제와 안건만 중요해지고 이끌려가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빅테크와 그 경영진들이 기술이 발전이 우리에게 준다고 말하는 실체없는 비전에 눈이 멀어, 실제 벌어지고 있는 피해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의제와 안건은 정부든, 조직이든,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들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으로 논의되고 있는지,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물음을 던지고 확산시키는 데에 AI가 활용되고, 각자의 답을 모으고 토론하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플랫폼이고, 우리 사회가 필요로하는 디지털 공론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한길사/ 2016) p.349  2)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마리아 레사/ 북하우스/ 2022) p.17, 372 3) <권력과 진보> (대란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생각의 힘/ 2023) p.57, 517,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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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파괴의 청사진 : 트럼프와 Project 2025
트럼프, 에너지 장관으로 기후위기 부정론자 임명 취임도 하지 않은 트럼프의 행보가 연일 언론사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벌써부터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에너지 장관(Energy secretary)으로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 리버티에너지(Liberty Energy) CEO를 지명했다. 그가 CEO로 있는 리버트 에너지는 셰일가스 추출 전문 기업이다. 트럼프는 크리스 라이트를 지목하며 “미국의 에너지 독립을 이끌어냈으며 세계 에너지 시장과 지정학을 바꿔놓은 미국의 세일 혁명을 시작했던 인물”이라고 아낌없이 칭찬했다. 크리스 라이트가 에너지 장관임으로 임명되기 위해선 미국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하지만, 미국 상원 역시 공화당이 승리해 무리없이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 라이트는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링크드인(LinkedIn)을 통 “기후위기는 없으며, 위기는 기후 변화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퇴보적인 기회 억압 정책뿐이다”¹라고 말했다. 정치권이 기후변화를 빌미로 화석연료 기업을 억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것” 트럼프는 공화당 전당대회부터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 점에서 그가 기후위기 부정론자를 내각 인사로 임명한 건 특별할 게 없고, 오히려 자신의 공약을 더욱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가 전당대회에서 했던 기후 관련 발언과 공약 몇가지는 다음과 같다. 발언 “풍력은 녹슬고, 폐기물이 나오며 새를 죽인다. 풍력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에너지다.” “바이든의 파괴적인 발전소 규칙을 취소하고, 그가 만든 전기차 의무화를 종식시킬 것. “미래에는 모든 제조 공장, 데이터 센터, 반도체 시설과 조립 라인이 미국에서 건설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미국이 가장 낮은 에너지 비용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미국에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공약파리기후협약 탈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지, 중국에 대한 관세 부과,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 석유・석탄・가스 생산자에 대한 세금 감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승인 가속, 공공토지 석유 채굴, 핵시설을 포함한 수십 개 발전소 건설, 풍력 보조금 중단 외신 언론의 경우 트럼프 공약이 실행될 경우 환경적, 경제적 파장에 대해 분석한 기사를 연일 내놓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수출 타격 등 경제적 파장만 주목해서 보도하고 있다. 환경적이든, 경제적이든 실제 트럼프의 공약이 실행될 경우 파장은 클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은 환경에 미칠 영향이다. 트럼프는 “풍력은 가장 비싼 에너지이며, 미국이 가장 낮은 에너지 비용을 갖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대표적 재생 에너지인 풍력을 비싼 에너지라고 말하고, 셰일가스 회사의 CEO를 에너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그에게 가장 싼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라는 게 명확하다. 또한, “모든 제조 공장과 데이터 센터, 반도체 시설이 미국에 있고 싶어할 것”이라는 말은 화석 연료로 만들어진 에너지를 기반으로 미국 내 모든 제조 공장과 반도체 시설, AI 데이터 센터를 가동시키겠다는 말이다. 트럼프는 화석연료가 가장 싼 에너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환경적인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화석연료는 가장 값 비싼 에너지다. 에너지의 전 주기적 영향까지 고려했을 때 가장 싼 에너지는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다. 트럼프가 비싼 에너지라고 생각한 풍력은 가장 싸다. 에너지별 가격, 미국 원전 182$, 석탄 118$, 태양광 61$, 육상풍력 50$ 가격 경쟁력으로 봐도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여야 균등화력발전비용(Levelized cost of Energy Comparsion) 이란 발전소의 건설, 운영, 유지 보수, 연료와 연료비용, 폐기 등 모든 비용을 총 발전량으로 나눈 값이다. 즉, 같은 단위의 발전량당 어떤 에너지원이 가장 비싼지를 알려주는 지표로 발전소의 경제성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투자은행 LAZARD(라자드)가 올해 6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균등화력발전(LCOE) 기준 메가와트시 당 가장 비싼 전력원은 미국 원전으로 182$였다. 그 다음으로 높은 건 석탄으로 118$, 그 다음으로 지열 85$, 복합화력발전 76$, 태양광발전 61$, 육상풍력발전 50$였다. 가격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트럼프가 늘려야 할 건 석탄이 아니라 재생 에너지임을 알 수 있다. 트럼프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알고서도 일부러 모른척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공약집 어디에도 재생에너지를 늘리겠다는 표현은 한 글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가 내건 공약은 미국의 대표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The Heritage Foundation)’에서 2023년 4월에 발간한 ‘Project 2025(Mandate for Leadership)’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보수주의 싱크탱크 해리티지 재단, 기후변화 부정 해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성향의 민간 싱크탱크다. 그들은 1981년부터 보수성향 대통령 후보자 혹은 당선인을 위한 Mandate for Leadership(리더십을 위한 지침)을 발표하고 있다. 2025년에 발간한 보고서는 9번째 판이다. 해리티지재단은 “Project 2025 작성에 약 400명의 보수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보고서 발간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집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참여한 400명의 전문가 중 140명이 트럼프 집권당시 주요 요직을 차지했던 사람들로 구성됐고, 트럼프의 러닝 메이트였던 제이디 밴스(J.D Vance)가 프로젝트 2025 리더가 쓴 책의 서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물론 트럼프는 이에 대해 부인했고, 해리티지 재단 역시 트럼프와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일부 내용을 보면 트럼프의 공약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실행되면 환경적으로도 재앙이다 싶은 내용이 많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멸종 위기에 처한 종 보호법(ESA) 폐기 국립 기념물 폐기(National Monuments) : 국립기념물은 국립공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며, 미국 문화유산과 자연보호를 위해 지정한다 석유 및 가스 추출 극대화 대기청법 약화 환경 결정에 있어 지역 사회의 발언권 감소 화학회사 신뢰 강화 RA(인플레이션감축법) 완전 폐기와 청정 에너지 투자 무효화 기후변화 연구기관 12곳 폐기 900페이지가 넘는 내용을 일일이 다 볼 수가 없어서 관심있는 주제만 몇 가지 살펴봤는데, 이게 21세기 정책 제안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한숨이 나왔던 부분은 해리티지 재단의 제안 중 일부가 실제 트럼프의 공약으로 이행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IRA 법안의 폐기와 석유 및 가스 추출 극대화는 트럼프가 공약으로 말했고, 실제 이행할 것으로 보여지는 것들이다. 트럼프가 프로젝트 2025의 환경 정책을 이행하면 27억 톤의 탄소를 더 배출할 것 미국의 에너지 정책 기업인 에너지 이노베이션(Energy Innovation)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만약 트럼프가 프로젝트 2025의 환경 정책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행할 경우 오는 2030년까지 미국은 현재보다 27억 톤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게 된다. 이는 인도의 한해 전체 탄소 배출량보다도 많은 수치다. 가뜩이나 탄소 배출이 많은 미국이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하게 된다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로 지구 온도상승을 막자는 파리기후협약은 절대로 달성될 수 없게 된다. 또한, 미국이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다른 선진국들이 앞장서서 하지도 않을 것이다. 설령 미국 외 다른 나라에서 앞장서서 탄소를 감축시킨다 하더라도, 미국에서 추가되는 27억 톤을 전 세계가 추가로 부담해서 감축시켜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미국이 만든 탄소 부채를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배출하는 것도 줄이기 바쁜데, 남의 나라에서 배출하는 것까지 우리가 대신 감축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27억 톤이라는 숫자는 트럼프가 프로젝트 2025를 정책으로 이행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행하고 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트럼프 개인에게 달렸다. 27억 톤의 탄소 배출이 한낱 개인에게 달렸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해도 트럼프의 당선은 비극이다 미국의 대통령과 정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이 가진 막대한 경제력과 힘, 우리나라와의 이해관계도 있지만, 미국이 환경을 거스르는 정책을 이행하게 되면 그 부채를 전 세계가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하는데 딴 놈이 잘못해서 내 빚이 느는 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탄소 배출을 줄이고, 산업화 대비 1.5도 이하로 온도 상승을 막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일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도, 내가 줄이는 것보다 더 많은 배출을 누군가가 하게 되면 내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엄청 친환경적으로 산다는 말은 아니다.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탄소 배출을 줄이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민들이 친환경적으로 살 수 있도록 제도와 도시, 인프라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트럼프의 내각 구성을 보면, 자신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만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즉, 화석연료를 더 적극적으로 태우고, 기후변화와 위기가 없다는 회의론자들로만 구성되어 4년 내내 집권할 것이라는 의미다. 트럼프에게 직언할 사람도 없고, 공동체의 권한과 발언권을 축소하자는 해리티지 재단와 기후위기는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트럼프 주위에 있는 걸 보면, 프로젝트 2025의 청사진 대로 흘러갈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만들어 낼 막대한 환경 부채를 기후위기는 현실이며, 정부 정책과 산업 경영 방식, 개인의 삶이 바뀌어야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더욱 더 지치게 할 것 같아서 두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트럼프의 당선은 비극이다. 이 글을 미국인이 볼리 없겠지만 만약 본다면 정말 아래 사진처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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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당선, 빌 게이츠의 비전, 대런 아세모글루의 제안
기후 위기 해결에 기후 기술(Tech)은 필수 기술은 대개 영리 기업이 주도해서 만든다. 오픈AI 처럼 비영리 단체가 만드는 경우도 있겠으나, 이는 극히 드문 사례다. 무엇보다 비영리를 표방한 오픈AI 조차 영리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비영리의 구조로는 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개선을 위한 사용자 확보가 쉽지 않다. 안 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영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히 영리 조직이 만들어 내는 기술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끔보면 영리는 무조건 적이고, 없어져야 하고, 그들이 만드는 기술조차 무조건적인 허상이다라고 보는 극단적인 시각들도 있던데 나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현대 환경 문제 해결에는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표적 환경 문제는 탄소 배출이다. 탄소 배출 제로(Ø)를 의미하는 넷제로가 국제사회 목표 중 하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량 중 50%는 현대에 없는 기술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기후 기술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린피스나 세계자연기금(WWF),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가 그런 기술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애초 그런 기술 개발이 그들의 역할도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기업을 감시하고, 그들이 만드는 환경 오염을 고발하고, 시민들의 인식을 깨우고, 기업 변화에 동참하도록 촉구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후 스타트업의 기술이나 투자 동향 등에 관심을 두고 보는 편이다. 어떤 기업이 어떤 기술을 개발했고, 어느 투자자 혹은 투자 기관으로부터 어느정도 금액을 투자 받았는지, 그 투자사의 포트폴리오는 뭔지, 왜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는지, 투심 보고서는 없는지 등을 본다. 글로벌과 국내 모두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기술 낙관론자도 아니다 빌 게이츠, “탄소만 제로(Ø)로 만들면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기술 낙관론자 혹은 찬양론자는 아니다. 기술이 구원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술 낙관론자들에게 노아의 방주와 방향키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술 낙관론자들은 기술이라는 배에 사람들을 태우고 스스로가 방향키를 쥔 선장이 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빌 게이츠(Bill Gates)다. 그가 기술적 업적을 이룬 것은 맞다. 또한, 그가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인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가 만든 윈도우와 익스플로어로 인류는 전에 없던 정보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현재의 메타, 틱톡, 유튜브도 결국 그의 혁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을 쓰고, 인터넷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그 혁신의 수혜자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혁신으로 인해 빌 게이츠는 막대한 부자가 됐다. 10년 연속 세계 최고 부자 순위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모두가 그의 말에 주목했다. 다음엔 뭘까. 다음엔 뭘까. 이러한 호기심과 기대감, 또 그가 가진 막대한 부는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했다. 그가 여름에 추천하는 책은 바로 번역되어 출판되거나 베스트 셀러가 된다. 그의 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2020년 10월 <How To Avoid A Climate Disater>를 발간했다. 한국에선 2021년 2월에 곧장 번역 출간됐다. 그는 책을 통해 각각 산업이 배출하는 탄소 배출량을 소개하며 그것이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 배출량을 제로(Ø)로 만드는 기술 개발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 기술들을 개발하면 탄소 배출량을 제로(Ø)로 만들 수 있고,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기술들은 대략 이렇다. ◼︎ 탄소 배출 없이 생산된 수소, 전자 연료, 차세대 바이오 연료 ◼︎ 제로 탄소 시멘트, 제로 탄소 철강, 제로 탄소 플라스틱 ◼︎ 차세대 핵분열, 핵융합 ◼︎ 탄소포집, 인공 고기, 가뭄과 홍수에 강한 식물・작물 그는 탄소 배출량 “제로를 달성하는 데는 정부 정책, 첨단 기술, 혁신적인 신제품, 그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제품을 전달하는 민간 시장의 능력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해야 하는, 보다 거시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¹고 말했다. 그는 몇몇 사고로 시장의 혁신과 능력 개발 기회를 저버리는 것을 비판한다. 대표적으로 원전이다. 그는 “원자력은 자동차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어떤 화석연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동차의 문제점들을 개선한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문제를 하나씩 분석한 다음, 혁신으로 해결하며 개선해야 한다.”¹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소련의 체르노빌,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은 맞지만,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자체를 중단시켰다며 혁신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 혁신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는 죽어가던 스리미일섬의 원전을 살렸다. 마이크로소프트, 스리마일섬 원전 재가동에 2조 1천 억 원 투자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 SMR 기공 시작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콘스텔레이션 에너지와 2028년부터 20년간 전력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16억 달러(약 2조 1천억 원)이다. 계약 이유는 급증하는 AI 데이터센터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8년부터 원전으로 생산된 에너지를 공급받을 예정이다. 콘스텔레이션 에너지는 미국 스리마일 섬에 원전 1호기를 보유하고 있다. 원래 2호기까지 있었으나, 1979년 3월 미국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해 2호기 가동이 중단됐다. 당시 주민 10만 명이 긴급 대피해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후 1호기는 계속 가동을 하다가, 2019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동이 중단됐고,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계약으로 재가동 하게 됐다. 빌 게이츠의 책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친원전주의자다. 그는 2008년에 원자력 발전 회사인 테라파워라를 설립했고, 현재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으로 활동 중이다. 테라파워는 지난 6월 18일, 미국 와이오밍주 케머러에서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4세대의 첫 삽을 떴다. 빌 게이츠는 해당 기공식에서 “안전하고 풍부한 탄소제로 에너지를 향한 큰 발걸음"이라며 "미국 에너지 미래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공을 시작한 SMR의 완공과 가동 목표는 2030년이다. 테라파워는 “완공되면 최대 500MW(메가와트)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최대 40만 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전략량”이라고 설명했다. 위험한 빌 게이츠의 프레임, 탄소 배출만 봐라 위험한 빌 게이츠 의제, 탄소만 제로(Ø)면 된다 위험한 빌 게이츠의 비전,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 탄소 배출 제로(Ø)사회 빌 게이츠가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탄소 배출’에 한정되어 있다. 광대한 기후위기 문제 중 탄소 배출만 보이는 프레임을 가진 것이다. 제한된 프레임에서는 제한된 의제만 나온다. 그가 제시한 기술과 행보에서 탄소 제로(Ø)를 강조하는 이유다. 그에게 환경 문제는 탄소 배출만 제로(Ø)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와 테라파워가 스리마일 원전과 SMR을 통해 안정적으로 무탄소 에너지를 공급받고, 공급한다면 빌 게이츠의 말에 더욱 힘과 권위가 생길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프레임 안에서 기후위기의 원인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전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전력난을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탄소 제로(Ø) 프레임과 그의 솔루션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프레임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를 기반으로 그가 말했던 무탄소 철강과 시멘트, 플라스틱 개발에 더욱 앞장설 것이다. 위험하다. 빌 게이츠의 주장은 공장 연기만 없으면 환경문제는 해결된 거다라는 말과 같다. 공장에서 나오는 오폐수, 그로 인한 수질 오염, 수중 생물 사망, 토지 오염, 인근 숲 생태계 파괴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굴뚝 연기가 나지 않으니, 그 연기가 나지 않는 공장은 무수히 지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장과 그 공장에서 만드는 생산품에 사용되는 물질 발자국과 그 과정에서 파괴되는 생태계는 그대로 둔채 말이다. 빌 게이츠의 비전은 공공선이 아니다 빌 게이츠의 프레임과 의제가 위험한 이유는 탄소만 제로(Ø)면 철강, 시멘트, 플라스틱, 바이오 연료, 인공 고기 등을 무한정 생산하고 소비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른 원인들을 지워버린다. 탄소만 제로(Ø)면 계속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활을 멈추지 않아도 되니 인류에게 도움이 된는 일종의 공공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하는 것이 인류에게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빌 게이츠의 비전은 공공선이 아니다. 빌 게이츠가 원전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건 인류의 전력난이 아니라, 그저 AI 발전에 필요한 전력 공급 문제일 뿐이다. 그저 자신의 이상과 비전인 무탄소에 국한하여 기후문제를 기술 혁신에만 의존해 해결하고, 그 기술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원전을 끌어들인 것 뿐이다. 이처럼 빌 게이츠 같은 기술 낙관론자들은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추진한다.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기술과 혁신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전제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어떻게든 기술을 개발하려고 한다. 또한, 그 기술의 실증을 성공시켜 자신의 말의 권위를 부여하고,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인식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프레임과 그 의제만 해결하면 된다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빌 게이츠가 책, <팩트풀니스(FACTFULNESS)>를 미국 대학교 졸업생 전원에게 선물한 건 이미 유명하다. 책은 우리의 인식과 다르게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빌 게이츠는 팩트풀니스 리뷰에서 “팩트풀니스는 환상적인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Factfulness is a fantastic book, and I hope a lot of people read it)”고 말했다. 팩트풀니스는 편협한 근거만을 취사 선택해 세상이 더 좋아지고 있는 왜곡된 시야를 만든다고 비판받는 책이다. 그는 팩트풀니스 뿐만 아니라,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 역시 전 세계 모든 대학생이 볼 수 있도록 eBook을 무료로 공개했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기후재앙을 피하는 데는 기술과 정책에 엄청난 혁신이 필요하며, 젊은 사람들이 특별한 역할을 해야 한다” 라며 “제로 배출은 인간이 한 일 중 가장 어렵겠지만, 나는 낙관적이다.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동참한다면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다”*며 책 선물 이유를 말했다. 두 선물을 보고 개인적으로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해 탄소 제로(Ø)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은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에 기술해 놨으니, 이 기술들을 개발해 <팩트풀니스>의 주장처럼 세상을 더 좋게 만들자”고 말하는 듯이 들렸다. 이런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영리, 비영리, 학생, 어른 할 것 없이 빌 게이츠에게 매료 됐다. 국내 환경단체 대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협소한 비전은 위험하다. 더 많은 담론을 만들고 네러티브를 바꿔야 한다.” 202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우리가 하나의 아이디어나 협소한 비전에 고착되어 있다면, 많은 경우에 이것은 선택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의제 설정력과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아이디어와 비전을 우리에게 부과했기 때문이다.”² 라고 말했다. 또한, “이 상황을 고치려면 내러티브를 바꾸어야 한다. 즉 현재의 비전을 분석해 이것이 유발하는 비용을 드러내고 테크놀로지의 미래에 대해 지금과 다른 대안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담론과 관심을 할애해야 한다.”²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책을 통해 사회적 의제와 비전의 설정을 사회적 권력이 가진 사람들이 주도했고, 그 비전 아래 발전한 테크놀로지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배만 불렸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더욱 확장시키고 넓히기 위해 다른 힘있는 집단과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의 권력자들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굉장한 부를 소유하고, 그 부를 기반으로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큰 발언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²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하나의 아이디어’를 네트워크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확장시켰고, 그것을 비전으로 만들어 국민들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고 설득 권력을 발휘해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수 권력자가 만들고, 확장시키고, 설득시킨 프레임과 의제로 개발된 기술과 혁신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렇게 해서 배가 부른 건 그 프레임과 의제를 만든 소수 권력자들 뿐이었다고 말한다.  현대 AI의 발전 역시 이런 양상으로 간다는 게 그들의 경고다. 소수 권력자가 만든 프레임과 의제에 의문을 갖지 않으면, 불평등과 환경 문제의 악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소수가 만든 프레임과 의제, 비전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과 그 프레임 안에서 보여지는 세상이 전부이고, 자신들이 만들려고 하는 기술만이 유일한 대안인냥 말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밀어 붙이고 싶은 프레임과 대안일 뿐.  실상 인류에게는 그들의 프레임과 대안을 넘어서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택지가 있으니, 선택지들을 두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담론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비전, 위험한 사회, 위험한 시민 2024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오는 2025년부터는 트럼프가 다시 미국의 대통령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특이한 점은 실리콘 밸리였다. 실리콘 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텃밭 지역으로, 이 지역 기업의 수장들 역시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실리콘 밸리의 다수 억만 장자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실리콘 밸리 vs 실리콘 밸리’ 혹은 ‘오픈AI・MS・아마존 vs 메타・애플・구글’ 이라며 대선을 바라보기도 했다. 민주당 해리스 지지자들은 AI 속도 규제를, 공화당 트럼프 지지자들은 AI 혁신에 속도를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실리콘 밸리 억만 장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 신기했다. 이는 곧 내부 직원의 반발과 소비자 반발을 동시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017년 우버(Uber)의 창업자이자 CEO였던 트레이스 칼라닉(Travis Kalanick)이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에 합류했다가 20만 명의 소비자가 탈퇴하고 우버 직원들이 반발해 사퇴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실질적 위험에도 실리콘 밸리의 일부 거물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건 AI 발전 규제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AI 규제 철폐를 주장했고, 이것이 일부 실리콘 밸리 억만 장자들의 이해관계에 더 맞았던 것이다. AI 발전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고,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승리는 모두가 알듯이 트럼프이고, 향후 AI 규제는 제한 없이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여파는 국내에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경쟁에서 뒤쳐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아마 이에 대한 담론을 준비할 새도 없이 속도가 붙을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비전에 사회가 단단히 홀려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비전은 기업계와 테크 분야의 지배층이 자신의 부와 정치 권력, 사회적 지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계획을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된다. (권력과 진보/ p.50) 지배층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 곧 공공선에도 최선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고결한 경로가 모종의 고통을 유발한다 해도 진보를 위해 충분히 치를 가치가 있는 비용이라고까지 믿게 될 수도 있다. 고통을 겪고 비용을 떠맡게 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권력과 진보/ p.50) AI가 인류에게 어떤 혜택과 폐해를 가져올지 아직 그 누구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폐해는 일부 사람들이 지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짊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산업혁명의 혜택으로 경제가 발전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인류 경제가 더욱 획기적으로 커지고 전에 없던 생활을 누리는 것은 맞지만, 그 비용인 불평등과 기후위기 역시 함께 겪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많은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소수 빅테크와 경영진,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갇혀서, 그들이 하는 것이 공공선이라는 비전에 이끌려 가는 게 아니라. AI를 비롯한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개발하고, 활용되어야 하는지 이야기 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협소한 비전으로 갈지 더 포용적인 무언가로 갈지도 “선택”이다.”² 개인적으로 기술 낙관론자들이 만들어 가는 비전은 위험한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이 아닌 힘있는 한 사람이 원하는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전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그런 비전을 설파하는 소수에게 더 많은 발언권과 권위,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회는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런 비전과 사회를 멀뚱히 서서 지켜만 보는 시민은 더더욱 위험한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비전과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지극히 힘과 권력이 없는 시민일 뿐이다. 대런 아세모글루의 제안처럼 일부 기술 낙관론자들의 프레임과 의제, 비전에서 벗어나 더 많은 대안에 대한 담론을 활발히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게 트럼프 시기에 빅테크를 마주할 시민들의 의제라고 생각한다. 1)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 (빌 게이츠/ 김영사/ 2021) p.19, 126 2) <권력과 진보>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생각의 힘/ 2023) p.51, 111, 151 * 전문을 다소 축소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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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에 규제를 더하자
11월 남보다 1원이라도 더 싸게 최대 80% 할인 11월이 되자 유통 기업 대부분이 대규모 할인 행사를 내놓고 있다. 마켓컬리는 최대 80% 할인 행사를 발표했고, 쿠팡은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가전제품 최대 75% 할인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마트, 신세계 백화점, SSG닷컴, G마켓 등을 소유한 신세계 그룹은 SSG(쓱)데이 행사를 개최해 대규모 할인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롯데그룹 역시 땡큐절을 개최해 최대 70% 할인을 펼치고 있다. 일부 대형마트에서는 할인 행사를 맞아 오픈 전부터 줄을 서고 있고, 할인 제품이 금새 동나는 상황도 벌어졌다. 경기도 부천의 한 이마트에서는 계산을 위해 30분을 기다리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만큼 소비자 관심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소비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게 해야 하는 유통가는 그 관심에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유통가의 대규모 할인 행사는 경제적으로 당연하다. 추석과 연말 사이 전통적 비수기 11월, 블랙 프라이데이와 광군제 여파로 할인 실시 11월은 유통가에서 전통적 비수기에 해당했다. 소비자들이 9월 혹은 10월 추석에 대규모 소비를 하고, 또 연말에 대규모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규모 소비 기간 사이에 낀 11월은 소비자들이 지갑을 잘 열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조는 해외직구가 활성화되자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11월 넷 째주)와 중국의 광군제(11월 11일) 시기에 대규모 할인 행사가 이루어지고, 국내 소비자들이 해외 직구를 늘리자 국내 유통 기업들이 선제 대응을 하는 것이다. 선제 대응을 하지 않으면 국내 소비자를 미국과 중국에 뺏기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대규모 할인 정책으로 국내 소비자를 자사에 묶어두려는 것이다. 해외 업체로 인한 국내 유통업계 피해는 현실 해외 직구가 활성화되자 국내 이커머스 등 유통 업계 실적과 이용객이 줄어드는 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023년 테무와 알리가 국내 서비스를 본격화 한 뒤 중국발 해외 직구 규모가 70% 증가했고, 알리와 테무의 국내 이용자 수도 꾸준히 증가했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에 따르면, 2024년 2월 기준 알리는 전년 동월 대비 이용자 수가 ▲463만 명 증가했고, 테무는 ▲581만 명 증가했다. 반면, 국내 이커머스 업체였던 11번가는 ▼208만 명 감소했고, G마켓은 ▼102만 감소했다. 위메프는 ▼116만 명 감소했고, 티몬은 ▼61만 명 감소, GS Shop은 ▼5만 명 감소했다. 반면, 국내 소매판매액지수는 10분기 연속 감소 추세다. 소매판매액지수는 2020년을 기준(0)으로 소매업의 실제 월간 판매액을 지수화한 것이다. 국내 소매 판매지수는 2022년 1분기 ▲+2.6% 이후 줄곧 하락하고 있다. 2022년 2분기 ▼-0.2%, 3분기 ▼-0.9%, 4분기 ▼-2.3%, 2023년 1분기 ▼-0.8%, 2분기 ▼-0.7%, 3분기 ▼-2.7%, 4분기 ▼-1.9%, 2024년 1분기 ▼-2.1%, 2분기 ▼-2.9%이다. 3분기는 잠정 ▼-1.9%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소비자물가지수는 111.6이었다. 이는 2020년에 비해 약 10% 상승한 수치다. 물가 상승률은 2021년 ▲+2.5%, 2022년 ▲+5.1%, 2023년 ▲+3.6%였다. 물가상승률은 전년도 대비 상승률을 말한다. 통계 지표는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소비 둔화가 벌어지고, 그에 따라 대폭 할인 제품을 찾는 성향이 증가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물가상승률이 낮아지지 않는 한, 이 추세는 강화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소비자는 언제든 더 싼 곳을 찾아 떠날 수 있다. 해외 직구 활성화는 국경마저 넘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물가 해법은 더 싼 제품이지, 소비 감소가 아니다? 소비와 할인 정책, 광고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하는 이유 소비자들은 국내 물가 상승의 해법을, 해외의 더 싼 제품에서 찾았다. 결코 소비 감소가 아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몇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① 소비 감소 자체는 불가능한 것일까? 국가 경제를 생각해서 소비하는 건 아닐텐데 ② 소비자가 소비를 일부러 줄이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주변 환경이 소비자로 하여금 소비를 멈추지 않도록 만든 것일까? ③ 소비를 줄이다가 주변 환경에 의해서 멈추게 된 것은 아닐까? ④ 소비가 개인의 의지에 맡겨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나 빼고 모두가 다 소비하면 개인이 그걸 견딜 재간이 있나?  ⑤ 고물가의 해법이 싼 제품이 아니라, 소비 감소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절한 대안이 있을까? ⑥ 경제도 결국 인간이 설계한 시스템이고, 생산과 소비 역시 마찬가지인데. 새롭게 설계할 수는 없을까? 이 설계도에 필요한 건 뭐지? 재원? 정책? 제도? 의지? 분배? 균형? 역기능은 없나? 경제 둔화에 대한 반발도 있을텐데? 무엇보다 공상과학 같은 말이라고 들리지 않을까? 일론 머스크가 화성 간다는 말도 믿는데 이걸 못 믿을까? ⑦ 지금 경제를 이끌고 가는 운전자가 누구지? 그 운전자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밖의 풍경은 어떤지 조차 못 보고(혹은 못 보게) 있는 건 아닌가? ⑧ 환경 비용을 제품 가격에 포함시키면 분명 효과는 있겠으나, 결국 서민의 삶은 더욱 궁핍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프랑스 노란조끼처럼? ⑨ 필요에 의해서,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게 하는 방안은 없나? 필요와 욕구의 차이는 뭐지? ⑩ 이게 되는 건가? 이런 고민을 한 이유는 당연히 환경 때문이다. 현재 기후위기 문제는 소비 중심의 추출 자본주의가 원인이다. 모든 생산품은 지구의 물질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즉, 지구 어딘가를 파헤쳐서 만든 제품이라는 의미다. 값싼 대규모 할인 제품은 그 할인율 만큼이나,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일전에 작성한 <알리와 테무의 초저가엔 기후위기가 빠졌다>에서 이 부분을 다뤘었다. 물질 발자국과 경제성장이 정비례하며, 이는 곧 경제가 지구 파괴를 통해 성장했음을 다룬 내용이었다. 또한, 값싼 제품 공세는 환경 파괴를 부추기고, 그런 공세가 계속되는 한 기후위기와 물가상승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결코 환경주의자여서가 아니다. 경제를 후퇴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히려 기술 없는 문제 해결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업이 기술 개발과 환경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제도적으로 그런 기후기술 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성장시키고, 그들을 환경문제 해결의 도구로써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2021년에 발표한 ‘Net Zero by 2050’ 보고서에 따르면, 넷제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온실가스 감축량 중 거의 50%는 현재 개발중이거나 실증 단계인 기술에 의해 달성 가능하다. 즉, 현재 없는 기술을 전적으로 개발하고 보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기업들도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업은 지구 생태계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 그 경영은 착취적이며 선형적이다. 일부 기업이 순환경제를 말하지만, 순수한 순환경제는 새로운 물질 투입이 발생하지 않고, 생산량 자체가 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무언가를 더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이다. 이는 곧 연필 한 자루로 신규 물질 (나무, 흑연, 고무, 금속 등) 투입 없이 같은 크기의 연필 두 자루를 만들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말 자체가 모순이다. 이처럼 기업 경영은 그 생태계 자체를 갉아 먹으며 성과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환경문제는 너무 갉키고 뜯겨서 회복할 여력 조차 없는 지구의 상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지구 생태계 자체를 회복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고, 기업을 그 회복의 도구로써 사용해야 한다. 기업을 위해서도, 소비자들을 위해서도 소비 문제와 이를 부추기는 할인과 광고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지구 생태계 파괴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소비 중단은 시작도 지속도 어렵다 때문에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 정답은 아니지만, 현재 지식과 시야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제도다. 국가가 제도를 통해 할인과 과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를 규제하고, 수리와 재활용, 재사용을 장려하는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장시간 만들고, 이를 통해 소비 지향 환경이 아닌, 소비 지양 환경을 만들어야 현재와 미래 소비자 모두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소비자 개개인의 삶의 전환도 필요하다. 레크레이션 강사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참여를 유도해도, 참가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강사만 맥이 빠질 뿐이다. 하지만 강사마저 없다면 레크레이션은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레크레이션 강사도, 참여자들도 여기서 얻는 효능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레크레이션 강사에게 확실한 사례비를, 참여자에게는 즐거움 등을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제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 자체로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환경 속의 인간(PIE, Person In Enviroment)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인간 행동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다는 개념이다. 때문에 특정 인물의 (문제)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그가 과거에 어떤 환경(물리적, 심리적, 사회적)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성장했는지 보고, 행동 변화를 위해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어마어마한 광고와 할인 정책에 둘러 쌓여 있다. 마트나 편의점을 가면 1+1 혹은 2+1 제품은 흔히 볼 수 있다. 광고들 역시 각종 할인율을 자랑하며 제품 구매를 알게 모르게 유도한다. 이런 환경에서 소비를 멈추지 못하는 건 일말 당연하다. 안 사면 바보고, 멍청한 것이 된다. 이런 환경에선, 소비 중단의 시작도, 지속도 어렵다. 한번 할인을 시작하면, 기업은 할인을 멈출 수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할인 광고 이러한 할인 정책은 기업에게도 이롭지 않다. 한번 1+1, 2+1 등 할인 정책을 시작하면 소비자들은 그러한 패턴에 익숙해 진다. 가격 경쟁력으로 소비자를 끌어 모았다면, 기업은 가격 경쟁력을 계속 유지해야지만 소비자를 묶어둘 수 있다. 때문에 기업들이 할인 경쟁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 할인을 결코 멈출 수 없게 된다. 이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다. 죄수의 딜레마란, 자신의 이익만 고려하다가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가 유발되는 것을 말한다. 두 개 경쟁 기업이 각각 광고를 하지 않으면 50억 씩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수익을 더 얻기 위해 광고를 집행하면 상대방 역시 동일하게 광고를 집행하게 된다. 그럴 경우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각각의 이익이 40억으로 줄게 된다. 광고비 10억 만 지불하고, 실질 소득은 줄어드는 형국이 벌어지는 것이다.¹ 득 될 게 없는 현상은 소비자마저도 그 할인에 익숙하게 만들어 기업 스스로를 할인과 소비자 인식의 철창에 가두게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오히려 할인과 광고를 줄이는 것이 기업과 소비자, 환경에게 더욱 이득이다. 기업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고, 소비자는 할인에 유혹되어 불필요한 소비와 낭비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선의에 기대어 자발적으로 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어떤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나 문제는 어떤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가이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재활용과 재사용, 수리 광고 규제에 대한 선례다. 아주 간단히만 소개한다. ① 프랑스 계획된 소비법(2014), 노후화 불법(2015)과 수리 이용자 지수(2021) 도입 계획된 노후화 벌금 30만 유로, 3년 간 매출액의 5% 벌금 소비재 보증 기간 6개월 -> 2년 연장 제품 수리 지수 가능 지수 수치 표시 프랑스는 지난 2015년 녹색성장을 위한 에너지 전환법을 제정했고, ‘계획된 노후화’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계획된 노후화는 기업이 제품 설계 당시 특정 시기가 되면 의도적으로 성능을 낮추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신규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 법에서는 계획된 노후화를 “마케팅 담당자가 교체율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든 기술”로 정의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발각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00 유로의 벌금형에 처한다. 이때 벌금 액수의 경우 “위반으로 인해 발생한 이익에 비례하며, 계획된 노후화가 알려진 날짜 기준 최근 3년간의 연간 매출액을 기준으로 계산된 평균 연간 매출액의 5%까지 증가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계획된 노후화를 법제화 하도록 이끈 건 프랑스의 시민단체인 ‘HOP(Halte à L'Obsolescent Programmée, Stop Planned Obsolescent)’다. 이들은 2017년 애플이 제품 설계에서 계획된 노후화를 의도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일명 배터리 게이트 문제였다.  당시 애플이 특정 아이폰 모델의 배터리 성능을 저하 시켰고, iOS 업데이트 시 배터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최종 승소했다. 애플은 2,500만 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한편, 애플은 “소비자가 제품을 수리할 경우 더 위험하다”라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수리할 수 있게 하는 법안 폐지를 로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HOP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애플을 주목하고 있다. 애플이 계획된 노후화를 계속 진행할 경우 이에 대한 소송을 걸고있다. 2022년 12월 애플이 또다시 계획된 노후화로 제품을 설계하자 소송을 걸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법원은 애플 배터리 게이트 사건 당시 애플 측의 손을 들어줬다. 또 한가지는 수리 용이성 지수 표시다. 이는 소비자에게 해당 제품이 얼마나 수리가 가능한지 표시하는 것이다. 10점 만점으로 표시되며 현재 스마트폰,  세탁기, 노트북, TV, 전기 잔디 깎는 기계 등 5가지 제품 유형에 대해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규정했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해당 제품을 얼마나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알리는 것이다. 제조업체는 자사 제품 수리 용이성 지수를 세부 항목별로 측정하고, 이를 온라인에 게시해야 한다. 만약 소비자가 정보를 원할 경우 소비자에게 15일 이내에 무료로 알려줄 의무가 있으며, 판매자에게도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유통업자도 표시 책임이 있으며, 제품 판매 시에 가격 옆에 소비자가 쉽게 알 수 있도록 표시해야 한다. ② 스웨덴 수리 VAT 감소 기존 25% -> 12>#/p### 백색 가전의 경우 소득세 환급 수리 저항성 감소 수리 용이성 지수를 표시한다고 해도, 만약 수리 비용이 비싸다면 소비자가 쉽게 수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수리 비용이 기존 제품 비용의 30%를 넘는다면 수리를 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있다. 이렇게 가격에 따라 수리를 꺼리는 것을 ‘수리 저항성’ 이라고 한다. 수리 저항성을 낮추기 위해선 수리 비용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스웨덴은 수리 장려를 위해 제품 수리 시 VAT를 25%에서 12%으로 절반 줄였다. 또한, 백색가전을 수리 할 경우 소비자에게 소득세 환급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혜택에 대해 스웨덴의 부재무장관 Per Bolund는 “사람들이 무언가가 고장났을 때 수리하는 것이 저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품질 제품을 구매하기가 더 쉬워진다” 라며 “수리를 확대하면 실제로 노동 시장 확대와 실업 감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리 서비스는 종종 높은 기술을 요구하지만, 그렇게 높은 교육 수준은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실업 중인 노동력 중 혜택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③ 프랑스 34% 이상 할인 금지 소매업자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법안 다국적 기업과 소규모 기업의 불공정 경쟁 방지 소비 감소의 영향도 있을 것 프랑스는 2023년 3월 1일부터 모든 할인마트점에서 34% 이상 할인을 금지했다. 이는 곧 1+1 할인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주요 해당 제품은 식기 세척액, 표백제, 다목적 세척제 등 가정용 청소 제품, 샴푸, 치약, 탈취제 등 개인 관리 제품, 메이크업, 향수, 스킨케어 등의 미용 제품, 물티슈, 기저귀, 이유식 등 아기용 제품, 애완동물 사료, 깔짚, 장난감 등 애완동물 관련 제품 등이다. 법안의 주요한 이유는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중소 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중소기업이 다국적 기업과의 할인 경쟁에서 이길 수 없고, 마진이 남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중소기업과 소규모 생산 업자들이 까르푸(Carrefour)나 리디(Lidi)같은 프랑스 내 다국적 기업과 불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설령 중소기업을 위해서 실시한 법안이라고 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1 자체가 소비자에게 이득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게 된다. 하나만 사고 싶어도 두 개를 사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불필요한 소비다. 할인율 제한은 이를 방지해준다. 또한, 양질의 제품(예를 들면 유기농 제품 등)을 생산하는 업자들이 대형 마트와 가격 경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유기농 제품은 그 자체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만약, 할인율을 제한하면 가격 경쟁 싸움이 되고 점차 더욱 양질의 제품을 소비자가 소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대개 유기농 제품 등은 지역에서 생산해서 유통 과정이 짧아 탄소 배출도 그만큼 준다. 그것 자체로 환경적으로 더 이로울 수 있다. 어느 광고인의 고백,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영국 스코틀랜드 태생의 미국 광고인이다. ‘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의 창립자이며, 1920년 대 이후 광고계의 번영을 이끈 ‘현대 광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저서들은 광고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여겨진다. <광고 불변의 법칙>, <어느 광고인의 고백>,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 등이다. 그는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에서 광고와 할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속적인 가격할인 정책은 소비자가 제품에 자부심을 갖는 것을 저해한다. (p.75) 당신의 가족이 읽지 않았으면 하는 광고는 만들지 마라. 당신은 당신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부인에게도 거짓말하지 마라. 즉 남의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제품에 관해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을 기소할 정부에 걸리던지, 당신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을 처벌할 소비자에게 걸리게 될 것이다. (p.212) 사실을 말해야 한다. 소비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당신의 부인이 바로 소비자다. 단순한 슬로건이나 지루한 형용사로 어떤 것을 구매하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p.220) 당신의 가족들이 읽기 싫어하는 광고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제품은 정직한 광고로도 판매할 수 있다. 제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제품을 광고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p.221) 광고는 품질의 보증이다.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여 제품의 우수함을 밝히고 소비자들이 한결같이 품질이 높은 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든 회사들은 제품의 품질을 쉽게 떨어뜨리지 못한다. 쉽게 사람들은 잘 속는다. 하지만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p.330~331) 데이비드 오길비는 팔리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고 말했다. 제품 구매로 이어지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는 것이다. 또한 오길비는 제품 자체의 품질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금방 쓰고 버릴 싸구려 제품은 광고하지도 만들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기업이 제공하는 무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제품을 살지 말지 결정한다. 일부 기업은 이를 악용해 비용은 감추고, 혜택만 강조한다. 그 혜택이 비용보다 더 나은 경우는 없다. 너무나도 많은 광고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다. 일부 사실이 담긴 거짓을 말이다. 또한, 현대 “광고는 언제나 소비가 만족을 가져다줄 것이라 약속한다.”² 하지만, 광고의 대부는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을 속이는 광고가 아니라, 사실이 담긴 광고 말이다. 그는 이를 위해 광고 기획자들이 광고하려는 제품을 반드시 사용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제품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제품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제품에 하자가 있다면 결코 광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고주에게도, 광고사 자신들에게도 무엇보다 그 제품을 이용할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사람들 모두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제품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말하는 광고 제도 역시 마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해당 제품 생산에 필요한 물질은 어디서 생산됐고,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어디에서 어디로 유통됐고, 어느 차량을 통해 현재 매장까지 왔는지, 그 과정에서 배출한 탄소와 지급된 비용은 어느정도인지 말이다. 또한 이러한 광고를 하는 곳에 소비자 선택권을 확실히 보장했다는 의미로 세재 혜택 등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디컨슈머가 될 필요가 있다 디컨슈머란,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를 말한다. 신규 제품을 구매하기 보다 수리하고, 재활용 하고, 재사용 하고, 중고를 구매하며 최대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을 말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디컨슈머가 필요하다. 또한, 만연한 소비문화에 폐기도 필요하다. “소비문화의 근본적 특징은 부가 더이상 안녕을 증진하지 않고 훼손하는 지점을 흐리고 몽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² 흐려진 시야를 교정해서 제대로 본다면 입지 않고 옷장에, 침대에 뒹귈거리는 옷과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식자재가 냉장고와 찬장에 쌓여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소비 문화 폐지를 위해선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디컨슈머 사회가 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어려움 예를들어 성장률 저하 등을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한 논의 역시 진행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선 그런 논의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 같다. 정부 차원이든 개인 차원이든 말이다. 부디 그런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활발히 논의되고 공론화 되면 좋겠다. 1) <협동의 경제학> (정태인・이수연/ 레디앙/ 2016) p.81~82 2) <디컨슈머> (J.B 매키넌/ 문학동네/ 2023) p.145,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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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와 SMR의 선순환, 이걸 우선 논의해야 한다
SMR(소형모듈원전) AI 시장 친환경 에너지로 낙점 최근 1주일 남짓 신문에는 원전을 다루는 기사가 많았다. 2024년 노벨상 과학분야를 AI(인공지능)가 휩쓸면서 관심이 더 증폭된 듯 보인다. AI가 사용됨에 따라 데이터 센터 확충이 필요해지고, 전력 사용량 폭증이 예상되니, 24시간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친환경' 에너지인 원전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사들의 핵심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목받는 건 SMR(소형모듈원자로)이다. SMR은 작게 축소한 원자로다. 기존 원전대비 발전량은 작지만, 크기가 기존 원전대비 3분의 1수준으로 작고 안정성과 가격 경쟁력은 더 좋다고 평가 받는다. 그동안 AI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것이 '전기'였다. 익히 알려진대로 AI가 사용하는 막대한 전기와 AI가 생산하는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이터센터가 사용하는 전기량은 상당하다. 이는 국가 단위와 맞먹는다. 2020년 기준,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200-250TWh(테라와트시)였는데,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체 전력 사용량은 200TWh 이상 수준이었다. 더구나 이 양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프랑스의 에너지 기업인 '슈나이더 일렉트릭(Schneider Electric)'이 발표한 AI 혁신:데이터센터 설계에 대한 과제와 지침(The AI Disruption:Challenges and Guidance for Data Center Design)'에 따르면, 향후 AI 서버를 적용한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은 2028년까지 연평균 26~36%씩 증가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을 생산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여겨졌다. 기후위기 문제로 석탄과 석유를 통한 전기 생산은 어려웠고, 친환경 에너지인 태양광과 풍력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AI와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내내 돌아가야 하는데, 태양광과 풍력은 24시간 안정적인 공급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환경적 요인과 지리적 요인 및 안정성을 고려하면 SMR밖에 대안이 없다” 라거나 “‘SMR’이 AI 전력 해결사” 라는 말이 나온다. SMR(소형모듈원전) 확산 이끄는 빅테크(아마존・구글・MS),  세계원자력협회 “2035년에는 SMR시장 640조 원으로 성장할 것” SMR에 가장 활발한 투자자는 단연 빅테크(MS・아마존・애플・구글)다. 경기부진에도 너도나도 AI에 투자하고 있다. 금액도 상당하다. 아마존은 SMR 기업인 X 에너지에 5억(한화 약 6,800억 원)을 투자했으며, 에너지 노스웨스트와 계약을 체결해 4개 SMR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구글은 SMR 기업인 카이로스로와 500MW의 전력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500㎿는 중형 도시 또는 AI 데이터센터 캠퍼스 한 곳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으로 2030년부터 공급받을 계획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9월, 2028년부터 20년 간 스마일 원전 1호기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MS는 창업자 빌 게이츠가 투자한 SMR 기업 ‘테라파워'를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SMR이 사용화되면 테라파워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을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오픈 AI CEO 샘울트먼이 투자한 SMR 스타트업인 오클로는 지난 10월 15일 미 에너지부로부터 SMR 설계 승인을 받았다. 오픈AI 역시 SMR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들이 AI에 사활을 거는 만큼 투자는 더욱 커지고, SMR 시장 역시수 백조원 단위로 커질 전망이다. 세계원자력협회(World Newclear Association, WNA)는 “SMR 시장이 2035년까지 5,000억 달러(한화 약 640조 원)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영국왕립원자력 연구원도 “2035년에 SMR 시장이 63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SMR 빅테크가 끌고, 정부가 밀고 우리나라 정부 “전력수급계획에 SMR 4기 건설 반영・・・여기엔 여야가 없다." 현재 이런 모습은 빅테크와 원전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상용화가 된 적이 없다는 약점이 있는 SMR에 빅테크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기술 발전을 이루고 상용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SMR은 필요한 자본을 공급받고, 빅테크는 사용화의 열매의 무탄소 에너지를 공급받는 고리다. 빅테크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지만, 성공만 하면 달고 맛있는 과실을 양껏 취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에 고리가 점점 강화되는 모습이다. 한편, 원전은 정부의 뒷받침도 있어야 한다.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체코 원전 수주를 이후로 계속해서 원전 밀어주기를 하고 있다. 지난 20일 발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전력수급계획에 SMR 4기 건설 반영" 하겠다고 발표했다. SMR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겠다는 의미이자, 밀어주겠다는 의미다. 대통령실은 “(SMR이) 원자력 기술이기도 하거니와 차세대 성장 동력이자 수출 주력 효자 상품이 될 수 있는 기술"이라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여야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나서서 추진할 테니, 여야가 적극 지원해달라는 의미다. 정부 입장도 이해가 간다. 정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경제다. 그 경제 일선에 있는 건 단연 기업이다. 더구나 기업은 AI라는 산업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여기서 뒤쳐지만 영영 뒤쳐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고, 실제 실적 부진으로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AI 경쟁에서 뒤쳐진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는 삼성전자는 연일 실적 부진을 일으키고 있다. 반면, AI 파운드리 생산을 하는 TSMC는 연일 주가가 높아지며 최고 실적을 경신하며, "AI 산업의 장기 승자가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내 기업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할 수 있다. 아니 충분히 작용해야 한다. AI와 SMR 발전의 전제, “인공지능 발전은 필연, 기술 발전=진보, 기술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빅테크 기업이 AI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그것을 정부가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만 보면 빅테크가 AI를 발전시키기 위해 원전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부가 뒷받침하는 게 일말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건 왜 AI를 발전시켜야 하는가 이다. 빅테크들은 마치 AI가 인류를 더욱 발전시킬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럴까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AI의 발전과 SMR의 사용 뒷편에는 AI의 발전과 전력 사용 증가를 당연시하는 기저가 있다. 마치 AI의 발전이 인류에게 필연적이며, 이 필연을 이루기 위해 전기 사용 극대화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으로 우리는 AI 발전을 인류가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기술 발전은 늘 있어왔고, 그것이 인류를 진보하게 만들었으니 AI도 인류를 진보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기술 진보=좋은 것’ 혹은 ‘기술 진보=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기술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발전 이후 발생할 문제들은 뒷전이 된다. 설사 그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해도, 기술 발전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업과 기업가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기술 발전이 진보와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모두에게 혜택을 줄까? 2024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기술 발전=진보’는 틀렸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와 사이먼 존슨(Simon Johnson)’은 책 <권력과 진보(Power&Progress)>를 공동 집필했다. 여기서 진보는 정치 이념이 아니라,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과 부의 증가, 그로 인한 번영을 말한다. 그들은 책의 서두에 책 집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진보가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진보˝는 또다시 소수의 기업가와 투자자만 부유하게 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량과 권한을 박탈당하고 이득은 거의 얻지 못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포용적인 새 비전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회의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통념에 맞설 수 있는 조직과 반론이 있어야 한다.”¹ (권력과 진보/ p.20) 집필 이유 중 “또다시 소수의 기업가와 투자자만 부유하게 하고 있으며"와 “사회의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이는 소수가 독점한 상황에선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진보가 있을 수 없으며, 일부 소수가 권력(또는 경제성과 힘)을 독점하는 것을 철폐하고 분배해야 한다는 의미다.  소수의 독점과 권력의 분배는 대런 아세모글루가 또다른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Why Nations Fail>에서 국가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를 비교하며 포용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는 발전했고, 착취적 제도를 갖춘 나라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포용적 제도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여,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이뤄낸다.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다양하게 반영하기 위해선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마련된 정치제도가 사유 재산과 창조적 파괴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모두가 의견을 게재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을 토대로 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어느 소수의 독점이 있을 수 없도록 막아준다는 것이다. 반면, 착취적인 제도는 정반대로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며,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창조적 파괴와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가 결여되어 새로운 발전이 나타나지 않는다. 권력과 힘을 쥔 소수가 권력의 분배와 대항자의 발생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 파괴와 경제적 동기가 없어서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 주장이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이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로 남한과 북한을 뽑는다. 남한은 포용적 제도를, 북한은 착취적 제도를 갖고 있으며 위의 위성 사진이 그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² 여기까지만 보면,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권력과 진보>를 통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이 주장하는 건, 과거에 기술 발전=진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술이 발전할수록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소수의 권력과 부만 집중적으로 커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기술 기업의 출현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 기술과 권한을 독점하여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진보> 서두에 “소수의 기업가와 투자자만 부유해지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포용적인 새 비전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회의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통념에 맞설 수 있는 조직과 반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기술이 발전할 수록 더욱 착취적으로 발전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책을 통해 AI로 인한 생산성 증대와 부의 확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AI와 SMR의 성공과 실패의 폐해는 모두에게 폐해가 된다 에너지 감축을 위한 논의가 우선 되어야 한다 AI의 발전과 SMR 모두 막대한 자본이 든다. 그 막대한 자본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건 자본을 가진 소수 빅테크들 뿐이다. 이들은 성공할 경우 그 과실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따먹다. 물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만큼 실패시 위험부담도 크다. 성공의 과실과 실패의 폐해를 함께 가져가는 양날의 검을 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 부담을 떠안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해도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실패시 폐해가 모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 AI는 성공의 과실이 모두의 폐해가 될 수도 있다. AI는 그 자체로 막대한 양의 전기를 사용한다. AI 발전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는 것 만큼, 전기 사용도 당연히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됐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에너지 총 량을 어떻게 줄일까이다. 현재는 에너지 총량 증가는 당연하니, 여기서 친환경으로 효율적으로 조달하자라는 논리다. AI 발전에 가려진 또 다른 논리기도 하다. 이 논리 자체를 바꿔야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이렇다. 1. 전체 에너지 사용량 감소 2. 에너지 효율성 증가 3. 친환경 에너지 사용 4. 상쇄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이 후 순위인 것은, 이것을 구축하기 위한 인프라 개발을 위해 수많은 환경 자원을 지구로부터 착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사용량이 줄지 않으면, 태양광과 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가 되었건 원전이 되었건 환경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건 똑같다. 설령 SMR이 사용화가 되어 사용된다 해도 이 장비를 만들기 위해 지구 어딘가에서 막대한 양의 광물을 착취한다면, 이는 곧 무탄소 전기를 생산하자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탄소 배출만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지구의 여러 시스템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SMR이 탄소배출 해결책일지언정, 기후위기 해결책이 아닌 이유다. SMR 자체도 문제다. 소형 원전으로 기존 대규모 원전보다 안정성이 있다고 해도, 완전히 100%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SMR이 지역 생태계에 미칠 영향과 사용 후 핵원료 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더구나 SMR을 설치하는 지역의 지역민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조차 논의되고 있지 않다. 이런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AI 발전에 도움이 되니 해야지”라는 논리로 밀어 붙여선 안 되는 이유이자, AI가 발전할 경우 과실은 빅테크가 가져가지만, 폐해인 기후위기는 인류 모두가 함께 지게 된다 말하는 이유다. 당연히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 소수만 누리는 의제 설정의 독점을 깨고, 다양한 관점이 포함되어야 한다 "미래를 재구성하는 길은 길항권력을 창출하는 것이고, 특히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와 관점이 지배적인 비전에 맞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폭 넓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고 의제 설정에 다양한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를 열어줄 제도를 일굼으로써, 우리는 소수만 누리는 의제 설정의 독점을 깨뜨릴 수 있다"² (권력과 진보/ p.143) 현재 빅테크와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가 만드는 의제는 AI의 발전이 당연하며, AI의 발전을 위해 원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빅테크의 기술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주장에서도 이 발전이 어떤 폐해를 불러올 수 있는지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발전에는 “여야가 없다"는 반론의 여지를 내지 말라고 말한다. 정치에는 여야가 없지만, 그 여야를 만드는 건 결국 국민이다. 그리고 그 국민들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 또한 그 국민들은 빅테크가 만든 기술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정부 입장에서도, 빅테크 입장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의견들을 모두 듣고서 자신들의 의제와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소수 빅테크와 투자자들만 배가 불러지게 되면 이는 또다른 독점과 소수의 권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이자 소비자이자, 인류 구성원인 개개인이다. 개별 개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 개인이 모인 공동체도, 나라도 깨어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소수의 의견과 방향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소수의 권력과 힘의 강화로 가는 지름길이며, 그 종착지는 착취적인 제도의 부활과 폐해다. 우리가 진보의 수혜를 입은 것은 맞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주요 이유는 우리 앞의 세대들이 그 진보가 폭넓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그 일을 해야 한다. ² (권력과 진보/ p.18) AI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소수의 의견과 힘이 강해지고, 다수의 의견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곧 그 어느 때보다 개개인이 다양한 의견을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게 해야하는 시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생각을 조금 더 과감없이 표현하고, 또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AI 기술 발전의 수혜가 나와 공동체 모두에게 돌아오게하는 방법이다. 1) <권력과 진보>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생각의 힘/ 2023) p.18, 20, 143 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아세모글루・제임스 로빈슨/ 시공사/ 2016)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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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 "야생동물 개체군 73% 감소", 그 뒤에 다국적 기업과 자본이 있다
WWF “야생 동물 개체군 73% 감소했다" 세계자연기금(WWF)가 지난 10월 10일 ‘2024 지구생명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20년까지 지난 50년 간, 전 세계 야생 동물 개체군 규모가 73%가 감소했다. 이는 현재까지 관찰된 야생동물 개체군의 규모가 50년간 평균 약4분의3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WWF는 이를 지구생명지수로 표현했다. 지구생명지수(Living Planet Index, LPI)란, 전 세계 5,495종을 대표하는 약 35,000개의 개체군을 대상으로 1970년부터 2020년까지의 추세를 분석한 결과다. WWF는 담수 생태계의 85%, 육상의 69%, 해양의 56%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감소한 생물 개체군 자신들이 속한 생태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시스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체군이 감소하면, 그 시스템은 본래의 시스템 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이는 먹이사실 시스템, 자원 순환 시스템, 토양 회복 시스템 등 다양하다. 이 시스템은 지구 전체 시스템을 움직이는 또다른 일부로서 작동한다. 어느 한 개의 시스템이 오작동하면,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생물 개체군 감소를 어물쩡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번 사라진 종은 영영 되살릴 수 없고,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 복원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Stockholm Resilience Centre)의 소장인 요한 록스트룀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지구 한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총 9가지 영역이 있다.  이는 ①기후 변화, ②생물 다양성, ③담수 사용, ④토지 시스템의 변화, ⑤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⑥해양 산성화, ⑦생지화학적 유량(인과 질소 순환), ⑧대기권의 에어로졸 부하, ⑨진기한 물질이다. 각 9가지 시스템이 지구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하며, 넘어선 한계를 되돌리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는 이 한계를 주기적으로 추적한다. 가장 최근인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이미 9개 중 6개가 한계를 넘었다. 요한 록스트룀은 이 9가지 한계 중 가장 시급한 문제를 생물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생물다양성의 손실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생물다양성이 생태계 복원력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지조차 모른 채 빠른 속도로 생물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¹ 라며 “종의 상실은 다른 지구 한계들과 달리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독 비극적이다. 한번 사라진 종은 영영 되살릴 수 없다.”¹고 경고했다. 농업과 식량 시스템, 생태계 파괴의 주범 WWF는 73%의 개체군 감소 원인으로 식량 시스템을 지목했다. WWF는 “현재 식량 시스템은 서식지 파괴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전 세계 물 사용량의 70%, 온실가스 배출량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으로 전환하고, 식량 손실과 낭비를 줄이는 정책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식량 시스템은 농업을 위한 농지 확장과 개간, 국내 및 해외 수출, 가공, 유통, 소비, 폐기 등 모든 시스템을 아우루는 말이다. 농지 확장은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한다. 또한, 수출과 유통, 소비 단계에서 수 억 톤에 달하는 음식물이 폐기된다. WWF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매년 12억 톤의 식량이 농장에서 폐기됐고, 소매업체와 소비자가 낭비하는 음식물까지 합산하면 약 25억 톤이 폐기 됐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CED)와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2023-2032 농업전망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4%의 식품이 수확 및 소매 단계에서 손실되고, 약 17%의 식품이 소매 및 소비 단계에서 폐기 된다. 한편, 향후 10년 간 식품 수요는 인구 증가에 따라 15%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요 증가는 생산 확대를 불러오고, 이는 농경지 확대를 불러온다. 농경지 확대는 동식물 개체군이 살아갈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확장되고, 이는 곧 생물 개체군 감소로 이어진다. 끊임없는 악순환이다. 이런 농경지 확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전 세계적으로 많았다.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농업혁명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이자 인류 희대의 사기극"²이라고 말했으며, 영국 역사가이자 빅히스토의 개척자로 불리는 클라이브 폰팅은 “농업은 인간이 원하는 작물과 동물을 기를 인공 서식지를 위해 자연 생태계를 없애 버리는 것”³이라고 말했다. 클라이브 폰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농경지 확대는 곧 인공 서식지의 증가였고, 이는 자연 생물군의 서식지 감소와 멸종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생물 개체군 감소를 막기 위해선 농경지 확대를 막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경지 확대를 줄이기 위해선 식량 공급과 소비 시스템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낭비 줄이기와 단년생 작물(1년만에 생산하고 농지를 갈아 엎어야 하는 생물) 수확에서 벗어나 다년생 작물 생산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농민의 변화가 필요하다. 농민이 당장 수익을 위해 단년생 생물만 심고 기르는 것을 멈춰야 하며, 동시에 다년생 식물을 길러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득이 온전히 보전되어야 한다.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변화는 이루어질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바로, 농업 산업 전반을 쥐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들이 농민의 몫을 쥐고 놔주지 않는 한 변화는 요원하다.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 25억 명의 소득을 쥐고 있는 30개 다국적 기업 프랑스의 ‘시민을 위한 사회 영향 연구소(BASIC)’은 ‘Who’s Got the Power’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는 국내에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로 번역됐다.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 농산물 생산의 공급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다국적 기업이 농경 산업을 쥐고 있는지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30개 미만의 다국적 기업이 약 25억 명의 농민의 몫을 쥐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선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이 좁은 길은 판매된 생산품이 농민에게 얼마나 적게 돌아가지 나타낸다. 이 좁은 길을 통과해 농민에게 떨어지는 값은 동전 몇 푼 되지 않는다. 이 좁은 길을 윔켜쥐는 건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들은 좁은 길을 더욱 좁게 만들 수도 있고, 넓게 만들 수도 있다. 30개 미만의 다국적 기업은 농산물 가격 통제와 인권,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체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이들 기업이 전 세계 대부분의 소매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눈에 봐도 수 백개에 달하는 브랜드가 대략 10개 기업에 속해 있다. 유니레버, 네슬레, 코카콜라, 펩시코, 켈로그, 다논, 마스, 몬델즈 등등이다. 이들의 변화가 없다면, 농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결코 많아질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코코아(카카오+초콜릿) 산업을 살펴보자. 그림에서 보듯 아래로 내려갈 수록 공급망 전체에서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걸 알 수 있다. 소매단계(retail)에서 35%의 몫이 돌아가고, 5개 회사의 브랜드 제품 대량 생산에서 40%의 몫이 돌아간다.  또한 3개 기업이 초콜릿 가공 단계에서 10%를 가져가고, 2개 기업이 코코아 가공 그라인딩 단계에서 5%를 가져간다. 또한 현지 트레이더가 5%를 가져가고, 농민이 나머지 5%를 가져간다. 그리고 이 농민의 수는 1,400만 명이다. 즉, 1,400만 명이 코코아 산업의 5%를 나눠갖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이들 농민들이 이러한 산업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소득이 없고, 실업자가 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국적 기업의 요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농민의 경제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경작지 증가를 막을 수 없다 경작지 증가를 막지 않으면, 생물 다양성 감소를 막을 수 없다 다국적 기업에 종속된 산업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경우,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은 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 5%의 이익마저 줄이고, 더 많이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년생 작물만 기르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단년생 작물은 1년만에 경작지를 개간하게 하고, 토양 휴식 없이 또다른 식물을 심고 경작하고, 개간하게 만든다. 또한, 단년생 작물만을 생산해 “토지의 생산성이 떨어지면, 새 농토를 얻기 위해 자연의 숲을 잠식한다.”⁴ 유발하라리와 클라이브 폰팅이 경고한 농경지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산업에 맞춰진 농경지의 변화를 산업화 된 농경지라고 한다. 농경지의 산업화가 진행되면, “토양 침식, 삼림 파괴, 단작 재배와 산업적 생산 방법으로 인한 오염, 취수, 탄소 격리의 감소, 그리고 포유류를 포함한 동식물 종 다양성의 감소 등 자연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도 확대”⁴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작지의 증가를 막지 않으면 생물 다양성 감소도 막을 수 없다. 인류가 인공적으로 만든 경작지는 모두 생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삶의 터전을 망가트리는 건 인간이었고, 그 인간을 움직인 건 자본의 논리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 메스를 가져다 대야 한다. 고쳐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버려야 한다. 무언가를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버리고,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장의 한계에서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 보고서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바꾸지 않았을 때 이루어지는 파국을 예고했다. 그들이 제시한 시나리오는 총 10개다. 그 중 시나리오2는 인류가 피해야 할 시나리오에 우리가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성장의 한계 발표 후 30년이 지난 2002년 새롭게 업데이트한 내용이다. 2000년대 초 기준 지구의 재생 불가 자원(석탄이나 석유 등) 사용을 2배로 늘리는 동시에 자원 채굴 기술 발전으로 채굴 비용 상승 시점을 늦춘다고 가장하면, 산업은 20년 더 성장할 수 있다. 또한, 꾸준한 인구 증가로 2040년 인구는 80억 명으로 정점을 이룬다. 산업이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한 만큼 소비도 동시에 증가한다. 하지만, 오염(Pollution) 수준도 함께 폭등한다. 위 사진에 따르면 오염은 도표 밖으로 나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며, 식량은 꾸준한 하향 곡선을 그린다. 이는 오염 증가가 토양 황폐화와 생산성 감소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토양 황폐화와 생산성 감소는 인구를 먹여살릴 농작물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기아 발생과 사망률 증가가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실제 시나리오2를 보면 식량 감소가 나타나고 머지 않아 인구가 감소한다. 시나리오의 변인 요소는 총 5가지다. ‘①인구 증가, ②지속적인 경제성장, ③(재생 불가능한) 자원 소비, ④오염물질 배출, ⑤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식량 생산’이다. 이 5가지 요소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이 5가지 요소를 모두 통제하지 않으면 인류가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결과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다섯 가지 전환과 세 가지 단계 성장의 한계 이후 50년, 로마클럽은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한다. 바로 ‘모두를 위한 지구 Earth 4 All’이다. 이는 앞선 성장의 한계 주요 모델이었던 월드3 모델을 업데이트해서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말해주는 보고서다. 그들은 전 세계가 합심해서 참여한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5가지 영역에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①빈곤 전환, ②불평등 전환, ③권한 부여, ④식량 전환 ⑤에너지 전환’⁵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식량 전환만 아주 간략히 소개한다. 식량 전환을 위해선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①새로운 농업 기법 도입, ②식량 시스템 효율성 개선, ③식단 변화이다.  새로운 농업은 재생 농법을 말하며, 이는 곧 단년생 식물이 아닌 다년생 식물로 전환하고 토지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식량 시스템 효율성 개선은 유통과 소비 단계에서 낭비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국제 교류가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작 식단 변화는 현재 육류 위주의 습관에서 벗어나 채소 과일 등을 고루 섭취하는 변화가 만들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⁵ 어렵다. 아주 어렵다. 개인의 변화가 일어나야 함은 물론이고, 산업의 변화 역시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소작농들의 경제성을 보전해 주어야 하고, 이들이 마땅히 재생 농법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투자해 줘야 한다. 이걸 누가할까? 정부가 할까? 기업이 할까? 재원은?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 데 납득할까? 개인과 기업이? 식량 시스템 효율성도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 게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장 전 세계로 걸쳐져 있는 유통망을 지역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전 세계 유통망의 혜택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커피와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다. 혹은 아주아주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는 의미다. 이걸 소비자가 납득하고, 기업이 감당할 수 있을까? 또한 음식물을 버리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만 먹는다는 게 가능할까? 식단 변화는 가장 개인적인 변화를 불러와야 한다. 육류를 줄이고 채소와 과일, 콩 등으로 줄인만큼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개인의 변화가 가장 어렵다.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개인의 변화를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걸 모든 인류가 다 같이 할 수 있을까? 결국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야지만 가능하다. 자본의 논리는 항상 대량 생산해서 싸게 공급하고, 싼 공급을 통해 끊임없는 소비를 조장한다. 현재 인류 중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살았던 사람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논리를 너무 당연시 하고, 절대 바꿀 수 없는 성역으로 여긴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게 가능 할까? <모두를 위한 지구> 팀은 “낙관적인 사고 방식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지구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야 한다. 경제란 우리 인간이 설계한 시스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⁵ 자본의 논리 역시 인간이 만든 경제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논리'일 뿐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논리가 있고, 과거에 맞았던 논리가 시간이 지나 전혀 맞지 않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노예제가 당연했고, 그들을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듯이 말이다. WWF가 발표한 생물 개체군 감소의 가장 이면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 그 논리에 가장 앞장서는 다국적 기업이 생물 개체군 감소에 가장 크게 이바지 하는 농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또한 자본의 논리는 인간을 움직여 현재의 기후위기와 생물 다양성 감소, 양극화, 불평등 등 각종 문제를 야기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는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생각할 시간도 없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말이다. 1)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요한 록스토룀 외/ 에코리브르/ 2017) p.101  2)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 p.129 3)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민음사/ 2019) p.110 4)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 (르 바지크/ 따비/ 2017) p.127 5) <모두를 위한 지구> (다수 공저/ 착한책가게/ 2023) p.17, 17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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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에 임산부 좀 먼저 가고, 먹고, 앉게 하자는 게 그렇게 아니꼽나?
“임산부한테 그걸 왜 해주냐" 최근 대전의 유명 빵집인 성심당에서 임산부 프리패스 서비스를 내놨다. 임산부의 경우 기다릴 필요 없이 빵을 고를 수 있고, 빵 가격도 5%를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행사를 알리는 성심당 안내판에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비맘들을 응원해요.”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해당 사례가 알려지자 두 가지 부류가 나타났다. 첫째는 “임산부가 벼슬이냐며 프리패스는 역차별"이라는 부류, 둘째는 “임산부 뱃지 삽니다"라는 부류였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늘어나고 이슈가 되자, 성심당은 “임산부 뱃지만으론 불가능하며, 산모 수첩 또는 임신 확인증을 지참하고, 출산예정일 확인 후 신분증과 대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빵집 서비스가 역차별이고 불공정하다고? 가소롭다 성심당의 임산부 프리패스에 대해 역차별을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말을 인용한 기사들을 보던 중, 이런 문구를 봤다. “성심당이 사기업인데, 역차별이다. 모든 고객에게 공정한 대우를 해야 한다.”. 가소롭다. 성심당은 그냥 빵집이다. 손님이 많고, 지역에서 유명할 뿐이다. 그런 빵집에서 임산부가 줄 없이 들어가도록 해주고, 고작 5% 할인해 준 걸 차별이고 공정하지 못한다고 하면 세상에 저런 혜택을 누가 줄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5% 할인도 만 원 짜리 500원 할인해 준 것 뿐이다. 껌 한 통이 1,200원이고 자판기 커피가 500원인 요즘에, 고작 그 500원이 그렇게 아니꼽게 보였을까. 저 글을 쓴 이의 생각대로라면, 가장 공정하게 빵을 팔기 위해 성심당은 손님들에게 제비를 나눠주고 당첨된 사람에게만 빵을 팔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마저도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역차별이다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임산부 뱃지 삽니다? 가엽다 임산부 뱃지를 산다는 사람도 살펴보자. 정부가 주는 임산부 혜택은 뱃지가 있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임산부로 등록이 되어야지만 받을 수 있다. 임산부가 아니면서 임산부 뱃지를 산다는 사람들은, 세심히 확인하지 않는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성심당 혜택처럼 말이다. 전형적인 체리피커다. 체리피커는 상품 구입은 하지 않고 부가 서비스 혜택만을 취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스스로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소비생활을 영위한다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좋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꼼수를 잘 부리는 사람들이다. 드러나는 그 작은 임산부 혜택을 누리려고 뱃지를 산다는 사람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안 되고 처연하다. 가엽다는 의미다.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임산부들일 것 임산부 뱃지 구매의 악순환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임산부 당사자들일 것이다. 임산부 뱃지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위해 뱃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배가 부르지 않은 이상 누가 임산부이고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초기 임산부들은 이런 위험이 더 많다. 실제 임산부 뱃지는 당장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들이 마땅히 임산부임을 알리고, 배려와 양보, 혜택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일상 곳곳엔 이런 임산부들을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일례로 지하철의 안내 방송에서는 “지하철에는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초기 임산부들을 위해 임산부석을 비워주시고, 임산부 뱃지가 있는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라고 방송을 한다. 물론 이런 안내 방송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실제 앉아서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임산부석, 민원만 7,000건, 임산부 54% 일상에서 배려 받지 못했다 “여성전용석이다, 남성이 앉았다” 개랑 원숭이 같은 한심한 웹상 싸움 현재 서울시에서 운행 중인 1~9호선에는 칸 마다 두 개의 임산부 배력석이 설치되어 있다. 1~8호선은 7,226개, 9호선 636개, 우이신설선 72개, 신림선 전동차는 96개다. 하지만 실상 임산부가 이 자리를 제대로 앉아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이다. 2023년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 접수된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은 총 7,086건이었다. 민원 대부분은 임산부석을 이용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임산부석이 아니라 여성전용석이라느니, 남성이 앉아 있었다느니 갈라치기해서 싸우기 바쁘다. 한심하다. 웹상에서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른채 키보드로 개랑 원숭이처럼 싸우는 싸움으로 임산부 당사자들이 받는 배려가 도대체 뭔가 싶다. 저렇게 웹상에서 싸운다고 하여 임산부 당사자들에게 배려나 자리가 생기는 게 아니다. 지난 2020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임산부 1,500을 대상으로 조사한 임산부배려 인식 및 실천수준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임산부 54.1%가 배려를 받지 못 했다. 또한, 2021년 조사에서도 51,9%가 배려받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배려를 받지 못한 이유로 “임신 초기라 배가 나오지 않아서"가 2020년 54.3%, 2021년 49.4%였다. 2021년 조사에서는 가장 부정적인 배려받지 못한 경험으로 44.1%가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석 이용 불편을 꼽았다.  임산부가 배려받지 못했다는 수치는, 우리 사회가 임산부애 대한 배려와 존중의 점수다. 한편, 일상에서 배려와 존중을 받지 못하는 건 임산부만이 아니다. 배려를 못받는 건 임산부만이 아니다, 소방관, 경찰관, 군인도 마찬가지 흔히 우스갯말로 경찰관을 짭새라고 부르고, 군인을 군바리라고 부른다. 어떤 민원인은 “지하철에서 군인이 앉아서 간다"며 민원을 넣었다. 민원 내용을 보면 “군인들이 왜 자리에 앉아 있나요? 방송 요망"이라고 보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6년에는 스타벅스에서 군인에게 무료 커피를 나눠준 것을 두고 “성차별"이라고 했다. 이게 칭찬할 일이지, 어떻게 이게 성차별이 될 수 있을가. 어떻게 이렇게 배배꼬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2023년 군인들의 직업 만족도는 44%로 조사됐다. 2020년대비 27% 하락한 수치다. 사회적 평가는 12.9%였다. 소방관은 어떤가, 헬기로 출동했더니 “김밥에 모래 들어간다" 라며 민원을 넣고,  소방차 사이린이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고 있다. 점심 도시락을 사기 위해 나온 소방관에게 “공무원이 12시 전에 왜 나오냐"며 민원을 넣고, 소방관에 불법 주차한 외제차 차주가 소방관에게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는 “구급대원 향한 폭언과 폭행을 멈춰달라"고 소방관들이 직접 말하고 있다. 경찰은 말해 뭐하나. 공무집행 방해를 받는 대상 93%가 경찰이다. 현장에서 경찰들은 “조폭시켜 죽이겠다"고 말하지 않나 “나 조폭 알아 감당하겠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조폭을 잡는 게 경찰인데,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성단체에서 시작됐네, 남성단체에서 시작됐네 따지는 인간들도 똑같다 개인적으로 여성・남성 커뮤니티에서 노닥거리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키보드로 노닥거리며 비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말들을 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림돌림 하는 걸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저런 사례를 들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각종 여성・남성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을 하고 있다. 여성들이 어쩌고, 남성들이 어쩌고. 언론들도 그런 반응들을 각종 커뮤니티에서 퍼다 나르고 있다. 그걸 통해서 경찰, 군인, 소방관에게 돌아가는 이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배려 없는 사회에서는 공동체 참여와 활동도 없다 UCLA Social Relations Lab에서 발표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룹 구성원으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인식은 공동체 활동 참여 의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공동체에 겪고 있는 사회적 딜레마에 협력하고 연대하려는 의식이 강화된다. 반면, 존중이 부족하면 무관심과 폭력, 적대감 같은 부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Urban Public Space and Social Cohesion: A Systematic Review (도시 공공 공간과 사회적 응집력의 관계 이해 : 체계적인 리뷰)라는 보고서는, 시민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공간(Open Space)의 중요성을 말하며, “사회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균형을 겪는 사회에서 공동체 결속력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소외감과 존중 부족 증가로 이어져 공동체 유대와 집단 행동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임산부, 경찰관, 소방관, 군인에 대한 우리 사회 배려의 모습은. 공적인 공간이든 사적인 공간이든 상관없이 그저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며, 존중 하려는 마음과 태도 조차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심당 같은 사적인 곳과 지하철 같은 공적인 곳에서 몸이 아파서, 몸이 무거워서, 공적(소방과 치안 등)인 일을 하다가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좀 앉고, 먹고, 가게 하자는 것조차 “이건 공정하지 않아. 역차별이야"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것 자체를 우리 사회가 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적인 곳에서는 그럴 수 있다. 모든 시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성심당 같은 지극히 사적인 사업장에서 하는 것까지 “좋다, 모범적이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역차별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더욱 더 말이다. 임산부석에 대한 개인적 생각 배려라는 말 자체가 잘못 됐다. 임산부는 배려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누려야 하는 사람 나 역시도 지하철에서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안 좋게 본다. 그런 걸 볼 때면, “저렇게 앉아 있으면 임산부가 퍽이나 와서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고 하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배려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배려는 해도 되지만 안해도 된다. 안 한다고 해서 뭐라 그럴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선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배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건물 10층에 만들어놓고, 엘리베이터 없이 올라오라고 하면 그게 과연 배려일까? 공간을 만들었으니 배려 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가 올라올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충분히 설치 해 놓거나, 애초 올라올 필요 없이 턱이 없는 1층에 만들어 놓는 게 배려일 것이다.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임산부 석을 보면서 “저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니라, 임산부 권리석 이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배려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권리는 침해 해선 안 된다. 내 권리를 누리기 위해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 라는 말 조차 안할 수 있도록 임산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석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임산부 만이 아니라, 소방관, 경찰, 군인 등 내 이익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일하는 모두 그런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그런 권리를 지켜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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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문학에 의해 탄생한 노벨상과 전쟁의 무기가 된 노벨상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이유 2024년 노벨상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AI가 노벨상 과학 분야를 휩쓸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고, 노벨 문학상 역시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수상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5월이 되면 항상 그의 책을 찾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뜻깊은 사건이자 이변이었다.  그 이변에 힘입어 국내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는 일시적으로 마비됐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려는 독자들이 몰린 탓이다. 현재 온라인 서점 인기 순위 1~10위 모두 한강 작가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자가 가득하다. 노벨상을 만든 건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 현재의 노벨상이다. 그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노벨 재단을 만들었고, ‘문학, 평화,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분야에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다. 과거나 현재나 노벨상의 상금이 큰 이유다. 한편, 인류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요하는 노벨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에 공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프레드 노벨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나마이트가 인류를 해치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제정됐다.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다이나마이트는 본래 자본주의가 발달하려던 시기와 겹쳐 도로 건설을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에 사용됐었다. 노벨은 단독 특허권자였기 때문에, 다이나마이트가 쓰이면 쓰일수록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 다이나마이트는 곧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쓰이게 된다. 바로 전쟁이다. 당연하게도 이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로 인해 알프레드 노벨에게 ‘죽음의 상인' 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다이나마이트를 판매한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다이나마이트가 처음 전쟁에 사용된 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때였다. 독일 통일을 이루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1870년 7월 19일부터 1871년 5월 10일까지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각각 약 14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프로이센은 약 45,000명의 사망자와 9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쟁의 승리는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전쟁 승리에는 다이나마이트의 공이 컸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요새를 파괴하는 데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했다. 액체 폭약으로 효율성과 효과성이 좋았던 다이나마이트는 프랑스 요새를 부수는 데 무수히 사용됐고, 그 결과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 전쟁 승리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이뤘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에게 알프레드 노벨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원인인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이자, 이를 돈벌이에 사용한 상인이었다. 때문에 프랑스는 알프레드 노벨을 일컬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렀다.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의 별명을 알게 된 건 어이없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목격한 뒤였다. 프랑스의 한 언론사는 알프레드 노벨의 형의 부고를 알프레드 노벨의 부고로 착각해 아래 제목과 내용으로 부고 기사를 내보낸다.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사람을 더 많이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어제 죽었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에서 낸 기사여서 그런지 감정이 게 많이 느껴지는 제목과 리드다. 노벨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의 발명품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해 큰 죄칙감을 느낀다.  전쟁으로 평화에 대한 국제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인 당시, 노벨 역시 평화와 과학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재산이 이에 평화와 과학의 발전에 이어지길 바랬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유언장을 고쳐 새로운 유언장을 쓰게 된다. 그 내용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노벨 재단을 만들어, 국적과 성별에 상관없이 ‘문학, 평화, 물리학, 화학, 생리학, 의학' 분야에서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만들고, 큰 상금을 주어 그들의 지치지 않고 계속 인류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1901년 노벨상의 탄생이다. 노벨상 수상작들, 새로운 무기로 쓰이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까지 이야기만 보면 노벨상의 탄생에는 전쟁 무기로 변질된 발명품을 만든 과학자의 반성과 회의감, 자책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문득 한 가지가 궁금했다. 노벨의 다이나마이트처럼, 그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전쟁의 살상무기로 쓰이고 있는 노벨상은 없을까?  궁금증을 쫓아 내용들을 찾아봤다.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많이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핵무기부터, 현재도 전쟁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도 쓰이고 있었다. 1921년과 1922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핵무기가 됐다 핵 물리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두 명이다. 첫째는 알버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 물리학상), 니엘스 보어(1922년 노벨 물리학상)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질량 에너지 등가 법칙(E=mc2)은 핵무기 이론의 기반이 됐다. 엔리코 페르미는 핵 분열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 맨허튼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투화지점의 온도는 약 4,000도까지 올라갔고, 해당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흔적없이 증발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4만 명의 민간인이 증발했고, 그 중 3만 명은 한국(당시 조선인)이었다. 군인은 2만 명 정도가 증발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증발했고, 그 중 1만 명은 한국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불필요하고, 끔찍하며, 비참한 희생자들이다. 1919년의 노벨 화학상은 유대인 학살의 무기가 됐다 191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건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였다. 그는 1909년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인 일명 ‘하버법'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9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 발명을 통해 화학 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식량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인류가 기아에서 벗어나는 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임에도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국군주의자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인 독일의 승리를 위해 화학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치명적인 염소가스와 독가스를 개발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데 공헌했다. 덕분에 그를 부르는 또다른 별명인 “화학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때 만든 대표적 무기가 치클론B로, 이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가스로 사용됐다. 한편, 그는 독일인이긴 했으나 유대인으로 나치당에게 홀대를 받았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가족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고, 자시이 만든 치클론B 가스에 의해 죽었다. 1964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2024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무기로 사용 중이다 가장 최근의 전쟁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노밸상의 업적이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이언빔(Iron Beam)이다. 그 바탕은 196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찰스 타운스, 니콜라이 바소프, 알렉산더 프로호로프의 공로인 ‘레이저 기술'이다. 이스라엘 방산 기업 라파엘이 만들었다. 라파엘은 2014년 싱가포르에서 에어쇼에서 처음 아이언빔을 선보였다. 라파엘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언빔은 “100kW급 고에너지 레이저 무기 시스템(HELWS)으로,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범위한 위협 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무력화하며, 빛의 속도로 공격하는 무제한 탄창을 갖추고 있다." 아이언빔은 지난 2020년 팔라스타인 가자지구 인근에 실전 배치됐다. 아이언빔은 이스라엘-하마서 전쟁 당시 수백 발의 하마스 미사일을 요격한 아이언돔의 단점을 보완한다고 여겨진다. 노벨상의 업적이 기존 무기의 보완재의 기본이 된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제시한 사례는 불과 몇 개지만 사실 이외에도 많다.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업적인 트렌지스터는 현대 군사 장비 필수품으로 미사일 유도 시스템, 레이더 기술 등에 활용되고 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업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은 GPS 개발에 영향을 미쳤고, 현재 GPS는 군용에서 정밀 유도 미사일과 드론 운영, 병력 위치 추적 등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2010년도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업적인 꿈의 물질이라 불리는 그래핀은 초경량 방탄복 제작 활용에 착수된 상태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AI는 새로운 다이나마이트가 될까 202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필드와 제프리 힌턴은 모두 “인간 이해 벗어난 AI 기술 발전이 두렵다"고 말했다. 특히 제프리 힌턴 교수는 “앞으로 수년 내에 AI의 위협을 다룰 방법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경고는 AI 기술에 대한 경고였지만, 개인적으로 더 무섭고 두려우며, 경고를 보내야 할 대상은 인간 자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스스로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개발하고 무기로 만들어 나와 다른 인간을 겨냥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앞선 사례들은 그런 인간들이 만든 사례다. 알프레드 노벨의 다이나마이트처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결과다.  무언가가 처음 의도와 달라졌을 때는, 처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제정한 진짜 이유, 그것은 평화였고, 그 평화에 불을 지핀 건 문학이었다. 노벨상 제정의 결정적 역할을 한 평화를 말한 문학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이 만든 다이나마이트로 고민에 빠졌던 시기, 유럽 전역에 한 책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책 제목은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Die Waffen niendr!>. 반전문학*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로 작가이자 평화 운동가였다. 책은 전쟁의 참혹함을 여성의 시선에서 묘사하며 평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당시까지 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당연시했고 심지어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책은 그런 생각과 시각을 비판하고, 독자들이 전쟁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저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는 이 책에 힘입어 오스트리아에 국제 평화 협회를 만들고, 국제 평화운동에 인생을 바친다. 자신의 책이 자신을 평화운동가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라운 건 그는 비록 1주일이었지만 노벨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사후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되는 걸 걱정하던 노벨은, 자신의 전직 비서가 일으킨 국제평화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직접 편지와 성금을 전달하며 그의 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베르타 폰 주트너 역시 노벨에게 편지를 보내며 평화의 중요성을 계속 말했고, 이는 노벨상 제정과 노벨상에 평화부문이 포함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의 무기가 된 상황에서 평화 자체가 노벨이 가장 염원한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노벨상은 1901년 처음 수상을 시작했고, 베르타 폰 주트너는 1905년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쓴 반전문학은 유럽 전역에 평화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고, 이 평화 운동과 베르타 폰 주트너의 설득은 노벨의 노벨상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서 노벨상 제정 뒤에는 평화를 말하는 문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뒷배경은 2년차로 접어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1년차가 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 전쟁들에서 노벨상이 새로운 무기로 변한 2024년에 강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이게 맞나. 이게 처음의 취지였나. 평화를 말할 수는 없는 건가. 평화는 진정 불가능 한 걸까, 라고. 무기를 내려 놓거나, 무기가 안 되게 할 수는 없는걸까 라고. 가장 비폭력적인 저항이라 더욱 값진 노벨 문학상 문학으로 인간을 탐구한 한강 “세계 곳곳에서 전쟁인데, 무슨 잔치"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냈다"며 한강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여기서 말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우리나라에 있었던 5・18 민주화 운동과 4・3제주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책 모두 국가가 개인을 폭력으로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쓰고 있다. 폭력은 한강 작가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계기다. 한강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을 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때문인지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다양한 모양의 폭력이 나오고, 그 안에서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할 수 없었던 인간 말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이 장면이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 창비/ 2014) p.117 쏠 수 없는 총,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건 이런 총이 아닐까 싶다. 절대로 무기가 될 없고, 무기로 쓰는 인간조차 없는 그런 총 말이다. 그런 시대가 되고, 그런 시대가 되기 위해 인간들이 합심한다면 어쩌면, 평화를 말했던 문학에 영감을 받아 제정된 노벨상의 본래 취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또 그런 시대를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 시대를 위해 전쟁이라는 참상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강 작가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인데, 무슨 잔치"나며 노벨 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노벨 문학상의 품격이 이런 건가 싶다. 2024년의 노벨문학상 선정에 주된 이유가 됐던 작품인 <소년이 온다>는 지난 2014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찍혀 사상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종도서(당시 문화부 우수도서) 선정에 탈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역시 국가의 폭력이었다. 그런 국가 폭력에 가장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얻은 승리가 노벨문학상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만큼, 이참에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다행히 내방 책장에는 그의 책들이 여러권 꽂혀 있다. 그간 평화를 생각하면서 한강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노벨상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친, <무기를 내려놓으라!> 역시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도 함께 찾았으면 좋겠다. 부디, 현재도 전쟁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곳곳의 무기가 내려놓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을 소재로 창작되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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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경제의 도구로 보는 이상, 노벨상은 없다
노벨상 과학분야 이번에도 한국인 수상자는 없었다 매해 10월이 되면 스웨덴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을 발표한다. 노벨상은 모든 과학자와 작가, 경제학자에게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 이후에는 한번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졌다 시피 노벨상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베르나르도 노벨'의 유엔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된다. 노벨상의 의의를 생각하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했다고 인정받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아이러니 하다. 매해 약 5만 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하는 나라가, 연구・개발(R&D) 분야에 가장 많은 예산이 집행되는 나라가, 인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한 과학 연구나 개발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논문과 예산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쓰이고 투입된 걸까. 노벨상은 기초과학 분야 수상이 높다.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은 수 십년에 걸쳐 기초과학 연구를 진행한 사람들이다. 기초과학은 그렇게 수 십년을 연구해야만 유의미한 성과가 나온다. 이러한 기초과학 예산은 정부에 의지하게 된다. 정부 예산이 없으면 연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정부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정부는 헌법에 기초해 국가를 운영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 9장 127조 1항, 과학의 목적은 경제 성장이다 국가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는 헌법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헌법에서 ‘과학'은 딱 두 번 언급된다. 헌법 ‘제 1장 22조 2항’과 헌법 ‘제 9장 127조 1항’이다. 이중 과학에 대한 국가의 역할과 목적을 담은 내용은 후자다. 헌법 제 9장 127조 1항은 이렇다. ①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제 9장 127조 1항) 내용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과학에 대한 정부의 역할, 둘째, 과학의 목적이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이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R&D 예산 지원과 투자, 인재 육성 등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민 경제 발전' 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적이다. 결국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내용이다. 헌법 제 9장은 ‘경제' 장이다. 국가가 무엇에 기초해 경제를 운영해야 하는지 명시한 것이다. 그 경제 장에 ‘과학' 단어가 담겨 있다는 건, 결국 과학은 경제 발전을 위한 하위 요소 즉, 도구라는 의미다. 애초 복지 증진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위한 과학이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2024년 노벨상 과학 분야, AI가 싹쓸이 잠깐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을 짚고 넘어가자. 올해 노벨상은 AI가 싹쓸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AI 분야 수상자가 많았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제외하고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모두 AI의 기초를 닦았거나, AI를 통해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은 AI 머신러닝 기법을 개발한 것을 인정 받았다. 머신 러닝은 오픈AI의 ChatGPT로 대중에게 잘 알려졌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에게 데이터를 줘서 스스로 학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머신러닝의 한 방법이 ‘딥러닝'이다. 수상자 중 한명인 ‘제프리 힌튼’은 이 딥러닝 기술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이들 기술의 파생으로 대량언어학습모델(LLM)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ChatGPT 역시 등장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는다.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AI 서비스와 산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AI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한편, 그의 제자들 역시 AI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루고 이끌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론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다. 그 역시 스승을 따라 올해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데이비드 하사비스가 설립한 구글 딥마인드는 2016년 알파고를 만들어 인류 최강 센돌 이세돌을 박살냈다. 알파고는 딥마인드 기술을 통해 수 백년 동안 쌓인 바둑 기보를 모두 학습했고, 이세돌과의 대국에선 학습한 수를 바탕으로 수 만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서 착수했다. 그 결과는 4승 1패. 이세돌에게 당한 1패를 제외하고 이후 끝까지 무패를 달성하며 은퇴했다. 이전까지 AI가 절대로 넘을 수 없다던 바둑이라는 벽을 이세돌과 커제를 박살내면서 깨부순 것이다. 물론 그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건, 알파고를 만들어 이세돌을 박살냈기 때문이 아니다. 노벨 위원회는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그 역시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원이다)가 AI 단백질 구조 예측 모델인 ‘알파폴드(AlphaFold)'를 개발했고, 그 결과 단백질 구조 예측성을 40%에서 90%로 높인 것을 수상 이유로 설명했다. AI를 기반으로 한 단백질 설계는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고 새로운 단백질을 디자인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신약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코로나19 같은 전 세계를 패닉에 빠트리고, 수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질병으로 부터 빠르게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노벨 위원회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자 세 명에게 준 이유일 것이다. 경제 논리가 아닌 인류 복지 증진의 논리, 인류 복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AI에게 상을 준 것 이상을 종합해 보면 2024년의 노벨 위원회가 AI 연구자들에게 상을 준 이유는, 그들의 연구와 성과가 향후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질병의 발생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이 40년에 걸쳐 머신러닝 기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딥러닝 기술은 있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딥러닝이 없었다면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AI 모델은 나올 수 없었다. 만약, 이러한 기술이 없다면 향후 코로나19 같은 재앙적인 질병이 다시 발생했을 때, 인류는 또다시 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아래 노벨 위원회는 수상자들의 AI의 성과가 인류 복지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학을 인류 복지 증진으로 보느냐, 경제 성장의 도구로 보느냐가 노벨상 수상의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한국은? 돈 되는 산업에 투자하겠다며 과학 예산을 깎았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스필드가 AI 연구를 시작한 게 1980년으로 알려졌다. 약 40년 만에 성과를 인정 받은 것이다. 현재 그 성과를 기반으로 AI 기술이 사용화 됐고,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가 연구를 진행하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AI의 암흑기로 불렸다. 연구 성과는 없었고, 지원도 미비했다. 이처럼 기초 과학은 성과가 나오는 데 오래 걸린다. 그것을 기다려줄 인내와 예산이 필요하다. 과학을 경제의 도구라고 본다고 해도, 과학에 대한 예산 지원은 계속 증가해야 한다. 자원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의지할 건 기술과 인적자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 아래 우리나라는 연구개발(R&D) 예산 투자액을 1990년 이래 한번도 줄이지 않았었다. 2020년부터 매해 약 10%씩 늘려왔다. 2020년은 약 24조, 2021년은 약 27조, 2022년 약 30조, 2023년 약 31조였다. 이러한 예산 증가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현 정부부터다. 2024년인 올해 R&D 분야 예산은 25조 9천 억 원으로 2023년도에 비해 약 5조가 삭감됐다. 정부는 “약 5조 원의 삭감된 예산을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돈이 되는 첨단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단기 성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깍인 예산 5조원 중 기초연구 사업 예산은 약 1,500억 원 가량이 삭감됐다. 1억 미만의 연구가 많아 효율적이지 않다 논리였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기초분야는 기술 발전의 핵심" 이라며 “R&D 예산 삭감은 사다리 걷어차기" 라며 반발했다. 과학계가 예산 삭감을 재고할 것을 요청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분은 계속됐고, 이는 카이스트의 졸업식에까지 미쳤다. 졸업생의 몇 마디 마저 기다리지 않았다 2024년 2월, 카이스트 졸업식 당일 한 대학원생은 졸업식 축사로 참여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R&D 예산을 복원하라"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졸업식 가운을 입고 있던 정부 보디가드가 그 졸업생의 입을 틀어 막았다. 과학계의 분노가 국민의 분노가 된 순간이었다. 대통령이 한 국민의 몇 마디마저 끝까지 들어줄 인내가 없는 모습이었다. 혹은 애초 자신에게 반하는 목소리는 틀어막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애초 경제의 논리는 효율과 효과의 논리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효율과 효과로만 생각하면, 효율적이지 않고 당장 효과를 내보이지 않는 모든 건 비용이 된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기초과학 분야는 더더욱 비용으로 치부된다. 돈은 많이 드는데, 당장 효과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이 한국인이었다면, 그들은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제에는 인내라는 게 없다. 그 논리를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과 정부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카이스트 졸업생의 입틀막 사건은 철저한 경제 논리에 입각한(그리고 최소 헌법 제 9장 127조 1항에 기초한) 대응이 아니었나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건대 과학을 경제의 도구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도, 경제 외 것을 위한 과학도 연구 개발되지 못할 것이다. ESC(변화를 위한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 “제 9장 127조 1항 고치자” 이러한 문제 의식은 국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동의를 얻고 있다. 변화를 위한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ESC)는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도구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활용성은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경제 발전이라는 족쇄를 채워 관련이 적은 분야나 기초연구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라며 “‘9장 경제'에서 ‘1장 총강'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헌법 제 1장 총강은 법치국가로서 우리나라의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항들이 모여있는 장이다. 헌법 제 1조 ①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며 ②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9장의 조항을 폐지하고, 1장 총강으로 옮기자는 의미는 “과학을 경제 성장의 도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원리'로 삼자는 것이다.”1) 헌법은 모르겠지만, 경제 논리로만 과학을 취급해선 안 된다는 데는 동의한다 헌법을 뜯어 고치자는 주장은 내게도 조금 급진적이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이 경제의 도구로 취급되서는 안 된다는 데는 동의한다. 만약, 과학이 경제의 도구로만 활용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과학은 결국 경제 성장을 최대로 이끌도록 작동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환경 파괴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에는 투자가 적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경제의 도구가 된다면, 과학은 결국 경제 즉 돈의 논리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제를 위한 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환경 파괴, 불평등 등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이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녹자라떼처럼 지역에서 발생하는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이다. 지역적이지만, 공동체의 문제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기록해주고, 비과학자들인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해주고, 과학적인 해법을 마련하고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난 과학이 필요하고, 그러한 과학을 통해 마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이러한 과학을 인내하며 지원을 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렇게 됐을 때, 어쩌면 수 십년이 지나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며 2025년도 과학 분야 정부 예산 카이스트 졸업생 입틀막 사건이 크게 화제가 되자 정부도 이를 의식했는지 내년도 과학 분야 예산을 2023년도 수준인 29조 7천 억으로 증액했다. 40% 삭감 전 예산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증액된 예산 항목을 보면 인공지능, 바이오 등 경제에 맞춘 예산 증가폭이 컸다. 전체 예산 중 기초연구(개인 연구 지원 + 집단 연구 지원) 분야 예산은 2조 3,400억 원 수준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이것이 “역대 가장 높은 예산"이라며 강조했다. 후퇴한 걸 되돌리는데도 1년이 걸렸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 지원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생각해 본다. *글을 올린 2024년 10월 10일(목) 오후 8시,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글 머리에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이후 수상자가 없다고 한 걸 지우려다가 그대로 남겨두고, 글 맨 아래에 한강 작가의 수상에 대해 적어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개인적으로 아주 기쁘다. 1) <사람의 자리> (전치형/ 이음/ 2019)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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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보고 듣기만 해도 변화가 생긴다
극우에 열광한 구 동독 지역 사람들 최근 독일의 선거에서 특이한 결과가 나왔다. 구 동독 지역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가 큰 지지를 받은 것이다. 지역마다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호남과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양분화 된 결과는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독일 결과가 놀라운 건 왜 극우 정당이냐는 것.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구 서독 지역과 구 동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가 여전히 심하다는 것. 물가와 임금 등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고, 그때문에 구 동독 지역 사람들은 서독 지역 사람들과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 둘째, 난민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는 것. 메르켈 총리 당시 이백 만이 넘는 난민을 수용한 결과 구 동독 지역 사람들이 오히려 소외를 겪었고, 극단적으로 난민에게 터전을 뺏기는 지경까지 갔다는 것. 이에 대한 반감으로 “난민은 약탈자, 난민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AfD에 표를 줬다는 것이다. 양극단이 비단 독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 선거 결과는 외부적으로는 하나가 됐을지라도, 내부적으로는 하나가 되지 못한 독일의 현실을 보여준다. 남의 나라 선거 결과를 보면서, 서로가 극단적으로 달랐던 집단 간의 융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함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우리나라야말로 정치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 수도권과 지방 갈등, 빈곤층과 중산층 갈등, 근로자와 고용주 갈등, 노인층과 젊은층의 갈등, 종교 갈등이 만연한 나라다. 개인적으로 요즘에는 ‘역사관 갈등'도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러한 갈등은 인식 정도에서도 나타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올해 3월에 발표한 <2023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회갈등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하고 있었다. 사회갈등 인식률을 높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① 보수와 진보(82.9%), ② 빈곤층과 중상층 (76.1%), ③ 근로자와 고용주 (68.9%), ④ 개발과 환경보존 (61.4%), ⑤ 수도권과 지방 (56.8%), ⑥ 노인층과 젊은층(55.2%), ⑦ 종교 (42.3%), ⑧ 남녀(42.2%) 위 내용은 “갈등 정도가 어느 정도 심하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 ‘약간 심하다'와 ‘매우 심하다'는 응답자의 비율'이다. 특히 보수와 진보 등 정치 이념 갈등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또다른 통계에서는 이런 이념 갈등이 서로를 마주치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12월에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조사 및 대응방안(X) - 공정성과 갈등 인식>에 따르면, 전체 조사 응답자 중 58.2%가 “정치 성향이 다른 이와 연애・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33%는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지인과 술자리에 참여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으며, 71.4%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함께 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한국, “나와 다르면 마주치기도 싫다" 통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마주치기도 싫다.” 이다. 우리니라 국민 중 절반 이상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앞서 “심각하다"고 답변한 갈등이 더욱 심화될 뿐이다. 이렇게 갈등만 심해서, 과연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과 양극화,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정말 의문이 든다. 불평등, 양극화, 기후위기 모두 공동체 문제다.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공동체가 없다는 게 통계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서로 마주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알아가야 한다. “이런 삶도 있구나, 저런 삶도 있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이, 저렇게 사는 사람이, 이런 삶에서는 저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혹은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구나.”를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감청하는 사람들 과거 구 동독에는 이렇게 <타인의 삶>을 감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의 신념이 곧 자신의 신념인 비밀경찰들이다. 이들은 자국민들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감청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사상적 오류가 발견되면 곧바로 자택에 침입해 감옥으로 보냈다. 비즐러는 동독 비밀경찰로, 경찰대학에서 자신이 직접 심문한 사례를 들려주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무표정의 비즐러는 학생들에게 “최소 40시간 정도 잠을 재우지 않는 강도 높은 심문을 해야한다.” 라며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진술 내용이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되며, 분노하지도 않고, 오히려 슬퍼한다. 때문에 이런 결정적 증거를 잡았을 때가 더욱 강도를 높여야 할 때”라고 가르친다. 40시간을 재우지 않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나요?” 라는 학생의 질문에 “사상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악랄하다."리며 “여러분은 도청이란 작업에서 항상 사회주의의 적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적들보다 더 악랄해 져야 한다는 의미다. 당에 대한 충성만이 가득한 비즐러에게, 그의 상관이자 친구인 ‘그루비츠'는 ‘햄프셔 장관'이 참관하는 연극에 가자고 한다. 햄프셔 장관은 일찍이 문화계를 ‘정화'했다고 평가받는 권력자다. 그루비츠의 권유로 간 극장에서 비즐러는 서독에서도 명성 높은 극작가 ‘드라이만'이 만들고, 그의 애인인 배우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은 연극을 관람한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의심스럽다며 감시가 필요하다고 그루비츠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감시를 자청한다. “예술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 모두의 신념이 같을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낸 드라이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햄프셔 장관은 이를 승낙하고, 그 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도청 장치를 설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도청한다. 친구들과의 대화, 생일 파티에서의 작은 말다툼, 애인 크리스타와의 육체 관계, 옆집 아줌마에게 한 “넥타이 좀 매주실래요?” 라는 말,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자신에게 한 말 등등 드라이만이 말하고 듣는 모든 것들은 감시되고, 도청되며, 기록된다. 당연히 드라이만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음악을 진정으로 들은 사람이, 과연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감청이 경청으로 비즐러는 자신의 부하와 교대하며 밤낮없이 드라이만을 감청한다. 그러던 어느날 드라이만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의 정신적 지주인 스승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의 스승은 문화계 명성이 높은 연출가였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찍혀 더이성 연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라이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수화기를 내려 놓는다. 스승의 죽음에 비참해진 드라이만은 피아노에 앉아 과거 소련의 레닌이 “이 음악을 계속 듣고 있으면 혁명을 완수할 수 없을 것.” 이라고 했던 베토벤 소나타 제 23번, ‘열정'을 연주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애인 크리스타에게 말한다. “이 음악을 진정으로 들은 사람이 과연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표정 하던 비즐러에게 약간의 표정 변화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스승의 죽음으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잃었던 드라이만은 피아노 연주 이후 다시 글쓰기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를 감청하던 비즐러도 감청의 내용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동독 정부가 숨기는 ‘자살자 수' 통계 발표에 대한 비밀 대화를 공동 작품 집필로 둔갑시키고, 서독 인사와의 불법 내통에 대해서도 “이번만 눈 감아주지.” 라며 넘어간다. 상관인 ‘그루비츠'에게도 “정황이 없는 것에 밤낮 허비하고 싶지 않다. 혼자서 하고 싶다.”며 허위로 보고한다. 비즐러에 대한 그루비츠의 의심은 점차 커지고, 증거를 잡아 오라는 상부의 압박도 거세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한 특단의 조치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게 이루어지고, 그 중심에 있던 비즐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어떤 선택인지는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가 느낀 감정을 느끼는 것 표정처럼 감정도 없을 것 같은 비즐러는 감청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 중간 비즐러는 아무도 없는 드라이만의 집에 혼자 들어간다. 이유는 없었다. 도청 설치와 내부 조사를 위한 긴박함과 긴장감이 없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비즐러는 거기서 시집 한 권을 가지고 나오고, 그 시집을 소파에서 누워 읽는다. 사랑에 대한 시였다. 영화에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비즐러는 그 시를 읽으며 자신만의 사랑에 대한 상상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비즐러는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존경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동독이라는 감시환경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것인지를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아마 이것이 그가 했던 어떤 선택의 이유일 것이다. 듣기만 해도 이해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비즐러는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듣고 지켜봤다. 감청과 감시가 목적이었다 했을지라도, 그저 듣고 보는 행위만으로도 그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갔다. 비즐러의 그런 모습은 갈등이 심화되고, 나와 다른 사람은 마주치기 조차 싫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는 것, 우리에게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이라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야한다는 것. 서로간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놓고 서로의 입장만 계속해서 이야기 해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내가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느낀점이다. 개인적으론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경계없이 모여 안전하다는 느낌아래 서로의 생각과 경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민사회와 시민단체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싶다.  정치적 이념과 경제적 이득에 치우진 정부나 경제, NGO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직면한 공동체 문제에 주목하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자는 그런 시도 말이다. 그런 대화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를 회복하고, 공동체가 직면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아닐까 싶다. 광교를 사이에 둔 세 개의 국기 여담이지만 지난주 일요일(10월 6일) 서울 종각역 일근에서 세 개의 국기를 봤다. 종로타워빌딩 인근 광교를 사이에 두고 두 집단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국기가 펄력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였다. 각자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십중팔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에 관련된 것이리라. 광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이념과 생각으로 펄럭이는 국기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풀려야 되는 갈등이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갈등은 어딜가나 있다. 비극적인 건 그 피해를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치른다는 것이다. 부디 잘 해결되어, 더이상 무분별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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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독점 반대, 공동체 회복 찬성
대가 없이 주어진 대기를 파괴한 인류 대기는 인류 모두의 공공재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할 때부터 조건 없이 주어졌다. 이 대기는 인류 생존에 필수 자원이다. 비단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 상의 모든 동∙식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다. 그 차원에서 대기 문제는 지구 상 모든 생물의 공통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식물은 잘못이 없다. 그들은 시스템 균형을 맞추고 있는 존재들이지, 인간처럼 시스템을 변형시키고 망가트리는 존재가 아니다. 인류는 농경지 개간을 시작으로 점차 지구의 지형을 변형시켰고, 더 많은 생산과 소비라는 이념을 더해 지구 착취를 가속화했다.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는 상쇄분 이상으로 배출됐고, 계속 대기 속에 남아 지구 온난화를 일으켰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산화탄소는 배출되고 있으며, 내가 글을 쓰는 지금도, 이 글이 올라가는 플랫폼도 모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이 글을 클릭해서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건, 우리 모두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기후위기 등 환경 문제를 공동체 문제라고 하는 이유다. 모두가 파괴했으니,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커먼즈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 해보려고 한다. 커먼즈에 대한 두 가지 개인적 정의 커먼즈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국내에서 커먼즈는 다야한 형태로 번역된다. ‘공유, 공유지, 공동자원’ 등등등 다양하다. 모든 번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으니, ‘커먼즈'라고 쓰겠다. 대략적인 의미는 인류가 공통으로 소유하거나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인류에게 대가 없이 주어진 것. 예를 들면 환경, 자연, 자원, 토지, 대기, 물 등이다.  둘째 인류가 함께 만들어 낸 것. 예를 들면 디지털 플랫폼, 지식 등이다. 인류에게 조건없이 주어진 자연과 환경이 커먼즈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크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인류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이 커먼즈라는 것과 그 예시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은 더욱 그렇다.  디지털 플랫폼의 예는 메타, 유튜브, 구글, 네이버 등이다. 이들이 커먼즈라니. 나는 그냥 썼을 뿐인데. 의아할 것이다. 이들이 커먼즈인 이유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데이터를 생성했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플랫폼 확장에는 데이터가 필수다. 어떤 플랫폼이든 이용자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이용자가 데이터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이용자가 플랫폼을 접속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게시물을 올리는 등 모든 행위를 할 때 만들어진다. 이용자가 곧 데이터 생산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규모 플랫폼의 경우 데이터 생산 직군이 따로 없다. 물론 소규모 플랫폼의 경우 직원들이 직접 이용자가 되어 데이터를 생성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형 디지털 플랫폼은 데이터 생산직군이 없다. 소비자가 다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플랫폼은 플랫폼과 이용자가 함께 만든 것이다. ‘인류가 함께 만들어 낸 것' 이라는 관점에서 디지털 플랫폼이 커먼즈인 이유다. 커먼즈를 독점하는 거대 기업 자원과 이익은 내것이지만, 문제는 모두의 것이다 문제는 거대 플랫폼 소유 기업이 이런 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단 플랫폼만이 아니라, 천연자원, 토지, 농지를 독점하고 있는 거대 다국적 기업 대부분이 그렇다. 플랫폼의 데이터도, 본인들이 자원을 채취하는 땅과 숲, 바다도 모두 본인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정 기업만 자원을 채굴하고, 데이터나 알고리즘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그렇다. 이런 말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피해를 외부화하기 때문이다. 농지를 끊임없이 태우고 개간하며 발생한 이산화탄소, 그로 인한 기후변화 문제는 그 지역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듯 제한된 통로만 배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뿜어진 이산화탄소는 전 세계로 흩어지고 대기로 올라가 기후변화를 강화한다.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가짜뉴스, 딥페이크, 정보유출 등 문제는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이 피해는 벌금을 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벌금이 대가라고 할 수도 없다. 벌금 냈다고 개별 피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는 전형적인 피해의 외부화다. 문제를 외부화하는 한, 독점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인류 출현부터 주어진 환경은 인류 모두의 것이고, 인류가 함께 만들어 낸 것 역시 인류 모두의 것이다. 즉, 인류 공동체의 것이지,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니다. 후자의 경우 최소 그 플랫폼을 이용하고, 데이터를 생성한 사람들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부 다국적 기업은 그것이 특정한 집단이나 소유주의 것인것 마냥 말하며 ‘독점'하고 있다. 만약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이익과 피해를 고스란히 가져간다면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함께 만들어 낸 것(혹은 모두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것)을 이용해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공동체에게 전가하고 있다. 독점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다. 또다른 이유, 공동체를 해치기 때문 커먼즈의 독점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를 해치기 때문이다. 일부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원을 통제하는 한, 그것을 이용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소수 사람들의 방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플랫폼 정책에 변화에 따라 플랫폼 이용자의 사용자 경험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독점하는 한 사람들은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 독점이 강화되면, 이익은 사유화되기 마련이며, 이익은 분배는 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적게 분배된 이익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나눠가져야 한다. 1이라는 이익을 ‘0.1, 0.01, 0.0001, 0.000001’의 형태로 쪼개고 쪼개서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픔이 더 많은 음식을 찾듯, 이렇게 적은 분배는 남보다 내가 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정당화한다. 함께 살자가 아니라, 내가 먼저 살고보자가 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 지는 건 당연하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공동체는 쪼개지고 파편화된다. 이렇게 파편화 된 상황에서 기후위기 같은 공동체의 문제가 눈에 들어올리 없다. 공동체가 함께 움직일리도 없다. 당장 내 눈 앞의 문제가 큰데, 그 너머의 문제가 보일리 없다. 공동체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정부의 태도다. 정부가 독점을 막고, 사회에 공동체의 중요성과 함께 해결하자는 메시지와 시그널을 계속 보내야 한다. 정부가 사회에 어떤 시그널을 보내고, 그 시그널에 맞는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정서도 분명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정책이 아니라, 협렵하고, 함께하는 정책을 만들고 시행해야 한다. 남을 위하는 노동을 하는 돌봉 노동 종사자에게 더 큰 보상을 주고, 자연을 가꾸고, 환경을 보호하는 녹색 일자리를 만들고 보상하고, 더 나아가 이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소중한 것임을 알려줘야 한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가 아닌 독점과 경쟁을 부추기는 기업에게는 더 큰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이런 모습으로 정부가 공동체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 개인들도 정부에 공동체 가치 확산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하며, 그 개개인 자체도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고, 공감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공감하고 인식하지 않는데, 공동체에 대해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독점에 반대하고, 공동체에 찬성해야 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그 모든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자칫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는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개개인이 함께 모여 떠들어 대야 할 이슈 중 하나가 ‘독점' 이라고 생각한다. 자원의 독점, 플랫폼의 독점, 지식 재산권의 독점 등 다양한 형태의 독점에 대해 반대하고, 그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임을 말하고, 그 문제와 방안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해야 한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떠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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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차 늘리면 된다? 오답이다
국토교통부 “친환경 차량 증가세 뚜렷하다" 국토교통부가 2024년 7월 21일에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국내 신규 등록 차량은 823,000대다. 이중 휘발류차는 358,000대, 경유차는 70,000대, LPG차는 84,000대가 등록됐고, 하이브리드차는 240,000대, 전기차는 66,000대, 수소차는 2,000대가 등록됐다. 전체 등록 차량 비중에도 변화가 있었다. 친환경 자동차(전기차, 수소, 하이브리드)는 293,000대가 증가해 누적 2,413,000대가 등록됐다. 반면, 내연기관 자동차(휘발유, 경유, LPG)는 107,000대가 감소해 23,539,000대가 누적 등록됐다.* 국토교통부는 이런 변화를 두고 “내연기관차(경유차)의 감소세와 친환경차의 성장세는 뚜렷하다.”라며 국민들이 자동차 시장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도록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많은 국민에게 유용할 수 있는 맞춤형 통계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누적 차량 대수도 증가한다는 것 친환경차의 증가세가 뚜렷하고, 내연기관차의 감소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만 보면 시장과 사회가 친환경으로 돌아선 듯 보인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친환경차가 늘어나도, 누적 차량 대수가 증가한다면 환경에 전혀 이롭지 않다. 2024년 상반기 기준, 국내 누적 차량 등록 대수는 26,134,000대, 전체 인구 51,271,480명이다. 즉, 국민 1.96명 당 1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수치도 더 적은 인구가 더 많은 차량을 소유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인구감소가 대두되고 있지만, 2023년에는 오히려 인구가 증가했다. 인구 증가에도 인구 대비 차량 소유 비율이 감소했다는 건, 인구 증감 속도보다 더 많은 차량이 등록됐다는 의미다. 즉, 인구보다 더 빠르게 차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친환경차 증가 ‘강조’가 아닌, 누적 차량 증가를 ‘우려' 해야 한다 국토교통부는 보도자료에 ‘친환경 차량 증가'를 강조한다. 마치 친환경이니 괜찮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렇지 않다. 국토교통부가 기후 위기를 걱정했다면, 친환경차 증가 강조가 아니라, 누적 차량 증가를 우려 했어야 한다. 현재 기후 위기는 부족이 아니라, 과해서 발생하는 문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물질 소비, 낭비와 폐기물이 감당안 될 만큼 많아서 발생한 것이다. 너무 많다의 해법은 감소가 되어야 한다. 누적 차량 증가를 우려해야 한다고 한 이유다. 이 차원에서 보면 도로교통부의 보도자료는 “도로교통부는 기후위기에 더 빨리 다가가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심지어 도로교통부가 말하는 하이브리드 차는 친환경도 아닐뿐더러, 에너지 발전 비중을 살펴보면 국내에 진정한 친환경 차량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국내엔 사실상 친환경 차가 없다 하이브리드차란, 전기와 내연기관 엔진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전기와 석유를 같이 쓴다는 말이다. 실제 증가량도 하이브리드차가 전기차보다 2배 가량 높다. 하이브리드차는 전기차로 가는 여정의 징검다리로 여겨진다. 전기차 충전 설비 확충에 시간이 걸리니, 하이브리드차를 먼저 지원해 설비 확충까지 시간을 벌자는 전략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이브리드차를 친환경으로 홍보하고 정부 보조금을 지원했었다. 당연한지만 석탄과 석유를 동력으로 하고, 석탄과 석유로 만든 전기가 동력인 자동차는 친환경이 아니다. 친환경 석유차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전기차도 마찬가지다. 전기 생산 동력이 화석 연료라면 친환경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석탄으로 전기를 만들어 전기차를 운전한다면, 이는 단순히 화석연료를 다른 화석연료로 대체하는 것밖에 안 된다."1) 생산 단계가 아닌 최소 운행 단계에서라도 친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재생 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쓰는 전기차가 운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재생 에너지 발전 비중을 보면 이 또한 한참 부족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24년 5월 기준 국내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발전 비중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발전 에너지 중 재생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4.4%에 불과하다. 나머지 85.6%는 비재생에너지(석탄, 원자력, 천연가스)로 생산 중이다. 전기차의 전체 비중이 적고, 석유와 함께 운행되는 하이브리드차의 수치가 올라가는 상황, 이에 더해 재생 에너지 발전 마저 적은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국내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차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탄소 배출 세 번째로 높은 ‘수송' 분야, 전환 반드시 필요 수송 분야는 국내에서 반드시 탈탄소화 시켜야 할 분야다. 2023년 우리나라 수송 부문 잠정 탄소 배출량은 약 9,500만 톤이다. 전체 탄소 배출량의 약 15%를 차지한다. 산업과 에너지 전환 부문 다음으로 높다. 우리나라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는 2030년까지 수송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을 6,100만 톤까지 줄이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무공해차(전기・수소차)를 450만 대까지 보급할 계획이다. 달성 여부는 요원하다. 전기차 배터리 화재 이후 전기차 구매 심리가 위축됐고, 전기차 대신 하이브리드차를 사겠다는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현대차도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을 2028년까지 40% 늘려 133만 대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목표이긴 하나, 현대・기아차 국내 점유율이 73%인 것과 소비자 반응을 보면 하이브리드차의 증가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승용차, 승합차, 버스의 평균 사용 연한은 15~20년이다. 즉, 새로 생산되는 모든 차량이 재생 에너지를 연료로 쓴다고 해도, 모든 차량이 화석연료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수십 년이 걸린다는 의미다.2) 이런 상황에서 하이브리드 차의 판매 증가는 갈길 바쁜 탄소 감축과 전환을 더욱 멀어지게 한다. NDC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선, 수송 분야 탄소 배출량을 현재보다 30%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매년 10%씩 감축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현재 상황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기차를 늘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전기차는 징검다리일 뿐 목적지가 아니다 전기차는 목적지가 아니다. 최종 목적지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전기로 움직이는 대중 교통 체계 구축을 위한 징검다리 말이다.2) 도로교통과 수송 분야 탈탄소의 목적지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전기차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 이동 수단 없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의 수명 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누적 차량이 줄어들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적절한 정책과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이렇다. 도로 폭을 좁히고 인도를 확장  (재생 에너지 만을 연료로 하는) 친환경 대중교통 확충 고속도로의 주행 허용 속도 낮추기독일의 경우 130km로 제한시 190만 톤, 100km 제한시 540만 톤 감축 효과2) 자동차 제품 설계시 최고속도 제한예) 현재 200km를 100km로 제한 특정 거리 이동에는 탄소 배출이 많은 이동수단(항공 등)을 이용 금지 정책화예) 100km 이내에는 항공 이용 불가 집과 직장, 의료시설, 편의시설 접근성 개선15분 혹은 20분 내 도보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역 계획 정책 수립 정부는 이처럼 가능한 대안을 최대한 마련하고, 토론하고, 조율하고, 반영해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에는 자동차의 절대량을 낮추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대안이 나와도 탄소 중립을 이룰 수 없고, 기후 위기를 피할 수 없다. 승소한 기후소송, 패러다임 전환으로 대응하는 목표와 방안이 나오길 현대차 창업주 정주영은 “인체에 비유하면 고속도로는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혈관을 흐르는 피와 같다. 이 때문에 좋은 자동차를 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 내에 좋은 피를 공급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3) 라고 말했다.  좋은 차를 싸게 공급한다, 이것이 그간의 패러다임이었다. 이 패러다임 때문에 우리 일상의 자가용은 삶의 부품이 아닌 핵심이 됐다. 이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친환경 차량 늘리기가 아니라, 차량 줄이기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 이동수단 없이도 불편함이 없는 삶의 전환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개입해야 할 가장 최우선 지렛대다.4) 기후소송 승소로 탄소중립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났다. 정부는 2030년 이후의 탄소 중립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새로운 방안에는 늘리는 방식이 아닌, 줄이는 방식이 채택되고, 줄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특히 나 같은 뚜벅이와 따릉이 시민을 위해선 더더욱 그런 방안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론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자가용의 대안이 훌륭한 대중 교통이라고 믿지만, 사실 진짜 대안은 훌륭한 동네다. 그것이 자동차를 사회 조직의 중심 원칙이 아니라 삶의 한 부품으로 되돌리는 작업의 핵심 원칙이다.5) 최근 읽은 책에서 발견한 부분이다. 공감이 되어 밑줄을 그었다. 그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말 그대로 자동차 운전은 아무도 좋게 평가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나쁜 냄새로 공기를 오염시키는 까닭에 중단해야만 한다. 산책이나 계속하자.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6) ※ 참고 자료 ※ 1)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 (빌 게이츠/ 김영사/ 2021) p.198 2) <기후책> (그레타 툰베리 외/ 김영사/ 2023) p.284, 348, 350 3)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제삼기획/ 2001) 4) <ESG와 세상을 읽는 시스템 법칙> (도넬라 H. 메도즈/ 세종/ 2022) p.316 5) <자연 자본주의> (폴 호컨 등/ 공존/ 2011) p.125 6) <산책> (로베르트 발자/ 민음사/ 2016) p.19 * 친환경차의 신규 등록 대수와 누적 등록 대수의 변화가 일치하지 않는 건, 폐차가 등록 말소가 포함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자료에는 폐차나 등록 말소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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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울 원전 3・4호기 짓고, 재생에너지 발전 막는 정부. 뭔 짓거린가
2년 전 예정된 신한울 원전 3・4호기 원전 건설 허가 “고사 직전인 원전 살리겠다" 정부가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을 허가했다. 준공 예정 시기는 약 8년 뒤다. 3호기는 2032년 10월에, 4호기는 2033년 10월에 완료될 예정이다. 2년 전에 예정된 수순이었다. 지난 2022년 6월 16일, 정부는 ‘새정부 경제정책방향’를 발표하며 “탄소중립・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조속 재개, 운영 허가 만료 원전 계속 운전 등으로 원전 비중을 제고"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10일에는 한발 더 나아가, “원전 중소・중견 기업 ‘돈’ 걱정 사라진다"라며 신한울 원전 3・4호기 보조기기 계약 체결 시 선금 30%를 선지급 하는 ‘선금 특례 제도'까지 마련했다. 계약을 체결해도 실제 납품할 때까지는 대금을 받기 어려웠던 것을 해결해주겠다는 취지였다. 해외 판로 개척도 열심히 했다. 지난해 5월에는 국내 원전 수출 경쟁력 향상을 위해 48억의 신규 수주 지원을 했고, 그 결과 지난 7월 17일에 체코 원전 30조 원 수주에 성공했다. “고사 직전의 원전 생태계를 복원"해서 “탄소중립이자 국부 창출의 주역”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기업 참여까지 독려하고 있다. 지난 5월 CF100 인증제(Carbon Free 100, 원전・수소 등이 포함된 무탄소 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100% 사용) 창설을 발표했다. 기업의 원전 에너지 사용량을 늘려, 탄소중립을 돕겠다는 취지다. 원전으로 기후위기를 잡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국내 기업 82%는 “CF100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수출로 먹고 사는 국내 기업에게 국제 사회 요구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국내 기업에게 요구하는 건 RE100(재생에너지 100%로 전력 생산)이다.  만약, 정부가 정말 기업을 생각했다면 원전을 말할 것이 아니라,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높이고, 전력 망을 확충하도록 지원했어야 한다.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탄소중립과 기후위기를 위해서라도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어야 한다. 정부는 그렇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재생 에너지는 고사 중이다. 진짜 고사 중인 재생 에너지, 아프리카보다 뒤처지고 OECD 꼴찌 수준 정부가 원전을 살리는 사이, 재생 에너지는 고사 중이다. 국내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중은 아프리카 평균보다 낮아졌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OECD 가입 국 중 꼴찌 수준이다. 영국의 글로벌 싱크탱크 엠버(Ember)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전체 에너지 발전량 중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중은 5.4%였고, 아프리카는 4.6%였다. 하지만, 2023년에는 아프리카는 6%가 된 반면, 우리나라는 5%로 하락했다. 지지부진한 재생에너지 발전량과 비중을 늘리는 게 현 정부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태양광과 풍력 등은 탄소중립 달성에 가장 유용한 에너지로 인정받는 에너지다. 정부의 역할은 이 에너지를 확충할 제도와 방안을 마련하고, 지원해야 한다. 또한, 관련해서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지역민(예를 들어 송전탑 건설 등)과 토의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수용하고 반영해야 한다. 실제 정부는 주민과 대화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원전 강화를 말한 새정부경제정책방향 발표 당시 “재생에너지는 주민수용성에 기반하여 보급을 지속하되, 비중을 합리적 수준으로 조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주민수용성에 대비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합리적 수준으로 조정한다고 말한 것에 빗대어 보면, 정부 방향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부, 재생에너지 발전 규제 “사업 허가 안 준다” 주민 수용성 기반한다던 약속은 어디로? 주민수용성이란, 발전사업 개발사가 주민에게 일시적・영구적 피해를 보상하고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을 말한다. 정부가 말한 주민수용성이 진짜였다면, 재생에너지 보급에도 지역민의 의견을 구하고, 보급 중단에도 지역민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정부는 그러지 않고 있다. 산업통산자원부는 지난 9월 1일부터 재생에너지 신규 허가 규제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태양광 발전이 가장 활발한 지역과 해상 풍력 발전량이 많은 제주도의 재생 에너지 신규 허가가 중단됐다. 허가 중단 이유는 “전력을 생산해도 송전 시설이 부족해서 전달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지역에서 생산해도 다른 지역으로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재생에너지 발전 단체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오히려 현재 이격거리 규제를 풀어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규제를 풀어서 재생에너지 발전을 독려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규제를 걸어 발전을 저해하는 모양새다. 송전시설이 문제라는 건, 정부 스스로 재생 에너지 생산 문제가 아니라, 송전 시설 확충이 문제라는 고백이다. 재생에너지 사업 허가 규제는 전기 전달의 문제를 전기 생산 차단으로 대처한 것이다. 만약 송전 시설이 문제라면, 정부가 나서서 더욱 주민과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게 마땅하다. 주민 수용성을 기반으로 조절하겠다고 한 말이 진심이라면 말이다. IEA “태양광 에너지 투자금이 다른 모든 에너지 투자금보다 많다" 국토 0.7%만 쓰면 2030년 탄소중립 경로 맞출 수 있어 과거에는 태양광의 투자 비용이 많다는 인식이 있었고, 실제로도 석탄과 석유 등 다른 화석 에너지에 비해 단가가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투자량이 많아져 가격은 싸졌고, 효율성도 높아져 면적 단위당 전력 생산량도 높아졌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태양광 에너지 투자금이 다른 모든 에너지 투자금보다 많다"고 말한다. IEA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태양광 발전 투자량은 5,030억 달러이며, 그 외 에너지 투자량은 4,260억 달러다. 이러한 투자량에 힘입어 태양광 발전의 발전 단가는 싸지고 있고, 에너지 효율도 좋아져 더 작은 패널로 더 많은 발전도 이룰 수 있는 실정이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산지가 70%라 많아 태양광 발전이 용이하지 않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높아져 현재 국토의 우리나라 국토의 0.7%만 사용해도 2030년 탄소중립 경로를 맞출 수 있다. 지역에서도 에너지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태양광 발전 움직임과 에너지 지역 자립 움직임이 강하다. 정부의 확장 의지만 있으면 재생 에너지 확장은 분명 가능한 일인데, 느닷없는 원전의 확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10년 뒤에나 완공되는 원전으로 어떻게 탄소중립을? 그와중에 암모니아 혼소 석탄 발전에 3조 투자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원전 완공까지 걸리는 10년의 기간 동안 에너지 부분 탄소중립을 어떻게 이루겠다는 부분이다. 신한울 원전은 약 10년 뒤에나 완공된다. 그 말인즉슨, 10년 내 신규 원전에 의한 전력 생산이 없다는 말이다. 당장 내년에 원전 완공이 가능하고, 바로 에너지 생산이 가능하다면 정부의 원전 정책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의문이다.  만약, 원전과 함께 재생 에너지 발전을 함께 늘리는 방향으로 설정했다면 어느정도 이해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재생 에너지 발전 비중을 줄이는 정책과 제도를 피고 있는 현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탄소중립 의지가 있는건지 의심스럽다. 당장 2030년의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그 와중에 2030년부터 적용되는 ‘암모니아 혼소 석탄 발전’에 3조의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퇴출 시켜도 모자랄 판에,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화석연료 기득권도 없는데 도대체 왜 화석연료 자원이 있는 국가의 경우 화석연료 추출 기업이나 지지자들의 기득권이 견고하다. 때문에 그들의 로비와 반대로 재생 에너지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해당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다르다. 화석연료 기득권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이 오히려 빨라야 한다. OECD 기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꼴찌인 수준은 정부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 화석연료 자원이 없는 게 오히려 장점인 상황인데, 그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족이 아니라 무능이다. 기업들이 반기지도 않는 CF100 인증제를 만들고, 당장 에너지 증가도 없고 2030년의 목표 달성도 어려운 원전을 전면에 내세우며 재생 에너지 발전은 줄이는 게 도대체 뭔 짓거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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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사회 한국, 떠나는 한국인
“한국이 싫어서, 그래서 떠났어” 최근 개봉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는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계나는 편도 2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을 견디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다. 계나는 해 뜨기 전 출발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매일매일 열심히 뛰어서 버스에 탄다.  버스가 회사까지 가면 좋으련만, 그녀는 몇 번의 환승을 거쳐야만 회사에 갈 수 있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또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서 온 회사지만, 출근하자마자 드는 생각은 “집에 가고 싶다.”이다. 직장 생활도 맞지 않는다. 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며 자격 미달의 업체를 선정하라는 상사에게, “자격 미달의 업체를 걸러내기 위해 공개 입찰을 하는 거예요.”라며 맞선다.  부당한 상사의 지시에 계나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말은 “퇴사하겠습니다.” 물론 진짜 퇴사는 아니다. 상사의 기를 꺾으려는 것. 팀장 역시 갑작스럽게 팀원이 퇴사하면 인사고과에 좋게 반영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던 말이다. 결국 계나는 팀을 옮기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하지만 계나의 고민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 집은 이사가는 데 적금 깨서 돈 좀 보태달라고 한다. 남자친구와 그의 부모님들은 계나의 사정을 아는지 자꾸 동정한다. 더구나 한국의 겨울은 너무도 춥다. 보일러 안 되는 집에 이불을 아무리 감싸도 추위는 봄이 와야지만 누구러진다. 하지만 이는 계절의 변화일 뿐. 다른 의미에서 계나에게 봄날은 올 기미가 없다.  결국, 계나는 선택한다. 한국을 떠나기로. 저 멀리 남쪽의 따뜻한 나라로 가기로. 시급 높고, 날씨 좋고, 직업과 가진 것으로 판단 안 하는 나라로 가기로. 새로 시작하기로. 그녀의 독백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 못 살겠어서.’” 서울에 사는 것도 스펙이야 6년 전이다. 대학내일에서 유튜브에 한 영상을 올렸다. 제목은 <서울로 취직한 지방러의 속마음>. 2분 30초 남짓의 영상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두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민영아, 서울에서는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월급이 반토막 난다? 그러니까 나는 서울 사는 동기보다, 반밖에 못쓰고 못 모은다는 거지. 서울에서 태어나는 거 그거 진짜 좋은 스펙이더라.” “우물 안 개구리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거든? 근데 그 우물이 생각보다 안전하고 따뜻했구나 싶은거지. 여기서 안 내려가고 버티면, 나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6년 전, 처음 저 영상을 보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친구들과 한창 대화를 나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각기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내 친구들은 자신들이 내는 월세가 얼마인지, 공과금이 얼마인지, 생활비가 얼마인지 등 숨만 쉬어서 나가는 돈을 소리 높여 말했다. 가볍게 세 자리가 넘어갔다.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초년생들이 내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 금액을 내 친구들은 대학생 때부터 꼬박꼬박 미루지 않고 냈다. 물론 그 돈을 꼬박꼬박 내기 위해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쉬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원해주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친구들의 경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자립심 강했던 친구들은, 부모에게 힘든 소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억센 사투리는 그런 말을 할 때면 화가난 듯 들리다가도, 서글프게 들리곤 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친구들은 개천에서 용난다 정도의 업적은 아닐지라도, 집안에서는 다시 없을 경사였다고 말했다. "내 새끼 서울가는구나"라며 꼭 안아줬다고. 그런 축하를 받았는데, 어떻게 집에 힘든 소리를 하겠냐고 말하곤 했다. 내 친구들에게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서울이라는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고 떨어진 낙오자를 의미했다. 친구들을 보며,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 생활이란 ‘부모에게 조차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삭히며 웃어야 하는 생활'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서울 토박이가 뭘 아나, 뭘 누리고 있는지" 물론 서울도 서울나름일 것 “서울 토박이가 뭘 아나" 라는 친구의 말이 모든 서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서울 사람이라도 거주지와 거주 형태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자가, 전세, 월세의 삶이 다르고, 아파트와 빌라의 삶이 다르고, 강남과 강북의 삶이 다를 것이다. 서울에 살아도 안락함과 안정감은 제각각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자가 보유율은 55.8%, 자가 점유율은 51.9%였다. 수도권은 서울, 인천, 경기권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울 거주자의 자가 보유율과 점유율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자가가 아닌, 전세와 월세는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내 친구들과 영화 속 계나, 영상 속 지방러의 말에 담긴 ‘서울에 사는 것도 스펙' 이라는 말은 서울에 자가를 보유한 집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국토부의 통계는 서울 사람 대부분이 이 ‘서울' 스펙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울로 모인다. 최근 한국은행은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 대응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서울 집중과 그에 따른 문제 원인을 ‘입시' 경쟁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 수혜를 일부 지역만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행, “소득 높으니 대학도 잘가더라" 한국은행 보고서를 요약하면, “서울이건, 지방이건 학생들의 능력 차이는 없다. 다만, 거주 환경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인재는 어디에나 있다. 지방 학생 수에 비례해서 학생을 뽑자. 이것이 그 어떤 경제 정책보다 효과적인 수도권 집중 현상과 서울 집 값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대학교 총장이 결단하면 된다.”이다. 사진의 모습처럼 우리나라는 수도권 특히 서울 집중 현상이 크다. 한국은행은 그 이유를 입시 경쟁으로 지목한다. 내 자녀가 나보다 더 나은 삷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교육에 투자하게 하고, 그 교육열이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이어져 집 값 상승과 사교육비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사교육비는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런 경쟁은 부모들이 직접 수능까지 접수하게 한다. 자녀가 밟고 설 밑바닥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낸 서울대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나, 서울대생 부모야.”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한편, 이러한 사교육 지출에도 상위권 대학에 가는 건 소득 분위가 높은 가정의 학생들이었다. 그 중 서울대의 경우 강남3구 거주 학생들의 진학률이 가장 높았다. 물론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 진학이 결코 사교육에만 의존해서 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 개개인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있을 수 있는 결과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고, 학생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저소득층이나 고소득층이나 사교육비 지출이 높은 가운데, 고소득층의 학생들이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건 안타깝다. 대학이 계급인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던 분노가 8년 전인데, 아직도 진행 중이다. 대학교 간판은 영원한 계급 보고서는 입시 경쟁만이 아니라, 학교 내에서의 계급화도 다룬다. 보고서는 서울대 학교 재학생들이 “지균충 기균충(지역균형전형 기회균형전형 입학생 비하)”라며 서울 외 지역에서 입학한 학생들을 비하하는 걸 직접 다뤘다.  놀랍지는 않다. 과거에도 명문 대학교 내에서 성골, 진골, 6두품 등으로 급을 나눴었다. 그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대학교 간판이 계급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너랑 나는 급이 달라.” 말로 애써 내뱉지 않는 저 말을, 마음속에는 은근히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한국은 이상하게 대학교에 집착한다. 대학원도 아니다. 학부를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서울대 대학원을 나와도, 학부가 서울대가 아니면 소위 쳐주지 읺는다. 유튜브에서 학부의 중요성을 개그 소재로 사용된다. 수능 커뮤니티에도 대학교 서열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입학하고 졸업한 대학교가 내 위치를 말해준다고, 저기에 가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걸 학생들 잘못이라 말할 수도 없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인데,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다. 기업 평가 최하위, 한국 대학생 한국은행의 보고서는 이런 계급을 올리기가 학생들의 창의성과 협동심을 줄이고, 기업의 대졸자 평가에서도 최하위를 기록하게 만듦을 보여준다. 상위권 사람의 능력이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능력은 처참하다. 창의성과 협동심이 하락한 채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기업에서 낮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어느 조직에서, 어느 프로젝트를 하던지 상관없이 중요한 건, 개인 능력보다 팀의 능력이다. 팀 능력이 좋으려면, 팀 원 간 협업이 잘되어야 하고, 타 부서와도 협업을 잘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통과 협동이 필수다. 이는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얼마나 교류했는지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창의와 협동보다, 경쟁과 계급을 배우는 지금의 구조에서 그런 능력이 키워질리 없다. 한국은행, “지역 비례 선발제로 학생들 뽑자" 한국은행은 이 문제의 대안으로 ‘지역 비례선발제'를 제시했다. 이유는 “다양성 확대"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존중하고, 협업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과도한 입시 경쟁과 서울 집중 현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방안이 허무맹랑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만큼, 지금의 현실도 허무맹랑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이없는 세상을 바꾸려면, 어이없는 대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의 대안은 개인적으로 과도한 입시경쟁과 서울 집중 완화, 다양성 확대면에서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꼭 한국은행의 대안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을 타파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고향이든, 타향이든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처지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계나는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디딛고 만난 한국 남자 ‘재인'이 “나는 지잡대 나왔어.”라고 주먹을 내밀자, “나는 홍대 나왔어.”라며 ‘나는 너랑 달라.’라는 티를 낸다. 둘 다 영어 못 한다고 현지인에게 핀잔 듣고, 같은 어학원을 다니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계나의 그런 모습은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이 자신을 동정하자 남자친구에게, “너 나랑 같은 대학교 나왔어. 나도 너처럼 서울에서 좋은 학원 다녔으면 더 좋은 대학교 갈 수 있었다고.”라고 화내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동급의 동정을 못 참는 것처럼, 하급의 동급 취급도 못 참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같은 학교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다른 학교와도 계급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 계나는 재인을 지잡대 나온 양아치로 인식한다. 몇 년이 지나 재인과 통화하던 계나는 어학원 다닐 때의 첫인상에 대해 재인에게 말한다. 양아치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지잡대 나온 양아치여서 아침까지 술 마시다가 어학원에 빠지는 줄 알았던 재인은, 남들이 잘 때 일어나 아침부터 일을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안 계나는 그제서야 진실을 알고 깨달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함께 살아가는 종족이다. 서로가 부족한 걸 채워나가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등을 맞대야 할 같은 처지다. 그런 종족에게 대학이라는 간판으로 만든 계급과 서열은 서로를 양분하여 협업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위계만 만드는 초석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현상으로 저출산과 서울 집중, 집 값 상승 등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서울이 스펙이 되지 않고, 대학이 계급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지방러 고충 영상처럼 “서울 사람 될 수 있을까.”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이 계급이 되는 순간, 어떻게든 올라가려 서울로 올라오는 현상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서울 외 모든 것이 오답이 되어 버린다. 서울이 정답이 될 수 없다. 서울만이 줄 수 있는 계급이란 것도 없다. 과거의 풀이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만 떠날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처럼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교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 친구에게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친구와 짧은 대화다. “나 퇴사 했어.” (친구) “오, 이직하게?.” (나) “아니. 이민 준비한다. 더는 안 되겠다.” (친구) “왜?”(나) . . . “한국이 질렸어. 이제 싫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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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같은 열대야를 보내고
2024년의 여름, 열대야 2024년의 여름밤은 너무나도 더웠다. 더위로 잠 못 들고, 더위로 일어난 나날들이었다. 자려고 누운 방안에 온통 더운 공기가 가득했다. 환기 시키려 창문을 열었지만, 소용없었다.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도 그저 더운 바람을 밀어낼 뿐. 에어컨처럼 온몸에 냉기를 휘감아 주지 못했다.  잠 설치는 날이 많아지자 피로가 몰려왔다. 입술에 하얀 포자가 하나둘씩 생겼다. 구내염이었다. 구내염 치료를 위해 알보칠을 사러 약국에 갔고, 약사에게 구내염 발생 이유를 물었다. “비타민 B가 부족하거나 피로가 쌓이면 발생할 수 있어요.” 라고 했다. 비타민 문제는 아닐 터였다. 종합 비타민을 거의 매일 먹으니까.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약사가 물었다. “잠 잘 못 자시나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는 반팔티를 팔락였다. 그리고 물었다. “요즘 저 같은 사람이 많나요? 더워서 잠 못 자고 피곤해서 약 사러오는?”. 약사가 말했다. “한국인은 항상 피곤해해요.” 짧게 쓴 웃음 짓고 나오려는 내게, 약사는 “알보칠 바르고 빨리 나으세요.” 라며 부채 로고가 새겨진 자양강장제를 건넸다. 자양강장제를 마시고, 며칠이고 알보칠을 발랐지만 구내염은 낫지 않았다. 한쪽이 나으면 다른 한쪽이 나고, 다른 한쪽이 나으면 또 다른 한쪽에 났다. 7월에 생긴 구내염은 9월이 되서야 사라졌다. 열대야가 끝난 시점이었다. 잠 푹 자니 해결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났다. 2020년의 여름, 장마 2020년의 여름은 시원했다. 당연하다. 당시 한반도는 이상 저온 현상을 겪었다. 전 세계는 고온 현상이 나타났는데, 유독 한반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온의 여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던 건 아니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고, 56일의 기록적인 장마로 외부 생활이 어려웠다. 멈추지 않는 비에 거리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무수히 고여있었다. 뛰어도 넘을 수 없는 큰 웅덩이는 밟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밟은 웅덩이에 신발과 양말이 젖었고, 젖은 신발과 양말은 웅덩이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젖은 양말과 신발은 빨아도 잘 마르지 않았다. 햇빛이 간절했지만, 하늘에 먹칠한 구름만 가득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구름에 있는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내리면 마를 법도 한데, 누가 마르지 말라고 계속 수증기를 쑤셔 넣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구름이 한반도에 모여 있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비에 짜증이 났었다. 숨쉬기 힘든 마스크도 빨리 벗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장마나 코로나나 당시로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다신 겪고 싶지 않다.” 장마가 끝나는 날, 내 일기에 쓰인 마지막 문장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장마와 열대야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 같다.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보고서의 결론이다. 온실가스 배출은 줄지 않았다 IPCC가 낸 6차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감축이고, 둘째는 적응이다. 감축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고, 적응은 1.5도 혹은 2도가 올라간 지구에 적응해서 살 수 있도록 정책과 서비스, 시스템 등을 정비하는 것이다. 감축이건 적응이건 온실가스 배출 감소는 필요하다. 특히 이산화탄소는 꼭 제거되어야 한다. 직접 없애지 않는한, 대기 중에 계속 머물기 때문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그대로 둔 채, 계속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면, 대기 속 이산화탄소는 지구를 둘러싸고 계속 뜨겁게 데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멈추지 않는 건, 불에 기름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보고서를 처음 읽었을 때 허무했었다. 그렇게 정부건, 기업이건, 시민이건 대응하겠다고 하는 데 실질적으로 줄어든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다. 7차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는데, 희망 이야기가 나올지 의문이다. 한편으론 더 악화한 이야기만 나올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을 하니 벌써 짜증이 난다. 매년 구내염과 함께한다고? 매년 젖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고? 열대야가 계속되고, 장마가 계속 될 거라는 말보다, 여름이면 구내염과 함께하고, 젖은 양말과 신발과 함께 할 거라는 사살이 더 짜증이 난다. 참, 주옥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1960년에 태어난 사람은 심각한 폭염을 평균적으로 일생에 네 번, 2020년에 태어난 아이는 무려 열여덟 번이나 겪게 된다고 한다. 또한, 지구 온도가 0.5도씩 상승할 때마다 발생 빈도는 갑절로 늘어난다.1) 최근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뭐가 가장 걱정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날씨”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야 저거 봐, 저 날씨를 보라고. 저게 사람 사는 날씨냐고. 내가 바나나야? 오렌지야? 귤이야? 내 애가 저런 날씨에 밖에 돌아다니기나 하겠냐고.” 라고 말했다. 그 뒤 친구는 한참 동안 어릴 때 보낸 여름 방학 이야기, 결혼 생활 이야기, 먹고 사는 이야기, 자식 이야기를 했다. 예전 여름은 이랬고, 이렇게 놀았고, 이런 추억이 있었고, 결혼하니 이렇고, 저렇고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은연중에 “날씨 더 더워지면, 예전처럼 밖에 돌아다니면서 놀지도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야, 주옥같은 소리하지 마.” 그리고 말했다. “삼촌이라는 인간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내 애 말귀 알아들을 때 그딴 말 하지도 마.” 이런 말을 하는 사이 애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제 노는 시간 끝났다.”며 쫓겨 내듯이 나를 내보냈다. 친구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2020년의 태어난 아이는 심각한 폭염을 열여덟 번 겪게 된다"는 부분을 몇 번씩 읽었다. “그러면 안 되지.” 그 뒤 절망하기보단 나부터 잘하자는 생각으로 8월 한 달 동안, 웬만하면 걸어 다니며 대중교통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러다 보니 하루 평균 22km를 걸었다. 22km의 수치가 나 자신이 얼마나 영향을 줄였나 하는지 수치화한 것 같았다. 기후위기가 22km 만큼은 멀어졌길 하는 바람이다. 한 가지 의문인 건, 그렇게 걸었는데도 살이 쪘다는 것. 멀어진 만큼 무거워졌다. 걸어서 살 뺐다는 말은, 다 거짓말인 것 같다. 1) <기후책> (그레타 툰베리 외/ 김영사/ 2023)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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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가사관리사, 그들은 누구일까
100명의 필리핀 가사관리사들 입국 지난 8월 6일,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100명이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오는 9월부터 6개월간 한국 가정에서 가사관리사로 일하게 된다. 모두 최저임금과 4대 보험을 적용받는다. 전일제 고용 시 월 238만 원을 받게 된다. 서울시는 총 157가정을 선정했다. 선정된 가정은 동남권(서초, 강남, 송파)이 59가정, 도심권(종로, 중구, 용산, 성동, 광진, 서대문, 동대문)이 50가정, 서북권(은평, 마포, 양천, 강서)이 21가정, 서남권(구로, 영등포, 동작, 관악)이 19가정, 동북권(중랑, 성북, 노원, 강북)이 8가정이었다. 선정된 가정을 보면 동남권이 약 40%로 가장 많다. 소득 수준이 높은 동네다. 강남 8학군이라는 말처럼, 이 지역은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될지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강남권 부모들이 주로 활동하는 한 맘 카페에서는 “필리핀 가사 도우미가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까요?” 라는 문의가 올라오고, 그 답변으로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서 도우미로 쓰면 영어 유치원 보내는 것과 같다.”는 답변이 올라온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가사를 도우러 온 건지, 자녀 교육을 위해 온 건지 혼란스럽다. 자녀 교육도 가사의 일환인가 싶다. 가정 내 언어로 영어를 쓰는 걸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글쎄. 어디까지가 업무 범위인지 구분 짓기 어려운 상황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일하는 가정 자녀의 영어까지 신경 써줘야 하는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행여 우리 가사관리사는 영어를 잘한다, 우리 가사관리사는 생각보다 못한다며 비교 대상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실효성에만 집중되어 있다 언론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시민들의 관심사도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실효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어떤 비자를 통해 국내에 입국했고, 급여를 얼마를 받는지, 가사관리사 제도가 실효성이 있을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일부 논쟁에서는 최저임금을 줘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집중되기도 한다. 이러한 실효성 논쟁이 불필요한 건 아니나, 여기에만 집중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필리핀 가사관리사 도입은 6개월 시행을 거쳐 정식 도입할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실효성이 좋아서 도입이 확대된다면 향후 우리나라에는 해외 가사관리사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도를 안착시켜야 한다면,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이 어떤 문화와 배경 속에서 온 사람들인지 아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아봤다. 필리핀 가사 관리사, 그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배경을 갖고, 고학력의 전문가 일자리를 버리고 우리나라의 가사관리사로 왔는지 말이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그들은 누구인가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한국에 온 표면적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 것이다. 1인당 GDP를 봐도 필리핀과 우리나라의 소득 격차는 현저하다.  2022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DP는 약 3,500달러다. 같은 해 우리나라 1인당 GDP인 32,000달러에 약 10배 못 미친다. 국내에서 최저임금이, 필리핀 현지에서는 몇 달 치 월급이 된다. 돈, 해외로 나가서 일하기 충분하고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면도 분명히 있다. 과거 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을 나가 외화를 벌어오고, 자신들의 가정을 먹여 살렸듯이, 국내 영화나 소설들이 그 당시 우리나라 상황과 각 가정의 상황을 보여주듯이,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에게도 그 이면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조금 알아봤다. 필리핀 가사 도우미 그들은 누구이며, 왜 고학력의 그들이 해외로 나가는지 말이다. 조금만 살펴본 그들의 이면은 씁쓸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세계화의 하인들 책, <세계화의 하인들>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이주가사노동자로 일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다룬 책이다. 책은 제목처럼 세계의 하인으로 일하는 이유가 세계화와 연관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개발도상국에 이전시키고, 고부가가치 사업을 선진국이 차지하면서 국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이 일어난 건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이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폐해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 산업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원하는 고용 시 일만 하다 보니, 그 나라의 발전이 더디게 된다. 인구는 많은데, 산업 발전이 더뎌 일자리가 없고, 경제발전이 더뎌져 임금이 낮은 것의 반복이다. 그 결과 해외로 나가는 것이다. 필리핀 여성들은 주로 이주가사노동자로 해외에 나간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150만 명의 이주가사노동자가 있고, 필리핀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주가사노동자 3분의 1이 필리핀 사람들로 전해진다. 이번에 국내에 들어온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중 대다수가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전해진다. 한 가사관리사는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했고, 다른 가사관리사는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한국에 왔다. 이렇게 고학력자 임에도 해외 가사관리사로 일하는 것도, 앞서 필리핀의 산업 상황과 연관된다. 모순적 상황에 대한 억울함을 느낀다 사용자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검증된 사람들이 오고, 고학력에 선망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오는 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억울함을 느낀다. 원해서가 아닌, 환경적인 상황에 의해 자신의 고학력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 <세계화의 하인들>에서는 필리핀에서 교사였던 사람들이, 해외에서 가사관리사로 일하는 것에 억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닌 환경적인 상황에 어쩔 수 없이, 교사에서 가사관리사가 된 것에 억울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혼이 불법인 가부장적인 제도 필리핀 여성들이 박탈감을 느낌에도 해외로 나가서 일하는 건, 필리핀 특유의 강한 가부장제 문화 때문이다. 필리핀은 바티칸을 제외하고, 이혼이 불법인 유일한 나라다. 전국민의 80%가 가톨릭을 믿는데, 이혼이 종교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내부적으로 법안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으나 하원을 넘어도 상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인 분위기와 종교의 압력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류다. 책, <세계화의 하인들>은 이러한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국의 이주 가사관리사로 일한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을 다시 본국에 송금해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와 보수적인 분위기를 피해 해외로 왔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차마 놓지 못하는 것이다. 전체 GDP의 8.8%를 담당하는 영웅들 세계은행에 따르면, 필리핀 이주가사노동자들은 매해 260억 파운드(한화 약 45조)를 필리핀 본국으로 보내고 있다. 이는 필리핀 GDP의 8.8%를 차지한다. 또한 필리핀 전체 가구의 12%가 이렇게 송금한 금액으로 생활한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필리핀의 전임 대통령인 두테르테는 그들을 “산업 영웅"으로 불렀다. 과거 우리나라가 독일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 나간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했듯, 필리핀에서도 동일한 말들이 이루어졌다. 두테르테는 전 필리핀 대통령은 2019년 한 행사에서 “필리핀의 발전을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해외에서 일하는 여러분들과 여러분 가족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계속 필리핀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녀는 그들를 알지 못한다 보수적인 종교와 가부장제를 피해 해외에서 일을 하고, 그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산업 영웅으로 불려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 가정에서 그들의 자녀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CNN은 해외 가사관리사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 4명을 인터뷰 했다. 그 중 돌로레스(Dolores)라는 여성은 “내 자식이 6개월 됐을 때 일을 하러 해외에 왔고, 다시 돌아왔을 땐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지만, 자신이 해외에 나가 돈을 벌면 자녀를 교육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이주노동자로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여전히 교육이 이 가난과 빈곤을 탈출할 대안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교육시킨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더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의 부재로, 자녀가 더욱 형제자매를 돌보는 책임감을 갖게 되어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9월부터 시작되는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을 정확하게 모른다. 얇게 알아본 내용 마저도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삶을 다 반영하는 건 절대로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양가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처한 상황은 분명 안타깝다. 억울함을 느끼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자녀를 자주 만나지도, 자녀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황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당장 필리핀이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자라나는 자식이 있고, 필리핀 현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몇 배나 되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게 한편으론 다행이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단순 급여만 비교하고, 실제 실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생각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말 그대로 우리나라 가정을 도우러 온 사람들이지만, 결코 하인처럼 부려 먹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가사관리사 제도를 보면 업무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안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장치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개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필리핀 가사관리사와 국내 가정 모두 서로 존중하며 원하는 바를 얻으면 좋겠다.
구글 번역기, 아주 칭찬해
구글이 담는 소수 언어 지난달 24일, 구글 번역기에 새로운 언어 110개 추가됐다. 이로써 구글 번역기에 담긴 언어는 250종이 됐다. 추가된 언어는 중국 광동어, 파기스탄의 펀자브어, 켈트어의 일종인 맨어, 아프리카와 인도의 소수언어다. 아프리카 언어는 폰(Fon)어, 키콩고(Kikongo)어, 루어(Luo)어, 가(Ga)어, 스와티(Swati)어, 벤다(Venda)어, 우오로프(Wolof)어가 추가됐고, 인도 언어는 아와디(Awadhi)어, 보도(Bodo)어, 카시(Khasi)어, 콕보록(Kokborok)어, 마르와디(Marwadi)어, 산탈리(Santali)어, 툴루(Tulu)어가 추가됐다. 구글은 이번 업데이트로 “6억 1,400만 명과 추가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8%에 해당하는 수치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다. 들리지 않겠지만, 구글 직원들에게 있는 힘껏 박수를 보낸다. 혹자는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고, 읽지도, 쓰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언어가 추가된 게, 왜 반가운지 의아할 것이다. 부디 이번 글이 의아해 하는 분들에게 소수 언어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소수 언어에 관심 갖고 지켜야 한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서다. 조지 오웰의 『1984』 조지 오웰의 책 『1984』는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책에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세 개 대륙이 나오고, 유라시아와 오세아니아는 전쟁 중인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전쟁 중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책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유라시아의 외부 당원(하급 당원)이다. 유라시아는 계급사회로 최상위에 빅브라더, 그 밑에 내부 당원(고급 당원), 그 밑에 외부 당원(하급 당원), 마지막으로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외부 당원은 상위 13%가 속하고, 내부 당원은 상위 2%가 속해있다. 내・외부 당원은 ‘텔레스크린'으로 항상 감시 당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감시받지 않는다. 이유는 노동자들이 가벼운 영향만 줘도 조종되기 때문이다.1)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1984』에선 동물과 노동자가 가장 자유롭다.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의 감시 아래 기록을 삭제하고 조작한다. 조작 이전 기록은 불구덩이로 보내져 태워진다. 때문에 『1984』의 세계관에서 온전한 기록과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작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은 단어까지 조작하고 없애버린다. 신어(newspeak), 언어의 축소 윈스턴이 속한 당과 그의 동지들은 ‘신어(newspeak)’를 만든다. 이는 기존 단어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단어이며, 다수 의미를 포괄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안 좋다(ungood)’는 신어는 ‘나쁘다(bad), 빈약한(poor), 형편없는(terrible)’을 포괄한다. 그리고 ‘나쁘다, 빈약한, 형편없는’은 모두 ‘안 좋다'로 만 사용된다. 그리고 기존에 ‘나쁘다, 빈약한, 형편없는’ 적힌 기록은 모두 ‘안 좋다'로 조작되고 사라진다. 윈스턴의 일이다. 이런 조작으로 대체된 ‘나쁘다, 빈약한, 형편없는’ 세 단어는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여겨져 소멸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도 그 단어가 존재했었는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설령 사라진 언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기록은 이미 조작됐기에 그 어느 곳에서도 사라진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누구도 과거의 기록을 증명할 수 없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데, 가장 명백한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1) 이러한 신어의 제작과 기록의 조작에 대해 윈스턴은 깊은 의문을 갖는다. 윈스턴이 이러한 의문을 내비쳤을 때, 같은 하급 당원 동지는 이렇게 답한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 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 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히게 될 걸세.”1)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사고는 표현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으며, 표현은 언어와 지식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1984』의 신어가 사고의 범위를 좁힐 수 있던 이유는 이와 다르지 않다. 언어의 다양성과 풍부한 표현은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다양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위 사진은 생물 다양성과 언어의 다양성을 함께 보여준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할 수록, 언어 역시 다양하다. 당연하다. 종의 수가 많으면, 이를 표현하는 가짓 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다양한 종이 있는지 모르면, 우리는 그저 몇 가지 단어로만 생태계를 정의하고 부르게 된다. 마치 3만 종이 잡초를 구분할 줄 몰라, 그저 잡초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 차원에서 세상을 가장 풍부하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 언어는 영어도, 중국어도, 스페인어도,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한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소수 언어다. 현재 그 언어들은 기록되지도, 구전되지도 않은 채 40일에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생태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소수 언어 굼벵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느리고 굼뜬 사람을 떠올린다. 굼벵이를 몰라도, 굼벵이 같은 사람을 보면 굼벵이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지역의 언어들은 생태계 이해에 더욱 유용하다. “타히티 사람들은 침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투나하바로(tunahaavaro, 뱀장어의 한 종류)라고 부르며, 찾기 어려운 사람은 오후아(ohua, 바위 밑에 숨는 물고기)라고 한다.”2) 팔라우의 어부는 3백 개 이상의 어종을 구분하고, 각 종의 음력 산란주기를 안다. 북극의 이누이트족은 사람과 개, 카약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눈과 얼음을 구분하는 용어를 갖고 있다.2) 육지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하우누족은 450종 이상의 동물과 1,500 종의 식물을 구분한다. 하우누 농부는 10종의 기본 토질과 30종의 아종 토질을 구분하고, 토양의 굳은 정도에 따라 네 가지 다른 용어를 쓰며, 서로 다른 토질을 구분하는 9가지 색깔 표현이 있다. 그들은 땅의 지형을 5가지로 분류하고, 땅의 경사 정도를 3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다.2)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인 미크맥어는 가을에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로 나무들의 이름을 붙인다. 그 지역에서는 바람이 대개 일몰 한 시간 정도쯤 후에 일정한 방향에서 불어오는데, 그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이름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리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2) 생태계 보존에 관심이 있든 없든, 이런 분류가 얼마나 가치 있고, 얼마나 깊이 생태계를 이해해야 쓸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를 포함해 마트에서 통조림이나 사 먹고, 브랜드 따위만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지식이다. 생물 다양성이 가장 시급하다 스톡홀름 지구 복원력 센터의 요한 록스트룀은 지구 위험 한계선 9가지를 제시했다.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담수 사용, 토지 시스템의 변화,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해양 산성화, 생지화학적 유량(인과 질소 순환), 대기권의 에어로졸 부하, 진기한 물질>이 그것이다. 지구복원력센터는 이 9가지 시스템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 2009년, 2015년, 2023년 세 차례에 걸쳐 추적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9가지 중 6가지가 지구 한계 범위를 넘어섰다. 이중 가장 시급하게 다뤄야 할 문제는 ‘생물 다양성'이다. 요한 록스트룀은 “무엇보다 생물 다양성의 손실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생물 다양성이 생태계 복원력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들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정말이지 불충분하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지조차 모른 채 빠른 속도로 생물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3)고 경고한다. 소수 언어는 생물 다양성을 이해시켜 줄 것 요한 록스트룀이 생물 다양성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한 이유는, 그들의 역할을 분명하게 알아야 우리가 직면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생태계에 어떤 종들이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를 이해하고 있고 표현하고 있는 건, 생태계와 밀접히 교류한 소수 언어들이다. 소수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도록 생태계와 교류해 온 소수 민족의 언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태계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들의 언어를 보존하는 건,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알려줄 백과사전을 그대로 보전하는 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한 이름 모를 소수 민족의 언어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런 차원에서 구글 번역기의 소수 언어 추가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100%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시도 자체가 유의미하고 소중하다. 실패한 『1984』 속 윈스턴의 저항과 양갈래 길 마지막이다.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해 자신만의 저항으로 ‘일기'를 쓴다. 그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후세에 몇 마디의 기록이라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떠난 뒤에라도 그다음 세대가 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거야.”1)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저항은 실패했다. 그의 저항과 일탈은 감시를 벗어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 빅브라더의 초상을 향해 눈물 흘리며 “나는 빅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끝이 났다. 다행히 우리는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세 개 대륙으로만 구분된 세상에 살고 있지도 않고, 세 개 대륙에서 세 개 언어만 사용하며 살고 있지도 않다. 우리에겐 소수의 언어를 보존하고, 후대에 남기고 전해줄 수 있는 AI 기술이 있다. 다만 양 갈림길이 있을 뿐이다. 소수 언어를 빠르게 사라지게하는 길과, 사멸 위기의 소수 언어를 보존하는 길이다. 양 갈래 길에서 어떻게 기술을 활용할지는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손에 달렸다. 나는 당연히, 환경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소수 언어 보존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4의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지 않았듯, 윈스턴의 실패도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길 바라본다. ※참고 자료※ 1)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2016) p.76, 221, 290 2)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이제이북스/ 2003) p.38, 103, 279 3)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요한 록스트룀 등/ 에코리브르/ 2017) p.214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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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당신이 틀렸습니다
제번스의 역설 “석탄 사용량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난다"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William Stanley Jevons)는 1865년에 ‘석탄 문제(The Coal Question)’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 유명한 ‘제번스의 역설'이 등장한다. 제번스가 논문을 발표할 당시 영국에선 끊임없는 석탄 사용으로 석탄 고갈 문제가 대두됐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 엔진이 총 석탄 소비량을 줄일 것이라 생각했다. 증기 엔진은 당시 석탄 효율성을 높인 최신 기술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와트의 엔진이 총석탄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의 석탄 소비가 급증했다." 이를 통해 제번스는 "효율성 개선이 비용을 절감했고 자본가들이 절감된 비용을 재투자하요 생산을 확장했기 때문임을 발견했다."1)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제번스는 논문을 통해 “기술 발전으로 연료를 절약해 사용하면 소비량이 줄어든다는 건 완전히 착각이다. 그 반대가 진실이다.(It is wholly a confusion of ideas to suppose that the economical use of fuel is equivalent to a diminished consumption. The very contrary is the truth)”라고 반박했다. 제번스의 역설은 기술 발전과 에너지 효율성 증가의 환경 비용을 생각하게 해준다. 효율성 증가는 분명 좋은 현상이지만, 그것이 절대적 총량을 증가시킨다면 환경 오염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LED, 기후변화를 해결할 100가지 솔루션 중 하나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사업가인 ‘폴 호켄(Paul Hoken)’은 2013년부터 ‘프로젝트 다로다운(Project Drawdown)’을 기획해 이끌고 있다. 드로다운은 기후 용어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최대치가 됐다가 떨어지는 지점을 말한다.  프로젝트 드로다운 팀은 온실가스량을 저감시킬 100가지 솔루션을 발표했다. 또한, 2050년까지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 배출을 막거나 없애는지, 실현에 필요한 비용 총액, 순비용, 절감 비용 등을 계산했다. 프로젝트 드로다운 팀이 제안하는 해결책 100가지 중 하나는 LED(Light Emitting Diode)다. LED는 전류를 흘리면 발광하는 성질을 지닌 반도체로, 전기 에너지를 직접 빛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어 에너지 효율이 우수하다. 또한, 백열전구보다 90%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형 형광등에 비해서는 절반쯤 되는 에너지를 사용한다. LED 가로등은 최대 70%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이런 에너지 효율성으로 LED의 기후변화 해결책 순위는 가정용이 33위, 기업용이 44위로 중상위권에 속한다. 순위가 높을수록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높은 건 당연하다. 프로젝트 드로다운 연구팀은 LED가 2050년까지 가정용 시장의 90%를, 상업용 시장의 82%를 차지한다고 전제했다. 높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저효율 조명을 대체함으로써 주거권에서 7.8기가 톤, 상업권에서 5기가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을 것이라 분석했다.2) LED의 가장 큰 장점은 수명이다. 5만 시간의 수명으로 백열등 1,000~1,500시간을 최대 50배가량 상회한다. “미국 일반 가정의 조명 평균 시용 시간은 1.6시간이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42년간 사용할 수 있다.”3) 에너지 효율이 90% 높은데, 사용 가능 시간이 50배 더 길다면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에 엄청난 이득이다. LED의 소켓 포화도 오지 않았고, 사용량도 줄지 않았다 조명 산업에는 '소켓 포화 상태'라는 용어가 있다. 수명이 짧은 전 세계의 백열전구 대부분이 소켓에서 분리되어 내구성 좋은 LED로 교체되는 시점을 묘사하는 용어다.3) 2010년에 이 소켓 포화를 목전에 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소비 증가 때문이다. LED 조명의 수명 증가와 효율성 증가는 동시에 더 많은 LED 소비를 불러왔다. 이유는 안도감 때문이다. 에너지 효율성이 증가했으니, 더 사도 된다는 안도감이다. 이 안도감이 더 많은 LED 조명 소비를 불러왔다. “스위스 취리히의 고급 상점가인 반 호프스트 라세 거리에서 2010년대 후반 5년 동안 전광판이 40배 이상 늘어났다.” 가정집과 마당에서도 장식용 조명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기했다.3) 사례는 또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 난징에 위치한 국제청소년문화센터다. 난징 국제청소년문화센터에는 LED 패널이 총 70만 개가 사용됐다. 불빛은 60층 건물의 외벽을 덮고 있으며, 지상에서도 이 건물을 향해 투광 등을 쏜다. 300m 높이에 달하는 국제청소년문화센터는 하늘로 수직 상승하는 특수 LED 조명으로 인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건물 소유주는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기만 하면 색상을 변경하고 멋진 조명 쇼를 만들 수 있다. LED 조명 시장은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 전 세계 LED 시장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43.6%다. 또한, 연평균 11.4%씩 성장하고 있다. 또한, 2024년부터 2032년까지는 연평균 성장률 18.34%로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성장세에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조명 시스템에 대한 수요 증가와 비용 효율적인 솔루션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 증가가 크다. IoT 플랫폼과 통합된 스마트 조명 시스템도 인기를 끌고 있어 에너지 효율성과 사용자 편의성을 향상시키고 있어, 더욱 소비가 촉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요 증가로 값싼 제품 경쟁도 늘고 있다. 그로 인한 품질 문제도 있다. 켜지는 조명이 있고, 켜지지 않는 조명이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중국인들은 어떤 것은 켜지고 어떤 것은 아예 켜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 LED 전구를 킬로그램 단위로 값싸게 구매한다."3) GFZ 독일 지질학 연구소의 물리학자이자 광공해 연구원인 크리스토퍼 키바(Christoper Kyba)는 “야외 조명을 전부 LED 조명으로 교체해서 에너지 효율을 높인다 해도, 광고와 투광 조명의 총량이 늘어난다면 세계 규모나 국가 규모에서는 실제로 에너지가 그리 절약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3) 라고 말했다. LED 사례는 전형적인 제번스의 역설이다.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지고, 해당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결과적으로 에너지 사용 총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빌 게이츠, AI 전력 사용량 줄어들 것 빌 게이츠는 영국 런던에서 진행된 ‘브레이크 에너지 서밋'에서 AI로 인한 에너지 사용량 급증에 대해 “현재 AI로 인한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이 증가했지만, 추후에는 “명백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근거는 ‘그린 프리미엄'이었다. 그린 프리미엄은 친환경 제품과 서비스, 에너지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다. 기술 기업들이 그린 프리미엄으로 인한 높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기술 개발과 보급에 나서고, 그 결과 에너지 사용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과거를 통해 유추할 수는 있다. 석탄과 LED 사례는 빌 게이츠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한다. 개별 에너지 사용량은 줄어들 수 있을지언정, 전체 사용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이미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하루에 5엑사 바이트(1018) 그러니까 정보화 산업이 시작된 시기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모든 정보의 양에 해당되는 만큼의 데이터가 생산된다.”4) 끊임없이 생산되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데이터센터의 증설이 필요해진다. 설령 데이터센터의 개별 에너지 사용량이 줄어든다고 한들, 전체 AI 사용량의 증가로 사용량은 더욱 커질 것이다. 권력은 소비자에게 넘어갔다 더 높은 기술의 효율이 아닌, 더 많은 소비자 행동이 필요하다 빌 게이츠와 같은 사람들은 기술 발전으로 인한 효율성 증가만을 외친다. 기술 발전과 에너지 효율로 단위당 에너지 산출량이 증가해, 같은 제품도 전력 사용량이 덜 하다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어디서도  전체량이 증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효율성 증가로 친환경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외친다. 즉, 에너지 효율만 되면 지금의 환경 문제를 만드는 소비를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책, 『슈퍼 자본주의』에서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 쪽으로 이동했다"5)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주의 문제가 소비자와 투자자에 의해 야기됐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투자자와 소비자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 생산에 동조했음에는 동의한다. 권력이 소비자 쪽으로 넘어왔다면, 자본주의 속성인 끊임없는 성장과 소비의 추구 역시 소비자들이 관여해 해결할 수 있음을 뜻한다. 가장 강력한 소비자 행동은 무분별한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제번스의 역설은, 기술 혁신으로 인한 효율성 증가로 가격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소비자들이 더 많은 소비를 해 전체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할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비를 줄임으로써 문제 해결에 동참할 수 있고, 보이지 않게 소비를 촉진하고,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줄이는 기업을 감시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모어에 있는 제6번 소방서에는 현재도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는 전구가 있다. “이 전구는 1901년부터 거의 계속 불을 밝히고 있다. 2015년에는 100만 시간을 돌파하면서 기네스북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 켜져 있는 전구로 등재되었다.”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리버모어 소방서의 전구처럼 제품을 오래도록 사용하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분별한 소비로 제품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소비한다면 에너지 효율이 아무리 높아져도 제번스의 역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디 소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소비를 줄여나가는 소비자의 행동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참고 자료※ 1) 『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제이슨 히켈/ 창비/ 2021) p.208 2) 『플랜 드로다운』 (폴 호컨/ 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p.279p~284 3) 『디컨슈머』 (J.B 매키넌/ 문학동네 / 2023) p.98, 103, 187, 193, 194 4)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기욤 피트롱/ 갈라파고스 / 2023) p.113 5)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김영사 / 2008) p.3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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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만이 아니라, 최고임금도 생각해야 합니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 지난 7월 2일, 최저임금 차등 적용 안이 부결됐다. 찬성 11표, 반대 15표, 무효 1표였다. 참석 인원은 근로자위원 9명, 사용자위원 9명, 공익위원 9명 등 총 27명이었다. 내년도에도 모든 업종의 최저임금이 동일하게 적용되게 됐다. 차등 적용 부결 후, 현재는 2025년도 최저임금 결정으로 의제가 넘어갔다. 노동계는 시간당 1만 1,200원을 제시했고, 경영계는 9,870원을 제시했다. 2024년 최저 시급은 9,860원이다. 노동계는 1,340원 인상을, 경영계는 10원 인상을 말하는 꼴이다. 최저임금 결정은 이번에도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노동계는 “고물가로 너무 힘들다, 최저임금 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경영계는 “더 올렸다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무너진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 일리가 있다. 노동자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나 모두 고군분투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과 소득 불평등 문제 최저임금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이슈는 소득 불평등이다. 노동계도 최저임금 인상 이유로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를 말한다. 최저임금은 바닥 값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바닥 값을 증가시켜 소득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바닥을 높이면 그 위에 올라있는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 주요 정책이었던 ‘소득 주도 성장' 역시, 바닥 값을 끌어올려 전반적 소득 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바닥 값을 올리는 게 소득 불평등 감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바닥이 올라가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올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급여도 동시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임금 종사자 중, 대기업 정규직 종사자 비율은 약 11%다. 통계청이 지난 2월에 발표한, ‘2022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보수) 결과'를 보면, 대기업은 평균 591만 원을 벌었고, 중소기업은 286만 원을 벌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2배 이상이다. 상장 중견기업도 급여는 대기업의 60% 수준이다. 대기업의 경우 복지와 성과급이 중소기업에 비해 푸짐하다. 성과급을 자사 주식으로 주는 경우도 있다. 반면, 중소기업은 성과급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영 상황이 안 좋다면, 급여마저 밀릴 위기에 처한다. 중소기업이 “지불 능력을 고려해 최저임금을 고려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바닥과 천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신성장경제연구소 최병천 소장은 책,『좋은 불평등』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비판했다. 비판 핵심은 문재인 정부가 바닥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적 하층 선정을 잘못했다며, “하층은 누구인가?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해, 하층은 노인이다. 하층은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다. 노인 소득을 끌어올리면 불평등은 줄어든다.”1)며 노인 소득 증진을 주장했다. 그는 “불평등을 직관적으로 정의하면 '하층 소득 대비 상층 소득의 격차'다. 불평등에 대한 중립적 표현은 '격차' 그 자체다.”1)라고 말했다. 노인의 소득을 올려야 한다고 한 이유도, 소득 없는 노인에게 소득이 생겨야 상층과의 격차가 줄어든다고 봤기 때문이다. 경제적 바닥을 제대로 산정해 끌어올려야 상층과의 격차가 줄어든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바닥을 올려도 천장이 무한정 뚫려 있다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끝없이 올라가는 소득을 제한하는 천장이 없다면, 불평등 심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바닥만 생각해선 안 된다. 천장도 생각해야 한다. 바닥 올리기 만이 아니라, 천장 제한도 생각해야 한다. 최저임금만이 아니라, 최고임금도 생각해야 한다. 바닥이 올라가고, 천장이 내려올 때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 먼저 바닥과 천장의 높이부터 확인해 보자. CEO와 직원의 급여차, 미국 272배, 한국 129배,  0.01%와 최저임금 소득자 비교 시 2,100배 차이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ility Lab)가 발표한 2022년 세계 불평등 보고서(World Inequiliry Report 2022)에 따르면, 하위 50%는 전 세계 부의 2%를 차지한 반면, 상위 1%는 38%를 차지했다. 급여(Income)에서도 차이가 났다. 상위 10% 이상이 급여의 71%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는 8%만을 차지했다.2) 이는 급여 격차가 불평등을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미국 총 노동연맹(AFO-CIO)이 발표한, 2022 Excutive-Paywatch에 따르면, 2022년 기준 S&P 500 기업 CEO의 평균 보상액은 1,670만 달러(한화 약 231억 원)였다. S&P 500 기업 CEO들의 평균 급여는 직원 평균 급여에 272배에 달했다.3) 지난 10년 동안 그들의 급여는 5백만 달러 상승했다. 2015년 기준 미국 내 상위 0.01%의 평균 소득은 3,160만 달러였다. 이는 당시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연평균 소득의 2,100배에 달하는 수치다.4) 미 경제정책 연구소(EPI, Economic Policy Institute)는 “지난 32년 동안, 국내 일반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13.7% 증가한 데 반해, CEO들의 평균 임금은 1,1167% 상승했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 내 CEO의 평균 급여는 일반 근로자(Typical workers)에 320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급여 차는 소득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EPI는 "미국 상위 1% 소득 가구의 약 3분의 2는 기업 경영진의 급여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즉, 기업 경영진의 높은 급여가 소득 불평등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상황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2019년 국내 200대 기업의 직원과 CEO의 급여 차는 최대 129배였다. 30배 이상 나는 기업도 상당했다. 엔씨소프트, E1, SK네트웍스, CJ제일제당, 금호석유화학, LG전자 등이 30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한국 조사는 대기업 중심 결과다. 중소, 중견 기업에 비해 급여를 많이 받는 대기업 내부에서도 최대 129배의 차이가 난다면, 일반 중소기업 근로자와 대기업 CEO의 임금을 비교할 경우 미국처럼 300배 가량 차이날지 모른다. 가히 슈퍼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슈퍼 경영자의 슈퍼 소득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슈퍼 경영자'의 등장을 말했다. 그가 말하는 슈퍼 경영자는 “노동의 대가로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의 극히 높은 보수를 받는 최고위 경영자들"5)이다. 그는 슈퍼 경영자들의 등장이 불평등과 관련 깊다 말한다. 그는 “소득세 신고에 나타난 소득과 기업의 보수 기록을 연결시킨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2000~2010년에 소득계층 상위 0.1퍼센트의 대다수가 최고위 경영자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새로운 불평등은 ‘슈퍼스타' 보다 ‘슈퍼 경영자'의 등장과 훨씬 더 관련이 높았다.”5)고 말했다. 위 두 개 그림 1, 2는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 자본에서 제시한 1929년과 2007년의 미국 내 최상위층의 소득 구성 표다.5) 그림 1은 1929년의 소득을, 그림 2는 2007년의 소득을 보여준다. 소득 상위 1%~0.1%(P99~99,9)의 소득을 보면, 1929년에는 자본소득(Capital income)이 노동소득(Labour income)을 앞지르고 있다. 반면, 2007년에는 노동소득(Labour income)이 자본소득(Capital income)을 앞질렀다. 피케티는 이 변화가 “대기업 최고위 경영자들이 받는 보수의 급상승으로 주로 설명된다.” 라며 불평등과 CEO의 높은 보상의 연관성을 설명한다.5) 물론 이 보수에는 급여 만이 아니라, 상여금, 성과급, 스톡옵션 등이 포함됐다. 샘 피지게티, 최고임금(Maximum wage) 제안. “세후 소득 기준, 10배 못 넘게 하자.” 미국 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 특별위원 샘 피지게티(Sam pizzigati)는 최고 임금(Maximum wage)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최고 임금은 최저임금과 연동되고, 급여 상한액은 최저임금보다 세후 10배로 제한된다.4) 또한, 그 이상의 소득이 발생하면 100% 연방 소득세율 적용하고, 거둬들인 세금을 소득 재분배에 쓰자고 제안한다. 그는 속도 제한이 없는 임금을 비판하며, 최고임금이 그 제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하면 엉망이 되는 법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실상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과함을 방지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둔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에 제한을 가하지는 않는다. 개인 소득은 제한하지 않는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속도'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부자로 말이다.”4) 그림 3은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제시한 191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의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표다. 총소득 상위 1%가 차지하는 몫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을 보면 1929년 즈음 상위 1%가 차지하는 소득 비율이 20%까지 올라갔다가, 1940년부터 낮아지더니, 1970년대에는 8% 미만으로 내려갔다.5) 천장이 내려온 것이다. 이 변화는 소득세율 증가와 연관이 있다. 그림 4는 1900년에서 2013년까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소득세 최고 세율을 나타낸 표다. 1940~1950년의 미국 연방 소득세율은 약 94%에 달했다. 그리고 1980년을 기점으로 소득세 최고세율은 점점 하락해 현재 4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피케티는 1980년대의 불평등 증가를 소득세율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소득세율 변화에 따라 소득 불평등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고세율이 가장 크게 인하된 국가는 국민소득에서 최고 소득자가 차지하는 비율, 특히 대기업 최고위 경영진의 급여가 가장 크게 증가한 국가다.”5) 라고 말한다. 샘 피지게티의 주장과 피케티의 통계를 결합해 생각해 보면, ‘뚫린 천장으로 한 없이 올라가는 최상위 층의 소득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가 실질적 소득 불평등 해소에 필요함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방안으로 최고임금과 소득세율 개선이 실질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어렵다. 국내에서 실패했던 최고임금 도입 최고임금 정책 마련 시도가 국내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은 “임금불평등 해결을 위해 최고 임금을 도입하겠다."라며 “최고 임금제" 도입을 주장했다. 정의당은은 “국회의원 보수 최저임금에 5배 제한, 공공기관 보수 최저임금 7배 제한, 민간기업은 최저임금에 30배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다. 물론 실패했다. 그 뒤 최고임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소득 격차만 중요해서가 아니다 샘 피지게티는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이 ‘둘 다' 존재하는 세상은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을 착취하려는 강한 동기가 약화되다가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4)라고 주장한다. 또한, 최고임금이 도입되면 “음지에서 고생하는 (최저임금을 받는) 이 노동자들이 사회의 조명을 받으며, 최상위 소득을 최하위 소득과 연동시키는 사회에서는 그런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4)고 주장한다. 필수노동 돌봄, 최저임금이 최고임금 표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최근 본 눈에 들어온 정의가 있었다. “표준은 원래 '바닥'(floor) 값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천장 값이나 경제적 최적점으로 해석되기 일쑤다.”6) 라는 관점이었다. 바닥이 천장이 되고, 경제적 최적점으로 여겨지는 직종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돌봄노동이다. 돌봄 노동은 필수 노동이다. 돌봄 노동 종사자는 장애인 활동 지원사, 요양보호사, 아이돌보미, 사회복지사 등이다. 국내 돌봄 노동 종사자는 140만 명으로 추산된다. 2022년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2,200만 명 중 6.4%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이들 대부분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그들에겐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다. 만성적인 저임금으로 해당 분야 종사자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8년 뒤에는 71만 명가량 모자랄 전망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게 유지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혁신가 없이 살 수 있지만, 메인테이너 없이는 일주일도 살지 못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아이폰, 갤럭시, 유튜브, 배달 앱, 당일 배송 등은 우리에게 즐길 거리와 볼거리를 선사해 준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누리는 이것들을 더 누리게 해주는 걸 ‘혁신'이라고 말한다. 2021년 발표된 포춘 500대 기업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CEO Top10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과 회사들이 많다. 테슬라, 애플, 엔비디아, 넷플릭스, 블리자드, 마이크로소프트 등등이다. 이들은 모두 전에 없던 서비스와 제품을 세상에 내놓으며 혁신가라고 불린다. 언론과 사회, 시민들의 눈도 모두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시선을 돌려야 한다. 엄청난 혁신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현재같은 엄청난 수익을 줘도 되는가에 의문을 던짐과 동시에, 그들의 혁신이 과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지와 그 혁신이 우리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 “러셀과 빈셀은 언론과 학계의 관심이 온통 혁신가, 발명가, 기업가에 쏠려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과 건강에 더 많이 기여하는 것은 메인테이너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천재적 혁신가 없이도 근근이 살아갈 수 있지만 성실한 메인테이너 없이는 일주일도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혁신가가 앞에서 주목받고 지원받고 성공하는 동안 메인테이너는 뒤에 남겨지고 잊히고 사라지기 마련이다.”7) 개인적으로 일부 소수에게 엄청난 부가 집중되는 것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삶에 반드시 필요한 영역들이 정말 소규모 부로 연명하고 있는 것도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소득이 가치는 아니지만, 우리가 어디에 집중하는지는 보여준다 최저임금 때만이라도, 다른 걸 보자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6・ 7월이 되면 항상 조금 안타깝다. 단순 임금 결정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노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최저임금이 오른 만큼만 오르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노동과 사람들이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가장 힘든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샘 피지게티는 최고임금이 도입되면,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잊혔지만, 우리 삶을 유지해 주는 사람들이 주목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최고임금이 그들의 복지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소득이 가치는 아니지만, 우리는 소득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가치 부여한다. 누군가의 높은 소득은 우리 사회가 “그들은 그럴만해"라며 가치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가치 부여가 피케티가 말한 슈퍼 경영자와 그들의 소득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가치 있는 직업과, 가치 없는 직업의 차별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부디,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시기만이라도 우리 사회가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만이 아니라, 직업 가치에 대한 불평등 역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자료※ 1) 『좋은 불평등』 (최병천/ 메디치/ 2022) p.109, 203 2) World Inequility Report 2022 (World Inequility Lab / 2022) 3) Executive-Paywatch (AFO-CIO / 2022) 4) 『최고 임금』 (샘 피지게티/ 루아크/ 2018) p.5, 6, 23, 41, 42, 45, 46 5)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김영사/ 2014) p. 362, 363, 364, 380, 609 6) 『자연자본주의』 (폴포큰 등/ 공존/ 2011) p.523 7) 『사람의 자리』 (전치형/ 이음/ 2019) p.72
경제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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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자본주의가 환경 파괴를 가리는 꼼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자본주의 폐해를 지적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15~16세기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의 저작 ⟪유토피아(Utopia)⟫는 현대의 기본소득, 공유경제, 6시간 노동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유토피아는 그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 섬이다. 책은 라파엘이라는 인물로 ‘유토피아'를 설명한다. 라파엘은 유토피아에 머물다 섬 밖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를 알리고 싶어 섬을 나온 인물이다. 유토피아를 묘사한 그림에서도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설명에 따르면, 유토피아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정반대 삶을 산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소유하고, 심지어 기존 것을 버리는 것과 반대로, 유토피아는 생산을 줄이고, 공유하고, 수리하며 오래 사용한다. 단편적으로 유토피아 사람들은 집을 후대에 물려주고, 후손들은 집을 수리해 수명을 최대한 연장한다.1) 6시간 노동도 여기서 나온다. 신규 생산에 시간을 쓰지 않고, 필요한 것만 수리하면 되기에 6시간 노동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사치가 아닌, 필요를 위한 노동만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6시간도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초과 생산”1) 하는 시간이다. 반면, 라파엘이 방문한 산업화된 영국은 전혀 달랐다. 사치품 생산에 과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었고, 생산 수단을 소수가 독점해 부의 분배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자본주의의 폐해였다. 라파엘은 “건강한 사회의 필수적 조건이 재산의 균등한 분배임이 명백하나, 자본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며,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차지할 수 있다면, 이는 그러한 자산이 아무리 많다 해도 반드시 소수의 수중에 들어가며, 그렇지 못한 다수는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고 말했다. 또한,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이 비참한 빈곤에 따르는 가장 부조리하고 사치스러운 취미이며, 하인, 직공, 심지어 농업 노동자까지도 사실상 모든 사회 계급이 옷과 음식을 무모하게 낭비하고 있다.”1)라고 지적한다. 부의 분배가 없고, 재산에 상관없이 필요 없는 물건의 생산과 소비를 추종하는 게 토마스 모어가 본 자본주의의 일상이었다. 한편, 극단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도둑이 되기도 했다. 기본소득 개념이 나온 대목이다. “도둑에게 사형 대신 생계 수단을 지급해야 한다” 기본소득의 원형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최소한의 생계 보장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기본소득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라파엘이 도둑질로 사형당한 사람 20명을 본 뒤, 함께 있던 신부에게 한 말에서 나온다. “도둑을 사형으로 다루는 건 공정하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처벌로는 너무 가혹하고 억제책으로는 매우 비효과적입니다.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훔치는 거라면, 아무리 엄벌을 가해도 절도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가공할 처벌 대신, 모든 사람에게 생계 수단을 마련해 주어, 아무도 처음에 도둑이 되고, 다음에 시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1) 사형당한 도둑들은 농장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도 물건을 살 정도의 급여를 받지 못했다. 필수품을 살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의 결과가 도둑질이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생존욕, 도둑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토마스 모어는 생존을 위한 수단 제공이 사회문제를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현대 기본소득의 원형이다. 발전된 기본소득, 일자리 소멸의 대안 토마스 모어가 제시한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발전했다. 발전사가 다채로워 일일이 언급하기 어렵다. 현대에는 AI, 로봇,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와 소득원 소멸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논의됐으며, 대표적으로 김종인, 이재명, 조정훈 등 전현직 국회의원이 다뤘다. 기본소득의 불을 지핀 건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었다. 그 대국으로 인간이 더이상 AI를 이길 수 없다는 게 증명됐다. 그전까지 바둑은 AI가 인간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여겨지던 영역이었다. 그의 역투가 안타까워 보인 이유다. 인류 최강의 쎈돌인 그의 흑돌과 백돌은, 알파고가 그려 놓은 기보를 따라 그릴 뿐이었다. 알파고는 이세돌이 만든 집을 무너트렸고, 쎈돌은 그렇게 부서졌다. 그의 돌은 알파고를 딱 한 번밖에 무너트리지 못했다. 대국 후, 이세돌은 “알파고가 이렇게 완벽하게 둘 줄 몰랐다"고 인정했다. 알파고의 아버지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CEO)도 “알파고가 이렇게 창의적일지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국내 프로 바둑 기사들도 알파고의 착수를 창의롭다고 인정했다. 이세돌의 패배가 충격적이었던 건 AI는 절대 인간을 바둑에서 이길 수 없다는 신념과 아름다운 기보가 창의적인 예술이라는 신념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실제 대국의 기보를 예술로 보기도 한다. 이세돌도 “바둑은 예술이었지만, 알파고 등장으로 더이상 그렇지 않게 됐다"며 돌을 놓았다. 이후, 문학상 받는 AI와 영상 제작 AI가 등장했고, 인간의 영역을 위협하고 있다. 생성형 AI와 로봇의 효율성과 효과성은 인간과 차원이 다르다. AI와 로봇은 잠을 자지 않고, 에너지 공급만 있다면 끊임없이 생산할 수 있다. 반면, 생산성에서 크게 뒤처지는 인간은 생산 노동에 참여해 소득을 창출할 기반이 없어져 소득이 없게 된다. 프랑스 경제학자 故 앙드레 고르츠는 책, ⟪경제이성비판⟫에서 “한 사회의 생산력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더 적은 노동으로도 같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어 노동의 양으로 임금이 결정되면 (임금이 점점 적어져) 사회구성원들이 삶을 지탱할 수 없다”며 그 대안으로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정치권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지만, 미국에서는 경제계에서 언급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오픈 AI의 샘 알트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이다. 물론 주장과 언급은 다르지만, 경제계에서 나온다는 것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또 그렇기에 더 중요한 논의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을 말하는 경제인들 모든 경제인의 주장을 다룰 수 없기에, 오픈 AI의 CEO ‘샘 알트먼'의 행적만 보려고 한다. 샘 알트먼은 “로봇 등 첨단 기술이 기존 직업을 빠르게 대체하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라며 “기본소득이 사람들에게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픈 AI 부임 전인 2018년, 사재 111억을 들여 설립한 비영리 조직 YC 리서치 랩에서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실험을 진행했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시에서 100가구를 선정해 6개월에서 1년 동안 매달 1,000~2,000달러의 기본소득을 지급했다. 이는 당시 오클랜드시 최저임금으로 하루에 8시간, 20일 일한 수준이었다. AI와 로봇의 발전으로 기존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될 것이고, 그로 인해 인간이 자유시간을 더욱 누릴 것이라는 주장은 일말 타당해 보이고, 심지어 좋아 보인다.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기본소득의 원칙과 재원 기본소득의 원칙은 이렇다. ①현금으로 지급한다. ②개인에게 지급한다. ③보편적으로 지급한다. ④구직 노력 등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급한다. ⑤정기적으로 지급한다.2) 원칙에 따라 현금을 조건 없이 모두에게 지급해야 하기에 막대한 현금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모든 재정의 원천은 세금이다. 만약 AI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없게 된다. 기본소득 도입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다. 소득원이 없는데 세금을 어떻게 내고, 세금이 안 걷히는데 어떻게 기본소득을 주냐는 것이다. 샘 알트먼, 국가적 펀드와 토지세 주장 샘 알트먼은 국가형 펀드와 토지세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형 펀드는 미국 내 기업에게 매년 시가 총액의 2.5%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토지세는 토지를 보유한 개인과 기업에게 2.5%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걸 재원으로 국가형 펀드를 만들고, 만 18세 이상 국민들이 배당금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한 2021년 당시, 미국 기업의 시가 총액은 50조 달러였다. 샘 알트먼은 무어의 법칙에 따라 10년 내 2배로 증가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렇게 되면 10년 뒤 미국 내 기업 가치는 160조 달러에 달하고, 2.5%의 세금을 걷으면 만 18세 이상 미국 성인 2억 5,000만 명에게 1만 3,500달러를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샘 알트먼의 주장은 배당 당사자를 만 18세 이상 성인으로 한정했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지급한다는 기본소득 원칙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의 분배 측면에서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빌 게이츠, 로봇세 주장. 기본소득은 시기상조 빌 게이츠는 기본소득 자체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에서 자신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페이지에, 한 유저가 “기본소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묻자 “훗날 국가들이 기본소득을 할 정도로 충분히 부유해질 수 있지만, 아직은 노인과 아동 교육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며 시기상조 임을 밝혔다. 반면, 그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미래에는 로봇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Quartz와의 인터뷰에서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한다면, 로봇을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인간에게 부과한 만큼의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말했다.일각에서는 빌 게이츠의 로봇세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원재, 데이터 기업으로부터 재원 마련 이원재의 주장도 생각해 볼만하다. 그는 데이터 기업에게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타와 구글 등 데이터 기업이 사용자가 만들어 주는 데이터를 통해 수익 활동을 벌이지만, 정작 생산자인 소비자에게는 이익이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데이터 기업의 고용이 낮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2) 그는 "데이터는 사용자의 노동 결과이므로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다”라며 “만약 데이터가 이익으로 전환됐다면 그 부를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며, 이것이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본소득제 논의에서 데이터 경제가 그 재원으로 논의되는 이유”라고 말한다.2) 또한, AI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인 개인의 생계 수단 확보 문제가 해결되면, AI가 그리는 사회 비전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2017년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우리는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를 모색해야 하며, 이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안전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 저커버그가 이원재의 주장대로 세금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AI 발전에 있어서 일자리 위협과 소득원 상실 문제가 사라진다면 AI 발전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AI 분야 리더들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게 납득이 간다. 기본소득은 AI 발전 위험을 줄여주는 완충제이자, AI 발전을 더욱 가속화 할 발판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같은 주장을 두 팔 벌려 환영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게 감춰둔 게 무엇인지 봐야 한다. 기본소득 주장에서 언급되지 않은 게 있다. 그건 바로 생산과 소비다. 생산과 소비에 문제는 기후위기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논의해야 할 주제다. 환경이 없다면, 기본소득이 말하는 자유 따윈 존재할 수 없다. 이 차원에서 기본소득은 생산을 유지하려는 도구일 뿐이다. 생산과 소비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AI와 로봇은 생산의 혁신이다. 전에 없던 생산성을 보인다. 생산은 그간 인간의 영역이었다. 인간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AI와 로봇 혁신은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치 않게 만들고, 그로인해 금전적 보상의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다. 생산성이 아무리 높아져도, 소비가 없으면 공급과잉과 공황으로 번진다. 소비 없는 생산은 의미가 없다. 이는 경제가 멈추는 것을 의미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멈추는 걸 의미한다. 때문에 자본의 논리는 언제나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추구하고, 어느 하나가 멈추면 억지로라도 돌아가게 만든다. 자본시장에서 기본소득을 말하는 이유도, 생산을 뒷받침 할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서다. 생산과 소비를 움직일 윤활유 역할이다. AI와 로봇의 생산을 지속하기 위한 소비 재원일 뿐이다. 문제는 AI와 로봇이 만들어 낼 생산성 혁신과 경제 성장을 지구가 견딜 수 있느냐이다. 2022년, 생산과 소비에 지구 1.71개 사용 길지만 짧게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생태수용력(biocapacity)과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을 알아야 한다. 이는 현재 생활 방식 유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지구가 필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생태발자국이란, 인간이 소비하는 모든 자원을 생산하고, 폐기물을 흡수하는데 필요한 토지, 물 등 생태계의 면적을 측정한 값이다. 인간의 모든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생태 면적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흡수, 식량 재배, 어장, 방목장, 임산물, 건축 기반 시설 수용 등에 필요한 생태학적 공간을 모두 계산한다. 그리고 글로벌 헥타르(global hectares, 이하 gha)로 나타낸다. 생태수용력이란, 인간이 지구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생태계의 용량이다. 현재 기술과 관리 관행을 고려해, 인구가 소비하는 자원을 제공하고 폐기물을 흡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으로 생산적인 육지와 바다의 양의 측정 값이다. 이역시 글로벌 헥타르(gha)로 나타낸다. 만약 생태발자국 값이 생태수용력 값보다 작다면, 이는 우리가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그 값이 클 경우 우리는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의미다. 위 지도는 각 나라별 <생태수용력-생태발자국> 값을 나타낸 것이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은 해당 나라의 생태수용력을 초과한 생산과 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녹색은 생태수용력이 감당할 수준으로 생산과 소비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값이 -를 기록하면, '생태적자'라고 한다. 붉은색 국가는 모두 생태적자국이다. 대부분의 선진국과 중국, 인도 등 인구가 많은 국가들이 생태수용력을 넘어섰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중동과 사하라 사막 부근에 위치한 나라가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은 그 나라 생산과 소비의 영향도 있지만, 애초 생태수용력(숲, 강 등)이 낮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전 세계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개의 지구가 필요한지를 나타낸 것이다. 2022년 기준, 이미 1.71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생태적자는 1970년부터 시작됐다. 문제는 AI와 로봇은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래프를 칠하기 위해 더 붉은 물감이 더 많이 필요해 질 것이다. 참고로 2022년 기준, 전 세계 사람들이 미국인 처럼 살려면 약 7.5개의 지구가 필요하고, 우리나라처럼 살려면 5.8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생산의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1932년 책,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발표했다. 책은 포드 자동차가 출시된 해인 1908년을 새로운 기원으로 삼은 미래를 그린다. 포드 자동차 창립자 ‘헨리 포드'는 생산 혁신을 이룬 인물로, 1918년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해, 자동차 한 대 생산 시간을 750분에서 93분으로 줄였다. 멋진 신세계는 포드주의를 채택한 영국을 배경으로, 더 빠르고 많은 생산을 추종한다. 심지어 인간마저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산'한다. 책에서는 34층이 저층으로 묘사되고, 난자 하나에 인간 한 명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난자가 스스로 8개에서 96개까지 싹을 틔워 인간을 생산한다.4) 책은 그런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식 유토피아다. 물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미래가 ⟪멋진 신세계⟫처럼 될리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책 초반부 내용이 거북하고, 잘 상상가지 않아 덮기도 했다. 소설이라도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책은 자본주의가 생산을 어디까지 중요시 여기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멋진 신세계가 묘사하는 모습이 ‘혁신'이라면 나는 혁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AI와 로봇이 감당 못할 수준의 생산을 이뤄낸다면, 나는 엑셀을 밟기보다 기본소득을 주지 않음으로써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의 환경파괴를 가리는 꼼수일 뿐, 진짜 논의해야 할 건 따로 있다. 토마스 모어는 기본소득의 원 개념을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언급했다. 자본주의에서 불평등과 생존 위협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계 수단을 마련해 줘서 문제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사치품을 생산하고, 사치품 생산과 소비에 과하게 집중하기에 자신을 위한 시간이 줄고, 환경도 파괴된다고 말했다. 이는 곧 생산과 소비의 추종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경제 전체의 주요 목표는 사회의 필요가 허용하는 한, 각자를 육체노동에서 해방시켜 많은 자유 시간을 갖도록 하는 데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각자는 각자의 마음을 계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 기본소득이 말하는 자유는 자본주의 하의 생산과 소비 이념을 넘어설 때 가능하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AI 발전으로 사람들이 노동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고,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AI가 편리한 세상을 만들지도 모른다. 노동시간이 줄지도 모른다. Chat GPT 등장만으로 업무 효율성이 좋아졌다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결국은 더 많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걸로 연결될 뿐이다. 그것이 끝나고서야 우리는 내 시간을 가질 뿐이다. 그마저도 외부에 무엇이 있나 보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에 무엇이 올라왔나’를 보는 것으로 소비된다. 혁신으로 시간을 얻고 그 시간을 더 많은 영상 시청과 제작, 더 빠른 인터넷, 더 편리한 자료 서치에 사용할 뿐이라면, 그게 진짜 자유인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유튜브 영상을 더 많이, 더 생동감 있게 보고, 더 생동감 있게 게임하고, 더 빨리 자료를 찾는 게 자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를 위한 생산과 소비는 분명히 필요하다. 자연이 허용하는 만큼의 자연스러운 성장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생산과 소비는 자연의 허용치를 넘었고, 자연을 고갈시키며 용량을 더욱 줄이고 있다. 경제계가 말하는 기본소득이 도입된다 한들, 그때는 깨끗한 공기를 마실 자유와 산과 바다 등 자연을 누릴 자유를 박탈 당한 뒤일 것이다. 때문에 생산과 소비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본소득은 나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건 기본소득 도입과 재원 마련 방안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시스템에 기반한 성장의 추종을 언제까지 받아들일 것인지, 어떻게 필요를 위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 것인지, 필요(needs)와 욕구(desire)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생산과 소비를 멈췄을 때 피해를 받을 사람들의 피해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자연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쓸 수는 없을지 등을 고민하며, 생산과 소비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해야 한다. 토마스 모어가 말한 자유는 사치로운 생활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과 소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다. 기본소득의 원형이 말하는 자유가 이것이라면, 현대의 논의 역시 생산과 소비에 얽매이지 않는 삶과 방식, 시스템을 논의해야 한다. ※ 참고 자료 1) ⟪유토피아⟫ (토마스 모어/ 범우사/ 2000) p.36~37, 44, 77~78, 96~101 2) ⟪소득의 미래⟫ (이원재/ 어크로스/ 2019) p.337, 340~341, 349~351, 369 3) ⟪성장 없는 번영⟫ (팀 잭슨/ 착한책가게/ 2015) p.30 4)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러/ 문예출판사/ 2018) p.7~31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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