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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 시민이 기억하는 모습, 시민이 해야 할 질문
🎗 시민이 기억하는 모습, 시민이 해야 할 질문
기억하자는 말에서 출발한 질문
2014년 이후 4월 16일마다 “기억하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궁금했다. 무엇을 기억하겠다는 걸까?, 어떤게 미안하다는 걸까?
기억하자와 미안하다는 말에 주어가 없는 느낌이었다. 기억하겠다는 사람이 많을 수록 내 의문은 더 많아지고 깊어졌다. 그 의문은 두 개로 좁혀졌다. 저 말로 참사를 막을 수 있을까? 참사 원인을 드러내고 있을까?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참사 방지다. 만약, 기억하겠다와 미안하다는 말이 참사 원인에 접근도 못 하고, 제거도 못 하고, 행동하게 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같은 참사를 또 겪을 게 뻔하다.
[함께 기억] 프로젝트로 세 편의 글을 썼다. 그 중 두 편은 인터뷰였다. 모임도 참여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모임에 참여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세월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었다. 둘째, 기억하자는 말에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고 싶었다. 셋째, 그 기억이 참사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었다.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기억은 참사 예방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번 글은 이렇게 생각한 이유와 내가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 원인, 시민이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시작은 떠내려오는 아이들부터다.
떠내려 오는 아이들
두 사람이 강가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강 쪽에서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진 것이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서둘러 아이를 구했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아이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엔 한 명이 아니었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이 보이고, 보이고, 또 보였다. 아이들이 계속 떠내려오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만으로는 구하기 벅찰 만큼 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때 한 친구가 물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물에 있던 사람이 “너 어디가?!”라고 물었다. 친구가 답했다.
“상류(Upstream)로 올라가서 아이들을 물속에 던져 넣는 놈을 잡으려고.”
업스트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는 여정
해당 사례는 행동 경제학자 댄히스가 ⟪업스트림⟫에서 소개한 사례다.1) 업스트림이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거나, 그 문제로 인한 피해를 체계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반면, 다운스트림은 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댄 히스는 업스트림으로 올라가며 문제 원인을 찾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1) 문제 발생 후 해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애초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탓하는 게 아니라, 소가 왜 탈출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앞선 사례는 아이들이 떠내려오는 상류(Upstream)로 올라가서, 애초 밑(Downstream)에서 아이들을 구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예시다. 참사 발생 이후 인명 구조, 피해자 수습, 책임자 처벌에만 집중하지 말고, 참사 근본 원인을 찾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 수습, 배 인양, 책임자 처벌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참사를 예방하는 건 아니다.
문제불감증, 업스트림으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방해물
업스트림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어렵고 오래 걸린다.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감춰진 문제와 원인이 보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문제와 원인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문제불감증'이다.
문제불감증이란, 부정적 결과가 자연스럽고 통제할 수 없으며,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이다. 어떤 문제에 무지할 때, 마치 그것을 날씨 대하듯 “어쩔 수 없지"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것이다.1)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는 문제와 원인을 못 보게 한다. 원인이 그대로인데, 문제가 사라질 리 없다. 때문에 문제불감증은 업스트림으로 가는데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기억하자는 말은 참사 당시 우리의 문제불감증을 기억하고 경계하는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재한 문제를 볼 수 있다. 기억의 현주소를 보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문제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기억의 현 주소
모임에 참여하고, 인터뷰하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그렇다’였다. 무엇을 기억하냐고 물으면, 참사 날짜, 타고 있던 사람들, 목적지, 언론 오보, 정부 대처, 선장의 탈출 시점과 선내 상황 등이었다.
또한, 참사 당일 자신들이 하던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수업 듣고 있었다, 일하고 있었다, 카페에 있었다. 낮잠을 잤다. 식사 준비를 했다” 등등 다양했다. 선명하고 깔끔한 기억이었다.
그 외 기억은 그날의 감정이었다. 분노와 슬픔, 비참함, 죄책감 등이다. 한 사람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알게 됐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어.”라고 말했다. 표정은 침울했고, 일부는 울었다.
“2024년 4월 16일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면, 뭘 할 거야?”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 말이 없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참사 현장에 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직장인은 일을, 학생은 수업을, 부모는 자식을 위한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잠시 멈출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부는 팽목항에 간다고 할지도 모른다. 서울시청부터 팽목항까지는 약 420km다. 시속 80km로 가도 5시간이 걸린다. 물에서 숨을 가장 오래 참은 기록은 24분 33초다. 도착했을 때 생존자가 있을까. 아마 도착해서 10년 전과 똑같이 분노와 슬픔, 죄책감만 느낄 것이다.
참사 후 느낀 감정은 참사의 원인이 아니다
참사 후 느낀 감정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건 참사 예방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사 희생자가 나온 뒤 느낀 감정과 참사 이전 상황은 인과관계가 없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참사 방지다. 때문에 참사 후 감정이 아니라, 참사 원인과 막지 못한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시스템 부재를 원인으로 말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큰 원인은 참사 이전 누구도, 시스템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챘다면, 우리는 배가 뒤집혀도 바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이고, 304명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 챈 문제불감증
앞서 "2024년 4월 16일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면 뭘 할 거야?"라는 질문에 기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지."였다.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또다시 참사를 마주해서, 2014년 4월 16일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하는 것일텐데. 왜 이런 질문을 그대로 받아 들일까. 기억하겠다 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참사는 발생해, 라며 체념한 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한 체념 속에서, 질문 자체가 '발생하면'을 가정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질문이 발생하면인데, 당연하다 반문할 수도 있다. 그 당연하다는 태도가 문제 불감증이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 챈 이유는, ‘시스템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비됐고, 작동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작동 안 했는지, 없었는지 모를 시스템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 자체가 문제임을 알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그 시스템이 있었고, 작동했나? 답은 바로 나온다.
문제불감증은 “눈앞의 문제가 문제인지 모르는 무지”1)에서 비롯된다. 문제를 모르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태도는 세월호 이전부터 만연했고 참사 후 드러났다. 다큐멘터리 <그레이존>이 보여준 모습이다.
세월호 오보는 왜 발생했나
다큐멘터리 <그레이존>은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 상황을 보여준다. 전원 구조로 보도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그대로 보도됐다. 자막을 쓴 사람도, 보도를 본 기자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레이존>에서 가장 심각하게 들렸던 대사는 “정부가 다 구했대.” “그래서 그걸 믿었죠.” 였다. 상부 지시와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부 지시는 당연히 맞겠지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다. 질문하고 확인했다면 막을 수 있었지 모르는 오보였다. 우리 주변에 이를 막을 신호가 없었을까?
국내 언론은 세월호 이전부터 질문하지 않았다. 2010년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국내 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했다. 손을 든 건 중국 기자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내 기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국내 기자에게 손들어 질문하라고 했다. 손든 기자는 없었다.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다.
강남순 교수는 이를 보고 “질문하기가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저널리스트조차도, 왜 제대로 질문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가.”2)라며 비판했다.
모두가 똑같이 행동했다는 건, 그게 당연한 문화였다는 것이고,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방증한다. 외부에도 질문 안 하는 기자가, 내부 지시에 질문할 리 없다.
국민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태도가 기자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국민도 다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보고 처음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은 없었다. 언론 보도가 당연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구조 오보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다.
만약, 2010년 질문하지 않는 기자들을 보고 “왜 질문하지 않냐”, “내부에서 질문하지 말라고 했냐”, “질문하지 않는 걸 문제라고 생각한 적 있냐”, “질문하지 않는 문화는 언제부터 왜 만들어졌냐”고 물었다면 오보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존> 출연 기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①왜 지시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았는지. ②질문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거나 문제라고 생각한 적 있는지. ③질문하지 않는 모습은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졌는지. ④같은 참사가 있을 때, 더는 오보를 안 내도록 바뀌었는지.
세월호 이후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불렸다. 항상 붙는 말은 “기레기 니들이 그렇지"다. 이는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다.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원인이 뭔지 찾고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래 그렇지"라는 말에 머무는 건 방관일 뿐이고, 쓰레기가 쌓이는 걸 지켜만 보겠다는 말이다.
시스템 부재가 문제일까? 부재에 무지했던 게 문제일까?
어떤 게 참사를 예방하는 기억일까?
세월호 참사로 구조 시스템이 없었고,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이 자체로 큰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부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알아차렸다면, 시스템을 만들고,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모르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애초 시스템이 뭔지도 모르게 된다. 시스템이 있다고 믿으면, 참사가 벌어질 때까지 부재를 모르고, 참사가 발생해야 알아차린다. 비극이 있은 뒤에야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채고 있다. 그게 세월호 행사여도 말이다.
화재 발생시 대피 경로가 무엇인가요? 누가, 어디로, 어떻게 대피시키나요?
장애인, 비장애인, 남녀노소 중 누구를 최우선 순위로 대피 시키실 건가요?
R&R 어떻게 분배되어 있나요?
세월호 행사에 가면 묻는 질문이다. 답변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행사 기획자와 참여자 모두 생각지 못한듯 당황한다. 난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4월 16일마다 노란리본을 달고,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게 현실이 아니라, 시스템이 없는데, 아무도 그 부재를 눈치 못채는 게 진짜 현실이라 생각한다. 세월호가 이렇다면 다른 행사는 불보듯 뻔하다.
개인적으론 안전이나 대피 계획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대피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계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창필 필요도 없다. 119에 누가 신고할 것인지, 누가 비상구로 안내할 것인지, 장애인이나 노약자 혹은 부상자가 있다면 누가 전담할 것인지 등만 사전에 대비하고 R&R만 분배해도 되는 일이다. 그 어느 조직과 개인도 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후 1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10년 동안 뭘 배우고, 변한건지 의문이든다.
만약, 안전부터 신경 쓴다면 어떤 모임이든 참여자 모집부터 달라질 것이다. 특이사항으로 장애나 부상 등 도움이 필요한 점을 반드시 남기게 했을 것이다. 누가 오는지 알아야, 그에 맞게 준비할 수 있다.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참석자가 파악되면, 행사 좌석 배치 부터 달라질 것이다.
기억의 주소는 감정과 상황이 아니라
부재를 몰랐다는 것, 부재를 몰라서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
세월호 참사는 배만 안 뒤집히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들을 살피고, 개선해서, 새로운 유형의 참사를 예방하자고 말한다. 문제 원리를 알면 어떤 문제도 풀 수 있지만, 유형만 알면 다른 유형을 풀 수 없다. 핵심 원리는 안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대비 시스템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 원리를 기억하고 모든 유형의 참사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모습은 ①시스템의 부재 ②시스템 부재를 못 봤다는 점 ③ 시스템 부재를 못 본 이유, 이 세 가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스템 부재를 못 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① 문제가 문제인지 몰랐던 무지 ② 문제가 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은 무관심 ③ 만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체념 ④ 만연한 문제에 대한 방관 ⑤ 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①~④번은 무능함이고, ⑤번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간 우리의 모습이다.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함께 기억] 프로젝트 중 성현이 내게 한 질문이다. 그렇다는 답변에 성현은 다시 물었다. “어른들은 뭘 했나요? 10년 동안.”
10년 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놓친 위험요소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 위험 요소들을 봤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게 놓친 기회가 몇 번일까.
(사)4・16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총괄팀장 장동원 씨는 이태원 참사 뒤에 “유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참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싸웠는데, 결국 또 희생자가 나왔잖아요.”라고 말했다. 미안해야 할 건, 기억하겠다고 한 모든 사람이지, 가장 앞에서 싸우는 한 사람이 아니다.
안전은 일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다면, 일부에게만 맡겨서 안 된다. "기억하겠다, 위로한다, 안전에 투표하겠다"에 멈추고, 그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 세월호 유족과 일부 법조인, 정치인, 기자가 해결할 거라며 맡겨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정치인도 내가 서 있는 곳의 문제와 위험요소를 모른다. 故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발간 된 책, ⟪운명이다⟫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종료 후 고향인 김해에 내려가 화포 습지를 복원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엉망이 된 화포천을 보고 탄식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했다.
"어디 화포천만 이렇겠는가. 온 나라가 다 이럴 것이다. 대통령을 하면서 강의 지천과 실개천, 습지들이 이토록 처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3)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대통령도 가장 밑의 현실은 알지 못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시의원이, 구의원이 아무리 국민과 내 지역을 생각한다고 말 해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문제는 알 수가 없다. 내 주변 문제를 알고, 알아차려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참사는 일상에 있다. 기억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일상의 참사 위험요소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문제를 알아차리기 위해 가장 쉬운 실천은, 질문이다.
일상에 녹여야 할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과 질문
“현실 세계의 변화는 단순한 해답을 가져오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각자의 정황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좋은 질문은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하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도 이끄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준다.”2)
앞서 세월호 행사에서 대피경로와 우선순위를 질문했을 때, 비로소 그 어떤 안전 시스템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이처럼 질문은 보이지 않던 문제를 드러나게 한다. 드러난 문제는 해결하고 예방해야 하며, 그 순간마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말해야하는 순간 5가지는 이렇다.
①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②문제가 없는지 의심이 들 때 ③문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때 ④문제 개선 중에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할 때 ⑤ ①~④을 다 알고도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할 때.
세월호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한번에 의미와 중요성을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은 많지 않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은 그 일을 해내는 소중한 표현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도 이 표현을 자주 써야 한다. 1년에 한번 말하는 “세월호를 기억하자”가 아니라, 일상에서 말하는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이 304명의 죽음에서 반성하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태도다.
은유 작가는 “우리가 의심 없이 행했던 일을 의심하는 순간 해방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을 것입니다.”4)라고 말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우리들이 더욱 안전하기 위해서는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신호를 찾아서 그 신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1)
세월호 유족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지겹다"가 아니라, “어차피 참사는 또 발생해"라는 말이며, 가장 모욕적인 태도는 ‘문제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의심 없이 행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것들에 의심하고 질문하면, 10년 뒤 우리는 더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세월호를 기억하면서, 10년 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냐는 질문과 10년 동안 뭘했냐는 질문에,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해졌고 모두가 일상의 위험을 알아 본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업스트림⟫ (댄히스/ 웅진지식하우스/ 2021) p.15, 41, 140
2) ⟪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행성B/ 2021) p.63, 65
3) ⟪운명이다⟫ (노무현, 노무현재단/ 돌베개/ 2022) p.311
4) ⟪해방의 밤⟫ (은유/ 창비/ 2023)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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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10년 전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한 사회인가요?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그 사이 세월호는 흐릿해졌다. 교과서로 배운 사람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이 흐려지고, 모른다고 슬퍼할 건 아니다. 나무랄 일도 아니다. 기억하고 나무라는 사람도 세상의 모든 참사를 기억하고 아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나 역시도 내가 어릴 적에 발생한 참사는 잘 모른다. 성수 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모두 교과서로 배웠지만, 그걸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교과서에 담겼다고 사회가 그걸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두 번의 붕괴는 건설사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고는 2022년 광주에서 발생했다. HDC 산업 개발이 만든 아파트가 건설 도중 부서진 것이다. 건설사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만약, 성수 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방하고, 내재화했다면 광주의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교과서에 기록해야 하는 참사다. 그 참사를 계속해서 후대에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어디서 알려줘야 할까, 뭐라고 알려줘야 할까.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 세대의 무능함을 답습하지 않게 하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성현(가명)은 세월호 참사 당시 8살이었다. 올해 18살이 됐다. 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같은 나이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성현을 만나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성현은 인터뷰 도중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제가 살아갈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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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터뷰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하다
해줄 수 있느냐고 하셔서 참여했다. (웃음).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대화하고 싶었다. 부모님 말고, 학교 선생님 말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게 다다.
Q. 인터뷰 주제가 편안한 주제는 아니다.
안다. 세월호 아닌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300명이 죽은 참사가 편안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 있던 가장 큰 참사 중 하나가 아닌가.
Q. 세월호를 묻기 전에, 어떤 참사들을 알고 있나
이태원 참사가 내게 가장 가깝고, 알고 있는 참사다. 가장 최근이기도 하고, 유튜브와 SNS에 참사 현장이 많이 공유됐었다. 직접 이태원에서 본 건 아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그 비극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 잔상이 떠다니기도 했다. 참사를 직접 겪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이 안 된다.
Q. 사실 세월호 참사 자체를 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안다기보단 배웠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참사를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2014년에 8살, 지금은 18살이다. 8살 때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나 발달한 게 많으니까, 알고리즘에 걸리면 계속 나와서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Q.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내에 안전교육이 강화된 것으로 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강화된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그게 원래 것이다. 세월호 참사 전 사람들이라야 변화를 알겠지만, 우리는 그게 원본이었다. 그래서 말하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를 떠올려 보면 안전교육을 한 것 같다. 비디오 시청이나 야외 교육 등을. 그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내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전학을 많이 다녀서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다.
Q. 학교 내 안전 의식은 많이 늘어났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그런 의식이 증가했었다.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이 과연 안전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가 묻고 싶다. 내가 알기엔 세월호 학생들은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정말 가만히 있었던 걸로 안다. 말을 너무 잘 들었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죽을 상황에 가둬둔 건 어른들 아닌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던 학생들의 문을 두드린 건, 어른들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정확히 모르지만, 그랬을 것 같다. 진짜 사람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몇 년이 지난 뒤였을 것이고. 이게 과연 학생들이 안전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발생한 건가? 오히려 어른들이 안전교육을 안 받아서 생긴 사고 아닌가 묻고 싶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건 어른들 아닌가.
Q. 세월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많이 물어보셨다. 이태원 참사 이후 더욱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도 말씀을 안 하셨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보고 함께 돌아온 후, 부모님께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알고 보니 두 분다 세월호 관련 봉사활동도 하셨다고 그랬다. 그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부모님은 세월호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
뉴스에서 하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예를 들어 어디서 발생했다, 언제 발생했다, 몇 명이 사망했다 등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때 본인들이 느낀 게 무엇인지를 많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걸 느꼈어. 아빠는 이런 게 비참했고, 이런 점에 분노했었어. 그래서 이런 걸 했어.” 라고. 그 끝에 항상 내 생각을 물어보셨다. “부모의 감정과 생각을 알 필요도 없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Q. 부모님께서 생각 자체를 강조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께서 강조하셨던 게 있었다. 세월호 학생들이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과연 내 자식에게 말 잘 들으라고 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고 부모인가를 대뇌였다고 하셨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말 들어야지 라고 말했을 때, 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 옳은 말인지 생각하고 말했었나 돌아봤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을 학생들이 얼마나 신뢰했을지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어른이 “부모 말 잘 들어야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학생들을 배 안에 가둬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셨다. 또 그 안에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도리어 나눠주며,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데 헌신한 선생님들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무능한 어른의 비겁함 때문에 구할 수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떠났다고 하셨다.
세상엔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능인지 비겁함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설령 부모의 생각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하고, 부모든 선생이든 그 누구든 간에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 때문에,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다.
Q. 부모님 말씀에 동의하는지
세상 모든 어른을 만나본 게 아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부모님, 친척들이 전부다. 그래서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세월호 당시 어른들이 무능하고 비겁했다는 건 알겠다. 나도 곧 어른이다. 몇 년 지나면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거다. 그때 나는 당시의 어른들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했으면 좋겠다.
Q. 세월호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학생들이 있었고,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학생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건 정말 어른들이 무능한 거로 생각한다. 묻고 싶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 내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
Q.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온다. 어른들은 기억하자고 한다. 학생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억하자는 말이 뭘 기억하자는 건가 싶다. 그냥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지.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싶었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다. 제삿날에 제사상에 절은 하지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다. 그런 제사가 내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부모님한테만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런 말을 하니까 부모님도 “네 말이 맞다.”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어른들의 구호나 외침이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근데 뭘? 이라고 느낀다. 물론 이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억을 알기엔, 내가 그 참사의 슬픔과 분위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
제사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 부모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돌아가셨을 때 분명 슬펐겠지만, 아무 기억이 없는 내게는 사실 와 닿지 않는다.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서 부모님이 계신다 정도지. 그 외에는 사실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의 문제다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되는 현상 같다.
Q. 진로는 정했는지
고민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부가 너무 싫다. (웃음) 공부 안 해도 원하는 걸 할 수는 없는 건가 싶다. 왜 모든 걸 공부로만 정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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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성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성현은 족발이라고 말했다. 족발이랑 매운 족발,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하니, 성현은 동생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했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성현의 동생이 왔다. 셋이 함께 근처 족발집에 가서 족발을 먹었다. 후식으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구호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모른다. 참사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유족들의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 내게 성수 대교를 기억하자,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뭘 기억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보다는 성현의 부모님이 그랬듯,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해야 하는 것 같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을 분명히 알려주되, 거기서 끝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억하자는 말을 잠시 떠올려봤다. 그 말을 듣고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참사 유족들의 감정인지, 참사 자체인지, 참사 원인인지, 참사 때 느낀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한 다짐인지, 그 생각들로 내린 결론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성현의 생각에 세월호 참사는 “무능한 어른들의 비겁함.”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입을 막는 자(者)들이 있는 게 떠올랐다.
성현의 말이 계속 곱씹어진다. “세상에 아직도 비겁하고 무능한 어른들이 많은가요? 제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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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내 생일 4월 16일,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로 바뀐 결말
벌써 10년 전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직장인이 됐다. 벌서 선임, 대리, 과장을 단 사람도 있다. ‘무명(가명)’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학생은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보겠다며 기자가 됐다.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한 글로 뾰족한 세상, 둥글게 깍아 보겠다 다짐했다. 그 다짐을 계속 다듬으며 어느새 선배 소리를 듣는 기자가 됐다.
소설을 좋아했던 무명은 자신이 읽은 소설을 각색해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곤 했다. 같은 배경의 주인공이 다른 사건을 마주치며 다른 결말을 맞게 했다. 이유를 묻자 “작가의 결말이 너무 후져보였다.”라며 “작품 주인공에겐 내가 생각한 사건과 결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무명의 노트는 단편소설로 채워졌다. 자연스레 소설가를 꿈꿨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글로 쓰인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명의 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소설가를 꿈꿨던 대학생이, 세월호 참사 후 기자가 된 이야기다. 인생도 소설이라면, 무명에게 세월호는 예정된 결말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다.”던 무명은 전혀 다른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내 주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질문하는 즐거움은 기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삶의 경로를 바꾼, 무명과의 인터뷰다.
Q. 본명을 말할 수 있을지
못 한다. (웃음). 나 기자다. 외부에 이름 내놓고 글 쓰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름보다 매체를 보겠지만. 내 이름 넣었다가, 혹시라도 선/후배가 보면 어쩌냐. 나인 거 알면 “이거 선배 아니예요? 이거 너 아니냐?”라고 물어볼텐데. 창피하다. 안 된다. 참아달라. (웃음)
Q. 알겠다. 그럼 사진은 가능할지?
이름을 가리는데, 얼굴을 까라고? (웃음) 유재석이 유두래곤으로 나온다고, 유두래곤인 게 아니다. 비가 비룡으로 나온다고 비가 아닌 게 아니다. 이효리가 린다G로 나온다고 이효리가 아닌 게 아니다. 이름 바꿔도 가수 후배들은 뛰어와서 90도로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할 것이다. (웃음). 얼굴 나오면 난 진짜 끝장이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도 알아볼 거다. “어? 걔다.” 이러면서.
Q. 인터뷰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닌지?
그건 모르는 거다. 어느 매체에 올라가든 글은 확산된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도 공유되지 않냐. 설령 그 커뮤니티 안에서 돌고 돈다고 해도, 공개된 글은 공유된다. 그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게 발목을 안 잡으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하는 거고, 정신차리고 써야한다.
요즘 정치 뉴스를 봐라, 정치인들 공천하는데 10년 전에 SNS에 쓴 글 때문에 잘리지 않나. 과거 발언으로 잘리기도 하고. 이 인터뷰도 무시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이랑 얼굴 안 내보내는 거다. (웃음). 그냥 무명이라고 하자. 이름없고, 얼굴없는 기자.
Ⓒ한량
Q. 기자로서 요즘 가장 중대한 사안은 뭔가. 기자면 세상사에 궁금증이 기본 아닌가. 궁금해야 질문도 할 수 있는 거고.
그게 기본이면 난 기본이 안 됐다. (웃음). 일적으로는 출입처 사안이 가장 중요하다. 재미없는 사안들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건, 요즘 기업들 주주총회 시즌이다. 관심있는 기업이 몇 군데 있어서 주총 결과를 보고 있다. 정부에서 벨류업 프로그램 내놓는다고 하는데, 실효성이 있을지도 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누가 후보가 되는지와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등이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모습밖에 없어서 보기가 싫다. 기사 쓰는 사람은 신났을 거다. 제목 달기 좋은 말을 정치인들이 쏟아 내니까. 의대 증원도 중요한 이슈고.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다가오는 내 생일이다.
Q. 생일은 공개할 수 있는 정보인가?
그렇다. (웃음). 사실 제일 중요한 내용아닌가? 오늘 인터뷰에서? (웃음). 4월 16일, 내 생일이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다. 벌써 10년이다. 시간이 빠르다.
Q. 10년 전 생일에 뭘 했는지 기억하는지.
기억한다. 생일이라 신났었다. 학교도 안갔다. (웃음). 생일을 학교에서 보내기 싫었다. 저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걸 기다리며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채널을 무심코 넘기는데, 채널마다 배가 누워있었다. 원래 뉴스를 잘 안봤는데, 유독 그날은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예능이 재미없어서 그랬을 거다. 넷플릭스도 없고, 유튜브도 활성화되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본 뉴스 자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월호, 진도 팽목항 앞 바다에서 침몰 중'
무슨 말인가 싶어 뉴스를 계속 봤다.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 앞선 전원 구조는 오보다. 배 안에 사람들이 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다가 사고가 났다. 내 기억에 그날 모든 뉴스는 세월호로 도배됐다.
일면식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안산, 처음 들어본 단원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취소했다.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Q.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모든 프로그램이 세월호 참사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예능에서는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며 무사 귀환을 바란다고 하기도 했고, 일부 예능은 정규 편성을 취소했었다.
생일의 연장선으로 답하면 “내가 즐거워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일 약속도 취소 했었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학교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혹시나 ‘모르는 학생들이 있을까봐 알려준다’ 라면서.
또 질문처럼 예능 방송도 결방했었다. 당시 대학교 축제도 모두 취소하는 분위기였고, 기업들도 행사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참사가 많았지만, 세월호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당시 이런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활동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참사 이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 목소리에 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해서 해주고, 노란 리본 제작이랑 나눔 봉사 활동을 하고, 기부하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노란 리본을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직접 서명을 받기도 했다. 힘 없는 대학생이지만, 없는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당시 세월호 진실규명 활동에 후원 요청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발적이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부할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진실규명 활동 후원 요청 글을 쓰고 학교 선/후배에게 돌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성과가 있었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여기서 성과란 실제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줄어들고,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졌는가다. 이루어졌다면 내 활동도 성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슬픔이 줄지도,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활동이라도 있었기에, 이정도까지 온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미미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소설가를 접고,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Q. 기자가 돼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소설을 계속 쓰는데 상복이 없었다. 지원하는 문학상마다 떨어졌다. (웃음) 그때부터 “아, 내 글이 소설용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조차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웃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세월호 활동이 겹쳤다. 앞서 말한 후원 요청 글을 쓴 것이다. 소설을 쓰면 매번 보여드리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때도 글을 보여드렸다. 피드백 좀 달라고. 그걸 보고 교수님이 “기자를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넌 인간 감정 묘사로 설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해 행간에 힘을 주고, 짧게 치고 가는 스타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악필은 누구나 읽기 싫어 한다. 쓰는 사람도 읽기 싫어 한다. 명필이 읽기도 좋다. 명필을 쓸 줄 아는데, 왜 악필을 고집하냐. 손에 안 맞는 글 쓰지 말고, 손에 맞는 글을 써라.”라고 하셨다.
Q. 갑자기 혼난 것 같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
애정이야 있었겠지만, 난 당시 기분 나빴다. “내 글이 그정도로 쓰레기라고?”. 그 말 듣고 화장실 가서 울었다. (웃음). 난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네가 쓰면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거니까 쓰지 말라는 거 아니냐. (웃음). 진짜 분해서 울었다. 입상이라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하지.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분했다.
기자를 하라는 말과 함께, 세월호 글에도 피드백 주셨다. 글을 수정해서 선후배들에게 나눠줬다. 버려도 되는데, 읽어만 달라면서 줬다. 성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글을 보고 기부했다는 선후배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내 글이 성과를 낸 순간이었다. 내 글 때문인지,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바라던 일을 내 글로 할 수 있던 게 기뻤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써서 나눠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자에 대한 생각이 피어난 것 같다. 내 글로 정말, 세상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슬픔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내 글로 누군가가 슬퍼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불합리한 사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자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정에 없던 사건과 변화였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내가 후원 요청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수에게 찾아가서 피드백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수가 기자를 하라고도 안 했을 거고. 무엇보다 내 글로 무언가 변화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못 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고, 내가 예정했던 삶을 바꿨다.
Q. 기자가 돼서 그때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쉽지 않다. (웃음). 원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쓰고 싶은 것만 쓰려면 블로거를 해야 한다. 기자는 지면에 쓴다. 지면은 언론사 공간이지, 내 공간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걸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수습 기자 때의 다짐은 늘 기억하고 있다.
Q. 다짐이 뭐였는지?
“모진 세상 연필깍이 삼아서, 뾰족한 글을 쓰겠다.”였다. 그렇게 글로 모진 부분을 하나씩 깍으며 둥글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연필은 늘 부러진다. 아마 계속 부러질거다. 그래도 부러지면 깎으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잘 못지 킬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일이 다가오면, 그때 다짐을 더욱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Q. 생일이어서 물어보지만, 세월호 이후 생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나?
몇 년간은 생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일보다는 세월호가 더 컸다. 생일보다는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의 생일은 항상 누군가의 기일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난 건, 세월호에 있던 사람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병원에서, 가정에서 사고로, 병으로, 혹은 스스로 눈을 감는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지금도 누군가는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언론에 나오지 않는 사고가 많다. 그 안에 다친 사람과 장애를 입는 사람도 많다. 그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식이 태어나는 날 부모는 세상을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런 소중한 날이 죄책감으로 물들어선 안 된다. 유족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기뻐할 건 기뻐하고, 기억할 건 기억하면 된다.
Q.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한다.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사고 자체만 기억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 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304명이다, 구조 과정에서도 순직한 분들이 있다, 참사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가 좌초됐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사건 기록이지.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머리에 있다고해서 기억이 되는 건 아니다. 참사로 기억해야 하는 건,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또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 10주기에는 10년 전 내가 세월호 참사에서 느낀 게 무엇이고,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 감정과 다짐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세월호를 통해 기억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 질문으로 이번 생일은 뭘 할 건지
아직 계획은 없다. 파티를 하진 않을 거다. (웃음) 그래도 즐기면서 보낼 거다. 내 생일 4월 16일이 누군가에겐 슬픈 날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자, 지금의 내 모습이 있게 해 준 날이다. 아까 답변한 대로 기뻐할 건 기뻐해야 한다. 내 생일 4월 16일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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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세월호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노란리본을 줍는게 고작이구나"
4월 16일이 또다시 찾아온다. 계절은 언제나 돌아오니 좋지만, 세월호는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매년 돌아오는 이 날과 그 날의 기억은 별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4월 16일은 몇 가지 감정과 장면을 떠올리게한다.
처음 감정은 분노였다. “뭐 저런 선장이 있나, 뭐 저런 언론이 있나, 뭐 이런 정부가 있나”. 그런 감정은 점점 수그러들었고, 이윽고는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끊임없이 방송되는 뉴스는 갇힌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끝내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모든 관계 없는 장면에서 세월호가 보였다. 과거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봉태규가 추위에 떠는 장면이 나왔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물이 너무 차가워 벌벌 떠는 장면이었다. 본 방송이었는지, 재방송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재방송이었을 것이다. 연관도 없는 그 장면을 보고 “아 애들도 저렇게 추웠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추웠겠지, 떨었겠지, 무서워겠지. 물이 다리로 허리로 얼굴로 계속 차올랐을텐데, 물을 좋아하던 애도 있었을텐데 그 물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음이 다가오는 게 그렇게 눈으로 보였겠지, 밖으로 나간다면 누구한테 가장 먼저 가고 싶었을까, 뭐가 가장 먹고 싶었을까, 밖으로 나갔을 때 뭐가 혹은 누가 있기를 바랐을까, 얼마나 나가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들은 “나라면 저기서 뭘 할 수 있었을까?” 로 이어졌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로 끝났다. 실제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참 초라했다. 그 당시 읽은 어느 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노란리본 나눔 부스에서 리본 나눔 봉사활동을 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서명 부탁한다는 요청에 내 이름과 싸인을 남겼다.
노란리본 나눔 봉사를 할 때다. 한 분이 내 리본을 받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 분 손에는 내가 준 노란리본과 1회용 플라스틱 컵이 들려있었다. 그 분은 쓰레기통에 1회용 플라스틱 컵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준 노란리본도 함께 버렸다. 원해서 버렸는지, 모르고 버렸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모르고 버렸다고 생각한다. 버릴려고 했으면, 애초에 받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당시 노란리본은 지하철 역 앞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마냥 받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수로 버린 걸 안 뒤로 다시 돌아와 “실수로 버렸어요. 다시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져 노란리본을 찾고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일부러 버렸든, 모르고 버렸든 노란리본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싫었다. 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노란리본은 끊어져 있었다. 끊어진 걸 버릴까 하다가, 접착제를 가져와 붙였다. 그 리본은 내 방 서랍에 꽤 오랜 기간 보관되어 있다.
누군가는 봉사활동을 하고, 싸인 한 걸 보고 그것마저도 잘한 것이다 말할지도 모른다. 당시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겨우 이런 거구나 싶었다. 노란리본을 주고, 버려진 걸 줍고, 끊어진 걸 억지로 붙여서 보관하는 게 전부구나 싶었다. 이 생각에 나 자신이 참 초라했다.
이처럼 내게 세월호 참사는 분노로 시작해 무기력함과 초라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내 기억도 조금 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요
기억(記憶)의 한자는 ‘記:기록할 기'에 ‘憶:생각할 억' 이다. 즉, 기억이란 기록하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월호를 [함께 기억]하며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 질문의 힌트를 세월호 유족의 말에서 얻었다.
“2016년 4월 세월호 생존학생과 참사로 세상을 떠난 학생들의 형제자매가 증언을 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때 참사로 오빠를 잃은 한 여학생이 소극장에서 관객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꼭 용기를 내주세요."”*
세월호 참사로 오빠를 잃은 여학생의 말처럼, 세월호 참사 10주기에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록하면서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 상기시켜 줄 것이다.
물론 기록이 행동을 담보하지 않는다. 항상 옳은 행동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옳음이 누군가에겐 그름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건 다르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면, 그것이 최소 내 행동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 잣대에 맞는 행동이 쌓인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에게 있어 옳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의 바람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게될 것이다.
옳은 일의 표현 방식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 나는 쓰기를 선택했다. 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어쩌면 내 가치관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더욱 그런 것 같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사회가 됐다.
그렇다면, 나는 이번 기회에 용기를 내보자고 말하고 싶다. 써보자. 잘 쓸 필요 없다. 짧아도 된다. 글의 길고 짧음이 생각의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없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가, 생각의 좋음과 나쁨을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함께 기억하며, 자신들을 돌아보면 좋겠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겨보면 좋겠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록하고, 행동으로 옮겨보자고 다짐하는 계기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김승섭/ 난다/ 2022)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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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회의원의 행적을 보며
제목 : 어느 국회의원의 행적을 보며
시대전환의 조정훈 의원이 최근 국민의 힘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국회의원 의석 1명을 가진 소수정당이 거대 정당 중 하나로 들어간 것이다. 소수 정당이 거대 정당으로 편입되는 것, 혹은 소수 정당에서 이탈해서 거대 정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수정당으로써 국회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의석 1석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거대정당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이다. 조정훈 의원은 586 운동권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궁금했다. 이 목표가 첫 국회 입성 당시부터 이어진 목표였을까? 그가 국회의원으로써 하고 싶었던 건 뭘까.
국회의원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조정훈 의원은 국회의원 당선 후 스스로를 ‘입법 노동자'라고 명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표적으로 발의한 법안이 무엇인지,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세계은행, 개발협력 전문가 조정훈
조정훈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세계은행에서 근무를 했다.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에 도로, 항만, 건설 등 인프라 구축을 위해 활동한다.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장기간에 걸쳐서 적은 이자로 값을 수 있게 해준다. 대규모 개발협력 프로젝트에 있어서, 세계은행과 함께 하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조정훈 의원 스스로도 세계은행에서 근무를 하면서, 다양한 개발도상국을 경험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15년 간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는 이주민 생활을 했다.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의 삶과 희귀피부암을 앓으며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타인의 고통에 깊게 공감하게 됐다. 이에 자신이 받아온 것들을 이웃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합리적임녀서 미래지향적인 이주민 정책을 수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 번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외국인과 함께 살아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됐다.”
대표발의안,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
조정훈 의원은 지난 3월 21일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 했다. 본인을 포함해 총 11인이 함께 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명, 국민의 힘 의원이 8명이었다.
법안의 핵심 내용은 외국인 가사 노동자를 월 100만 원에 고용하자는 내용이었다. 월 100만 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적용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법안 발의 이유는 육아와 가사 부담으로 인해서 여성들이 출산을 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외국인 가사 노동자를 데려와서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출산율을 높이자는 취지다. 그는 싱가포르 사례를 설명하며, 이미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에 약 2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중소기업, 제조업, 농어촌, 임엄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다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수준이다. 그만큼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에 깊숙이 들어왔고, 그 역할면에서 적지않은 영향력과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런 영향력과 중요성에 비해 그가 발의한 법안은 최저임금 보장이 되지 않는 차별적인 법안으로 인식됐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정의당, 기본소득당, 한국노총, 이주민단체 등에서 차별을 법제화하는 법안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해당 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비판도 많았다.
실제 출산율을 높이자는 취지와 다르게 예로 들었던 싱가포르의 출산율이 오히라 낮아졌다는 통계가 있었고, 월 100만 원으로 대한민국에서 이주 노동자가 살 수 있는지, 국내 부부들이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신뢰할 수 있을지, 기존 가사노동자조차도 근로기준법적용을 못받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고칠 생각은 않고, 차별적인 법안으로 채우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해당 법안을 환영한 건 오세훈 서울시장이었다.
비판이 강하게 일자 조정훈 의원과 함께 발의한 국회의원 중 이탈자가 발생했다. 이에 법안 발의가 철회되어, 다시 인원을 모아 발의한 바 있다. 해당 법안은 여의도를 넘어 용산으로 넘어갔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조정훈 의원은 외국인 가사 도우미가 없었다면, 자신의 아내 역시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만큼 여성의 경력 단절을 위해서도, 가사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해당 법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해당 기사를 보면서 앞서 조정훈 의원이 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어디에 있었나 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가족에 대한 공감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가족을 위해 일하는 누군가에 대한 공감은 보이지 않았다.
조정훈 의원이 국민의 힘과 함께 한다면,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현재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는 너무나도 열악하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주 69시간 근무를 말했던 정부다. 이러한 취지의 정당에 들어가서 과연 본인이 스스로 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정말로 할 수 있을지 우려 스럽다.
외국인과 함께할 수 밖에 없다는 조정훈 의원 본인의 말처럼, 부디 외국인 노동자일지언정 최소한의 권리는 지킬 수 있으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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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16만 5천 외국인 노동자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제목 : 2024년의 16만 5천 외국인 노동자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나라 농어촌과 지방 공장에 외국인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이 말이 나온 지 벌써 수년이다. 코로나19 당시, 국경을 막아서 외국인이 들어오지 못하자 일손이 없다고 아우성치던 기사를 허구한 날 본 기억이 있다.
이러한 현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욱 많이 국내에 들여오게 만든다. 2024년에는 최대 16만 5천 명의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에서 일 하기 위해 들어올 예정이다. 16만 5천 명의 사람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 산업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2021년 5만 2천 명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한편,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전문 취업 비자(E-9)’를 받게 된다.
비전문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법률, 의료 등 전문직이 아니라 제조업, 농축산업 등 특별한 기술없이 할 수 있는 업무들을 하게 된다. 해당 분야들은 대부분 구인난을 겪고 있는 곳들이다.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과 제조업, 농어촌 분야는 사람이 구해지지 않으니, 외국인을 고용하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고용허가제가 구인난을 해결할 기회가 된다. 또한, 국내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 역시 자국에서 받는 급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일거 양득, 모두에게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건 양면을 갖는다.
코리안 드림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개발도상국 사람들이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등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주류다. 이들 나라와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GDP 기준)은 몇 배씩 차이가 난다. 1인당 GDP로 따지면 더욱 크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2022년 기준 약 3만 2,400달러다. 베트남의 1인당 GDP는 약 4,160달러, 캄보디아 약 1,800달러, 라오스 약 2,100달러다. 많게는 16배에서 적게는 8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이들에게는 몇 배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한국행이 꿈이다. 우리나라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듯, 이들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다. 고용허가제는 그 꿈을 이루는 길이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대한민국에 들어오기 위해 그들은 한국어능력시험을 거친다. 최소 한국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통과가 되고, 국내 취업처가 확정이 되면 국내에 들어올 수 있다. 또 이렇게 일할 경우, 최저임금, 산재보험, 노동 3권 등을 보장받는다.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자국에서 받는 것에 몇 배는 벌 수 있기에 한국에서의 일은 그들에겐 코리안 드림이다.
하지만, 그 꿈이 길몽이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현실에선 악몽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깻잎 투쟁기
책, <깻잎 투쟁기>는 밥상머리에 깻잎이 어떻게 올라오는지, 누가 깻잎을 재배하는지, 왜 그들이 재배하는지, 그들의 작업은 어떤 모습인지, 왜 그런 모습인지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약 1천일 간 깻잎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조사하며 책을 썼다. 저자는 책을 통해 국내 농어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나라 제도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밝힌다. 앞서 말한 최저임금, 산재보험, 노동3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이 우니나라의 현실 중 하나다.
국내 깻잎은 대부분 이주노동자에 의해 재배된다. 이들은 모두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다. 이들이 없다면, 밥상에 깻잎이 올라올 수 없다.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농촌에서 이들의 노동력은 절대적이다. 반면, 그 위치와 입장과 다르게 그들의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하다.
구체적 예는 이렇다. 밥시간이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화장실 갈 시간이 부족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숨어서 몰래 볼일을 보기도 한다. 숙소도 넉넉지 않다.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더운 양찰로 만든 비닐하우스 내 숙소가 전부다. 이러한 숙소마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월세를 내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을 그들이 모를리가 없다. “저개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컨테이너 집, 비닐하우스 집,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집에서 사는 것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자 일종의 차별적 착각이다. 그들도 자신들이 사는 집이 더럽고, 열악하고, 좋지 않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일어나면 일하고, 해지면 일을 끝낸다. 물론 할당량은 채워야 한다. 하루에 수십 상자의 깻잎을 떼어내야 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야근을 해야 하고, 이 야근 일당은 당연히 수당으로 치지 않는다. 애초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점심도 거르고, 화장실도 대충 때우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코리안 드림을 갖고 한국에 왔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자국에서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저자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모순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를 드러낸다.
“내가 만난 일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며 사실상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그마저도 주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쟤네(이주노동자) 못 사는 나라에서 왔어. 캄보디아에서는 한 달 최저 월급이 20만~25만 원인데 여기에서는 일고여덟 배 더 벌어가잖아. 그러니까 한국인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안 되지. 쟤네 월급 조금만 줘도 여기서 일할 거잖아. 쟤네 퇴직금도 받잖아. 한국만 손해 본다니까."”*
한국이 손해보고 있는 걸까?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을 고용한 사람들은, 2주 정도 국내 사람들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지원자가 없을 경우,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 인력이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해당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국내 사람들이 없다는 의미다. 일할 사람이 없다는 건, 그만큼 사업주가 손해를 본다는 의미다. 사업주에게 고용허가제는 최저임금으로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기회다. 어찌보면 그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고용을 신청하는 사업주에게 내국인 구인 노력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 취지 자체가 내국인(선주민)이 일하지 않는 곳에 외국인(이주민)을 고용한다는 것이다. 선주민이라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곳에 이주노동자가 그 자리를 촘촘히 메우고 있다. 여동수 센터장의 말대로, 한국과 사업주 입장에서는 최저임금으로 구하지 못할 노동력을 이주노동자가 제공하니 더 혜택을 보는 셈이다.”*
한편, 이런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국내 일자리를 모두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는 진실과 다르다. “기본적으로 고용허가제는 인력이 부족한 한국의 사업장에 이주노동자가 단기로 와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 제도는 내국인 구인 노력을 의무화한다. 제조업, 건설업, 서비스업은 13일 동안, 농축산업과 어업은 7일 동안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공고를 낸 뒤에도 일손을 구하지 못할면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내국인(선주민)이 일하러 오지 않는 곳에 외국인(이주민)이 일을 하도록 돕는 제도인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그것도 최저임금만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외국인이라고 해서, 저개발 국가에서 왔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대해야 할까? 책, <깻잎 투쟁기>는 우리나라가 외국인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고발하며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난 3월, 모 국회의원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월 100만 원 만 주고 일종의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자는 말을 했고, 법안 발의를 했었다.
법안의 취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낮은 가격에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맞벌이 가정의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다. 월 100만 원의 돈이 코리안 드림을 갖고 오는 사람에게는 큰 돈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생활안정과 노동의 질적 향상을 꾀한다는 최저임금의 취지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부분이 맴돌았다.
"쟤네(이주노동자) 못 사는 나라에서 왔어. 캄보디아에서는 한 달 최저 월급이 20만~25만 원인데 여기에서는 일고여덟 배 더 벌어가잖아. 그러니까 한국인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안 되지. 쟤네 월급 조금만 줘도 여기서 일할 거잖아. 쟤네 퇴직금도 받잖아. 한국만 손해 본다니까."*
"저개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컨테이너 집, 비닐하우스 집,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집에서 사는 것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자 일종의 차별적 착각이다. 그들도 자신들이 사는 집이 더럽고, 열악하고, 좋지 않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그들이 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 와서 일을 하는 건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 그에 합당한 돈을 벌기 위해서다. 결코 차별을 받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최소 같은 사람이면, 같은 조건에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걸 인식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과거 우리나라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중동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돈을 벌어왔다. 그 돈을 통해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그들의 가족들은 밥을 배불리 먹고, 교육을 받고, 삶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지난 과거를 생각하고 돌아본다면 최소한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더이상 차별적인 대우와 차별적인 법률을 만들어서도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산업계는 더이상 돌아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선진국으로 진입한 만큼, 우리나라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다.
2024년에 새롭게 들어오는 16만 5천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코리안 드림을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이 한국에 갖고 있는 꿈과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깻잎 투쟁기>(우춘희/ 교양인/ 2022) p. 42, 92, 93,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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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제목 : [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대학교 강당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단에선 교수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는 12시 30분에 끝났다. 다음 수업이 1시 15분인 터라, 내 점심시간은 45분 밖에 되지 않았다. 설교가 끝나면 제일 먼저 강당을 나가 점심을 먹고, 도서관 소파에 누워서 어제 못 잔 잠을 자려고 했다. 설교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고, 교수가 한 말에 눈을 떴다.
“지금,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학생들이 갇혀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핸드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나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진도 앞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기사였다. 다행히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됐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앞선 전원 구조 소식이 오보라는 기사를 접했다. 수 백명의 학생들이 배 안에 갇혀 있으며, 구조가 시급하다는 기사가 연신 올라왔다. 구조하고 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기사만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도 구조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상식이란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식’을 말한다. 가장 먼저 도망친 세월호 선장, 수 백 명의 죽음을 오보하는 언론, 7시간 만에 등장하는 대통령,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던데, 라는 말. 내게 이 모든 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선원들을 우선 해야 되는 게 선장 아닌가? 언론은 도대체 뭘 보고 기사를 쓰길래 수 백 명의 목숨을 구조했다는 오보를 냈을까?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보고를 받지 않았나? 보고가 되지 않은 건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발언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해라 라는 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대응하라고 정부가 있고, 부처가 있고, 시스템이 있는 거 아닌가?
이 모든 상황에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은 “세상이 이상하다"였다. 그 순간 언론에서 비추는 모습이 과연 진짜일까 의심이 들었고, 나는 내 눈으로 직접 그 상황을 봐야겠다 싶었다. 다음 주가 중간고사였지만, 아랑 곳 않고 진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량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식 잃은, 아니 정확히 당시에는 아직 자식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부모들을 보면서 뼈에 새겨지게 느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이유는, 유족들의 모습을 담을 적절한 단어가 뭔지 알 수 없어서였고, 비통해 하는 그 분들의 모습을 어줍잖은 단어로 품을 수도,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였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면 가족이 있고, 침대가 있는 방에 누울 수 있는 내가 무슨 말과 마음으로 그들의 비통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비통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그 분들의 모습과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까지. 세상 만물의 소리를 담을 수 있고, 가장 과학적인 언어가 ‘훈민정음' 한글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억울한 것이 있으면 직접 한글로 써서 임금인 자신에게 항소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어떤 억울함도 표현하고 품을 수 있는 한글이지만, 한 가지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식 잃은 부모'다.
부모 잃은 자식을 일컬어 ‘고아孤兒’라고 하고, 남편 잃은 아내를 ‘과부寡婦’, 아내 잃은 남편을 ‘환부鰥夫’라고 한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것은 세상을 잃은 것이고, 자기 자신을 잃은 것과 같다. 자신 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비통함은 감히 말할 수 없다. 그 어떤 억울함도 호소하면 들어준다고 말한 세종대왕이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만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애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그 단어를 만들지 않은 게 아닐까.
연극 <먼데서 오는 여자>에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한다.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게 해달라고 싸우다가 10년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있은 후, 유족들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처럼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정부는 없었다. 못 들어준 것이 아니라 안 들어줬다. 오히려 그 슬픔이 사회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듯이 외면했다. 유족들은 계속해서 진상 규명을 외쳤고, 함께 기억하자고, 기억해 달라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만들자고 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또다시 마주했다. 이번에도 정부의 시스템은 발휘되지 않았고, 책임 없다는 말과, 참사가 아닌 사고이며, 경찰 더 투입됐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를 보고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부모님들처럼, 2022년 10월 29일의 부모님과 형제, 자매, 남매. 친구들과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들은 또다시는 ‘한량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참사가 있는 곳에 가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지언정,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은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참사를 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참사 현장에 가서 현장을 본다. 그리고 ‘나’라는 작은 사람에게라도 그 ‘햔량없는' 고통이 분담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량'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참사로 탄생한 이름이다. ‘나’라는 사람의 한계와 그릇은 명확하지만, 이 작은 한계와 그릇으로 고통과 억울함이 나눠질 수 있다면, 또 그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유족들의 고통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참사를 통해 있어선 안 될 이름들이 생겨났다. 세월호 아이들, 세월호 세대, 세월호 유족, 이태원 참사 유족, 이태원 참사 피해자 등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외에도 국내에는 크고 작은 참사들이 발생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조금 잊혀진 성수대교 붕괴 참사와 삼풍 백화점 참사 등이 있다.
참사를 통해, 세상에 있지 말았어야 할 이 이름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그 이름을 잊어버리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 이름을 잊는 날은 참사의 원인이 된 시스템의 부재와 정비, 책임자들의 사과가 있을 때가 그들의 이름이 잊힐 수 있을 때가 될 것 같다.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걸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가 갈 수 있다면, 참사의 현장을 언제고 마주하고 싶다.
글을 쓰고 있는 10월 29일, 사고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골목과 추모식이 있다는 서울광장을 다녀왔다. 불과 30초면 다 걸을 수 있는 그 골목에서 수백명이 압사했다는 게 다시금 믿기지 않았고, 수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에 책임자들이 나오지 않은 게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8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한게 없어 보이고 오히려 퇴보한 듯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나는 여전히 유족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인故人’을 추모하고, 글을 쓰는 것 뿐이라는 점이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분들의 고통과 억울함, 비참함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책임자가 듣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유족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책임을 물어주면 된다고 믿는다. 부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억울함이 조속히 풀어졌으면 좋겠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란다. 참사로 희생된 분들과 그 유족분들의 안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