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참사]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10. 29 이태원 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2주기를 앞둔 지금, 유가족들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지난 9일, 서울 중구 부림빌딩에 마련된 임시 기억·소통 공간 '별들의집' 에서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났다.  ■ 다시 돌아온 10월, '참사 2주기' 맞는 유가족 -어느새 10월이 됐네요. 언젠가 "우리에게 10월은 굉장히 아프고 시린 달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 있어요. 참사 2주기를 맞는 마음.. 어떠실까요?   10월은 유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달이에요. 사실 1년 중 너무나 좋은 한 달이잖아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고요. 이렇게 좋은 한 달이 우리한테는 굉장히 아프게 다가오는 달이라 너무 서글프기도 하죠. 놀러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는 집 안에만 있고요.  10월을 기억하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게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도 밖으로 나오자. 나와서 뭔가 하고 사람들한테 10월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라도 하자. 그런 마음으로 10월을 보내고 있어요. 지난주부터 <시민들과 주말걷기> 행사를 시작했는데, 만나서 함께하다 보면 웃을 수도 있고 참 좋은 것 같아요.   -1주기와 2주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까요?   많이 다르죠. 1주기 때는 10월이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어요. '10월을 어떻게 보내지? 어떻게 해야 되지?' 10월 29일이 다가올수록 당시 기억들이 자꾸 되살아나기 시작하니까 많이 힘들더라고요. 그때는 오로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만 견디려고 했었는데 올해 10월은 달라요. 우리가 해야 될 목표가 뚜렷해졌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지가 명확해졌으니까요.  아이들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다 날아간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에요. 아이들이 자기들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없애주는 것. '너희 잘못이 아니야. 국가와 정부가 잘못해서 만들어진 참사야. 너희들은 정말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들이야' 라는 것들을 밝히기 위한 것이요. 그래야 아이들의 명예가 고스란히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 특별법 통과부터 특조위 출범까지... 유족이 전하는 숨겨진 뒷 이야기 ○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회 통과…긴박했던 순간들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얼마 전,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우여곡절이 참 많았지요. 특별법 통과 목표가 지난해 12월이었는데, 올 5월에야 통과 됐더라고요? 야당 단독으로 통과됐지만, 일단 법안이 통과됐어요. 특별법이 통과되는 시점에서 참 묘한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1년 동안 특별법 통과를 위해 길거리를 헤매고 목소리를 내고 몸을 다 던지는 고행을 했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했고 완전히 외면하고 거부해버렸었잖아요. 굉장한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거든요. 아이들한테 '우리가 법안을 만들어서 올렸어' 했는데, 거부당하니까 어찌할 줄 모르겠는 거야. 이 막막한 심정을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했어요. 유가족들이 절망감 때문에 포기할까 봐 걱정이 됐어요.  재의요구권이 거부돼 다시 국회로 돌아오면 여당 국회의원들 찾아가서 '찬성표를 많이 확보해서 다시 거부권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설득하고 희망을 주려고 했어요. 끈을 놓지 말라고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고. 유가족들은 절망감에 빠져있고, 저도 기진맥진 탈진한 상태에서 집에 멍하니 있었어요. 그런데 전화가 온 거예요. 지금 특별법 관련해서 여야가 합의를 하려고 한다. -갑자기요? 그때가 언제였어요? 지난 5월이었죠. 굉장히 생뚱맞았어요. 처음엔 신뢰 못 했어요. 계속 그래왔으니까. 협상만 하다가 서로 안 맞으면 어그러지는 식이었으니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와 영수회담 할 때 말을 잘못한 게 있었어요. 법리를 잘못 해석하더라고요.  '영장 청구권'과 '영장 청구 요구권'은 완전히 다른 사항이거든요. 특별법에는 영장 청구 요구권이 들어있었어요. 대통령은 영장 청구권이 들어있어서 위헌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영장 청구는 오로지 대한민국에서 검사만 할 수 있는 권한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특별법에 있는 일반 민간인 특조위원들이 그 자격을 갖는다는 것은 위헌이고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아니거든요.  영장 청구 요구권은 검사한테 우리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검찰에 '영장 청구를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거란 말이에요. 검사가 판단을 해서 '이거 가지고는 안 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검사가 '오케이' 하더라도 판사한테 영장 청구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판사가 '아니야' 하면 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요구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대통령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걸 보고 저 실수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통령이 영장 청구 요구권을 비롯한 독소 조항만 없애주면 특별법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니 그 부분으로 물고 늘어지자. 이걸 삭제시키면 특별법 통과시켜 줄 것인지 강하게 정부 여당에 푸시하자고 했죠. 그런 상황 과정 속에서 여야 협상을 다시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했어요. 이게 뭘까?  믿을 수가 없으니 좀 지켜보자. 그런데, 한 30분 있다가 다시 전화가 온 거예요. 여당에서 요구하는 조항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요구를 받으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한다고.  조항이 뭐냐 물었죠. 아까 말한 대통령이 실수한 부분 ① 해당 조항을 빼 달라. ② 특조위 기간을 (1년+3개월 연장) 9개월+3개월 연장으로 해 달라. ③ 특조위원장 추천을 여야 합의로 하자. 이 3가지 조항을 이야기했어요.  급하게 운영위원들과 대책회의가 줌 회의를 통해 논의하고 결정을 했었어요. 판단했을 때 '대통령이 실수한 부분은 없어도 큰 관계없다, 오케이 그거는 빼줄게.' 그런데, 기간은 1년+3개월 연장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무조건 1년은 지켜야 된다고 했죠.   특조위원장 자리는 여야 합의로 해서 하자고 제의했는데, 합의는 애매모호한 거예요. '합의가 아닌 협의로 하라'고 했어요. 협의는 기한이 있어요. 계속 논의하다가 기한이 넘어가면 그냥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협의로 하자고 전달한 거죠.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한 1시간 있다가 전화가 왔는데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우리가 얘기한 것들을요. 깜짝 놀랐어요. 전혀 기대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유가족들이 오케이만 하면 바로 여야 원내대표가 기자회견하고 발표할 거라는 거예요. 고민할 시간이 길지 않았어요. 1시간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 시간이 저한테는 가시방석이었죠. 모든 유가족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고, 설명을 들을 수도 없고, 오로지 내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 무거운 짐이 나한테 온 거예요. 그런데, 머리를 딱 비우고 딱 이것만 생각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어떻게 선택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했어요. 어떤 선택이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선택일까.  삭제한 조항은 특조위 활동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이 있는 항목들은 아니라고 판단되었고, 지금 법안 통과시키지 못하면 앞으로를 장담할 수 있을까, 입법이 어떻게 될지, 정치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고민하다 전화했죠. 오케이. 그리고 잘못되면 모든 책임에 대한 돌은 내가 맞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정세가 보이잖아요. 상황이 점점 눈에 보이면서 이때 특별법 통과 안 됐으면 큰일 날 뻔했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법이 통과 안 됐으면 사실 이 공간으로 오지도 못했어요. 분향소에 계속 있었어야 했어요. 지난여름 얼마나 폭염에 시달렸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어떻게 견뎠을까요.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했냐면, 이번에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무죄를 선고받았잖아요. 만약 법이 통과 안 된 시점이었다면 모두 다 절망에 빠졌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특조위가 있잖아요. 그게 굉장히 큰 위안이 되는 거예요. ‘그래. 무죄받았어? 알았어. 특조위에서 조사해서 더 큰 죄를 받게 할 거야.’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 경찰은 유죄, 구청은 무죄? '엇갈린 판결'   -아, 그렇죠. 얼마 전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의 1심이 있었어요. 박 구청장은 무죄, 이 전 서장은 금고 선고받았더라고요. 유족들이 법원 앞에서 울부짖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어요. 네. 유족들은 박희영 구청장에게 형사적 책임을 떠나서 구청장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묻고 싶은 거예요. 자신의 지자체에서 일어난 사고잖아요. 지자체장으로서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책임을 느끼고 구청장직에서 물러나야 맞는 이치인 거죠. 그런데, 너무나 당당하게 직을 수행하는 걸 보고 우리는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정권의 실세 라인이에요. '방탄하는구나'라고 느꼈거든요. 재판 과정에서도 똑같았어요. 유족들은 재판하는 중에도 굉장히 많이 분노하고 느꼈어요.  -위원장님은 전 재판과정을 직접 지켜보셨잖아요?      네. 검사가 제대로 역할을 안 하는 거 같았어요. 판사가 몇 번이나 증거 자료 좀 확보해 와라 해도 안 하는 거예요. 판결이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예상을 깨고 징역 7년을 구형했어요. 깜짝 놀랐어요. 웬일로 7년을 구형하지? 의아했는데 무죄가 나왔어요.  간극이 너무 크잖아요. 이건 형식적인 언론 플레이다. 보여주기 위한 거다. 검찰은 열심히 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구나 생각해서 그때 굉장히 분노했거든요. 어떤 판단과 기준을 가지고 검찰이 징역 7년을 구형했고, 판사가 판단했을 때는 죄가 안 된다는 것인지.  징역 7년과 무죄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계속 인터뷰하면서 검찰이 항소하고 제대로 다퉈주지 않으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되고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해야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7일에 항소를 했어요.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텐데 안 할 수 없죠. 항소 시작되면 특조위 조사하고 병행해서 가게 될 텐데 다들 도망갈 길이 없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밉고 괘씸한 건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죄를 씌우고 싶지는 않아요. 죄가 없는 사람을 밉다고 무조건 넣어야 된다? 이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만약에 죄가 없더라도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책임이 있다면 직을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해요.  형사적인 책임을 떠나서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 무죄에 대한 그 의미가 '일을 안 하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예요. 이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 했어, 인파 관리도 안 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무죄인 거야. 그런데, 일을 했던 사람, 무언가를 한 사람, 경찰이든 뭐든 뭘 했던 사람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거죠. 이런 메시지가 공무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한번 고민해 봐야 될 부분이에요. '나 일 안 할래. 가만히 있으면 아무 죄도 안 되는데 괜히 나서 가지고 책임지라고 처벌받으면 나만 손해지. 왜 해?'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죠. 이건 잘못됐고 부적절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혀 없죠. 외국 언론들도 참 이해할 수 없다고 해요. 159명 사망자. 얼핏 듣기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사망자가 많은 참사라 들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성수대교 붕괴됐을 때, 국무총리, 국토부 장관 다 그만뒀어요. 그 사람들이 대교 만들 때 무슨 책임이 있었겠어요? 없어요. 그렇지만 여파라는 게 있기 때문이죠.  관료들이 있는 이유가요. 그런 상황 생기면 대통령이 그만둬야 돼요. 하지만, 대통령이 그만둘 수 없죠. 국가에 혼란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국무총리, 장관이 있는 거예요. 대통령을 대신해  책임지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안 져요. 그러면 책임은 대통령한테 계속 가 있는 거예요. 사라지지 않는 거죠. 우여곡절을 겪었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고, 참사 22개월 만인 9월 비로소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송기춘 위원장의 약속처럼 특조위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원을 풀어줄 수 있을까. 특조위가 조사하고 밝혀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꼼꼼히 짚어본다. ■ "진상규명, 이제 시작" 특조위 출범과 해결 과제 -지난 9월 23일,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수사를 위한 별도의 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유가족 측 입장이었잖아요?   특수부 수사 때부터 부실 수사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부가 방탄하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조사할 수 있는 기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목매달았던 거죠. 얼마 뒤면,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선고 나올 텐데 사실 기대가 없어요. 검찰에서 김  청장은 불기소해야 된다고 1년 동안 방탄을 했어요. 죄가 없다. 수사심의위에서 기소 의견이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기소했는데 금고 5년을 선고했어요. 불기소해야 된다고 떠들더니 금고 5년을 때린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거잖아요.  박희영 구청장 재판과 똑같이 기대치가 없어요. 겉보기로만 해놓고 직접 선고는 전혀 다른 각도로 나올 확률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하지 않으면 그냥 덮여 버리고 말 거다, 진실을 밝힐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 가지, 특조위에 대해서 정부 여당이 무용론을 많이 주장했거든요. 세금 낭비니 어쩌니. 국정조사나 특수본에서 다 했는데 왜 또 하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 시각으로 국민들도 보고 있어요. 특조위에서 무언가를 밝혀내지 못하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어떤 재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영원히 특조위를 꾸릴 수 없을 거예요. 무용론이 되어버리고 말 거예요. 그래서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겁니다. ○ 특조위가 반드시 밝혀야 할 과제들 -유가족은 특조위에 '1호 진상규명 조사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나요?  (*진상규명은 특조위의 자체 직권조사, 유가족 등 관련자 신청으로 이뤄지는 신청 조사로 나뉨.)  유가협 차원에서 공통된 과제예요. 모든 가족의 공통된 의문점을 1호로 접수한 거고요. 11월쯤 2주기가 끝난 후에는 각 가족 개개인들이 가진 의문점에 대한 진상 조사 신청을 할 거예요.     -추가 신청은 개별적으로 하나요? 네. 희생자들마다 의문점이 달라요.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개개인의 기록은 다르니까요. 어떤 유가족은 내 아이는 계속 살아 있었다, 체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의문이 드는 것들을 찾아봐 달라고 하는 부분이 있겠죠. 사망자 시신이 소방 기록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그때 당시 영상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녔는데. 길에 아이들이 시신이 눕혀져 있는 게 있어요. 7~8명 정도. 그런데, 하의 탈의를 시켰어요. 얼굴만 옷으로 덮어놓은 게 있었어요. 너무나 의아했던 부분이죠. 하의 탈의를 왜 시켰지? 누워 있다가 생존한 애도 있어요. 자기가 기절해서 누워 있는데 너무 추워서 깼대요. 그런데, 옷이 다 면도칼로 찢어져 벗겨져 있었다는 거예요. 그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대체 왜 이유가 뭐지? 왜 그렇게 했지? 의문이 드는 거죠. 보통 시신을 그렇게 방치하지 않거든요. 덮어 놓아야 맞는 건데.  또 사진 찍는 걸 제재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재해야 되는 거예요. 경찰도 한 명 서 있었어요. 그렇게 두면 안 되거든요. 미스터리인 거죠.  계속 유류품도 조사했었잖아요. 만약, 마약이 발견되거나 연루됨이 나타나면 아이들을 그 매개체로 삼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사 발생 초반에 SNS에 잘못된 정보가 많이 돌았어요. 클럽에서 마약 하다가 사고가 났다, 클럽에서 화재가 있었다.   모든 게 왜곡되어 퍼진 거예요. 희생자 159명 중 단 한 명이라도 마약을 가지고 있었거나 연루됐으면 모두가 마약 사범으로 매도 돼버릴 수 있었죠. 이런 사진이 아마 증거 자료가 되었을 거예요. 나중에 가족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정말 성실한 아이들 밖에 없는 거예요. 이태원에 그냥 구경 갔던 애들이에요. 핼로윈을 체험하고 싶어 왔던 애들. 한편으로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어요.  우리가 의문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게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잖아요? 경찰들이 와서 희생자들 유류품을 다 뒤졌어요. 마약 관련된 게 있나 없나 계속 찾고 있었던 거예요. 마약을 한 흔적이 있나 없나. 만약 희생자 중 한 명이라도 마약을 소지하고 있거나 마약과 연루된 무언가가 있었으면 다 뒤집어 씌웠을 거예요. 이게 마약 때문에 생긴 사건이라고. -참사 원인에 많은 의문들 중 대통령실 용산 이전도 영향이 있다, 지적하는 의견도 있잖아요? 특조위 조사에서 나올 거예요. 참사 전과 후, 그 후 대처. 이렇게 세 가지.  참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데, 용산 이전이 굉장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요. 청와대에서 용산 이전할 때 충분한 기간을 가지지 않았어요. 집을 이사하더라도 충분히 준비를 갖춰주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대통령 집무실을 졸속으로 이전할 수 없는 거죠. 공간만 이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가장 핵심적으로 잘못된 것은 대통령실이 이전하면 대통령 경호의 문제가 따르는 거예요. 청와대에 있을 때는 그 역할을 종로경찰서가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청와대에 있었기때문에 종로경찰서가 모든 노하우를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용산으로 와버렸어요. 용산경찰서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거예요. 옮기기 전에 예상해서 인력을 보충시켜 준다든가 용산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고 진행해야 됐어요.  가장 1순위가 대통령 경호란 말이에요. 그런데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가버렸어요. 용산경찰서는요. 재판 과정에서도 증언했지만 대통령실이 이전하면서 업무량이 1.5배가 늘었대요. 능력도 안 되는데 대통령 경호에 대통령실 앞 집회까지 경호하려니까 일정 외 업무량이 늘어나고 견딜 수가 없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인원 보충을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는데 그것도 안 됐다. 재판관이 '대통령실을 이전한 것이 참사에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하냐' 물었더니 그 사람이 '그런 것 같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집회 때문에 발생된 거다, 집회만 없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집회가 없는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니에요. 보수 정권이 집권하든 진보진영이 집권하든 집회는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그게 문제라고 하면 공산국가죠. 모든 국민들도 알고 대통령실도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했다는 게 얼마나 무능한 일인지 근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다 이야기를 하거든요. 용산서 담당 과장이 재판 나와서 증언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자기들은 이태원의 인파 관리에 대한 것들을 지시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상부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빨리 가서 인파 관리하고 구조하라고 했으면 30분이면 갔다는 거예요. 그만큼 대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지시를 받은 게 없다는 거죠.       아이들이 압사당한 채, 길에서 기절해 있는 상태로 무려 50분을 멈춰 있었단 말이에요. 심각한 상황을 인지했으면 빨리 경찰을 보내서 구조 활동을 시켰어야 되는데.. 그러면 많은 아이들이 살 수 있었어요. 지시하면 30분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아무런 지시를 안 했어요.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용산으로 대통령실 이전한 게 영향을 안 끼쳤다고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당연히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김광호 서울청장이 국정조사에서도 이야기했고, 법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곳에 경찰 병력이 한 160명인가 140명인가 이렇게 있었다. 예전보다도 훨씬 많은 경찰 병력이 있었다고 했거든요. 경찰 병력 중 50명은 마약 수사대 병력이었어요. 나머지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범죄, 성추행 사건 등에 배치 돼 있었고, 인파 관리를 위한 병력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만약, 정보 경찰이 있었으면 사태 심각성을 보고 빨리 전파해서 구조해야 된다고 했을 텐데, 정보 경찰조차 한 명도 없었단 말이에요.   마약 수사대 병력은 사법경찰이란 말이에요. 아무도 경찰인 줄 몰라요. 사법 경찰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듣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경찰이라는 것을 인지 못하니까. 이 사람들은 과연 참사가 벌어지고 수습되는 동안에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가 핵심인데,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요. 국정조사에서 증인으로도 채택 안 됐고, 특수 수사에서도 조사가 안 됐고, 이 사람들만 이상하게 빠져나가 있어요. 아무런 증언도 확보가 안 돼 있잖아요, 가장 핵심이 인물들인데. 그래서 이번 특조위에는 꼭 그걸 밝혀야 된다고 하고 있어요.  국정조사 때 이야기 나왔던 게 마약 수사대는 한 팀이 5명으로 수사하는데, 당시 50명. 10개 팀이 투입이 돼 있었던 거예요. 이 사람들이 생생히 현장을 목격을 하고 있었는데. 상부로부터 인파 관리를 해야 된다, 뭘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거예요. 자기 직무에만 충실하라고. 경찰 특성상 마약 수사를 하고 있잖아요? 살인사건이 나도 개입 못해요. 그게 경찰의 특성이고요. 직무를 팽개치고 다른 걸 하잖아요? 그럼 징계 대상인 거예요. 눈앞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사람이라면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지금 심각하다.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되냐' 상부에서 뭐라고 지시했느냐가 핵심이에요.  마약 수사대 팀장들이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자기들끼리 회의를 했대요. 그 자리에서. 그래서 마약 수사대 조끼를 갈아입고 그때부터 구조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때는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상태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느 장소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보고를 했는지 이게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에요. 그리고 누구한테 지시를 보고를 했고 누구한테 지시를 받았느냐 이게 굉장히 큰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참사가 벌어진 이후, 상황 대처 문제도 지적하고 싶다고요? 제가 오전 12시쯤 현장에 갔는데 그때까지도 도로 통제가 안 되어 있었어요. 살아있는 아이들이 119에 실려서 응급실로 가야 되는데 못 가는 거죠. 도로에 사람이 꽉 차있는데.. 이건 그냥 길에서 죽으라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짚고 싶었던 것은. 당시에 응급환자를 보내기 위해서 병원 응급실에 연락했는데 안 받았다는 거예요. 그것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재난 상황이에요. 전시 상태 같은 상황이라고요. '받을 수 있다, 없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조건 받아야 되는 거죠. 선택적으로 우리 병원은 안 돼?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제도도 분명히 고쳐야 되는 부분이죠. 전시 상태에 준하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무조건 가까운 병원 어디든 응급실은 무조건 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가장 최우선적으로 되어야 되는데, 너무나 부실하고 어이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겉포장은 선진국이라고 해놓고 실상은 완전히 후진국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분명히 살 수 있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굉장히 분노하는 지점이고요. 특조위에서 꼭 이걸 밝혀내야 된다고 유족들은 강조하고 있어요.   -또 하나의 의문, 희생자들 가족 인계까지의 과정 초기부터 공통된 의혹들이 있어요. 제가 현장을 갔을 때 이태원 골목 옆 빈 상가에 아이들 시선이 쭉 눕혀져 있었어요. 거기서 아이를 발견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못 들어가게 막는 거예요. '내가 부모인데, 왜 못 들어가게 하냐' 그랬더니 '여기 다 치료 중이라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면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방해되면 안 되지 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시신들이었어요.  왜 부모인데도 못 가게 막았나 굉장히 화가 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아이의 손을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렇게.. 부모들이 찾아왔는데도 인계해주지 않고 계속 놔두고. 우리 아이 같은 경우는 다목적 체육관에 들어가 있었는데, 신원 확인도 되었고 내가 사실관계 확인하면 인계해주면 되는 걸 안 하고 의정부로 보냈더라고요. 의정부 가서 찾았거든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거리로, 외곽으로 보낸 이유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재난 대응 시스템을 만드는 데 1조가 넘는 돈을 들여서 만들어놨단 말이에요. 완전 무용지물이에요. 그 많은 돈을 들여 만들어놨던 게 아무 쓸모가 없고 하나도 쓰지를 못했어요. 너무 답답하고 갑갑한 거죠.  -9대 과제에 담긴 유족들의 추가 요구사항은 무엇인가요? 9대 과제 8번은 피해자 지원 체계의 부분인데요. 참사 초기에 정부로부터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하나도 받은 게 없이 방치돼 버리니 그런 문제를 지적을 하는 거죠.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의 권리라는 게 당연히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던 거고. 당연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스템, 상황 그리고 주위에서 우리를 억누르게 했던 유가족다움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이 있었어요. 2차 가해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되짚어봐야 될 사회적인 병폐이고 한 두 사람의 문제가 되는 게 아니죠. 특조위에 이런 2차 가해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특조위 출범 날, 유족들이 그곳을 찾았죠. 송기춘 위원장이 "유족과 희생자의 한을 꼭 풀어주겠다" 말을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한'이 진정으로 풀릴 수 있을까요?  가지고 있는 한은 유족들 마다 다를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참사가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만 밝혀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아이들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무질서했다, 자기들이 잘못했다 또는 왜 거기를 갔느냐' 이런 왜곡된 시선에 묻혀버리면 영원히 그냥 하지 말아야 될 짓을 했던 아이들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거예요. 그것만큼은 해명하고 싶어요.  열심히 일상을 살아왔던 아이들이에요. 단 한 번의 휴식을 위해서 갔던 곳에서 엄청난 일을 당해버린 거잖아요. 도대체 왜 아이들에 책임이 있냐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휴식할 권리도 있는데. 열심히 일은 해야 되고 휴식은 하면 안 된다? 그런 문제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제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태원을 관광특구에서 해제시켜라' 왜 관광특구를 만들어 놓고 와서는 안 되는 공간처럼 이야기를 하느냐고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거 아니냐고. 관광특구로 지정한 건 오라고 하는 거잖아요. 왜 여기를 갔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하는 걸까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
[이태원 참사]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캠페인을 끝내며 9월 27일, 글을 시작하기 전 이태원 거리에 카메라와 함께 답사를 나왔다. 금요일이기에 다소 사람이 몰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했고 내가 기억해온 활기 넘치는 상가가 가득했던 거리에는 임대인을 구하는 종이만이 남아 많은 이들에게 쓸쓸한 단상을 남기고 있었다. 사실 이태원은 코로나로 전국이 통제되었던 시절 전부터 꺾여가고 있었다. 문화거리를 불온한 이들이 배회하는 장소라고, 젊은이들이 일탈을 벌이는 장소라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물건이 유통되는 장소라고, 손가락질 하던 이들의 소원대로 거리의 상권은 다양한 이유로 무너졌다. 거리에 큰 상처를 남긴 첫 문제는 코로나였고, 다음으로 발생한 문제는 이태원 참사. 두 사건이 짧은 숨으로 연달아 발생하면서 많은 상인들의 숨통을 조였고 이제는 아무도 생기 넘치는 젊음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태원을 떠올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이태원은 살아날 수 있을까. 이 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거리의 미래를 상상해봤다. 역사에서 나와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참사 당시의 거리였다. 참사가 발생한 장소는 1번 출구에서 불과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도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을까. 역사와 바로 연결된 곳, 세계음식거리의 초입부에 속하는 골목, 짧게만 생각 해봐도 많은 인파가 있었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7일 당일, 유달리 거리 주변에서 순찰하는 경찰차들이 눈에 띄었다. 3번 출구 앞에 보이는 작은 파출소가 이 거리의 모든 치안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날만큼은 파출소 인근을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다. 길을 건너 3번 출구 근처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커피숍에 붙어있는 임대문의 딱지였다. 축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근방은 공실이 된 건물로 가득했다. 참사의 시간을 이겨내기에 2년의 시간은 아직 모자란 건지. 이 조용한 건물들을 보고 과거 평일 낮, 사람으로 가득한 이태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거리의 페인팅을 싫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할렘가의 문화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거리의 특색을 만들어준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애초에 이런 도시였다. 이 건물은 3번 출구를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건물이다.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 초입에 바로 보이는 건물, 이태원하면 문화, 술, 음식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겠지만 이태원에는 꽤 오래전부터 앤틱 가구거리가 있었다. 앤틱 가구거리도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갔던 날 축제가 있어서인지 상인들은 거리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오랜만에 밖에서 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리에 진열된 수많은 가구, 도기, 그림 액자, 그리고 이 물건들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 앤틱 가구라는 개념 자체가 인기가 없어진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앤틱 가구거리를 둘러보고서는 이태원 시장에 잠깐 들렀다. 예전에는 여기 시장도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코스 중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해방촌 신흥시장이 젊은 인구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가 되어서인지 유달리 한산해보였다. 옷을 구경하러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거리에는 이 근방이 익숙한 현지인들만이 남았고 외부인의 발길은 끊겼다. 옷을 인터넷으로 가장 많이 사는 젊은 세대에게 건물 지하에 내려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옷을 사라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쉽게 하려고 하지 않겠지. 시장 밖 거리에서는 저마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당일에는 앤틱&빈티지 축제가, 방문했던 날로부터 며칠 후에는 세계문화음식거리에서 축제가, 그리고 10월 말에는 할로윈 축제가 열릴 것이다. 퍼레이드, 코스튬 파티, 다양한 음식과 음악까지 다들 그간의 불황을 잊고 즐거운 한때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실이 되어버린 상가는 거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간 서평을 쓰면서 2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과거를 추모하는 형태에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돌을 던지는 시민들도 바뀌어야 하고, 정부도 언론도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 이 말은 이태원을 향한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작년 이맘때쯤 이태원 방문자 수가 코로나 이전의 80%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그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말도 있었다. 이미지 회복은 아직이라는 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1년 전에도,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도 말이다. 유튜브에 이태원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이태원 참사 이후 거리에 대한 지적을 하는 내용의 영상들이 여럿 나온다. AED가 부족했다는 지적, 상권의 발달 형상과 안전장치 미흡에 대한 지적, 적은 통제 인원과 이에 대한 한계에 관한 지적까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이태원은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다소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다소 무식한 접근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속칭 군대식으로 해결한다고 표현하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흉을 없애는 방식 같은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고 이태원 거리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축제를 금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전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더욱이 모색하는 것이 정답 아닐까? 거리를 걷고, 축제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다 결국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1번 출구로 가야했고, 나는 이 거리를 떠나기 전에 3번 출구 앞 파출소에 다시금 멈춰 섰다. 파출소 앞 주차장에는 경찰차가 멈춰있는 경우가 없었고 잠깐 들렀다가 나가는 차, 멈췄다가 출발하는 차로 입구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고 있을까. 이들이 이번 축제에도 안전한 이태원을 만들어줄까. 시민들에게는 즐거운 이태원, 활기찬 이태원도 물론 필요하지만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는 이태원이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3번 출구로 들어가 1번 출구로 나가며 그날의 100m는 얼마나 멀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 캠페인을 함께한 후 길과 거리에 관심이 생겨 서울의 거리와 관련된 책을 읽고, 또 강연을 듣고 있다. 최근에 들었던 강연은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들은 <<서울의 골목길에는 산이 보인다>>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 서울의 골목길과 산에 대한 강연이었다. 나는 골목길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대로에 기업인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진다면 골목길에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화가일수록 대로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프렌차이즈가 놓이고 골목길에는 성공을 꿈꾸는 시민들의 가게가 놓인다. 최근 이태원에서 술집보다 카페의 성공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는 문화가 젊은 세대에서 없어지고 있는 점, 신흥시장의 부흥으로 인근 데이트코스라 부를 수 있는 카페들이 얻는 반사이익, 다양한 카페 문화 형성까지 아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요소들로 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상권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죽고 살며, 몰락과 발전을 반복한다. 이태원은 잠시 꺾였지만 다시금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공이다. 이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리의 이미지가 아닐까. 께름직한 이태원, 안전하지 못한 이태원이 아닌 과거를 이겨낸 새로운 이태원이라는 이미지, 안전한 이태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평소부터 축제까지 앞으로도 안전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올해도 이태원 축제가 크게 열린다는데 이번 행사도 부디 안전하게 끝나기를.
·
[이태원 참사] 국가폭력의 경험을 안고 자란 아이
어른들은 몰라요 서울의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매일 1시간씩 활동 소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혹은 교육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들과 실무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나눴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나누었다. 어느 날 과장님의 질문. 서희 너의 민감성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공책에 나열했다.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폭력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다. 엄마 나 밭을 걷는 것처럼 느껴져. 지뢰가 마구 퍼져있는, 근데 지뢰의 위치는 몰라. 어디서 어떤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밭을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차량이 갑자기 날 박지는 않을까. 뒤에 오는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건넨 주스나 사탕에 약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까. 일상의 불안함은 때론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사회에서, 참사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참사의 맥락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사람들의 목숨이나 인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내가 국가의 쓰임이 있지 않다면 혹은 그만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관리한다. 이 불안함은 과연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나의 조부모 세대, 전후 가난 나의 할아버지, 홍*희, 48년생. 나의 할머니, 전*숙, 49년생.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3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전쟁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군모를 쓰고 있더랬다. 머리가 너무 작아 군모가 자꾸 벗겨져 나가는데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군모 덕에 살았고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3살이면 내가 자주 보는 아기 유튜버의 나이. 완벽한 문장 구사가 어려워 여러 단어를 나열하며 말하는 그 나이. 3살, 만 2살,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였던 할머니가 결혼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가난과 함께 살아갔다. 할머니가 시집간 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옆집에서 수저를 빌려왔다.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모든 일들을 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나보다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게 그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동네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나의 부모 세대, 가난 + 독재 정권 + IMF 나의 아빠, 홍*용, 69년생. 나의 엄마, 김*환, 71년생. 민주항쟁 당시 나의 아빠는 19살, IMF 당시 29살이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그 날, 11살이었던 나의 아빠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빠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당시엔 업적들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고, 다른 것들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 시대엔 전부 다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2살 차이 나던 아빠의 이모 -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 는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옷에는 수류탄 냄새가 항상 배어있었지만, 당신의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 혹은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독재 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사회를 꿈꾸었다. 대학에도 경찰이 있던 그 시대에. 한편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빠 세대까지 이어졌다. 3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의 아빠는, 고등학교 중퇴 후 이른 나이에 친척 집에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나의 아빠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고 나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 해 IMF가 터졌다.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의 넘쳤던 나의 외가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부도가 난 회사에서 가정집에서 쓰기도 힘든 대형 프린터기를 집에 가져왔다. 그 뒤로 나의 아빠는 쭉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민주화, IMF, 이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더 나은 한국 사회를 꿈꾸며. 나라를 살리자는 목표로 금을 모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갔다. 나의 세대, 없음 나, 홍서희, 99년생. MZ세대이자 Z세대의 첫 발을 딛는다. 우리 세대의 세대적 과제는 딱히 없다. 온 세대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목적을 내세울 만한 요인도 동력도 없다. ‘행복하기’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세대적”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행복은 다를 테고 행복하기 위한 방식도 다를 테니.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웠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친숙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이 아침에 일 하러 가면, 아기(나와 동생)은 혼자 남아 TV를 열심히 봤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책보다 TV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잡지식이 상당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살기 진짜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살기 좋아졌다고 불리는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세대적 과제가 없다면, 나의 세대는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줬던 큰 사건들을 돌아봤다. 내가 경험한 참사 내 나이 16살,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니는 학교에서 내가 나고 자란 ‘정선’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정선에 현장체험학습 갈만한 곳을 물어보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니!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의 한 달 전,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떴을 때만 해도, 갈 수 있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불과 몇 시간 후 유가족들에 의해 사실이 전달됐다. 나와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언니 오빠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안국역 근처에 살던 나는 예비 고3이었지만 하야 시위에도 매주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 나이 18살,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살면서 수많은 여성 피해자 사건들을 봐 왔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우리 집에서는 밤에 골목길로 절대 다닐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도 금지됐다.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범죄자들에게 쉽게 표적이 된다는 뉴스 보도로 인해, 나는 밤에도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굳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나와 몇몇 여성을 보며 자위행위를 했고,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마주했다. 두 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극히 꺼렸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 혼자 근무하는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살인’으로 바라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내 나이 24살,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은 마치 폭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누구 하나 품에 껴안는 사람이 없었다. 당일 이태원 근처에서 놀았던 나는, 자괴감과 부채감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뭐가 좋다고 그 시간에 놀았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서서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혐오 표현을 들으면서 고통을 감내했을 거로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여전히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파악 중일 때, ‘국가애도기간’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참사가 아닌 사고로 바라보며 ‘보상’의 맥락으로 축소했다. 그들에게 참사의 고통은 그저 개인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며 보장해 줘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드는 돈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더 효율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 - 보상 - 을 찾고자 했다. 사과는 늦어졌고 진상규명은 진척이 없었다. 국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부채감도 자괴감도 불안감도 고통도 전부 개인의 몫이었다. 내 나이 25살,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남동생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군 내에서의 사망 사건들이 종종 보도되고 있었고 불안함이 커진 건 그해 7월이었다.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수근 일병이 목숨을 잃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임 넘기기는 계속되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결과였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내 동생 또한 호우 피해 지역에 투입되었다. 나의 동생이 다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복무가 끝나길 바라기만 했다. 군에서의 사건들은 매번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매우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기후위기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국내산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그에 대해 얘기를 하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고민이 크게 와닿지 않으신 듯했다.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진정 괜찮을까? 온열질환으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아파트 주차장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데 그런 곳에서 하루 9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에 화가 났다. 위헌 결정이 나자 그제야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났다. 언제 탄소중립이 이뤄질 수 있을지 답답했다. 백날 텀블러 들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가의 부재? 아니, 국가폭력 내가 겪은 참사들이, 국가가 국가의 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나? 국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만 볼 수 있나? 사실 이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다. 사람들의 목숨은 ‘비용’으로 환산하고, 구조하고 예방하는 것에서 ‘효율성’을 찾는 국가의 폭력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호라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폭력을 행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사고’라는 말로 숨겼다. 응당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을 앞선 말로써 축소했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너의 죽음은 오롯이 너의 몫.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나의 세대는 전-국가적인 목표가 없다. 국가가 나서서 이끌만한 요인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보장 능력이 없는, 보호의 능력도 없는, 책임도 지지 않는, 회피하는, 역할과 소임을 축소하는, 심지어는 교묘한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나의 세대는 이 국가 앞에 불안함만이 남는다. 나의 환경에 대한 모든 신뢰가 붕괴되어 언제든 내게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불안함을 주는 저 강력한 권력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극복하거나 비판하거나 변화하고자 하는 행동이 내 삶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파할 여유도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더욱더 ‘나’의 현실에만 몰두할 뿐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생존을 위해 제테크를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하고 다름을 강조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삶의 태도를 택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가는 달라질까? 국민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불안함이 커질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요즘 길거릴 걷는 것도 무서워. 우리는 함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럴 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내 감정이 틀리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과 함께 극복할 수 있음에 기쁨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나는 더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토로한다. 너무나도 자연히 행해지는 국가폭력을 직시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일상의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세대들에게 연대의 손을 건네며 주저앉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
2
·
[이태원참사]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2014년 4월 16일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도중, 갑자기 뉴스 속보가 뜨기 시작하더니 바로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저게 무엇인가 싶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뉴스 속보가 계속 나오고,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 부상자 수가 점점 늘어나는 걸 보니 “아, 이게 실제구나. 실제로 일어났고, 현재 진행형이구나”라는걸 알아차렸다. 초기만 하더라도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는 많지 않았다.   당시 내가 전해들었던 것은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인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급격하게 변침을 했고, 이로 인해 침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단원고 학생이 8시 51분에 119에 구조요청 신고를 했고, 배는 침몰하고 있었지만, 선내에서는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이 연방 흘러나왔다는 것. 그리고 9시 35분 해경함정 123정이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아, 이제 구조가 시작되나 보다.”라고 느꼈던 나는 안심을 했었다.   하지만 해경 함정이 도착했었던 9시 35분, 기관부 선원 7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해 구조됐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따라 탈출했다는 것과 침몰전까지 172명이 구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선장과 그 밑에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할 수 있겠냐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났고, 결국 10시 30분경 침몰한 세월호는 이후 단 1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현재까지(2015년 4월)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언론은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냈고, 해경 등 구조당국은 구조작업에 우왕좌왕해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의 대상이 됐다.   검찰은 참사 이후,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해 살인, 살인미수, 업무상 과실, 선박매몰, 선원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2014년 5월 15일 구속기소했다.   #그렇게 8년이 지난 2022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다.   4.16 참사가 일어난지 어연 8년, 그 해 4월 16일에 전국민이 4.16 참사 8주기를 추모하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4.16 참사의 표식인 노란 리본과 추모 글이 담긴 글을 올렸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할로윈데이 전전날, 나는 그 당시에 서울시 서대문구에 거주하고 있었고, 구립홍은청소년문화의집에서 서대문구 대표 청소년 축제인 “청청축제” 축제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할로윈데이 전전날인 10월 29일, 나는 우리 축제 기획단이 준비한 2022 청청축제를 신촌 연세로 차없는 거리에서 개최할려고 일찍부터 가서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를 다한 후, 나는 축제 기획단으로서 부스 하나를 맡고 있어 바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2022 청청축제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갈려고 연세대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왜냐면 나도 이태원에 갈려고 했었으니깐.   하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그냥 포기하고 집에 가서 뻗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성당에서 갑자기 “압사 사고로 떠난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라며 기도를 해서 난 무슨 일이 났나 싶었다.   성당이 다 끝난 후, 난 집으로 갔고, 핸드폰을 봤다.   그랬더니 이렇게 긴급 재난안전문자가 와있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 발생. 인근 주민분들과 시민 여러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처음엔 당연히 오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이때도 똑같이 뉴스 속보가 떴었고, 4.16때와 마찬가지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고 했었다. 이때 사망자는 총 158명, 하지만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재현 학생을 포함하면 159명이나 사망했었다. 부상자는 더 많았다. 197명이나 됐으니 말이다.   당시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다 22년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가 가시화되면서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이태원에 몰리면서, 대형 압사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인 KBS가 이태원 참사 속보를 새벽 0시에 처음 보도되자마자, 전 세계의 매스컴들이 숨가쁘게 움직이면서, 같은 시각 KBS 뉴스를 전해 들은 일본 NHK 서울지국도 KBS 보도를 인용해서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각인 후지TV도 정규 방송까지 중단한 채 MBC 뉴스 속보를 인용하여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KBS와 MBC 등 지상ㅍ하 3사가 이처럼 속보 경쟁에서 전 세계적 특종을 하게 된 것은 뉴스를 쫓는 방송인들의 집년 어린 노력의 결과였다.   #압사 사고는 왜 일어났나 압사 사고 이전, 경찰은 인력 부족과 밀집된 인파로 인해 군중 통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건 당일인 10월 29일 18시 17분과 26분 ‘압사’를 언급한 신고 두 건과, 18시 34분 압사 가능성을 제기한 신고 등, 18시에서 사고 직전인 22시 사이 총 79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18시 34분 걸려온 신고 전화는 이태원의 해밀톤 호텔 앞 골목에 이태원 역에서 나온 인파와 클럽에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뒤섞여 압사 사고가 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녹취록도 몇 건 공개되었다.   그 후, 10월 29일 22시 15분경 압사 사고는 해밀톤호텔 서쪽에 있는 내리막 골목길에서 발생하였다. 소방당국은 23시 19분부터 축제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10월 30일 06시 30분 최성범 서울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인명 구조를 위하여 소방 507명, 구청 800명, 경찰 1100명, 기타 14명, 총 인력 2,421명이 동원되었다고 하고, 또한, 장비는 소방 184대, 구청 10대, 경찰 30대, 기타 9대의 총 233대가 동원되었다. 재난의료지원팀 14팀(서울 7, 경기 7)이 출동하였다. 또한 타 시도 구급대에서는 장비 94대, 인력 222명이 지원되었다. #사고 대응은 과연 적절했나? 경찰은 10만 명가량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경찰 137명을 현장 배치했다. 그러나 이는 30만 명의 인파에 비해 매우 적은 인원수로 파악되었다.   용산구청은 당시 이태원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우려하는 ‘핼러원데이 치안여건 분석 및 대응방안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 유지와 인파 통제를 별도로 지시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4시간 전부터 경찰 측에도 압사 위험에 대한 신고가 쇄도했는데, 첫 신고가 발생한 18시 34분으로부터 5시간 뒤인 23시 40분에 첫 경비 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사고 이후, 소방과 경찰이 출동했지만 인파가 몰려있어서 100m 거리를 가는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착했을 때는 아래에 깔린 피해자들의 팔을 잡고 꺼내려 했으나 워낙 많은 사람이 쌓여 있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구조해도 사람들이 뒤엉킨 탓에 핸드폰과 가방 등 소지품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사상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지상파 방송 채널은 특보 체제로 변경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고 발생일 새벽 중앙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여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10월 30일 오전에는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정 최우선 순위를 본건 사고 수습과 후속 조처에 두겠다“라고 밝혔으며, 이태원 사고현장을 찾아 수습 상황을 둘러보고, 정부서울청사 상황실에 설치된 사고수습본부를 방문해 회의를 주재하였다.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오세훈 서울 시장은 네덜란드 출장 중, 사건 보고를 받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사건 당일 개인 일정으로 충북 지역을 방문하여 취침 상태에서, 23시 32분에 사건에 관련하여 처음으로 문자 메시지를 받았으며, 23시 52분에 전화를 받았으나 취침 중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22분 후인 30일 00시 14분 사고를 인지하고, 상황 담당관과 전화통화로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서울로 출발하고, 02시 30분 경찰청에서 지휘부 회의를 갖고 대응 방안을 지시하였다.   # 참사 이후 위반 건축물 다수 존재 사고 발생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173-7 일대로, 이곳은 이태원 해밀톤호텔 왼쪽 50m 길이의 내리막 골목길이다. 길 위쪽은 폭이 5m 이상이지만 아래쪽에는 3.2m로 좁아지며, 사고는 폭 3.2m 골목에서 일어났다.   건축법상 도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폭이 4m 이상이어야 하고, 해당 지역 건축물현황도에도 도로 너비는 4m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해밀톤호텔은 도시계획상의 건축한계선이 설정되기 전인 1970년에 준공되어 건물의 대부분(건물 출입구 포함)이 건축한계선을 넘은 상태였다. 게다가 건축한계선이 설정된 후에도 골목 하단부에 건축한계선을 침범하는 분홍색 철제 가벽을 도로에 바로 붙여 10m가량 무단 증축했다. 하지만 해밀톤호텔은 5억여원의 이행강제금을 납부해가며 무단 증축한 부분을 계속 유지해왔다.   #반응과 여파 1.정부 사건 발생 지역인 이태원동을 관할하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0월 30일 새벽 3시 "구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들이 제게는 행복이었다"라고 했다가 비판을 받고 오후 4시 "참담할 따름"이라고 수정된 입장을 발표했다.   10월 30일 아침에 대국민담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정말 참담하다, 일어나선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발생했다"라는 소감을 밝히며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또한 31일에는 배우자 김건희와 함께 서울광장 합동분향소를 찾아 헌화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가애도기간을 11월 5일 24시까지로 정하고, 전 공공기관과 재외공관에서는 조기를 게양,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애도를 표하는 검정색 리본을 패용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국가애도기간 동안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다른 사건에서도 사용하던 '謹弔(근조)'가 쓰인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으로 착용하라'는 공문을 다시 보냈고, 왜 글씨 없는 리본으로 바꿔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글자 없는 검은 리본 착용, 누가 무슨 이유와 근거로 지시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2.축제와 행사 추모 분위기로 인해 할로윈 행사를 준비하던 곳들의 행사 취소가 잇따랐다.   에버랜드와 롯데월드는 10월 2일부터 11월까지 진행하던 할로윈 축제와 연계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SM타운 원더랜드 2022' 행사를 취소하였다. 또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이천점은 30일 오후 3시부터 진행할 가수 홍진영의 미니콘서트를 비롯, 모든 이벤트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월드와 대구광역시 남구청, 홍대 앞 클럽 에프에프는 예정되어 있던 할로윈 행사를 전면 취소하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30일 공식 인스타그램에 '자백' 무대인사를 취소한다고 알렸다. 부산원아시아페스티벌은 30일 공지를 통해 "오늘 저녁 7시부터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부산 원아시아페스티벌 K-POP 콘서트가 취소됐다"라고 알렸다.   스타벅스, CU, GS25 등의 음식 업계에서도 할로윈 관련 상품의 판매를 중단하였고, KBS와 SBS 등 모든 방송사 역시, 방청객들이 몰리는 군중 밀집 행사 프로그램 기획 및 제작에 대해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SBS 예능본부의 곽승영 팀장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출연자 및 방청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SBS 가요대전 등 군중 밀집 행사 프로그램 생중계 제작 시에 의료진과 안전 요원을 의무적으로 배치하겠다"라고 설명하였다.   # 정부의 국가 애도 기간 선포 이후   본 필자는 사건이 일어났었던 당시, 해당 장소를 방문할려고 했었지만 안했었고, 필자의 형도 방문할려고 했었고, 사촌누나는 직접 방문을 했지만,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인파가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고 했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정말 다행이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필자는 국가 애도 기간이 끝나는 22년 11월 5일, 이태원역에서 현재 필자가 소속된 단체 중 하나인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이라는 단체와 함께 추모행사(?)에 나섰다. 또한, 인터뷰도 했었다.   #2023년 10월 29일 10.29 참사로부터 어느덧 1년, 10.29 참사 1주기를 맞이했던 날이었다. 이때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 도로가 아예 통제가 되고 있었다. 바로 10.29 참사 1주기 추모 행사 때문이었다.   이 행사에서는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촉구와 관련 내용에 대한 시위가 이루어졌다. 필자도 참석하여 한자리를 빛냈다.   이 행사는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출발해 삼각지역, 시청역까지 가는 행진도 같이 진행되었다.   # 10.29 참사가 일어난 그날, 그 시간부터 현재 2주기에 이루기까지 다가오는 10월 29일 화요일은 10.29 참사가 발생한지 2주기째이다. 2년 동안 정말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일단 경찰의 부실대응 논란부터 안전 매뉴얼 무용지물 논란, 해밀톤호텔 불법 증축 논란, 압사 유발자 존재 의혹, 압사 유발자에 관해서 경찰 수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처벌이 가능/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게 나오면서 더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후, 주점 구조 거부 논란과 남성 시민이 여성 환자 심폐소생술 시도 주저 루머, 사후 시민의식 논란, 서울관광재단 이태원 홍보행사 논란과 일부 구급차 사망자 이송 논란까지. 이 외에도 정부 관련 논란과 특수본(특별수사본부) 관련 논란, 공직자 언행 논란, 정치계 관련 논란, 언론 및 인터넷 관련 논란, 추모 공간 관련 논란과 사후 사건 및 사고, 국정조사에서의 논란까지. 정말 각종 논란들이 2년동안 오갔었다. 현재는 잠잠한 상황이긴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었다. 그리고 참사 이후, 1주기가 되기 전, 23년 6월 29일, 국회법 제85조의2제1항에 따라 박광온, 배진교, 용혜인, 강성희 의원 등 183인으로부터 신속처리안건 지정동의의 건이 제출되어, 제407회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2023.06.20.)에서 신속처리안건 지정동의의 건 가결되어, 국회법 제85조의2제2항에 따라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23.8.31. 행안위 의결 및 법사위에 회부되었고, 국회법 제85조의2에 따라 2023.11.29. 본회의가 부의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2024년 1월 9일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이 법률안에 대해 취임 이후 9번째 법률안 거부권을 사용했다. 다만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민주를 비롯한 야권 측에선 특별법 입안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러다 2024년 5월 2일, 다시 한 번 특별법안이 가결됐다. 이번 건은 여야가 합의하여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이 나와 이전과는 다른 모양새로,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의 패배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에 대한 반동이며, 실제로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의 회담을 통해 여야 간 협치와 정치의 복원이 시작됐는데, 이태원 특별법 합의는 구체적 첫 성과라 생각한다“며 환영 의사를 밝히기도 하는 등 급물살을 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마무리 10.29 참사 이후, 관련 특별법이 가결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합의 하에 가결되었다는게 놀랍기도 하다.   이제 곧 있으면 10.29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다들 10.29 참사 추모위원 및 추모 인증샷과 자기 동네에 현수막 걸기 행동에 동참해주길 바란다. 
·
[이태원참사] 2년 전 10월 29일을 기억하고 행동하기
 2년 전 생일날엔 유독 밤에 연락이 많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생일이지만 기분이 나지 않아서 다음 날 있을 영어 시험을 핑계로 집에 있었던 날, 그래도 시험 전 날인데 모의고사라도 한 번 풀어봐야지 하면서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정작 눈은 랩탑 모니터 속 넷플릭스를 향해 있던 그 때. 연달아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에 그제서야 이 황당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생일이니까 다들 내가 당연히 놀러 나갈 줄 알았던 것 같다. 또 이태원에서 약속잡는 걸 좋아했으니까 혹시나 참사 당일 현장에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하고 밤새 기사를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실감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고 참담한 일인지.  참사 다음 날 시험장에 유독 빈자리가 많았는데, 문제 푸는 내내 그 자리들이 신경쓰였다. 혹시 저 자리에 앉았어야 할 이가 어제 이태원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거면 어떡하지. 시험 끝나고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통수를 보는데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거나, 취업준비를 하거나, 국가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로 보는 시험이라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많아봤자 30대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사람들 중에서 혹시 누군가 어제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면 어떡하나, 어제 나처럼 기사를 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진 않았을까,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 날 입은 옷도, 날씨도 다 기억 날 정도로 2년 전 그 날이 기억나는 게 신기하단 생각을 하면서 마치 세월호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날, 맨투맨 티를 입고 나왔다가 너무 더워서 어깨 위에 걸쳐놓고 걸어다녔던 날, 낮에 중학교 동창 시형이네 아줌마가 하시는 문방구에 갔었다. 아줌마랑 뉴스 속보를 보면서 사람들 다 구조됐다던데 하는 얘기도 나눴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보라는 기사가 떴고, 이후 말도 안 되는 팽목항 영상들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사건도 세월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처럼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크게 온 감정은 무력감. 이만치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인 파악도 안되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도 이뤄지지 않는 걸 보면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놀러갔다 죽었다.’ 기성 세대로서 어린 친구들을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온갖 교묘한 말로 여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정녕 이 사회의 주류라면 내가 이 곳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만약 2년 전 이태원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가 하루하루 고되게 살다 그 날 하루 겨우 숨 돌리려 이태원을 찾았던 거라면? 그게 죄인가? 아니, 이태원의 밤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죄인가? 쏟아지는 인파로 늘 북적이는 할로윈 이태원인데 왜 그 해에만 유독 통제가 안 되었을까? 왜 공적 통제가 그 즈음에만 허술했던 걸까? 다양한 변수들을 찾고 추려서 원인을 알아야내야만 하지 않을까? 그걸 끝까지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이들을 위해서? 눈물 분노 응징의 3단계를 거치는 것 말고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혼자 밥벌이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사회에 조금의 책임감을 가지는 게 성인 된 도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이런 작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지랖이라거나 현생 살라거나 하는 무책임하고 힘빠지는 말들만 돌아왔다. 그런 말을 하는 인간들과는 당최 상종을 하고 싶어지지 않고, 그래서 이런 얘길 아예 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근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이 땅을 영영 떠날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여길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하지 않나, 그게 남은 이들의 책무가 아닐까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는 참사 이후 내 생일만 되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분명 그 날 나도 이태원에 있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즈음 지치지 않았다면 분명 밤에 놀러 나갔을거다. 올 해 10월 29일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을텐데 벌써부터 여러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이런 막연히 미안하고 무력한 마음을 갖는 것 외에 뭐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이태원 참사를 주제로 한 모임에 나가게 됐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모두 이태원 참사에 대한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마음의 빗장을 풀고 편안히 있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머릿수 하나 정도 보태는 소심한 마음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뭔갈 해볼 수 있을까도 싶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더 이상 혼자 하는 고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든든해진다. 
·
[이태원참사] 당신과 약속하는 기억 투쟁: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과 피해자 권리 실현을 향해
#1 2015년 4월 세월호참사 1주기를 앞두고 매주가 투쟁이었다. 국가는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는 것마저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았다. 가족들은 경복궁 앞에서 노숙에 들어갔고, 하늘에서는 매몰차게 비가 쏟아졌다. 화장실조차 제공되지 않아 가족들은 박스에서 일을 처리하는 수모까지 감내했다. 특별법에 따라 독립된 조사 기구를 설치하라는 요구조차 불온시하며 물리력을 동원해 추모마저 봉쇄한 정권에 분노했다.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추모대회 도중에 가족들이 투쟁하고 있는 경복궁으로 달려갔다. 최루액 섞인 물대포가 사람들을 향해 조준되었다. 그런데도 가족들을 만나겠다며 새벽 내내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학우여, 분노의 행진에 나서자!”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2 2023년 10월 29일 8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서 10.29이태원참사(이하, 이태원참사) 1주기 추모대회가 열렸다. 8년 전 대통령은 추모를 뒤로한 채 해외로 떠났다면, 2023년 대통령은 가족들의 추모대회 참석 요청을 ‘정치집회’로 매도하며 홀로 종교행사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이태원 사고 현장이든, 서울광장이든, 성북구 교회든 희생자를 추도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지만, 참사 1주기를 앞두고도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진상·책임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은 점에서 이는 이율배반적 언사였다. 수많은 이들의 꿈과 미래가 한순간에 파괴되었지만, 이를 책임지는 국가는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보다 유흥을 즐겼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을 탓하는 비열한 처사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운동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기억’입니다. 이는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 망자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참사를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망각의 시간을 주도하려는 국가권력에 맞선 저항입니다. 또한, 기억은 시민들에게 애도와 연대를 요청하는 메시지로 등장합니다. 기억은 사라진 존재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고, 기억을 실천하는 존재를 주체로 세움으로써 과거와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과 책임을 끌어냅니다. 우리는 기억이 망자와 나, 그리고 이 절망을 함께한 이들을 연결해주고, 고통 속에서도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가는 강력한 ‘실천’이라 믿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를 앞두고, 저는 지난 1년간 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워 쟁취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과정을 기억함으로써, 당신과 앞으로의 이태원참사 기억 투쟁과 재난참사 운동의 방향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1.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의 시작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는 참사 직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감각을 학습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 이태원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에서 청문회를 비롯한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경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에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1월 17일, 국조특위는 구조 실패와 예방 및 대비의 미비 등 국가 책임 일부만을 확인한 채 활동을 종결했습니다. 그에 앞서 1월 13일, 경찰 특수본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6명을 구속기소 했지만,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고위급 인사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수사조차 진행하지 않은 채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윗선에 대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 정부 기관의 비협조와 위증, 짧은 조사 기간, 그리고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유가족과 시민이 배제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곧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독립적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또한, 피해자와 논의도 없이 일방적 결정으로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바라던 추모분향소와 추모대회에 대한 불허와 철거 시도, 참사 직후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지원 부재 등 애도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행태 역시 부각되면서 ‘피해자권리 보장’을 법제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참사 100일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3월 2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청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청원동의를 얻기 위해 전국 순회에 나섰고, 청원 시작 열흘 만에 5만 명(100%)의 동의를 달성했습니다. 4월 20일, 국회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하게 됩니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 183명이 참여해, 21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이 되었습니다.   -참사 70일 즈음, 이태원 헤밀턴 호텔 골목길 2. 기억하겠다는 약속,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하라!” 한 달이 지나도 국회의 시간은 멈춰있었습니다. 특별법 제정은커녕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도 법안이 상정되지 못했습니다. 6월 7일, 유가족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에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에게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도보 행진에 나섰습니다. 한여름 장대비를 맞으며 투쟁한 가족들의 바람은 임시국회가 종료되는 6월 30일 전에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입법될 수 있도록 국회의 노력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특별법을 ‘정쟁 법안’이라며 계속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고가 사건인지 참사인지를 논하는 것부터, 참사 발생의 원인과 이후 수습의 미비함을 밝히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논의가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여당은 ‘정치적’이라 떼를 쓰며 법안을 반대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강조한 ‘피해자 지원’에는 정작 피해자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정치적 권리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입법 논의가 가로막힌 가운데 6월 20일, 유가족 두 분은 곡기를 끊고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단식농성에 참여한 최선미 씨는 참사 1년을 돌아보며 “이 나라에서 유가족이 되면 겪어야 하는 거의 모든 일 겪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외면당하고, 진상의 실마리조차 차단된 상황에서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슬픔을 회복하기보다 진상을 은폐하려는 국가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습니다. 서명운동, 도보행진, 거리농성, 단식 등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지난 재난참사 유가족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의 요구가 억압되고, 또 다른 비극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혀야 했던 재난참사를 떠올려 보면, 참사는 단순한 인명 피해뿐 아니라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망각과 모욕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현재적’입니다.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6월 30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다짐으로 머물렀던 진상규명이 드디어 법·제도적 차원에서 국가의 역할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가족들은 안건 심의 촉구, 행정안전위원회 법안 통과 촉구, 특별법 본회의 통과를 재차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특별법 제정 투쟁과 동시에, 참사 책임자 엄벌, 추모할 권리를 박탈한 공권력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참사 희생자와 시민을 향한 정치인의 혐오 발언 규탄,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인식 변화를 위한 활동도 펼쳤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태원참사의 진상이 밝혀지길 바라며 2023년 10월 29일 1주기를 맞이했습니다.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특별법 제정'의 요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참사 발생 400일이 되는 12월 2일에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2022년 12월 16일 살을 찢는 추위 속에서 가족들은 황망한 죽음의 이유를 밝혀달라며 49재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투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규명을 지연하고 방기하는 국가의 행태에 책임을 묻기 위해 오체투지를 전개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온몸을 붙여 꽁꽁 언 땅의 냉기를 받아들였던 가족들의 투지는 해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여야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본회의 통과가 세 차례나 미뤄졌고, 가족들은 여러 차례 양보와 법안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특별검사 임명 요청을 삭제하고, 조사에 불응할 경우 제재는 과태료로 완화했습니다. 조사위원회 활동 연장 기간 단축, 유가족 몫의 조사위원 추천권도 삭제했습니다. 이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했을 때 아쉬운 결과였습니다. 세월호특별법은 총 17인의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중 희생자가족대표회의에서 3인을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양보를 택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이 여야의 분열이 아닌 협의와 타협의 결과로 이뤄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총선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가 된다며 법 시행일까지 총선 이후인 4월 10일로 박아두자는 여당의 요청마저 수용했습니다. 2024년 1월 9일 참사 438일 만에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집단 퇴장했고 야당만의 단독 통과라며 비난했습니다(여당 소속 권은희 의원만 특별법 찬성). 여당은 바로 국회 로텐더 홀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이태원참사 더 조사할 게 없다”,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가졌다”, “참사를 정략적으로 악용한다”라며 특별법을 폄훼하였고, 18일 대통령에게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며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분향소에 걸려있던 영정을 내리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까지 행진에 나섰습니다. ‘위헌’이니, ‘정쟁’이니 날카로운 언어를 내리꽂으며 분열의 책임을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비정한 정치에 눈물을 머금고 삭발까지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1월 30일, 끝내 정부는 피해지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특별법을 거부했습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에 나선 가족들, 한겨레신문, 2023.12.20.     3. 진상규명의 첫걸음을 떼다: 이태원참사특별법과 쟁점 4.15총선에서 준엄한 경고를 받은 정부·여당은 야당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다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참사의 진상규명이 피해자와 유가족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유가족보다 야당과의 논의를 우선했다는 점은 여전히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을 진상규명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정부·여당이 삭제를 요청한 것, 즉 쟁점이 되었던 사항은 조사위원회의 ‘압수수색 영장청구 의뢰권’과 ‘불송치·수사중지 사건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입니다. 여기서 영장청구의뢰권의 경우 ‘영장청구권’과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이를 독소조항이니, 위헌적이니 훼방을 놓았습니다. 위의 권한은 과거 조사위원회에도 존재했고, 실제 정부 기관이 자료제출과 진상조사에 성실히 협조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데 무게를 두며, 정부·여당의 삭제 요청을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였습니다. 5월 2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이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찬성 256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습니다. 5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의결되었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뒤틀린 국가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투쟁과, 참사의 고통을 나눈 시민들이 함께 진상규명의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4. 법조문에 내려앉은 ‘피해자 권리’와 다시 시작되는 기억 투쟁   -2024년 5월 2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정식 명칭은 ‘10·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입니다. 10년 전 제정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하면 제목에서부터 ‘피해자 권리보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안 곳곳에 ‘권리’와 관련된 조항도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참사의 법안 중 무엇이 더 좋은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10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이태원참사에서 피해자권리 실현의 과제로 결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고 한 달 뒤인 2014년 12월 10일, 진실 은폐와 국가폭력에 맞섰던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권리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의 존엄을 해하는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것’을 다시 결의하며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4.16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선언문에는 연대할 권리, 참여할 권리, 안전할 권리, 진실을 알 권리, 애도할 권리, 행동할 권리, 저항할 권리,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 등 열세 개의 조항을 통해 세월호참사 이전과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짐들을 적어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란 계속되는 각종 재난과 참사에 연대하는 일임을 밝히며, 피해자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투쟁만큼 권리주체로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약속했습니다. (피해자의 권리) 피해자는 부당한 해를 입었고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정부와 책임 있는 대표자로부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피해자는 사건 해결의 전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8항 특히 4.16인권선언의 8항인 ‘피해자의 권리’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제3조(피해자의 권리)와 연관됩니다. 이는 세월호특별법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조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권리는 총 8개의 호로 ①진상조사 과정 등 참여할 권리, ②혐오로부터 보호받으며 조력을 받을 권리, ③개인정보·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④애도의 권리, ⑤피해지원을 받을 권리, ⑥추모사업·공동체회복 등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⑦배상 및 보상받을 권리, ⑧그 밖에 피해자의 권리로 규정되어 있고, 이 조항들은 4.16인권선언과 깊이 공명합니다. 제6조(특별조사위원회 설치)에서 ‘10·29이태원참사 이후 희생자와 피해자의 권리침해 등 피해 실태 및 구제방안에 대한 조사에 관한 사항(강조: 필자)’을 특조위의 업무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이란 참사의 발생 원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와 희생자가 어떤 권리침해를 겪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또한, 세월호특별법은 피해자를 ‘명예훼손’의 대상이나(제5조, 4항), 단순히 지원받는 존재로 여긴 반면, 이태원참사특별법의 경우 제3장 ‘피해 구제 및 지원 등’ 제55조(피해자 등의 참여 보장) 조항인 ‘국가가 피해자 및 피해지역에 대한 지원계획을 수립·시행할 때에 피해자 등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하여야 한다’를 명문화함으로써 피해자의 참여보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제1조(목적)에서 ‘공동체 회복’을 통한 안전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4장 공동체 회복 지원 등에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국가의 노력과 추모사업 등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즉, 참사의 진상규명을 통해 도래할 안전사회란 재난을 예방하는 것만큼 사회적 성찰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담긴 ‘피해자의 권리 보장’은, 그동안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쌓아온 약속의 흔적이자, 다짐의 결실입니다. 참사의 비통함 속에서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투쟁했던 우리는 ‘피해자권리 실현’이라는 의제를 법 조항으로까지 가져왔습니다. 다만, 이것이 법 조항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또 다른 기억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9월 13일,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따라 조사위원회 9인이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위원장,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특별법 제정과 특조위의 활동으로 참사의 진상규명이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상규명의 과제를 특조위에 맡겨놓기보다는, 아직 듣지 못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 더하여 그들의 말 속에서 우리가 빼앗겼던 권리는 무엇이고, 연대를 통해 되찾아야 할 권리는 무엇인지 발견하는 사회적 실천이 요구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권리는 법조문에 새겨진 문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와 행동으로 실현됩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 그리고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에 함께했던 우리들의 목소리를 모아, 이 시대의 필요한 권리를 끊임없이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 목소리와 우리의 연대, 기억 투쟁 속에는 분명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약속과 다짐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10.29이태원참시2주기시민추모대회,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서울광장
·
3
·
[이태원 참사] 무수한 애도 중 하나를 선택하기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애도의 마음이 집결하는 것을 느낀다. 매일 성대에 호흡이 부딪히며 피가 맺힐 정도로 소리치는 이들이 존재하는 데도 나에게는 10월이 되어서야, 혹은 4월이 되어서야 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유가족, 생존자, 연대하는 이들, 시민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눌러 담는다. 기억을 다시 한번 갱신하고 기억에 기억을 더하며 다짐한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 태어나 살아갔으며 자신이 그날 죽음을 맞이할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죽음에는 국가 / 사회 / 안전 체계의 실패가 있고,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끝나지 않은 투쟁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리를 나가거나, 일하면서, 친구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 속에는 애도가 등장하지 않고, 참사에 깊게 혹은 오래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다. 참사의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왜 울부짖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가? 많은 이들이 애도를 보내고 공명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변화를 만드는 시작인데 말이다. 나는 어떤 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문은 애도로 향하는 문이다. 한 시민에게 죽음에 대한 슬픔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애도를 보내야 할까. 내가 그럴 자격이 될까와 같은 고민을 하며. 그들의 망설임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필요하다. 이들을 하나둘 초대하며, 그들이 언제든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망각에 저항하며 함께 애도해야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애도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관련된 책을 참고했다.  1. 죽은 이를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기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문학동네)  이 소설 작품에는 시즈토라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한다. 전국을 떠돌며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어떤 사람인지, 죽음이 어떤 가치를 따지고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가 죽은 자리에 찾아가고, 나름의 손동작으로 기도하며 제례를 행한다. 다만 제례를 행하기 전에 주변에 이와 같은 사실을 묻는다. “00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00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았든 그에게 사랑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시즈토는 계속 그 애도를 실행한다. ‘명복’과 ‘애도’를 구분하는 그의 말에 힌트가 있다. 명복을 비는 것은 가족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것이지만, 애도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고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때 하는 추상적인 행위라고 말이다. 즉 애도는 죽음과 관계없는 자가 그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애도가 인간과 사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핵심적인 주제라는 걸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며 가족과 사회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어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 죽음들에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나에게 되돌려보자. 나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는가. 어떤 죽음은 애도하고, 어떤 죽음은 애도하지 않는가. 진정 기억해야 할 죽음이 나의 죽음뿐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유한하고 허망한 일인지 같은 질문들이다. 시즈토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할까. 그가 죽음에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으려는 것, 죽은 사람에 대해 기억하려는 것, 그리고 애도가 죽은 사람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만약 그에 동의한다면 참사 생존자들을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는 행동이 애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유가족의 사회적 운동에 관한 관심 (「궤도 이탈」, 마쓰모토 하지무, 글항아리)  2005년 4월 25일 일본의 지하철 노선인 후쿠치야마선 운행 중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07명, 부상자 수는 562명이었다. 책은 이 사건에서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인물을 조명한 논픽션이다. 그는 십여 년간 후쿠치야마 선을 운행하는 거대 철도회사 JR 서일본을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섰다. 끈질긴 노력으로 회사의 경직된 조직문화, 안전시스템 문제, 사건을 망각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을 끌어내고 조직의 변화와 안전시스템 개선을 차근차근 이뤄갔다. 그가 사건 초기 했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사고를 교훈 삼아 JR은 자기네가 일으킨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유가족,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모든 유가족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거대한 슬픔을 견디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다만 어떤 유가족은 슬픔과 비탄에만 잠기는 것이 아니라 진상 규명, 사회 시스템과 안전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들이 약하고 비참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사노를 통해 그 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고를 직시하고 설명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애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말하고 몸을 움직여 표현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협상과 설득을 통해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널리 호소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대했다. 다른 참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과 시민과 정부로부터 도움을 구했다. 절박하게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관심과 지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외부에 있는 나 혹은 우리, 시민의 힘이 필요했다.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4.16 세월호참사, 10.29 이태원참사 등 많은 유가족이 연대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치고 행동하여 그 연대의 힘을 유가족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밖으로 뻗어 나가게 한다. 그 힘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애도의 한 방법일 것이다.   3. 사건을 봉인하지 않고 기억을 나눠 갖기 (<기억 서사>, 오카 마리, 교유서가)  참사의 희생자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 그것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것은 참사를 겪은 유가족이나 생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겪은 일을 완벽히 재현, 표상하려고 할수록 그것은 불완전한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나눠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건을 이해하거나 체험하기는 더 어렵고 고통을 대신 느낄 수도 없는 사건의 외부에 있는 자들과도 말이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 그들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아랍문학과 페미니즘 이론 연구자인 오카 마리는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위안부, 각국의 재난을 다룬 서사들을 점검한다. 어떤 기억을 나눠 가지기 위해 쉽게 동원되는 것이 서사이다. 서사는 이야기이며 사건에 관한 일종의 요약된 이야기이다. 서사는 그것을 완결짓기 위해 필연적으로 인물과 공간을 빌려오고 그것에 관한 결론, 이해 가능한 설명을 수반한다. 그러나 오카 마리는 그러한 서사와 종결이 기억의 봉인이라 단언한다. “서사는 끝나고 독자는 이해하고 감동한다. 거기에는 읽는 사람을 불안에 빠뜨리거나 위협하는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불안정한 거처를 찾고 자신이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릴 것이다. 그 기억은 봉인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 동굴을 영원히 막아버린 봉인.” 사건의 잉여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듯 ‘사건은 그 폭력의 기억이 바래져 언어화될 수 있고 기억 속에 깃들여진 것만 경험으로서 공유’된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도 이 참사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들은 언어화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고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 잉여에 사건의 본질이 담겨있을 수 있다. 참사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미 이해가 끝난 사건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참사에 대한 수많은 서사가 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스스로 내린 참사에 대한 결론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서사로도 참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이해가 아니라 기억의 일부분을 나눠 갖겠다는 마음이 애도일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장에 나가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2주기의 추모 현장, 생존자의 이야기, 유가족의 이야기, 시민들의 애도가 나누어지는 어떤 장소. 그곳에는 언어화되지 않는 슬픔과 분노, 희망과 용기, 저항과 위로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기억을 나눠 받으며 또 다른 기억을 생성해 나갈 것이다. 나 또한 이 방법들이 모두 옳다고만 믿는 것은 아니며 모두에게 각자의 애도 방식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중요한 건 그 무수한 애도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문을 열어 젖히고 애도의 세계로 발을 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능한 어떤 애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더불어 읽으면 좋을 책들  (북펀드 진행 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4 북펀드 바로가기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3 http://aladin.kr/p/iQqEe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김초롱, 아몬드, 2023 http://aladin.kr/p/i4Bnc
·
4
·
[이태원 참사] 타인과 나,나와 타인 2
 그녀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4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서 지하철이 멈췄다.어제까지만 해도 문이 열리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먼저 내리기 위해 서로에서 몸을 바싹 붙이고 밀어댄다. 매일 같은 출근길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열치가 서기 직전 어떤 긴장감이 느껴진다. 누가 먼저 내릴 것인가. 누가 먼저 저 문 자리를 선점할 것인가. 매일이 그랬고, 어제도 그랬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열차가 역에 들어서고 멈추기 직전의 언제나 같은 긴장감.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우리는 모두 느꼈다. 누가 먼저 내릴 것인가. 그것은 내가 먼저 내리기 위해 긴장감이 아니었다. 먼저 내릴 사람에게 한 순간을 물러서 주겠다는 긴장감이었다. 이것은 아주 찰나였지만 그녀는 마치 영화 속에서 한 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그 순간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깊게 인지되었다.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좀 더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자면 ‘양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지만, 그녀가 느낀, 그 곳에 있던 모두가 느낀 그 찰나는 ‘공포’였다. 여기서 먼저 나가려고 어제처럼 타인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가, 그들을 밀고 내 걸음을 옮겼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하는 공포였다. 이태원 사고가 있고 다음날 그녀에게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 것은 출근길 아침, 그 찰나가 주었던 ‘집단의 공포’였다. 그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음을 왠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은 내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은 감각처럼 오래오래 자신에게 붙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어제의 사고를 떠올렸고, 모두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으면, 그것이 모두를 멈짓하게 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그러기 위해 발걸음을 늦쳤으며 처음으로 어떤 짜증이나 경쟁심 없이 그 문을 통과해 5호선을 향해 걸었다. 그 후로 매일 그 역에 설 때마다 과연 오늘은 어떨까 그녀는 설레였다. 얼마간은 그런 현상이 지속되었다. 그러고 언제나처럼 그런 사고가 있었느냐는 듯 사람들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럴 때 일수록 그녀는 점차 문에서 더 멀리서, 더 뒤에서, 더 느리게 내리려 노력했다. 언젠가는 심폐소생술을 배우고자 했던 게으른 결심도 당장 행동에 옮겼다.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심폐소생술을 누군가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지극히 소심하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겁이 많았다. ‘정말 긴급하고 위급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할 거라는’ 막연학 믿음을 생기지도 않을 뿐더라, 아무런 힘이 없었다. 며칠 전 봤던 그 거리 위 누워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을 향해 간절히 심폐소생술을 하던 누군가들의 모습이 결코 자신의 모습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폐소생술을 배웠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심폐소생술을 해보자는 강사의 말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나름 영화에서 봤던, 드라마에서 봤던 그것을 해 보았지만, 그녀의 손바닥 아래 누워있던 인형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형이기에 너무 다행인 일이었다. 압박을 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적당한 속도로 압박을 주어야 인형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녀는 타인들 속에 있었다. 동료들을 만나 일을 하러 갈 때도,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갈 때도, 하루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갈 때도 그녀는 항상 타인들 속에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보다도,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보다도, 가장 느긋해질 수 있는 가족들보다도 그녀 가까이에 있던 것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떤 고민을 가진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느긋함을 공유하는지 알 수 없는 누군지 모를 타인이었다. 그렇게 깨닫고 나니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타인들에 자꾸만 눈이 갔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들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이라는 것을 낯설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만약, 그녀에게, 우리에게 어떤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녀의 동료보다, 친구보다, 가족보다 조금 더 높은 가능성으로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줄, 그녀가 손을 내밀어줄, 그녀를 위해 간절한 몸짓으로 심폐소생술을 해줄, 그녀가 간절한 맘으로 심폐소생술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이들이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진정한 타인’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
·
[이태원 참사] 3. 돈이 되는 목소리와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
3. 돈이 되는 목소리와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고   어린 시절의 내게 신문과 뉴스는 사회를 비추지만 사회와 동떨어진 작은 외딴 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조명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까지 알려야한다는 욕망으로,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는 저널리즘이라는 것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처럼 보였고, 실제로 돈이 되지 않을만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기자정신 아래에 만들어진 칼럼들을 꽤 좋아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달동네에 퍼진 재개발 소식에 등 떠밀리듯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과 그 길 좌우에 깔린 녹슨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담아내는 사진. 당시 칼럼들은 발품을 팔아 쓰는 글이 많았고, 1년간 달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재개발 구역의 변화를 담아내는 기사도 있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변하는 건 없었다. 해봤자 녹슨 지붕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눈이 녹아내리고, 빗물이 흘러내리고, 단풍이 쌓이고, 다시금 눈이 쌓이는 정도. 24년, 지금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는 기획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애초에 기획 기사를 위해 1년이나 준비를 한다니,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시대에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데스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뷰어십이 나오지도 않는 기사를 쓸 바엔 인터넷 게시물이나 긁어오는 게 더 낫다, 그렇게 판단하는 데스크는 더 많을 수도 있고. 실제로 요즘 뉴스에는 그런 칼럼보다 네이트판과 같은 많은 유저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많은 인기를 받은 자극적인 게시글을 그대로 옮겨 담는 수준의 기사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은 언제나 꾸준한 뷰어십과 관심을 얻는다. 사람들은 게시글이나 긁어오는 기자를 욕하면서도 꾸준히 그 기사를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뷰어십에 미친 –아니면 살기위한 투쟁을 벌이는- 언론사들은 이태원 참사 직후 어떤 기사를 내보냈을까. 사고 당시 자극적인 기사는 시민들의 알권리라는 명목 아래 거리에 살포되었다. 과연 이는 시민의 알권리를 위한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오늘은 평범한 신문 독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사회 규범의 경계인 회색지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잘못 밟으면 금지된 선을 넘을 거 같지만 조심만 한다면 아슬아슬하게 어디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을 거 같은 회색지대. 하지만 그 말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금기를 깨고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를 원하는, 말하자면 사이다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저널리즘이 펜으로 타인을 찌르는 공격 행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이태원 참사 당시에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남용되었다. 먼저 참사 당시의 사고 상황을 언론사에서는 SNS 영상까지 포함해 여과 없이 흘려보냈고, 시민들은 사고 현장을 보면서 다양한 부의 감정을 키웠다.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감정의 뭉치, 언론사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이 참사의 범인으로 예상되는 인물들, 혹은 범인을 색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SNS 메시지를 사고가 발생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올리면서 부의 감정을 뷰어십으로, 그리고 분노의 감정으로 바꿔냈다.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이를 돈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런 기사들 아래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은 경찰을 향한 비난이었다. 저렇게 인물이 특정되는데 어째서 바로 찾지 않냐, 당장이라도 잡아와라, 얼굴 모자이크 하지 말고 올려라, 이게 바로 ‘시민의 알권리’ 아니냐. 나는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오용되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 저자의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가 그간 언론인으로 살며 생각하고 느껴온 것들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시대가 겪고 있는 너무 많은 갈등, 일차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고들을 안일하게 접근했던 동료들과 자신, 그리고 이에 대한 후회,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도떼기시장마냥 전시하는 언론의 현 실태를 향한 비판. 필드에서 그가 느껴온 것들은 아마 수많은 신문 독자들이 때로는 무심코 지나갔을법한, 때로는 몸으로 느꼈음에도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불편함으로 와닿았을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첫 챕터를 펼치면 바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과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동영상, 동영상에 찍히는 수많은 리트윗들, 그리고 전염되는 감정들. 기자인 저자는 재난 보도 준칙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 이 재난 속 이야기를 담아내는 자신 또한 이들과 같은 방관자가 아닌가라는 무력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모두가 이런 이야기에서 부의 감정을 얻는 것으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는 목소리를 낸다. 언론을 통해 슬퍼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언론을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로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처럼 시민들이 참사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사만이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자극적인 기사도 많았고, 때로는 재난 보도 준칙의 수준을 넘어선 기사도 있었다.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같은 저널리즘의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지는 않을 테니, 누군가는 데스크에게 돈이 될 만한 이야기를 쓰라고 압박당하고 있을 테니. 실제로 언론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언론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파이를 언론인 척 하는, 혹은 언론의 틀만 가져온 자극적인 유튜브가 겸상하기 시작했다. 언론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레거시적인 시스템에서 미디어 기사로 방향을 틀어 이에 힘을 실었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역으로 언론인 척 하는 유튜브에 가까워졌다. 그들에게 형식을 보여주고 내용을 받아온 것이다. 나는 이런 저널의 행태가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24년 현재, 언론 산업이 과거처럼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언론사에 광고를 실을 바에 유튜브에 광고를 띄우는 광고주들이 늘어난 만큼 언론의 주력 수입원이었던 광고 역시 지금의 언론 규모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에서만큼은 언론이 과거의 역할을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보를 위한 언론, 시민들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언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 가장 뷰어십이 나오는 기사가 정치, 경제면이고 현대 사회에서 갑작스러운 이슈라고 해봤자 재난이 거의 주된 기삿거리임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인 기사만을 남발하고 부의 감정을 먹기 위한 행동만을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쌓고, 또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표출하게 된다. 즉 저널리즘이 지키려고 했던 오랜 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야기다. 이 글을 쓰던 때부터 며칠 전, 여의도에서 세계 불꽃축제가 열렸다.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대교 위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에 위험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 다른 아파트에 무단으로 들어가 복도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까지 많은 인간군상을 담은 기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백만 명이나 모이는 장소에 대체 왜 가는 거지? 그래놓고 죽으면 국가 탓 할 거 아닌가? 이태원 참사처럼.’ 언론과 국가가 잘못 굴린 펜은 아직까지 굴러가고 있다. 아마 당분간 계속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에 왜 가냐는 이해심 없는 댓글과 함께 이태원 참사에 빗대어 욕하는 사람들. 이들의 방향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년이라는 기간을 앞이 아닌 대각선으로, 혹은 뒤로 걸어갔기에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보낸 허송세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이야기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통해 모두가 재고하는 계기를 만들고…. 분명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래도 그 길을 가려는 목소리가 늘어나면 좋겠다. 그게 저널의 역할이고 저널리즘이니까. 마지막 서평으로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와봤다. 이 책은 기자로 활동하는 저자의 족적과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저널리즘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저자의 굵직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비단 이태원 참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고들, 해외에서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나와 정세에 관심이 많은 독자일수록 흥미롭게 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저널리즘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나온 <<저널리즘 선언>>도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언론사는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두는 방향성을 보이지만 엘리트와 공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또 그들의 편을 들지 않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편을 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는데, 언론에 대한 이상향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괴리감을 차분하게 해석해준다는 점에서 같이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해봤다. 특히 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최근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인물들, 그러니까 유색인종, 성소수자,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기자 개인의 입장과 언론의 입장을 두 책을 통해 비교하며 볼 수 있기에 가까이 두고 읽는다면 더 좋은 시너지를 낼 것이다. 준비한 서평은 이번 서평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는 이 캠페인을 이어가면서 든 생각, 캠페인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조사를 위해 9월말에 다녀온 이태원은 내가 10년 전에 기억했던 이태원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꽤나 쓸쓸한 도시가 되었다. 그들은 이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을까. 마지막 사진은 골목 앞에 있는 조형물과 용산 구청의 안내 커버를 가져와봤다. 참사로부터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추모의 감정에 대해 반발 심리를 보이며 조형물을 더럽히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 조형물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감정을 뒤로하고 살아갈 만큼 현대인에게 2년의 시간은 짧지 않다. 아마 언젠가는 저 커버가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언젠가는 성인이 될 거고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이 참사도 과거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이 저 조형물을 봤을 때 이 거리에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구나, 참사 이후로 사회가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구나, 어쨌든 사회는 좋은 곳으로 향하고 있구나. 우연히라도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
[이태원 참사] 나의 첫 번째 핼러윈
나의 첫 번째 핼러윈 (23.10.28.) 이른 저녁,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우리는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작은 연습실을 빌려 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각자 챙겨 온 소품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분장을 시작했다. 재민과 인영은 호박 모양의 종이 가면을 조립해 뒤집어썼고, 지오는 '프리다칼로'처럼 양 눈썹을 한 줄로 이어 두껍게 그렸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성용은 커다란 쇼핑백에서 마법사 모자와 반짝이는 재질의 망토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나는 빨간색 후드 집업으로 갈아입어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에 나오는 '미구엘'을 흉내냈는데, 동규가 빌려준 통기타까지 둘러매자 꽤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거울을 보며 사진을 찍기도 잠시, 막상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이태원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했다. 해밀톤 호텔 앞 교차로에서는 교통을 관리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은 행인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였고, 주요 길목마다 설치된 철제 펜스는 우측 통행을 강제했다. 간혹 걸음을 늦추다가는 서둘러 움직여 달라는 핀잔을 들었으니, 사람들과 눈을 맞추거나 대화를 나누기란 몹시 어려웠다. 그 광경을 두고 한 친구는 이렇게 평했다. 꼭 선생님 앞에서 노는 느낌이라고. 또한, 그 일대 전봇대에는 전부 흰색 국화가 걸려 있어 별수 없이 움츠러들기도 했다. 혹시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구는 걸까. 속으로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예년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온 무리를 발견하며 얼마간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일주기를 앞두고 나는 제법 비장하게 약속했다. 올해 핼러윈은 이태원에서 즐길 거라고, 코스튬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을 표현할 거라고. 처음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오기가 앞섰다. 그런데 마을 미디어 용산FM과 함께 기록단 활동을 운영하고 나서는 호기심과 책임감 또한 더해졌다. 녹취록을 읽다 보면, 내심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나도 한 번 그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던 한편, 인터뷰이 각자의 이야기가 그날 이태원에 머문 사람들을 비추는 증언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 년 뒤 같은 자리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것으로나마 당신들과 연결되고 싶었다. 나아가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모두가 여기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랐다. 축제의 방식으로 애도를 상상하기 '미구엘' 분장을 선택한 까닭은 오롯이 보영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보영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를 떠올렸다. <코코>는 멕시코 명절인 '죽은 자들의 날'을 배경으로 한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계에 방문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과 같이 어울리며 축제를 벌인다. 언뜻 핼러윈과 닮았지만,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환대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엄숙하기보다 흥겹게 일주기를 보내고 싶은 게 보영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코코>는 '기억'의 중요성을 각별하게 다룬다. 산 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잊힐 때,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마저 영영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용기를 내서 압사가 발생한 골목까지 다다르자, 희생자들을 기리는 물결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근방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리 제작한 도장을 찍어주었다. 핼러윈을 나타내는 호박 랜턴 이미지 아래 'REMEMBER ME REMEMBER ITAEWON'이라는 글귀를 각인한 도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날 급하게 이런 뜻을 개인 SNS 계정에 공유했더니, 흔쾌히 호응해 준 친구들이 있었다. 태린과 윤호는 그렇게 동행했고, 민경과 윤석과 시연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힘을 보탰다. 뿐만 아니라, 새훈은 따로 사람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고 다녔다. 기록단에 참여한 나연과 다예의 경우, 그 현장을 담겠다며 목에 카메라를 걸고 내내 플래시를 터뜨리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주현을 만났다. 참사 생존자이기도 한 주현은 똑같이 <코코>를 염두에 두었다. 머리에 메리골드를 본뜬 꽃장식을 더했고, 팔에는 검정색 가죽장갑으로 멋을 냈다. 두 볼에 비즈까지 붙인 주현을 보는 순간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토록 노련하고 화려한 모습과 비교해 나의 '미구엘'은 얼마나 초라하던지.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고는 해밀톤 호텔 뒤쪽으로 행진했다. 내가 칠 줄 모르는 기타를 어설프게 튕기는 동안 주현은 보라색 리본과 팔찌를 주변에 건넸다. 그러자 사람들은 화답하듯 손을 뻗는가 하면, 이미 받았다고 자신의 팔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저마다 환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구태여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Remember me, though I..." 난생처음 핼러윈을 즐기며 나는 지난 인터뷰들을 상기했다. 낯을 가리는 승연씨는 코스튬을 통해 자유로워졌는데, 나 역시 홀린듯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자신을 발견했다. 민희씨와 원기씨의 경험담도 비로소 와닿았다. 이태원에는 새로운 풍경들이 가득했다. 각양각색의 차림 속에서 샤인씨처럼 드랙을 한 사람도 있었다. 외국인들과 "해피 핼러윈"을 주고받을 적에는 모하메드씨를 떠올렸다. 시끌벅적한 클럽과 라운지 바를 지나칠 적에는 문득 DJ seesea와 범조씨가 궁금했다. 이 시각,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느새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DJ H씨의 제안처럼,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놀자 호들갑을 떨고 싶어졌다.  시간은 이내 자정을 넘겼다. 우리는 기념으로 네 컷 사진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 보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사실, 보영은 올해 핼러윈에 반드시 가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런데 일주기가 다가올수록 점점 복잡한 심경이 밀려들었다. 통제된 도로 위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던 공포가 여전했을 뿐더러, 썰렁한 이태원을 마주할까 봐 지레 속상했다. 아쉬운 대로 그날 탔던 차에 올라타 오밤중 한 바퀴 돌고 있다고 알렸다. "지금 어디에요?" 운명인지 우연인지 꽤 가까운 위치에 있어 우리는 자칫 엇갈리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며 뛰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신호 대기 중인 차량 한 대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틈으로 활짝 웃는 보영이 보였다. 벅찬 마음으로 술집으로 향한 우리는 가볍게 떠들다 진지해지기를 반복했다. 럭비공처럼 튀는 수다는 곧 내년 핼러윈 계획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어떤 옷 입지?" "좌판 깔고 뭐라도 해야 하나?" "미리 모여서 분장 같이 할까?" 서서히 취기가 올라 가게 문밖을 나서니, 새벽녘 하늘에 별들이 은하수처럼 걸려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까 전의 골목으로 돌아갔다. 희생자들을 위해 절을 올린 뒤, 한쪽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마침 바로 앞 편의점에 사장님이 근무하고 계셔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주현에게도 그 사실을 전했다. 그렇게 둘은 <코코> 분장을 하고서 사장님께 안부를 물었고, 그것을 끝으로 각자 택시를 잡아 유령처럼 헤어졌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핼러윈, 일주기를 하루 앞둔 23년 10월 28일의 이야기다. 나는 그만큼 연결된 감각으로 참사를 기억한다. 물론, 아직 마음이 허락하지 않거나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해 놀기를 주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기록단 활동에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아무렴 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쓴 주된 목적도 이태원의 핼러윈을 대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참사 이후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뿐 도무지 놀기 힘든 당신을 책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이태원 일대를 나란히 걷는 동안 주현과 나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코코>의 OST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그 가사를 아래 옮겨 적는다. 잘 놀고 왔다.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say goodbye (나를 기억해줘, 내가 작별 인사를 해야 하지만) / Remember me, don't let it make you cry (나를 기억해줘, 울지마) / For even if I'm far away, I hold you in my heart (내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에 널 품고 있어) / I sing a secret song to you each night we are apart (우리가 떨어져 있는 매일 밤마다 나는 너에게 비밀스러운 노래를 불러) /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travel far (나를 기억해줘, 내가 멀리 여행을 가야 하지만 ) / Remember me, each time you hear a sad guitar (나를 기억해줘, 네가 슬픈 기타 소리를 들을 때마다) / Know that I'm with you the only way that I can be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너와 함께 있음을 알아줘) / Until you're in my arms again (네가 다시 나의 품에 안길 때까지) / Remember me (나를 기억해줘)"
·
1
·
[이태원 참사] 참사 앞에서… 정치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날 일찍 잠이 들었다. 핸드폰을 침실 밖에다 뒀기 때문에 알람이나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핸드폰에는 수십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긴급사고, 교통통제, 인명사고, 접근자제… 불길한 마음에 서둘러 포털에 들어가 뉴스를 확인했고 동거인에게 소리 지르듯 외쳤다.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나 봐!" 축제를 즐기러 갔던 사람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보호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정치  우리 헌법 제34조 제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약칭 재난안전법)은 '다중운집인파사고' 등을 '사회재난'으로 규정하고 있으며(제3조 1항 나목),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를 예방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제4조 제1항).  이태원 참사는 정치가 법률을 통해 스스로 규정해놓은 일을 그대로만, 제대로만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막아야만 했던 참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자기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꼴을 볼 수 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직후 현장에 경찰이나 소방 인력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느냐는 질문에 “경찰이나 소방 인력이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라고 말했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며, 우리의 안전은 어떻게 지켜야 하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핼러윈 축제에 관한 대책 회의가 있던 날에 회의 참석을 부구청장에게 떠넘기고, 용산구에서 열린 바자회와 야유회에 참석한 것이 드러났다. 이전에는 구청장이 주재해서 경찰, 소방, 인근 상인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회의였다. 참사 당일에도 다른 지역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고 집안 제사 때문에 간 것이었음이 들통났다. 그런데도 구청은 메뉴얼대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고 항변했다. 심지어 핼러윈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라는 기괴한 답변을 내놨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정부가 스스로 마련한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경찰력 투입 기준을 묻는 말에 불쑥 끼어들어 영어로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가 있다면 굉장히 많은 경찰 인력을 투입해야겠죠”라고 농담을 던졌다. 농담을 말이다! 현장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그렇지 않나요?”라고 재차 말하며, 자신의 유머를 받아주지 않는 것에 짜증을 내는 듯했다. 한 외신 칼럼은 “총리의 무신경한 유머가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얼마나 존중 없이 대해지는지 (보여준다)”라고 썼다.   무능력과 무책임에 면죄부는 없다  2024년 9월 30일, 법원은 1심에서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에 대해 금고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일한 인식으로 대비에 소홀했고 결국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702일째… 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첫 재판이었다.  하지만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똑같은 재판부였지만 판결이 달랐던 이유는, 용산구청이 안전관리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주의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판결대로라면 앞으로 우리는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곳에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우리 헌법과 재난안전법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1심에서 무죄를 받은 것이 정치의 무능력과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참사 앞에서… 책임을 느낀다  얼마 전 치러진 ‘서울세계불꽃축제’ 현장에는 경찰이며 구청이며 다 나와서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수고하고 잘하는 일이다. 그래! 2년 전에도, 2년 전에도 반드시 이렇게 해야 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2022년의 여름, 나는 지방선거에 출마했고 용산구 지방의원에 도전했다.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의원,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의원이 되겠다”라는 것이 선거 슬로건이었고, 선거운동의 처음과 마지막에 ‘땡땡거리’라고 불리는 백빈건널목 기찻길에서 안전을 지키는 역무원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비록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못했지만, 나는 내가 출마했던 곳에서 일어난 참담하고 비통한 희생 앞에 일편의 책임을 느낀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반드시 막아야 했던 일을 막지 못해 죄스럽다. 의원이 되었다면 구청의 미흡한 준비를 지적해서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마다 한 번 더, 돌아가신 분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갖고, 다치신 분들의 온전한 회복을 빌 뿐이다.
·
[이태원 참사] 우리에게 참사의 언어가 없다.
10.29 이태원참사가 내게 남긴 것 작년 10월에도 그랬듯, 올해도 이맘때쯤이 되면 마음이 뒤숭숭하다.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단어가 없어 ‘뒤숭숭하다’로 퉁-쳐버릴 때마저도 쓰라리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지만, 너무 크게 다가올까 두려워 찜 목록에만 담아둔 지 오래. 10.29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아 드디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참사가 발생한 다음 날 - 많은 내 또래 친구들이 그랬듯 - 나는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추측은 실로 타당했다. 참사 당일, 나도 이태원에 가려고 했다. 29일 저녁 11시가 넘은 시간, 침대에 누워 각종 SNS를 확인했다. 현장의 사진들이 빼곡했다. 사진들을 처음 마주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익숙지 않은 ‘압사 사고’라는 단어와 이해하기 힘든 사진들이 합쳐져 혼란스러웠다. 쏟아지는 사진들을 계속 보다 보니 이해하기 두려웠다. 이해하면 무서울 것 같아 황급히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들로 대체하거나 스크롤을 내려 사진보다는 글을 확인했다. 나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혹은 나와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밤새도록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새로고침할수록 늘어만 가는 사망자 수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궁금증일까? 왜 사람들이 다치는지 궁금한 상태인가? 무서움이 많은 내가 자꾸만 소식을 찾아보는 이유가 뭘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궁금함에서 시작된 행동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들이 잠들어 너무도 고요한 내 방에서, 심장 소리가 빨라지고 커지는 걸 느꼈다. 혹시 지인이 있을까, 수많은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오지 않는 사람들에겐 전화를 걸었다. 허망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당일, 코로나 방역에서 벗어난 첫 축제, 10월의 마지막 날, 바람이 선선해 밖에 나가기 좋은 날. 그들은 나였고, 내 친구였고, 내 가족이었고, 내 이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지 못했다. 조금만 붐벼도 숨이 막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퇴근 시간에 이동이 필요하다면 자가용이나 택시를 이용했다. 여유가 된다면 붐비는 시간을 피해 미리 장소에 도착했다. 축제, 페스티벌, 대회, 콘서트 등 사람들이 밀집할 만한 곳은 절대 가지 않았다. 나에게도 10.29 이태원참사는 후유증이 있었다. 내가 피해자도 아닌데.... 어쩌면 나도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 나도 참사의 생존자였다.   사회가 원하는 피해자의 모습 사회가 원하는 피해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피해자가 어떤 모습이라고 상상하는가? 피해자들은 숨고 가리고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피해자다움. 재판에서는 자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하고 입증해야 한다. 이때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피해자로서 인정을 받는다. 피해자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경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재판에서는 사회가 원하는 피해자다움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성범죄에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이에 대한 비판이 늘면서 ‘피해자다움’과 ‘가해자다움’의 의미가 변하거나 희미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오랫동안 법원은 성범죄 피해자를 정형화된 틀에 가뒀다. 그들이 생각하는 피해자는 1) 피해를 본 이후 가해자와 최대한 접촉을 피하거나 적극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정한’ 피해자라면 2) 분노·좌절·무기력·두려움·공포 등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으로 3) 일상생활이 마비되어 관계가 단절된 상태여야 한다. 피해자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살아온 환경이 다를 텐데, 피해자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을 보이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대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중이다. 내 주변엔 꽤 쉽게, 전세사기 피해자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죄의식에 고통을 겪는다. 뉴스에 나오는 피해자들도,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에 나오는 피해자들도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표현된다. 때론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기도 한다. “네가 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피해자들은 그렇게 사회가 종용하는 피해자의 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 그 틀에 벗어나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피해자들이 된다. ‘보상금 때문이지’ ‘정부한테 뭐 하나라도 더 달라고 하는 거지’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것 좀 봐’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쉿’ 묵음을 강요한다.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정치적인 언어로 쉽게 축소된다. 그들에게는 ‘흐느끼는 것’만으로 애도하길 바란다. 조용하게 잠재운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는, 피해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2차 가해를 양산한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귀 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되며 들어줄 노력은 하는가?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말 속엔 ‘피해자다운’ 목소리를 내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는가? 피해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은 분명하다. 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다움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 피해자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 정형화된 피해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또 다른 피해를 경험한다. 이에 피해자는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피해를 겪을 수 있다. 이들 또한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나처럼. 10·29 이태원참사는 이전에 일어났던 참사들과는 ‘다르다’라는 평을 받는다. 혹자는, 이는 참사가 아닌 단순 ‘사고’라고 하기도 한다. 다름의 가장 큰 원인은 피해자들의 핼러윈 파티 참여 동기에 있다. ‘자발적’으로 ‘놀러 나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이 강요된다. 참사의 경험은 속으로 삭혀야 하며, 유가족들은 목소리를 낮춰 흐느껴야 하고, 애도조차 조용하고 간단하게 진행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태원참사가 일어난 시기에 자신이 이태원에 있었음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다. 실제로 이태원참사 당시 이태원에 있었던 내 친구는 “이태원에서 생긴 트라우마는 네가 감당해야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말들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라는 말을 줄여 만든 ‘누칼협’은 지극히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조어로, 이태원참사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사용했다.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때때로 개인 안에서 부딪힌다. 피해를 겪고 있는 내 내면과 그 피해는 너의 책임이니 침묵을 강요하는 환경 사이에서. 외부에서 정의 내린 피해와 내가 겪은 피해 사이에서. 결국 자신이 피해자이지만 스스로가 피해자가 아님을 종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를 보고, 때론 2차 가해로 나타난다. 그렇게 피해자는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언어가 없는 피해자들 나는 종종 내 경험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런 경험은 단순히 사회적인 차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예컨대 나의 경우 나서길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불쾌한 경험이 잦았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사회적인 차별로 드러났다. 반면 가장 가까운 친구와 애인과 가족과 얘기할 때도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경험은 ‘내가 고깝게 생각해서’ ‘내가 피해의식이 있어서’로 치부된다. 나의 피해 경험은 곧 사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된다. 내가 별나서, 로 축소된다. 한때 나도 적극적으로 내 경험을 설득하고자 했다. 여전히 그런 충동이 든다. 어필하고 강조하며 상대의 이해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못해 ‘그래, 그렇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찝찝하면서도 ‘이 정도면 됐지’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넘어갔다. 하지만 대화 끝에 언제나 나는 지쳐있었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 실은 공감할 노력도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 나는 혼자서 뻘짓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받아낸 공감(처럼 보이는 것)에 아주 작은 위로를 받는다. 그 위로는 곧 사라지지만. 상대가 나에게 가지는 ‘피해자로서의 기대’에서 내가 벗어난다면, 나의 경험과 목소리는 사라진다. 튕겨 나간다. 매번 도전하지만, 큰 벽에 가로막힌다. 그렇게 나도 곧 무너질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그런 경험이 있는가? 무언갈 말하고 싶은데 정확한 의미를 담은 단어가 없는 경험. 나는 빈번히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 내 감정과 내 경험을 이야기할 단어가 없다. 언어가 없다. 길게 늘어뜨려 놓고 기존에 알던 단어를 조합해도 명쾌하게 정의할 언어가 없다. 일 생활에서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로는 내 경험을 표현하기 어렵다. 언어가 없으니,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기득권들의 언어로 나를 담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 10.29 이태원참사는, 언어가 없어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이다. “놀다가 죽었다”라는 기득권 혹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되는 세상에선 내 감정을 가시화할 수가 없다.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어 설득하고자 하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지칭할 단어가 없어서. 표현할 언어가 없어서. 피해자로서 행동양식이 정해져만 있는 것 같은 사회에서, 광의적인 차원의 피해자들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그들이 오롯이 느낀 것을 말할 언어가 있을까? 우리에게 참사의 언어가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가 집필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삼는다. 학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념적이면서도 울림 있게 담아내며, 한 시대에 이루어졌던 학살이 동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연결됨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대해 “이별을 고하지도, 행하지도 않겠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애도를 멈추지 않고, 결코 끝내지 않겠다는 결의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16살, 중학교 3학년 당시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나와는 불과 2년 차이 나는 언니·오빠들이었다. 나는 당해 수학여행이 취소됐다. 그리고 또다시 내 나이 24살에 이태원참사가 일어났다. 내 나이 또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군복무를 하던 일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 남자 동기들이 떠올랐고 2살 터울의 남동생이 떠올랐다. 여러 차례 사회적인 참사 앞에 나는 두려움만 남게 되었다. 혹시 내가 그러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그렇게 나도 숨게 되었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꺼내지 않았다. 나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저 두려움에 떨 뿐이다. 최근 영화 <벌새>를 다시 감상했다.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참사로 인해 친구를 잃은 중학생인 은희를 다뤘다. 당시 20대이면서 잠실에 살던 우리 엄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 시절 그 큰 다리가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성수대교 붕괴 이후 은희의 삶을 보여주진 않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내가 그랬듯,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은희도 같은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갔을 것이다. 살아냈을 것이다. 영화 속 은희의 마음을 나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속 은희는 지금의 나였다. 이태원참사로 혼란을 겪었던 내게 은희는 위로를 건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조용하면서도 우울한 무드를 갖고 있다. 참사를 겪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한편에 비슷한 무드를 갖고 있지 않을까? 여러 차례 참사를 겪은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시대의 참사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인의 삶에 자연스레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강요되고 억압되는 현실에 마치 영향이 없던 것처럼 살아간다. 영화는 ‘은희’만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은희’에 본인의 이름을 대입하는 것에서, 동시대에 하나의 참사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책 <작별하지 않는다> 영화 <벌새>, 나는 이것이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개인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우리에겐 개별적이고 사적인 감정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으고 모아 스스로 이름을 붙여 가시화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 있음을, 어떤 감정을 느낌을 실체화하는 것의 힘을 나는 굳게 믿어본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애도를 멈추지 않고, 결코 끝내지 않겠다”.
·
2
·
[이태원 참사] 2.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목소리가 큰 소수’
2.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목소리가 큰 소수’ <<인싸를 죽여라>>를 읽고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를 문화수도라고 자칭하던 시절, 그러니까 온갖 인터넷 밈과 유머 게시글을 양산하던 2010년도 초반에는 디시와 다른 커뮤니티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편이었다. 합성을 이용해 만든 재미있는 게시글(물론 그 와중에는 정치적이고 고인 모독 코드를 가진 게시글도 있었다)도 그들의 특이점이었지만 그보다 도드라지게 보이는 특징은 익명성, 반말, 루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언더그라운드 성향이었다. 이런 특징은 당시 존재하던 네이버, 다음의 카페와 블로그, 이글루스, 루리웹같은 친목도모, 존댓말, 상호존중을 기본 규칙으로 세운 사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새로운 인터넷 문화이었으니 당연히 그만큼 이용자들을 향한 사회의 반발도 따라왔고. 실제로 언론에서는 꾸준히 디시의 이용자 성향과 게시글 특징에 대한 저격성 기사를 올렸다. 존중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 문화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법한 게시글에 대한 기사. 하지만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하던 유저들은 기사에 대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유저들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그 이후로 꾸준히 활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 ‘목소리가 큰 소수’가 탄생한 것이다.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2020년도 초반, 이제 디시의 유저 코드는 디시만의 코드가 아니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성향, 루저를 넘어서 베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반말과 욕설, 비단 디시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X(전 트위터), 네이버 뉴스 댓글까지, 그들만의 저급한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모습은 어디를 가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평균적인 코드가 되었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지금도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인가? 참사 피해자를 향해 돌을 던진 이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미국의 2010년도 중반 인터넷 문화, 인터넷 내 대안 우파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리버럴 성향의 캔슬컬처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비평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내용이 한국의 과거 인터넷 문화와 비슷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 책에 적힌 내용들보다 현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더욱 더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 진영의 사상을 표방하는 사이트가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보이는 성향들, 그러니까 베타를 자처하는 모습과 인터넷 냉소주의가 만연해졌음이 한국의 상황을 대입했을 때 특히 몸에 와닿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인터넷 냉소주의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향한 무관심, 이를 넘어선 불행을 향해 보이는 조소, 익명성에 기댄 정제되지 않은 발언,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시켰냐는 말의 줄임말) 문화. 이런 인터넷 냉소주의는 언제나 사고의 순간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고는 했다. ‘누가 그 장소에 가서 놀라고 했냐.’ ‘오늘 같은 날 이성 만나보자고 저런 동네에 모인 사람들이 잘못한 거 아니냐.’ ‘저기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문란한 사람들인데 잘 죽은 거 아니냐.’ 이 모든 말이 이태원 참사 피해자를 향해 다양한 커뮤니티의 수많은 익명이란 가면을 쓴 이용자들이 던진 말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런 돌을 던질 거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베타 성향을 자처하는 인터넷 이용자들 기준에서 그들은 알파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니까, 언더그라운드와는 궤가 다른 파티 문화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사고 이후 일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행동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이 보낸 분노의 방향성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분노한다면 죽은 이들이 아닌 살아서 문제가 될 행동을 한 이들에게 분노해야 하는데 죽은 이들도 살아있었다면 저런 행동을 했겠지, 하며 뭉뚱그려 분노한다니. 물론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선한 사람들이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돌을 맞을 이유도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돌을 던져도 된다는 식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국가도, 사회도, 언론도, 이런 부분에 대해 메시지를 정제해달라는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기는 어렵기에 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그들은 선량한 동료시민이고 착한 이들이다.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돌을 던지지 말라.’는 공감하는 척에 가까운 목소리 내기라는 방법을. 인터넷을 오래 하던 유저들도 최근에는 이런 냉소주의적 문화 흐름에 대해 피로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오글거린다’는 말에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사라졌고, ‘설명충’이라는 말에 지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누칼협’이라는 말에 행동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알빠인가?’라는 말에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긁혔냐?’는 말에 타인을 변호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말. ‘목소리가 큰 소수’가 인터넷을 대표한다는 말은 이제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모든 익명의 유저들이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수아비에 숨어 돌을 던지는 시대가 되었다. 호남과 영남이 반목하는 시대가 끝나자 청년세대와 중장년세대가 반목하고, 남성과 여성이 반목하고, 알파와 베타가 반목하는 시대가 왔다. 지금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으로 목소리가 큰 소수가 존재하는지. 사실 우리는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울 뒤에 숨은 다수가 아닌지. 이 책을 읽고 간단하게 이런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전반적인 우경화, 남성 커뮤니티의 대안 우파화. 하지만 나는 이런 단순한 결론은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24년 현재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우경화보다는 좌우 양극단으로 나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성별 중심의 커뮤니티뿐 아닌 이성이 혼재된 커뮤니티까지, 진영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인터넷 냉소주의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태원 참사 2주기, 나는 과거의 사고와 더불어 미래에 있을 사건들을 위해 이제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착한 피해자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넘겨짚지 말라. 진짜 나쁜 인물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돌이 무서워 숨지 않게 그들에게 무분별한 돌을 던지지 말아 달라. 그리고 익명의 가면에 숨어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인터넷 문화를 개선해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두 번째 서평으로는 <<인싸를 죽여라>>라는 인터넷 문화 비평서를 들고 와봤다. 사실 이 책은 독서 커뮤니티에서 꽤 좋은 호응을 받음에도 섣불리 손이 가지 않는 도서, 제목부터 표지까지 너무나도 인터넷 커뮤니티가 떠올라서 손이 가지 않는 도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초월번역은 많은 이들이 칭찬할 정도기도 하고. 이번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문화와 전반적인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해 다뤄보려고 했다. 사실 쉬운 주제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색을 담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가 똑바로 담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에 관련된 서평에서는 최대한 정치적 목소리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기에 최대한 중립을 잡으며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도 꽤 오랜 시간 인터넷을 해왔고, 커뮤니티 활동을 해왔지만 최근 이런 냉소주의 문화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나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을 향한 회의감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이들이 나의 동료고 선배일까, 내 후배일까, 사회에서 만나는 또 다른 가면을 쓴 인물일까. 그런 고민이 들게 만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저런 인물이 되지 않아야지 다짐하며 늘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참사 2주기에는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 좋겠다. 추모의 목소리만큼 문제가 되는 사회 문화, 피해자가 숨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 그간 우리가 봐온 사고의 정리와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미래를 향한 목소리.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시선을 보내주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띄운 작은 풍등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하나의 별이 되기를 바라고. 이번에 가져온 사진은 SNS로 참사를 접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익숙하고 너무나 슬픈 구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해밀턴 호텔 골목을 반대편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참사 당시 많은 환자들이 이 거리에 누워있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관과 구급대원, 그리고 그 옆에 구경이 난 것처럼 서있는 사람들까지 당시 사진에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이제는 정적만이 남은 거리를 찍고 싶다는 생각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의 골목 앞 거리를 찍어봤다. 사고를 구경하는 이들, 다음에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오려고 한다. 고통을 마치 구경거리처럼 전시하는 저널과 기자로서의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이 담긴 책인데 수많은 사건을 다뤘던 저자의 책이 아마 이 이태원 참사 2주기 서평의 마지막으로 가장 적절한 책이 아닐까 싶어 고르게 되었다. 가장 첫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시 사고 상황에서 언론이 행했던 고통 전시회를 보고 회의감을 느끼고는 했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저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저널리즘은 어떻게 사고를 접근해야만 하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
·
[이태원 참사] 2주기에 던져보는 10.29 이태원 참사에 관한 질문들
사회적 참사의 발명 현재 통용되는 ‘사회적 참사’라는 단어는 한국사회에 자리잡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약칭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은 2017년에 제정되었는데 사회적 참사, 사회적 재난참사와 같은 용어는 이 법의 제정 전후로 한국사회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정리했던 것처럼,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는 사회적 참사라는 언어를 발명했다. 그 이전까지 재난이나 참사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사건이나 사고라고 명명하는 범주에 속했다면,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논쟁을 거치면서 ‘참사’는 보통의 사건도 아니고 교통‘사고’도 아닌 사건/사고 ‘그 이상의 사건/사고’를 지칭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에 따른 변화 중 하나는 재난참사를 사고-보상 프레임에 입각해 국가가 보상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에게 재난참사의 법적, 정치적, 경제적 책임을 추궁하는 관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참사의 명명을 둘러싼 정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아리셀 참사와 같이 근래에 들어 사회적 참사라고 규정되는 사례들은 단순히 처음부터 참사였던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이 그것들에 사고나 사건이 아닌 참사라는 이름을 붙여 세월호 참사 이후 정착된 책임 추궁의 관행을 소환한 것이다. 요컨대 참사는 어떤 사건/사고를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로 만들어내는 언어인 것이다. 그렇기에 가령 정부는  10.29 이태원 참사가 아닌 ‘이태원 사고’라고 불러 그 의미를 격하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참사라는 개념이 참사와 사고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내가 10.29 이태원 참사를 만나고 연구하면서 느낀 건, ‘사회적 참사’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세월호 참사라는 구체적인 경험이 아주 많이 묻어있다는 점, 그래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의 이해에 근거해 이태원 참사를 해석하려 하면 뭔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사이의 유사성이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나 단절에 관해서는 잘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고작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력과 유산이 우리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년이라는 단기간에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운동이 이뤄낸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성취를 이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국 각지에서 노란리본을 제작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리는 운동이 일어났고,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응답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세월호 이후 재난참사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전까지 사회적 참사라고 인지되지 않던 많은 재난참사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을 다시 호명했다.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멀리 나아가지 못했고 기억공간 조성은 정부가 방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월호 참사가 촉발한 사회운동은 넓고 너른 품으로 그 세계를 확장해 왔다. 가장 먼저 길을 내어 멀리 나아간 세월호 참사는 다른 사회적 참사에 분명 귀중한 전범일 수밖에 없다. 풍기문란 통제의 오랜 역사 그러나 동시에 익숙한 관념을 깨뜨리는 데서 사람들의 생각이 발전한다.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길만으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에 온전히 도달하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가 가진 차이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놀다가 죽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놀다가 죽었다고 말했을까? 여기에 대해 ‘놀이’ 일체를 억압하는 사회라고 단정짓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핼러윈 축제 직전에 이태원에서 치러지는 지구촌 축제에는 안전 통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벚꽃 축제는 압사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통제가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도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놀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다가 죽었다”는 ‘놀이’ 일체가 아니라, 어떤 놀이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이태원 참사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람들이 “놀다가 죽었다”고 말한 것들을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곳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가서’ 놀다가 죽었다.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이태원은 여전히 ‘위험한 곳’으로 상상된다. 이때의 위험은 이를테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이나 그러한 사고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문란함’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 한 언론은 2020년 5월 이태원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집단감염사태를 두고 ‘이태원 게이클럽발 감염’이라고 헤드라인을 달아서 성소수자 혐오와 코로나19를 연결시켰다. “놀다가 죽었다”라는 말에 담긴 ‘위험’의 감각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 ‘위험’에 대한 감각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시기의 유산이며 지금도 <경범죄처벌법>과 같은 법제도, 그리고 특정 지역에 대한 경찰행정의 관행으로 남아있는 ‘풍기문란 통제’에 닿게 된다. 당대 지배권력의 시선은 선량한 풍속과 나쁜 풍속을 나누어, 미풍양속을 해치고 위협하는 문란한 풍속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량한 풍속과 문란한 풍속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을 리 없다. 풍기문란 통제는 무척 자의적이고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해 왔다. 한때는 봄날 꽃놀이나 크리스마스 축제도 ‘풍기문란’의 소지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잘 남아 있는 건 1970년대 유신 정권 시기 ‘장발 단속’이다. 유신 정권은 장발을 문란하고 불건전한 ‘미국 문화’라고 규정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건전한 문화와 풍속을 장려했다. 그 구분은 물론 자의적인 것이었다. 핼러윈 문화는 1980년대 중반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대중적으로 퍼져 있던 하위문화이자 청년문화였던 ‘디스코 문화’의 영향 속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언론들은 핼러윈 시기에 ‘디스코텍’에서 핼러윈 파티를 열린다는 홍보성 기사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디스코 열풍은 문란하고 위험한 청년문화의 하나였고, 이태원은 그러한 문화의 산실 역할을 했으니 처음부터 이태원은 핼러윈 문화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이후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이태원의 클럽이나 카페에서 핼러윈 파티가 매년 마다 열렸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 실내 공간에서 벌어지는 파티이지, 지역 일대 전체가 장이 되는 축제는 아니었다. 여러 기록들을 확인해 보면, 2011년에 이태원 지역 상인들이 거리에 무대를 설치하고 ‘이태원 핼러윈 축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태원 핼러윈은 그렇게 축제가 되어 매년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지역의 행정권력인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는 관변축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된 이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이것은 앞으로 이태원 참사 특조위가 행정 문서들을 발굴해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한정된 자료들로는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설은 ‘풍기문란 통제’의 시선에서 이태원 일대를 바라보고 통제해왔던 행정적 관행의 연장선에서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마약이나 각종 경범죄 단속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것이다. 2022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핼러윈 축제는 2011년부터 시작되지만 용산구청은 이에 대한 안전통제를 의제화한 적이 없으며, 용산경찰서는 2017년부터 안전통제의 필요성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 시행됐을지, 그 안전이 생명의 안전인지 풍속의 안전인지는 더 분석해보아야 한다. 경찰이 아주 최소한의 안전통제(이것도 매우 불충분하다)를 했더라도, 아마 2020년 코로나19 집단감염 이후 다시 한번 풍속통제의 관행이 강화되면서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용산구의 방역대책은 사실상 특정 지역의 풍기문란함에 대한 단속의 관행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50년대부터 미군기지 옆 ‘기지촌’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이태원은 풍기문란한 문화의 온상이었다. 1970년대 미군철수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문란한 몸과 마음을, 그리고 기지촌을 ‘정화’하고자 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수시로 성병 단속의 대상이 되어 모욕을 겪었고, 치사량의 페니실린을 맞아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지키고자 한 것은 미군 남성들의 안전이었고, 기지촌이라는 게토 안에 여성들을 가두어 문란함으로부터 한국사회를 보호하고자 했다. 오늘날 용산에게 미군기지가 철수한 시대에도 이태원을 바라보는 행정적 관행과, 한국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모른다 짧게는 세월호 참사로부터, 멀게는 한국근현대사의 국가폭력으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묻고 진실을 규명해 온 주체는 유가족이었다. 나는 이것을 ‘애도의 가족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각종 산재사망사고와 재난사고에 대해 그것을 ‘사회적 참사’라고 부르며 국가와 자본의 부정의에 대항하는 운동의 주요행위자는 유가족이다. 유가족이 그러한 운동의 행위자이자 주체가 된 것은, 특히 국가폭력의 역사에서 지배권력은 ‘빨갱이’를 가족의 문제로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빨갱이의 가족도 빨갱이라는 연좌제의 논리는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학살로 자식을 잃고 가족이 몰살당한 살아남은 유가족들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에 더해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으로부터 명예를 회복해야만 했다. 그랬기에 유가족들은 처음에 ‘양민’학살을 문제삼았다. 국가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민’은 여전히 어떤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남겨놓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양민’은 ‘민간인’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활동을 하든 국가가 민간인에게 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초기에 유가족들은 자식들을 무고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그러내려 애썼다. 그것은 분명 “놀다가 죽었다”라는 인식에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은 이후 수정되었는데, 가령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는 한국사회가 ‘문란하다’고 인식해 온 성소수자들도 함께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범시민이라고 해서 꼭 그 죽음이 더 억울한 것은 아니다. 저항해야 할 것은 “놀다가 죽었다”는 인식과 거기에 깃든 풍기문란 통제의 오랜 역사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는데 '어린 학생들'의 죽음이라는 측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은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가 가진 특성은 ‘피해자’의 범주가 무척이나 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 주변 일대에만 당시 약 15,000명이 몰려 있었다. 당시 이태원 일대 전체로 본다면 35,000여 명이 운집해 있었다. 반면 정부가 파악한 (희생자 195명을 제외한) 유가족 및 피해자는 여러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321명에 불과하다. 애도의 가족주의라는 제도화된 운동의 관행(레퍼토리)는 유가족들에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외에 이태원 참사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지하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겪고 느낀 이태원 참사는 유가족들(조차 당연히 의견이 획일적이지 않다)의 이해와 같지 않다. 참사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건에서 각자가 놓여 있는 위치는 매우 달랐고, 그 위치에서 각자가 참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목소리를 잘 정리하고 조립하기보다는, 사회적 참사에 관한 기존에 확립된 서사와 이태원 참사에 대해 발언하는 피해자들 일부의 목소리만으로 이태원 참사의 서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가령 유가족이 아닌 피해자들조차도 관점이 다르고 참사를 다르게 의미화한다. 목격자나 구조자들이 트라우마와 괴로움을 호소한다면, 희생자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158명의 부상자들은 트라우마와 피해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사의 체험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상인들도 이태원에 오래 거주했는지, 업종이 무엇인지 등에 따라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누군가는 빨리 잊혀지길 원하지만 누군가는 이태원 참사의 기억을 통해 이태원 상권이 다시 살아나는 길을 찾기를 원한다. 이태원 가게에서 일했던 직원들이나 이태원 주민들도 제각각 체험과 이해가 무척 다르다. 그러나 정형화된 피해자 상을 상상하는 한 이런 다른 모습들은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너무나 없고,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아직도 공적으로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태원 참사는 너무나 쉽게 윤석열 정권의 문제로만 그 의미가 축소되고는 한다. 이태원 참사를 특정한 목적에 맞게 서사화하려는 시도는 참사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온전한 애도와 기억을 가로막는다. 이태원 참사 이후 오랫동안 포스트잇들이 해밀턴호텔 옆 골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제 그 벽에는 클럽 홍보를 위한 게시판이 설치되었고, 참사의 애도와 기억을 말하는 포스트잇들이 붙을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 2023년 핼러윈 기간에 이태원은, 행정이 ’안전’을 강조하면서 단단한 폴리스라인이 좁은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골목을 반으로 갈라 놓았고, 축제를 즐기는 시민보다 경찰과 구청직원들이 더 많이 운집해 있었다. 음식점 상인들은 핼러윈 주말이 평상시보다 장사가 안 된다며, 경찰들이 저렇게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클럽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증 검사를 하는데 대체 누가 오겠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2주기는 어때야 할까? 그리고 2주기 이후에 이태원 참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문란하고 위험한 땅으로 여겨져 왔던 이태원에 서린 기억은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의해 버림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
2
·
[이태원 참사] 지역 사회에서 바라본 이태원 참사
지역 사회에서 바라본 이태원 참사-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기록단 활동을 중심으로 (23.04. ~ 23.11.) 기록단 ① 배경 - 이태원을 둘러싼 오랜 시선 질문을 던져 본다. 만약 이태원이 아니었다면, 일각의 반응이 달랐을까? 적어도 그 심한 정도가 덜하지 않았을까? 참사 이후 그날 이태원에 머무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며 그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돌리기 부지기수였고, 그런 모욕은 이태원을 둘러싼 오랜 시선에 기대 확산되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태원은 이미 너무 위험하고 문란하고 이상한 동네다. 과거 기지촌이 형성된 이래로, 말 그대로 '퀴어'한 존재들이 모여들었으므로. 또한 펜데믹을 거치면서 강화된 성소수자 혐오부터 밀집 경험을 민페로 여기는 감각까지 헤아리면, 지금 이태원에 덧씌워진 편견은 몹시 복합적이다. ② 문제 – 불온한 이태원과 참사 피해 '안전'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레 높아졌다. 압사가 발생한 골목을 두고, 왜 그 위험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데 실패했는지 사람들은 추궁한다. 나아가 일상에 도사린 문제들을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질문과 각성을 통해 사회는 나아지겠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이태원이 불온하게 그려질수록 참사 피해 역시 그 불온함에 갇혀 해석되기 마련이다. 그날 이태원에 들렀던 사람들 대부분이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고, 같은 자리에서 생활을 이어 가는 주민들 또한 입을 열기를 주저한다. 와중에 빠르게 선포된 국가애도기간이 슬픔의 형식을 제한함으로써 참사에 관해 말할 기회는 일찍 닫히고 말았다. ③ 취지 – 이태원에 얽힌 마음을 듣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은 그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국가도, 사회도, 타인도 신뢰할 수 없는 탓에 참사를 겪은 개인은 불안한 가운데 놓여 있다. 이태원에서 노는 발길은 한동안 줄었는데, 그건 주변 상권의 침체 그 이상을 뜻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서로를 확인하는 대신 낙인을 먼저 의식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누구든 이태원에서 다시 놀 수 있을 때 비로소 회복이나 해결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작게나마 물꼬를 트기 위해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었다. 각자 품은 사연을 새기다 보면, 참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지 않을까. 뒤집어 강조하면, 이태원에 얽힌 마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야 참사는 영영 미지로 남는다. ④ 기획 –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작업 나의 경우, 언젠가 그런 고백을 들은 적 있다. “저에게 이태원은 마치 외국 어딘가 같아서 참사가 와닿지 않았어요.” 반면, 용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참사는 꽤 직관적이었다. 추모를 위해 이태원에 들른 지인이 있으면 한동안 가이드 겸 도슨트 역할이 되어 주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역에서 보다 잘할 수 있는 작업이 있지 않을까. 기획의 방향도 그 위치를 고려해 정했다. 첫째, 제도 정치나 사법, 행정의 관점,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 중심의 애도 그 바깥의 이야기를 발굴하자. 둘째, 오늘날 이태원을 표상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참사 경험을 조명하자. 셋째, 지역의 회복과 안전 사회에 대한 방안을 아래로부터 도출하자.  ⑤ 운영 - 마을 공동체 미디어의 역할 활동을 주관한 마을 미디어 용산FM은 주민들과 함께 방송을 만들어 왔다. 주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 제작 전반에 참여하기를 도왔다. 기록단 운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기록단은 이태원 일대를 답사하고 구술 기록 워크숍을 수강했다. 질문지 구성과 인터뷰이 섭외, 인터뷰 진행, 기사 작성 등 전 과정을 주도하면서 활동의 의미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다. 여건이 되는 경우 기록단이 직접 카메라를 잡기도 했다. 과연 그 방식이 지역 사회의 아픔을 다루는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는 일만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 ⑥ 구성 –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기록단에는 일곱 명이 모였다. 기록 활동가부터 퇴직교사, 스타트업 대표, 사진작가, 대학원생, 디자이너, 다큐멘터리 감독까지. 인상 깊었던 건, 대부분 동네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신청했다는 점이다. 녹사평, 이태원, 해방촌 등을 지나고 있었고, 이미 근방에 거주하거나 노동하고 있었다. 주로 개인적인 인연이 계기로 작용했을 뿐, 관련 활동을 해 본 경험도 드물었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갈증이 얼마나 큰지 엿본다. 나중에 기사 원고를 적에는 형식을 통일하기보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제약을 최소화했다. 또한 기록단을 역으로 인터뷰해 처음 계획에 없었던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⑦ 죄책감 – 책임감으로 승화하지 못한 한편, 살아남은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발 디딜 틈 없던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예방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누군가 죽어 가는 줄도 모른 채 축제를 즐긴 사람은 그날 웃고 떠든 자신을 탓한다. 현장을 목격한 뒤 빠져나온 사람은 구조에 나서기 망설인 자신을 탓한다. 아비규환 속에서 CPR에 임한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살리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 그리고 사람들. 또 한 번 반복된 참사 앞에 선 사람들은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만한 계기는 흔치 않다. 참사를 외면하는 식으로 고통을 떨쳐 내기도 쉽다. ⑧ 답답함 – 상실을 나눌 만한 장의 부재 답답함도 가득하다. 그날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는 희생자들의 총합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 상실을 나눌 만한 장은 한참 모자라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 말을 꺼내기를 저어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함구하는 사람도 있다. 들어맞는 표현을 떠올리느라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기대와 다른 응답이 돌아올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참사가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면 모두에게 치유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데, 정작 그 상처를 서로 내보일 수 있는 관계를 찾기란 참 어렵다. 그보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야 마는 풍경이 차라리 익숙하다. 그사이, 상처는 안으로 곪을 수밖에 없는 걸까.  2. 인터뷰 ① 섭외 – 이태원과 연결된 인터뷰이 김혜영, 신정임, 노호태, 신솔아, 심나연, 홍다예. 기록단은 아홉 명의 인터뷰이를 섭외했다. 혜영씨는 이태원 떠들썩한 복판에 사는 보영씨의 마음을, 정임씨는 매년 가족 단위로 핼러윈을 즐기던 민희씨와 원기씨의 마음을, 호태씨는 단골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범조씨의 마음을, 솔아씨는 이태원 클럽씬에서 음악을 트는 DJ의 마음을, 나연씨와 다예씨는 드랙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샤인씨와 이태원에서 놀기 좋아하던 승연씨의 마음을, 보영씨는 다문화 공동체를 찾아온 모하메드씨의 마음을 각각 들었다. 과연 당신에게 이태원이란 어떤 의미인지, 참사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아래는 그 대답의 일부다. ② 윤보영 – 애증의 사정을 아는 주민들 이태원역 근방에는 클럽과 술집만 들어선 게 아니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산다. 보영씨는 이태원 대로변에 거주한다. 주말이 지나면, 거리에서 쓰레기와 널브러진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똥오줌까지도. 핼러윈 때는 항상 휴가를 사용해 일찍 귀가했다. 하지만 그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의 공간은 내가 어떤 존재이든 포용해 줄 것만 같다. 그 애증의 사정을 아는 주민들은 희생자들에 대해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물론, 같은 주민이더라도 연령에 따라 거주 위치에 따라 가족 구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③ 김원기/임민희 - 온 동네 잔치로서의 핼러윈 용산에서 나고 자란 원기씨에게 핼러윈의 의미는 남다르다. 어릴 적부터 용산 미군기지 장교들의 숙소였던 외인아파트 가까이에서 외국 문화를 접해 왔다. "Give me a chocolate!"를 외치며 이웃집을 방문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편 민희씨에 따르면,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동네 잔치다. 주택가 곳곳 호박 장식과 사탕 바구니가 걸리고, 어린이집과 공원에서 행사가 열린다. 아이들은 가족 단위로 거리를 구경하며 다양한 세계를 익힌다. 그렇듯 이태원의 핼러윈은 고유하고 다채롭다. 클럽이나 술집에서만 기념하는 것도, 청년들만 즐기는 것도, 유흥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흔히 폄하되듯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지 않다.  ④ 곽범조 – 매출이 보여주지 않는 회복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범조씨의 경우, 이전만큼 손님들이 돌아오더라도 장사를 접을 참이다. 참사를 직접 겪은 충격뿐만 아니라 코로나 때부터 이어진 생계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말 그대로 방도가 없다. 그런 감각은 단기적인 지표로 포착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매출 중심으로 회복을 논한다면 많은 곤란을 놓치기 쉽다. 가령, 범조씨가 이태원에 자리 잡은 데에는 한 시절 자신이 즐겨 찾던 놀이터를 물려주고 싶은 바람도 있다. 지역의 특색이란 그렇게 재생산되기에, 회복도 그 역사에 대한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 다른 어디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이태원의 모습이 있다. ⑤ 선샤인 – 자유를 익히는 공간, 이태원 퀴어 아티스트 샤인씨에게 이태원은 선망의 공간이었다. 그 정제되지 않은 매력에 일찍이 빠졌다. 이태원에서는 상대방의 배경을 묻는 일이 드물다. 그저 “너 재밌다. 나랑 놀자”로 통한다. 옷차림에 대해서도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상식에서처럼 입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 개의치 않음을 통해 불특정 다수가 자신을 옹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속력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태원에서는 편견을 드러내는 일이 훨씬 눈초리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이태원에 오기도 하지만, 이태원에서 자유를 익히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동안 학습된 편견을 점점 깨 나가는 것이다. ⑥ 정승연 – 핼러윈 코스튬을 통한 일탈 낯가림이 심한 승연씨에게 이태원의 핼러윈은 곧 일탈의 기회가 되었다. 캐릭터 분장이 부끄럽기도 잠시, 이태원에서만큼은 금세 자신감이 솟았다. 나중에는 낯선 이에게 먼저 다가갈 만큼 적극적이 되는데, 그건 아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덕분일 것이다. 평상시 이태원이 간직한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범조씨는 강남과 이태원을 이렇게 비교했다. 강남은 퇴근 후 집에 들러서 다시 세팅하고 가는 곳이라면, 이태원은 그냥 바로 가도 상관없는 곳이라고. 승연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태원에서는 다른 어디에서보다 자기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틀에 박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⑦ DJ – 추모 방식의 또 다른 가능성 이태원에는 음악이 흐른다. 씬이 형성되어 있어 무수한 클럽에서 음악을 틀며 각기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 DJ H씨는 애정하는 클럽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참사 이후 이태원에서는 ‘이태원 스트롱’이라는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보스턴 마라톤 참사 때 등장한 ‘보스턴 스트롱’이라는 구호를 본뜬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면서 많은 공연과 전시가 중단되었지만, DJ들은 이전부터 예정된 파티를 그대로 진행했다.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로, 춤추는 사람은 춤으로,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건 그렇게도 가능하다. 이태원에서 계속 놀겠다는 다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⑧ 모하메드 – 한국어로 도착한 재난 문자 이태원 일대를 걷다 보면 다양한 음식점, 빅 사이즈 옷가게, 환전소 등이 눈에 띈다. 보영씨는 흔히 보이는 케밥집에 대한 호기심으로 외국인 인터뷰이 섭외를 희망했다. 외국인이라는 큰 범주 안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모하메드씨는 참사 소식을 접하고 깜짝 카메라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어로 도착한 재난 문자에 대한 아쉬움을 술회했다. 앞서 곽범조씨는 외국인 손님의 경우 내국인과 다르게 참사 한 달 뒤부터서야 발길이 끊겼다고 전했다. 외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차별적인 지원이 보도되기도 했다. 과연 이태원의 외국인은 지금 이 순간 참사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3. 함의들 ① 골목 – 이토록 다양한 피해의 층위 참사가 발생한 골목은 외딴섬이 아니다. 누구든 쉽게 드나들 수 있고, 그만큼 쉽게 휘말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다. 지하철역 출구와도 인접해 있다. 따라서 희생자와 생존자, 구조자, 목격자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밀집된 인파 속에서 어린 자녀의 손을 붙잡고 겨우 빠져 나왔던 원기씨와 민희씨 부부는 생각한다. 만약 그대로 떠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를 잃을 뻔한 상황에 아찔해지는 한편, 그날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생사가 걱정이다. 보영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도로 위에서 차량에 갇힌 채 현장에 노출되었던 보영씨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② 당사자 – 참사의 영향 아래 놓인 사람 참사는 그날 이태원에 머무른 사람들을 관통한다. 나아가, 직간접적으로 소식을 접한 모두가 참사의 영향 아래 놓인다. 이태원의 핼러윈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DJ H씨는 일상에 도사리던 죽음을 체감하고, 모하메드씨는 분향소에 걸린 앳된 면면을 보며 미안해한다. 자신과 당신, 둘의 운명을 가른 데에는 한 끗 차이밖에 없으므로. '나' 역시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공포가 새겨졌지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당사자를 폭넓게 상상해야 한다'는 정임씨의 뜻과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나연씨의 뜻은 그런 점에서 통한다. ③ 편견 - “왜냐면 내가 많이 변했거든요.” 모르는 영역은 곧잘 편견으로 채워진다. 특히 이태원과 핼러윈을 둘러싼 혐오는 참사를 해석하는 데 강력하게 작용한다. 일각에서는 "거길 왜 갔냐"라며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보영씨는 지적한다. 이태원과 핼러윈을 몸소 경험해 본 주민들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그만한 이해가 드물어 침묵에 잠기는 건 오히려 주민들 쪽이다. 누군가의 고통은 또 다시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기록단조차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인터뷰를 통해 변화해 나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과연 바뀔지 묻는 질문에 혜영씨는 확신했다. "왜냐면 내가 많이 변했거든요." ④ 피해 – 그날 이후 잃어버린 무언가 이태원은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에 회복을 고민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헤아려야 한다. 가령,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하는 원기씨에게 핼러윈의 의미는 각별하다. 유년 시절부터 함께해 온 만큼 아득한 추억이 거기 쌓여 있다. 그 문화가 위태로워질수록 원기씨의 뿌리도 흔들린다. 또한 드랙퀸 활동을 하는 샤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로서 샤인씨가 느끼는 연대감은 여기 모인 이방인들을 아우른다. 이태원의 위기를 두고, 샤인씨는 왠지 악착같다. 그렇듯 참사의 여파는 실존 깊숙이 미치고, 이태원의 침체는 지역 사회에 치명적이다. ⑤ 정치 – 양극화된 정치 현실 속 침묵  '정치적인 것'에 대한 경계심이 도드라졌다. 그런 이유로 인터뷰이 섭외에 실패하기도 했으며, 인터뷰이의 염려를 거듭 덜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반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 참사에 대해 입을 열 때 사람들이 지는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 솔아씨는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서 의견 표출이 얼마나 두려운지 공감한다. 나연씨는 거리마다 나부끼는 정당 형수막이 마치 기사 댓글 창 같다고 한 지인의 평을 떠올린다. 중간쯤에 있는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승연씨는 인터뷰 말미 한숨 쉬듯이 답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한 거니까 잘 들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⑥ 애도 – 일상과 분리된 추모의 한계 일상과 추모는 분리되어야 하는 걸까. 추모는 꼭 무겁고 엄숙해야 할까. 한동안 영업을 중단했던 범조씨는 압사가 발생했던 골목 앞을 일부러 지나면서도 국화를 놓거나 포스트잇을 붙이지는 못한다. 일주일에 몇 번씩 이태원에서 약속을 잡던 승연씨는 '애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고백한다. 둘 다 안타까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더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다. 이에 DJ H씨는 고인의 마지막을 흥겹게 지키는 아프리카 장례를 예시로 든다. 보영씨는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를 떠올리며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울리는 하루를 상상한다. 솔아씨와 샤인씨는 이태원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를 제안한다. ⑦ 불신 – 사회를 향한 불신의 누적 물론 이런 의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참사 그 자체가 해결되어야 한다. DJ Seesea씨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음을 호소한다. 책임 있는 자의 적절한 사과나 반성이 뒤따른 적이 없기에, 개인적인 치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를 향한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단이 이태원 참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연상한다. 더불어 이듬해 이어진 오송 참사와 서이초 사건 등을 언급하며 무너진 신뢰에 대해 고심한다. 참사 당시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겼던 호태씨가 ‘믿음’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 것도 비슷한 취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무수한 상처들이 아물지 않은 채로 나날이 누적되고 있다. ⑧ 지역 – 여전히 미지로 남은 이야기 기록단은 이미 지역에서 형성한 관계를 바탕으로 인터뷰이를 섭외했다. 물론, 여전히 미지로 남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같은 주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연을 품고, 상인들 역시 업종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상이하게 겪는다. 외국인과 이주민의 생활도 천차만별이다. 청소년과 노인의 경우도 다름없다. 그러고 보면, 보영씨는 참사 직후 당근마켓 어플에 게시된 내용들을 기억한다. "슬프다", "미안하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막막하다" 그리고 댓글로 자신의 상담 경험을 공유했다. 아쉽지만, 모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기록단 활동이 더 많은 연결을 위한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며 맺는다.  4. 고민들 ① 핼러윈 – 참사 일주기의 과잉된 반응들 참사 일주기를 앞두고 정부·지자체가 내놓은 핼러윈 대책은 문제적이다.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원기씨의 바람이 무색하게, 이태원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은 행인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였다. 또한, 주요 길목마다 설치된 철제 펜스는 우측 통행을 강제했다. 걸음을 늦추다가는 서둘러 움직이라는 핀잔을 들었으니, 사람들과 눈을 맞추거나 대화를 나누기란 어려웠다. 과연 그런 통제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걸까. 그토록 과잉된 조치는 위험을 관리하기보다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 한편, 마포구에서는 ‘핼러윈 금지’ 현수막이 붙기도 했다. 놀이공원이나 식품 업계에서는 핼러윈 마케팅을 다른 방식으로 대체했다. ② 이야기 – 도무지 듣지 않고자 하는 사회 어떤 이야기는 수면 위로 넘실댄다. 반면, 어떤 이야기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다. 익숙한 틀에 들어맞지 않는 목소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누락되는데, 누군가의 삶도 그렇게 고립된다. 핼러윈 다음 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이태원 참사 일주기 추모 대회가 열렸다. 주현씨는 생존자로서 무대에 올랐지만, 그 자리를 지배하는 정서와 구호를 읽으며 많은 것을 덜어내야 했다. '참사'가 '참혹한 일'을 뜻한다면, 나에게는 온통 참혹한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참사를 설명하기 위해 갈피가 될 만한 조각들을 내보이는데, 그런 이야기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고자 하는 힘이 사회에 만연하다. ③ 분향소 –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하는 분향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면전에 대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은 꾸준히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헌화하는 행렬이 길었다. 언젠가 다국어로 적힌 홍보물이 설치되자 외국인의 관심이 늘었고, 어린이들은 항상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호자를 잡아끌었다. 그 앞에서 나는 이 참사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했을까. 곳곳에 쓰인 '기억', '애도', '안전' 같은 단어를 두고도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또한 분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이 들렀다. 외딴섬 같은 그 공간에 연대하면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다. 혹은 참사에 관해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④ 기록 – 참사 피해를 기록할 때의 원칙 기록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근거한다. 녹취록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그 행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몇 가지 태도를 유념했다. 가령 많은 피해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피해가 고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나름의 방식으로 참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응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 피해가 아무리 클지언정 그것이 한 개인을 이루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삶의 일부로서 어떤 맥락 위에 놓이는지 살펴야 한다. 이태원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움직임과 문화에 주목해야 공평하되, 그 풍경을 마냥 아름답게 담는 게 정답은 아니다. 이태원 안에서조차 구역에 따라 그 분위기는 서로 다르다.
·
[이태원 참사]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
“참사 당일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단 10분을 요구하고 싶어요.”   모 신문 편집국 내부에서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회고를 했을 때 나온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회부 사건팀 부팀장(vice·바이스)이 전했고, 이 말을 직접한 사람은 그의 후배 기자였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소속 기자들은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드는 편집국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언론사에서 가장 연차 어린 기자들이 배치되는 부서이기도 합니다. 그가 10분을 요구한 이유는, 취재 현장으로 나가기 전 함께 재난보도준칙을 읽고 왜 우리는 이 취재를 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난보도준칙은 세월호 참사 이후인 2014년 9월,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한국기자협회·한국신문윤리위원회 등 국내 대표적인 언론현업인단체가 모여 만든 일종의 취재·보도 가이드라인입니다. 언론인 스스로 필요하다고, 지켜야한다고 정해놓은 규범이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취재 전 다같이 재난보도준칙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태원 참사 초반에 드러났던 보도문제, 즉 혼란스러운 초기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무차별적인 취재 경쟁을 벌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장에 배치된 기자들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가이드라인대로 행동하기는 무척 어렵고, 특히 연차 어린 기자들이 배치된다면 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현장에서 가이드라인대로 취재하고 보도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재난보도 상황에서 작동하는 문제적 ‘보도관행’ 그런 점에서 우리는, 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적 '관행'이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경희(2019)는 세월호 참사 당시 기자들이 반복한 ‘잘못된 관행’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물론 기자 개개인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뉴스를 만드는 일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선택하는 상황, 즉 갈등구조 속 반복되는 선택행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특히 재난사고의 경우,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어떤 소재에 주목하고 어떤 취재원을 만날 것인지, 사회적 참사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부와 국회 등에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사안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갈등구조는 깊어지고, 언론인·언론사·언론조직 등이 어떤 관행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해당 연구 결과, 재난현장 취재과정에서 4가지, 보도과정에서 5가지의 갈등구조와 그 속에서 선택된 관행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취재과정에서는 △‘재난 현장’과 ‘정부 발표’ 사이 △‘피해자 인권’과 ‘뉴스거리’ 사이 △‘현장 자율 취재’와 ‘본사(데스크) 지시 취재’ 사이 △‘타사와의 취재 경쟁’과 ‘타사와의 협력 취재’ 사이에서 기자들은 갈등합니다. 그 속에서 △정부 발표는 신뢰하지만 피해자는 비신뢰하는 관행 △피해자 인권보다는 뉴스거리, 특히 영상 중심으로 취재하면서 비윤리적 취재를 하게 되는 관행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데스크의 지시를 일단은 따르는 톱다운 방식의 취재 관행 △비협력적 취재 관행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보도과정에서는 △‘현장 보고’와 ‘정부 발표’ 사이 △‘피해자 중심 보도’와 ‘권력자 중심 보도’ 사이 △‘핵심 사실 보도’와 ‘기계적 중립 보도’ 사이 △‘정확한 보도’와 ‘신속한 보도’ 사이 △‘선정적 구성’과 ‘절제된 구성’ 사이에서의 갈등구조가 드러납니다. 세월호 보도에서 대부분의 데스크는 △현장 보고보다 정부 발표를 보도하기를 선택했고 △피해자의 요구나 주장보다는 권력자의 행보나 언행을 보도했으며 △재난사고의 원인과 재난 대응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밝혀내는 보도보다는 이것이 정부나 행정 관리자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되는 것을 고려하여 ‘중립성’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따라 보도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매체 환경의 영향으로 △신속한 보도와 △선정적 구성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행들은 한국 저널리즘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뉴스거리를 정부나 공권력의 발표에 의존해온 방식, 타사와 협업 취재보다는 기자 개인기를 통한 특종과 단독에 더 집중하는 문화, 정파성에 대한 두려움과 중립성 신화에 대한 과도한 의존(사회 비판 보도를 정파적 보도로 여기고, 정파적 보도는 편파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한 보도라고 해석하는 관점), 속보와 같은 정보의 빠른 전달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보는 관점 등이 중첩되어 참사·재난보도에서의 문제 상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위험커뮤니케이션 상황 하에서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전문가’와 위험을 인지해야 할 ‘대중’ 사이를 언론이 잘 매개해야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러한 취재관행은 개선될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 질문 : 언론은 무엇인가요? 재난 상황에서 제대로 보도해줄 언론을 기대하는 우리들은, 언론이 이런 문제적 보도관행을 갖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며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더 근본적으로, 언론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은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것들을 기대하나요? 일반 시민들·대중들에게 언론은 무엇인가요? 기대가 좌절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생각하는 언론에 차이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기자들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역할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2년 열린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다시 본 재난보도준칙’이라는 토론회에서 한 기자가 이같이 말했습니다.   “(재난보도)준칙 제13조에 유언비어 방지 부분(모든 정보는 출처를 공개하고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확인되지 않거나 불확실한 정보는 보도를 자제함으로써 유언비어의 발생이나 확산을 막아야 한다)이 있는데 이 대전제에 반대할 기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장에서 나의 일이 됐을 때 솔직히 장담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당시 마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든가 연예인이 있어서 사람들이 몰렸다는 목격담이 있었는데, 수사기관 등 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 이상 이런 내용을 일체 전하면 안 되는 건가란 생각을 했다. 왜냐면 당시 현장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내용을 전하는 게 현장성을 지키는 제1의 기준일 수도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어디까지 현장을 전해야 하는 건가 고민이 들었다.”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제1의 기준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그것은 상황마다, 시기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장 정보 전달’을 언론의 역할 1순위에 놓게 되면 언론의 또 다른 역할들은 2순위, 3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떠올려봅시다. OO일보 사회부 사건팀 소속 신입 기자는 2022년 10월 29일 왜 해밀톤 호텔로 갔어야 할까요? (1)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시, 그 중심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발생한 ‘사고’가 무엇이고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취재하여 알리기 위해서일까요? (2) 들어보니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이고 그렇다면 이는 대중의 주목과 관심을 끌 수 있는 뉴스거리이니 취재해야하는 것일까요? (3) 벌어진 ‘사고’에 대해 공권력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사고’를 ‘사회재난’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기 위해서일까요? 대체 그는 왜 거기로 가야했을까요?   언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기자·언론사의 취재·보도 과정 또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과정이라고 본다면, 언론의 취재 과정과 목적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을 그대로 적용해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사건사고를 알리기 위해서 취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커뮤니케이션을 ‘정해진 양의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전달모델·transmission). 이는 기본적으로 미디어(언론)에 대해서, 정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 즉 정보와 거리와 사람을 통제control하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이태원 참사에서의 보도 문제를 일으킨 원인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으로 언론의 역할을 바라본다면 분명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2) 대중이 궁금해 하는 뉴스거리를 발굴하기 위해 취재해야 한다는 개념은 어떨까요.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을 ‘주의를 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공시모델·publicity). 즉, 언론(매스미디어)은 대중의 눈길을 끌고, 감성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언론은 후술할 ‘규범 이론’의 적용을 받는 편이므로 공시모델로 완벽히 설명되진 않지만, 단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관점(전달모델)보다는 가치중립적인 면모를 띄며, 우리가 미디어(언론)에 대해 ‘이들은 광고주에게 대중의 주목(attention)을 팔아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고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3) 언론, 저널리즘은 일반적으로 위의 관점보다는 ‘규범 이론’으로 설명됩니다. 규범 이론이란, 언론의 이상적인 구조와 운영 방법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가치와 원칙을 정하고 – 예를 들면 ‘언론 운영을 규제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미디어에 대한 직접 규제는 정당하다’, ‘정부 규제도 언론 자유도 모두 필요하다’와 같은 내용 –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언론의 책무가 정해집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정부 규제를 요구하는 압력이 늘어나면서, 미디어 경영자들은 규제를 정부에 맡기기 보다는 공중의 필요에 맡기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언론에 감시견 역할이 부여되고, 언론이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Fourth Estate로 그려지게 됩니다.   이태원 참사와 미디어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이 두 가지에 어떠한 직접적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인 스스로와 언론사가 이태원 참사를 포함한 취재 현장에 ‘왜’, ‘무엇을 취재하기 위해’ 가야하는지 생각할 때 필요한 근본적 사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언론의 역할을 떠올리고 그들을 분석하고 평가할 때 쓰일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현장에서 느낀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기자의 다짐은 언론을 정보 전달자로 한정하는 관점입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를 전달함으로서 사회 다양한 요소를 통제하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쥐어줄 것인가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뉴스가 전달되거나 제공된다는 인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에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즉 어떤 의미를 생성해내며, 공동체가 공통으로 갖게 되는 행동이나 공유하게 되는 신념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는 관점입니다. 오늘 읽었던 뉴스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는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많은 한국 사람들이 출근길에서 뉴스를 읽는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행동인지,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일련의 보도행태에서 우리는 어떤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는지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의례적 관점·a ritual view of communication).   기자가 고민으로 언급한 것처럼, 참사 초기 ‘마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MBC에서는 뉴스특보를 진행하던 도중 ‘단순 압사 사고가 아니라 약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시민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목격담을 전하는 것이 부적절했던 이유는, 해당 현장에서 나온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실제로 현장에서 이런 목격담이 떠돌았던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태원 참사를 구성하게 될 여러 의미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사가 발생했던 이태원이라는 지역을 떠올려볼 때, 이태원이 한국 사회에 의미해 온 장소성이 있습니다. 박상은(2023)은 이태원 참사가 어떻게 의미 구성이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왜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었는지(즉, 안전 대책이 설계되지 못했던 행사였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이태원의 지역 성격이 바뀌는 상황에서 도시계획은 여기에 발맞추지 못했고, 덩달아 이태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이 작용하면서 핼러윈 축제는 지자체의 관리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장소성은 참사 이전부터 작동해왔다는 점입니다.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공간, 그러나 위험하고 문란한 공간이라는 사회적 시선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며 참사의 의미를 왜곡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태원 참사를 어떠한 의미로 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한국 언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 언론이 이것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마약 목격담을 전달해야 한다’는 감각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재난과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을 구성하기 결국 우리는 재난과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까지 떠안게 되었습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남아있는 진상규명은 무엇이고,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울리히 벡(Beck, 1986)이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에서 말한 대로,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겪을 위험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계속 커질 것이라면, 위험과 대중 사이를 매개할 언론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하는지 고민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아주 새롭게 이뤄져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었다는 재난보도준칙을 다시 봅시다.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만들었다는 이 가이드라인엔 이미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일례로 제8조(통제지역 취재) ‘병원, 피난처, 수사기관 등 출입을 통제하는 곳에서의 취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관계기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라는 조항이나, 제18조(피해자 보호)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뉴스거리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캐물으며 공격적으로 취재하는 기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혼란이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재난으로부터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이 또한 기자의 역할이자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
1
·
[이태원 참사] 언론은 어떻게 해야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이태원 참사'를 마주했다. 이후 계속 이태원 참사를 취재했고, 이제 곧 2주기다. 그사이 여러 일이 일어났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최근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참사의 책임자들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누구는 유죄를 받았고, 무죄가 나오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진상규명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사회적 참사는 복잡다단하다. 단순히 '특정 개인을 책임지게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공공기관의 기형적 관행과 사람들의 욕망, 그리고 비효율적 시스템이 얽혀 있다. 언론은 이를 밝혀내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완벽하지 않다. 특조위가 규명해내지 못할 수도 있는 부분을 언론은 보완해야 한다.  나는 지난 몇달 간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기획기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태원 참사의 10가지 진상규명 과제를 골랐고, 이를 규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썼다. 10가지 과제를 뽑기 위해, 또 이를 특조위가 조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증명하기 위해 국회 국정조사, 수사, 재판 자료를 훑었다. 별도로 확보한 여러 영상과 사진, 문서 등도 검토했다.  취재를 하며 생각했다. "나에겐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언론은 왜 이런 자료들을 모아놓지 않았고, 또 보도하지 않았을까."  특히나 아쉬웠던 부분은 참사 당시 모습을 담은 영상의 부족이었다. 나는 여러 자료를 통해, 참사 직후 경찰의 현장 교통통제 실패가 구조지연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피해 규모가 더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가져왔고, 기사를 썼다. (관련 기사 :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⑥ '교통 통제 실패' 그리고 놓쳐버린 골든타임) 하지만 기사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그래서, 구조가 빨랐다면 '누구를 살릴 수 있었는지'였다. 나는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참사 직후 언론보다 빨랐던 것은 시민의 휴대전화였다. 여러 시민은 자신이 찍은 모습들을 SNS에 올렸고, 소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곧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참혹한 영상은 삭제돼야 한다는 여론과 정책적 결정이 있었다. 이로 인해 언론은 더 이상 SNS의 영상을 수집하거나 보도하는 걸 금기시해야 했다. 그 결과, 현재 찾을 수 있는 참사 관련 SNS 영상은 매우 한정적이다.  확인해 보니, 참사 현장 영상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은 기이하게도 미국 언론이었다. 해당 언론은 이태원 참사 직후, 매우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촬영한 영상을 수집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 지난해 <CRUSH>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참사 현장 영상은 삭제돼야 하고, 수면 아래 묻혀야 한다는 것. 참사 직후,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금 시점에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판단을 후회한다.  우리는 희생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버티다 죽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희생자들의 사망 진단서에는 "30일 오전 12시 00분 사망 (추정)", "29일 오후 10시 15분 사망 (추정)"이라고만 적혀 있다. 만약, 참사 당일현장 영상이 대량 수집돼 있었다면, 그래서 여러 각도에서 참사 골목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분석해볼 수 있었다면, 어떨까. 난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유가족은 요새도 SNS를 돌아다니고, 또 여러 방송사에 문의하며 영상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 중이다. 앞서 설명한 미국 언론에도 연락해 '제발 시민들이 찍은 참사 당일 영상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현장에 도착한 11시 20분은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후였다"고.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11시 20분 이후에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희생자가 있었고, 그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담긴 영상이 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민 장관의 저 말을 반박할 수단이 없다, 지금은.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오히려 언론은 그런 영상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보도했어야 하지 않았나, 이름부터 참혹한 참사를 왜 참혹하게 보도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러지 않기로 한 약속이 과연 진상규명에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는가.  앞서 설명했듯, 현장 영상의 사례는 일부분일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와 언론은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 과연, 사회적 참사의 해결에 도움이 보도는 무엇인가? 또 그것의 불편함을 우리는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OT 후기
들어가며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의 한 골목, 우리는 또 다시 많은 이웃을 잃었다. 그런데 이 참사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10.29 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10.29 참사, 핼러윈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 등. 이름을 붙인 이들마다의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이 다르다. 10.29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아, 나는 어떻게 참사를 상상하는지 떠올려보았다.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그날은, 놀아야 하는 날이었다. 마스크와 인원수 제한, 운영시간 축소 등 다양한 방역 지침으로 내 3년의 대학 생활은 날아갔다. 흔히들 간다던 MT도, 친구들과 떠나는 우정 여행도, 미루고 또 미루고 또 미뤘다. 그리고 드디어 방역 지침 대부분이 권고 사항으로 축소되었다. 때마침 중간고사도 3일 전인 26일에 끝났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구들이랑 놀아야 했다.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미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피드엔 이태원 구석구석에서 행복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이태원에 갈 준비를 마쳤다. “야 오늘 이태원 사람 X많아 ㅋㅋㅋㅋ” 먼저 가 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곳도 마땅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틀어 근처 용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계속해서 넘긴다. 그리고 곧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주로 나의 위치를 묻는 내용들이었다. 모두가 자는 불 꺼진 우리 집에 나는 거실에 혼자 나와 티비를 본다. 실시간으로 뉴스가 보도된다.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도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이태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그날 이후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을 쉽게 가지 못한다. 출퇴근 시간엔 아빠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여력이 없을 땐 택시로 움직였다. 피치 못 하게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면 시간대를 피해 미리 가거나 늦게 갔다. 옆 사람과의 간격이 점차 가까워지면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상했다. 나는 그 장소에 있지도 않았는데.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을까? 나와 같이 아픈 마음을 갖고 있을까? 아파하는 게 맞는 걸까? 비판이 두려워 앞장서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2주기가 가까워지니 맞닥뜨릴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캠페인즈에서 진행하는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 시작은 9월 11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 함께 글을 쓴 사람들과 만나 소개와 소감을 나누고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강연을 들었다. 최성용 연구자의 강연 :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참사를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의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참사를 있는 그대로의 명확한 사실이나 사고로 파악한다. 이에 최성용 연구자는, 사람들이 참사를 상상하고 해석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 특히 이태원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함께 나누었다. [위로부터 상상하기] 책임의 주체 혹은 책임의 목적 및 결과는 무엇인가? 국가적 재난이 생겼을 때, 우리는 늘 책임의 소재를 찾는다. 이태원 참사에도 같은 방식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의 사후 대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2022년 말에 진행되었던 국회 국정조사에서도 사후 대처를 기준으로 장관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책임의 주체를 좇아 사후 대처의 과정과 결과만을 따졌다. 하지만 사전 대비가 아닌 사후 대처에만 집중한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놓치기 쉽다. 구조적인 문제는 사후 대처가 아닌, 사전 예방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찾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에서 책임의 주체를 찾는 것이 이후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방하는 것보다 중요할까? 이 외에 다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법이 없는 경우, 다시 말해 불법이 아닌 경우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고위 장관 개인과 관료 시스템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같은가? 국가와 경찰과 지자체의 책임은 같은가? 진상규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법적 처벌을 위한 진상 규명을 해야 하는가?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의 진상 규명은 무엇이 다를까? 국회 내에서 혹은 제도권 내에서 진상 규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보상금의 관한 쟁점으로 참사를 축소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10월 31일 행정안전부는 보상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참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보상금의 관점으로 축소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위로금 2,000만 원, 장례비 최대 1,50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구체적인 액수를 내걸었다. 이러한 축소의 결과는 부정적인 여론으로 즉각 나타났다. 이태원 참사에 세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당시 장관은 “경찰이나 소방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산 구청장 또한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참사를 한정 지었다. 정부가 참사를 보상 액수로 제한하고 축소한 결과,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한 번 더 고통에 휩싸이고 고립되었다. 일방적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내걸었을 때, 무엇이 휘발되는가? 시민언론 민들레는 홈페이지를 통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을 게시했다. 희생자들을 그늘 속에 묻히게 하지 않겠다며 온전한 추모를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다른 인적 사항과 특징들 없이, 이름 자체만으로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을까? 어떤 사연과 맥락을 가진 개별의 사람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을 통해 추모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참사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를 부르는 명칭은 지금까지도 제각각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태원 ‘사고’라고 칭한다. 어떤 기준으로 참사와 사고를 구분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적다면 사고인가? 참사가 되지 못한 사고들이 오히려 사각지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닐까? 한국심리학회 트라우마 학회 연구소에서는 이를 두고, 이태원을 제외하고 ‘10.29 참사’를 제안했다. 장소를 언급하는 순간, 그곳에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다는 의미였다.  [아래로부터 상상하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유언비어와 사진들을 옮긴 것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까? 2차적 증언자로서의 언론들의 역할은 없었을까? 이태원 참사 직후, 갖가지 유언비어들과 이미지들이 여럿 생성되었다. 화재가 났다, 마약이 성행했다는 등. 하지만 이것이 악의를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현장에서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담론들이 유언비어의 형태로 퍼졌다. 목격자들이 상상 밖의 일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사진을 나르거나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퍼뜨릴 수 있다. 문제는 그 이미지와 유언비어들을 보고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데 활용한 다른 시민들이나 언론들이다.  녹사평 시민분향소에 있던 포스트잇들의 언어는 어디로 갔을까? 참사 이후 녹사평역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2월 5일, 서울 시청 앞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 붙인 포스트잇들의 메시지는 꽤나 다르다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녹사평역에서는 희생자들과 자신의 유대관계를 언급하며 자신의 슬픔과 애도를 표현하는 메시지들이 많았다. 반면 서울 시청의 분향소에는 주로 특별법 제정이나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결국 참사에 대한 애도로부터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한 채로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정치적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골목에 붙어있던 수많은 포스트잇에 담긴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또 다른 피해자는 누구일까? 오후 10시, 참사 발생 골목 및 그 근처에서 사용된 핸드폰 내역을 보면, 약 1만 4천 명 정도가 골목 주위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태원 전체로 보았을 때엔 약 3만 5천 명 정도가 밀집했다. 이 숫자는 내국인만 조사했기에 외국인까지 포함하면 더 큰 숫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공적으로 출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피해자는 극소수다. 유가족가족주의적 애도는 한국 사회 운동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슬픔을 축소했던 우리의 현대사들을 볼 수 있다. 최근까지도 국가는 유가족들의 상실과 슬픔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는 유가족들의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팽목항으로 달려가, 당시에 무수히 생성되던 오보들을 적극적으로 정정했다. 그들은 유가족인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배 안에 갇혀있는 걸 지켜봐야 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는 실제 축제에 함께 참여하여 가족들을 잃기도 했다. 공적 출연의 동기가 부재한 생존자좁은 의미에서 159명의 희생자가 있고, 196명의 부상자가 있다. 이 부상자를 생존자라고 보았을 때, 트라우마가 없고 공적으로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와 관련된 활동의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생존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피해자의 한 모습이다. 부상자/목격자/구조자 등, 결국 참사에 연루된 수많은 피해자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냐에 따라, 그들은 각각 다르게 감각한다. 죄책감이나 트라우마 등으로 그들을 대변할 수 없다. 또한 외국인/이주민/성소수자들 등은 공적 출연을 꺼리기도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없다. 이태원 지역의 식당 종업원이태원 지역의 상인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있다. 참사 당일, 사실상 고용주가 아니라 대부분 종업원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참사 이후 많은 종업원이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 또한 피해자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이태원에서 놀다가 죽었다’ 이태원의 장소성은? 많은 이들이 참사가 아닌 ‘사고’로 명명한다. 놀다가 죽었다, 는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이는 풍기문란통제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풍기문란통제는 과거 일본에서서 사회통제의 한 방식이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며 이 통제방식이 그대로 조선에 작동하게 된다. 국가는 그들의 기준으로 ‘문란함’을 규정했고, 제도 혹은 장치로서 사회를 통제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했기에 문란함의 기준은 모호했다. 이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사람 혹은 행정기구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 이후에 기지촌이 되는 이태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후 매년 언론들은 이태원을 풍기문란한 곳으로 재현했고, 이태원은 ‘위험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나가며 10.29 이태원참사의 2주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1주기엔 어떻게 보냈는지 다시금 떠올렸다.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이태원에 방문하기도 두려웠다. 활동가들이 올린 글들을 보며 ‘내가 언제쯤 이전처럼 이태원에 갈 수 있을까’ 떠올렸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차츰 마주할 용기가 생겼나 보다. 이태원참사와 관련된 메시지들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바라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10.29 이태원참사의 현장에 있지 않은 나는, 거짓말처럼 현장의 두려움을 아직까지도 느낀다. 마치 내가 생생히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느낀다. 혹시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어딜가든 두리번거리며 쉽게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이 고이고 함께하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나도 피해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 동일하지 않지만 개별적인 두려움으로 피해를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부상자로서, 목격자로서, 유가족으로서, 이웃으로서, 구조자로서, 나와 같은 또 다른 목격자로서.  정부는 참사에 대한 애도를 축소하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 한편 각각의 두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경험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무시하진 않았을까? 혹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언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다가오는 2주기까지 광의적인 피해자들의 감정과 목소리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10.29 이태원참사에 대해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고 나누며 온 마음으로 추모하는 2주기가 되길 바란다.
·
2
·
[이태원 참사]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스티그마 효과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행위, 모습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낙인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거론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요소다. 한 아이의 행실과 평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아이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다가, 실제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탈선을 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탈선을 하려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구성원이 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쁜 낙인만 존재하는가. 착한 낙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착한 낙인이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져서 단어를 풀어보겠다.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묶은 좋은 말이 오히려 거북한 시선을 만들거나, 집단 내부에서도 그 표현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에 ‘A와 같이 노는 학생들은 전부 착해.’라는 말을 듣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여보자고 복도 중앙에 돈이랑 유사하게 생긴 상품권을 뿌려놓고 구석에 숨어서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었고 학교 뒤뜰에 있는 벌집에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학생이었는데. 학원을 몰래 빠져나와 PC방에 가던 아이였고, 새벽에 기숙사 담벼락을 타고 나와 당구 치러 가던 학생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싫어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착한 무리의 착한 학생’이라는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처럼 살고 개처럼 행동한다고, 입이 꽤 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말조심하는 편이라고. 나는 내게 찍힌 좋은(사실은 좋아 보이는)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  이태원에는 뿌리 깊은 낙인이 박혀있다. 문란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 질 나쁜 외국인들이나 모이는 장소, 마약의 근원지, 한국 에이즈 발원지. 사실 이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문화 특성을 나쁘게 재해석한 이야기다.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였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국가단위로 유도를 했던 관광지였고, 실제로 이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만큼 밤문화도 발전했고 클럽, 술, 음식 문화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같이 섞이면서 다문화 사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가 단위, 언론 단위의 낙인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 heterosexism(이성애적 차별주의)이 심화되는데 국가, 언론이 박차를 가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에이즈 문제의 중심지는 이태원이며 성소수자들이 이태원에 모이게 되면서 사회에 문제가 될법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범죄를 조장한다. 개신교 기반의 단체는 이런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기사를 꾸준히 올리며 지역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태원에 가서 논다는 사실 자체를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가 되었다.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태원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이와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장애, 차별부터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진주를 ‘낙인’이라는 실로 꿰어내고 공감이 아닌 대답을 찾는 응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방식은 근래에 보이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책 치고는 특별한 전개 방식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책에서는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대전제를 세우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공감한다는 말은 이제 인터넷 냉소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표현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네가 고통을 아는 체하냐. 이제는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학자로서 이성으로 접근한다.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 주는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을 ‘인터넷 냉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던진 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 학생들은 놀러가다 사고가 나서 죽은 건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를 한 돌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질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의 집단이 바뀌었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지탄하던 사람들까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냉소주의가 2010년도 중반에 비해 크게 심화된 점도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서는 과거부터 뿌리 깊게 박힌 낙인이 있었다.  이태원에 놀러간 이들은 문란한 이들, 인터넷문화를 대표하는 베타메일과는 다른 알파메일들,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성소수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모든 혐오가 과거부터 쌓여온 낙인의 한 획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돌은 많았다. 그들을 향한 추모탑이 세워질 때 옆에 혐오로 돌탑을 세워도 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던져진 긍정의 키워드는 그들의 투석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들은 문란하지 않고 문화를 즐기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이 착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는 사건 당시 구급차 인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의 영상과 더불어 큰 파급력을 일으켰고 인터넷 냉소주의자들은 피해자를, 더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를 모두 비웃었다. 놀러가서 죽은 게 뭐가 자랑이냐고, 이제는 놀러가서 죽어놓고, 사건이 난 이후 다른 곳에서 춤추다가 집에 가놓고서는 보상금까지 타려고 하냐고.  국가, 언론이 찍은 나쁜 낙인과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고통에 잘못 공감한 –혹은 척한- 이들의 착한 낙인 덕분에 피해자들은 입을 열기를 포기했다. 수년간 반복해서 찍어온 이 깊은 낙인을 피해자 한 명의 입으로는 지워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낙인을 계속 찍고 있을까. 선한 낙인과 나쁜 낙인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잠재적 피해자, 2차, 3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저자의 방식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통을 향한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올해 초,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후배를 만났다. 성년이 된 이후로 쭉 군 생활을 했다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역하면서 다시 경기도로 오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미에서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는 예전보다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조금의 고민이 있고, 조금의 압박감이 있고, 조금의 불안함이 있는 그런 얼굴. 그 후로 우리는 두어 번 더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후배는 긴 고민 끝에 내게 커밍아웃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고(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다), 이 몇 번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언제든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라는 말을 꺼냈다. 상관없으니 다음에 또 놀자고.  이후로 후배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다시 연락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그를 향한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다. 나와 연락을 한 이후에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다던가, 집안에서 붕 떠버린 위치에 있다던가.  나는 아직도 그가 내게 연락을 먼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커피나 한잔 하자고 부르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를 기다려도 사회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으니까.  참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할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내 후배를 위한 시선이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후배를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축제 문화에 대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둥글어지고….  첫 책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라는 책을 가져와봤다. 다음 서평으로 계획 중인 도서는 <<인싸를 죽여라>>다. 2010년도 중반 온라인 극우주의와 혐오, 조롱,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한 이야기. 최대한 좌, 우 정치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돌을 던지는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참사 당시 SNS 상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찍어봤다.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혹은 이 자리의 바깥 거리에 있었던 피해자들 중 목소리를 내고 싶음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지금 이 황량한 골목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사진을 찍으며 상상해봤다.
·
2
·
[이태원 참사] 지난 2년의 시간, 당신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나는 평소에 서울시청 앞 광장을 자주 지나다닌다. 서점을 갈 때나 청계천을 걸을 때, 성당에 갈 때도 산책할 겸 탁 트여있는 광장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가곤 한다. 지난 시간, 그곳에 참사 합동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인터뷰를 이유로 참사 유가족 분들과 생존자 분들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분향소 앞을 지날 때면 언젠가 만났던 분들이 계신지, 그들이 나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실지언정 인사라도 드릴까하여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는 건 버릇이 됐었다.  그런데, 하나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그렇게나 많이 분향소 앞을 지나갔는데, 단 한 번도 분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영정이 마련되지 않은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영정 사진들이 놓여있는 분향소는 똑바로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 앞을 지날 때면 고개가 자동적으로 푹 숙여졌고 땅만 보면서 걸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몇 발자국만 가면 바로 분향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었다. 마주하기 힘들면 길을 돌아갔으면 될 것인데, 그건 또 싫었다.   영정 앞에 꽃 한 송이를 못 올리고 향로에 향을 한번 못 피웠지만. 나는 그 앞을 지나고 싶었다. 대신 그때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추모를 하곤 했다. 영정들 앞을 지날 땐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형식을 제대로 못 갖추었지만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직도 이런 나의 행동과 감정을 세분화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다. 그저 그 앞에선 자꾸 눈물이 나곤 했고,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우리는 잊지 않았다  지난 5월 초,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선 “드디어...” 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머릿속에선 유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참사 이후 약 1년 6개월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들은 지금 어떤 마음이실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참사가 발생한 날부터 내가 언론을 통해 보았거나 직, 간접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다시 떠올려봤다. 참사 당일의 그 충격적인 장면, 수많은 희생자들,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눈물, 울분과 분노, 고통, 기나긴 투쟁의 시간. 정부 기관과 정치권에서 벌어진 공방까지. 이 기억들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참사에 대한 감정을 한번쯤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사를 주제로 글을 하나 썼었다. 그리고 글벗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자리에 모인 날, 우리는 참사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누군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날의 기억이 나는 바람에 눈물이 나서 힘들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남 일 같지 않고 아직까지 가슴이 먹힌다고 했다. 누군가는 생각에 잠겨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년 반 가량 지난 시점이었지만, 모두가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참사가 벌어진 뒤 처음 뉴스를 보았던 그 순간을. 잠 못 들고 밤새 TV만 지켜본 그 순간을.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잠시 희미해져 있었을 뿐이지, 다들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지인의 일이 아니었을지라도. 우리가 가진 슬픔의 무게가 그때나 지금이나 동등하게 무거움을 확인했다.  우리 뿐 일까. 다른 이들은 어떨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동안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슬픔을 달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혹여 사는 것이 바빠서,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레 기억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도 어쩌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하여   나는 일 때문에 뉴스 기사를 많이 읽는다. 그리고 기사를 읽고 나서 항상 밑에 달린 댓글을 훑어본다. 이것을 보면 여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기도 하니까.  처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즈음, 기사마다 애도, 추모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매섭고 차가운 비난과 혐오가 섞인 악성 댓글의 비중만 더 높아져갔다.  ‘남의 나라 귀신놀이가 뭐가 좋다고..’ ‘놀다 죽었는데 왜’ (댓글들을 다들 많이 접해보았을 테니, 이 정도까지만 적겠다. 댓글을 굳이 그대로 다 옮겨 적고 싶지 않다.)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조롱과 희롱 섞인 말들은 읽는 나조차 괴롭게 했다. 청춘들이 핼로윈을 즐기러 간 것이 나쁜 것인가. 나도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핼로윈 파티를 즐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발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땐 괜찮았는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문제가 뭐였는지에 대해서 악플 쓰기 전에 생각은 해 보았을까.  유족을 향한 악성댓글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이 너무 많았다. 이들의 움직임을 정치적 행동이라 단정 지으며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족들이 왜 국회에 가고,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긴 시간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알까. 그들의 눈을 마주 보고 심정을 이해하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 일부가 너무 냉담하고 매정하다고 느낀다. 아픈 가슴에 자꾸 비수를 꽂는 것. ‘남의 일이고 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참사나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항상 유족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슬픔과 울분, 고통이 담긴 목소리. 외면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외쳐왔던 목소리들. 이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나와 당신이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소리와 우리가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내 일이 아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모두 같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부디 이들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들은 거두어주시면 좋겠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첫발 뗀 특조위에게 바란다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9월 23일 출범했다. 글을 쓰는 바로 오늘이다. ‘지각 출범’이라는 딱지 붙어 버린 늦고도 아주 늦은 출범이다. 지난 5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공포된 지 30일 째인 6월 20일까지 특조위 구성이 끝났어야 했는데, 넉 달이란 시간을 넘겼다. 이것도 유족의 간곡한 호소문이 전달된 후에야 진행되었다. 왜 항상 그들을 끝까지 내몰고 나서야 일이 추진되는 것일까.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갖추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특조위원들과 유가족들의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를 보니, 일부 유족들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눈물에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 담겨있었겠나.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특조위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라는 숙제를 잘 해내주기를 바란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원이 풀릴 수 있도록 하겠다.” 고 송기춘 위원장이 말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간이라는 것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년 가까이 됐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참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억은 잠시 희미해졌을 뿐이지 지워지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이 글을 쓰면서 유족들의 모습이 많이 생각났다. 고립되고 외면당하면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힘겨웠을지, 어떤 마음으로 버티어 왔을지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들에게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곁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또, 나는 처음에 자기 고백을 했는데, 글을 써 내려가면서 계속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조만간 ‘별들의 집’을 찾을 예정이다. 그곳에서 빚진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싶다.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