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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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말해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 식성부터 성격까지 자신을 꼭 빼닮았던 딸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는 아버지는 딸을 위해 투사가 되었다.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위로도 받는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정민 위원장의 이야기.

 

  

이정민 위원장
24.01.29 이태원참사 특별법 공포 촉구 유가족 시민 4대 종교 오체투지 후 이정민 위원장 및 유가족들이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특별법 공포를 촉구해달라 외치고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제공

 

-2년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활동을 돌아보면 늘 주축에 위원장님이 계셨어요.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여러 투쟁에서도 앞장서시고 언론 인터뷰도 맡아오셨죠. 이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냥 뉴스만 보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이걸 겪으면서 깊숙하게 블랙홀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겪고 알게 됐어요. 어느 순간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사안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되니까요. 차라리 모를 때가 나은데, 알고서 쳐다보면 너무 괴로운 거야.

-위원장님의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참사 당시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퇴직하고 2년째 되는 시점이었어요. 사업을 준비하다가 어느 정도 다 갖춰져서 23년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 거죠. 의미를 부여할 게 없는 거예요. 돈을 벌어서 뭐 할 거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게 돼요. 그게 부모거든요.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너무 허망하죠.

사람들이 돈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분노를 해요. 내가 내 아이 키우면서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알아? 감히 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내가 얼마를 받을 건데?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심리적인 상실감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환산해요? 그렇게 내 사업은 다 접고 포기 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던 사업이 있었어요. 그건 못 없애겠는 거예요. 캐릭터 사업을 했는데, 특허도 내놓고 많은 준비를 했단 말이에요. 그걸 없애는 순간 아이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체 대표를 제가 인수인계 받아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아이가 만들어 둔 상품도 엄청 많은데 한 번씩 찾아와주시는 분들에게 무료 나눔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위안과 위로를 삼아요.

미오니오
주영 씨의 브랜드 '미오니오' 캐릭터 이미지. 미오니오 인스타그램


-주영 씨가 아버지를 굉장히 든든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무뚝뚝해서 아이한테 위로의 말이나 따뜻한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본인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볼 때마다 나랑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너무 많이 들었죠. 식성부터 생각하는 거나 모든 것들이요. 그래서 많이 다퉜어요. 성향이 같으면 나의 단점이 보이거든요.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죠.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 자리를 몇 번 가졌어요. 보통의 아빠들이 그렇게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작에 친구들 불러서 같이 밥도 먹고 이름도 알고 뭐 이렇게 하면 참 좋았겠다 싶어서 후회가 되더라고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요.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 역할을 했대요. 친구들이 힘들 때 인생 상담도 해주고, 들어주고. 아이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부분이 참 많아요. 내가 좀 더 세심하고 배려 있게 관찰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자녀의 꿈을 마음껏 지지하지 못해 미안했던 아버지

민트초코
주영 씨의 브랜드 '미오니오'의 민트 초코 캐릭터 인형. 주영 씨의 반려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미오니오 인스타그램


아이가 직장 생활 접고 사업 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 물정도 모르고 무슨 사업을 한다고 그러냐 했어요. 너 굉장히 후회할 거다. 책임 질 것이 많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여러 번 만류 했죠. 설득이 안 될 것은 알지만 ‘너 내가 예전에 힘들다 이야기했지?’ 이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한 밑밥이었던 거죠. 그렇게 실패를 단정 짓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한테 말한 게 있으니 힘들다고 이야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계속 무시했어요. 누구 한 명이라도 좀 져주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정리 하면서 보니까 힘들어했던 흔적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아빠가 돼가지고 딸하고 신경전만 펼치고.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인들한테 자녀들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얘기해요. 자식을 보내고 그런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고 한심한 건가 깨닫는다. 너 힘들지? 너 힘들 거야. 그래도 이제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런 위로의 말을 한마디라도 해줄 수 있으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한테는 엄청나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참사 이후 마음이 지치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실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지친 마음을 다루고 계세요?

 처음에 심리상담센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심리 상담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저한테 ‘지금 어떠세요?’ 묻는 거예요. ‘괜찮아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게 끝이었어요. 그 뒤부터는 전화를 안 받았어요.

심리 상담을 받는 다른 가족 분들도 있어요. 아직도 잠을 못 이루고 수면제 같은 거 처방받는 분도 있고 사람마다 달라요. 트라우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원봉사 상담사를 만나봤더니 참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분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한 1시간을 같이 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라우마는 어느 순간 ‘탁’ 하고 왔다가 사라져요. 한 번씩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화도 냈다가 막 울기도 하고. 별의별 희한한 감정이 밀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요, 이런 흐름이 주기적으로 오는 게 트라우마의 특징인데, 지금 아무 이상 없다니까 이상 없는 줄 알면 어떻게 심리 상담을 하겠어요.

결국은 공감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공감하고 있구나 느끼면 그때부터 치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떤 심리 상담사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가족들끼리 앉아서 이야기할 때 훨씬 나은 치유가 된다고 느껴요. 유가족과 많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 속에서 공감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보면 시민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이 받으시는 압박이나 부담이 굉장히 큰 것 같더라구요. 위원장님도 대표자로서 느끼실 무게가 결코 가볍진 않으실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가족들하고 다른 부분이 있어요. 앞장서서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가족보다는 훨씬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어요. 제가 단단하지 않으면 못 하거든요. 못 끌고 나가거든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스스로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습관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인터넷에 위원장님을 검색해보니까 직업에 사회활동가라고 뜬 걸 봤어요. 순간 그걸 보고 위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요? (웃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집회에서 발언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유가족이 아니야, 저 사람은 활동가야, 그런데 유가족처럼 행세하고 있어.’ 이런 댓글들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어처구니 없어가지고. 하하. 도대체 뭘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막 웃었거든요.

저는 ‘깜’이 안 되죠. (웃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 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일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대책위 상황실이나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워요. 저는 제 일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그 분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하잖아요.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인정을 받아야 될 분들이에요.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거든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시민대회
24.01.20 이태원참사 특별법 공포 촉구 대회. 유족들의 투쟁에는 늘 많은 사회활동가들이 함께했다.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제공


예전에 일본의 아카시시 불꽃놀이 압사사고 유가족들이 우리와 연대하기 위해서 찾아왔었어요. 그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하나가 시민단체였어요. 일본은 그게 없대요.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할 수밖에 없대요. 누군가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국 오니까 정말 많은 단체들이 도와주고 지원하는 거 보고 너무 부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시민단체가 참 잘 작동되는 것 같아요. 시너지를 많이 얻고 또 그렇게 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저런 시민운동가, 활동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요. 스스로에게 이익은 되지 않아도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자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떤 끈끈한 무언가. 이웃에 대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거요. 오지랖이 넓은 민족? (웃음) 그런 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겠다고 결심하시기까지도 큰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다들 나하고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불안하고 노출되는 게 싫으니까. 뒤에서 서포트하는 역할만 하겠다 해서 (처음에는) 부대표를 맡았어요. 처음엔 거절을 했었어요. 왜냐면 제 어머니가 이 일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계시거든요.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알게 되면 안 된다. 나는 초상을 두 번 치러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극구 사양을 했었는데 그땐 나서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죠.

가족들끼리도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애 엄마나 아들이 뭘 망설이냐 무조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게 더 우습지 않느냐고 해서 그렇게 결심한 거죠. 오히려 야단을 맞았어요. 왜 주저 하냐고.

한 번은 어쩌다가 어머니가 뉴스를 본 거예요. ‘저기 나오는 사람이 엄청 많이 닮았네.’ 하고 말했는데. 누나가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왜 뉴스에 나오겠어? 뉴스에 나올 일이 없는데.’ 했었죠. (웃음)

1기 운영진 임기가 끝나고 2기에 들어서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뽑는데, 이제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등 떠밀려가고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는데 사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생전 없던 병이 생기더라고요. 다리부터 시작해서 붉은 반점이 생겨서 올라왔어요. 병원에 가봤더니 자가 면역에 이상이 생겼대요. 외부로 드러나는 것들은 괜찮은데 내부로 나타나면 그때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의사가 충분히 쉬면 가라앉을 거라고 해서 작년 10월 1주기 행사를 끝내놓고 쉬었어요. 쉬니까 싹 사라지더라고요.

1주기 땐 여기저기 불려 다녀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언론이나 각종 행사 등 정말 숨 쉴 틈이 없었어요. 그때 하루에 두 건, 세 건씩 인터뷰 하러 다니니까. 저는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 한 번도 없는 굉장히 건강한 체질이라고 생각 했는데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특별법 통과 이후에는 임기도 끝났고, 이제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해야 되겠다 했더니 주위에서 질타를 하는 거예요. 특조위 출발하는데 지금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떡하냐 무조건 책임을 지셔라. 힘들어도 지금까지 해왔으면 끝장을 봐야 될 거 아니냐. 지금 포기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등 떠밀더니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고 이러니까 이제 안 해도 된다. 고민했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 했느냐, 내가 왜 힘든 고행을 겪어가면서까지 이걸 하려고 했던가.


이정민 위원장 1인시위
23.09.18 법원 앞에서 박희영 용산구청장 엄벌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이정민 위원장.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제공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다른 거 다 제쳐놓고 그냥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을 한 거예요. 내가 유가협 대표로서 일을 한 게 아니다 거기에 의미 부여 해선 안 된다. 나는 어떤 대표나 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로서 부모로서 내가 이 역할을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요.

앞으로도 내 아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우리 아이가 불명예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 그만둬도 되겠다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족들은 안 그랬어요. 투표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반대표를 찍었대요. 아군이 아니고 적이구나 싶었죠. (웃음)

 

-역사를 보면 대형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 대책이 마련되고 관련 법안들이 만들어져요. 항상 유족들의 목소리와 노력이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에 이러저러한 법들은 다 피해자들이 만들어놓은 법들이에요. 안전과 관련된 법들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죠. 왜 대한민국의 모든 참사 관련 법안들은 피해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몸으로 던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게 참 안타깝고 답답하죠.


분향소에 특별법
24.01.19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 유가족들은 특별법을 분향소 영정 앞에 올렸다.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제공


-지난 2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해오셨어요. 이태원 참사와 유가족 분들의 여러 활동들로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안전해졌다고 느끼시나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못 느낄 수 있지만 저는 확실히 느껴요. 원래 강서 쪽 지하철이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막 끼어서 탄다. 숨이 막힐 정도로 꾸역꾸역 탔었는데, 참사 이후 인원이 다 찬 것 같으면 안 타는 거예요. 그 변화가 있었다는 걸 제가 듣고 그래도 사람들 인식이 심어져 있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최근 열린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잖아요. 경찰 병력이 2500명 이상이 투입이 됐고, 주최 측 인력까지 합하면 인파 관리 인력이 만 명 정도가 됐어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인식이 잠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참사 이후 주는 영향은 크다고 생각을 해요. 일반 사람들은 못 느끼겠죠. 당연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하나하나 바뀌어갈 거라고 믿어요.

 

-말씀처럼 하나하나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위원장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아직 남은 과제들이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신다면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 드릴게요.

시민들께 한 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왜곡된 정보와 싸워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글을 보고 판단해요. 왜곡된 정보만 있으면 그것만 보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같이 목소리를 내주시는 분들이 잘못된 정보와 싸워주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파할 수 있게 노력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어요. 진실한 부분과 거짓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거든요. 진실의 목소리를 많이 내 주십사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
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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