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⓷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유족들은 때때로 무인도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공허한 외침으로 느껴질 때, 그들을 일으키고 힘을 북돋은 것은 시민들의 연대와 서로를 향한 공감이었다. 2년 동안 곁에서 든든히 함께해준 사람들 덕분에 유족들은 지치지 않고 더욱 강해졌다. 유가족들이 느낀 뜨거운 연대의 순간들. |
-지난 2년 동안 유족들이 거리에 나가있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곳곳에서 투쟁하셨는데 그 시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
활동하면서 느낀 건데 몸을 많이 던질수록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더라고요. 더 격렬하게 몸을 던져야만 그만큼 관심을 가져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심이 적어지고. 그런 마음에 오체투지, 3보 1배, 단식, 삭발 등 많은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울광장으로 분향소를 이전했을 때예요. 참사 직후 녹사평에 분향소가 설치됐는데, 그때는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집에 있으면 못 견디니까 슬픈 마음만 갖고 거기서 지내다시피 했죠. 분향소 옆에서는 보수단체가 마이크 들고 우리를 괴롭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저 사람들은 우리 애들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지? 대한민국의 사회에 대해 점점 눈을 떠가는 시점이었죠.
49제 이후 녹사평 분향소에 시민들 발걸음이 점점 떨어지는 걸 느끼게 됐어요.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많이 알리고 이야기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 때 분향소 이전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참사 100일 추모제를 하는 날 녹사평에서 행진을 하면서 분향소도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죠. 다들 광화문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거기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했어요. 여기서도 이렇게 시달리는데 사람 더 많은 광화문 가서 시달릴 생각하니 엄청 괴로운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들어가지고 후보지를 찾으러 나갔어요. 어디가 좋을까 하다가 세종문화회관 그 뒤편에 공간이 있더라고요. 거기가 도로에서 안으로 더 들어가 있어서 약간 외지면서도 너무 좋은 거야.
-외진 곳이 오히려 좋으셨군요.
공격당할까봐요. 그때는 사람들한테 알리는 것 보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너무 상처를 많이 받으니까 못 견디겠다는 마음이 많이 들어가지고. 게다가 그 앞에는 집회 신고를 낼 수 없대서 더 좋았죠. (웃음) 그렇게 서울시에 협조 요청을 했는데 펄쩍 뛰더라고요.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다가 새 공간을 제안했어요. 녹사평역 지하 4층. 원하면 오세훈 시장이 와서 브리핑도 해 주겠다고요. 그 때가 추모제 열리기 며칠 전이었거든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그래도 제가 혼자 한 번 가봤어요. 지하라 내려가는 시간도 엄청 걸려요. 그런 건 뭐 다 좋았어요. 영정 걸어둘 수 있는 공간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쭉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지나갔어요. 순간 이내 그 공간이 막 흔들리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났죠. 아이들 영정을 걸어둬야 하는데 이렇게 흔들리는 곳을 제안 할 수 있느냐. 그 이후부터 서울시하고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이후 우리가 분향소로 정해둔 (세종문화회관 옆) 공간에 화분 같은 걸 엄청 갖다 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분향소 설치를 못하게요. 광화문에도 100일 추모제를 하려고 돈 많이 들여서 무대를 만들어놨는데 거기에 경찰 병력과 차벽을 엄청나게 동원 시켜놔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울시에 괜히 이야기했구나 후회가 물밀듯이 왔죠. 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는 뒤가 없었으니까 분향소 설치를 못하면 그냥 거기서 죽자. 뒤가 절벽이라도 일단 가자고 결정 했어요.
그래도 막연하게 있을 순 없으니까 후보지를 한 세 군데 정해서 상황을 봐가면서 들어갈 수 있는 후보지에 들어가자고 했고, 그 계획은 딱 다섯 사람만 알고 있었어요. 말이 새어 나가면 경찰이든 또 와서 막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건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
100일 추모 행사 당일, 영정 들고 녹사평에서 서울역까지 와서 잠깐 쉬는데 시민대책회의에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시청에 경찰 인력이 적은 거 같다. 잘하면 서울시청 광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결정을 해달라고 연락이 온 거죠. 우리가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할 처지도 아니니 가능성만 있으면 합시다, 했죠. 우리가 광장에 들어가는 것은 다른 유족이나 행진하는 시민들 아무도 생각을 못했고요. 경찰들도 광화문에 밀집해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엄청 불안하더라고요.
그러다 서울시청에 도착한 순간, 선두 차량에서 마이크에 대고 우리 대책회의 이미현 실장님이 ‘여기에 분향소를 설치합니다.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외쳤어요. 다들 얼떨떨해 했죠. 이게 무슨 소리야? 막 우왕좌왕했어요. 그러다가 몇 명이 트럭에서 천막을 꺼내고 ‘지금 우리가 분향소를 설치할 겁니다. 시민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소리 치니까 그제서야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경찰들도 깜짝 놀라가지고 달려와서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시민들이 전부 다 밀려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대치가 되고 몸싸움이 일었어요. 행진에 함께한 많은 시민들이 달라붙고, 그렇게 천막을 내리고 한쪽에 겨우 설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와중에 유가족과 시민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서 경찰들이 못 들어오게 했죠.
-조마조마하면서 그 장면을 봤던 기억이 나요. 영상이랑 사진이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해졌거든요.
시청에서도 철거 인력을 파견했어요. 그런 와중에서 시민들께서 아무도 가지 않고 그걸 지켜주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데 우리 유가족 중 한 분이 경찰들을 향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밀집된 상황에서 아이들을 잃었는데, 우리 아이 또래인 너희들도 이런 걸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좀 비켜줬으면 좋겠다.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경찰 몇 명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경찰 한 명도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이건 안 된다. 이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유가족들의 눈을 보고 판단한 거예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 물러나더라고요. 이후 분향소에 아이들 영정을 놓으니 그 이후에는 경찰들도 손을 못 댔죠.
그 고비를 넘기면서 시민들께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졌어요. 유가족들이 녹사평 분향소에서 굉장히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그때 완전히 에너지를 얻었죠. 왜냐하면 삭발하거나 오체투지 하거나 3보 1배는 그냥 제가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시민들이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단 말이에요. 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마치 우리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무인도에서 아무리 외치고 소리지른다 한들 뭔 소용이 있겠어요. 막 살려달라고 아우성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 편이 이렇게 많구나 깨닫는 순간 사고가 완전히 달라져버리는 거죠. 그 전까지는 정말 연약하고 누가 툭 던지면 상처 받아서 구석가서 울고 막 이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부터 이제 싸워도 충분히 견딜 수 있겠구나 하면서 버티고 훨씬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 정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과 에너지로 계속 싸워나갈 것 같아요.
-유가족 분들끼리 더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되었을 것 같아요.
많이 끈끈해졌죠. 그때 유가족들이 시민들과의 연대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 끈끈해지게 됐죠. 사실 우리들의 공통점은 유가족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거든요. 어떻게 보면 모래알 같기도 하죠. 이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제 오랜 친구들이 다 떠나갔어요. 그들도 이 참사를 이해 못해요. 그런데 서로에 대한 친분도, 정보도 없는 유가족들은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깊이 오래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있다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서로 서로 포기를 해버리거나 돌아서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제가 사진으로만 본 이 (희생자) 아이들이 왜 엄청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친숙할까 싶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 속 아이들을 보면 부모들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거예요. (웃음) 이게 참 희한하더라고. 그래서 친분이 뭐가 필요해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필요가 뭐 있어? 아무 필요 없어.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이런 인연으로 같이 마주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지. 다른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아무리 심리치료 심리 상담을 해도 치유가 안 되는데, 유가족이 서로 대화하고 이야기하면 치유가 돼요.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거든요. 세월호나 다른 참사 유가족들과 만나도 똑같아요. 그 분들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고 공감하기 때문에 만났을 때 오래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요. 지금 세월호, 오송 참사, 대구 지하철,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참사 등 대한민국의 각 참사 피해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분들도 많은 활동을 하시고 행사 때마다 같이 연대해서 목소리도 내고 있는데 그러면서 더욱 크게 느껴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요.
-10월 5일 남산 둘레길 걷기 행사에서 떠나기 전에 호주에 계신 유가족 분하고 현장에 모인 분들이 영상통화를 하시더라구요. 그게 참 인상 깊었어요.
이태원 참사의 경우 외국인 희생자가 26명이나 돼요. 그런데 외국인 유족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기 어려워요. 정부에서도 알려주는 것이 없고요.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정보를 주고 뭔가 하려고 노력하죠.
1주기 행사 때 이란에 있는 유가족들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했었는데 대사관에서 이유 없이 비자를 안 내줘서 못 온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너무 안타까워서 1주기 행사 때 외국인 유가족 분들이랑 영상 통화를 했었어요. 줌을 열어서 같이 영상으로 이야기했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올해 2주기에도 할 예정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지난 5일에도 우리가 시민들이랑 둘레길 걷기 행사를 한다고 하니 호주에 있는 유족분들이 인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었어요. 환경이나 국적이 다 다르지만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셨을 것 같아요. 한국에는 유가족들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분들은 자기 나라에서 홀로 계셔야 하니까요.
그렇죠. 여기 와서 내 동지를 만난 느낌을 가지니까. 우리 분향소에 있을 때 해외 유가족들도 많이 오셨었어요. 한 가족은 우리가 행사할 때 입는 보라 조끼, 보라 잠바를 나눠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같이 입고 집회에 나가고, 유가족들과 만나서 허그하고 여러 가지 함께 하고 돌아갔는데 가서도 메일을 보내와요.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느끼는 공감과 연대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이야기했던 시민들과 함께하는 둘레길 걷기 행사가 작년에 이어 지난 10월 5일에 2주기를 맞아 또 다시 열렸어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셨고, 밝고 따뜻한 분위기여서 참 좋더라구요.
작년하고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작년 10월에는 맑은 날에 밖에서 걷는 게 힘들었어요. 그 때는 많이 힘들 때라 왜 여기서 이걸 하고 있지 왜 걷고 있지 별의 별 생각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다르더라고요. 함께하는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어요. 저도 조금 놀랐는데 유가족들도 활발하게 웃고 시민들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고요. 그래서 아마 시민들도 편하지 않았을까. 같이 어울리고 함께하는 것이 좋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동안에 유가족들도 이전보다는 편안해진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올 해 2주기 행사를 많이 준비하셨어요.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행사가 있으실까요?
우선 오늘부터 (9일) 매주 수요일에 별들의 집에서 함께 보라 팔찌와 리본을 만드는 행사가 열려요. 그리고 12일, 19일 주말에는 우리가 2주기 추모제와 10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포스터를 붙이면서 서울 둘레길을 시민들과 함께 걷습니다. 함께 연대해 줬던 시민단체나 또는 청년단체, 정당 분들을 초청을 해서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연대와 공감의 시간도 가지고요. 저희가 그동안 받기만 해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가지고요. 24일에는 2주기 159분 콘서트, 26일에는 시청 광장 시민 추모대회를 열고, 29일에는 국회에서 추모제를 엽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 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가 있어요. 청년들과의 나눔 행사인데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힘든 청년들이 이태원에서 압사를 당하고, 전세 사기로 돈 잃고..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위해서 해주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봐요.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을 잃었지만 모든 유가족들이 부모의 마음으로 청년들을 위로해 주고 같이 공감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대역 근처에 카페를 하나 빌렸어요. 음료랑 유가족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 나눔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청년들하고 나누고 연대하고 공감하면서 서로서로 위로받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올 해 10월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처음 기획한 행사인데 반응이 괜찮으면 해마다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에서 ‘별들의 집’으로 오신 게 6월 16일이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가 애도의 공간이었다면, 별들의 집은 어떤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기억과 소통의 공간이에요. 시민들과도 소통하고 유가족끼리도 소통하고요. 우리가 가족끼리 여기서 월에 한 번씩 간담회를 하거든요. 다 모여서 소통도 하고. 애초에 참사 이후 우리가 정부에 요청했던 게 이거였어요. 기억의 공간과 소통의 공간을 좀 마련해달라. 만약에 이 공간이 진작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분향소를 안 만들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도 필요했었다는 거죠.
-이 곳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은 11월 2일이 지나면 옮겨야 한다고 들었어요.
이 건물이 재개발 예정이라 무조건 이전을 해야 해요. 이곳이 몇 개월 밖에 못 쓰는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온 이유가 있어요. 특별법이 통과됐으니 야외 분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고, 이제 우리는 특조위 활동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실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아마 이번 주 토요일에 가족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결정을 할 거예요. 어디로 옮기는 게 좋을지.
-평소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다가 참사 관련된 키워드를 보면 맞다, 이태원 참사가 있었지,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분들도 많으시고요. 그런 분들이 어떻게 유가족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연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어요. 오늘 행사처럼 이렇게 와서 같이 팔찌 만들기를 한다든지 같이 한다던지, 기억 공간에 와서 아이들 사진을 한번 보고 또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하나 남기고 간다던지 이런 게 다 연대의 마음이고 하나하나 굉장히 소중해요.
그것까지도 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뉴스 기사에 댓글이라도 하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남겨주시는 것도 굉장히 커요. 제가 녹사평 분향소에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에만 빠져있었어요. 그 때 시민 분들이 와서 같이 애도하면서 저의 손을 잡고 ‘함께하겠습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함께하겠다는 이야기가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저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그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
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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