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애도의 마음이 집결하는 것을 느낀다. 매일 성대에 호흡이 부딪히며 피가 맺힐 정도로 소리치는 이들이 존재하는 데도 나에게는 10월이 되어서야, 혹은 4월이 되어서야 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유가족, 생존자, 연대하는 이들, 시민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눌러 담는다. 기억을 다시 한번 갱신하고 기억에 기억을 더하며 다짐한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 태어나 살아갔으며 자신이 그날 죽음을 맞이할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죽음에는 국가 / 사회 / 안전 체계의 실패가 있고,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끝나지 않은 투쟁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리를 나가거나, 일하면서, 친구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 속에는 애도가 등장하지 않고, 참사에 깊게 혹은 오래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다. 참사의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왜 울부짖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가? 많은 이들이 애도를 보내고 공명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변화를 만드는 시작인데 말이다.
나는 어떤 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문은 애도로 향하는 문이다. 한 시민에게 죽음에 대한 슬픔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애도를 보내야 할까. 내가 그럴 자격이 될까와 같은 고민을 하며. 그들의 망설임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필요하다. 이들을 하나둘 초대하며, 그들이 언제든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망각에 저항하며 함께 애도해야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애도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관련된 책을 참고했다.
1. 죽은 이를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기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문학동네)
이 소설 작품에는 시즈토라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한다. 전국을 떠돌며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어떤 사람인지, 죽음이 어떤 가치를 따지고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가 죽은 자리에 찾아가고, 나름의 손동작으로 기도하며 제례를 행한다. 다만 제례를 행하기 전에 주변에 이와 같은 사실을 묻는다.
“00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00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았든 그에게 사랑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시즈토는 계속 그 애도를 실행한다. ‘명복’과 ‘애도’를 구분하는 그의 말에 힌트가 있다. 명복을 비는 것은 가족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것이지만, 애도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고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때 하는 추상적인 행위라고 말이다.
즉 애도는 죽음과 관계없는 자가 그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애도가 인간과 사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핵심적인 주제라는 걸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며 가족과 사회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어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 죽음들에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나에게 되돌려보자. 나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는가. 어떤 죽음은 애도하고, 어떤 죽음은 애도하지 않는가. 진정 기억해야 할 죽음이 나의 죽음뿐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유한하고 허망한 일인지 같은 질문들이다.
시즈토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할까. 그가 죽음에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으려는 것, 죽은 사람에 대해 기억하려는 것, 그리고 애도가 죽은 사람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만약 그에 동의한다면 참사 생존자들을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는 행동이 애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유가족의 사회적 운동에 관한 관심 (「궤도 이탈」, 마쓰모토 하지무, 글항아리)
2005년 4월 25일 일본의 지하철 노선인 후쿠치야마선 운행 중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07명, 부상자 수는 562명이었다. 책은 이 사건에서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인물을 조명한 논픽션이다. 그는 십여 년간 후쿠치야마 선을 운행하는 거대 철도회사 JR 서일본을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섰다. 끈질긴 노력으로 회사의 경직된 조직문화, 안전시스템 문제, 사건을 망각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을 끌어내고 조직의 변화와 안전시스템 개선을 차근차근 이뤄갔다. 그가 사건 초기 했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사고를 교훈 삼아 JR은 자기네가 일으킨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유가족,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모든 유가족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거대한 슬픔을 견디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다만 어떤 유가족은 슬픔과 비탄에만 잠기는 것이 아니라 진상 규명, 사회 시스템과 안전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들이 약하고 비참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사노를 통해 그 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고를 직시하고 설명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애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말하고 몸을 움직여 표현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협상과 설득을 통해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널리 호소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대했다. 다른 참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과 시민과 정부로부터 도움을 구했다. 절박하게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관심과 지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외부에 있는 나 혹은 우리, 시민의 힘이 필요했다.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4.16 세월호참사, 10.29 이태원참사 등 많은 유가족이 연대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치고 행동하여 그 연대의 힘을 유가족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밖으로 뻗어 나가게 한다. 그 힘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애도의 한 방법일 것이다.
3. 사건을 봉인하지 않고 기억을 나눠 갖기 (<기억 서사>, 오카 마리, 교유서가)
참사의 희생자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 그것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것은 참사를 겪은 유가족이나 생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겪은 일을 완벽히 재현, 표상하려고 할수록 그것은 불완전한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나눠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건을 이해하거나 체험하기는 더 어렵고 고통을 대신 느낄 수도 없는 사건의 외부에 있는 자들과도 말이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 그들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아랍문학과 페미니즘 이론 연구자인 오카 마리는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위안부, 각국의 재난을 다룬 서사들을 점검한다. 어떤 기억을 나눠 가지기 위해 쉽게 동원되는 것이 서사이다. 서사는 이야기이며 사건에 관한 일종의 요약된 이야기이다. 서사는 그것을 완결짓기 위해 필연적으로 인물과 공간을 빌려오고 그것에 관한 결론, 이해 가능한 설명을 수반한다. 그러나 오카 마리는 그러한 서사와 종결이 기억의 봉인이라 단언한다.
“서사는 끝나고 독자는 이해하고 감동한다. 거기에는 읽는 사람을 불안에 빠뜨리거나 위협하는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불안정한 거처를 찾고 자신이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릴 것이다. 그 기억은 봉인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 동굴을 영원히 막아버린 봉인.”
사건의 잉여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듯 ‘사건은 그 폭력의 기억이 바래져 언어화될 수 있고 기억 속에 깃들여진 것만 경험으로서 공유’된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도 이 참사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들은 언어화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고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 잉여에 사건의 본질이 담겨있을 수 있다. 참사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미 이해가 끝난 사건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참사에 대한 수많은 서사가 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스스로 내린 참사에 대한 결론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서사로도 참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이해가 아니라 기억의 일부분을 나눠 갖겠다는 마음이 애도일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장에 나가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2주기의 추모 현장, 생존자의 이야기, 유가족의 이야기, 시민들의 애도가 나누어지는 어떤 장소. 그곳에는 언어화되지 않는 슬픔과 분노, 희망과 용기, 저항과 위로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기억을 나눠 받으며 또 다른 기억을 생성해 나갈 것이다.
나 또한 이 방법들이 모두 옳다고만 믿는 것은 아니며 모두에게 각자의 애도 방식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중요한 건 그 무수한 애도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문을 열어 젖히고 애도의 세계로 발을 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능한 어떤 애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더불어 읽으면 좋을 책들
(북펀드 진행 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4 북펀드 바로가기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3 http://aladin.kr/p/iQqEe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김초롱, 아몬드, 2023 http://aladin.kr/p/i4Bnc
코멘트
41. 죽은 이를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기, 2. 유가족의 사회적 운동에 관한 관심, 3. 사건을 봉인하지 않고 기억을 나눠 갖기. 애도하기 위한 여러 방법, 꼭 기억하겠습니다.
책 추천 감사합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모두의 목소리, 모두의 감정. 우리에게 다 밑거름이 될 것이다, 확신합니다.
애도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기. 좋은 약속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언급해주신 책들이 모두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읽는 내내 생각했네요. 어쩌면 참사가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고, 그래서 자연스레 과거의 무언가에서 참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책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참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2주기에도 그 이후에도 모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