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참사의 발명
현재 통용되는 ‘사회적 참사’라는 단어는 한국사회에 자리잡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약칭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은 2017년에 제정되었는데 사회적 참사, 사회적 재난참사와 같은 용어는 이 법의 제정 전후로 한국사회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정리했던 것처럼,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는 사회적 참사라는 언어를 발명했다. 그 이전까지 재난이나 참사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사건이나 사고라고 명명하는 범주에 속했다면,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논쟁을 거치면서 ‘참사’는 보통의 사건도 아니고 교통‘사고’도 아닌 사건/사고 ‘그 이상의 사건/사고’를 지칭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에 따른 변화 중 하나는 재난참사를 사고-보상 프레임에 입각해 국가가 보상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에게 재난참사의 법적, 정치적, 경제적 책임을 추궁하는 관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참사의 명명을 둘러싼 정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아리셀 참사와 같이 근래에 들어 사회적 참사라고 규정되는 사례들은 단순히 처음부터 참사였던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이 그것들에 사고나 사건이 아닌 참사라는 이름을 붙여 세월호 참사 이후 정착된 책임 추궁의 관행을 소환한 것이다. 요컨대 참사는 어떤 사건/사고를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로 만들어내는 언어인 것이다. 그렇기에 가령 정부는 10.29 이태원 참사가 아닌 ‘이태원 사고’라고 불러 그 의미를 격하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참사라는 개념이 참사와 사고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내가 10.29 이태원 참사를 만나고 연구하면서 느낀 건, ‘사회적 참사’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세월호 참사라는 구체적인 경험이 아주 많이 묻어있다는 점, 그래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의 이해에 근거해 이태원 참사를 해석하려 하면 뭔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사이의 유사성이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나 단절에 관해서는 잘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고작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력과 유산이 우리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년이라는 단기간에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운동이 이뤄낸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성취를 이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국 각지에서 노란리본을 제작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리는 운동이 일어났고,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응답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세월호 이후 재난참사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전까지 사회적 참사라고 인지되지 않던 많은 재난참사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을 다시 호명했다.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멀리 나아가지 못했고 기억공간 조성은 정부가 방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월호 참사가 촉발한 사회운동은 넓고 너른 품으로 그 세계를 확장해 왔다. 가장 먼저 길을 내어 멀리 나아간 세월호 참사는 다른 사회적 참사에 분명 귀중한 전범일 수밖에 없다.
풍기문란 통제의 오랜 역사
그러나 동시에 익숙한 관념을 깨뜨리는 데서 사람들의 생각이 발전한다.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길만으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에 온전히 도달하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가 가진 차이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놀다가 죽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놀다가 죽었다고 말했을까? 여기에 대해 ‘놀이’ 일체를 억압하는 사회라고 단정짓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핼러윈 축제 직전에 이태원에서 치러지는 지구촌 축제에는 안전 통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벚꽃 축제는 압사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통제가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도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놀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다가 죽었다”는 ‘놀이’ 일체가 아니라, 어떤 놀이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이태원 참사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람들이 “놀다가 죽었다”고 말한 것들을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곳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가서’ 놀다가 죽었다.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이태원은 여전히 ‘위험한 곳’으로 상상된다. 이때의 위험은 이를테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이나 그러한 사고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문란함’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 한 언론은 2020년 5월 이태원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집단감염사태를 두고 ‘이태원 게이클럽발 감염’이라고 헤드라인을 달아서 성소수자 혐오와 코로나19를 연결시켰다. “놀다가 죽었다”라는 말에 담긴 ‘위험’의 감각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 ‘위험’에 대한 감각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시기의 유산이며 지금도 <경범죄처벌법>과 같은 법제도, 그리고 특정 지역에 대한 경찰행정의 관행으로 남아있는 ‘풍기문란 통제’에 닿게 된다. 당대 지배권력의 시선은 선량한 풍속과 나쁜 풍속을 나누어, 미풍양속을 해치고 위협하는 문란한 풍속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량한 풍속과 문란한 풍속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을 리 없다. 풍기문란 통제는 무척 자의적이고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해 왔다. 한때는 봄날 꽃놀이나 크리스마스 축제도 ‘풍기문란’의 소지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잘 남아 있는 건 1970년대 유신 정권 시기 ‘장발 단속’이다. 유신 정권은 장발을 문란하고 불건전한 ‘미국 문화’라고 규정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건전한 문화와 풍속을 장려했다. 그 구분은 물론 자의적인 것이었다.
핼러윈 문화는 1980년대 중반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대중적으로 퍼져 있던 하위문화이자 청년문화였던 ‘디스코 문화’의 영향 속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언론들은 핼러윈 시기에 ‘디스코텍’에서 핼러윈 파티를 열린다는 홍보성 기사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디스코 열풍은 문란하고 위험한 청년문화의 하나였고, 이태원은 그러한 문화의 산실 역할을 했으니 처음부터 이태원은 핼러윈 문화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이후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이태원의 클럽이나 카페에서 핼러윈 파티가 매년 마다 열렸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 실내 공간에서 벌어지는 파티이지, 지역 일대 전체가 장이 되는 축제는 아니었다. 여러 기록들을 확인해 보면, 2011년에 이태원 지역 상인들이 거리에 무대를 설치하고 ‘이태원 핼러윈 축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태원 핼러윈은 그렇게 축제가 되어 매년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지역의 행정권력인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는 관변축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된 이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이것은 앞으로 이태원 참사 특조위가 행정 문서들을 발굴해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한정된 자료들로는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설은 ‘풍기문란 통제’의 시선에서 이태원 일대를 바라보고 통제해왔던 행정적 관행의 연장선에서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마약이나 각종 경범죄 단속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것이다. 2022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핼러윈 축제는 2011년부터 시작되지만 용산구청은 이에 대한 안전통제를 의제화한 적이 없으며, 용산경찰서는 2017년부터 안전통제의 필요성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 시행됐을지, 그 안전이 생명의 안전인지 풍속의 안전인지는 더 분석해보아야 한다. 경찰이 아주 최소한의 안전통제(이것도 매우 불충분하다)를 했더라도, 아마 2020년 코로나19 집단감염 이후 다시 한번 풍속통제의 관행이 강화되면서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용산구의 방역대책은 사실상 특정 지역의 풍기문란함에 대한 단속의 관행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50년대부터 미군기지 옆 ‘기지촌’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이태원은 풍기문란한 문화의 온상이었다. 1970년대 미군철수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문란한 몸과 마음을, 그리고 기지촌을 ‘정화’하고자 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수시로 성병 단속의 대상이 되어 모욕을 겪었고, 치사량의 페니실린을 맞아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지키고자 한 것은 미군 남성들의 안전이었고, 기지촌이라는 게토 안에 여성들을 가두어 문란함으로부터 한국사회를 보호하고자 했다. 오늘날 용산에게 미군기지가 철수한 시대에도 이태원을 바라보는 행정적 관행과, 한국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모른다
짧게는 세월호 참사로부터, 멀게는 한국근현대사의 국가폭력으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묻고 진실을 규명해 온 주체는 유가족이었다. 나는 이것을 ‘애도의 가족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각종 산재사망사고와 재난사고에 대해 그것을 ‘사회적 참사’라고 부르며 국가와 자본의 부정의에 대항하는 운동의 주요행위자는 유가족이다.
유가족이 그러한 운동의 행위자이자 주체가 된 것은, 특히 국가폭력의 역사에서 지배권력은 ‘빨갱이’를 가족의 문제로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빨갱이의 가족도 빨갱이라는 연좌제의 논리는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학살로 자식을 잃고 가족이 몰살당한 살아남은 유가족들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에 더해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으로부터 명예를 회복해야만 했다. 그랬기에 유가족들은 처음에 ‘양민’학살을 문제삼았다. 국가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민’은 여전히 어떤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남겨놓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양민’은 ‘민간인’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활동을 하든 국가가 민간인에게 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초기에 유가족들은 자식들을 무고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그러내려 애썼다. 그것은 분명 “놀다가 죽었다”라는 인식에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은 이후 수정되었는데, 가령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는 한국사회가 ‘문란하다’고 인식해 온 성소수자들도 함께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범시민이라고 해서 꼭 그 죽음이 더 억울한 것은 아니다. 저항해야 할 것은 “놀다가 죽었다”는 인식과 거기에 깃든 풍기문란 통제의 오랜 역사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는데 '어린 학생들'의 죽음이라는 측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은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가 가진 특성은 ‘피해자’의 범주가 무척이나 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 주변 일대에만 당시 약 15,000명이 몰려 있었다. 당시 이태원 일대 전체로 본다면 35,000여 명이 운집해 있었다. 반면 정부가 파악한 (희생자 195명을 제외한) 유가족 및 피해자는 여러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321명에 불과하다.
애도의 가족주의라는 제도화된 운동의 관행(레퍼토리)는 유가족들에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외에 이태원 참사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지하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겪고 느낀 이태원 참사는 유가족들(조차 당연히 의견이 획일적이지 않다)의 이해와 같지 않다. 참사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건에서 각자가 놓여 있는 위치는 매우 달랐고, 그 위치에서 각자가 참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목소리를 잘 정리하고 조립하기보다는, 사회적 참사에 관한 기존에 확립된 서사와 이태원 참사에 대해 발언하는 피해자들 일부의 목소리만으로 이태원 참사의 서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가령 유가족이 아닌 피해자들조차도 관점이 다르고 참사를 다르게 의미화한다. 목격자나 구조자들이 트라우마와 괴로움을 호소한다면, 희생자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158명의 부상자들은 트라우마와 피해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사의 체험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상인들도 이태원에 오래 거주했는지, 업종이 무엇인지 등에 따라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누군가는 빨리 잊혀지길 원하지만 누군가는 이태원 참사의 기억을 통해 이태원 상권이 다시 살아나는 길을 찾기를 원한다. 이태원 가게에서 일했던 직원들이나 이태원 주민들도 제각각 체험과 이해가 무척 다르다. 그러나 정형화된 피해자 상을 상상하는 한 이런 다른 모습들은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너무나 없고,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아직도 공적으로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태원 참사는 너무나 쉽게 윤석열 정권의 문제로만 그 의미가 축소되고는 한다. 이태원 참사를 특정한 목적에 맞게 서사화하려는 시도는 참사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온전한 애도와 기억을 가로막는다.
이태원 참사 이후 오랫동안 포스트잇들이 해밀턴호텔 옆 골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제 그 벽에는 클럽 홍보를 위한 게시판이 설치되었고, 참사의 애도와 기억을 말하는 포스트잇들이 붙을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 2023년 핼러윈 기간에 이태원은, 행정이 ’안전’을 강조하면서 단단한 폴리스라인이 좁은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골목을 반으로 갈라 놓았고, 축제를 즐기는 시민보다 경찰과 구청직원들이 더 많이 운집해 있었다. 음식점 상인들은 핼러윈 주말이 평상시보다 장사가 안 된다며, 경찰들이 저렇게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클럽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증 검사를 하는데 대체 누가 오겠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2주기는 어때야 할까? 그리고 2주기 이후에 이태원 참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문란하고 위험한 땅으로 여겨져 왔던 이태원에 서린 기억은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의해 버림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코멘트
2"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모른다"라는 말이 저를 쿡, 찌르는 것 같습니다. 모두 기억하는 이태원 참사가 다르겠네요. 이태원 참사는 2년 전 일어난 일이지만, 이태원 참사를 정의하고 기억을 모으고 벼려 가는 건 계속 해야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참사를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