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국가폭력의 경험을 안고 자란 아이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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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호기심 가득 독일어문학•사회복지 학부생 &.&

어른들은 몰라요

서울의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매일 1시간씩 활동 소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혹은 교육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들과 실무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나눴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나누었다. 어느 날 과장님의 질문.

서희 너의 민감성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공책에 나열했다.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폭력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다. 엄마 나 밭을 걷는 것처럼 느껴져. 지뢰가 마구 퍼져있는, 근데 지뢰의 위치는 몰라. 어디서 어떤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밭을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차량이 갑자기 날 박지는 않을까. 뒤에 오는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건넨 주스나 사탕에 약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까. 일상의 불안함은 때론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사회에서, 참사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참사의 맥락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사람들의 목숨이나 인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내가 국가의 쓰임이 있지 않다면 혹은 그만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관리한다.

이 불안함은 과연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영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나의 조부모 세대, 전후 가난

나의 할아버지, 홍*희, 48년생. 나의 할머니, 전*숙, 49년생.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3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전쟁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군모를 쓰고 있더랬다. 머리가 너무 작아 군모가 자꾸 벗겨져 나가는데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군모 덕에 살았고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3살이면 내가 자주 보는 아기 유튜버의 나이. 완벽한 문장 구사가 어려워 여러 단어를 나열하며 말하는 그 나이. 3살, 만 2살,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였던 할머니가 결혼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가난과 함께 살아갔다. 할머니가 시집간 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옆집에서 수저를 빌려왔다.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모든 일들을 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나보다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게 그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동네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나의 부모 세대, 가난 + 독재 정권 + IMF

나의 아빠, 홍*용, 69년생. 나의 엄마, 김*환, 71년생. 민주항쟁 당시 나의 아빠는 19살, IMF 당시 29살이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그 날, 11살이었던 나의 아빠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빠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당시엔 업적들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고, 다른 것들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 시대엔 전부 다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2살 차이 나던 아빠의 이모 -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 는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옷에는 수류탄 냄새가 항상 배어있었지만, 당신의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 혹은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독재 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사회를 꿈꾸었다. 대학에도 경찰이 있던 그 시대에. 한편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빠 세대까지 이어졌다. 3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의 아빠는, 고등학교 중퇴 후 이른 나이에 친척 집에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나의 아빠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고 나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 해 IMF가 터졌다.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의 넘쳤던 나의 외가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부도가 난 회사에서 가정집에서 쓰기도 힘든 대형 프린터기를 집에 가져왔다. 그 뒤로 나의 아빠는 쭉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민주화, IMF, 이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더 나은 한국 사회를 꿈꾸며. 나라를 살리자는 목표로 금을 모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갔다.



나의 세대, 없음

나, 홍서희, 99년생. MZ세대이자 Z세대의 첫 발을 딛는다. 우리 세대의 세대적 과제는 딱히 없다. 온 세대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목적을 내세울 만한 요인도 동력도 없다. ‘행복하기’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세대적”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행복은 다를 테고 행복하기 위한 방식도 다를 테니.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웠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친숙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이 아침에 일 하러 가면, 아기(나와 동생)은 혼자 남아 TV를 열심히 봤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책보다 TV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잡지식이 상당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살기 진짜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살기 좋아졌다고 불리는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세대적 과제가 없다면, 나의 세대는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줬던 큰 사건들을 돌아봤다.


내가 경험한 참사

내 나이 16살,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니는 학교에서 내가 나고 자란 ‘정선’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정선에 현장체험학습 갈만한 곳을 물어보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니!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의 한 달 전,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떴을 때만 해도, 갈 수 있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불과 몇 시간 후 유가족들에 의해 사실이 전달됐다. 나와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언니 오빠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안국역 근처에 살던 나는 예비 고3이었지만 하야 시위에도 매주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 나이 18살,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살면서 수많은 여성 피해자 사건들을 봐 왔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우리 집에서는 밤에 골목길로 절대 다닐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도 금지됐다.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범죄자들에게 쉽게 표적이 된다는 뉴스 보도로 인해, 나는 밤에도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굳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나와 몇몇 여성을 보며 자위행위를 했고,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마주했다. 두 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극히 꺼렸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 혼자 근무하는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살인’으로 바라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기간별 기사 댓글 속 혐오의 비중, 국민일보, 2022.

기간별 기사 댓글 속 혐오의 비중, 국민일보, 2022.

내 나이 24살,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은 마치 폭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누구 하나 품에 껴안는 사람이 없었다. 당일 이태원 근처에서 놀았던 나는, 자괴감과 부채감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뭐가 좋다고 그 시간에 놀았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서서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혐오 표현을 들으면서 고통을 감내했을 거로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여전히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파악 중일 때, ‘국가애도기간’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참사가 아닌 사고로 바라보며 ‘보상’의 맥락으로 축소했다. 그들에게 참사의 고통은 그저 개인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며 보장해 줘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드는 돈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더 효율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 - 보상 - 을 찾고자 했다. 사과는 늦어졌고 진상규명은 진척이 없었다. 국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부채감도 자괴감도 불안감도 고통도 전부 개인의 몫이었다.

내 나이 25살,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남동생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군 내에서의 사망 사건들이 종종 보도되고 있었고 불안함이 커진 건 그해 7월이었다.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수근 일병이 목숨을 잃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임 넘기기는 계속되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결과였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내 동생 또한 호우 피해 지역에 투입되었다. 나의 동생이 다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복무가 끝나길 바라기만 했다. 군에서의 사건들은 매번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매우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기후위기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국내산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그에 대해 얘기를 하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고민이 크게 와닿지 않으신 듯했다.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진정 괜찮을까? 온열질환으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아파트 주차장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데 그런 곳에서 하루 9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에 화가 났다. 위헌 결정이 나자 그제야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났다. 언제 탄소중립이 이뤄질 수 있을지 답답했다. 백날 텀블러 들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가의 부재? 아니, 국가폭력

내가 겪은 참사들이, 국가가 국가의 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나? 국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만 볼 수 있나? 사실 이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다. 사람들의 목숨은 ‘비용’으로 환산하고, 구조하고 예방하는 것에서 ‘효율성’을 찾는 국가의 폭력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호라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폭력을 행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사고’라는 말로 숨겼다. 응당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을 앞선 말로써 축소했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너의 죽음은 오롯이 너의 몫.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나의 세대는 전-국가적인 목표가 없다. 국가가 나서서 이끌만한 요인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보장 능력이 없는, 보호의 능력도 없는, 책임도 지지 않는, 회피하는, 역할과 소임을 축소하는, 심지어는 교묘한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10.29 기억와 안전의 길

10.29 기억와 안전의 길

나의 세대는 이 국가 앞에 불안함만이 남는다. 나의 환경에 대한 모든 신뢰가 붕괴되어 언제든 내게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불안함을 주는 저 강력한 권력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극복하거나 비판하거나 변화하고자 하는 행동이 내 삶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파할 여유도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더욱더 ‘나’의 현실에만 몰두할 뿐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생존을 위해 제테크를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하고 다름을 강조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삶의 태도를 택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가는 달라질까? 국민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불안함이 커질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요즘 길거릴 걷는 것도 무서워. 우리는 함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럴 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내 감정이 틀리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과 함께 극복할 수 있음에 기쁨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나는 더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토로한다. 너무나도 자연히 행해지는 국가폭력을 직시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일상의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세대들에게 연대의 손을 건네며 주저앉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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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라는 표현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비슷한 세대로 같은 사건들을 목격해오면서 저는 막막함과 무력감을 많이 느껴왔습니다. 글쓴이님처럼 언제, 어떤 사고가 나와 내 가족, 주변인을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안은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요... 국가가 방관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을 할 수 밖에요...

비회원

너무나도 잘 읽었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경험과 통찰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의 조부모, 부모세대는 전쟁 후 나라를 복구하고 가난과 독재, 경제 위기를 이겨내려 애썼는데 남겨진 건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는 불안뿐이네요. 참사의 맥락을 비용으로만 바라볼 뿐 아무도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 결국 부채감, 자괴감, 불안감, 고통은 모두 개인이 감내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생존을 위한 각자의 현실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 매우 공감합니다. 우리의 세대적 과제를 '없음'이라 하셨지만, 어쩌면 국가에게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과제이지 싶습니다. 도이님의, 저의, 그리고 모두의 공통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요. 쉽지 않겠지만 제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연대하겠습니다. 함께 다음 단계로 넘어가요😎!

해를 거듭할수록 굵직한 참사가 곁을 스쳐지나갔네요. 10년 전,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서서히 참사의 고통과 무책임한 이들의 갈등 사이에 삶은 얼만큼 나아졌나 가늠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죠. 참사를 외면하고 가리는 이들이 만든 세상에 균열을 낸다면, 이 세상은 더욱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겠구나 싶어요.

어려운 시대 어떻게 잘 되길 바라면서 노력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