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목소리가 큰 소수’
<<인싸를 죽여라>>를 읽고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를 문화수도라고 자칭하던 시절, 그러니까 온갖 인터넷 밈과 유머 게시글을 양산하던 2010년도 초반에는 디시와 다른 커뮤니티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편이었다. 합성을 이용해 만든 재미있는 게시글(물론 그 와중에는 정치적이고 고인 모독 코드를 가진 게시글도 있었다)도 그들의 특이점이었지만 그보다 도드라지게 보이는 특징은 익명성, 반말, 루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언더그라운드 성향이었다. 이런 특징은 당시 존재하던 네이버, 다음의 카페와 블로그, 이글루스, 루리웹같은 친목도모, 존댓말, 상호존중을 기본 규칙으로 세운 사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새로운 인터넷 문화이었으니 당연히 그만큼 이용자들을 향한 사회의 반발도 따라왔고.
실제로 언론에서는 꾸준히 디시의 이용자 성향과 게시글 특징에 대한 저격성 기사를 올렸다. 존중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 문화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법한 게시글에 대한 기사. 하지만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하던 유저들은 기사에 대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유저들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그 이후로 꾸준히 활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 ‘목소리가 큰 소수’가 탄생한 것이다.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2020년도 초반, 이제 디시의 유저 코드는 디시만의 코드가 아니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성향, 루저를 넘어서 베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반말과 욕설, 비단 디시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X(전 트위터), 네이버 뉴스 댓글까지, 그들만의 저급한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모습은 어디를 가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평균적인 코드가 되었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지금도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인가? 참사 피해자를 향해 돌을 던진 이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미국의 2010년도 중반 인터넷 문화, 인터넷 내 대안 우파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리버럴 성향의 캔슬컬처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비평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내용이 한국의 과거 인터넷 문화와 비슷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 책에 적힌 내용들보다 현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더욱 더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 진영의 사상을 표방하는 사이트가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보이는 성향들, 그러니까 베타를 자처하는 모습과 인터넷 냉소주의가 만연해졌음이 한국의 상황을 대입했을 때 특히 몸에 와닿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인터넷 냉소주의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향한 무관심, 이를 넘어선 불행을 향해 보이는 조소, 익명성에 기댄 정제되지 않은 발언,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시켰냐는 말의 줄임말) 문화. 이런 인터넷 냉소주의는 언제나 사고의 순간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고는 했다.
‘누가 그 장소에 가서 놀라고 했냐.’
‘오늘 같은 날 이성 만나보자고 저런 동네에 모인 사람들이 잘못한 거 아니냐.’
‘저기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문란한 사람들인데 잘 죽은 거 아니냐.’
이 모든 말이 이태원 참사 피해자를 향해 다양한 커뮤니티의 수많은 익명이란 가면을 쓴 이용자들이 던진 말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런 돌을 던질 거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베타 성향을 자처하는 인터넷 이용자들 기준에서 그들은 알파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니까, 언더그라운드와는 궤가 다른 파티 문화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사고 이후 일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행동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이 보낸 분노의 방향성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분노한다면 죽은 이들이 아닌 살아서 문제가 될 행동을 한 이들에게 분노해야 하는데 죽은 이들도 살아있었다면 저런 행동을 했겠지, 하며 뭉뚱그려 분노한다니. 물론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선한 사람들이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돌을 맞을 이유도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돌을 던져도 된다는 식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국가도, 사회도, 언론도, 이런 부분에 대해 메시지를 정제해달라는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기는 어렵기에 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그들은 선량한 동료시민이고 착한 이들이다.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돌을 던지지 말라.’는 공감하는 척에 가까운 목소리 내기라는 방법을.
인터넷을 오래 하던 유저들도 최근에는 이런 냉소주의적 문화 흐름에 대해 피로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오글거린다’는 말에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사라졌고, ‘설명충’이라는 말에 지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누칼협’이라는 말에 행동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알빠인가?’라는 말에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긁혔냐?’는 말에 타인을 변호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말.
‘목소리가 큰 소수’가 인터넷을 대표한다는 말은 이제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모든 익명의 유저들이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수아비에 숨어 돌을 던지는 시대가 되었다. 호남과 영남이 반목하는 시대가 끝나자 청년세대와 중장년세대가 반목하고, 남성과 여성이 반목하고, 알파와 베타가 반목하는 시대가 왔다. 지금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으로 목소리가 큰 소수가 존재하는지. 사실 우리는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울 뒤에 숨은 다수가 아닌지.
이 책을 읽고 간단하게 이런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전반적인 우경화, 남성 커뮤니티의 대안 우파화. 하지만 나는 이런 단순한 결론은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24년 현재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우경화보다는 좌우 양극단으로 나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성별 중심의 커뮤니티뿐 아닌 이성이 혼재된 커뮤니티까지, 진영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인터넷 냉소주의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태원 참사 2주기, 나는 과거의 사고와 더불어 미래에 있을 사건들을 위해 이제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착한 피해자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넘겨짚지 말라. 진짜 나쁜 인물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돌이 무서워 숨지 않게 그들에게 무분별한 돌을 던지지 말아 달라. 그리고 익명의 가면에 숨어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인터넷 문화를 개선해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두 번째 서평으로는 <<인싸를 죽여라>>라는 인터넷 문화 비평서를 들고 와봤다. 사실 이 책은 독서 커뮤니티에서 꽤 좋은 호응을 받음에도 섣불리 손이 가지 않는 도서, 제목부터 표지까지 너무나도 인터넷 커뮤니티가 떠올라서 손이 가지 않는 도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초월번역은 많은 이들이 칭찬할 정도기도 하고.
이번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문화와 전반적인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해 다뤄보려고 했다. 사실 쉬운 주제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색을 담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가 똑바로 담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에 관련된 서평에서는 최대한 정치적 목소리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기에 최대한 중립을 잡으며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도 꽤 오랜 시간 인터넷을 해왔고, 커뮤니티 활동을 해왔지만 최근 이런 냉소주의 문화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나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을 향한 회의감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이들이 나의 동료고 선배일까, 내 후배일까, 사회에서 만나는 또 다른 가면을 쓴 인물일까. 그런 고민이 들게 만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저런 인물이 되지 않아야지 다짐하며 늘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참사 2주기에는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 좋겠다. 추모의 목소리만큼 문제가 되는 사회 문화, 피해자가 숨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 그간 우리가 봐온 사고의 정리와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미래를 향한 목소리.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시선을 보내주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띄운 작은 풍등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하나의 별이 되기를 바라고.
이번에 가져온 사진은 SNS로 참사를 접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익숙하고 너무나 슬픈 구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해밀턴 호텔 골목을 반대편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참사 당시 많은 환자들이 이 거리에 누워있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관과 구급대원, 그리고 그 옆에 구경이 난 것처럼 서있는 사람들까지 당시 사진에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이제는 정적만이 남은 거리를 찍고 싶다는 생각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의 골목 앞 거리를 찍어봤다.
사고를 구경하는 이들, 다음에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오려고 한다. 고통을 마치 구경거리처럼 전시하는 저널과 기자로서의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이 담긴 책인데 수많은 사건을 다뤘던 저자의 책이 아마 이 이태원 참사 2주기 서평의 마지막으로 가장 적절한 책이 아닐까 싶어 고르게 되었다.
가장 첫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시 사고 상황에서 언론이 행했던 고통 전시회를 보고 회의감을 느끼고는 했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저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저널리즘은 어떻게 사고를 접근해야만 하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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