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돈이 되는 목소리와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고
어린 시절의 내게 신문과 뉴스는 사회를 비추지만 사회와 동떨어진 작은 외딴 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조명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까지 알려야한다는 욕망으로,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는 저널리즘이라는 것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처럼 보였고, 실제로 돈이 되지 않을만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기자정신 아래에 만들어진 칼럼들을 꽤 좋아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달동네에 퍼진 재개발 소식에 등 떠밀리듯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과 그 길 좌우에 깔린 녹슨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담아내는 사진. 당시 칼럼들은 발품을 팔아 쓰는 글이 많았고, 1년간 달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재개발 구역의 변화를 담아내는 기사도 있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변하는 건 없었다. 해봤자 녹슨 지붕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눈이 녹아내리고, 빗물이 흘러내리고, 단풍이 쌓이고, 다시금 눈이 쌓이는 정도.
24년, 지금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는 기획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애초에 기획 기사를 위해 1년이나 준비를 한다니,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시대에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데스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뷰어십이 나오지도 않는 기사를 쓸 바엔 인터넷 게시물이나 긁어오는 게 더 낫다, 그렇게 판단하는 데스크는 더 많을 수도 있고. 실제로 요즘 뉴스에는 그런 칼럼보다 네이트판과 같은 많은 유저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많은 인기를 받은 자극적인 게시글을 그대로 옮겨 담는 수준의 기사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은 언제나 꾸준한 뷰어십과 관심을 얻는다. 사람들은 게시글이나 긁어오는 기자를 욕하면서도 꾸준히 그 기사를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뷰어십에 미친 –아니면 살기위한 투쟁을 벌이는- 언론사들은 이태원 참사 직후 어떤 기사를 내보냈을까. 사고 당시 자극적인 기사는 시민들의 알권리라는 명목 아래 거리에 살포되었다. 과연 이는 시민의 알권리를 위한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오늘은 평범한 신문 독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사회 규범의 경계인 회색지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잘못 밟으면 금지된 선을 넘을 거 같지만 조심만 한다면 아슬아슬하게 어디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을 거 같은 회색지대. 하지만 그 말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금기를 깨고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를 원하는, 말하자면 사이다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저널리즘이 펜으로 타인을 찌르는 공격 행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이태원 참사 당시에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남용되었다. 먼저 참사 당시의 사고 상황을 언론사에서는 SNS 영상까지 포함해 여과 없이 흘려보냈고, 시민들은 사고 현장을 보면서 다양한 부의 감정을 키웠다.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감정의 뭉치, 언론사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이 참사의 범인으로 예상되는 인물들, 혹은 범인을 색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SNS 메시지를 사고가 발생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올리면서 부의 감정을 뷰어십으로, 그리고 분노의 감정으로 바꿔냈다.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이를 돈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런 기사들 아래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은 경찰을 향한 비난이었다. 저렇게 인물이 특정되는데 어째서 바로 찾지 않냐, 당장이라도 잡아와라, 얼굴 모자이크 하지 말고 올려라, 이게 바로 ‘시민의 알권리’ 아니냐. 나는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오용되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 저자의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가 그간 언론인으로 살며 생각하고 느껴온 것들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시대가 겪고 있는 너무 많은 갈등, 일차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고들을 안일하게 접근했던 동료들과 자신, 그리고 이에 대한 후회,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도떼기시장마냥 전시하는 언론의 현 실태를 향한 비판. 필드에서 그가 느껴온 것들은 아마 수많은 신문 독자들이 때로는 무심코 지나갔을법한, 때로는 몸으로 느꼈음에도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불편함으로 와닿았을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첫 챕터를 펼치면 바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과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동영상, 동영상에 찍히는 수많은 리트윗들, 그리고 전염되는 감정들. 기자인 저자는 재난 보도 준칙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 이 재난 속 이야기를 담아내는 자신 또한 이들과 같은 방관자가 아닌가라는 무력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모두가 이런 이야기에서 부의 감정을 얻는 것으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는 목소리를 낸다. 언론을 통해 슬퍼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언론을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로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처럼 시민들이 참사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사만이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자극적인 기사도 많았고, 때로는 재난 보도 준칙의 수준을 넘어선 기사도 있었다.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같은 저널리즘의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지는 않을 테니, 누군가는 데스크에게 돈이 될 만한 이야기를 쓰라고 압박당하고 있을 테니. 실제로 언론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언론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파이를 언론인 척 하는, 혹은 언론의 틀만 가져온 자극적인 유튜브가 겸상하기 시작했다. 언론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레거시적인 시스템에서 미디어 기사로 방향을 틀어 이에 힘을 실었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역으로 언론인 척 하는 유튜브에 가까워졌다. 그들에게 형식을 보여주고 내용을 받아온 것이다.
나는 이런 저널의 행태가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24년 현재, 언론 산업이 과거처럼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언론사에 광고를 실을 바에 유튜브에 광고를 띄우는 광고주들이 늘어난 만큼 언론의 주력 수입원이었던 광고 역시 지금의 언론 규모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에서만큼은 언론이 과거의 역할을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보를 위한 언론, 시민들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언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 가장 뷰어십이 나오는 기사가 정치, 경제면이고 현대 사회에서 갑작스러운 이슈라고 해봤자 재난이 거의 주된 기삿거리임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인 기사만을 남발하고 부의 감정을 먹기 위한 행동만을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쌓고, 또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표출하게 된다. 즉 저널리즘이 지키려고 했던 오랜 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야기다.
이 글을 쓰던 때부터 며칠 전, 여의도에서 세계 불꽃축제가 열렸다.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대교 위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에 위험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 다른 아파트에 무단으로 들어가 복도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까지 많은 인간군상을 담은 기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백만 명이나 모이는 장소에 대체 왜 가는 거지? 그래놓고 죽으면 국가 탓 할 거 아닌가? 이태원 참사처럼.’
언론과 국가가 잘못 굴린 펜은 아직까지 굴러가고 있다. 아마 당분간 계속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에 왜 가냐는 이해심 없는 댓글과 함께 이태원 참사에 빗대어 욕하는 사람들. 이들의 방향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년이라는 기간을 앞이 아닌 대각선으로, 혹은 뒤로 걸어갔기에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보낸 허송세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이야기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통해 모두가 재고하는 계기를 만들고…. 분명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래도 그 길을 가려는 목소리가 늘어나면 좋겠다. 그게 저널의 역할이고 저널리즘이니까.
마지막 서평으로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와봤다. 이 책은 기자로 활동하는 저자의 족적과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저널리즘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저자의 굵직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비단 이태원 참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고들, 해외에서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나와 정세에 관심이 많은 독자일수록 흥미롭게 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저널리즘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나온 <<저널리즘 선언>>도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언론사는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두는 방향성을 보이지만 엘리트와 공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또 그들의 편을 들지 않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편을 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는데, 언론에 대한 이상향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괴리감을 차분하게 해석해준다는 점에서 같이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해봤다.
특히 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최근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인물들, 그러니까 유색인종, 성소수자,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기자 개인의 입장과 언론의 입장을 두 책을 통해 비교하며 볼 수 있기에 가까이 두고 읽는다면 더 좋은 시너지를 낼 것이다.
준비한 서평은 이번 서평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는 이 캠페인을 이어가면서 든 생각, 캠페인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조사를 위해 9월말에 다녀온 이태원은 내가 10년 전에 기억했던 이태원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꽤나 쓸쓸한 도시가 되었다. 그들은 이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을까.
마지막 사진은 골목 앞에 있는 조형물과 용산 구청의 안내 커버를 가져와봤다. 참사로부터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추모의 감정에 대해 반발 심리를 보이며 조형물을 더럽히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 조형물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감정을 뒤로하고 살아갈 만큼 현대인에게 2년의 시간은 짧지 않다.
아마 언젠가는 저 커버가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언젠가는 성인이 될 거고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이 참사도 과거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이 저 조형물을 봤을 때 이 거리에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구나, 참사 이후로 사회가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구나, 어쨌든 사회는 좋은 곳으로 향하고 있구나. 우연히라도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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