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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누가 만들어 주나?
기후난민이란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을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잦은 가뭄과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최근 사례로는 파키스탄이 있다.  2022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간, 파키스탄에는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1,100여 명이 사망했고, 57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후 추가적인 이재민이 발생해 총 1,700여 명의 사망자와 800만 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도로, 교통, 주택 등 삶의 터전이 파괴됐고, 파키스탄은 피해복구 금액 163억 달러 한화 약 20조 원이 필요할 전망이다. 글로벌 사우스 북반구의 저위도나 남반구에 위치한 아시아·아프리카·남미·오세아니아의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을 일컬어 글로벌 사우스라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이며, 전세계 글로벌 기업과 선진국들이 저임금 노동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진출한다. 인간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옷, 커피, 초콜릿, 쌀 등 대부분 생활 필수품은 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만들어진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앞서 파키스탄 역시 글로벌 사우스에 속한다.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이들 나라에는 사회 제반 시설이 부족하다. 사회 제반 시설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그만큼 위기에 취약하다는 의미다. 이들 나라에 홍수와 가뭄 등 환경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나라의 사람들은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은 그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후변화에 원인 제공은 누가하나? 2021년 국가별 탄소배출량을 보면, 중국이 약 100억 톤으로 전체 배출량의 27%를 차지한다. 그 뒤를 미국 약 53억 톤, 유럽연합 35억 톤으로 뒤따른다. 대한민국은 약 6억 톤으로 세계 10위의 탄소 배출국이다. 해당 통계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탄소 배출 대다수가 선진국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도 많은 양의 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인구 때문이다. 실제, 1인당 탄소 배출량을 따져보면 중국은 1인당 7.6톤, 인도는 1.78톤이다. 앞서 홍수로 재해민이 발생한 파키스탄의 경우 0.85톤이다. 반면, 선진국인 캐나다는 1인당 20.62톤, 미국은 19.27톤, 독일 10.62톤, 일본 9.99톤 등을 배출한다.  해당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건, 기후변화의 직접 원인인 탄소 배출은 선진국에서 나오고 있지만, 그 악영향은 개발도상국에서 받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삶은 에너지 소비 삶이다. 지하철, 버스, 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탑, TV, 냉장고, 수도 등등 모두 에너지를 소비한다. 에너지를 소비량은 탄소 소비량이다. 누리는 게 많으면, 배출하는 것도 많다. 이렇게 수많은 걸 누리는 현대인의 삶은 과거 귀족이 노예 30명을 거느린 삶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대는 제국도 노예도 없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삶은 있고, 온갖 수모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 제국적인 삶의 양식이 계속되는 한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제국적 생활양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문제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대인에게 현대의 삶을 포기하고, 과거의 삶으로 회귀하라고 할 수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다만 그 시작은, 내가 누리는 삶의 양식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말하는 것이다. 기업과 정부에게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내게 오는 제품과 서비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흉터를 남기고 오는지 인지하는 것이다. 시민 차원에서 꾸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 더 나아간다면 그런 문제 있음을 인지하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변화를 만들고 있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응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사이토 다케시, 다다서재, 초판 1쇄, 2020)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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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사용자와 헤어질 결심
예산 낭비를 지적하는 기사는 최근에도 흔히 볼 수 있다. 14억 들여 고친 테마파크의 하루 평균 방문객이 3명이라 기사는 수요예측을 잘못해 발생한 예산 낭비 사례이며, 100억 들여 조성한 오토캠핑장이 4년째 방치되었다는 기사는 접근환경을 만들지 못해 발생한 예산 낭비 사례이다. 170억을 투자해 개발된 스마트시티 서비스는  구축 후 운영관리에 대한 계획과 지원이 없어 유명무실해진 예산 낭비 사례도 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사업에서도 크고 작은 예산 낭비 사례들이 있다. 국가연구개발 사업 분야 중 웹 기반 정보서비스 사업에서 앞서 소개한 세 번째 예산 낭비 사례와 유사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진단할 자료가 없는 게 문제  웹 기반 정보서비스 사업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사용하는 정보서비스가 있고, 응용프로그램(앱)을 모바일로 내려받아 사용하는 정보서비스가 있다. 정보서비스 사업은 국가 과학기술 지식정보서비스(NTIS)에서 관련 검색어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키워드로 생각할 수 있는 ‘웹서비스’, ‘데이터베이스구축’, ‘정보서비스’로 검색해 보면, 각 190건, 26건, 169건이 나온다. 이중 모두가 정보서비스 연구개발사업으로 볼 수는 없지만, NTIS에서 검색되는 정보들이 어느 시점 이전의 과거 데이터는 빠져있다거나,   과제의 세부 위탁사업인 경우 등록이 누락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검색 결과로 나타난 수치만으로도 적지 않은 지원 사업들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정부 예산으로 개발·구축된 정보서비스는  현재 잘 운영되고 있을까? 중단되었다면 얼마 동안 운영되고 중지된 것일까? 성공적으로 역할을 달성하고 사라진 것일까? 효율적 운영 차원에서 흡수/통합된 것일까? 웹 기반 정보서비스 사업들을 모아 보면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이런 궁금증을 살펴볼 수 있는 정책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유지가 더 힘든 정보서비스 사업 만약 연구개발사업으로 구축된 정보서비스가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거나, 업데이트가 안 되고 방치되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히 연구개발사업의 진행 결과물을 통합적으로 살펴볼 자료조차 없는 상황에서 정확한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다만 과학 관련 정보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연구개발 사업으로 진행된 정보서비스를 관심 있게 지켜본 경험에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면, 대부분의 정보서비스 관련 연구개발사업이 단기과제로 진행되며, 정보서비스 구축만으로 과제가 완료되는 점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 보니 구축된 정보서비스의 지속적인 운영관리는 예산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과제 수행자의 의지에 맡겨 둘 수밖에 없다. 정보서비스 운영을 통해 수익모델을 마련한 경우가 드물게 있거나, 다른 유사 과제를 지원받아 운영비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국가연구개발사업 특성상 이미 정보서비스를 하는 경우 운영관리만을 위해 사업비를 지원해 주는 형태는 찾기 어렵다. 근무 경험이 있는 생물학 분야 연구정보서비스 사이트인 브릭도 연구자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고, 하루 이용자도 수만 명이 넘지만, 수년간 매년 일몰 사업으로 검토되었다. 몇 개월 뒤 사업비 지원이 끊겨 서비스가 중단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환경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단기 연구개발사업으로 진행된 정보서비스 사업들이 구축 후 운영관리까지 고려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구조이다. 운영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다행히 최근 들어 공공데이터포털, 연구정보콘텐츠통합같은 형태로 구축된 서비스나 데이터베이스를 국가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시행착오를 통해 개선된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다. 국가 연구개발사업으로 진행된 정보서비스 사업들에 대해 상황을 진단하고 점검할 수 있는 체계적인 관리가 부족하다. 아울러 정보서비스 사업은 “구축이 완료”라는 개념을 넘어 운영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변화도 필요하다. 그나마 구축 정보들의 사장을 막기 위해 진행되는 정보통합 형태도 문제가 있다. 지금은 정보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정보가 많아서 문제인 시대이다. 신뢰성 있는 정보의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구축된 정보를 이용자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보 큐레이터 역할도 높아지고 있다. 단순 정보 통합만이 해답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정보서비스의 가치는 지속적인 정보관리와 업데이트에서 더 큰 효율과 효과를 발생시킨다. 보여주기식 구축성과와 평가에만 관심을 두고 운영관리가 뒷전이 된다면, 애써 만든 정보서비스는 사용자와 언제인지 모를 “헤어질 결심”을 계속해야 한다. 국가 R&D사업으로 추진된 정보 구축 사업들이 사업 종료 후 유지관리가 안되어 사라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그 규모와 이유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예산으로 구축한 정보서비가 한 여름 바닷가 백사장에서 놀이 삼아 짓고 허무는 모래성이 아니지 않는가? 작성자: 퐝AZ (ESC 회원이며, 기획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아재유머로 지구정복을 꿈꾸며, 철강 도시 포항에서 철없이 사는 퐝AZ입니다.)출처본 글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제작한 콘텐츠로,  ESC에서 운영 중인 과학기술인 커뮤니티 '숲사이(원문링크)'에 등록된 정보입니다.ESC: https://www.esckorea.org/숲사이: https://soopsci.com/    
공공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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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하고 심난한 청년정책
지난 6월 4일, TV조선 특별프로그램으로 '2023 대한민국 청년정책 공모전'이 방영되었다. 40초짜리 짧은 클립영상에서 눈에 띄었던 장면은 '실망스럽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상상 같은데요' 라고 말하는 심사위원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한 청년', '기뻐하는 청년들'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뒤늦게 유튜브에서 방송을 찾아봤다. "소울메이트의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정책 발표가 끝난 뒤 진행자가 심사위원의 점수를 확인하기 전에 하는 멘트다.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는 악수하는 모양의 아이콘으로 표시한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라는 의미를 아주 잘 표현했다. 중앙부처가 같이 만든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연출을 맡은 PD의 마음대로 작업을 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이 방송의 발주처가 청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해석하는지 잘 느낄 수 있는 방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3 대한민국 청년정책 공모전’은 국무조정실과 청년재단이 3월 1일부터 21일까지 접수를 받았고, 712건의 제안이 접수되어 총 2,000명 이상의 청년(3명이 1팀)이 공모전에 참여했다. 추후 총 3차에 걸친 심사를 통한 최종 과제를 선정, 전문가 특강 및 부처 정책담당자 멘토링 후 2차 심사를 거쳐 최종 심사가 방영되었다.(보도자료) 사실 2022년에도 '서울 청년정책 콘테스트'라는 이름으로 정책 오디션이 진행되었고, 그 이전부터 청년정책을 공모전 형식으로 제안 받는 사업은 늘 있어왔다. 시혜적인 관점으로 청년을 바라보는 청년정책이나 단기간 공모전 형식으로 청년정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이번 정부에 새롭게 등장한 것도 아니다. 공모전 하나만 가지고 전체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러한 방식으로 청년을 호명하면서도, 청년 세대 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청년정책을 강화하지 않는 것에는 의문이 든다. 한겨례 공동기획 기사 [윤석열 정부 1년 ③불평등 청년예산]윤석열 정부 청년예산, 저소득층 몫 줄이고 중산층은 늘렸다연봉 2800, 적금 두 달도 버겁더라…목돈은 중산층 청년 몫공공분양 목돈 들고, 공공임대 줄어…‘노크’ 못하는 저소득층중소기업 청년 16만명 받던 교통비 지원 올스톱 정부의 의지는 말이 아니라, 정책에 실제로 투여하는 예산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청년정책의 결정 권한을 가진 이들은 누구에게 악수를 건내고 있는걸까. 정부가 국정 과제로 제시한 390개 청년정책을 분석한 한겨례 공동기획 기사에서 "청년정책도 빈익빈 부익부인 것 같다"는 한 인터뷰이의 말에 크게 공감이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청년 시기를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청년의 삶에 필요한 기반을 만드는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란한 마음으로 방송을 보러 왔다가, 심난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연구 현장에 숨은 정책 찾기
‘나 때는 말이야’가 언제부터 ‘라떼’라는 은어로 불리며 꼰대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희화화되었다. 공동체 중심 사회에서는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부족장으로 추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지혜로운 답변을 듣기 위해 찾아간다. 부족장은 ‘경험에 비춰보면 말이야’로 현명한 방안을 제시해 준다. 비슷해 보이는 그때의 연륜과 지금의 라떼는 무엇이 다르기에 존경받는 어른에서 비아냥의 대상인 꼰대가 된 것일까? 사실 두 단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연륜은 시간의 흐름이 함께 하며, 경험의 범위도 점차 넓어지면서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진화를 거듭한다. 반대로 라떼는 과거 어느 시점과 상황에 머물러 그때를 소환해서 강요한다. 과학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연구자들의 의견수렴 행사들이 수시로 열린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연륜과 지식이 많은 발제자와 패널로 구성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고, 방청객의 질문과 의견을 듣는 형태이다. 다양한 의견이 교환되고, 현명한 대안과 방향이 제시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행사를 지켜보며 애매한 라떼의 모습을 떠올린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참석자들의 의견수렴 행사임에도 라떼에서 느껴진 거리감과 불편함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현장'이 빠진 의견 수렴 방식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연구 현장 모습 스케치하기 연구 현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중 수치화된 통계자료가 편리하면서도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통계자료가 현상을 파악하기에 좋은 자료이지만,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자료는 매우 일부분이다. 그래서 통계자료가 필요한 경우 설문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한다. 다소 거칠고 대략적일 수 있지만 광범위한 연구 현장의 모습과 연구자의 의견을 담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설문 기획만큼은 관료나 설문 대행사가 아닌 연구 환경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가 설계하고 현장 연구자들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 현실감 없는 엉뚱한 질문들로 구성된다거나, 방향을 정한 선택지로 설계된다면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연구 현장 목소리 채색하기 설문조사가 광범위한 의견을 통계적으로 담는 형태라면,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토론은 의견을 좀 더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공청회, 포럼과 같은 의견수렴 형태도 상황에 따라 필요하겠지만, 현장 연구자들의 다양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면 토론 방식을 변경해 볼 필요가 있다. 경험에 비추어 효과적인 토론 방식을 추천하자면, 지자체에서 시민들의 정책수렴을 위해 자주 사용되고 있는 타운홀미팅* 방식이다.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공동체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해온 방식이라 효과도 충분히 인증받고 있다. 참석자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최대한 많은 발언권을 공평하게 줄 수 있으며, 토론 방식이 흥미로워 참석자가 어렵지 않게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또한 기존 정책을 다양한 시각에서 오류를 집어낼 수 있고, 정책 수요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정책 결정에 본인이 참여했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설문조사와 달리 타운홀미팅은 현장 연구자뿐만 아니라 시민, 정치인, 관료 등 토론 참여자의 범위도 넓다. @ 2021 WISET 여성과학기술인 정책 타운홀미팅 모습 오피니언 그림 완성하기 앞서 언급된 두 형태보다 더 좋은 의견 수렴방식이 있다. 설문조사와 타운홀미팅을 연계하는 하이브리드방식이다. 설문조사로 광범위한 의견 수렴을 통계적으로 살펴보고 토론의 핵심 주제를 구체화한다. 구체화된 주제들은 타운홀미팅 토론을 통해 여러 시각에서 살펴본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정책제안을 만든다. 설문조사는 현장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구도를 짜고, 스케치하는 작업이라면, 타운홀미팅은 더 선명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채색하고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에 비유될 수 있다. 완성된 그림은 가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마케팅과 전시를 기획하고 상품화시킨다. 이것이 정책 입안자의 역할이다. 다만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하이브리드방식은 매우 귀찮고 피곤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공감도 높은 정책 찾기 정책의 공감도는 나와 연관성을 가질 때 높아진다. 필자는 오랜 기간 익명의 과학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온라인에 올려진 거칠지만 생생한 연구자들의 고민이 담긴 글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들도 많았다.  과학기술 정책 의견들이 모두 거대 담론을 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연구 현장에 소소한 애로점을 파악하고 해결해주는 정책 또한 필요하다. 공감도 높은 정책은 현장에서 불편을 체감할 수 있는 디테일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의견 수렴 방식이 라떼를 소환하거나 강요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연구자에게 필요한 과학기술 정책을 연구 현장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앞서 소개한 하이브리드방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면 어떨까?
민간 보조금 사업에 대한 단죄 혹은 개혁,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간 단체 보조금 예산 삭감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조치일까요?  낙관적이지 않은 경제상황과 외국처럼 기부금 문화도 정착되지 않은 구조 속에서 민간단체 후원금은 갈수록 줄어들고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보조금 삭감은 민간단체의 활동을 더욱 축소 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여러 논란으로 인해 보조금 사용 기준을 준수하며 진행해온 단체들도 부정적인 여론의 피해자가 되어 더더욱 시민들의 후원과 지지가 줄어들 수 밖에 없기에 운영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실제로 몇몇 단체들은 감사 대상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문제 있는 단체로 ‘낙인’찍히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생존의 위기에 놓일 단체들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 정부 기조에 맞는 사업에만 초점을 맞출 가능성도 있기에 한 곳에서는 ‘시민단체 길들이기’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이번 감사에서 부정비리 사례로 적발된 시민단체 상당수가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한 곳이어서 정치적 목적을 띤 ‘표적감사’ 아니냐는 의심도 피하기 어렵다”고 전하기도 하였습니다(2023-06-04, 시민사회 위축시킬 민간단체 ‘보조금 구조조정’ 계획, 출처 경향신문). 부실한 민간 보조금 사업 진행에 대한 ‘개혁’ 꼭 필요합니다.  실제로 보조금을 유용하고 기준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단체들의 문제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E협회연맹의 사무총장은 국내외 단체 간 협력 강화를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 받았지만 사적 해외여행(2건), 아예 출장을 가지 않은 허위 출장 1건 등 총 3건에 출장비 1344만 원을 착복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하였고, 기념품이나 책자를 만들겠다며 제작비 1937만 원을 받아 제작하지 않거나 지출 근거 없이 200만 원을 자신의 계좌로 이체한 사실이 감사에서 드러나 형사 고발을 앞두고 있습니다(2023-06-05, 민간단체들 ‘눈먼 보조금’… “1865건 314억 부정 사용”, 출처 동아일보). 이 외에도 많은 보조금 유용 사태가 감사를 통해 적발되었습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자정과 반면교사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수혜받는 민간 단체의 문제라고만 호도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민간 보조금 선정부터 현실성과 물가에 맞는 사용 기준, 지출계획 및 실행, 철저한 사업 모니터링, 꼼꼼한 검수와 피드백 모든 것에 대한 민관 서로의 점검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지난 글에서 남겼 듯 (<민간 보조금 사업 수행 단체의 인건비 지원,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고) 민간 단체 보조금은 민관이 협력하여 의미 있는 시민행사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위해 대부분 지출됩니다. 단체가 사업을 수행하며 실제로 발생하는 내부 인건비나 운영비가 보전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부 및 지자체는 보조금 사업의 현실성을 파악해서 이러한 지급 부분을 양성화하여 투명성을 제고할 필요도 있습니다. 보조사업마다 상이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실제 보조사업자로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실정에 맞지 않는 기준이 많습니다.  이번 논란을 통해 여러 가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어가면서 해결방안과 비전을 민관이 함께 철저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조금 삭감은 간단한 ‘미봉책’이 되고 말 것이고 문제는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감사가 진행된다면 그 내용과 기준 또한 어떠한 의혹 없이 명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크기 때문입니다. 민간 보조금 유용에 대한 단죄 혹은 개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불법'에는 단죄만이 최선일까요? 어떤 개혁을 통해 보다 나은 현실로 바꿔나갈 수 있을까요? 다양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댓글로 남겨주세요!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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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함께 만드는 노동의 미래, 10일의 대화
AI가 바둑을 두고 책을 쓸 때, 우리는 생각했습니다."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면, 나의 일자리도 없어질까?"기술의 발전은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합니다.디지털 기술 변화 앞에서 우리의 '노동'을 어떻게 만들어갈지,미래 노동에 대해 시민과 함께 답을 만드는 '대화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신청하기 '10일의 대화 - 빠띠 편' 신청하기 ? (클릭) 대화 모임 신청하기 ? (클릭)※ 대화 모임 신청 시,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1️⃣ 설명회란? ‘10일의 대화가 뭔가요?’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일단 들어오세요. ??‍♀️‘10일의 대화'가 무엇인지, ‘대화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지, 총정리해드립니다.(*온라인 중계, 대화모임 및 공론장 신청자에 한해 시청 링크 제공) 2️⃣ 10일의 대화란? ‘주변 사람들과 사회 문제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10일의 대화' 모임에 신청하세요.누구나 콘텐츠(영상, 글, 발제자료)를 통해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빠띠 운영가이드를 통해 대화모임을 열 수 있습니다. 방법 하단 신청하기 버튼을 누르고 양식 작성 및 제출 6/23(목) <10일의 대화> 콘텐츠 확인 (*신청자에 한해 안내 메일 발송 예정) 6/24(토)~7/3(월) 중, 대화 모임 집행 나눈 대화 기록을 빠띠 채널(캠페인즈)에 공유 지원 및 혜택 공론장 운영 방법 안내 (설명회 영상) 함께 나눌 질문(의제)가 담긴 콘텐츠 ‘디지털 노동' 오리지널 영상 (약 10분) 전문가 글, 발제 자료 공론장 개최 소식 빠띠 채널 홍보 대화 모임 운영 가이드 및 키트 제공 온라인 운영 지원온라인 사회, 퍼실리테이팅, 줌 유료 버전 지원 ※ 추후 협의하여 가능여부 확인 운영비 지원최대 10만원 (1인 5천원, 그룹 당 3인~ 20인) ※ ‘10일의 대화 주간’(6/24 ~ 7/3)에 진행시 지원 가능 ※ 결과 및 명단 공유 완료 후 지급 ? 10일의 대화 - 빠띠 편 : ‘10일의 대화, 빠띠도 합니다.’ ‘디지털 노동’에 대해 전문가 발제를 듣고 문제와 대안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다면?'10일의 대화' 모임을 진행하기 전, 어떻게 얘기를 나누고 운영해야 할 지, 참고하고 경험하고 싶다면?'10일의 대화 : 빠띠 편'에 신청해 보세요. ? 상세내용보고 신청하기 3️⃣ 결과 나눔이란? ‘다른 공론장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요?’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 하지만 같은 주제 ‘디지털 노동'으로 어떤 대화모임이 진행되었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었을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10일의 대화'를 마치고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정 및 장소 추후 공지 ? 신청하기 '10일의 대화 - 빠띠 편' 신청하기 ? (클릭) 대화 모임 신청하기 ? (클릭)※ 대화 모임 신청 시,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 문의 : dx@parti.coop | 주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후원: Open Society Foundation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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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노동,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디지털 시대의 노동,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1차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이 있을 때마다 일자리에 대한 우려는 지속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숙련공이 필요한 수공업과 다르게 방직 기계가 보급되자 비숙련자만으로도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비숙련자인 미성년자 고용, 도시로 몰려든 잉여 노동력이 넘쳐나면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문제가 부각되면서 부의 재분배 문제가 집단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방직공 1인당 생산량은 50배가 증가하고, 1830~1900년 사이 방적공 고용은 4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Economist, 2016) 우려와 달리 새로운 기술 진보와 산업혁명이 있을 때마다 전체 일자리는 증가하였습니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낮아진 생산 비용만큼 소비자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론고시 vs 크리에이터  유튜브 이전에 콘텐츠를 생산하는 직업(PD, 기자. 아나운서, 배우, 개그맨 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2014년도 MBC의 예능PD 경쟁률만 무려 712:1이었습니다. 아나운서의 경우 1000:1에서 2000:1 사이의 극심한 경쟁을 뚫어야만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론고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요? 우리나라의 크리에이터는 2022년 기준 1,750만 명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3명 중 1명이 크리에이터입니다. 그리고 유튜브의 경우 9만 7,934개의 채널이 수익 창출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특정한 자격 조건이 없어도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비자로서 크리에이터가 만든 다양한 콘텐츠를 무료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디지털은 일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면서 일의 속성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냅니다. 디지털 기술이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지금,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유망한 직업은 있는데, 왜 유망한 ‘노동’은 없는 걸까요? 1960~1970년대 육체 노동을 통해 직접 생산에 기여하는 제조업, 건설업, 광업 등에 종사하는 직업군이 주류였습니다. 1980~2000년대 사무직, 금융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의 일자리 인기가 높아집니다. 이때 취업이 잘되는 전공은 경영학 등 인문 사회계열이었고, 구직자들이 가장 많이 준비한 스펙은 학점과 토익 등의 어학점수였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2010년대 공학/이학 계열 전공자가 진출할 수 있는 엔지니어 등의 취업이 잘 되면서 ‘이과 전성시대’가 열립니다. 그리고 2020년대 현재 가장 선호되는 전공이자, 스펙은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코딩’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높은 연봉을 주는 소위 ‘네카라쿠배’라 불리는 IT기업의 인기가 대기업을 넘어서지만, 중소중견기업의 구인난은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4차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개발자를 포함 각종 기관에서 유망직업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2022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2020년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조사’를 보면 유튜버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초등학생들이 원하는 장래 희망 직업 4위를 차지했습니다. 희망하는 직업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망직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일자리 수요 증가 또는 취업자 수의 증가, 고소득, 안정성 등이 기준입니다. 즉, 일자리 수와 일이 주는 외재적 보상이 기준입니다. 직업은 일을 통해 보수의 대가를 받아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니까 외재적 보상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유망한 ‘노동’도 있을까요?   디지털 시대 '좋은 노동’이란 무엇일까요? 183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 사망사고가 발생합니다. 사고가 많으니 증기자동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생겨납니다. 특히 증기자동차를 반대한 곳은 경쟁자인 마차 업계였습니다. 증기자동차의 속도는 마차보다 빠르고 탑승 인원도 많고 요금도 저렴했습니다. 일자리를 걱정한 마차 업주와 마부 조합은 영국 의회에 청원을 넣어 1865년 ‘적기조례’를 제정하여 공표하였습니다. 증기자동차는 시속 30~40km를 달릴 수 있음에도 시내에서는 시속 3.2km로 제한을 받게 됩니다. 또 증기자동차를 운행할 때는 운전사, 기관원 그리고 적기(붉은 깃발)를 든 신호수 3명이 반드시 운행해야 했습니다. 신호수는 차량의 앞에서 적기를 들고 다니며 마차나 말이 접근할 때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마차와 사람보다 느리고, 인건비가 더 드는 증기자동차 업계는 적기조례가 유지되는 30년간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진 증기자동차 기술자와 사업가들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으로 빠져나가 다른 나라에서 자동차 산업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영국 시민들도 피해를 봅니다. 더 빠르고 편리한 교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으니까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낸 커다란 변화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역사에서 배우게 됩니다.   디지털과 기술의 발전은 기존 일자리와 일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일부 일자리를 대체하는 반면 또 다른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합니다. 생산성과 필요 기술의 변화는 더 큰 임금 격차와 불평등을 확대하기도 합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방법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1980~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자리 정보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2000~2010년대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취업사이트(취업 포털)를 통해 일자리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기업이 채용공고를 올려야만 나의 입사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가 되면서 소셜네트워크와 비즈니스네트워크 기반 링크드인, 리멤버 등을 통한 경력 채용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나의 프로필과 경력을 공개하면 기업이 나를 찾아오는 프로세스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나 면접도 AI가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디지털 활용 기술 및 대응 역량에 따라 일자리 정보의 접근 기회가 달라진 것입니다. 변화가 클 수록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시작은 나 스스로 '좋은 노동'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이란 무엇일까요? 디지털 시대, 노동의 변화는 우리에게 위기가 될까요? 기회가 될까요? 디지털로 인해 각종 편리함과 유용함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는 디지털 시대 소비자이자 노동자입니다. 디지털의 변화를 소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위기가 될까요? 기회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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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지구적 존재'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
챗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 등장으로 세계가 술렁거리고 있다. 본격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기존 온라인 플랫폼이나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을 넘어서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대화와 창작의 영역까지 인공지능이 섭렵하고 있다. 스마트폰 이전의 시대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인공지능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각자가 인공지능 기술을 실감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기술적 변화보다는 대화의 주제가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을 실감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도구로 남을지, 인간과 인공지능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우리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지 등.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놀란다.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어떻게 가져다줄지 아직은 예측뿐이다. 그동안 쌓여있던 HER, 아이로봇, 매트릭스와 같은 SF 영화들을 기반으로 저마다 다양한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신기술과 가깝지 않은 나는 기술의 ‘발전’에 대한 기대보다는 확증편향, 민주주의의 위협, 혐오와 차별 문제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 사실 가짜뉴스, 혐오와 차별의 문제, 범죄 사기는 인공지능 기술 이전에도 존재했던 기본값의 문제들이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술은 가짜뉴스와 범죄 사기를 더욱 교묘하게 만들고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퍼트린다. 변화를 앞둔 사회는 어수선하고 초조하다. 변화의 물결이 거세고 방향성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해외 동향 유럽, 미국 등의 기술 강대국이 인공지능 기술을 받아들이는 갈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 보인다. 이용자 보호 우선에 중점을 둔 법규제 방식과 선제적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둔 기업 자율성 보장이다. 전자의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유럽연합이 있다. 유럽연합은 2020년에 인공지능 백서를 지침서로 만들었다. 유럽연합의 인공지능 대응 핵심은 인공지능 기술 구축과 확산에 있어 윤리성을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제 및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김지윤, 2020) 기술과 관련된 법은 기본적으로 규제의 성격을 띤다. 기술 개발에 제어를 거는 동시에 이용자를 보호하는 효과를 보기 때문에 안정성을 위해서는 법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영국은 유럽연합과는 다르게 규제보다는 기술에 대한 투자로 혁신 촉구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3월 영국도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백서를 제작했다. 인공지능 사용 촉진을 위해 안전/보안, 투명성 및 설명 가능성, 공정성, 책임 및 거버넌스, 경쟁 가능성 등 5가지 원칙을 발표하고 일자리 창출과 의료 기술 개발을 기대하며 1600억이 넘는 투자를 약속했다.  (에이아이타임즈 2023.03.29) 미국은 의외로 인공지능 기술 규제와 개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술 개발, 혁신을 외치는 모습이었다가 빅테크 기업 경영인들의 우려로 인공지능 기술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아직 어느 입장을 뚜렷하게 고수하지 못하고 논의만 이어가고 있다. (에아이아타임스 2023.03.30) 전 세계 이용자들의 데이터를 쓸어모으고 있는 빅테크 기업이 밀집한 미국 내부에서 이런 서한이 나온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한국 정부 물론 지난 2020년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이른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공지능 윤리기준’을 마련했다. 인공지능 윤리기준의 3대 기본원칙과 10대 핵심요건을 발표했다. 인간의 존엄성 원칙, 사회의 공공선 원칙, 기술의 합목적성 원칙이다. 10대 핵심요건은 인권보장, 프라이버시 보호, 다양성 존중, 침해금지, 공공성, 연대성, 데이터 관리, 책임성, 안전성, 투명성을 언급한다. (대한민국 전자정부 누리집,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20.12.23) 온갖 좋은 말을 기본으로 원칙을 세웠지만, ‘자유’에 영혼을 바친 현 정부가 과연 이용자 보호를 위해 인공지능 기술 개발을 규제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인공지능도 지구의 땅을 밟고 서있다 과기부의 자료에 따르면 “‘인공지능 윤리기준’을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하에 인공지능 윤리 쟁점을 논의하고, 지속적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쳐 주체별 체크리스트 개발 등 인공지능 윤리의 실천 방안을 마련한다”라고 나와있다.  윤리 쟁점에 대한 논의와 지속적 토론, 숙의는 매우 중요하다. 이해관계자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것이 숙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윤리의 쟁점과 방향에서는 인간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이야기할 수 있다. 윤리, 도덕, 공동체 가치 등 철학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윤리를 논하는 이유는 그만큼 기술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윤리 구성에는 가짜뉴스, 노동시장의 변화 같은 사회적 시각도 중요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생태적 관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지구적 존재임을 망각하고 지구 자원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는 바람에 현재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태평양의 섬이 물에 잠기고, 이상기온으로 산불, 홍수 재난을 수시로 겪는 일상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공지능 기술은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무형의 존재가 아니다. 데이터 보관소와 컴퓨터 기계로 구성된, 물리적 실체를 갖고 있는 존재다.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는 전력, 에너지 자원이 어마어마하게, 정말 어마어마하게 소모된다. 2021년 발표된 연구논문에서는 챗GPT의 핵심 기술인 언어모델이 학습하는데 1천 287메가 와트시(MWh)가 소모된다고 한다. 이는 미국 120개 가구의 1년 전기 사용량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110개 가구의 1년 배출량에 해당하는 502톤의 탄소가 배출됐다고 한다. (매일경제 2023.03.10)  기술 개발과 에너지자원, 기후위기가 이루는 삼각 균형은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이다. 인공지능 기술 개발이 에너지 자원의 한정치를 넘어서면 균형은 무너진다. 인공지능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공지능을 지구적 존재로 먼저 인식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논해야 한다. 챗GPT와의 대화가 그만한 전기 사용량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기업이 인류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얻은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것인가, 혹은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위기 문제에 얼마큼 책임을 물을 것인가. 인공지능이 ‘기술’로만 분류될 때, 인간 사회의 윤리는 더욱 시험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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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사회와 기술이 발전하면 법과 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의 법이다르고,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의 법이 다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우리의 제도를 어떻게 바꿔나갈까? 오늘은 그 중에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공지능은 기존 정보와 자료들을 모아 특정한 알고리즘/수식을 이용해 결과를 산출하는데, 지금까지 나온 인공지능들은 기존 자료들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앞으로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 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이 유기체들처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 나오지 않는 한, 인공지능은 기존 정보를 가지고 인간의 화법을 얼마나 잘 모방해 내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정확히 어느 정도의 비중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기존 정보/자료의 상당히 많은 양이 개인정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과 개인정보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세 가지, 수집과 산출, 공적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수집은 인공지능의 학습을 위해 수많은 정보를 수집함에 있어서 개인정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이며,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산출은 인공지능이 특정인을 타겟으로 삼아 검색 기록 등을 기반으로 해 결과를 보여주는 일이 많은데 (특히 마케팅) 이 때 개인이 식별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에대한문제다. 공적 영역에 대한 문제는 인공지능을 사회의 안전이나 국민의 편리를 위해 사용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를 허용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계속 빨라질 것이다. 우리는 그 만큼 개인정보에 대한 논의도 지금보다 더 활발해져야 한다. 인공지능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SNS에 올라온 사진 배경만 보고도 특정인의 동선이나 거주지를 유추할 수 있고, 이름과 다른 정보 하나(예를 들어 다니는 회사, 출신 학교 등) 정도만 알아도 검색을 통해 특정인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공지능은 매우 뛰어난 검색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의 개인 정보 수집과 개인 식별은 (정확히 어느 정도일 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하는 검색/개인 식별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정보의 개념, 우리가 어디까지를 보호해야 할 개인정보로 봐야할지에 대해 다소 느슨할 지라도 구체적인 범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고, 이것이 유출될 경우 사업자와 개발자, 기술 그 자체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하며, 유출된 개인정보에 대해 어떻게 사후처리, 아마도 대부분은 배상이나 삭제가 되겠지만 심각한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는 공적인 사후처리 방식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한국과 같이 포괄적인 개인정보보호법은 없지만 공적인 영역과 민간 영역을 의료, 금융, 교육, 교통, 형사사법 등으로 세분화해서 개인정보, 알 권리를 정의하고 수집의 범위, 정보의 처리와 수정, 삭제 권리 등을 규정하고 있다. 법에 따라 다 다르지만 사업체, 서비스 제공업체, 계약업체, 개인 등이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을 어기면 1건당 최대 7,500달러의 벌금을 매긴다. (개인정보보호 국제협력센터) 미국의 경우에는 미성년자의 개인정보 보호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원래 미국과 마찬가지로 민간 영역을 세분화하여 개인정보에 대해 관리/보호/규제를 해왔는데, 2021년에 처음으로 개인정보보호법(中华人民共和国个人信息保护法)이 제정/시행되었다. 이 법에서는 전자 혹은 기타 방식으로 기록된 것, 이미 식별되었거나 식별할 수 있는 자연인에 대한 정보로 익명으로 처리된 것까지를 전부 개인정보로 정의하고 있다. 개인정보와 관련해 위법행위가 위중한 경우, 혹은 법을 어겨 시정명령을 받았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최대 100만 위안의 벌금이 부여된다.  단 이 법은 국가와 공공기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이미 안면인식기술과 인공지능을 통해 사실상 디지털 독재를 시행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한다. 도시의 감시카메라들은 무단횡단이나 노상방뇨, 대중교통 무임승차, 쓰레기 불법 투기 같은 경범죄까지 전부 잡아내고 불이익을 줄 수 있다. (中华人民共和国个人信息保护法) 일본은 2003년에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個人情報の保護に関する法律)>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는 개인정보를 ‘생존한 개인에 관한 정보’로 성명, 생년월일과 그것이 기록된 문서, 전자기록, 음성과 동작, 기타 방법을 이용해 표시된 일체의 개인적 사항으로 규정하였다. 개인정보에 관한 법률을 어길 경우 최대 100만 엔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個人情報の保護に関する法律)  일본의 경우에는 개인정보 보호의 일원화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은 원래 국가와 지방, 민간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개인정보를 보호/관리하고 있었다. 이것을 2014년에 발족한 개인정보보호위원회(個人情報保護委員会)로 일원화하는 것을 두고 지방자치 발전 문제, 개인정보와 중앙-지방의 권력 균형 간의 관계, 국가와 민간의 관계 등 여러 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경우, 기업, 특히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개인정보보호법을 완화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별 스타트업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업계의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법 위반 여부가 확실한 경우엔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사과해야 하지만, 스타트업의 신규 사업 영역이 기존 법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유권해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한경.2022.11.16.) 강병원 의원은 개회사를 통해“현행 개인정보 규제로는 혁신을 이끄는 스타트업 기업의 성장이 저해되고 글로벌 경쟁력도 저하될 우려가 높다”고 지적하며 “시대적 흐름에 맞추면서 정보 주체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개인정보에 대한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는 실질적인 방법들을 고민할 때이기 때문에 이 토론회를 개최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대한뉴스.2023.03.30.) 경제신문들은 잊을만 하면 개인정보보호법이 스타트업을 덮쳤다거나 스타트업의 성장을 막는다는 헤드라인을 뽑아내고 있다. 이들은 개인정보 보호가 기술의 발전을 막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상행위를 규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익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이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는 입장과는 대치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한국의 법률은 개인정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2조 1. “개인정보”란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보를 말한다.  가. 성명, 주민등록번호 및 영상 등을 통하여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  나. 해당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정보. 이 경우 쉽게 결합할 수 있는지 여부는 다른 정보의 입수 가능성 등 개인을 알아보는 데 소요되는 시간, 비용, 기술 등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다. 가목 또는 나목을 제1호의2에 따라 가명처리함으로써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기 위한 추가 정보의 사용ㆍ결합 없이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는 정보(이하 “가명정보”라 한다) (이상 개인정보보호법) 한국의 개인정보에 대한 제도적 정의는 자의적인 해석 가능성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보호해야 할 범위 자체를 넓게 잡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만 특정인이 명시되지 않은 경우에는 합리적 고려에 의해 명시 가능성을 판단한다고 되어 있다. 완벽한 제도야 있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도 ‘합리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이래저래 다툼의 소지가 너무 많다. 법률의 발전은 대체로 사회의 발전보다 느리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인터넷 강국이고 IT 강국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의 개인정보에 관한 논의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많이 늦다. 사업자도, 개인도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개인정보보호법은 공론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보호해야 하는 개인정보의 범위에 대해 지금이라도 논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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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아버지는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해피엔딩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가난한 집에서 살아가는 찰리가 윌리웡카 초콜릿에서 뽑은 황금티켓으로 초콜릿 공장을 탐방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찰리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산 초콜릿에서 전세계 5장 뿐인 황금티켓을 뽑는다. 해당 티켓은 베일에 쌓여 있던 윌리웡카 초콜릿 공장의 입장권으로, 티켓을 가진 사람에 한해서 베일에 쌓여 있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을 보여주는 초대권이다. 티켓을 뽑은 찰리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걸 알았고, 티켓을 팔려고 한다. 하지만, 팔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그와 함께 윌리웡카의 초콜릿 공장으로 향한다. 별난 이벤트처럼, 별난 내부를 탐험하며 초콜릿 공장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그 공장을 빠져 나온다. 쥐구멍에도 볓들날 온다는 말처럼, 찰리의 가정에도 또 다른 빛이 든다. 애초 로봇의 등장으로 실직한 아버지가, 로봇 수리공으로 재취업에 성공한 것. 그렇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노동자 임금, 근무시간 등 다양한 걸 보여준다. 챗 GPT의 대두로 주목되는 건, 찰리가 아닌 그의 아버지 모습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단순 노동이 사라질 것이고 오히려 높은 수준의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영화 속 찰리 아버지가 치약 뚜껑을 닫는 일을 하다가, 로봇의 등장으로 실직했다가 오히려 그 로봇을 수리하는 일로 재취업에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찰리 아버지는 이 두 주장을 몸소 보여준다. 현실은 어떨까? 로봇과 AI가 인간의 일을 모두 대체할까? 아니면, 또다른 일이 생겨나고 그 일을 하게 될까? 찰리의 아버지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로봇과 AI가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말은 너무 오래됐다. 실제 일부는 대체되고 있다. 기계는 커피도 내리고, 닭도 튀기고, 서빙도 한다.  커피를 내리는 카페도 심심치 않게 본다. 이런 내용을 보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건 사실로 보인다. 실제 국내 산업 현장에서 로봇은 활발히 쓰이고 있다. 단순 서빙, 커피 제조, 닭 튀기기만이 아니라 자동자 제도에도 활발히 쓰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로봇 밀집도가 1위다. 제조업 근로자 1만 명 당 로봇 대수는 932개로 2위인 싱가포르 605개의 거의 1.5에 달한다.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나라는 로봇 도입 속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다. 이런 추세 때문에 보스턴컨설팅 그룹은 지난 2015년에 발표한 <The Robotics Revolution: The Next Great Leap in Manufacturing> 보고서에서 한국은 2020년까지 제조의 20%를 로봇이 하고, 2025년에는 40%까지 상승할 것이라 발표했다. 산업 현장에서 로봇을 사용하는 건 위험한 업무에 사람을 투입하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효율성도 높고, 효과성도 높다. 실제 로봇 도입으로 인해 산업 현장에서 산업재해 발생 건 수가 줄었다는 연구도 있다. 더구나 로봇은 파업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효율성, 더 많은 효과성, 경제성 측면에서 산업계에서 로봇을 쓰지 않을 이유가 사실상 없다고도 보여진다. 오히려 인간을 쓸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든다. 로봇의 등장으로 부가적인 서비스도 등장하겠지만, 도입된 로봇의 수만큼 늘어나진 않을 것이다. 931대의 로봇을 931명의 인간이 수리하는 게 아니라, 일부의 사람이 로봇을 수리할테니 말이다. 931명의 사람이 로봇으도 대체됐다면, 수리공으로 재취업 한 찰리의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될까?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는 어디로 갈까? 미래 국가 모습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으나, 실업이 사회혼란과 문제라는 점은 명확하다. 때문에 국가나 시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시민은 대안을 마련하라며 목소리를 낼 것이고, 국가는 그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마련할 것이다. 또한, 틈새 시장을 노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 혹은 산업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나타날 노동의 모습이 결코 질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미래 노동의 질이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말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노동자를 일에서 밀어 낸다면, 어쩌면 별의 별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공유경제가 활성화 되어, 기존 인간이 하던 다양한 일을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개똥 치우는 일도 정말 현실에서 일로 받아들여 질지도 모른다. 실제 2016년 Pooper라는 서비스가 공유경제를 이름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면, 개똥을 치워주는 일이었다. 실제 서비스는 아니고 예술프로젝트였다. 벤베커는 “직접 해도 되는 일까지 긱경제에 맡기는 행태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금의 세태를 꼬집고 싶었다”고 말한다 있다.¹  로봇과 AI의 인간대체, 노동과 질을 함께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미래를 확정할 수 없으나, 로봇과 AI로 인간의 노동에 큰 변화가 생기리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일자리의 수가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노동의 질 역시 ‘인간이 이런 것까지 해야 되나?’라는 의문이 드는 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건, 인간과 로봇, AI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한계는 어떻게 둬야 할지 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미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의 질 문제 정비도 필요해 보인다. 여전히 사회 어디에선가는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마땅히 법으로 정해진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 미래엔 로봇과 AI를 다룰 줄 알고, 설계할 줄 알고, 개발할 줄 알고,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지 모른다.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가 미래엔 더 벌어지지 않도록, 시민들이 머리를 대고 토론해야 될 것 같다.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 (악렉산드리아J. 래브넬, 롤로코스터, 2020, p.282)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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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함께 일하는 미래 -희망편-
인공지능 로봇과 우주를 탐사하고, 사랑에 빠지고, 편을 갈라 전쟁을 치르는 이야기들이 수많은 영화와 소설을 통해 존재했습니다. 서사에 의존한 상상의 나래는 즐겁습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부담 없이 마음껏 가능성을 꿈꿀 수 있죠. 하지만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일상은 더 이상 가상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AI를 활용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수많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리라 전망합니다. 캠페인즈에서도 관련한 토론과 투표 컨텐츠들이 있었죠. AI가 여러분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나요? 인공지능과 인간이 일상속에서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인공지능의 존재부터 모든 상황을 만든 게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라는 점이 좀 우스울 것 같습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24시간 일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자본가 관점에서 매력적인 노동력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AI의 오류나 치명적인 실수를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할 것인지 명확한 제도나 법안이 마련되지 않은 만큼 무분별하게 AI에 직무를 맡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게다가 AI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탄소가 배출됩니다.  AI는 친환경? 알고 보면 탄소 뿜는 AI! 물밀듯이 나오는 AI 이슈를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휩쓸려 버리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바라볼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이왕이면 긍정적인 상상을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대비해야 하는 것은 미래에 있으니 말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폭풍처럼 체계를 뒤엎으면서 눈에 보이는 효율만을 추구할 때, 인간적인 가치를 지켜낼 ‘미래의 직장인’ 시나리오를 써보면 어떨까요? AI를 인간의 든든한 동료로 만들어 줄 건강한 상상력과 계획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나의 직업은 상담원, 동료는 AI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가 빗발치는 고객센터, 상담원들은 바쁘게 고객들을 응대하고 있습니다. 한 상담원이 말을 잠시 멈추고 뭔가 기다리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던 듯 다음 고객과 전화 연결이 되어 밝게 인사를 건넵니다. 서비스에 불만이 많은 고객이 통화 중 욕설을 시작하자  자동으로 AI 상담원에게 통화가 이전된 것입니다. AI 상담원은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되는 차분한 음악을 들려주며 불만 고객의 폭주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본 매뉴얼의 상담을 제공합니다. AI 상담원에 대한 평은 고객들에게선 그리 좋지 않지만, 상담원들에게는 호평받는 편입니다. 이전에는 상담원을 향한 욕설과 성희롱이 빈번하여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잦은 이직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상담원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AI 동료가 방패 역할을 해줍니다. 자동실행이기 때문에 상담원은 통화를 지속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상담원은 “부정적인 말을 잊기 위해 쓰는 에너지를 아끼기 때문에 다른 고객님들께 더 친절하게 상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라고 전했습니다. #2. 데이터 청소부 ‘호록’ N잡러(겹벌이)로 일하고 있는 김앤잡씨, 오늘도 공유 오피스로 출근했습니다. 큰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채워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노트북을 열자, 화면이 밝아지면서 파란 유니폼을 입은 귀여운 코끼리가 등장합니다. “굿모닝!” 밝은 아침 인사에 앤잡씨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코끼리는 앤잡씨의 작은 동료, 데이터 청소부 ‘호록’입니다. 앤잡씨는 예전부터 업무는 물론 쇼핑이나 자기 계발도 인터넷에서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광고, 스팸, 단순 알림성 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워도 지워도 계속 쌓이는 메일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앤잡씨는 데이터 청소 AI, 호록이를 구매했습니다. 호록이는 앤잡씨가 메일함에서 어떤 것을 읽지 않고 지우는지/읽지만 보관하길 원치 않는지 학습했습니다. 쇼핑몰에서 보내는 단순 알림 메일과 여기저기서 오는 광고들은 호록이가 모두 정리하기 때문에 요즘은 메일함이 가벼워졌습니다. ‘데이터 미니멀리즘(최소주의)’이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데이터 청소부를 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시나리오를 현실에 적용하려면 많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자원도 많이 필요할 테고요. 다만, 아이디어가 모이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정된 자원을 현명하게 투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보 분석이 필수니까요. 기술은 어떻게 발전해야 하고 인간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첨단기술의 시대를 맞닥뜨린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요?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직장 생활,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함께 나누어주세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가볍게 던져 주셔도 좋습니다. (예: 진짜 진짜 최종파일의 이전 버전은 이름을 자동으로 변경해 주는 AI, 점심/회식 메뉴 의견 취합해서 예약해 주는 AI 등)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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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는 시민의 ‘역량’을 높이려 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작년 7월,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습니다. 1964년 운크타드 창설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합니다.(한겨레, 20210704)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에 이를 자랑스러워 하며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로 성장했으며, P4G 정상회의 개최와 G7 정상회의 2년 연속 초청 등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역할이 확대되었다”고 말했습니다.(브릿지경제, 20220706) 올해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글로벌 수출 7위의 무역 강국, 종합군사력 세계 6위, 혁신지수 세계 1위의 당당한 나라가 됐다"며 “세계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됐"다며 자부심을 보였습니다.(한국일보, 20220301) 한국이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세계 경제 순위이며, 그것은 곧 ‘국내 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와 동일시 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 차원의 부의 증대는 국민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낫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GDP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중요하고 경제의 성장이 지상과제가 됩니다. 하지만 다른 지표들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16.7%로 OECD 4위, 노인 빈곤율 2018년 기준 43.4%로  OECD 1위라고 합니다.(MBC, 20220303) 한국사회의 불평등 지표인 가처분소득, 지니계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국가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복지 예산은 GDP 대비 10% 정도로 여전히 다른 모든 선진국보다 낮은 상황입니다.(오마이뉴스, 20220225) 국가 차원의 총 부는 선진국일지 모르겠지만, 개개인들의 삶들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GDP 중심 접근의 협소함을 넘어이 글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GDP 중심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주의: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간략하지 않을 수 있음) 아래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내용 전부는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책과 책 저자의 아이디어에 대한 소개이기도 합니다. [GDP 접근법]은 1인당 GDP 증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잘살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GDP 접근법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 측정하기 쉽습니다.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여러 재화와 서비스를 비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 투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 경제성장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습니다.  GDP 접근법에 대한 옹호는 ‘트리클다운(낙수) 이론’에 기대고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성장에 따른 구성원 개개인의 물질적인 삶의 증진이라는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의 양극화 현상등을 통해 낙수 이론은 점점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GDP 개념이 [1] 돈이라는 협소한 관점에서, [2] 부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게다가 [3] 삶의 질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단일한 수치로 나타내고자 하니 양극화도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적인 필요와 만족 등을 파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량 접근법’의 정의와 간략한 설명아마티아 센, 마사 누스바움 등은 GDP 접근법을 역량 접근법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역량 접근법은 국제 개발 정책의 맥락에서 삶의 질 높이려는 가난한 국가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모든 국가가 인간의 역량 발전과 관련하여 정의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말합니다. 역량접근법은 다음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누스바움, 2015. 28~29)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기회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고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을 세우기 위한 접근법"이 할 수 있습니다. 역량 접근법은 “선택과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회와 실질적 자유를 증진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가 사람의 기본적 품위나 정의를 지켜주는지 비교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보며, “사람을 목적으로 보면서 총체적 잘살기나 평균적 잘살기가 무엇인지 묻고 사람이 어떤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살”피고자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규정할 역량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 접근법은 “가치다원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뿌리 깊은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 특히 차별이나 소외의 결과인 역량 실패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에 따라 “사람의 역량과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정부와 공공정책의 시급한 과제"라고 여깁니다.(누스바움, 2015. 33~34)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이 제안하는 역량 접근법의 목적이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정치적 권리에 관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존엄성, 최저수준, 정치적 자유주의 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시작부터 윤리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셈입니다.(누스바움, 2015. 34) 살펴본 바에 따르면 역량접근법은 GDP 접근법의 협소함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포착하고 현실화 하기 위해 인간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안하고 현실화, 정책화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는 현실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적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진적인 방법이니 대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GDP 중심의 경제성장지상주의의 협소한 이해를 넘어 좀더 나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가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역량’이란 무엇인가?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역량]은 “‘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누스바움의 설명은 아마티아 센의 관련 논의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티아 센은 역량을 “‘실질적 자유'이자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이며 “사람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의 선택 가능한 조합"이라고 정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은 일종의 자유, 즉 선택 가능한 기능의 조합을 달성하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환경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유나 기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5~37)  누스바움은 센의 논의에 더해 역량을 ‘결합역량’과 ‘내적역량’으로 구분합니다. [결합역량]은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기회의 총합"으로서 실질적 자유를 지칭합니다. [내적역량]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유동적인 사람의 상태"로서 “훈련되거나 계발된 특성과 능력"을 말합니다. “결합역량은 내적역량에다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더한 것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개념상 내적역량을 생성하지 않고 결합역량만 생성하는 사회는 생각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누스바움, 2015. 37) 쉽게 말하면 정치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실질적 자유로서의 역량(결합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훈련된 역량(내적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거나 독려해야 할 것들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역량]은 “계발될 수도 계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선천적 역량"을 의미합니다. 기본역량은 “누구나 강제된 기능이 아니라 선택하고 행동할 실질적 자유를 의미하는 결합역량을 최저수준 이상으로 가져야 한다"는 주장의 전제가 됩니다. 누구나 기본역량을 지니고 있고, 이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결합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최저수준 이상의 결합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대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 또한 뒷받침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장애인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나은 사회인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8~39)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내적역량을 갖추고 결합역량에 도달하고 누릴 수 있는 잠재적인 기본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0대 핵심역량마사 누스바움은 지금까지 살펴본 역량에 대한 논의에 입각하여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10대 핵심역량을 제시하며, 최소한 최저 수준을 보장 할 수 있도록 해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10대 핵심역량의 정의와 그와 관련한 목표 설정,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측정은 GDP 접근법과 구별되는 역량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생명life 인간은 누구나 평균수명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보장되어야 합니다. [2] 신체건강bodily health 인간은 누구나 건강, 적절한 영양 공급, 적합한 주거 공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3] 신체보전bodily integrity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적 만족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감각, 상상, 사고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인간은 누구나 “감각기관을 활용할 줄 알아아 하며, 상상하고 사고하고 추론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을 통한 (시민) 역량의 확보를 필요로 합니다. 교육은 경험, 사고력과 상상력의 동원할 수 있도록 하며, 정치적 표현, 미적표현, 종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5] 감정emotions 인간은 누구나 “주변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슬픔, 갈망, 만족, 분노, 공포 불안 등 다양한 감정발달, 그 감정을 누릴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합니다. 이는 다양한 인간적 유대관계의 지원을 의미합니다.  [6] 실천이성pratical reason 인간은 누구나 “선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삶의 계획을 비판적으로 성찰 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실천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7] 관계affiliation 인간은 누구나 1)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른바 관계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혐오와 차별 없이 존엄한 존재로 대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 인간 이외의 종other species 인간은 누구나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9] 놀이play 인간은 누구나 “웃고 놀 줄 알아야 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 환경 통제control over one’s environment  인간은 누구나 1) 정치적 측면에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선택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치참여의 권리와 언론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2) 물질적 측면에서 재산소유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부당한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직장에서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스바움, 2015. 49~50)10대 핵심역량의 각 항목들은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천이성 역량을 높이는 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모든 핵심역량을 직접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 역량 덕분에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존중받"습니다. “공공정책에 관한 심의에서는 가족관계, 친구관계, 집단 간 관계, 정치적 관계 등이 구조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관계 역량은 다른 역량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합니다.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의 발전 속에서 모든 핵심 역량에 대해 이해하고 성찰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51~59) 이와 같은 [10가지 핵심역량 목록]은 시민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며 좀더 높은 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수준의 구체적인 보장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고안되었습니다. 그리고 10대 핵심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출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회정의의 최저수준을 엄밀하게 정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공간에서의 맥락에 따라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목록은 최종본이 아니며,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누스바움, 2015. 51~59)  ?돈,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는 아니다.국가와 기업은 경제성장만을 외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돈만 좇도록 강제되는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도 중요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한 삶에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사회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극한의 무한경쟁 속에서 돈만 되면 무엇을 하든 용인되는, 대다수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화폐물신주의가 절대 바뀔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폐쇄적인 조건 때문일까요? 역량 접근법은 다른, 다양한 만족스러운 삶의 가능성을 고민해보고 실험해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A 대신 B로의 총체적인 대체’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역량 접근법에서의 논의들과 10가지 핵심역량의 현실적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하나씩 확장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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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어공주>는 <원작 인어공주>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인어공주는 과도한 PC?] 글의 댓글에 달리는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읽어보면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관계가 한층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이미 여러곳에서 이번 <인어공주>의 영화적 요소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PC에 굉장히 친화적이고 지지하는 트위터 이용자분들 중 몇몇도 배우가 아닌 감독을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저 역시 작품에 PC요소를 입힐 때 무엇보다 감독 및 연출진과 배우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영화는 아니지만,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2>가 큰실패를 겪은 이유 역시 연출의 실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라오어2와 라오어3으로 파트를 나눠서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을 제대로 관리했으면 어땠을지...)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인어공주> 영화가 ‘아쉬웠다’라던가, ‘흥행에 실패했다’라고 말할 자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책임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콘텐츠로서 <인어공주>는 분명 원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향후 어떤 인종, 실력의 배우가 연기하든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는 영원히 보존되면 보존되지 다른 버전의 <인어공주>에 의해 삭제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작을 ‘훼손’하는 게 애초에 아닌 셈입니다. 단지 ‘원작의 다른 버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아이들이 원작을 찾는다구요.’라는 글을 보았습니다만, 바로 그때, ‘아이들’과 ‘우리(성인)’를 분리할 단계가 된 성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가 분명히 있고, 그럼에도 이번에 ‘다른’ <인어공주>를 디즈니에서 왜 제작해 상영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성인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이번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이런 맥락에서 ‘어두운 피부’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니 배우의 실력이나 감독의 연출을 아쉬워할 때 ‘흑인 배우’를 끌어들였다는 부분을 탓하는 건 애초 영화의 제작 목표를 오인하거나 부인한 결과로밖에 안 비출 것 같아 우려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약 백인 금발 남성이 홍길동을 연기하든, 중국인이 슈퍼맨을 연기하든, 이미 인터넷이 널리 퍼진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원작’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작’을 잊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합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영원히 영광의 자리에 남을 테니까요. 그 어느 ‘아류작’도 ‘원작’을 존경했으면 존경했지 삭제시키고자 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흑인이 캐스팅된 그것 하나만으로 박수를 치실 필요도, 영화의 모든 라인과 연출이 망가진 이유를 흑인 배우 캐스팅에 전부 갖다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 <다른 버전>의 영화는 원작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버전을 제작해보았을 뿐이니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박수를 치실 필요가 없고, ‘다르다’는 이유로 영화의 여러 흠을 비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글이 길어지는데, 이번 <다른 인어공주>를 비판할 때 그 기준을 <원작 인어공주>로 삼으시는 것 자체가 영화의 기획 의도와는 어긋나는 논지의 비판입니다. 못 만들었다면 그냥 배우의 실력과 감독 및 연출진의 실력 탓입니다. 애초 '원작의 다른 버전'을 기획했으니 '원작과는 다른 인종'이라서-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기획 의도를 오인하지 않는다면요).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글에 항상 달리는 댓글이 있습니다. 정작 흑인들도 한국인들을 향한 혐오를 남발한다는 게 그 내용이죠. 실제로 많은 뉴스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코로나19 이후 아시안 혐오가 증가하고 있는 건 분명 문제입니다.  하지만 ‘흑인도 아시안을 혐오하니 우리도 흑인 존중할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은 지나치게 섣부른 선택이거니와, 결국은 백인만이 승리하는 논리로 빠지게 됩니다. 기득권 바깥에 사는 사람들 간의 갈등은 점차 심해지는 와중에 세계화는 더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가속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보다 이른 시기 내 이웃으로 흑인이나 동남아인들을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상호존중의 담론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담론의 형성에는 무엇보다 미디어의 힘이 큽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원작의 다른 버전>들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훗날 아이들이 ‘다름에 대한 존중과 거부감 사이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그것을 다루지 못했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아이들)가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진흥은 미래세대의 '돌봄'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기업’의 책임은 미래세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디금부터라도 ‘다름’에 대한 존중의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에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디어 '상업'예술에서 '상업'의 측면, 즉 소비자가 돈을 내고 소비하는 측면을 감안해 이번 주제와 연결하자면, 우리는 '보다 올바르고, 따라서 더 안전한 미래'를 만드려는 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상업예술의 '상업'에는 이런 측면도 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을 애매한 글이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원작의 다른 버전>은 <원작>을 해칠 의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애초 기획 의도를 왜곡해 퍼뜨리는 담론의 탓일 겁니다. 
'신상 공개'라는 것을 공론장에 가져올 필요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 가독성을 위해 높임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A : “… 그리고 집단 괴롭힘으로 아이를 잃은 유족에게 복수를 권했다더군. 『왕따 가해자』란 명칭만 붙고 끝난 죄인에게 합당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면서.” B : “그 기준을 누군가가 멋대로 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법이 무용지물인 세상이 오겠죠.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으면 누구도 따르지 않게 될 거예요. 완력과 재력 같은 힘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기에 법은 약자를 구할 수 있는 거예요.” A : “... 그렇다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를 법이 벌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법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자를 못 본 체 하는 건 법으로 지키지 못하는 자를 버리는 짓이야.” B : “(침묵하다가) 사람을 벌하려면 그러기에 충분한 증거가 필요해요.” A : “(스포일러) 씨가 복수를 권한 사람 중에는 역시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면서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더군. 하지만 그런 경우도 (스포일러) 씨의 정보가 경찰에 신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복수라는 선택을 하고 안 하고와는 상관없이 (스포일러) 씨의 권유 자체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란 거다. 그에 비해 법이란 건 불공평하고 불완전하지. 아닌가?” 주인공 : “맞는 말이야. 하지만 공평해지기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어. 완벽함을 목표로 법률도 계속 변하고 있지.” A : “(책상을 내려치며) 그래선 너무 늦어!! 토시로는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미코시바 히로는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어.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실습까지 받고 있었다고! 그런 인간이? 말도 안 되지! 법률이 공평해지기만 기다린다면 난 늙어 죽을 거다. … 그럼 손을 더럽히는 것 말고 내게 무슨 방법이 있지!? 내가!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한 장면이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의 아들(토시로)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버지 A는 몇 년 뒤 그 학교폭력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C(미코시바)가 교육실습생으로서 교편을 잡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을 자살까지 내몰리게 한 이가 교편을 잡는다니! 절망하고 있는 A에게 범인(스포일러)이 다가온다. 그는, 자신은 지금껏 몇 명이나 되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그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피해 학생의 유족들의 ‘허락’을 받고 살해했다고, 정확히는 그 유족이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만약 A만 허락한다면 이번에도 C에게 ‘합당한 처벌(죽음)’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A는 승낙했고, 범인의 도움을 얻어 알리바이를 확보한 채 C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이 복잡하고 어두운 사건을 쫓아 진실을 밝혀내는 게 주인공(플레이어)의 역할이다.   게임 속 A의 울분을 이해하지 못할 이가 현재 대한민국에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A의 대사를 빌리자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들이 사회 속에 너무 많이 녹아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처럼 직접적인 살인으로 보복(여기서 ‘보복’이란 단어는 중요하다)을 가하자고 진지하게 주장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적어도 ‘문명화된’ 세상에서는 말이다.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의 ‘생물적 목숨’을 끊을 수는 없으니, 그나마 실현 가능한 ‘보복’은 그의 ‘사회적 목숨’을 끊는 일이다. 이것이 곧 ‘신상 공개’이다. 최근 우리는 신상 공개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노출되고 있다. 1) 古전두환의 손자인 전우원씨는 3월 13일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의 할아버지인 古전두환은 물론 그의 가족을 고발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 지인들의 성범죄와 마약 등 범죄 행각을 고발하며 그들의 실명과 사진, SNS 대화 내용을 캡쳐해 공개했다. 2) 올해 1월부터는 대한민국의 미용사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표예림씨가 자신의 초중고 시절 학교폭력 사실을 밝힌 사건이 있었다. 표예림씨 스스로가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4월 13일 ‘표예림동창생’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개설돼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신상이 공개됐다. 3) 최근의 일로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일이 있다. 6월 2일 유튜브 채널 ‘카라큘라 탐정사무소’에서 피의자 이모(30)씨의 실명과 사진을 포함해 직업, 생일, 키, 혈액형과 이씨의 과거 전과기록까지 공개한 것이다. 영상에는 피해자 김모씨도 등장해 “저는 (가해자의 신상 공개가) 너무 필요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피해자로서 평생 가해자가 교도소에 있었으면 좋겠고, 애꿎은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위 세 개의 신상 공개 사건은 전부 피해자 또는 목격자(증인)가 자발적으로,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됨을 알면서도 ‘저지른’ 신상 공개이다. 한편 우리는 다른 측면의 신상 공개도 떠올릴 수 있다. 4) N번방 사건의 조주빈, 5) 동거녀와 택시 기사를 살해한 이기영(31), 6)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해 피의자 전주환, 7) 그리고 최근에는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정유정(23)의 신상이 ‘국가’에 의해서 공개됐다. (4,5,6번과 7번을 비교하며 유독 국가의 신상 공개 결정이 여성에게 더욱 '쉽게' 행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1~3까지의 사례와 4~7까지의 사례는 양쪽 모두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주체가 다르다. 즉, 전자는 ‘개인’이 후자는 ‘국가’가 공개했음이 다르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형태의 신상 공개도 있다. 8) 2018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배드파더스’는 양육비 지급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의 신상을 인터넷에 게재해 왔다. 9)‘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3~8월 디지털 성범죄, 살인, 아동학대 등 사건 피의자의 신상정보와 법원 선고 결과 등을 ‘디지털 교도소’라는 사이트에 게시했다. 사이트 운영자는 베트남에서 붙잡혀 2021년 9월 29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0)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속출하자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나쁜 집주인’이라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법조계에서는 공익을 목적으로 사이트가 개설됐지만,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라고 한다. 8~10은 4~7처럼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신상 공개가 아니다. 그보다는 행정적인 제재에 가깝다.  1~3처럼 신상을 공개하는 자와 공개 당한 자가 '가해자-피해자(전우원씨는 '가해자 무리'로부터 전향한 사례) 관계'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보다는 '나쁜 사람-일반 대중 관계'라고 보는 게 더 옳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신상 공개가 범람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건 공개된 개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호소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에 관해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글을 적는다.  당장은 공부가 부족해 논의를 전부 개진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볼 수 있음직하다.  A) 신상 공개와 '사적 제재'의 관계는 무엇일까? 둘은 반드시 일치하는가, 아니면 사적 제재의 목적을 갖지 않는 신상 공개는 가능한가? B) 신상 공개의 정당성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인정되는가? '정당성을 인정 받은' 신상 공개는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옳은가? (제재/처벌/복수/정의의 실현의 분리 문제) C) 신상 공개의 동기는 무엇인가? 동기의 갈래가 정당성의 인정 여부를 가르는가? 주체는 누구인가? D) 좀 더 넓게 보자면,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범죄인, 또는 가해자와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는가? 이것은 포용-용서-관용-더불어 살아가기-정의-공동체-회복-갱생-신뢰-사회적 자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 또 동시에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나와 내 주변인의 '인간성'을 어떻게 건드리는가?  F) 신상 공개의 법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원래는 이 글을 첫 글로 쓰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밀려와 이제야 첫 발을 내딛게 되네요. 최근의 여러 사건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위에서 저렇게 질문들을 나열했지만, 저는 윤리철학이나 법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신상 공개에 관한 글을 쓰더라도 분명 애매한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캠페인즈는 공론장이니까, 먼저 이 글을 올림으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회가 도래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예상컨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디지털 기술은 더더 발전하고, 신상의 자발적-비자발적 공개(노출)는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단순히 '숨어 지내던 범죄인을 향한 정의의 철퇴'를 휘두르는 어떤 도덕적 쾌감만이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당장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이의 어떤 '추악함'이 목격되버릴 수도 있고, 그것이 범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정체성과 관련된 '커밍아웃'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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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인공지능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선, 범용인공지능(AGI)이 아닌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AI)의 목표는 설계자가 설정한 태스크(Task)에 맞는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판단을 내릴 때 개개인의 ‘인권’이나 ‘알 권리’ 같은 것들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철저히 목적 지향적이기 때문에 기술 접근성의 양극화가 초래할 문제와 같은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민주주의 보다는 철저한 통제와 감독으로 운영되는 독재에 최적화된 도구일지도 모른다. 출처 : Unsplash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류의 ‘방향키’를 쥐고있는 인공지능을 우리가 너무 모른다는 점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기반한 언어모델의 초거대화(LLM) 트랜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델의 성능만 좋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그 모델이 어떠한 프로세스를 거쳐서 결과를 도출해 냈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결과 인공지능 개발자들의 오랜 화두였던 설명가능한 인공지능(XAI)에 대한 개념은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있으며, 모델의 프로세스가 철저히 블랙박스로 남게되면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작동원리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ChatGPT가 요약해준 텍스트를 활용하여 돈버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것이 어떠한 원리로 나오게 된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유튜브는 개개인의 취향뿐만 아니라 비슷한 연령대, 성별, 지역 등의 사람들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자신에게 최적화된 영상을 추천해준다. 한층 더 정교해진 초거대언어모델(LLM) 기반챗봇들은 상담자의 의도를 추론하고 이전 상담내용을 기억해내어 어렵지 않게 문맥을 파악하고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문의안내를 해준다. 이처럼 추천 시스템이나 상담용 챗봇과 같은 인공지능 모델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의료, 법률, 정치 등 다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야에까지 인공지능이 침투했을 때,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예를들어 인종, 성별, 거주지, 과거 범죄이력 등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것인지 예측하는 인공지능 모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용자인 우리는 인공지능 모델이 어떠한 데이터와 근거를 바탕으로 잠재적 범죄자를 예측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통해 단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발생하게 하지 않게 하자는 법의 취지에 어긋날 뿐더러, 인간의 알 권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위와같이 윤리, 도덕적인 이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법률이나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인공지능 도입수준은 타 영역에 비해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모호해지고 합리성과 편의성의 측면에서 인간의 역할과 대체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면, 공공이나 정치분야에서 인공지능 보급은 시간문제일 뿐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더 늦기전에 인공지능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인식하고 통제권을 가져오기위한 노력을 시작해야한다.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따라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참정권 보장이 핵심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인공지능과의 공존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첫걸음으로 인공지능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우리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 그 잠재적인 위협 요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인공지능의 발전과정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공지능은 믿을 수 있는 기관의 감독하에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1956년 다트머스회의에서 존 메커시 교수에 의해 인간처럼 추론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인공지능의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인공지능은 통계학과 컴퓨터과학의 힘을 빌려 발전해왔다. 이후 인공지능은 1970년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빙하기를 맞게 되었다가, 은닉층(Hidden Layer)으로 XOR 문제를 해결한 딥러닝(Deep Learning)이 등장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된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과 GPU의 발전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미지, 텍스트, 음성뿐 아니라 생성AI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용되게 된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훈련 데이터를 활용한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뿐 아니라 대량의 빅데이터(Big Data) 속에서 인간이 발견해 내지 못한 특성과 패턴을 찾아내는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과 보상을 통해 스스로 패턴을 찾아내게 유도하는 강화학습(Reinforece Learning)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닉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 기계’를 만들고 활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할 뿐, 작동 프로세스와 그것이 초래할 영향력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이루어져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발전과정은 다음에 살펴볼 ‘블랙박스 모델’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냈다.   2. 블랙박스모델과 설명가능한 AI(Explainable AI) 인공지능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패턴을 찾아낸다. 생물학계에서 수십년에 걸쳐 연구해온 난제인 단백질 분자구조에 대해서도 인공지능은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결과가 어떠한 프로세스를 걸쳐서 도출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인공지능이 수억개의 매개변수와 인공신경망(ANN)을 거쳐서 만들어낸 프로세스는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로세스가 철저히 베일에 쌓인 인공지능 모델을 블랙박스 모델(Blackbox Model)이라고 한다. 블랙박스 모델의 계산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같다.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컴퓨팅 파워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델은 대부분 이 블랙박스 모델에 해당한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입력값으로 들어간 변수가 분석과정과 결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모델을 설명가능한 AI(Explainable AI)모델이라고 한다. 정치, 법률, 의료 등 민감하고 중요한 분야에 인공지능을 도입하고 활용하기 전에 우리는 일부라도 ‘설명가능한’ 인공지능 모델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3. 데이터의 편향 대부분의 인공지능 모델 개발은 훈련과 검증 그리고 테스트라는 과정을 거친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인간의 개입없이 인공지능이 스스로 패턴과 유사성을 찾아내는 비지도학습(Unsupervised Learning) 모델도 존재하지만,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과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에는 여전히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훈련 데이터의 레이블링(Labeling)과 선정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편향(Human Bias)가 인공지능에 반영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함을 뜻한다. 예를들어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인종(Majority) 에 대한 데이터가 소수인종(Minority)에 대한 데이터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편향은 고스란히 인공지능의 학습결과에 반영되어, 주류인종에 유리한 결과만을 도출하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또다른 인공지능 인종차별자(AI Racist)를 탄생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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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No만 정답인가요? - 섹스의 진부화된 의사소통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다시 구성하기
으레 페미니즘은 당위적인 성평등으로 쉽게 일컬어진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얘기의 첫 문장을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 여성이 마땅히 존중받는 조짐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페미니즘 학문에 박식한지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말 수가 적고 비교적 덜 마초적인 남성이 페미니즘의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습득한 페미니즘적인 배움은 천대받던 '여성적' 공감과 이해 능력을 재해석하고, 감정의 중요함을 밝혀내는 일이며, 이러한 공감능력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일컬어 덕목으로 부르기였다. 감정은 의외로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전희경,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감정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39쪽 "문학(적 상상력에 깃든 공감과 연민 등의 감정)은 삶의 부박함과 인간의 비속함에 맞서 어떻게 생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지,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문학은 본디 시대의 총체에 관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꿈꾸기 어렵다. 문학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아 탐사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현상들 너머엔 복잡하고 신비로운 삶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을 치고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탐색하고, 생명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66-67쪽 "감정의 부재는 합리성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상'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감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1쪽 구체적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면, 마침내 단일한 상황에서 인간 감정의 정동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섹스의 조짐을 마주친 여성들은 마음 속으로 각자의 혼돈을 겪는다. 그럼에도 자기와 불화하는 '단순한 (부)동의'를 명확하게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예스 means 예스", "노 means 노"라는 명료한 정치적 구호로 가시화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이 결정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순탄히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이 띄워진 이후 많은 여성들이 사뭇 찜찜한 채 명확한 (부)동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렸다. 정확한 의사표현만이 자신의 주체성과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예"를 던져놓고 왠지 불안한 섹스를 한 여성들이 있다. 막연히 급한 것 같은 예감에 "아니오"를 말하고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있고, 이들은 자기모순에 혼란스러워도 한다.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결정의 지난한 과정이 보호받을 권리였을 것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마음가짐과 속도에 따라서, 결정과정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기회가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졌어야 했다. 섹스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순간에 사람은 명확하고 단순한 "예"와 "아니오"를 발설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이다. 주저하는 건 한낱 회피일 뿐이고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자세만이 정정당당하다는, 기존의 남성적 도덕으로는 페미니즘의 감수성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와 "아니오"라는 최종적인 대답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상호간 좋은 소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더듬대는 말씨,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의 외면과 두루뭉술한 문장을 포함한 모든 반응에 상호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갖춘 더 효과적이고 나은 소통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불확실하고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서, 섹스를 하고 싶으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섹스가 아닌 대안적인 애무로 이 사이를 초대하고 싶은 욕망도 성실히 검토한다. 때로는 마주보는 것만으로 멈추고 싶어하며, 어떤 이는 BDSM적인 사이를 원하지만 스스로 비밀스러워 어떤 대답도 주저한다는 가능성도 훤히 열어젖힌다. 그 은밀한 언어적, 비언어적인 조짐을, 우리는 기다리고 눈치챔으로써 성적으로 자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더욱 더 밀접해진다. 그리고 다른 어느 관계의 도식이 아닌 우리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알맞은 속도와 방식으로 상호 동의된 섹스를 향하여 수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남성적으로 부패하여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과정이다. 상대의 진짜 의사를 살피다보면, 상투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주의적 언어로부터 멀리 떠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을 활짝 열고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만난다. 차츰 더 정직한 성적 이해를 꿰어나가게 된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하지 않을 때에도 관계의 조짐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섹스는 사실상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실천에 더 좋은 섹스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것과 상통한다. 예컨대 누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특정한 비주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를 마주한 상대방으로서 그의 비주류성에 관해 소통할 때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비법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주류성을 지닌 자에게 진부한 언어는 익숙한 절망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과 퀴어성, 우울을 고루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울”과 “퀴어성”을 호명하는 오염된 언어 때문에 자길 설명할 길을 잃고 고독해진다. 쉽고 진부하고 얄팍해진 언어는 그들 앞에서 힘이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을 고독 속으로 넣는 뜻밖의 힘을 낸다. 이에 그의 단일한 맥락과 외로움에 좀 더 뾰족하게 접근하는 언어를 써야지,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공감이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머리 찧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편적인 언어에 대항하는 이해방식이다. 그렇게 보통의 억압적인 섹스가 아닌 주체적인 섹스를 설계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예"와 "아니오" 또는 어떤 도식화된 말로는 풀어낼 수 없었던 여성의 정동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들춰내면 된다. 요지는 상대의 동의와 거부를 최종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을 함께 밟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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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바둑
“그 당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대만에서 바둑학원 ‘동심원기원(同心圓棋院)’을 운영하는 천치오우홍(陳秋宏) 원장은 2016년 3월을 이렇게 회고한다.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매치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뜨겁게 달궜다. AI가 넘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복잡한 바둑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딥러닝 인공지능 알파고는 AI 시대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총 5국 중 세 번째 대국마저 끝내 패했던 이세돌은 “이세돌이란 한 사람이 패했을 뿐, 인류 전체가 패한 것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드라마처럼 제4국에서 알파고가 오류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AI를 이긴 바둑기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 바둑계는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매치에 함께 참여한 한국기원의 양재호 사무총장은 한 강연에서 말했다. “바둑 역사는 인공지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딥러닝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바둑계는 이전에 좋은 수로 평가받았던 것들이 사실은 승률이 낮은 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국의 ‘절예’를 비롯한 ‘카타고’, ‘엘프고’, ‘릴라 제로’, ‘한돌’ 등 수많은 바둑 AI가 개발됐고, 여러 회사의 인공지능 간 대국도 매해 이루어진다. AI가 얼마나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스스로 진화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둑 해설가들은 인공지능을 참조하지 않고는 좋은 해설을 하기 어렵고, 바둑기사들은 인공지능을 스승으로 두고 있다. 프로들뿐 아니다. 아마추어들도 어느 정도 기초를 터득하고 나면 스스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자신의 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AI가 승률이 높은 곳을 알려주고, 참고도도 만들어주기 때문에, 일종의 답안지를 얻어 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I라는 고수와 대국을 할 기회가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세돌 9단이 유일무이하게 인공지능을 이긴 바둑기사로 남았다는 것은, 이제 이미 어떤 바둑기사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프로 바둑기사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AI만큼 정교하게 계산해낼 수 없다. 바둑 해설가들은 종종 “AI니까 저런 수를 생각해 내지, 인간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다”, “인공지능의 추천 수는 때로 프로선수도 이해하기 어렵다” 는 말을 한다.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보다 앞서고,  바둑의 신처럼 ‘신의 한 수’를 늘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AI 홍역을 먼저 치른 바둑계 바둑계의 변화는 현재 챗GPT등 생성AI와 마주친 우리 세계 일반의 변화를 암시한다. 바둑계와 인공지능 간의 대결과 적응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마주칠 혹은 마주치고 있는 인간과 생성 AI 간의 대결과 적응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둑기사는 전부 은퇴하거나 사라지고,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없으며, 바둑을 새로 배우는 사람이 없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천치오우홍 원장은 말한다. “기초부터 AI로 배울 수는 없다. 기초적인 룰을 익히는 것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인간이 당장 AI의 수읽기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심원기원’에서도 바둑을 배우려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선생님들은 AI를 공부해서 보다 효율적으로 바둑을 가르칠 수도 있다. 인공지능과의 바둑 게임도 도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바둑학원에서 학생들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예전과 다르게 발전 속도를 높일 수 있다. AI를 통해 예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기보(棋譜, 바둑을 두어나간 기록)를 전 세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프로들이 모여 수년 동안 함께 연구했던 것이 이제는 노트북만 가지고 따로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공부하고 해석할 수 있는 몫은 저마다의 기력(棋力, 바둑을 두는 실력)과 이해력에 따라 다르다. 인공지능으로 초반 50수 정도는 어느 정도 포석이 정해진다면, 이후 변화와 수읽기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 설사 바둑으로 인간이 AI를 능가할 수 없더라도 바둑 대회는 열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프로 기사들이 바둑판 위에서 수를 겨루고 있다. ‘신공지능’이라 일컫는 한국의 ‘신진서 9단’은 2023년 5월 현재 세계 부동의 1위로 굳건히 서 있고, 그의 바둑은 여전히 수많은 바둑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성 기사들도 인공지능을 공부해 속속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여성 프로기사 ‘최정 9단’은 세계바둑대회인 <제27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에서 중국과 일본, 한국의 강자들을 차례차례 꺾고 결승에 진출, 준우승을 차지하며 바둑계의 새로운 신화를 썼다. ‘오유진 9단’도 올 3월 통산 500승을 달성하며 국내 여자기사로는 다섯 번째로 500승 고지를 돌파했다. 전체적으로 프로기사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되었다’는 평도 있으며, 20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바둑기사들의 전성기가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역주행하는  ‘강동윤 9단’도 있다. 아시아권에서만 주로 즐기던 바둑을 이제 전 세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한국기원 전 사무총장이자, 현재도 감독과 해설가, 선수로 활약하는 김영삼 9단은 바둑계 인공지능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AI에게 묻고 배우는 시절이 도래했다.  AI가 없이는 성장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 AI를 통한 지난 몇 년간의 발전이 이제까지 이룩해 온 수천 년간의 발전보다 더 크다.“ 물론 인공지능이 좋은 도구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 치팅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한다. 최근 중국에서도 치팅 논란이 일어 중국 바둑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논란의 핵심은 인공지능을 활용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판별해 낼 도리가 없다는 데에 있다. 인공지능의 추천 수를 8, 90 프로 이상 맞추면, 과연 자신의 실력인가 인공지능 치팅인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더이상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바둑을 둔다, 우리는.   이미 인간계를 평정한 인공지능이 있음에도, 아직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대면 대국에 매료된다. 상대의 수를 예측해 보고, 수를 읽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거나 이용해서 새로이 나아갈 길을 내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은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하는 노력, 살얼음판 같은 승패의 갈림길에서 위기를 극복해내고 역전하는 슬기와 끈기, 인간과 인간 서로 간의 심리전 등. 사람이기에 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즐길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 인공지능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아이들은  AI로도 배우지만, 근본적으로는 선생님의 돌봄에서부터, 다른 친구들과의 승부에서부터 바둑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천치오우홍 원장은 말한다. 2016년 느꼈던 충격과 공포가 그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지만, 그래도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 승부를 겨룬다. 승부를 통해 서로의 마음과 인생, 태도를 접하고 읽어내린다. 또 패배를 이겨내고, 승리를 다지는 마음의 굳은 심지도 배워나간다.  바둑 속에 바둑을 두는 사람의 개성이 있어, ‘기풍(氣風)’이라 한다. ‘기풍’은 고유한 성격처럼 그 사람을 반영한다. 그것을 읽어내며 서로 간에 언어가 아닌 손의 대화, 수담(手談)을 나누는 재미는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재 활발히 논의되는 챗GPT 등 생성AI에 대한 충격과 공포는 물론 더 범위가 넓고, 우리가 예측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가장 중심이 될 것이다.  바둑 인공지능을 통해 과거에 좋은 수로 평가받았던 것이 이제는 좋지 않은 수로 평가받는 것처럼, 인공지능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진 편견과 관습, 권력의 위험성, 악의 등을 오히려 감지하게 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지능’ 혹은 ‘인간의 재능‘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인간은 과연 인공지능이 낸 사활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단순히 인공지능을 이겨내거나 이용하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에게 유용하게,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하도록 키를 잡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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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제정, 간호사들의 처우만 개선되면 의료시스템이 개선될 수 있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국민 건강은 다양한 의료전문직역의 협업에 의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며 간호법안이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이유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의결했습니다(jtbc뉴스, 2023.05.16.).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 후 간호사들은 총궐기대회를 열고 정부를 규탄하고 있으며(동아일보, 2023.05.20.), 20개의 의료보건직군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도 사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의료 보건과 관련한 문제는 국민 모두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에 간호법 제정과 관련된 논의는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호법 제정 무엇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만들어냈는지 알아보도록 할까요? [그림2] 의료법 전문(국가법령정보센터) 우리나라에서 “의료인”이란 보건복지부장관의 면허를 받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및 간호사를 말합니다. 이 5개 직역은 모두 의료법에 준하여 면허를 부여받고 관련된 역할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의료법은 1944년 일제가 전쟁에 의료인 급파를 위해 ‘조선의료령’이라는 법을 만들었고, 일제가 패망하고 돌아간 이후에 우리 정부가 ‘조선의료령’을 일부 수정하여 ‘의료법’으로 명명하고 이를 기본으로하여 여러차례 개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김계현, 2001, 한국과 일본 의료법체계에 관한 연구)  제 32대 대한간호협회 회장 신경림씨는 우리나라의 의료법은 의사들의 병원이나 의원의 개설 혹은 운영을 위한 법안이기에 변화하는 우리사회에 수준높은 의료보건 서비스의 확립과 의사가 아닌 다른 다양한 직역의 전문성있는 역할 수행을 위하여 간호법의 제정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YTN, 2022.02.28.) ? 간호법의 논란 지점  대한 간호사협회는 우리나라가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하였으며 2026년이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고령인구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인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의료 및 보건 서비스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이며 COVID-19와 같은 감염병의 신속 대응을 위하여 이번 간호법 제정을 준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의안정보스시템) 2023년 5월 16일 거부권 행사 시점의 논란 조항은 크게 2개의 조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1장 1조 - “지역사회”가 뭐길래..  [그림 3] 간호법 의안원문 발췌  제 1장에 있는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이번 간호법과 관련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입니다.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간호사의 단독 개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라며, 후에 악용될 수 있다 말합니다(연합뉴스, 2023.05.16.). 현재 간호사는 의료법 이외의 다양한 법률에 근거해 어린이집, 장기요양시설, 장애인복지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 체계에서 의사의 지도 없이 혈압·혈당을 체크하는 기본적인 행위조차도 불법 의료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병원 밖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환자에게 적절한 간호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한간호협회는 간호간병시스템 확립을 위하여 ‘지역사회’ 문구가 간호법안에서 빠져서는 안되며, 이미 지역사회에서 지역간호를 시행하고 있는 수만명의 간호사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단독 개원의 가능성을 없애고자 ‘의료법에 우선한다’는 조항도 넣지 않았고, 10조 2항에 ‘진료의 보조’도 추가했다고 말합니다(연합뉴스, 2023.05.16.)  대한응급구조사협회는 응급구조사들은 간호법을 통해 의료기관 밖으로 간호사의 영역이 넓어지면 응급구조사의 업무까지 간호사가 할 수 있게 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합니다. 소수 직역인 응급구조사들은 수행할 수 있는 업무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그들의 고유 영역은 병원 밖에서만 존재하는 업무가 많습니다.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기반으로 간호사의 업무의 영역이 확장되면 응급구조사의 생존권이 위태롭다는 것이 응급구조사들의 주장입니다.  응급조사협회 윤종근회장은 “간호사들이 소방 119 구급대로 유입돼 응급구조사의 업무범위가 아닌 구급대원이라고 칭해 간호사도 구급대원이라는 명분 아래 응급구조사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간호법은 응급구조사 제도의 도입 목적을 훼손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합니다.(의학신문, 2022.07.25.)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곽지연 회장은 “간호법은 사실상 간호사에게는 지역사회에서 의사 지도 없이 방문간호센터와 같은 독자적인 기관을 설립할 수 있게되는 것이며 장기요양기관 등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를 간호사의 보조인력으로 만들어 간호사 없이 업무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곽회장에 따르면 의료법은 의료기관에 국한돼 있지만 간호법은 의료기관 밖 지역사회까지 확대되기에 지역사회에서는 단독으로 간호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의미라 말합니다. 현행법상 장기요양기관의 경우 촉탁의 지도 하에 간호조무사 단독으로 근무할수 있지만 간호법에서 명시한대로 “지역사회”로 간호사의 영역이 확장되면 장기요양기관에서 간호사 없이 간호조무사만 근무할 수 없게 돼 직접적인 피해를 양산한다는 것이 곽 회장의 주장입니다. (의학신문, 2022.07.25.)   둘째, 제5조 2장 - 간호조무사 학력 상한제 논란 [그림4] 간호법 의안원문 발췌  제5조 2장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이상’ 인정자’가 논란의 쟁점입니다. 대한간호조무사협회측에서는 2년제 간호조무사학과를 졸업한 자가 응시자격을 위해 고졸자를 위한 간호학원을 또 다녀야 하는 사항에 대해 반발하였습니다 (뉴스핌, 2023.05.16.). 이 조항에 따르면 전문대나 4년제 대학의 보건·의료 관련 학과를 졸업해도 간호조무사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간호학원에 등록해 1년의 과정을 이수해야만 자격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통상 국가공인시험은 ‘고졸이상’, ‘대졸이상’같은 식의 ‘학력 하한’이 존재하는데, 유독 간호조무사 시험만 ‘학력 상한’이 존재하는 구조가 되는 셈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차별을 구조적으로 명시한 것이라고 간호조무사협회는 말합니다(중앙일보, 2023.04.14.) ? 간호법 갈등, PA간호사 논쟁으로.. 대통령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한 간호사들이 ‘업무 외 의료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현행 의료법에서는 의사들의 업무범위에 있으나 그 업무를 대신해주는 PA간호사들이 불법의료행위를 거부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수면위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전국 의료기관에서 활동하는 PA간호사는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수술장 보조 및 검사 시술 보조, 검체 의뢰, 응급상황 시 보조 등이 주된 역할로, 법의 경계에서 의사의 의료행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주당 최대 수련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 법(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2016년 12월 시행되면서 더 두드러진 인력 공백을 각 병원이 전공의가 아닌 PA간호사들로 메우고 있었기에, PA 간호사들의 불법의료행위 거부는 의료현장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연합뉴스, 2323.05.23.) PA 간호사들의 업무 거부가 의료현장의 공백으로 나타나자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간호사들의 준법투쟁(의사의 불법 지시 거부)을 지지하는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늘어나는 의료 이용에 비해 병원에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히 채용되지 않아 병상당 인력 기준을 만들어 의사와 간호사를 추가 채용해야 한다며, 이것은 의사들이 돈이 되는 분야로 쏠려서 필수의료 분야에 발생한 공백을 해결하는 문제와도 엮여 있다며 또 다른 문제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한겨레 21, 1465호) ?‍♀️ 간호법 입법 필요와 관련된 논의는 [간호법이 쏘아올린 작은 공. 간호법 필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찬반입장과 찬반집단이 보다 명확히 정리되어 있으니, [투표]를 통해 여러분의 의견을 드러내주셔도 좋겠습니다!
의료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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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업은 불법이 아닐까?
왜 파업은 불법이 아닐까?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 화물연대 파업, 노란봉투법 대립. 이 세 가지 이슈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근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노사갈등이 드러난 이슈라는 점, 다른 하나는 노동자 측 쟁의행위의 불법성 여부가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는 점입니다. 쟁의행위의 불법 여부는 위의 세 가지 이슈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노사갈등을 구성하는 거대한 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노동자 측은 대부분의 파업이 불법이 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용자 측은 불법 파업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쟁의행위’와 ‘불법’의 관계에 관해 대화해나가는 것이 이미 엉킬 대로 엉켜버린 노사갈등 문제를 풀 열쇠일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쟁의행위가 왜 ‘합법’인 걸까요? 쟁의행위가 합법이라는 것은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쟁의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처럼 보입니다. 업무를 방해함으로써 상대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합법이 아닌 것이 곧 불법이므로, 특정 쟁의행위가 불법인지 아닌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쟁의행위가 합법인 이유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쟁의행위가 어떤 원리에 따라 합법적인 행위로 인정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쟁의행위의 기반이 되는 법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개별 쟁의행위의 불법성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쟁의행위에 대한 현재의 법리적 해석이 옳은지에 대한 시민 차원의 사회적 대화 역시 가능해질 것입니다. *쟁의행위란? 노동자 또는 사용자가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노동자 측의 파업·태업·준법 투쟁 등과 사용자 측의 직장폐쇄·대체고용 등이 쟁의행위에 해당합니다. 본 글에서 사용하는 쟁의행위라는 단어는 노동자 측의 쟁의행위를 의미합니다. 범죄 성립의 요건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무엇이 범죄인지’입니다. 물론 무엇이 범죄인지는 상식으로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법은 범죄를 훨씬 구체적으로 규정하는데요.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할 때 범죄가 성립한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구성요건해당성입니다. 구성요건은 법에 적혀 있는 범죄의 유형을 말합니다. 예컨대 살인죄 조항에서 “사람을 살해한 자는”이 살인죄의 구성요건입니다. 누군가의 행위가 바로 이 구성요건에 해당할 때 그 행위는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특정 행위가 부도덕하더라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위법성입니다. 이는 전체 법질서의 입장에서 봤을 때 행위가 불법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더라도, 법질서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구성요건해당성을 충족하더라도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유들을 위법성 조각 사유라고 하며, 정당방위, 긴급피난, 자구행위, 정당행위 등이 이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유책성입니다. 이는 행위자에게 법적 비난을 물을 수 있는지, 즉 불법을 행위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지를 묻는 요건입니다. 구성요건해당성과 위법성을 충족하더라도 강요받은 행위라거나 행위자의 나이가 어린 경우 등 행위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어렵다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쟁의행위도 위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 행위로 보지 않는 것인데요. 과연 어떤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 것일까요?    쟁의행위는 정당행위   쟁의행위가 불법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위법성 조각 사유 중 하나인 정당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행위는 형법 제20조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법에 쓰여 있어서 했거나, 업무 때문에 했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정당행위는 전체 법질서의 이념, 또는 그 배후에 있는 사회윤리에 근거하여 정당화됩니다.    정당행위 중에서도 노동자의 쟁의행위는 법령에 의한 행위에 속합니다. 법령에 의한 행위는 법이 규정한 권리 또는 의무를 행사하거나 법을 집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체 법체계는 당연히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형법이 아닌 다른 법에서 적법하다고 인정한 행위를 형법상 위법하다고 평가한다면 법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겠죠. 쟁의행위 역시 다른 법을 통해 적법하다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형법상 허용됩니다. 이 같은 법령에 의한 행위로는 노동자의 쟁의행위 이외에 공무원의 직무집행 행위,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행위, 일반인의 현행범체포 행위 등이 있습니다.   쟁의행위는 헌법에 의한 기본권인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에 따라 정당화됩니다. 노조법 제4조는 “형법 제20조의 규정은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쟁의행위 기타의 행위로서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 정당한 행위에 대하여 적용된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는 정당한 행위로 해석되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여 쟁의행위가 정당행위에 속함을 명시하였습니다.    현재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범죄가 성립하려면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유책성을 충족해야 한다. (2) 정당행위는 위법성이 없으므로 범죄가 아니다. (3) 쟁의행위는 정당행위다. (4) 쟁의행위는 범죄가 아니다!   정당한 쟁의행위의 요건들   쟁의행위는 정당행위로서 적법하다고 인정되지만, 현실에서 전개되는 모든 쟁의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노조법 제4조를 자세히 보면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 정당한 행위”에 대해서만 정당행위로 인정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1조는 노동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항입니다. 결국 쟁의행위는 헌법상 노동삼권의 보장 취지와 쟁의행위의 목적 및 수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정당하다고 판단되어야만 적법한 것입니다.    쟁의행위가 형법상 정당행위가 되기 위한 요건들은 이미 다수의 대법원 판례를 통해 제시되어 있습니다. 크게 네 가지 요건이 있는데요. 첫째, 쟁의행위의 주체가 단체교섭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노동조합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일반 조합원이 아닌 노동조합 집행부가 쟁의행위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쟁의행위의 목적이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노사 간의 교섭을 조정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근로조건과 상관이 없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의 쟁의행위 등 애당초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을 달성하려는 쟁의행위는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실시하는 구조조정, 사업조직 통폐합, 합병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경영 관련 사안으로 보아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의행위도 정당행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쟁의행위를 하기 이전에 우선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시도해야 하고, 쟁의행위를 개시하기 전 조합원 찬반투표, 노동위원회의 조정절차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넷째, 쟁의행위의 수단과 방법이 사용자의 재산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폭력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 또는 사업장 시설의 일부를 점거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지만, 전면적∙배타적으로 점거하여 조합원 이외의 출입을 막거나 사용자의 관리지배를 방해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편 노동조합 차원의 쟁의행위와 조합원 개인 차원의 행위는 구별해야 합니다. 쟁의행위에 참가한 일부 소수의 노동자가 위법행위를 하였다고 해서 전체 쟁의행위가 위법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쟁의행위가 불법이 아닌 이유를 법리적으로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정답이 아닙니다. 법이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끊임없이 토론하며 함께 최선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쟁의행위의 법적 성격, 취지와 이념, 정당성 판단 기준 등은 오늘날의 노사갈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더욱 시민들이 활발히 이야기해야만 하는 주제입니다. 의문, 비판, 제안, 단상 무엇이든 좋습니다.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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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는 과도한 PC?
피씨(PC)라고 하면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언어생활 속에서 인종이나 성별, 성적지향, 출신지 등에 대한 편견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말한다. 한국에서 PC는 ‘PC 묻었다’, ‘과도한 PC’라는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PC라는 말은 한국뿐 아니라 그 말이 탄생한 미국에서도 경멸이나 조롱의 어조로 자주 사용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 성소수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가 나오면 이런 말이 더 자주 등장한다.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올바름이 과도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PC란 무엇인가? PC라는 것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윤리적인 기준이나 태도를 지칭할 때보다는 공적인 담론(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주로 사용된다. PC라고 하면 대체로 ‘~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쓰지 않는 게 좋다/쓰지 마라’ 등의 말을 떠올리기 때문에 PC는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반대로 ‘~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다/낫다’ 등 긍정적인 문장으로 사용할 경우엔 부정적/억압적인 느낌은 줄어들지만 이렇게 선택된 표현이 옳은지/나은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목적은 같다. 특정한 사람들이 넓게는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으로는 여러 기회와 분배 과정에서 소외당하거나 비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언어 생활에서 주의를 하는 것이 PC의 목적이고 이것을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PC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소외나 비하를 당하는 특정 집단을 위해 발언을 한다고 해서 그를 보고 ‘PC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발언이 사회의 특정 집단을 소외시키거나 비하하는 경우, 혹은 그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거나 암시하는 경우에 ‘PC하지 않다/언피씨(unPC)하다’라 평가한다. 즉 PC는 관련된 사람들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기 보다는 모욕이나 혐오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PC는 역사의 산물이다.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는 차별과 배제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적어도 도덕적인 진보에 대해 방해는 하지 말자는 것이고,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 혐오에 대해 최소한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 내재된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PC는 차별과 혐오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사실 우리는 이미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처벌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PC는 왜 공격을 당할까? 전세계적으로 PC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 ‘PC 묻었다’라거나 ‘과도한 PC’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PC를 좌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PC에 대해 단어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 기괴한 단어를 가져오거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유를 억압하고 침묵을 만들어내는 전체주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이나 윤리는 피상적인 것이고 껍데기이며 그 안에는 그보다 더 큰 - 예를 들면 사상통제나 독재 같은 -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PC에 대한 조롱과 경멸, 더 나아가 PC를 파괴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언어는 자유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사상통제에 대한 반항(혹은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넷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인어공주』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의 실사화가 결정되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것은 세바스찬이나 플라운더 같은 동물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플라운더는 현실의 돌돔이 되었고, 세바스찬은 현실의 달랑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나와 달랐다. 사람들은 주인공을 맡은 배우 핼리 베일리(Halle Bailey, 2000~)가 흑인이라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선 안 되는 것일까?  동화건 만화건 『인어공주』는 이제 세계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황인 인어공주, 흑인 인어공주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인어공주가 백인이어야만 되는 이유는 없는 것이고, 30여 년 전 만화에 백인을 그려넣었다고 해서 지금도 인어공주가 백인이어야만 되는 이유도 없다. 시대가 바뀌었다. (외모 비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어공주』 실사판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애초에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보긴 봤을까? 흑인이 아니라 백인 인어공주가 나온다고 한들 그들이 영화 『인어공주』를 보러 갈까? 『인어공주』를 빌미로 PC에 대한 원없는 한풀이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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