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 가독성을 위해 높임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A : “… 그리고 집단 괴롭힘으로 아이를 잃은 유족에게 복수를 권했다더군. 『왕따 가해자』란 명칭만 붙고 끝난 죄인에게 합당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면서.”
B : “그 기준을 누군가가 멋대로 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법이 무용지물인 세상이 오겠죠.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으면 누구도 따르지 않게 될 거예요. 완력과 재력 같은 힘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기에 법은 약자를 구할 수 있는 거예요.”
A : “... 그렇다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를 법이 벌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법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자를 못 본 체 하는 건 법으로 지키지 못하는 자를 버리는 짓이야.”
B : “(침묵하다가) 사람을 벌하려면 그러기에 충분한 증거가 필요해요.”
A : “(스포일러) 씨가 복수를 권한 사람 중에는 역시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면서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더군. 하지만 그런 경우도 (스포일러) 씨의 정보가 경찰에 신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복수라는 선택을 하고 안 하고와는 상관없이 (스포일러) 씨의 권유 자체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란 거다. 그에 비해 법이란 건 불공평하고 불완전하지. 아닌가?”
주인공 : “맞는 말이야. 하지만 공평해지기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어. 완벽함을 목표로 법률도 계속 변하고 있지.”
A : “(책상을 내려치며) 그래선 너무 늦어!! 토시로는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미코시바 히로는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어.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실습까지 받고 있었다고! 그런 인간이? 말도 안 되지! 법률이 공평해지기만 기다린다면 난 늙어 죽을 거다. … 그럼 손을 더럽히는 것 말고 내게 무슨 방법이 있지!? 내가!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한 장면이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의 아들(토시로)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버지 A는 몇 년 뒤 그 학교폭력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C(미코시바)가 교육실습생으로서 교편을 잡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을 자살까지 내몰리게 한 이가 교편을 잡는다니! 절망하고 있는 A에게 범인(스포일러)이 다가온다. 그는, 자신은 지금껏 몇 명이나 되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그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피해 학생의 유족들의 ‘허락’을 받고 살해했다고, 정확히는 그 유족이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만약 A만 허락한다면 이번에도 C에게 ‘합당한 처벌(죽음)’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A는 승낙했고, 범인의 도움을 얻어 알리바이를 확보한 채 C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이 복잡하고 어두운 사건을 쫓아 진실을 밝혀내는 게 주인공(플레이어)의 역할이다.
게임 속 A의 울분을 이해하지 못할 이가 현재 대한민국에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A의 대사를 빌리자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들이 사회 속에 너무 많이 녹아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처럼 직접적인 살인으로 보복(여기서 ‘보복’이란 단어는 중요하다)을 가하자고 진지하게 주장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적어도 ‘문명화된’ 세상에서는 말이다.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의 ‘생물적 목숨’을 끊을 수는 없으니, 그나마 실현 가능한 ‘보복’은 그의 ‘사회적 목숨’을 끊는 일이다. 이것이 곧 ‘신상 공개’이다.
최근 우리는 신상 공개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노출되고 있다. 1) 古전두환의 손자인 전우원씨는 3월 13일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의 할아버지인 古전두환은 물론 그의 가족을 고발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 지인들의 성범죄와 마약 등 범죄 행각을 고발하며 그들의 실명과 사진, SNS 대화 내용을 캡쳐해 공개했다. 2) 올해 1월부터는 대한민국의 미용사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표예림씨가 자신의 초중고 시절 학교폭력 사실을 밝힌 사건이 있었다. 표예림씨 스스로가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4월 13일 ‘표예림동창생’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개설돼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신상이 공개됐다. 3) 최근의 일로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일이 있다. 6월 2일 유튜브 채널 ‘카라큘라 탐정사무소’에서 피의자 이모(30)씨의 실명과 사진을 포함해 직업, 생일, 키, 혈액형과 이씨의 과거 전과기록까지 공개한 것이다. 영상에는 피해자 김모씨도 등장해 “저는 (가해자의 신상 공개가) 너무 필요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피해자로서 평생 가해자가 교도소에 있었으면 좋겠고, 애꿎은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위 세 개의 신상 공개 사건은 전부 피해자 또는 목격자(증인)가 자발적으로,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됨을 알면서도 ‘저지른’ 신상 공개이다.
한편 우리는 다른 측면의 신상 공개도 떠올릴 수 있다. 4) N번방 사건의 조주빈, 5) 동거녀와 택시 기사를 살해한 이기영(31), 6)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해 피의자 전주환, 7) 그리고 최근에는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정유정(23)의 신상이 ‘국가’에 의해서 공개됐다. (4,5,6번과 7번을 비교하며 유독 국가의 신상 공개 결정이 여성에게 더욱 '쉽게' 행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1~3까지의 사례와 4~7까지의 사례는 양쪽 모두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주체가 다르다. 즉, 전자는 ‘개인’이 후자는 ‘국가’가 공개했음이 다르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형태의 신상 공개도 있다. 8) 2018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배드파더스’는 양육비 지급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의 신상을 인터넷에 게재해 왔다. 9)‘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3~8월 디지털 성범죄, 살인, 아동학대 등 사건 피의자의 신상정보와 법원 선고 결과 등을 ‘디지털 교도소’라는 사이트에 게시했다. 사이트 운영자는 베트남에서 붙잡혀 2021년 9월 29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0)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속출하자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나쁜 집주인’이라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법조계에서는 공익을 목적으로 사이트가 개설됐지만,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라고 한다.
8~10은 4~7처럼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신상 공개가 아니다. 그보다는 행정적인 제재에 가깝다.
1~3처럼 신상을 공개하는 자와 공개 당한 자가 '가해자-피해자(전우원씨는 '가해자 무리'로부터 전향한 사례) 관계'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보다는 '나쁜 사람-일반 대중 관계'라고 보는 게 더 옳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신상 공개가 범람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건 공개된 개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호소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에 관해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글을 적는다.
당장은 공부가 부족해 논의를 전부 개진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볼 수 있음직하다.
A) 신상 공개와 '사적 제재'의 관계는 무엇일까? 둘은 반드시 일치하는가, 아니면 사적 제재의 목적을 갖지 않는 신상 공개는 가능한가?
B) 신상 공개의 정당성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인정되는가? '정당성을 인정 받은' 신상 공개는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옳은가? (제재/처벌/복수/정의의 실현의 분리 문제)
C) 신상 공개의 동기는 무엇인가? 동기의 갈래가 정당성의 인정 여부를 가르는가? 주체는 누구인가?
D) 좀 더 넓게 보자면,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범죄인, 또는 가해자와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는가? 이것은 포용-용서-관용-더불어 살아가기-정의-공동체-회복-갱생-신뢰-사회적 자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 또 동시에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나와 내 주변인의 '인간성'을 어떻게 건드리는가?
F) 신상 공개의 법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원래는 이 글을 첫 글로 쓰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밀려와 이제야 첫 발을 내딛게 되네요. 최근의 여러 사건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위에서 저렇게 질문들을 나열했지만, 저는 윤리철학이나 법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신상 공개에 관한 글을 쓰더라도 분명 애매한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캠페인즈는 공론장이니까, 먼저 이 글을 올림으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회가 도래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예상컨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디지털 기술은 더더 발전하고, 신상의 자발적-비자발적 공개(노출)는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단순히 '숨어 지내던 범죄인을 향한 정의의 철퇴'를 휘두르는 어떤 도덕적 쾌감만이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당장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이의 어떤 '추악함'이 목격되버릴 수도 있고, 그것이 범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정체성과 관련된 '커밍아웃'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코멘트
5경찰에 의한 신상공개가 있을 때마다 비슷한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공론장에서 논의가 꼭 필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경찰의 신상공개 절차가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사적 제재, 처벌이라는 측면과 신상공개 제도의 필요성, 기준 등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 사건", "피의자가 그 죄를 범한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경우" 등 매우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신상공개심의위원회의 판단이 실질적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신 유튜버 등의 신상공개 등의 문제를 비롯해서 현재 신상공개의 기준을 사회 구성원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 수 있는지,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 수 없다면 신상공개 제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복수극에서 통쾌감을 찾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방법을 찾게 된 이유는 결국 우리나라의 사법형법제도에 결함이 있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그럼에도 그런 '해결방식'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처벌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고요...신상공개도 정말 계속해서 숙고해야 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사적인 제재/처벌은 당연히 막아야겠지요... 문제는 왜 사람들이 사적인 처벌에 열광하는가 라는 점일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많은 사람들은 권선징악(그 중에서도 징악)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어떤 의미에선 종교나 미신에 깊게 빠지는 것이나 뛰어난 재능이나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정치나 제도가 경제의 문제, 분배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정치와 제도가 가질 수 있는, 보여줄 수 있는 윤리성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상 공개'라는 '법적 처벌'을 넘어서는 '사회적 처벌'은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반화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지른 죄에 비해 더 큰 처벌이 될 수도 있으며, 이후의 삶이 어려워짐에 따라 반성 및 성찰과 갱생의 가능성 자체를 막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잘못된 정보로 개인들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적으로는 폭로를 통한 사회적 처벌은 다른 방법들이 통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싸움일 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극도로 심각한 범죄일 경우에는 제한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체적 기준을 세우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의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이번 부산 돌려차기 사건과 관련해서 모 유튜버가 범인의 개인정보를 영상에 공개한 것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운 것이 피해자가 법적으로 도움을 받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사각지대에 빠져서 결국 이렇게 된거죠. 유튜버의 법적 잘못 유무는 두번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한국의 사법이 피해자를 위해 얼만큼 정상적으로, 적절하게 작동하느냐를 따져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슈가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나 개인이 법을 어겼다거나 정도로 문제를 축소 시키는 것이 아닌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입법을 요청하고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생각해요.
위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범인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만 시야를 좁히기엔 글쎄요. 사이다 vs 그래도 법을 어겼다 라는 의견들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입니다. 언론이 좀 힘을 써서 공론화를 하는 역할을 해야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