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페미니즘은 당위적인 성평등으로 쉽게 일컬어진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얘기의 첫 문장을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 여성이 마땅히 존중받는 조짐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페미니즘 학문에 박식한지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말 수가 적고 비교적 덜 마초적인 남성이 페미니즘의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습득한 페미니즘적인 배움은 천대받던 '여성적' 공감과 이해 능력을 재해석하고, 감정의 중요함을 밝혀내는 일이며, 이러한 공감능력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일컬어 덕목으로 부르기였다. 감정은 의외로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전희경,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감정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39쪽
"문학(적 상상력에 깃든 공감과 연민 등의 감정)은 삶의 부박함과 인간의 비속함에 맞서 어떻게 생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지,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문학은 본디 시대의 총체에 관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꿈꾸기 어렵다. 문학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아 탐사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현상들 너머엔 복잡하고 신비로운 삶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을 치고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탐색하고, 생명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66-67쪽
"감정의 부재는 합리성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상'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감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1쪽
구체적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면, 마침내 단일한 상황에서 인간 감정의 정동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섹스의 조짐을 마주친 여성들은 마음 속으로 각자의 혼돈을 겪는다. 그럼에도 자기와 불화하는 '단순한 (부)동의'를 명확하게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예스 means 예스", "노 means 노"라는 명료한 정치적 구호로 가시화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이 결정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순탄히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이 띄워진 이후 많은 여성들이 사뭇 찜찜한 채 명확한 (부)동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렸다. 정확한 의사표현만이 자신의 주체성과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예"를 던져놓고 왠지 불안한 섹스를 한 여성들이 있다. 막연히 급한 것 같은 예감에 "아니오"를 말하고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있고, 이들은 자기모순에 혼란스러워도 한다.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결정의 지난한 과정이 보호받을 권리였을 것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마음가짐과 속도에 따라서, 결정과정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기회가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졌어야 했다.
섹스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순간에 사람은 명확하고 단순한 "예"와 "아니오"를 발설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이다. 주저하는 건 한낱 회피일 뿐이고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자세만이 정정당당하다는, 기존의 남성적 도덕으로는 페미니즘의 감수성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와 "아니오"라는 최종적인 대답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상호간 좋은 소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더듬대는 말씨,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의 외면과 두루뭉술한 문장을 포함한 모든 반응에 상호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갖춘 더 효과적이고 나은 소통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불확실하고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서, 섹스를 하고 싶으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섹스가 아닌 대안적인 애무로 이 사이를 초대하고 싶은 욕망도 성실히 검토한다. 때로는 마주보는 것만으로 멈추고 싶어하며, 어떤 이는 BDSM적인 사이를 원하지만 스스로 비밀스러워 어떤 대답도 주저한다는 가능성도 훤히 열어젖힌다. 그 은밀한 언어적, 비언어적인 조짐을, 우리는 기다리고 눈치챔으로써 성적으로 자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더욱 더 밀접해진다. 그리고 다른 어느 관계의 도식이 아닌 우리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알맞은 속도와 방식으로 상호 동의된 섹스를 향하여 수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남성적으로 부패하여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과정이다. 상대의 진짜 의사를 살피다보면, 상투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주의적 언어로부터 멀리 떠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을 활짝 열고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만난다. 차츰 더 정직한 성적 이해를 꿰어나가게 된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하지 않을 때에도 관계의 조짐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섹스는 사실상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실천에 더 좋은 섹스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것과 상통한다. 예컨대 누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특정한 비주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를 마주한 상대방으로서 그의 비주류성에 관해 소통할 때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비법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주류성을 지닌 자에게 진부한 언어는 익숙한 절망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과 퀴어성, 우울을 고루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울”과 “퀴어성”을 호명하는 오염된 언어 때문에 자길 설명할 길을 잃고 고독해진다. 쉽고 진부하고 얄팍해진 언어는 그들 앞에서 힘이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을 고독 속으로 넣는 뜻밖의 힘을 낸다. 이에 그의 단일한 맥락과 외로움에 좀 더 뾰족하게 접근하는 언어를 써야지,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공감이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머리 찧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편적인 언어에 대항하는 이해방식이다. 그렇게 보통의 억압적인 섹스가 아닌 주체적인 섹스를 설계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예"와 "아니오" 또는 어떤 도식화된 말로는 풀어낼 수 없었던 여성의 정동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들춰내면 된다. 요지는 상대의 동의와 거부를 최종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을 함께 밟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코멘트
4자신이 내린 선택임에도 계속해서 내면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는 부분이 정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해주셨듯이 만약 사회가 여성을 제대로 보호해 왔다면 과연 이런 현상들이 지금만큼 문제적이었을까요?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캠페인즈에서 BDSM이란 단어를 읽을 날이 올 줄이야 ! 공론장의 주제들이 한층 더 다양해졌다는 것을 체감하네요.
저 역시 "예스"와 "노"로 딱딱 떨어지는 부분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최근 '감정'이라든가 '정동'과 같은 것에 대해 연구하는 책이 꽤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딱딱 분절되는 이성적인 것도 중요하겠지만 감정이나 정동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주체성의 실현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게 되네요.
"예스"와 "노"를 대답해야 하는 상황을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만드는 사회 구조를 돌아보게 됩니다. 기존의 남성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혹은 남성이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겪지 않아서 저 역시도 이런 관점은 생각치 못했습니다.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