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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생성형 AI 라벨링 확인하세요!
AI 윤리 뉴스 브리프
2024년 3월 넷째 주
by. 🍊산디
1. 미국 하원, 민감정보 적대국 제공 금지 법안 통과
미국 하원의 틱톡 금지법 통과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데이터 브로커가 미국에 거주하는 개인의 민감정보(sensitive data)를 적대국 또는 적대국에 의해 통제되는 누군가에게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만장일치로 하원을 통과한 것이죠.
이 때의 ‘민감정보’는 한국 법이 통상 지칭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내용을 아우릅니다. 사회보장번호와 같이 정부가 개인을 식별하는 데이터나 건강정보, 결제정보, 생체정보, 유전자 정보, 구체적인 지리정보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내역과 통화 시간, 통화한 위치 등도 모두 민감정보에 포함됩니다. 개인적 목적으로 저장된 캘린더 일정, 사진, 동영상도 포함되고, 17세 미만 개인에 대한 정보,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에 대한 정보도 물론 포함되며, 온라인에서의 활동 정보, 나아가 앞서 언급한 정보들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유형의 정보가 민감정보로 정의됩니다.
FTA 등 국가 간 무역협상을 통해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주장해왔던 미국은 이제 노선을 선회하여 적대국(중국, 이란, 북한, 러시아 등)으로의 데이터 흐름을 강력히 차단하려 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브로커의 데이터 반출, 틱톡 등 ‘적대국의 사업자’의 서비스 제공을 통한 데이터 취득을 모두 막음으로써 자국 국민과 산업을 보호한다는 것이죠.
AI의 등장으로 한층 고도화된 산업 구조는 데이터가 곧 주권임을 강변하는 듯 합니다. 변화한 국제 정세 속에서 데이터 장벽은 더욱 높아질 듯 하네요.
2. UN 총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 시스템 결의안 채택
UN의 193개 회원국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 시스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이번 결의안은 AI의 기획부터 활용되기까지의 전 주기에 인권을 존중하고 촉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는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AI는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적국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계산장치로서 등장했고, 세계화의 불평등을 배경으로 성장했습니다. 기술이 심화해온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기술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국제 협력과 조율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구속력 없는 이번 결의안이 군사적 목적의 AI 활용을 막거나, 범남반구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데이터 노동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결의안이 교두보가 되어 군사 부문에 AI 활용을 제한하기 위한 국제협력으로 확대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유튜버라면 생성형 AI 라벨링 확인하세요!
유튜브 영상 제작에 생성형 AI를 활용하고 계신다면 이제부터는 라벨링을 잘 하셔야합니다. 유튜브가 생성형 AI를 비롯한 변경·합성 미디어를 이용해 실제 사람, 장소, 이벤트로 착각할 수 있는 콘텐츠를 게시할 경우 라벨링을 통해 이를 알리도록 하는 정책을 단계적으로 시행합니다. 지속적으로 라벨 표시 규정을 어기는 크리에이터는 수익 창출이 제한되거나 콘텐츠가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번 라벨링 정책은 EU 디지털서비스법(DSA)의 시행과 대선을 앞둔 미국 정치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보입니다. 유튜브 외에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도 비슷한 라벨링 정책을 도입한 바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라벨링이 필요한 콘텐츠, 즉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된 실제로 착각할법한 콘텐츠’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은 유튜브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기업에게 일종의 ‘재량’이 부여된 셈이죠. 비단 이번 라벨링 정책이 아니더라도 우리 정책 환경의 플랫폼 재량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유튜브의 생성형 AI 라벨링 ‘자율규제’는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까요?
덧글
🤔어쪈: 오, 이로서 구글은 보다 손쉽게 사람이 직접 찍고 편집한 영상만을 AI 학습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겠군요!
4. 데이터, 어떻게 팔아야 잘 판 걸까? ...팔아야 하는 걸까?
2005년에 문을 연 레딧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광고 수익을 얻는 회사였습니다. 19년이 지난 지금,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기업 레딧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 성공적으로 IPO를 마쳤습니다. 그 동안의 데이터를 AI 훈련용으로 판매하는 것이죠. 구글은 레딧 게시글과 댓글을 활용해 AI를 훈련할 수 있도록 하는 연간 라이센스로 6천만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이용자들이 19년 간 떠들고, 업&다운 투표를 하고, 게시판(서브레딧)을 열고 운영하며 쌓인 데이터입니다. 매일 6만여 명의 이용자가 자발적으로 중재자가 되어 레딧 커뮤니티를 관리합니다. 이용자들이 자유/무료 노동으로 플랫폼 기업만 수익을 얻는 것에 문제를 제기해온 배경입니다. 흥미롭게도 레딧은 이 문제를 공모 주식 중 일부(8%)를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 이용자가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해결하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로써 데이터 판매 이후 이용자들과 플랫폼 간 긴장관계가 모두 해소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공모 주식 배정 결정이 알려진 이후에도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반대하는 의견이 쉽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FTC가 구글과 레딧 간 데이터 거래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 역시 레딧으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겠네요. 이용자의 노동으로 기업, 주주가 수익을 얻는다는 비판에 기업은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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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국민은 참고인이더라도 출국금지가 된다?
[팩트체크] 이종섭 호주대사와 달리 일반 국민은 참고인 신분으로도 출국금지가 된다는 윤건영 의원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했습니다.
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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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 공감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며
10년 전, 그 날의 나는?
2014년 4월 군대를 전역하니 23살이었습니다. 8월에 학교를 복학해도 됐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부모부터 주위에서는 전부 1년 늦게 학교를 들어가는 게 아주 큰 일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휴학을 했습니다. 무작정 신문배달, 편의점, 택배,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음악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드럼과 작곡을 배우면서 행복했습니다. 첫 사회 생활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시절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4. 4. 16일 그날도 아침일찍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누우며 자려고 하는 순간 버스 TV에서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제 삶 살아가기도 바빴던 저에게는 세월호 참사의 사건이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났구나’정도였습니다. 이후에 TV와 언론 보도에 사망자와 유가족들의 모습과 진상규명을 외치는 모습이 계속 나와 그때 조금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아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하고 인식은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슬플지,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큰지는 애석하게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조차도 제 것,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시대가 그런 거 일수도 있지만, 세상이 점점 자기 일이 아니면 큰 관심이 없는 개인주의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때 조금이라도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 참사 피해자가 과연 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이 그때는 왜 들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노란 리본을 메든, 후원금을 전달하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30대가 되어서 어느 한 계기는 아니지만, 점점 주변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아픈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 성장해서 다행이고 나름 뿌듯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기를
세월호 참사 가족 중 한 딸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딸의 영정 사진을 보며 딸을 기억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많이 슬펐습니다. 부모에겐 자식이 세상의 전부 일텐데, 한 순간에 딸을 잃어버린 슬픔이 얼마나 클지 쉽게 가늠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치의 예고도 없이 떠나버린 딸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리울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공감되어 한편으로 많이 슬프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우리 삶에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나 정부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나 피해자들의 보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혐오와 갖은 욕설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전부였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그들을 위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일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보며 20,30대를 살아가는 저로서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떠나버린 아이들도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고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았을까요.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는 안전망과 피해자 보상, 진상규명에 대해 다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픔과 슬픔이 나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의 일로 생각하며 도와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공감과 연대로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여러 장점도 있지만, 너무 빠르게 성장한 부작용이 점점 우리 사회에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빈부격차, 혐오, 성차별, 저출산, 일자리 문제, 인간성 상실, 정신적 질환, 전쟁과 평화, 환경 문제 등등 여러 문제가 많이 나타나 고통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 되기 위해서는 정부나 국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위로하며 정부와 국가에 의견을 내고 호소해야 합니다. 일어난 모든 사건은 남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건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저항하며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연대와 공감의 정신이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10주년, 다시 한 번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떠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하루 빨리 유가족들의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 한 켠에 여유와 행복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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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인연은 이어져 돌아온다-
hyun
"잠수부 자격증 있는 장병. 지휘통제실로.“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온 방송을 잊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육군 훈련소 가입소 기간 사흘 째 되던 날인 오전 6시.
“지휘통제실에서 전파합니다. 잠수 자격증이 있는 장병이 있으면 지휘통제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육군에서 숱한 자격증들 중에 왜 하필 잠수부 자격증을 찾는걸까. 그 의문은 훈련소 연대로 넘어갈 때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맞이한 첫 주말 종교행사 날이었다. 연무대 교회는 1주차 훈련병부터 5주차 훈련병 모두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1주차에 막 접어든 나는 4~5주차 전부터 온 선임(?) 훈련병들과 함께 있었다.
선임 훈련병에게 있어 우린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었다. ‘우리는 갈게! 너희들 각개!((훈련소 수료 후 자대로 가니까 너네들은 남아서 각개 전투(훈련소 5주차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훈련)나 해라는 의미)’ 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연무대 교회의 꽃 ‘실로암’ 찬양에 맞춰 이들은 ‘각개전투!’ 외치며 자극하기 바빴다. 이 곳만의 환영방식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게 있던 찰나 군종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 훈련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웃고 떠드는거야!” 무슨 시기이기에 이토록 그는 분개한걸까. 요 며칠 동안 꼬리표처럼 붙은 잠수부 자격증의 정체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그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산에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웃을 때가 아니다.“
세상과 단절 된 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스크린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여 400여 명이 실종되었고, 잠수부들은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다. 기자는 눈시울 붉히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고 택시와 버스기사들은 유가족들을 진도까지 실어나르는 장면이 스쳤다. 입대한 지 불과 이틀 사이에 배에 탄 470여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사는 “제발 0.0001% 라도 기적이 있다면 이들이 전원 구조되길 바랍니다.” 라며 애통한 심경으로 기도와 함께 “부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 는 말로 예배를 마쳤다.
안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은 애도의 분위기였다. 자대배치받고 간 교회에서도 기도제목 말미가 세월호 무사구조로 맺곤 했다. 하지만 사회와 군대 사이 해소할 수 없는 단절감이 존재했다. 군대는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유로 애도가 들어설 틈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도 꺼낼 수도 없었다. 바쁜 일과도 한몫했다. 선•후임 심지어 나조차 당장 주어진 일상과 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월호는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빚은 참사"
그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날이면 혼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답답함만 커졌던 것 같다. ‘배가 왜 침몰했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나?’ 원망의 마음도 따라서 커졌다. 파편처럼 끊긴 기억은 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선명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2015) 중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t. 객실 증설을 위해 개조하여 선박의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윤에 눈 멀어 생명을 버린기업과 비상사태에 부재한 국가가 빚은 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침몰 사실에 충격만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물밀듯 밀려오니 또 다시 세월호 생각은 진전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자대에 정착한 지 1년이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후임이 들어왔다. 그의 고향은 안산.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던 그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으나, 고향에서 전해진 슬픔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게만 느껴진 안산이 가까이 스민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 안됐나? 안산 출신 후임과 대학 동기의 죽음을 통해 슬픔은 외면할 수 없어"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의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인양해야할 진실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러는 이제 그만하라며 날선 비난과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죽음을 결코 외면해야할까. 한 사람의 죽음은 가능성이 소멸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그와 관계된 세계도 줄줄이 무너지는 비극이다. 그 고통이 국가의 외면으로, 이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는 타자화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을까. 나와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체감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2월 토요일 아침. 대학교 동기의 비보를 접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여름방학 중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창호 작업 중 6층 높이에서 추락사한(이 또한 안전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채 빚어진 참사였다) 대학교 동기의 소식을 그와 인연도, 연고도 없던 지인에게서 접할 줄은 몰랐다. 슬픔은 결코 나와 먼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죽음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인연의 고리는 어떻게든 닿아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기의 죽음을 접한 이후 변화가 필요했다. 살아가면서 인연은 어떻게 맞닿을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내가 만난 누군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칠 인연이 될 지도 모르니까.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고 이들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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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이들에게
돌무덤이 있는 풍경
나의 풍경에는 몇 개의 돌무덤이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돌무덤, 빵 공장 노동자의 돌무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이다. 거대한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로 지어진 무덤들은 문득 기억처럼 그곳에 있다. 익숙한 이 기억에 가끔 가까이 다가가 매만지고 바라보며 현재 내가 서있는 풍경을 돌아본다.
돌아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구태여 선언할 필요도 없이 세월호 참사는 이미 일상의 작은 조각이다. 나를 형성하는 요소이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돌무덤이 지어지던 역사 속, 나는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생이자 목격자였다. 세월호 참사 목도의 경험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정치화하지 말라’는 정치인들의 말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청년들이 놀다가, 일하다가 참사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이토록 도처에 있던가. 참사가 유난히 각인되는 이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예방을 강조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참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교통사고’에 비유를 들면서. 그러나 이 죽음에는 ‘안전’의 개념을 허술하게 다룬 구조적 배경이 깔려있고, 죽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안전을 ‘구조’ 속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 어떤 참사도 책임자들에게 처벌과 사죄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구조 속 최고 책임주체인 정치세력은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10년째 말이다.
정치인들의 방어기제에 무색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6일 전인 4월 10일, 22대 국회 총선이 있다. KBS는 4월 18일에 방영 예정이었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총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방영할 수 없다”라고 제작진에 통보했다. 참사의 최고 책임자인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하면 참사를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소거하고,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정치화하지 말라’는 단언이다. 참사 책임자에 대한 비판적 발언에 앞서 ‘내가 사회적 비극을 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가’하는 검열하도록 만든다.
‘정치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맥락에서 ‘정치화’는 ‘단순 사고’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을 특정 정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치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단순 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이 ‘사고’가 사회적 참사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풍경에는 돌무덤이 없다. 혹은 지워버리거나 보지 않으려 회피하는 것이다. 회피와 부인은 ‘권력’이다.
회피하는 권력은 응당 두려움에 떨기를
그러나 돌무덤들이 있는 풍경 속의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무덤, 희생자, 유가족과 동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생존 해내기’다. 살아내는 것은 정치 그 자체다.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내는데, 어찌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사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 요구인 진상규명과 후속 조치로서의 책임자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정치며, 즉 살아내는 방식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3년 6개월가량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조사기간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조사에 있어서 비협조와 방해 요인이 많아서인지 석연치 않은 결론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세월호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참사를 기억하는 마음은 굳은 돌이 되어 무덤에 쌓인다. 10년이 부족하다면, 20년 30년이라도 얼마고 돌을 쌓으리라. 돌무덤 풍경 속 나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서 이야기할 것이다.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이여, 돌무덤을 쌓는 우리를 응당 두려워하라. 또한 나의 풍경을 공유하는 이들아, 우리 부디 함께 생존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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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10년 전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한 사회인가요?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그 사이 세월호는 흐릿해졌다. 교과서로 배운 사람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이 흐려지고, 모른다고 슬퍼할 건 아니다. 나무랄 일도 아니다. 기억하고 나무라는 사람도 세상의 모든 참사를 기억하고 아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나 역시도 내가 어릴 적에 발생한 참사는 잘 모른다. 성수 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모두 교과서로 배웠지만, 그걸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교과서에 담겼다고 사회가 그걸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두 번의 붕괴는 건설사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고는 2022년 광주에서 발생했다. HDC 산업 개발이 만든 아파트가 건설 도중 부서진 것이다. 건설사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만약, 성수 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방하고, 내재화했다면 광주의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교과서에 기록해야 하는 참사다. 그 참사를 계속해서 후대에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어디서 알려줘야 할까, 뭐라고 알려줘야 할까.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 세대의 무능함을 답습하지 않게 하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성현(가명)은 세월호 참사 당시 8살이었다. 올해 18살이 됐다. 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같은 나이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성현을 만나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성현은 인터뷰 도중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제가 살아갈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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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터뷰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하다
해줄 수 있느냐고 하셔서 참여했다. (웃음).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대화하고 싶었다. 부모님 말고, 학교 선생님 말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게 다다.
Q. 인터뷰 주제가 편안한 주제는 아니다.
안다. 세월호 아닌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300명이 죽은 참사가 편안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 있던 가장 큰 참사 중 하나가 아닌가.
Q. 세월호를 묻기 전에, 어떤 참사들을 알고 있나
이태원 참사가 내게 가장 가깝고, 알고 있는 참사다. 가장 최근이기도 하고, 유튜브와 SNS에 참사 현장이 많이 공유됐었다. 직접 이태원에서 본 건 아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그 비극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 잔상이 떠다니기도 했다. 참사를 직접 겪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이 안 된다.
Q. 사실 세월호 참사 자체를 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안다기보단 배웠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참사를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2014년에 8살, 지금은 18살이다. 8살 때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나 발달한 게 많으니까, 알고리즘에 걸리면 계속 나와서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Q.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내에 안전교육이 강화된 것으로 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강화된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그게 원래 것이다. 세월호 참사 전 사람들이라야 변화를 알겠지만, 우리는 그게 원본이었다. 그래서 말하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를 떠올려 보면 안전교육을 한 것 같다. 비디오 시청이나 야외 교육 등을. 그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내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전학을 많이 다녀서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다.
Q. 학교 내 안전 의식은 많이 늘어났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그런 의식이 증가했었다.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이 과연 안전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가 묻고 싶다. 내가 알기엔 세월호 학생들은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정말 가만히 있었던 걸로 안다. 말을 너무 잘 들었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죽을 상황에 가둬둔 건 어른들 아닌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던 학생들의 문을 두드린 건, 어른들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정확히 모르지만, 그랬을 것 같다. 진짜 사람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몇 년이 지난 뒤였을 것이고. 이게 과연 학생들이 안전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발생한 건가? 오히려 어른들이 안전교육을 안 받아서 생긴 사고 아닌가 묻고 싶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건 어른들 아닌가.
Q. 세월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많이 물어보셨다. 이태원 참사 이후 더욱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도 말씀을 안 하셨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보고 함께 돌아온 후, 부모님께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알고 보니 두 분다 세월호 관련 봉사활동도 하셨다고 그랬다. 그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부모님은 세월호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
뉴스에서 하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예를 들어 어디서 발생했다, 언제 발생했다, 몇 명이 사망했다 등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때 본인들이 느낀 게 무엇인지를 많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걸 느꼈어. 아빠는 이런 게 비참했고, 이런 점에 분노했었어. 그래서 이런 걸 했어.” 라고. 그 끝에 항상 내 생각을 물어보셨다. “부모의 감정과 생각을 알 필요도 없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Q. 부모님께서 생각 자체를 강조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께서 강조하셨던 게 있었다. 세월호 학생들이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과연 내 자식에게 말 잘 들으라고 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고 부모인가를 대뇌였다고 하셨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말 들어야지 라고 말했을 때, 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 옳은 말인지 생각하고 말했었나 돌아봤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을 학생들이 얼마나 신뢰했을지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어른이 “부모 말 잘 들어야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학생들을 배 안에 가둬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셨다. 또 그 안에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도리어 나눠주며,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데 헌신한 선생님들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무능한 어른의 비겁함 때문에 구할 수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떠났다고 하셨다.
세상엔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능인지 비겁함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설령 부모의 생각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하고, 부모든 선생이든 그 누구든 간에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 때문에,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다.
Q. 부모님 말씀에 동의하는지
세상 모든 어른을 만나본 게 아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부모님, 친척들이 전부다. 그래서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세월호 당시 어른들이 무능하고 비겁했다는 건 알겠다. 나도 곧 어른이다. 몇 년 지나면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거다. 그때 나는 당시의 어른들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했으면 좋겠다.
Q. 세월호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학생들이 있었고,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학생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건 정말 어른들이 무능한 거로 생각한다. 묻고 싶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 내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
Q.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온다. 어른들은 기억하자고 한다. 학생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억하자는 말이 뭘 기억하자는 건가 싶다. 그냥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지.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싶었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다. 제삿날에 제사상에 절은 하지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다. 그런 제사가 내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부모님한테만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런 말을 하니까 부모님도 “네 말이 맞다.”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어른들의 구호나 외침이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근데 뭘? 이라고 느낀다. 물론 이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억을 알기엔, 내가 그 참사의 슬픔과 분위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
제사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 부모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돌아가셨을 때 분명 슬펐겠지만, 아무 기억이 없는 내게는 사실 와 닿지 않는다.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서 부모님이 계신다 정도지. 그 외에는 사실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의 문제다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되는 현상 같다.
Q. 진로는 정했는지
고민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부가 너무 싫다. (웃음) 공부 안 해도 원하는 걸 할 수는 없는 건가 싶다. 왜 모든 걸 공부로만 정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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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성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성현은 족발이라고 말했다. 족발이랑 매운 족발,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하니, 성현은 동생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했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성현의 동생이 왔다. 셋이 함께 근처 족발집에 가서 족발을 먹었다. 후식으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구호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모른다. 참사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유족들의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 내게 성수 대교를 기억하자,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뭘 기억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보다는 성현의 부모님이 그랬듯,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해야 하는 것 같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을 분명히 알려주되, 거기서 끝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억하자는 말을 잠시 떠올려봤다. 그 말을 듣고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참사 유족들의 감정인지, 참사 자체인지, 참사 원인인지, 참사 때 느낀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한 다짐인지, 그 생각들로 내린 결론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성현의 생각에 세월호 참사는 “무능한 어른들의 비겁함.”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입을 막는 자(者)들이 있는 게 떠올랐다.
성현의 말이 계속 곱씹어진다. “세상에 아직도 비겁하고 무능한 어른들이 많은가요? 제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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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10번의 4월, 앞으로의 기억
4월 16일의 기억
여러분은 그동안 지나온 9번의 4월 16일을 어떤 날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가슴 아픈 사고가 뉴스에 나오던 날로, 제주도에 가족이 도착해야 했던 날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저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초를 불고 있었고,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고 계셨으며, 엄마는 초를 끈 저에게 박수를 치고 계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이후, 이사 오기 전까지 제 생일마다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 가는 날이면 꼭 노란리본 현수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여러분은 ‘슈톨퍼스타인(Stolpersteine)'을 알고 계신가요? 독일의 설치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가 지난 1993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인데, 유럽의 거리 곳곳에 동판으로 걸림돌을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슈톨퍼스타인은 ‘장애물, 걸림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해 기준으로 베를린 시내에만 7천여개를 설치했고,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과 전 세계 20개국에 6만개가 넘는 동판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이 생활하던 곳에 설치하여 일부러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프로젝트로 동판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한 수용소를 표기하여 잠시 멈추고 바닥을 보며 그들을 기억 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걸림돌 덕분에 역사를 되새기며 죽은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희생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기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추모를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이라고, 기억을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이라고 명시해 놓았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일상 속에서 떠올리는 것이겠습니다.
기억하겠다는 말 한마디, 거리에 걸리는 리본은 언론의 오보, 진상 규명과 같이 참사에 대한 사실과 남은 과제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정작 그 학생들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름이 모두 묶여 “죽은 학생들”로 불리는 순간,
그 이름은 그 안에서 녹아 사라지고, 우리가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 그 이름은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걸림돌에 걸린 것처럼 잠시 멈춰 이름들을 생각하며 추모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연속된 참사
세월호 참사 이후에 시스템을 보완했다고, 또 누군가는 참사를 막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며 어쩔 수 없다 얘기합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계속되는 크고 작은 참사는 결국 세월호 이후에도 우리 정부의 시스템과 대처가 미흡하고 부족했다는 것을 책임 넘기기에 급급한 정부 대신 얘기합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는 모두 정부와 지자체의 초기 대처 미흡으로 인해 피해가 커졌고, 후에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세월호는 정부에게 안전사회라는 질문을 던졌고, 대답하지 못한 채로 사람들이 죽었으며, 아직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10주기를 맞으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학교에서, 또 누군가는 일터에서 집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세월호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떠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간단히 메신저 프로필에 리본을 달아놓았을 수도 있고, 또 가방에 리본을 달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매주 집회에 참가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책가방에 리본을 달아놓고, 친구들에게 리본과 배지를 나눠주고, 휴대전화에도 스티커를 붙여놓으며 그 날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세월호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월호보다는 환경을 위해 날마다 집회에 참여하러 서울로 올라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다 2023년 “923기후정의행진” 행사에서 시민합창단으로 참여하였을 때 지휘자님의 소개로 416합창단 기획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형언할 수는 없지만, 416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도 따스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공연을 보며 훌쩍거리고, 울던 눈으로 소리치듯 노래 부르던 기억은 제 머리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기억입니다. 공연을 관람하다가 우리 합창단 차례가 오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서 무대로 나가던 때, 416합창단에게 준비한 노래, 차례에 나와 있지 않았던 〈잊지 않을께〉를 훌쩍이며 소리치듯 부를 때, 노래가 끝나고 자리로 들어오자 옆에 계시던 분의 감사인사를 들었을 때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동안 4월 16일에는 식탁 앞에서 케이크를 먹었지만, 이번에는 노래하려 합니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시 한번 시민합창단에 서고자 합니다. 초등학교 때 했던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잊으라.” “이제 다 끝났으니 잊으라.”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억하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우리는 아직 배의 침몰 원인조차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책임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위해 싸웁니다.
저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는 세상이 올 때 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