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6411의 목소리]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2024.03.25

138
2
노회찬재단은 6411 버스 속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힘들 때 함께 비를 맞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겠습니다.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2024-03-25)

제소라 | 읽고 쓰고 그리는 예술노동자

2016년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 여성 작가로 초대를 받은 이후 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차차 여러 예술활동을 하게 됐다.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하는 예술활동은 내 작업의 동기이자 영감이 된다. 필자 제공


매해 연말과 연초가 되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예술 관련 공공기관의 창작 지원 마감일이 모두 이때 몰려 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활동비를 얻기 위해 주변 예술인들은 다들 ‘영혼을 갈아가며’ 지원서를 작성한다. 지원서엔 작가로서의 예술관, 그동안의 작업과 예술 활동에서의 성취, 이번 지원금으로 하게 될 작업의 예술적·사회적 기대효과를 작성해야 한다. 거기에 공공기관의 예술 지원 사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애정 어린 관점을 더하면 더 좋다.

마흔 중반에서 쉰이 되는 동안 예술 관련 사업에 지원하여 활동하고 작업했지만, 사실 예술 작업과 관련 활동이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과 작업마저 없다면 예술가라는 명함, 작가라는 존재 증명을 사회 시스템에, 더 정확히는 문화예술 공공기관에 하지 못한다. 나는 예술 장르마저 애매하다.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지만 전시 그룹에 속한 것도 아니고, 전시로 작업을 발표하는 화가는 아니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증명을 오래전 출간한 그림책으로 받았으니, 일러스트레이터인지 아니면 순수 미술 작가인지, 요즘은 글과 그림을 잡지에 연재하고 있으니 글도 되고 그림도 되는 작가인지, 내 정체성을 나도 잘 모르겠다. 작년엔 그림 작업이 아닌 어린이 교구 설명서에 들어가는 동시를 쓰고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옛이야기를 다시 써서 고료를 받았다.

광고

그래서인지 최근 몇년은 창작 지원과 예술 활동 지원 사업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의기소침하지만 언제까지 예술 지원 사업에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삼사십대의 작가들 틈에서 심의를 받을 땐, 젊은 작가에게 갈 지원금에 늙수그레한 선배가 주책없게 끼어들어 욕심을 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로 작가를 위한 창작 지원도 있지만, 그건 십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어중간하게 늙은 나는 올해 모든 예술 활동과 창작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방안이나 생계 수단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가장 오랜 생계 수단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자 사설학원에서는 더는 나를 쓰지 않았다. 강사로 일하기엔 나이가 많다고 학원장들이 말했다. 그렇다고 생판 다른 일은 구할 수 없어서, 알음알음 알아본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평생교육원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기도 하고, 지금은 어른을 위한 드로잉 강좌를 열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하는 강습 역시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작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려고 몇년 전에는 꽤 긴 시간과 돈을 들여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젠더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친구는 나에게 정말 단체에서 일할 수 있냐고, 그럼 작업은 어떻게 하냐고 했다. 나는 몇년 작업 좀 못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작업은 세상의 여러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단체에서 일하진 못했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광고

광고

나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품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처럼 강좌를 열거나 편의점 알바, 카페와 식당 서빙을 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기도 한다. 나와 동갑인 한 작가는 청소 노동을 했다. 가끔 생각한다. 계속 벌이가 시원찮다면 나도 청소 노동이든 요양보호사든 일을 찾아야 할까? 절대 그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중년 여성에게 열린 일자리는 청소 노동이거나, 식당 서빙, 장애인이나 노인을 돌보는 노동 등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며 예술과 관련한 일, 관련 없는 일을 오가며 일하는 노동자이고, 제도 밖 문화예술 강사이다. 나에게 밥이 되어준 노동은 연차를 더해가지만 시장에서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예술가라고 아름답고 귀한 재능이 부럽다고 하는데, 귀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어떻게 먹고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틈이 있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예술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게 메뚜기처럼 밥벌이를 찾아 뛰어다닌다.

광고

예술은 작업실에 은둔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예술 작업이든 밥벌이를 위한 생계 노동이든 삶을 꾸리는 모든 행위가 내 예술의 근원이 된다. 단 한번도 내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불안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건 적더라도 돈을 버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만약 나의 예술이 세상과 맞닿아 생기롭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예술가, 창작자라면 그건 밥 버는 노동의 경험 때문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공유하기

바로 이전에 올라온 6411의 목소리와 연달아 봤는데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가 연달아 문화 예술 노동자의 노동인데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서 씁쓸하네요.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