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1970년 평화시장에서 시작된 '걸크러시'? 이소선 여사와 노동자들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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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정규노동센터입니다

진짜 센 언니들

 

박미경 전태일재단 기획실장


확실히 걸크러시가 대세인가보다. 윤석열 대통령의 집안도 그렇다는데, 문제는 공사 구분이다. 아무튼, 국정을 뒤흔든 진짜 여전사들이 있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여성들이다.

 
이소선이 뿌린 씨앗
사회운동가 이소선은 1929년생으로 지금 살아계시면 94세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분신 항거한 전태일이 이소선의 아들이다.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라는 아들의 유언으로 이소선은 나이 마흔하나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령사회라는 지금이야 마흔하나를 많은 나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이십 중반이었다. 당시의 사회적 시선으로 이소선은 그저 못 배우고 돈없고 나이 많은 아줌마였다. 더욱이 팔자까지 드세어 아들을 앞세운…
이소선은 사회적 편견에 주눅 들지 않고 나섰다. 나아가 자신처럼 노동 운동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보듬고 일으켜 세웠다.
 
이소선은 생전 아들의 죽음 직후 ‘거액의 보상금과 이권을 물리친 게 가장 잘했던 일’이라고 했다. 노동청과 평화시장 업주들이 전태일의 장례식을 빨리 치르라며 돈이 한가득 든 큰 보스톤백을 가져왔는데, 가방을 열어 돈을 공중에 뿌렸다. 대단한 결단력이며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는 분이었다.
1970년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월 노동자투쟁이 있기까지, 투쟁의 현장에서 이소선은 경찰 앞에서 “나부터 잡아가라”며 소리치며 버티고 섰다. 노동조합 활동으로 또 민주화운동으로 이소선은 4번 구속돼 옥살이를 3년 했으며 구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결과 이소선의 표현대로 “독재정권 놈들”은 물러났다.
 
아카시아회가 맺은 열매
이소선의 강단과 결기로 전태일 죽음 이후 보름 만에 설립된 청계피복노동조합원의 초창기 조직 확대사업의 일등공신은 여성노동자들의 소모임이었다. 노동조합에 뿌리를 둔 첫 번째 소모임의 이름은 아카시아회였다. 여기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자긍심을 갖게 되고 자신이 일하는 노동 현장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문제를 찾고 고쳐 나가는 실천 활동을 했다. 아카시아회는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처럼 번창해서 백합, 무궁화, 레몬, 장미 등의 소모임도 자꾸 생겨났다. 이 영향으로 남성노동자들의 소모임도 탄생하게 된다. 어여쁜 이름의 소모임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간부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활동은 고사하고 어떤 집단행동도 용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배움에 목마른 청계 노동자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농성에 들어가고 또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정부와 사업주에 맞선 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1977년의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반환을 요구하는 투쟁에서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과 열일곱의 임미경은 죽기를 각오하고 4층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이때 임미경은 자해를 하며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될 거야! 내가 죽을 거야!”라고 외쳤다. 당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경찰의 욕설과 폭력은 기본값이었으나 청계노조 여성노동자들은 배로 되갚아주었다. ‘빨갱이년’이라고 하면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냐 몽둥이냐’고 대들고. ‘반성하고 머리를 숙이라’라고 쥐어박으면 의자나 책상 위의 기물을 던지며 강단지게 저항했다.

 
▲ 2020년 10월 3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분신 40주기를 기리는 '2010 전태일의 꿈' 추모 문화제 및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하나되어 승리하자"며 발언하는 이소선 ⓒ 전태일재단

 
진짜 걸크러시는 노동의 연대로부터
이소선과 청계피복여성노동자들을 여전사라고 호명하는 것은 투쟁력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도 세게 했다. 누군가 이소선을 천재라고 했는데, 인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천재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함께하는 노동자들에게 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소선은 한때 한자리에 있으려 하지도 않는 양 노총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앉혔다. 사랑의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청계피복노동조합 여성노동자들 소모임의 원천은 우정이다. 한창 뛰어놀고 배워야 할 나이에 공장에 나와 일을 하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친구가 되어 마음을 나누고 위로하면서 친밀한 우정을 나눴다.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은 하면서 서로에 대한 책임이 더해져 우정 이상의 운명적 우정이 돼버렸다.
 
지난해 연말, 전태일재단은 여성사업단을 만들었다. 극단적인 양극 화시대에 노동은 희망의 주어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불안정노동은 여성 노동이기도 하다. 센 언니들이 나서야 할 때다. 이소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인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타워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가고 싶어 했다. 기력이 좀 있을 때였던 2008년 기륭전자노조 단식투쟁 때는 현장을 찾아 “살아서 싸우자”고 했다. 
전태일재단 여성사업단은 이소선처럼 어렵게 일하고 싸우는 현장으로 찾아가 손을 맞잡으려 한다. 또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아카시아회처럼 여성 활동가들이 마음을 나누고 위로하면서 서로의 성장에 힘을 나누는 우정과 환대의 시공간을 열고자 한다. 진짜 걸크러시로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세우는 데 보탬(?)이 되고 새로운 희망의 판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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