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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메모리얼과 세월호 기억교실, 이태원 참사, 아픔을 기억하는 명징한 방법
미국 뉴욕의 경제 중심 월가(Wall Street)에는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있다. 즐거운 곳은 아니다. 오히려 가슴 아픈 곳. 바로 9/11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WTC) 메모리얼 & 뮤지엄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은 가장 공포스러운 곳이 되었다. 미국 경제의 상징건물이었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거짓말처럼 차례로 무너졌다. 납치된 항공기가 쌍둥이 빌딩을 뚫고 무너뜨리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는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지금 이곳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는 WTC의 마지막 기둥과 파편, 당시 희생자들이 지나갔을 계단의 일부와 건물의 한 면 등이 테러의 상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사의 흔적인 먼지가루들이 시간이 멈춘 듯 보존된 상점의 옷 위에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9/11 메모리얼 & 뮤지엄 안에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게 된 구역이 있다. 당시 사건을 재현한 역사관이다. 이곳에서는 아픔을 세세히 기억하고 명징히 드러내 밝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느낄 수 있다.
9/11 사건이 터진 8시부터 분단위로 세계무역센터의 상황, 대통령 및 정부 대응, 경찰 대응, 소방관 대응 등 전과정이 디테일하고도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날의 언론보도, 뉴스 상황, 주변인들의 반응 등의 영상들은 우리가 바로 그 날에 들어간 듯 생생하게 녹화되었다.
유치원에 참여 중이던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사건 소식을 접하고 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부터, 일사천리로 대응이 진행되는 과정과 뉴욕 및 주변 도시 각지에서 경찰과 소방관, 응급 의료진들이 모여든 지도까지. 뿐만 아니라, 신고가 들어온 시각과 당시 전화로 신고하고 대응하는 음성 녹음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벽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들면 관람자가 직접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항공기가 첫번째 건물을 통과해 폭파되고, 두번째 항공기가 두번째 건물을 통과한 뒤, 각 건물의 몇번째 층 희생자가 전화를 걸었는지, 또 그 목소리도 확인 가능하며, 건물이 무너진 뒤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혹은 목숨을 잃은 영웅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충격을 금치 못하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워 담았다.
다른 한편으로 납치된 항공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 음성 등 모든 자료들이 총동원되었다. 테러범이 공항 출입을 하는 CCTV 영상 기록. 테러범들이 조종실을 침입하여 나누던 대화도 녹음된 음성과 번역된 문자로 귀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채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메세지나 음성 녹음을 남긴 항공기 안의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문자 내용도 확인하게 된다.
“비행기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 별 일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해. 다른 가족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
“비행기가 납치된 것 같아. 여보, 사랑해. 아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
그날의 행적은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았다. 불탄 소방차, 희생자의 구두, 가방 등.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시각까지도.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위한 멘탈 치료도 이루어진 걸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끝일까. 기억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두번 다시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다음일 것이다.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은 당시 사건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후 정부가 어떻게 사건을 규명하고, 무너진 세계무역센터를 다시 일으켜 세웠는지, 또 기업들은 어떻게 사회적 재난에 기부로 마음을 보탰는지 보게 된다. 사건의 원인 규명 과정, 재건 과정, 새로이 지어가는 세계무역센터의 타임랩스 영상.
지나는 길 한쪽 벽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금언이 적혀 있다.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없을 것이다. - 베르길리우스”
이 문구는 묘하게 기시감을 준다. 바로 얼마 전 10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 기억식, 4월 16일에 이와 비슷한 문구를 똑같이 되새겨 본 적이 있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미국의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 기억하는 방법을 보자니 세월호 참사의 기억관 및 기억교실이 사뭇 안타깝게 느껴진다. 당시의 상황 및 원인 규명, 정부, 해경, 언론의 대응, 희생자들의 유품이나 가족들의 아픔 등.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 심지어 대통령이 그 시각 무엇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국가 재난 사건에서, 단지 책임자를 찾자는 것 이상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소소하다 못해 참담하다. 희생자들의 가족들만이 세월호 참사 기록단을 만들고 운영하며, 그 날을 기억하려 애쓴다. 국가도, 기업도, 사회도 그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과연 얼마나 노력했을까.
몇 해 뒤 일어난 이태원 참사 역시, 그 연장선 상에서 변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아직도 참사의 대응에 대한 논란만 존재할 뿐이다. (연합뉴스_ 장보인 기자_"기동대 있었다면 이태원참사 피해 최소화" 경찰들 진술) 심지어 2024년 6월 문을 연 이태원 참사 임시 추모 공간 ‘별들의 집’ 도 11월에는 재개발로 인해 자리를 비워야 한다. (뉴시스 홍연우 기자 ‘시한부’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 석달 후엔 어디로 가야하나) 사회적 재난의 기억들이, 매 순간 잊혀지고 반복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망각으로 가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떻게 예방 혹은 재건해야 할지, 여전히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가슴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사회적으로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 참사 가족단이 이룩한 것들도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기억 교실이 남아 있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가족을 위로할 수 있고, 법률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재건했는지 더불어 기록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매번 일어나는 재난에 늘 같은 방식으로 흐지부지 지나쳐 버린다면, 우린 그 참사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희생자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9/11 메모리얼과 뮤지엄의 기억 재생 방법과 그 대처는 우리의 아픔과 참사를 기록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 반복되어선 안되는 역사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말처럼 결코 시간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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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과 기억교실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세월호참사 10주기를 기억하기 위해, 4월 16일 오후 3시 안산 단원고 인근의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기억식이 열렸다. 세월호 희생자 250명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식을 시작으로,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과 추도사, 97년생 동갑내기의 기억편지, 기억 영상과 시 낭독, 노래 공연과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합창 공연 등으로 이루어졌다.
세월호를 기억식이 거행되는 사이에 불현듯 사이렌이 울렸다. 안산에서는 매년 4월 16일 오후 4시 16시에 이렇게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416을 기억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 짧은 사이렌과 묵념의 순간에 416 세월호참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사이렌 같은 사건이란 생각이 스쳤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우리들의 요구>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이행하라!
세월호참사 및 그 이후 발생한 국가폭력에 대해 국가책임 인정하고 사과하라!
대통령은 세월호참사 지우기 중단하라!
정부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권고 이행하라!
정부는 세월호참사 기억/추모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라!
세월호참사 대통령 기록물, 국정원, 군 등 정부 기록물 모두 공개하라!
부재했던 재난 컨트롤타워, 피해자 사찰했던 정부기관, 국가책임자 처벌하라!
대통령은 진상규명 추가 조치, 성역 없는 추가 조사 이행하라!
(세월호 참사 102주기 기억식 팜플렛에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국가폭력 및 사찰, 대통령이 사라진 시간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불러세운다. 기억은 사진첩에 끼워지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다음번 또다른 희생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 다음번 재난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막기 위해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사이렌을 계속 울려야 한다.
왜냐하면 팽목항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세월호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이태원참사 등 다른 참사와도 맥이 통하고, 419 민주화운동과도 맥이 통한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억은 사회적 기억으로서 의미가 깊다. 또한 세월호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은, 이 사회 어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재난참사 이후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잘못된 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자들에게 어떻게 사법적, 사회적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단원고 416 기억교실
기억식이 끝나고 근처에 10년 전 희생자였던 단원고 2학년 교실을 보존해 놓은 기억교실을 찾았다. 가는 길에 문 닫을까 걱정되어 택시를 탔다. 안산 택시들이 팽목항과 안산을 오가며 피해자 가족을 도왔다는 게 생각나 물어보니, 기사님은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그러면서 기억식에 대통령은 왔던가요? 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기억교실 건물을 둘러싼 울타리에 걸린 “10년, 당신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보였고, 노란 바람개비가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기억교실에는 남자반 여자반으로 2, 3 층으로 나뉘어 있는 교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란 등받이와 방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자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반 전체에 서너 자리를 빼곤 모두 노란 자리로 뒤덮여 있어 가슴이 턱 막혀왔다. 교무실 역시 희생자 선생님들의 사진과 평소 쓰던 출석부 학생기록 수첩 등이 남아 있었다. 안내하던 한 여자분이 간곡히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 아이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세요.”
그제야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애썼다. 지금 살아 있었다면 27살의 청춘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었을 아이들. 나는 기억교실 안에서 부표처럼 떠 있었다. 한 책상 위에 낙서로 적혀 있는 글귀를 보았다.
단 한번 뿐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의 키워드는 ‘기억’ 뿐만이 아니었다. 기억과 약속, 그리고 책임이었다. 기억은 힘이 세다, 는 말처럼, 기억이 약속을 만들고, 약속을 통해 책임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이 이제 10년을 맞이한 셈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진실규명과 책임 처벌, 앞으로를 대비한 관련 법률과 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인재(人災).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회적 참사.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들. 그것을 해낼 수 있어야지만 이 기억식의 의미는 뚜렷해질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노란 리본은 반짝거리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아직 더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뜨겁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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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록을 기록하다, 다큐 <그레이존>
2024년 3월 22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다큐 <그레이존>(주현숙 감독) 상영회가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10층에서 열렸다. ‘4.16재단’과 ‘사랑의 열매’의 지원을 받아 캠페인즈가 주관한 이 상영회에서는 "함께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모인 캠페이너들 및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란 무엇인가
세월호 다큐 <그레이존>은 흑백 사이 모호하게 연결된 기자들의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는 언론에게 화살이 몰렸던 사건이다. 상황이 어떠한지 언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현장의 팩트를 명확히 전달했어야 했던 언론이 우왕좌왕했던 것을 우린 기억한다. 세월호 침몰이란 속보로 심장을 철렁이게 했다가, 모두 구조되었다는 엉성한 안심을 주다가, 다시 침몰이라는 절망을 던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피해자 마음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위해 몰래 혹은 억지로라도 카메라를 무기처럼 들이밀었다. 결국 2차 가해자가 되어 버린 뒤, 그들이 만난 것은 유가족들로부터 오는 강력한 불신의 벽, 그리고 섣불리 정부 눈치를 봐 버린 자신의 무능, 이도 저도 할 수 없던 무기력이었다.
그들은 취재의 사명이 있었으나, 바다 너머를 볼 수 없었고, 해경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유가족 제보보다 정부의 ‘구조하고 있다’는 말을 믿었다. 의심할 수 없었던 자신에 실망하고, 아비규환의 현장에 절망했던 기자들. 자신을 기자라 말하기조차 어려웠던 순간.
메타적으로 보기
영화는 기자들의 참회록으로 보인다. 기자들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돌려, 자신을 카메라 앞에 두고 그날을 고통스럽게 떠올려 본다. 그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동시에 관객은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하게 된다.
기자들은 10년이 지난 이제야 당시 상황을 떨어져서 가늠해보고, 어디서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반추한다. 유가족들이 보고 온 현장(“구조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을 기자들이 서울 보도국에 명확히 전달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정부가 말한 ‘세월호 승객들을 구하는 중’이란 빈말을 전하면서, 진실과는 한참 어긋나 버렸다. 배 안에서 ‘당신들을 구하고 있으니 가만히 기다리라’는 방송과 ‘정부가 세월호 승객들을 구조하고 있으니, 가만히 기다리라’는 언론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럼에도 기자들은 세월호 참사를 제 3자의 눈으로 직접 본 유일한 목격자이다. 2차 가해자이자 2차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현장을, 자신들의 고백을 통해 가까스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세월호의 진실을 기자들의 입장에서 되묻는다. ‘참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024년의 우리는 10년 전 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나 자신은 유족도, 현장 기자도 아닌, 같은 나라의 국민이지만 달리 보면 행성처럼 동떨어진 일반 시민에 불과한데, 이 기억과 기록을 어떻게 끄집어내고 드러내야 하는가, 고. 감히 나의 펜 끝을 세월호 참사에 댈 수 있는가, 고. 하지만 그래야만 한다. 회색지대에 선 자들은 어쩌면 당시의 기자들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정 팩트인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도 팽목항의 어디쯤인가, 우리 역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보다 ‘왜’를 물어야 한다. 왜 비슷한 참사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가. 왜 진실은 아직도 정치적인 이유로 가려지거나 전달되지 못하는가. 나는 왜 기록하는가. 그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누구나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도, 유가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재(人災)로 인한 참사의 희생자는, 구해질 수도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담으려는 노력이다. 기억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보려는 것은 단지 10년 전이 아니라 지금이고 10년 후이고, 30년 후이다. <그레이존> 안에서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는 한 기자의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수십 번이고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세월호 선실에 앉아 있다. 죽은 이들 사이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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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하나의 작은 기억이 큰 기적을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큰 흔적을 남겼다. 2014년 4월 15일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안전하고 질서있게 나갈 수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고 잠자코 기다리던 사람들, 특히 고등학생들. 반면 자신들만 살겠다고 무책임하게 배를 빠져나간 선장. 부모들과 가족들은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 배는 기울어지고, 304명이 조용히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언론은 모두 구조되었다고 했다가, 실종자가 많다고 했다가, 눈길 끌기 식의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은 사고 관련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진 10시 15분부터 중대본을 방문한 오후 5시15분까지 약 7시간 반동안 행적이 불문했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라 그 충격이 더 컸다. 세계적으로 SNS를 통해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전하고, 사람들은 합동 분향소를 찾아가 분향하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국가는 어디 있는가?
세월호 참사가 내게 던진 질문은 ‘국가’였다. ‘국가’가 뭐지? 단순한 경제공동체? 이념공동체? 이날부터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단체’로 여겨졌다. 과거 경찰국가니, 복지국가니를 떠나,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내던지거나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게 국가가 아닐까. 이 추상적인 ‘국가’란 개념이 머릿속에서 부서지고 붙여지고 다시 분쇄되길 반복했다. ‘국가’란 세월호 참사에 뒤늦게 등장한 무심한 ‘대통령’ 일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저들끼리 빠져나간 선장과 선원 들이 ‘국가’였을까. 멀거니 바라만 보던 해경들이었을까.
우리는 더이상 책임자가 말하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국가나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은 채, 제 목숨만 제 이익만 챙길 수 있다는 걸 겪은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 액자 속의 아이들
내 기억 속에 한국은 집단 우울증 상태였다. 전체적 무기력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승객보다 제 목숨이 더 중요했던 무책임한 선장에 대한 허탈감, 바라만 보던 해경들과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싶은 대통령 명령만 기다리던 머저리들.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합동 분향소에라도 가서 그 무력감을 서로 위로하는 일 뿐.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먼저 임시로 합동 분향소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을 가 중앙역에서 내렸다. 안산은 내게 제 2의 고향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약 10년간 지냈던 곳.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아직 살고 있었고, 사람 한 두 명만 건너면, 모두 희생자들과 연결되었다.
안산 중앙역에 내려서 ‘서울예대’의 마크가 그려진 빨간 대형버스를 탔던 기억이 난다. 학생 등하교를 하던 버스가 지금 분향소를 오가는 버스로 쓰이고 있다는 게 묘한 상징처럼 두통이 났다. 사람들은 침울한 얼굴로 검은 옷을 입고 국화를 들고 줄지어 버스에 올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듯했다.
당도한 임시 합동분향소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넓은 벽 가득 검은 액자들이 빽빽히 걸려 있었다. 모두 교복을 입은, 한결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숨이 턱 막혔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우리가 잃은 건 무엇이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이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였다.
그만해, 라는 폭력
우리가 충분히 희생자들을 위해 뭔가를 했던가. 수습도 제대로 안 되고, 업계 유착과 비리, 제대로 교육되지 않은 후진국형 사고. 밝혀지지 않은 대통령의 7시간. 기어코 생사가 확인되지도 유해가 수습되지도 못한 사람들. 학생들 뿐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애쓰던 선생님들과 다른 사람들. 유족들의 통곡과 비통함.
그런 가운데, 어떤 이들은 유족들을 비웃고, 그만 좀 하라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실 규명을 위해 단식을 하자, 그 옆에서 그들을 조롱하며 짜장면을 먹던 기이한 사람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기억은, 진실에 대한 요구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은 없앨 수 없고, 특히 끔찍한 기억은, 해결책이, 수습이 완결되지 않는 한 잊혀질 수 없다. 아니, 잊혀져서도 안 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되새겨야 한다.
10년이 흘렀다. 10년 전 사진첩에서 발견한 노란 리본 이미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그때 우리는 기적이 누구보다도 필요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 마음 아픈 이를 함께 위로하는 마음. 어쩌면 그때 이미 우리는 기적을 만날 수도 있었다. 10년 후에 우리가 찾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기억, 희생자들의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가져오는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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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삭제된 공간의 기억- 왜 우리는 다시 묻고 있는가
사람들이 모이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였다. IT 강국답게 소셜 네트워크로 이태원에 모여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은 한국 전체를 들뜨게 했다. 다중(多衆)이 주는 광장의 에너지를 우린 무려 3년이나 누리지 못했었다. 코로나19가 준 공포, 환자가 죄인처럼 취급되는 두려움 속에서 밖으로 한 발짝 나가기가 어려웠다. 개인정보를 다 포기하면서까지 국가가 국민 안전을 위해 일해 주기를, 동시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 속에서 손님이 현저히 줄어든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로 방에서 화상회의를 했다.
2022년 후반 정부 규제가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백신을 서너 차례 맞았고, 한 번쯤은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 자가격리되는 경험도 생겨났다. 신종코로나에 의해 사망할 거란 공포를 인간의 지적 연구가 정복했다는 자신감과 함께, 코로나19가 감기 정도로 가벼운 병이 되었다. 암흑기가 끝나가는 시점. 전환점이 될 날이 바로 10월 29일, 30일 할로윈데이였다.
할로윈은 일반적인 날이면서 일반적인 날이 아니었다. 본래 켈트족에 연원을 둔 할로윈은 아시아권에서는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려진 명절이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할로윈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젊은 층은 달랐다. 유치원 때부터 코스튬 분장을 했고, 영어조기교육으로 할로윈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할로윈은 10월 31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의 문이 열리는 날, 유령이나 귀신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좋은 유령도 있지만 악령도 있기에 유령처럼 분장을 하고 뒤섞여 악령은 쫓아낸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그날은 기성세대가 터치하지 않는 젊은 층만이 즐기는 코스프레 축제의 의미였다. 광장으로 모일 찬스. 이태원의 서구적 분위기, 자유롭게 코스프레를 해도 자유롭게 술을 마셔도 같이 즐기는 축제의 느낌.
좁은 경사로에서의 질식
그러나 모든 것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29일 토요일에서 30일 일요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해밀튼 호텔 옆 좁은 골목길, 올라가려는 이와 내려오려는 이의 장난스런 대결이 몸대결로 번졌다. 1번 출구로 빠져나와 이태원 세계음식거리로 가려던 사람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1번 출구 쪽으로 내려오던 사람들. 순식간에 몇백 명의 인파가 몰린 5.5평 공간, 앞 사람 얼굴이나 뒤통수도 확인하기 어렵게 비좁은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사로를 따라 축제는 광란으로 변했고, 환호는 비명으로, 이태원 사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교차로가 되었다.
질식이, 깔린 사람들의 장기 파손이, 복부 팽창과 기절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5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경찰들은 늦었고, 예상하지 못했고,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외부로 나가는 목구멍에 걸린 사람들. 심정지 상태를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가 가감 없이 열어젖혔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이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침몰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코로나19로부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긍심에서, 축제에 통제 인력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참담함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쉬쉬했다. 어떤 이는 그저 압사 사고라 했고, 어떤 이는 참사라고 했고, 어떤 이는 젊은이들이 “놀다가 죽었다”며 씁쓸해 했고, 어떤 이는 나와는 무관한 먼 세계의 일처럼 받아들였다. 어떤 이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저어했다. 이태원 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해밀턴 호텔 쪽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었고, 그 건너편은 일상이 일어나는 한가하고 북적한 삶의 냄새를 끓이며 죽음의 냄새를 가까스로 닦아내고 있었다.
국가 애도 삭제 기간
정부는 서둘러 합동 분향소를 만들고, 국가 애도 기간을 정했다. 그 기간이 폭력적이란 생각은 못했다. 다만 세월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인지, 서둘러 사람들은 그 시간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적어도 괴로움을 축소 시키고 싶어했다. 정부는 이태원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를 옮기고 거리를 삭제했다. 일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 그 날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삭제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고통스러움 탓이었다. 누르고 누른 감정들을 쏟아낼 길이 없는 사람들이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모여들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정말 150여명이나 사망에 이를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다 들어차기도 빠듯한 공간에. 심각한 얼굴의 사람들과 카메라를 높이 쳐든 기자들. 아직 장식이 채 지워지지 않은 할로윈 호박들. 상점에서는 청소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도 각자 재빠르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고통을 방관으로 닦아내려 했고, 사망자인 피해자들은 단지 빗나간 청춘들처럼 긁어내려 했다. 가장 큰 청소는 침묵이었다.
고통스러운 일이라서, 젊은 층들만의 일이라서, 도대체 이해가 안 가서, 침묵했다.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유가족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침묵했다. 누구도 이 일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태원에 대한 언어가 사라지면서 기억도 금세 사라지는 듯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사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그 좁은 골목에서 아직 이렇다 할 반응도 대응도 없이, 연기처럼 소실되었다. ‘이태원’ ‘할로윈’은 금기가 된 듯하다. 다만 언어가 삭제된 것으로, 그 공간이 삭제되고, 그 사건이 삭제되었다. 결국 기억이 삭제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다시 다루어야 할까.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죽은 이들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올리는 것조차 저어하고, 그곳에 있었던 것조차 숨기려 하고, 옆에서 죽어간 친구 때문에 자살자도 생겨나는데, 우리는 유령들의 행진이므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이태원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가. 왜 그들은 이태원에 모일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왜 이태원을 모른 척하고 있는가. 아직 마음 아픈 곡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삭제된 공간은 재생되기 어려운 기억일까, 생각해 본다.
1주년이 된 참사, 왜 아직도 물을 수가 없나
이제 10.29 참사로 명명된 이 사건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지나간 기억의 편린으로 흩어지길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잊은 듯하다. 우리는 이것이 자연재해도 우연히 일어난 사고도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더 많은 경찰인력을 동원했어야 하는 그때, 단지 마약이 아니라 질서 통제를 위해 힘쓰고, 신고가 들어왔을 때 단순한 불평으로 듣지 않았어야 하는 그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월호, 코로나19로 우리에겐 국가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국가는 단지 경제공동체만이 아니라 자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질 줄 아는 공동체여야 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국은 선진국보다 더 나은 안전 체제와 의료체제를 갖춘 나라로 평가되었고, 국민들은 기꺼이 개인정보를 희생하면서 국가의 지시에 따랐다. 한국은 선진국이라는 의식도 차차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10.29 참사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질문조차 미궁의 구덩이 속에 질식사시켜버렸다. 국가는 이 문제가 마치 없는 문제처럼, 국가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치부해버렸다.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
자, 그럼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책임자도 매뉴얼도 없는 사회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세월호보다 더 통제가 가능했던 10.29 참사조차 그 피해자의 잘못 정도로 지나쳐가는 국가에서 우리가 안전을 바라는 것은 어폐가 아닌가. 진상규명은 단지 책임자 논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두 번 다시 동일한 문제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책임자도 그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제 3의, 제 4의 참사에 우리가 무방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다시 묻고 있다. “국가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는 달리 묻자면, “국가는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나”, 의 질문이고, “유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지금 당장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이야말로 이 참사의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