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공공성

[연구원정] 교육-노동시장 넘나들기: 선취업 후진학자의 생애경로와 딜레마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매일의 일상 속 작고 사소해보이는 선택은 물론이고, 진학이나 직업 선택, 결혼과 같은 커다란 결정을 내리면서 살아가죠. 만일 여러분이 열여섯살이 되던 해 내렸던 한번의 선택이 향후 당신의 삶의 경로를 크게 좌우한다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그 선택에 예상치 못한 차별과 배제가 내재되어 있다면 말이죠. 여기, 열여섯의 나이에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을 선택했던 청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진학을 선택했지만, 특성화고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좁고 얕기만 합니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교육 체계 안에서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분리돼 배제와 소외를 경험할 뿐 아니라, 코로나 19의 여파로 무색해져버린 현장실습과 취업난, 진학난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특성화고는 학생 개인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등학교*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공고한 학력주의 사회 속, 특성화고는 단순 고등학교라는 일반적 특성이 아니라, 특성화고 출신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정체성을 덧씌우는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사회 진출 이후에도, 이 청년들에게 따라붙는 이름표가 있습니다. 바로 ‘고졸’입니다. ‘대학에 못 간 사람’, ‘일반계 고등학교에 갈 내신 실력에 못 미쳐 특성화고를 선택한 사람’이라는 편견도 함께 따라오곤 하죠. 결국 청년들은 일터에서 ‘20대 초반에 대학 졸업장을 가져야만 나머지 인생이 좌우되는 현실’, ‘대학 학력이 없으면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사회에서 피부로 느끼며, (울며 겨자먹기로, 또는 전략적으로) 대학 진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취업 후진학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선취업 후진학자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생애경로의 다양성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고졸 청년은 마치 성공하면 안 된다는 듯이 ‘고졸 성공신화’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곤 합니다. 대학 재학생들에게는 '왜 대학에 갔느냐'고 묻지 않으면서, 대한 비진학 청년과 선취업 후진학자에게는 ‘왜 (그동안) 대학에 안 갔느냐’고 묻습니다. 선취업 후진학 제도의 일환으로 추진된 평생교육단과대 사업에 대해, 이화여대, 동국대에서는 ‘학위장사’라며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던 적도 있죠. 에브리타임(대학교 커뮤니티)에서는 ‘야간대’, ‘미융대(미래융합대)’ 애들과 우리(주간대)는 입갤(대학 입학 점수)부터가 다르다며 댓글마다 분리정책(Apartheid)이 펼쳐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여집니다. 선취업 후진학 ‘제도’는 있지만, 여전히 이 제도 속에서 살아가기(go through)를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대학교 역시 아직은 비전통적 학습자에 대해 그리 친화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취업 후진학 전형을 운영하는 대학은 여전히 소수이고, 전공도, 교수진도 매우 한정적입니다. '가장 보통의 대학'을 찾아 대학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대학에서는 다른 형태의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학 비진학 청년일 때에는 대학 진학 청년들에 비해 소수라는 이유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되어서는 일반적인 대학생에 비해 소수라는 이유로 관심과 담론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선취업 후진학 제도에 대한 정책 타당성 연구가 아니라, 선취업 후진학자의 삶에 대한 경험적 연구입니다. 교육과 노동시장이라는 두 지대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이 청년들의 삶에는 어떤 딜레마(모순)가 놓여있을까요. 이 딜레마는 결코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네 교육이 처한 사회적 딜레마 그 자체라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말이죠. * 본 연구에서 '선취업 후진학자'란 a. 특성화고등학교 또는 마이스터고등학교를 졸업자로서 b. 산업체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자가c. 지원할 수 있는 대학 특별전형인 '선취업 후진학 전형', '재직자 전형'을 통해 후학습을 경험한 성인학습자로 정의합니다.[문제 깊이읽기](Youtube) 씨리얼. 특성화고 학생들이 정부에 따질 수밖에 없는 이유. 2020. 11. 28. https://www.youtube.com/watch?... (Youtube) 씨리얼. 25년차 특성화고 선생님이 말하는 특성화고의 실체. 2020. 12. 11. https://www.youtube.com/watch?...(Aritcle) [특성화고, 교육과 노동의 중간 지대에서-3]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2021.11.07. https://chunchu.yonsei.ac.kr/n...(Aritcle) 갈 길을 잃은 특성화 고졸 취업생들. 2019.12.18. https://www.kueherald.co.kr/ne... [가설 들여다보기] 2. 연구 목적 그리하여, 제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비전통적 성인학습자인 선취업 후진학자의 삶과 학습경험을 이해함으로써, 생애경로로서 선취업 후진학의 의미와 모순점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생애경로’가 사회구조와 개인의 선택 속에서 교차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의 연속체이듯이, 학습생애경로 역시 학습자 개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학습자가 놓여있는 거시적 맥락(교육정책과 제도, 학습문화 및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 등) 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됩니다.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과 학습경로는 개인적 학습의 의미를 넘어서서, 체계화, 조직화된 교육정책과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고등학교에서, 일터에서, 나아가 부푼 꿈을 가득 안고 진학한 대학에서 마주한  이중구속적 상황이 있다면, 그건 곧 사회구조와 교육제도 안에 담긴 모순율일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는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선취업하고, 재직자 전형을 경유하여 고등교육체제로 이행(후진학)한 성인을 연구참여자로 삼으며, 이들의 학습경험에 관한 질적연구를 수행할 계획입니다. 본 연구가 질적연구를 통해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로와 학습경험이라는 미시적 단위를 포착한다고 해서, 이것이 교육 체제와 선취업 후진학 제도라는 구조적·거시적 단위를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살아온 생애경로와 지닌 학습경험의 틀이 제도적 맥락 위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필요에 의한 선취업 후진학 제도의 도입은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생애경로를 배태했고, 이는 개인에게 사회문화적으로 장려 혹은 배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먼저 선취업 후진학 경로를 살아내는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과 맥락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교육 제도와 학습자의 경험이 교차되는 지점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3. 연구 문제 첫째, 선취업 후진학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경로에 진입하게 되는가?  이 질문은 선취업 후진학자가 자신의 학습생애경로를 선택하게 된 계기와 맥락, 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삶의 특정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① 특성화고등학교로의 이행단계 ② 선취업으로의 이행단계 ③ 후진학으로의 이행단계의 맥락을 시계열적으로 구분하여 묻고자 합니다. 이 질문의 해석과정에서 연구자는 연구참여자가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경로를 어떻게 의미화하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이행하고 있는가에 주목합니다.  둘째, 선취업 후진학자들이 마주하는 학습경로상의 모순과 학습경험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선취업 후진학 경로 안에서 경험한 학습경험의 특징과 어려움을 구조화합니다.  셋째, 선취업 후진학자들의 학습경험과 학습경로 속에 내재한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결론적으로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이 작동하고 있는 구조성, ‘선취업 후진학’ 구조의 의미와 모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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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는 과연 평등할까?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을 중심으로
1. 시작하며  활동가로서의 시작 : 어떤 부끄러움에서  안녕하세요. 더 나은 교육과 사회를 위한 연구활동가를 꿈꾸는 박소영입니다. 저는 교육이란 한 사람의 지속가능한 삶을 일구는 중요한 요소이자 나아가 한 사회의 성숙과 발전에 기여하는 필수적인 영역이라는 믿음 아래 오랜 시간 교육 분야에 뜻을 두어 온 청년입니다.   교육이란 영역을 경유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던 저는, 교육이란 무엇이며 이  사회에서 교육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교육의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아주 많은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육이 지닌 힘이 소수의 운 좋은 아이들의 것이 아닌, 다수의 보편적인 아이들의 일이 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렇게 학부생 시절, 교육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당시의 제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에 다가갔던 저는 나름 제 자신이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성실히 고민하는 청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를 부끄럽게 만든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경험의 양극화”란 단어를 마주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제주라는 섬에서 자라오며 자신이 겪어왔던, 그렇지만 홀로 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기회의 격차 문제를 장학 사업으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존경하는 이의 도전, <비상한 상상>*으로부터 처음 접하게 된 이 단어는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평생을 수도권에서 살아온 제 삶에서는 지역에 의한 경험과 기회의 격차라는 문제가 한 번도 ‘문제’였던 적이 없었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로 1-2시간 이내로 서울에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 생활, 교육이나 강연은 제게 언제나 ‘접근 가능한’ 기회였습니다. ‘물리적으로 어려워서’ 이 기회들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던 존재들도 있었겠구나, 뒤늦게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의 경험이 이후의 삶과 스스로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지니는지 알고 있기에 이 문제에 더욱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제가 주목하지 못했던 불평등이 존재했음에 부끄러웠고, 이 문제를 장학사업과 연결하여 경험의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고자하는 이들에게 존경심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후 지역격차라는 문제를 접하게 될 때면, 미디어 등에서는 직접적으로 주목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경험의 격차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지방 출신 친구들을 만나면 혹시 친구의 학창시절에도 엇비슷한 마음과 경험이 있었는지 조심스레 묻곤 했고, 일련의 이야기를 듣고 모아보니 이는 지방 출신 친구들이 얼마간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문제는 분명 해결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이나 아직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해 개인이 감당하고 감내해온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마음에 이르자 저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비상한 상상>이 하나의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직 세상이 주목하지 못한 문제를 우리의 시각에서 정의하고 풀어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저는 용기를 내어 해당 단체의 문을 두드려 감사하게도 2022년 하반기부터 함께 홛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비상한 상상  : 지방 청소년의 경험의 양극화 및 기회의 격차 해소를 위한 수도권 꿈여행 장학 프로젝트. 시즌 1~3동안 총 13명의 장학생을 배출했고, 35곳 정도의 파트너 기관/단체와 함께 했다. “자신의 세계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경험이 한 개인의 성장과 도약에 얼마나 큰 자산이 되는지를, 그러나 지방의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뭐라도 해보려고 모인 마음들에 힘입어”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을 도모해보고자 한다. (비상한상상 호스트 및 디렉터, 양소희 님 SNS 中) 📜 스물 다섯, 인생 첫 장학생을 선발하기로 했다 : 비상한상상의 설립 배경 및 활동 과정은 설립자이자 디렉터인 양소희님이 쓰신 해당 글을 참조하시면 더욱 선명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연구활동가의 시작 :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는 우리의 움직임에 힘을 더하기 위해 “꿈을 향한 도전에는 경계가 없어야 하니까.”. 이 믿음 아래, <비상한상상>은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한 고민과 시도와 도전을 이어나갔습니다. 제주의 청소년들에게 어떤 경험을 선물할 수 있을까, 어떤 어른과의 만남과 대화를 주선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필요로 할까. 또 어떤 청소년에게 이 기회가 가닿아야 할까. 많은 것들을 고민하며 꿈여행을 설계하고, 장학생을 선발하고, 그들과 꿈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지역사회에 돌아와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문제의식을 실현해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이 문제의식에 응답하는 청소년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슬퍼지곤 했습니다. 자신이 어느 곳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에 대한 접근성이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니. 교육에 희망을 거는 사람으로서 지역의 문제가 현실로 와닿은 순간이었습니다. 이내 저는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이 문제가 사실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사이의 경험과 기회의 차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나 결과물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경험과 기회라는 단어가 주는 추상성과 거대함 때문일까 싶어 범위를 좁혀 검색했을 땐, 지역격차에만 집중했거나 교육문제에 집중하는 등 여러 하위요소들에 대한 제한적인 연구만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경험과 기회 그 자체가 얼마나, 어떻게 차이나는지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결과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경험의 양극화’라는 단어가 새로웠던 것처럼, 아마 이것이 미처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은 그럼 우리가 해보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의 격차의 실태가 어떠한지 우리가 알아보자고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아이디어가 나오자 너무 중요하고 흥미로운 작업이 되겠다며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비수도권 10대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경험과 기회는 무엇이며, 경험과 기회의 격차라는 문제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측정할 수 있을지 열린 아이디어를 던지며 워크숍마저 뚝딱 진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더 많은 공감과 동의를 얻기 위해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의 논의점을 잘 준비하고 마련한다면, 그렇게 우리의 문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분명 사회적으로 이 문제에 주목할  수 있는 중요한 시작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연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문제에 대한 진심 하나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는 것. 이를 같이 해결해보자고 얘기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활동의 가장 큰 매력과 힘을 다시금 느끼며 활동에 연구를 더해 우리의 이야기를 보다 탄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비상한상상> 시즌 3에서는 리서치팀을 꾸려 이 문제에 집중해보자 이야기하였고, 과분하게도 팀을 리드하는 자리를 맡아 차근차근 팀의 과업과 역할을 정리해나갔습니다. 그렇게 활동 속에서 연구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 기존의 연구와 그 한계청소년의 삶 속의 이야기를 향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팀의 리드 자리까지 맡겠다 용기 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던 ‘연구’라는 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여기’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모르는가를 명확히 답하는 그 과정의 엄밀성과 이를 밝혀냄으로써 펼쳐지는 추가적인 탐구와 대안의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저로 하여금 연구라는 단어에 반응하게 만들었던 듯 합니다.  <비상한상상>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 활동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면, 연구 꿈나무로서 저는 이 작업의 학술적 토대를 고민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안고 <연구원정>의 프로젝트 내에서 이 문제를 추가적으로 디깅해보자는 나름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역격차 그리고 경험과 기회의 격차, 그 교차점에 서서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 문제. 이 문제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저는 일차적으로 ‘지역 격차’와 ‘경험과 기회’라는 것의 교차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에 저는 우선 ‘지역격차’, 그리고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정의하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지역격차 : 조명래(2013)에 따르면, 지역격차란 지역불균형으로도 표현되며 집단 간, 계층 간, 부문 간 사회적 기회, 자원, 권력이 불공평하게 배분된 상태를 지칭하는 사회적 불평등이 지역 간에 골고루 분포하지 못해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지역격차는 사회적 불평등을 포함하여 지역이란 공간범주를 기준으로 나타나는 포괄적인 차이 혹은 불균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역격차가 문제가 되는 이유로, 지역간 기회, 자원, 권력의 불균등 분포가 구성원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하게’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을 겪게 하기 때문이라고 짚어 냅니다.       지역을 이유로 삶의 기회를  불필요하고 부당하게 경험하는 사회적 불평등. 이 정의를 알고 나니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청소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고, 청소년들의 삶에서 지역격차는 어떠한 양상으로 일어날까 더욱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스텝으로 경험과 기회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 단어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거대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발화하고 다니던 ‘경험’과 ‘기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예상치 못하게, 너무 이른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한 느낌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며칠, 아니 몇 주간 고민스러웠지만, 이내 방법을 찾았습니다. 제겐 함께 고민할 동료들이 있었거든요.  "개개인마다 다양한 뜻으로 소화하고 정의할 수 있을 경험과 기회를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파악하긴 어렵더라도, 경험과 기회의 요소를 우리가 정리해볼 수 있진 않을까?" 이에 저희는 청소년들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질 몇 가지 경험들을 떠올려 이를 범주화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카테고리는 문화자본, 사회자본, 교육기회, 진로 체험 기회였습니다. 물론 이것들이 청소년들의 삶 속 모든 경험과 기회를 포괄하진 못할 것입니다. 아주 작게는 대중교통 이용 경험, 크게는 의료 경험까지. 경험과 기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 하니까요.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당장 청소년의 삶에서 주목해보고 싶은, 또 주목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를 크게 4가지로 잡아보았습니다. 이 중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에 대한 간략한 개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문화자본 : 문화 자본은 학자들에 의해 다소 엄격하게 사용되었지만, 각 개인들이 사회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후천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면 그들은 문화 자본을 소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본 : 사회자본이란 개념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 개념이나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 네트워크의 집합적 가치의 총합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상준(2004)에 따르면, 사회자본은 보다 포괄적인 사회 관계 속에서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연결망과 집단 소속이 당사자에게 주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 자원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들로 구체화 해볼 수 있는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는 왜 중요할까요? 청소년기에 한 사람이 마주하는 경험과 기회는 그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진로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청소년기의 ‘경험’은 대학 입시 수시 전형 중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청소년기의 경험과 기회가 한 사람의 성장, 나아가 진학, 진로, 취업, 그리고 이후의 삶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학술적인 논의 외에도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지금의 여러분이 되기까지 중요했던 경험 한 두 가지 정도는 떠올리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과 기회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의해 불평등하게 배치되는 것을 문제로 여긴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교육학은 왜 이런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교육 분야를 배우고 발 딛고 서있는 제게 들었던 또 다른 의문입니다. 제 연구가 또 주목하고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교육격차는, ‘학교 환경의 차이, 지역 환경의 차이, 사교육을 받는 정도의 차이, 학부모 지원의 차이, 학업성취의 차이 등 교육과 관련된 여러 형태의 차이’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를 주된 연구 주제로 삼는 교육사회학이라는 분과 내 다양한 연구 논문들은 주로 학업성취 결과 분석을 위주로 교육격차를 확인하고 접근해왔습니다.  교육사회학 영역에서 교육평등은 교육 기회, 교육 과정, 교육 결과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 논의되지만 현행 연구들은 학업성취라는 교육의 결과 측면에서 교육격차를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측정 및 비교 가능한 학업성취도의 특성 때문일 수도, 학업성취가 한 사람의 교육성취, 나아가 직업 지위와 이후의 삶에서의 소득수준 등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인 연구 분석 결과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청소년들이 교육기회와 교육과정에서 경험하는 차이를 드러내고 규명하는 연구는 아직 부족한 듯 합니다. 우리의 연구가 현행 연구에서 아직 부족한 지점을 직접 포착하며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3. 연구의 구성 그래서 저와 제 동료들는 다음과 같은 연구질문을 세웠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격차가,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가?” 이제까지 교육격차 연구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의 차이’를 넘어 ‘교육기회’의 차이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조건과 과정’에서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실제 청소년들의 삶에서 경험과 기회가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 연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세상에 없던 청소년들의 경험 실태조사를 기획하게 됩니다. 바로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 탐구 실태조사를 말이죠. 서베이 기법을 활용하여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각 100명의 청소년들의 일상적 경험과 기회를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앞서 구체화한 지역에 따른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4가지 하위 분야에 대한 문항을 설계하여 배포하기로 하였습니다. 각 100개의 응답은 일반화하기에는 부족한 표본이지만,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청소년들의 응답을 수집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실태조사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가 실제 사람들의 삶에서 드러났는지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한 질적 연구 또한 동시에 준비하였습니다. 심층 인터뷰 기법을 통해 제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청년 12인을 대상으로 인터뷰 하여 상경 과정을 역추적해보고자 하였습니다. 비수도권 청소년으로서의 성장해온 과정에서 어떤 유형의 부재와 결핍, 격차를 인지하거나 감각하였는지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전문 연구자 그룹이 아니었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족함을 메워보고자 질적 연구를 준비하며 팀원들과 심층 인터뷰에 도움을 주는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던 날도 스쳐지나가곤 하네요. 4. 연구 결과 연구활동가의 특혜 : 나의 문제의식을 탐구해 볼 현장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활동과 연구의 시너지를 기대하며 시작한 활동은, 제게 정말 이 연구를 수행해 볼 기회를 선물로 안겨주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의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 사업 선정 결과, 실제로 이 연구를 직접 수행해볼 기회와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이 연구는 연구를 수행하고 결과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지원해줄테니 마음껏 상상하고 시도하라는 디렉터님의 이야기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어요.  연구 설계 : 3달이면 하나의 연구를 작게나마 시작해볼 수 있다고 어떻게 설계했냐구요? 2023년 10월 한 달간 팀원들과 열심히 머리를 맞대어 연구의 큰 얼개를 짜고, 구체적인 문항과 질문을 상상하고 설계하며 설문지와 질문지를 만들었습니다. “연구자의 기발한 아이디어 만큼이나 값진 것이 연구할만한 좋은 현장을 만난 것인데, 좋은 기회를 갖게 되셔서 기대가 됩니다.”라는 코멘트로 응원과 격려를 전해주시던 <연구원정> 동료 선생님의 말씀처럼 상상하고 구상했던 연구를 실제적으로 수행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연구 수행을 앞둔 시기에 더욱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결과가 모일까, 우리의 고민이 현실일까- 하는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11월부터 한 달 간 설문지를 배포하였고, 눈덩이 표집방법으로 질적 연구를 위한 인터뷰이를 찾고 인터뷰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실한 홍보와 인터뷰의 시간을 보낸 뒤 12월, 연구 수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기대에 약간 못 미쳐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열띤 홍보의 결과로 얻은 소중한 131건의 서울/제주 청소년들의 응답과 12인의 인터뷰. 우리 손으로 만들고 얻어낸 이 결과가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렇게 12월 한 달 간 팀원들과 이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이 유의미한 결과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구 결과 : 경험과 기회는 과연 평등했을까요? 과연 연구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우리의 예상보다 흥미로운 결과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양적연구 결과인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 실태조사에서는 서울과 제주 청소년들이 뚜렷하게 대조적인 응답을 보이는 문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질적연구에서 인터뷰이들의 발화는 이를 뒷받침하곤 했습니다.  문항 범주별로 양적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들을 소개하며, 관련된 질적연구의 응답이 있다면 덧붙이며 설명하겠습니다.  [문화자본]  이동의 한계에 따른 문화자본의 소유, 접근의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연결된다는 문항에서 서울 청소년들이 제주 청소년들에 비해 긍정적인 답변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관심 분야, 취미 생활등을 위한 다양한 정보의 접근성 차이가 컸습니다. 서울 청소년은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긍정 반응이 높았던 반면, 제주 청소년은 긍정 응답 비율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 “저는 교육 뿐만 아니라 문화 생활도 꽤 크다고 생각 하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좋아하는 가수가 있었는데 이제 콘서트를 가고 싶은데 가려면 비행기 타고 이제 숙박까지 생각을 하니까 콘서트도 못 가고 막 이런 경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응답자 F) - “중학교 때인가 코엑스를 방문했었는데, 그런 큰 문화시설을 접하면서 서울이 되게, 서울에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응답자 K) [교육기회 파트] 교외에서 관심있는 분야의 강연, 멘토링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청소년의 수는 제주-서울 비슷하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청소년의 수는 제주가 현저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회 이상 경험해본 적 있는 청소년들이 존재함을 고려했을 때, 완전한 결여-단절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학 혹은 취업 정보 파악에 관한 문항 답변은 확연히 상반된 결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은 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청소년의 비율이 72.8%이었지만, 서울 청소년은 단 33.3%였습니다. - “요즘 제가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되게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막 탐방을 하더라고요. 저한테 와서 막 인터뷰 해도 될까요? 이러면서 오기도 하고, 너무 예쁘다 생각하는데 한편 정말 저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거든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 탐방을 가나는 거를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까 이렇게 애들이 잠깐이나마 대학의 문화를 느끼고 또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학생들의 열정을 키우는 데 되게 도움이 많이 됐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 서울에서 지냈다면 아까 제가 관심있다고 말씀드렸던 그런 교육 불평등에 대한 생각이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겠다.” (응답자 F) - “저는 연극 전공이었거든요. 그런 연극사들을 다 그냥 걔네들(수도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동기들)은 다 배웠대요. 고등학교 때 그래서 그런 뭐 기본적인 연기 수업이라든지 그런 흐름들을 자연스럽게 그들은 익힐 수 있어서 저는 그게 조금 부러웠어요. 경험이 많았을테니까 아무래도 서울에 살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요?” (응답자 H) [진로 체험 기회] 서울과 제주 청소년 모두 관심 직업 분야에 대한 관심도와 다양성은 동일하지만, 실제로 관심 직업 분야 교육-체험-교류의 기회를 가졌는지 여부에서 제주-서울 청소년간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서울 청소년의 경우, 관심 진로분야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 해당하는 응답 비율이 25.9%인 반면, 제주 청소년은 43.3%로 두 배에 조금 못 미치게 높았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서울 청소년의 경우 교육-체험-만남의 횟수가 상승하는 모양의 그래프였지만, 제주 청소년의 경우는 아예 없거나 많은 양상을 띄며 제주 내에서도 양극화 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에 대한 주관적 인식 부분에서는 제주-서울 청소년의 인식이 눈에 띄게 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은 75%가 넘는 비율로 기회가 없다고 느낀 반면, 서울 청소년의 경우 60%에 육박하는 수가 기회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시험을 준비하는데) 그거에 대해서 면담할 선배가 없다는 거. 그래서 이게 다르구나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고. 서울은 좀 다르구나를 더 본격적으로 느낀 건 저희 회사 와서도 이렇게 진로 관련된 고민을 나누는게 되게 활발한 느낌이에요.” (응답자 A) - “서울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면 뭘 느낄 수 있냐면,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인맥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그 사람들과의 여러 가지 경험을 나눌 수 있고 사실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이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이러다보면 비슷한 분야 또는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들을 수 있어요.” (응답자 G) [사회자본] ‘현재 거주 지역에서의 기회의 부족과 외부 제약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지’에 대한 응답 결과는 실태조사 전반을 통틀어 가장 뚜렷하게 패턴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제주 청소년의 경우 약 85%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서울 청소년의 경우 약 60%의 청소년이 아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지역에 대한 애정도를 묻는 질문의 경우, ‘애정이 있다’고 답한 청소년의 비율은 제주(76%)-서울(87%) 모두 높았으나, 앞으로도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응답은 완전히 반전되어 나타났습니다 .(제주 “아니다” 63.8%, 서울 “그렇다” 68.5%) - “저는 만약에 상경을 할 학생들이 있다면 이제 고3 학생들이나 이런 친구들 싹 다 모아놓고 교육을 하거나 멘토를 매칭해서 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저는 그 모든 걸 혼자서 구글링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제주도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 꽤 있는데 그들의 경험이 공유가 되고 있지 않은 거에 대한 좀 안타까움이랄까. 다 리셋이 되는 것 같아요. 경험이 누적이 돼서 쌓이는 게 아니고 리셋. 다시 또 처음 시작되고. 이게 좀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응답자 G) - “(다시 제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나중에 이제 제가 정말 유명해져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나한테 작업 의뢰하러 올 정도가 된다면 당연히 전 제주도 가서 살고 싶어요. 근데 이제 그게 아니라면은 이제 열심히 영업을 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살아야 되는 거고. 위치가 중요하지 않게 되면 제주도에 살게 될 것 같아요.” (응답자 C) 연구결과의 종합 :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발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반화하기엔 적은 수의 응답이지만, 지금 모인 자료들을 종합해보더라도 <비상한상상>이 주목하고 있던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 사이의 경험과 기회에 어느 정도의 차이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들이 서울 청소년에 비해 문화, 교육, 진로체험, 그리고 사회자본으로 설명될 수 있는 여러 경험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특히나 경험과 기회의 정보나 접근성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회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 부분이 확연히 차이 나는 점에서, 막스 베버가 계급을 나누는 인식으로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 정도에 따라 구분한 것을 비추어 볼 때 해당 응답은 접근성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볼 만 합니다.  이러한 경험과 기회의 불평등이 단기적으로는 진학에, 나아가 시장 위치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낼지는 추가적인 분석 및 연구로 남겨둘만하다고 생각합니다.  5. 결론 지금까지 연구활동가로서 저와 제 동료들이 수행한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탐구해온 과정과 결과를 보여드렸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은 성장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를 겪는지, 그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지 탐구해보고자 했던 우리의 시도는 제주-서울 청소년 131인의 응답과 제주에서 자라 서울로 상경한 청년 12인의 이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상처럼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은 문화, 교육, 진로 체험, 그리고 사회자본 모두에서 수도권 청소년에 비해 경험 및 기회에 대한 정보의 양, 접근 기회의 차이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록 우리는 이 문제를 더욱 더 성실히 알리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역에 의한 한 사람의 경험과 성장이 차이가 존재하며 개개인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힘으로 돌파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험과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이따금 이 연구가 지닌 한계에 멈칫하곤 했습니다. 전문적인 연구자가 설계한 게 아닌 만큼 이 연구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연구 결과를 일반화할 만큼 많은 수의 표본을 모으지 못했으며, 추상적인 개념인 경험과 기회를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도 어설픈 지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문항들 역시 해당 문항이 오롯하게 경험과 기회라는 변수만을 측정할 수 있도록 통제되지도 못했습니다. 연구는 보다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 역시 많이 배울 수 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앎이 풍부했더라면, 조금 더 능숙했더라면, 조금 더 섬세했더라면,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이 문제를 보다 잘 구성해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그럼에도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내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가시화 하는 중요한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연구는 지역격차 혹은 교육격차, 어쩌면 경험과 기회의 격차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에게 또 다른 연구의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교육격차 그리고 교육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지닌 저는 경험과 기회의 격차가 한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더욱 궁금해졌고, 이러한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공공이, 그러니까 공교육이 해결할 수는 없을지 보다 많은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에게 이 문제와 연구가 가닿아 더 많은 논의들이 활발히 생산되고 토론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 문제에 고심하며 몰두했던 지난 시간들은 그 자체로 값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 문제에 대한 진심과 이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던 사람들의 선의와 열정에 힘입어 가능했던 이 연구가 앞으로도 더 발전되기를 바라며 마치고자 합니다.  운 좋게 팀과 단체가 활동한 내용을 대표로 정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제 개인이 수행한 게 아닌, <비상한상상>이라는 반짝이는 단체가 함께 수행한 결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팀의 연구에 학술적 토대를 고민하고 싶다는 욕심이 과연 얼마나 충족되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적인 고민만으로는 결코 실현해낼 수 없는 결과를 함께 만들어준 <비상한상상>에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연구와 현장에서 더 나은 세상을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의 모든 연구활동가를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조명래(2013). 격차의 새로운 양상과 통합적 균형 발전. NGO연구  제 8권 제 2호. 한국 NGO 학회. 이정화(2014). 문화예술교육의 이해. 커뮤니케이션 북스. 강석(2016). 커뮤니케이션과 자본. 커뮤니케이션 북스. 김상준(2004). 부르디외, 콜만, 퍼트남의 사회적 자본 개념 비판. 한국 사회학. 38(6), 63-95. 박주호, 백종면(2019). 교육격차 실증연구의 체계적 분석. 한국교육문제연구, 37(1), 21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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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수학...쥐어짜기 수학 교육의 한계
프랑스에 살면서 관찰하고 느꼈던 이웃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아이들은 늘 공부보다 놀기에 바빴다. 동네에는 개구장이 아이들이 많았고, 노인들은 길에 서서 이웃들과 하루종일 수다를 떨었다. 직장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다니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떠들곤 했다. 출근했다고 한 잔, 점심먹고 한 잔, 달콤한 각설탕을 찍어 먹는 에스프레소는 그야말로 수다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각설탕이 나왔으니 각설하고….  프랑스는 수학 잘하기로 소문난 나라다. 지금까지 총 64명의 필즈상 수상자 중 프랑스인이 받은 메달은 총 14개다. 물론 숫자로만 따지면 미국이 21개로 당연히 제일 많다. 하지만 미국의 인구가 5배나 많으므로 (미국 3억3천만, 프랑스 6천7백만), 인구 대비로 따지면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야말로 원탑이다. 수학이나 물리교과서에 나오는 프랑스 수학자의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미스터리 같은 통계도 있다. 바로 수학영재를 뽑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의 수상자 명단이다. 여기서는 중국이 단연 원탑이다. 러시아와 미국도 강하다. 우리나라 역시 강하다. 우리나라는 2012, 2017, 2019년 참가자 전원이 금메달을 받은 나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수학 강국이다. (이쯤에서 미국의 올림피아드 메달이 아시아계 학생들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살짝).  그럼 뭐가 미스터리인가? 바로 프랑스다. 눈을 씻고 봐도 프랑스의 수학올림피아드 성적은 상위권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이 금메달을 168개나 가져갔고, 미국이 137개, 그리고 1988년에나 되서야 참여하기 시작한 대한민국도 86개의 금메달이 있는데,  자그마치 1967년부터 참여해온 수학 원조의 국가, 프랑스의 금메달은 고작 26개에 지나지 않는다. 가히 OECD 최하위 수학 성적의 나라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통계인가. 이 두 개의 통계를 연관지어 뭘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애들 쥐어짜는 수학교육 방식이 고등학교때까지는 어찌 어찌 잘 작동하지만, 그 이후 학문의 세계에서는 안 통한다는 점만 얘기하고 싶다. 덧) 여러번 언급했지만 물리에 관해서도 비슷한 통계가 있다. 일본은 물리 올림피아드 노-메달 국가로 유명하다.  반면 우리는 물리 올림피아드 최상위 국가로, 수년째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휩쓸고 있다. 노벨상 수상 실적은 정반대다.  잠정적인 결론: 애들 쥐어 짜지 말자. 고등학교때까지 놀게 내버려두고, 대학 들어 온 다음부터 쥐어짜자... 작성자: 박인규(서울시립대학교 물리학과)출처본 글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제작한 콘텐츠로,  ESC에서 운영 중인 과학기술인 커뮤니티 '숲사이(원문링크) '에 등록된 정보입니다.ESC: https://www.esckorea.org/숲사이: https://soopsc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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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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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다. -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인권, 노동권, 정치기본권이 필요하다.
서울 S 초등학교 교사가 숨을 거둔 지 100일이 지났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1학년 담임이자 1년 차 신규교사였던 그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든 자원이 집중된 부유한 도심지의 학교 안에서 고인의 고통을 덜어줄 지원체계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7월 18일 이후 부조리한 교육 현장을 바꾸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학교의 벽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벽은 개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애도의 공간이 되었다. 무수한 포스트잇을 마주한 채 눈물짓는 이들 옆에서 필자 또한 오랫동안 쌓아온 체념과 무기력증을 성찰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모였다가 검은 점으로 흩어졌고 또다시 움직여 커다란 검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힘겨운 고통에 다가가며,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민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7명의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10일, 경찰은 고인의 사망 경위 수사 과정에서 범죄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분명히 사회적 고통에서 비롯된, 사회적 타살이었다. 취약한 위치에 놓인 교사가 노동 현장에서 고립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일자리와 삶의 질이 양극화된 현실 속에서 노동은 소득의 유일한 수단이다. 직업 서열이 경제적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고 불평등한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의 자존감과 더불어 삶의 존엄성이 수시로 침해받기가 쉽다. 동시에 개인의 풍부한 삶의 경험은 노동 현장에서 끊임없이 ‘성과 및 결과’로만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서 생존과 노동은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가 사회적 안전망 및 돌봄의 공백 속에 위치할 때, 그가 겪는 소외와 고통은 정량적인 수치로만 납작하게 표시될 뿐이다. 동시에 정부와 국가는 이 고통을 개인의 책임에서 비롯된 특수한 사례로 여기려고만 한다. 게다가 개인이 노력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슈퍼맨’ 서사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해진다.   교사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 토론장 바깥으로 쉽게 밀려나 버렸다. 언론은 교사를 향한 무분별한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고발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교육부도 비도덕적인 학생과 양육자의 가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을 급하게 추진했다. 학생과 양육자의 의무와 책임 강화를 명시한 법제도, 교사의 교권 강화라는 명목으로 학생 인권 침해를 조장하는 생활지도 고시안, 교권 관련 법률지원 및 치유 상담 지원 제도 등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토론장 속에서 정작 학교 교육 당사자의 목소리는 소외되고 심지어 배제되고 있었다. 특히, 지난 8월 8일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안) 마련을 위한 포럼’과 8월 10일 ‘교권회복 및 보호를 위한 교육부-국가교육위원회 공동주최 토론회’에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발제자와 청중의 입에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발언을 제지하지 않고 구성원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발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장 교사를 교육부 직원이 물리적으로 제지하고 포럼장에서 끌고 나갔다.* 정부와 교육부는 학교현장 ‘교육’이 삶 대신 죽음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교육 당사자인 학생 및 현장 노동자와 함께 원론적으로 고민하고 논의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공론장은 비민주적이었으며 폭력적인 인권 침해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논의를 되돌려 원점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양육자와 학생의 악성 민원을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부터 성찰해야 한다.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사회적 책임을 사회에게 묻기보다는, 다른 개인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것으로 모든 갈등과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의도가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개인은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토론과 숙의를 힘겹게 여기기 쉽다. 외부적 개입이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겪을 위험과 손해를 감당하는 것조차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다. 양육자도 교사도, 학생이 원하는 좋은 삶과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성적보다는 타인에게 존중받는 일, 더 나아가 교우관계, 학교 내의 다양한 소통에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보다는 나 자신만,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를 선택하는 것이 더 높은 지위와 소득을 획득하는데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 교육과정의 목표에서 교육은 가정, 경제,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개인이 사회관계를 맺으며 일상적인 연대를 통해서 민주시민 역량을 체득하고 실천해나가는 현장이다. 하지만 교육 구성원들이 지향하고 바라는 ‘교육’의 모습은 너무나 양극화되어있다. 권력 위계로 기울어진 논의를 평등하게 바꾸려면, 더욱 다양한 위치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목소리를 촘촘하게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이 정부 및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면서 각자도생의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통해 문제 해결하는 대신에 적극적 또는 극단적 자기 계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를 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오로지 생존을 보장하는 물질적 기반(높은 성적, 학벌, 전문직, 부동산 획득 등)을 축적하는데 골몰할 수밖에 없다. 공교육은 개인의 성취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비 능력적 요인(가족 배경, 사회적 경제적 계급 등)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차별 기제를 은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 스스로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게 하며 불평등한 생산(노동) 관계에 침묵하게 만든다. 기존 체제 강화를 통한 소득 안정을 확보하고자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보장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먼저, 개인이 평생에 걸쳐 촘촘하게 겪는 ‘평가 집착적인’, ‘고부담’ 시험 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혈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은 무한 경쟁 행위의 주체로 동원된 지 오래되었다. 차별과 불평등이 공기처럼 퍼진 한국 사회 안에서 ‘수능(대학입시) 제도’는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공신력을 발휘한다. (실제 수능 날 오전에는 교통 체계를 비롯한 모든 일상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진다.) 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수능과 대입을 위해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장기간에 걸쳐 총동원되고, 경쟁 속에서 개인의 실패가 곧 가족의 불명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온갖 갈등과 사건, 폭력과 불평등에 연루되면서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교사도 존엄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너무나 불가능하다. 1986년 1월 15일 새벽, 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 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여성 청소년이 외친 이 말은 1989년 5월 28일에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선언문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학교 교육 현장의 민주화를 위한 일상적 연대와 역량 강화를 지향하였고, 학생과 양육자, 모든 노동자가 힘을 모아서 비폭력 저항으로 국가의 비인간적인 억압과 차별에 대한 치열하게 맞섰다.   경쟁은 능력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이 노력해 만들어 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재화(지위)를 보상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사회의 신념체계이다. 이 논리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경쟁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시험/평가 절차의 공정함’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경쟁의 공정성은 현재 사회구조와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요구된다. 이로 인해 더더욱 학생과 교육 노동자가 겪는 차별과 취약한 현실은 당사자의 목소리로 제대로 나오지 못한다. 게다가 계급 차별을 없애는 복지와 소득 재분배조차 공정하지 못하다고(역차별이라고) 여긴다. 이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와 차별을 겪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과 동료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품고 약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재난 대응 시스템은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사람들은 소외 및 낙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와 긴밀하게 결탁하여 대기업, 초국적(글로벌)기업, 플랫폼 기업 등이 코로나19라는 기후 재난을 이윤 축적의 기회로 전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력하였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의 고용 유연화를 통해서 말이다. 정부와 국가 또한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험난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에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차별에 침묵하며 노동을 착취했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 구성원 간의 분열을 유도한다. 실제 현 정부는 고용 불안과 돌봄 공백에 있어 취약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동시에 돌봄, 복지, 의료, 교육, 교통,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다.   교사 또한 능력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할 의지를 갖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학교는 교육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소외되고 수단화되어, 혈연가족의 계급 세습을 위한 진학과 취업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게다가 교육개혁을 외치는 윤석열 정부는 저출생과 학령기 인구 감소를 빌미로 한 교육예산 축소로 교원정원을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원평가체제를 전환하여 승진·인사·임금과 연계한 직무성과급제로의 개편으로 불안정 교육노동과 교원구조조정을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감축은 지방교육자치 통제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지난 10일에 발표한 ‘2028년 대입제도 개편안’은 통합형, 융합형 수능 과목 체계 개편과 수능 심화 수학 개설, 고교 내신을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꾸고 상대평가를 병기하는 등의 큰 변화를 예고했다. 사교육 확대와 경쟁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난 개혁(아닌 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계와 현장 교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학교 현장에 대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둘러싼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논의가 소거된 채 정부는 ‘교권 회복과 공교육 정상화’요구를 ‘생활지도 고시안’ 발표로 입막음하려 했다. 이는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사의 (학생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권위 세우기 시도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고시안 예시를 들면 학생 소지품 압수, 문제행동 학생 교실 분리 등 학생 인권 침해를 교사의 ‘정당한 교육 행위’로 정당화하고 있다. 듣기와 상호소통의 책임이 간과된 권위와 권리인 ‘교육할 권리’와 ‘학습할 권리’를 보장하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동료 시민인 학생과 양육자와의 연대를 외면하면서, 인권 침해적인 ‘낙인’을 발행할 권리를 당연하게 여길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교권’이란 용어에 차마 담기지 못한 중요한 생명의 존엄과 보편적 권리의 가치를 한없이 상상하고 염원할 수는 없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학생과 양육자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을 들어 제2의 ‘김용균’처럼 살아갈 가능성을 용인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 정부와 국가가 ‘기본적 시민권을 실현할 권리’와 더불어 ‘소득’, ‘노동권’, ‘정치기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도록 투쟁하려면, 교사 스스로도 ‘교권’의 위계성과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특권층이 전유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두가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경험하는 시공간’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비통한 죽음은 불평등과 부정의, 그리고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맥락 안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척박하고 위태로운 기반에서 독박 돌봄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교사의 노동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논의에서 계속 멈춰있을 수 없다. 물질 만능주의, 능력주의, 개발(추출)주의, 생태 학살이 만연한 폭력적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을 꿈꾸는, 동료 노동자와 시민의 신념과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논의로 크게 확장되어야 할 때이다. (끝)   각주 *<학생인권조례가 일진회 구성 권리? 교육부 포럼 ‘황당’ 발제- [현장] “거짓말 마라 항의한 여교사, 교육부 직원들에게 끌려 나가>, 오마이뉴스,(2023.08.09.) ** 최덕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윤석열 정권의 교육개악, 어디로 향할 것인가’ (2023.10.27.) *** 희음 (멸종반란 한국), 이 토론문을 읽고 조언해준 말 (2023.10.26.)   참고문헌 1. 김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사회적 타살, 윤석열식 해법은 틀렸다!’ (2023.9.4.) 2. 이경숙(2020), <시험/평가체제 속 인간과 교육받을 권리>,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34~62 3. 정용주(2020), <현수는 개인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6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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