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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민생토론회와 대파 한 단
총선을 약 일주일 앞둔 유권자로서 요즘 고민이 많다. 정정, 고민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참담한 심정이다. 역대급 고물가 시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청년 유권자로서,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선거철 중 여러 측면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는데, 그중 하나가 윤석열 대통령의 유해한 선거 유세 방식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식에는 유례없는 독특함이 있다. 특유의 불통과 몰아붙임이 선거철 공세와 맞물려 그 정체성이 또 한 번 확인되고 있다.
그 대통령의 선거 유세 방식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지역 곳곳을 돌며 민생토론회를 총 스물네 차례 진행했다. 취임 극초기인 2022년 5월부터 11월까지 약 반년간 실시한 도어스태핑 이후 최다로 진행되는 연속적 언론 노출이다.
총선 시즌에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스물네 차례 진행하는 것이 상식적인가 하는 물음에 참고하고자 역대 대통령의 사례를 찾아봤다. 보도된 뉴스 기사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 중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은 각각 선거 두 달 전, 지방 방문 횟수는 각각 3회, 8회였다고 한다. (2024.03.07. 중앙일보.) 민생토론회 횟수가 잦다 보니 너무 많은 공약과 내용이 쏟아져서 일일이 확인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민생토론회 방식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토론회의 의도와 내용이다. 우선 스물네 차례나 민생토론회를 진행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명백한 선거 개입이다.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하는 자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공직선거법 제85조 1항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서울 수도권뿐만 아니라 수원, 부산, 울산, 충남, 대구, 전남 등 전국 곳곳을 돌며 이른바 ‘지역 숙원사업’을 해결하겠노라 유세활동을 벌인 것이다. 애초에 이런 활동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제지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선관위는 직무 유기로 일관하고 있다. (2024.03.27. 참여연대 성명서)
선거법 위반이라는 형식적 문제와 더불어 그 내용과 방식도 심히 문제적이다. 4/2 뉴스 보도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민생토론회 후속 조치로 GTX 조속 개통 및 의료개혁 등 240개 과제를 도출했다고 한다.( 2024.04.02.뉴시스) 윤 대통령은 “빠르게 행동하고, 벽을 허물자”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 특유의 몰아붙이기 방식이다. 빠르게 추진하겠다고 한 내용에는 재개발 재건축 규제 완화, 그린벨트 해제,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대형마트 영업규제 개선, 늘봄학교 전국 초등학교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된다. 그린벨트를 해제에 재개발 재건축 규제를 완화, 거기에 신공항 신사업단지 건설계획을 얹는다. 각 영역의 환경단체, 시민사회단체에서 요구하는 ‘기후공약’과는 거리가 먼 행태다. 또한 국가장학금, 주거장학금, 연구생활장학금 등 각종 장학금 지원 정책을 실시하겠노라 이야기하지만, 재원 조달 방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민생에 대해 대파 한 단 만큼의 감각도 없는 권력
현실 가능성을 떠나서 윤 대통령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번 총선이 윤석열 대통령 임기 2년 차에 맞이하는 총선이라는 점, 시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무능’과 ‘후퇴’라는 평가가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감이 들고 정권 영향력에 대한 심각성을 느낀다 해도, 민생에 대한 상식적 감각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폭주하긴 어렵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감각한 상태’에서 본인이 휘두를 수 있는 칼을 최선을 다해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대파 한 단에 875원인 상황을 보고 ‘합리적’이라고 하는 모습에서 민생 삶에 대한 무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윤 대통령의 선택적 추진력은 위협적이다. 대통령은 ‘민생’을 앞세워 폭주 중이고, 양당은 모두 이 사태를 막지 못하고 있다. 거대 야당은 22대 총선 이후에 현재 국면을 어떻게 바꿀지 시간을 앞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그 시간 동안 후퇴한 정책들과 피해 입은 민생은 어떻게 보상을 받을 수 있나.
무기력한 당신, 혼자가 아니다
이번 총선이 흔히 이야기하는 ‘정권 심판’이라면, 심판은 단연 유권자의 몫이다. 그러나 ‘심판’은 이후에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 가정이라는 점에서 현 총선의 ‘정권심판론’은 적절하지 않다. 위성정당이 판을 치며 의원 비례성은 아작나고, 진보 가치와 소수자의 목소리가 국회의 문턱을 넘기는 요원해졌다. 지역구에 투표할 만한 후보가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이런 상황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세요’라는 메시지는 오류 같다.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오류다. 이번 총선에 좌절감과 무기력을 느낀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어렵지만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받아들이고 이 순간을 역사의 한 점으로 만들자. 방법은 하나뿐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표를 던지자. 최선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성실하게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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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이들에게
돌무덤이 있는 풍경
나의 풍경에는 몇 개의 돌무덤이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돌무덤, 빵 공장 노동자의 돌무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이다. 거대한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로 지어진 무덤들은 문득 기억처럼 그곳에 있다. 익숙한 이 기억에 가끔 가까이 다가가 매만지고 바라보며 현재 내가 서있는 풍경을 돌아본다.
돌아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구태여 선언할 필요도 없이 세월호 참사는 이미 일상의 작은 조각이다. 나를 형성하는 요소이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돌무덤이 지어지던 역사 속, 나는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생이자 목격자였다. 세월호 참사 목도의 경험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정치화하지 말라’는 정치인들의 말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청년들이 놀다가, 일하다가 참사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이토록 도처에 있던가. 참사가 유난히 각인되는 이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예방을 강조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참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교통사고’에 비유를 들면서. 그러나 이 죽음에는 ‘안전’의 개념을 허술하게 다룬 구조적 배경이 깔려있고, 죽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안전을 ‘구조’ 속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 어떤 참사도 책임자들에게 처벌과 사죄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구조 속 최고 책임주체인 정치세력은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10년째 말이다.
정치인들의 방어기제에 무색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6일 전인 4월 10일, 22대 국회 총선이 있다. KBS는 4월 18일에 방영 예정이었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총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방영할 수 없다”라고 제작진에 통보했다. 참사의 최고 책임자인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하면 참사를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소거하고,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정치화하지 말라’는 단언이다. 참사 책임자에 대한 비판적 발언에 앞서 ‘내가 사회적 비극을 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가’하는 검열하도록 만든다.
‘정치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맥락에서 ‘정치화’는 ‘단순 사고’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을 특정 정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치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단순 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이 ‘사고’가 사회적 참사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풍경에는 돌무덤이 없다. 혹은 지워버리거나 보지 않으려 회피하는 것이다. 회피와 부인은 ‘권력’이다.
회피하는 권력은 응당 두려움에 떨기를
그러나 돌무덤들이 있는 풍경 속의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무덤, 희생자, 유가족과 동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생존 해내기’다. 살아내는 것은 정치 그 자체다.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내는데, 어찌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사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 요구인 진상규명과 후속 조치로서의 책임자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정치며, 즉 살아내는 방식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3년 6개월가량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조사기간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조사에 있어서 비협조와 방해 요인이 많아서인지 석연치 않은 결론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세월호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참사를 기억하는 마음은 굳은 돌이 되어 무덤에 쌓인다. 10년이 부족하다면, 20년 30년이라도 얼마고 돌을 쌓으리라. 돌무덤 풍경 속 나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서 이야기할 것이다.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이여, 돌무덤을 쌓는 우리를 응당 두려워하라. 또한 나의 풍경을 공유하는 이들아, 우리 부디 함께 생존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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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트라우마를 대하는 공동체의 역할
안녕하세요? 시민36입니다. 오늘은 집단 참사를 대하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10월 29일 지난 토요일,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핼로윈을 맞아 이태원에 방문한 무수한 젊은 생명이 압사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사고라고 부르지만, 이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고 정부의 무책임한 안전대책 부재로 벌어진 참사입니다.
10월 29일 토요일 새벽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SNS와 뉴스에는 참사의 현장 사진과 영상이 여과없이 쏟아졌습니다. 언론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보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참혹한 현장의 모습이 가려지진 않았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주중이 시작되면서 언론 일각, 심리학계에서는 사회적 참사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사건 현장의 영상과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고, 이는 간접경험으로 누적됩니다. 끔찍한 참사가 다른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충격이 더욱 큽니다. 글을 쓰는 지금 약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데, 저에게도 참으로 길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나요?
사회적 참사와 같은 큰 사건이 생기면 시간이 잠시 멈춘듯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러갑니다. 참사 이후, 살아남은 우리 사회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먹고 자고 일하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사 이후 월요일’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뉴스에 마음이 어지러운데, 그 와중에 업무상 메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머리는 참혹한 현장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생각하는 와중에 예정된 일들을 처리하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용건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말을 건네면서도 ‘혹시 연락이 안 되면 어떡하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하고 머뭇거려졌어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며 여느때와 같은 월요일을 보내려고 하는 제 모습과 비극적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정이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그러고 지금 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의자에 앉아서 개인의 감정들을 버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선뜻 안부를 건네지 못하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각자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이번 일로 우리 공동체가 슬픔,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슬픔을 버텨내는 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속에서 공동체의 역할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결론적으로, 제가 속한 회사에서는 약 한 시간 정도 팀원들이 다 같이 모여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미처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고, 억눌렀던 감정을 쏟아낸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는 바로 옆에 앉아서 늘 얼굴 보며 업무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의 감정은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 나누기 시간을 한차례 가지니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사, 학교와 같은 조직은 목적이 뚜렷한 사회적 조직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개인들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회사나 업무 조직에 있으면 사적인 이야기는 배제되고 늘 공적인, 목표 지향적인 이야기만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그 속의 구성원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퍼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애도는 퇴근 후에’, ‘개인적 감정은 일단 미뤄두고 지금은 업무를’ 해야 하는 조직문화, 과연 우리에게 올바른 환경일까요?
공적 공동체 속에서도, 서로에게 한 마디씩 건네며 마음의 안부와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조직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합니다.
가족, 회사, 학교 등 다양한 공동체에 속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번 참사 이후에 공동체에서 마음 나누기, 혹은 집단으로 슬픔을 다룬 경험이 있다면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