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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는 시민의 ‘역량’을 높이려 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작년 7월,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습니다. 1964년 운크타드 창설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합니다.(한겨레, 20210704)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에 이를 자랑스러워 하며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로 성장했으며, P4G 정상회의 개최와 G7 정상회의 2년 연속 초청 등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역할이 확대되었다”고 말했습니다.(브릿지경제, 20220706) 올해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글로벌 수출 7위의 무역 강국, 종합군사력 세계 6위, 혁신지수 세계 1위의 당당한 나라가 됐다"며 “세계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됐"다며 자부심을 보였습니다.(한국일보, 20220301) 한국이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세계 경제 순위이며, 그것은 곧 ‘국내 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와 동일시 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 차원의 부의 증대는 국민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낫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GDP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중요하고 경제의 성장이 지상과제가 됩니다. 하지만 다른 지표들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16.7%로 OECD 4위, 노인 빈곤율 2018년 기준 43.4%로  OECD 1위라고 합니다.(MBC, 20220303) 한국사회의 불평등 지표인 가처분소득, 지니계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국가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복지 예산은 GDP 대비 10% 정도로 여전히 다른 모든 선진국보다 낮은 상황입니다.(오마이뉴스, 20220225) 국가 차원의 총 부는 선진국일지 모르겠지만, 개개인들의 삶들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GDP 중심 접근의 협소함을 넘어이 글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GDP 중심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주의: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간략하지 않을 수 있음) 아래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내용 전부는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책과 책 저자의 아이디어에 대한 소개이기도 합니다. [GDP 접근법]은 1인당 GDP 증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잘살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GDP 접근법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 측정하기 쉽습니다.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여러 재화와 서비스를 비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 투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 경제성장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습니다.  GDP 접근법에 대한 옹호는 ‘트리클다운(낙수) 이론’에 기대고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성장에 따른 구성원 개개인의 물질적인 삶의 증진이라는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의 양극화 현상등을 통해 낙수 이론은 점점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GDP 개념이 [1] 돈이라는 협소한 관점에서, [2] 부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게다가 [3] 삶의 질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단일한 수치로 나타내고자 하니 양극화도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적인 필요와 만족 등을 파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량 접근법’의 정의와 간략한 설명아마티아 센, 마사 누스바움 등은 GDP 접근법을 역량 접근법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역량 접근법은 국제 개발 정책의 맥락에서 삶의 질 높이려는 가난한 국가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모든 국가가 인간의 역량 발전과 관련하여 정의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말합니다. 역량접근법은 다음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누스바움, 2015. 28~29)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기회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고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을 세우기 위한 접근법"이 할 수 있습니다. 역량 접근법은 “선택과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회와 실질적 자유를 증진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가 사람의 기본적 품위나 정의를 지켜주는지 비교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보며, “사람을 목적으로 보면서 총체적 잘살기나 평균적 잘살기가 무엇인지 묻고 사람이 어떤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살”피고자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규정할 역량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 접근법은 “가치다원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뿌리 깊은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 특히 차별이나 소외의 결과인 역량 실패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에 따라 “사람의 역량과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정부와 공공정책의 시급한 과제"라고 여깁니다.(누스바움, 2015. 33~34)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이 제안하는 역량 접근법의 목적이 “기본적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정치적 권리에 관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존엄성, 최저수준, 정치적 자유주의 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시작부터 윤리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셈입니다.(누스바움, 2015. 34) 살펴본 바에 따르면 역량접근법은 GDP 접근법의 협소함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포착하고 현실화 하기 위해 인간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안하고 현실화, 정책화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는 현실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적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진적인 방법이니 대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GDP 중심의 경제성장지상주의의 협소한 이해를 넘어 좀더 나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가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역량’이란 무엇인가?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역량]은 “‘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누스바움의 설명은 아마티아 센의 관련 논의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티아 센은 역량을 “‘실질적 자유'이자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이며 “사람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의 선택 가능한 조합"이라고 정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량은 일종의 자유, 즉 선택 가능한 기능의 조합을 달성하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환경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유나 기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5~37)  누스바움은 센의 논의에 더해 역량을 ‘결합역량’과 ‘내적역량’으로 구분합니다. [결합역량]은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기회의 총합"으로서 실질적 자유를 지칭합니다. [내적역량]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유동적인 사람의 상태"로서 “훈련되거나 계발된 특성과 능력"을 말합니다. “결합역량은 내적역량에다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더한 것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개념상 내적역량을 생성하지 않고 결합역량만 생성하는 사회는 생각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누스바움, 2015. 37) 쉽게 말하면 정치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실질적 자유로서의 역량(결합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훈련된 역량(내적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거나 독려해야 할 것들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역량]은 “계발될 수도 계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선천적 역량"을 의미합니다. 기본역량은 “누구나 강제된 기능이 아니라 선택하고 행동할 실질적 자유를 의미하는 결합역량을 최저수준 이상으로 가져야 한다"는 주장의 전제가 됩니다. 누구나 기본역량을 지니고 있고, 이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결합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최저수준 이상의 결합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대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 또한 뒷받침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장애인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나은 사회인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38~39)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내적역량을 갖추고 결합역량에 도달하고 누릴 수 있는 잠재적인 기본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0대 핵심역량마사 누스바움은 지금까지 살펴본 역량에 대한 논의에 입각하여 인간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10대 핵심역량을 제시하며, 최소한 최저 수준을 보장 할 수 있도록 해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10대 핵심역량의 정의와 그와 관련한 목표 설정,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측정은 GDP 접근법과 구별되는 역량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생명life 인간은 누구나 평균수명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보장되어야 합니다. [2] 신체건강bodily health 인간은 누구나 건강, 적절한 영양 공급, 적합한 주거 공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3] 신체보전bodily integrity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적 만족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감각, 상상, 사고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인간은 누구나 “감각기관을 활용할 줄 알아아 하며, 상상하고 사고하고 추론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을 통한 (시민) 역량의 확보를 필요로 합니다. 교육은 경험, 사고력과 상상력의 동원할 수 있도록 하며, 정치적 표현, 미적표현, 종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5] 감정emotions 인간은 누구나 “주변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슬픔, 갈망, 만족, 분노, 공포 불안 등 다양한 감정발달, 그 감정을 누릴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합니다. 이는 다양한 인간적 유대관계의 지원을 의미합니다.  [6] 실천이성pratical reason 인간은 누구나 “선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삶의 계획을 비판적으로 성찰 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실천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7] 관계affiliation 인간은 누구나 1)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른바 관계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혐오와 차별 없이 존엄한 존재로 대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 인간 이외의 종other species 인간은 누구나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9] 놀이play 인간은 누구나 “웃고 놀 줄 알아야 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 환경 통제control over one’s environment  인간은 누구나 1) 정치적 측면에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선택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치참여의 권리와 언론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2) 물질적 측면에서 재산소유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부당한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직장에서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스바움, 2015. 49~50)10대 핵심역량의 각 항목들은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천이성 역량을 높이는 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모든 핵심역량을 직접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 역량 덕분에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존중받"습니다. “공공정책에 관한 심의에서는 가족관계, 친구관계, 집단 간 관계, 정치적 관계 등이 구조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관계 역량은 다른 역량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합니다. 실천이성 역량과 관계 역량의 발전 속에서 모든 핵심 역량에 대해 이해하고 성찰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스바움, 2015. 51~59) 이와 같은 [10가지 핵심역량 목록]은 시민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며 좀더 높은 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수준의 구체적인 보장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고안되었습니다. 그리고 10대 핵심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출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회정의의 최저수준을 엄밀하게 정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공간에서의 맥락에 따라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목록은 최종본이 아니며,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누스바움, 2015. 51~59)  ?돈,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는 아니다.국가와 기업은 경제성장만을 외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돈만 좇도록 강제되는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도 중요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한 삶에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사회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극한의 무한경쟁 속에서 돈만 되면 무엇을 하든 용인되는, 대다수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화폐물신주의가 절대 바뀔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폐쇄적인 조건 때문일까요? 역량 접근법은 다른, 다양한 만족스러운 삶의 가능성을 고민해보고 실험해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A 대신 B로의 총체적인 대체’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역량 접근법에서의 논의들과 10가지 핵심역량의 현실적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하나씩 확장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성장만이 지상 유일의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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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어공주>는 <원작 인어공주>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인어공주는 과도한 PC?] 글의 댓글에 달리는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읽어보면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관계가 한층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이미 여러곳에서 이번 <인어공주>의 영화적 요소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PC에 굉장히 친화적이고 지지하는 트위터 이용자분들 중 몇몇도 배우가 아닌 감독을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저 역시 작품에 PC요소를 입힐 때 무엇보다 감독 및 연출진과 배우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영화는 아니지만,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2>가 큰실패를 겪은 이유 역시 연출의 실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라오어2와 라오어3으로 파트를 나눠서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을 제대로 관리했으면 어땠을지...)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인어공주> 영화가 ‘아쉬웠다’라던가, ‘흥행에 실패했다’라고 말할 자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책임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콘텐츠로서 <인어공주>는 분명 원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향후 어떤 인종, 실력의 배우가 연기하든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는 영원히 보존되면 보존되지 다른 버전의 <인어공주>에 의해 삭제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작을 ‘훼손’하는 게 애초에 아닌 셈입니다. 단지 ‘원작의 다른 버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아이들이 원작을 찾는다구요.’라는 글을 보았습니다만, 바로 그때, ‘아이들’과 ‘우리(성인)’를 분리할 단계가 된 성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가 분명히 있고, 그럼에도 이번에 ‘다른’ <인어공주>를 디즈니에서 왜 제작해 상영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성인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이번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이런 맥락에서 ‘어두운 피부’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니 배우의 실력이나 감독의 연출을 아쉬워할 때 ‘흑인 배우’를 끌어들였다는 부분을 탓하는 건 애초 영화의 제작 목표를 오인하거나 부인한 결과로밖에 안 비출 것 같아 우려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약 백인 금발 남성이 홍길동을 연기하든, 중국인이 슈퍼맨을 연기하든, 이미 인터넷이 널리 퍼진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원작’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작’을 잊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합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영원히 영광의 자리에 남을 테니까요. 그 어느 ‘아류작’도 ‘원작’을 존경했으면 존경했지 삭제시키고자 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흑인이 캐스팅된 그것 하나만으로 박수를 치실 필요도, 영화의 모든 라인과 연출이 망가진 이유를 흑인 배우 캐스팅에 전부 갖다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 <다른 버전>의 영화는 원작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버전을 제작해보았을 뿐이니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박수를 치실 필요가 없고, ‘다르다’는 이유로 영화의 여러 흠을 비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글이 길어지는데, 이번 <다른 인어공주>를 비판할 때 그 기준을 <원작 인어공주>로 삼으시는 것 자체가 영화의 기획 의도와는 어긋나는 논지의 비판입니다. 못 만들었다면 그냥 배우의 실력과 감독 및 연출진의 실력 탓입니다. 애초 '원작의 다른 버전'을 기획했으니 '원작과는 다른 인종'이라서-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기획 의도를 오인하지 않는다면요).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글에 항상 달리는 댓글이 있습니다. 정작 흑인들도 한국인들을 향한 혐오를 남발한다는 게 그 내용이죠. 실제로 많은 뉴스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코로나19 이후 아시안 혐오가 증가하고 있는 건 분명 문제입니다.  하지만 ‘흑인도 아시안을 혐오하니 우리도 흑인 존중할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은 지나치게 섣부른 선택이거니와, 결국은 백인만이 승리하는 논리로 빠지게 됩니다. 기득권 바깥에 사는 사람들 간의 갈등은 점차 심해지는 와중에 세계화는 더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가속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보다 이른 시기 내 이웃으로 흑인이나 동남아인들을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상호존중의 담론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담론의 형성에는 무엇보다 미디어의 힘이 큽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원작의 다른 버전>들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훗날 아이들이 ‘다름에 대한 존중과 거부감 사이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그것을 다루지 못했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아이들)가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진흥은 미래세대의 '돌봄'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기업’의 책임은 미래세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디금부터라도 ‘다름’에 대한 존중의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에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디어 '상업'예술에서 '상업'의 측면, 즉 소비자가 돈을 내고 소비하는 측면을 감안해 이번 주제와 연결하자면, 우리는 '보다 올바르고, 따라서 더 안전한 미래'를 만드려는 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상업예술의 '상업'에는 이런 측면도 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을 애매한 글이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원작의 다른 버전>은 <원작>을 해칠 의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애초 기획 의도를 왜곡해 퍼뜨리는 담론의 탓일 겁니다. 
'신상 공개'라는 것을 공론장에 가져올 필요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 가독성을 위해 높임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A : “… 그리고 집단 괴롭힘으로 아이를 잃은 유족에게 복수를 권했다더군. 『왕따 가해자』란 명칭만 붙고 끝난 죄인에게 합당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면서.” B : “그 기준을 누군가가 멋대로 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법이 무용지물인 세상이 오겠죠.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으면 누구도 따르지 않게 될 거예요. 완력과 재력 같은 힘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기에 법은 약자를 구할 수 있는 거예요.” A : “... 그렇다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를 법이 벌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법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자를 못 본 체 하는 건 법으로 지키지 못하는 자를 버리는 짓이야.” B : “(침묵하다가) 사람을 벌하려면 그러기에 충분한 증거가 필요해요.” A : “(스포일러) 씨가 복수를 권한 사람 중에는 역시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면서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더군. 하지만 그런 경우도 (스포일러) 씨의 정보가 경찰에 신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복수라는 선택을 하고 안 하고와는 상관없이 (스포일러) 씨의 권유 자체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란 거다. 그에 비해 법이란 건 불공평하고 불완전하지. 아닌가?” 주인공 : “맞는 말이야. 하지만 공평해지기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어. 완벽함을 목표로 법률도 계속 변하고 있지.” A : “(책상을 내려치며) 그래선 너무 늦어!! 토시로는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미코시바 히로는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어.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실습까지 받고 있었다고! 그런 인간이? 말도 안 되지! 법률이 공평해지기만 기다린다면 난 늙어 죽을 거다. … 그럼 손을 더럽히는 것 말고 내게 무슨 방법이 있지!? 내가!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게임 『로스트 저지먼트』의 한 장면이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의 아들(토시로)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버지 A는 몇 년 뒤 그 학교폭력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C(미코시바)가 교육실습생으로서 교편을 잡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을 자살까지 내몰리게 한 이가 교편을 잡는다니! 절망하고 있는 A에게 범인(스포일러)이 다가온다. 그는, 자신은 지금껏 몇 명이나 되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그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피해 학생의 유족들의 ‘허락’을 받고 살해했다고, 정확히는 그 유족이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만약 A만 허락한다면 이번에도 C에게 ‘합당한 처벌(죽음)’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A는 승낙했고, 범인의 도움을 얻어 알리바이를 확보한 채 C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이 복잡하고 어두운 사건을 쫓아 진실을 밝혀내는 게 주인공(플레이어)의 역할이다.   게임 속 A의 울분을 이해하지 못할 이가 현재 대한민국에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A의 대사를 빌리자면,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들이 사회 속에 너무 많이 녹아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처럼 직접적인 살인으로 보복(여기서 ‘보복’이란 단어는 중요하다)을 가하자고 진지하게 주장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적어도 ‘문명화된’ 세상에서는 말이다. 죄를 면피한 채 웃고 있는 자의 ‘생물적 목숨’을 끊을 수는 없으니, 그나마 실현 가능한 ‘보복’은 그의 ‘사회적 목숨’을 끊는 일이다. 이것이 곧 ‘신상 공개’이다. 최근 우리는 신상 공개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노출되고 있다. 1) 古전두환의 손자인 전우원씨는 3월 13일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의 할아버지인 古전두환은 물론 그의 가족을 고발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 지인들의 성범죄와 마약 등 범죄 행각을 고발하며 그들의 실명과 사진, SNS 대화 내용을 캡쳐해 공개했다. 2) 올해 1월부터는 대한민국의 미용사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표예림씨가 자신의 초중고 시절 학교폭력 사실을 밝힌 사건이 있었다. 표예림씨 스스로가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4월 13일 ‘표예림동창생’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개설돼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신상이 공개됐다. 3) 최근의 일로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일이 있다. 6월 2일 유튜브 채널 ‘카라큘라 탐정사무소’에서 피의자 이모(30)씨의 실명과 사진을 포함해 직업, 생일, 키, 혈액형과 이씨의 과거 전과기록까지 공개한 것이다. 영상에는 피해자 김모씨도 등장해 “저는 (가해자의 신상 공개가) 너무 필요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피해자로서 평생 가해자가 교도소에 있었으면 좋겠고, 애꿎은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위 세 개의 신상 공개 사건은 전부 피해자 또는 목격자(증인)가 자발적으로,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됨을 알면서도 ‘저지른’ 신상 공개이다. 한편 우리는 다른 측면의 신상 공개도 떠올릴 수 있다. 4) N번방 사건의 조주빈, 5) 동거녀와 택시 기사를 살해한 이기영(31), 6)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해 피의자 전주환, 7) 그리고 최근에는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정유정(23)의 신상이 ‘국가’에 의해서 공개됐다. (4,5,6번과 7번을 비교하며 유독 국가의 신상 공개 결정이 여성에게 더욱 '쉽게' 행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1~3까지의 사례와 4~7까지의 사례는 양쪽 모두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주체가 다르다. 즉, 전자는 ‘개인’이 후자는 ‘국가’가 공개했음이 다르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형태의 신상 공개도 있다. 8) 2018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배드파더스’는 양육비 지급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의 신상을 인터넷에 게재해 왔다. 9)‘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3~8월 디지털 성범죄, 살인, 아동학대 등 사건 피의자의 신상정보와 법원 선고 결과 등을 ‘디지털 교도소’라는 사이트에 게시했다. 사이트 운영자는 베트남에서 붙잡혀 2021년 9월 29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0)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속출하자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나쁜 집주인’이라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법조계에서는 공익을 목적으로 사이트가 개설됐지만,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라고 한다. 8~10은 4~7처럼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신상 공개가 아니다. 그보다는 행정적인 제재에 가깝다.  1~3처럼 신상을 공개하는 자와 공개 당한 자가 '가해자-피해자(전우원씨는 '가해자 무리'로부터 전향한 사례) 관계'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보다는 '나쁜 사람-일반 대중 관계'라고 보는 게 더 옳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신상 공개가 범람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건 공개된 개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호소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에 관해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글을 적는다.  당장은 공부가 부족해 논의를 전부 개진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볼 수 있음직하다.  A) 신상 공개와 '사적 제재'의 관계는 무엇일까? 둘은 반드시 일치하는가, 아니면 사적 제재의 목적을 갖지 않는 신상 공개는 가능한가? B) 신상 공개의 정당성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인정되는가? '정당성을 인정 받은' 신상 공개는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옳은가? (제재/처벌/복수/정의의 실현의 분리 문제) C) 신상 공개의 동기는 무엇인가? 동기의 갈래가 정당성의 인정 여부를 가르는가? 주체는 누구인가? D) 좀 더 넓게 보자면,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범죄인, 또는 가해자와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는가? 이것은 포용-용서-관용-더불어 살아가기-정의-공동체-회복-갱생-신뢰-사회적 자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 또 동시에 신상 공개를 통한 제재는 나와 내 주변인의 '인간성'을 어떻게 건드리는가?  F) 신상 공개의 법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원래는 이 글을 첫 글로 쓰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밀려와 이제야 첫 발을 내딛게 되네요. 최근의 여러 사건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위에서 저렇게 질문들을 나열했지만, 저는 윤리철학이나 법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신상 공개에 관한 글을 쓰더라도 분명 애매한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캠페인즈는 공론장이니까, 먼저 이 글을 올림으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회가 도래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예상컨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디지털 기술은 더더 발전하고, 신상의 자발적-비자발적 공개(노출)는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단순히 '숨어 지내던 범죄인을 향한 정의의 철퇴'를 휘두르는 어떤 도덕적 쾌감만이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당장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이의 어떤 '추악함'이 목격되버릴 수도 있고, 그것이 범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정체성과 관련된 '커밍아웃'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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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인공지능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선, 범용인공지능(AGI)이 아닌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AI)의 목표는 설계자가 설정한 태스크(Task)에 맞는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판단을 내릴 때 개개인의 ‘인권’이나 ‘알 권리’ 같은 것들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철저히 목적 지향적이기 때문에 기술 접근성의 양극화가 초래할 문제와 같은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민주주의 보다는 철저한 통제와 감독으로 운영되는 독재에 최적화된 도구일지도 모른다. 출처 : Unsplash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류의 ‘방향키’를 쥐고있는 인공지능을 우리가 너무 모른다는 점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기반한 언어모델의 초거대화(LLM) 트랜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델의 성능만 좋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그 모델이 어떠한 프로세스를 거쳐서 결과를 도출해 냈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결과 인공지능 개발자들의 오랜 화두였던 설명가능한 인공지능(XAI)에 대한 개념은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있으며, 모델의 프로세스가 철저히 블랙박스로 남게되면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작동원리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ChatGPT가 요약해준 텍스트를 활용하여 돈버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것이 어떠한 원리로 나오게 된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유튜브는 개개인의 취향뿐만 아니라 비슷한 연령대, 성별, 지역 등의 사람들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자신에게 최적화된 영상을 추천해준다. 한층 더 정교해진 초거대언어모델(LLM) 기반챗봇들은 상담자의 의도를 추론하고 이전 상담내용을 기억해내어 어렵지 않게 문맥을 파악하고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문의안내를 해준다. 이처럼 추천 시스템이나 상담용 챗봇과 같은 인공지능 모델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의료, 법률, 정치 등 다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야에까지 인공지능이 침투했을 때,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예를들어 인종, 성별, 거주지, 과거 범죄이력 등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것인지 예측하는 인공지능 모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용자인 우리는 인공지능 모델이 어떠한 데이터와 근거를 바탕으로 잠재적 범죄자를 예측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통해 단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발생하게 하지 않게 하자는 법의 취지에 어긋날 뿐더러, 인간의 알 권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위와같이 윤리, 도덕적인 이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법률이나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인공지능 도입수준은 타 영역에 비해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모호해지고 합리성과 편의성의 측면에서 인간의 역할과 대체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면, 공공이나 정치분야에서 인공지능 보급은 시간문제일 뿐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더 늦기전에 인공지능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인식하고 통제권을 가져오기위한 노력을 시작해야한다.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따라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참정권 보장이 핵심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인공지능과의 공존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첫걸음으로 인공지능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우리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 그 잠재적인 위협 요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인공지능의 발전과정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공지능은 믿을 수 있는 기관의 감독하에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1956년 다트머스회의에서 존 메커시 교수에 의해 인간처럼 추론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인공지능의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인공지능은 통계학과 컴퓨터과학의 힘을 빌려 발전해왔다. 이후 인공지능은 1970년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빙하기를 맞게 되었다가, 은닉층(Hidden Layer)으로 XOR 문제를 해결한 딥러닝(Deep Learning)이 등장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된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과 GPU의 발전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미지, 텍스트, 음성뿐 아니라 생성AI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용되게 된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훈련 데이터를 활용한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뿐 아니라 대량의 빅데이터(Big Data) 속에서 인간이 발견해 내지 못한 특성과 패턴을 찾아내는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과 보상을 통해 스스로 패턴을 찾아내게 유도하는 강화학습(Reinforece Learning)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닉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 기계’를 만들고 활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할 뿐, 작동 프로세스와 그것이 초래할 영향력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이루어져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발전과정은 다음에 살펴볼 ‘블랙박스 모델’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냈다.   2. 블랙박스모델과 설명가능한 AI(Explainable AI) 인공지능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패턴을 찾아낸다. 생물학계에서 수십년에 걸쳐 연구해온 난제인 단백질 분자구조에 대해서도 인공지능은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결과가 어떠한 프로세스를 걸쳐서 도출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인공지능이 수억개의 매개변수와 인공신경망(ANN)을 거쳐서 만들어낸 프로세스는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로세스가 철저히 베일에 쌓인 인공지능 모델을 블랙박스 모델(Blackbox Model)이라고 한다. 블랙박스 모델의 계산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같다.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컴퓨팅 파워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요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델은 대부분 이 블랙박스 모델에 해당한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입력값으로 들어간 변수가 분석과정과 결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모델을 설명가능한 AI(Explainable AI)모델이라고 한다. 정치, 법률, 의료 등 민감하고 중요한 분야에 인공지능을 도입하고 활용하기 전에 우리는 일부라도 ‘설명가능한’ 인공지능 모델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3. 데이터의 편향 대부분의 인공지능 모델 개발은 훈련과 검증 그리고 테스트라는 과정을 거친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인간의 개입없이 인공지능이 스스로 패턴과 유사성을 찾아내는 비지도학습(Unsupervised Learning) 모델도 존재하지만,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과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에는 여전히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훈련 데이터의 레이블링(Labeling)과 선정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편향(Human Bias)가 인공지능에 반영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함을 뜻한다. 예를들어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인종(Majority) 에 대한 데이터가 소수인종(Minority)에 대한 데이터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편향은 고스란히 인공지능의 학습결과에 반영되어, 주류인종에 유리한 결과만을 도출하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또다른 인공지능 인종차별자(AI Racist)를 탄생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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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No만 정답인가요? - 섹스의 진부화된 의사소통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다시 구성하기
으레 페미니즘은 당위적인 성평등으로 쉽게 일컬어진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얘기의 첫 문장을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 여성이 마땅히 존중받는 조짐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페미니즘 학문에 박식한지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말 수가 적고 비교적 덜 마초적인 남성이 페미니즘의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습득한 페미니즘적인 배움은 천대받던 '여성적' 공감과 이해 능력을 재해석하고, 감정의 중요함을 밝혀내는 일이며, 이러한 공감능력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일컬어 덕목으로 부르기였다. 감정은 의외로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전희경,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감정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39쪽 "문학(적 상상력에 깃든 공감과 연민 등의 감정)은 삶의 부박함과 인간의 비속함에 맞서 어떻게 생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지,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문학은 본디 시대의 총체에 관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꿈꾸기 어렵다. 문학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아 탐사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현상들 너머엔 복잡하고 신비로운 삶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을 치고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탐색하고, 생명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66-67쪽 "감정의 부재는 합리성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상'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감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1쪽 구체적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면, 마침내 단일한 상황에서 인간 감정의 정동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섹스의 조짐을 마주친 여성들은 마음 속으로 각자의 혼돈을 겪는다. 그럼에도 자기와 불화하는 '단순한 (부)동의'를 명확하게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예스 means 예스", "노 means 노"라는 명료한 정치적 구호로 가시화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이 결정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순탄히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이 띄워진 이후 많은 여성들이 사뭇 찜찜한 채 명확한 (부)동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렸다. 정확한 의사표현만이 자신의 주체성과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예"를 던져놓고 왠지 불안한 섹스를 한 여성들이 있다. 막연히 급한 것 같은 예감에 "아니오"를 말하고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있고, 이들은 자기모순에 혼란스러워도 한다.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결정의 지난한 과정이 보호받을 권리였을 것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마음가짐과 속도에 따라서, 결정과정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기회가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졌어야 했다. 섹스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순간에 사람은 명확하고 단순한 "예"와 "아니오"를 발설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이다. 주저하는 건 한낱 회피일 뿐이고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자세만이 정정당당하다는, 기존의 남성적 도덕으로는 페미니즘의 감수성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와 "아니오"라는 최종적인 대답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상호간 좋은 소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더듬대는 말씨,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의 외면과 두루뭉술한 문장을 포함한 모든 반응에 상호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갖춘 더 효과적이고 나은 소통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불확실하고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서, 섹스를 하고 싶으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섹스가 아닌 대안적인 애무로 이 사이를 초대하고 싶은 욕망도 성실히 검토한다. 때로는 마주보는 것만으로 멈추고 싶어하며, 어떤 이는 BDSM적인 사이를 원하지만 스스로 비밀스러워 어떤 대답도 주저한다는 가능성도 훤히 열어젖힌다. 그 은밀한 언어적, 비언어적인 조짐을, 우리는 기다리고 눈치챔으로써 성적으로 자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더욱 더 밀접해진다. 그리고 다른 어느 관계의 도식이 아닌 우리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알맞은 속도와 방식으로 상호 동의된 섹스를 향하여 수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남성적으로 부패하여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과정이다. 상대의 진짜 의사를 살피다보면, 상투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주의적 언어로부터 멀리 떠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을 활짝 열고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만난다. 차츰 더 정직한 성적 이해를 꿰어나가게 된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하지 않을 때에도 관계의 조짐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섹스는 사실상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실천에 더 좋은 섹스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것과 상통한다. 예컨대 누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특정한 비주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를 마주한 상대방으로서 그의 비주류성에 관해 소통할 때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비법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주류성을 지닌 자에게 진부한 언어는 익숙한 절망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과 퀴어성, 우울을 고루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울”과 “퀴어성”을 호명하는 오염된 언어 때문에 자길 설명할 길을 잃고 고독해진다. 쉽고 진부하고 얄팍해진 언어는 그들 앞에서 힘이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을 고독 속으로 넣는 뜻밖의 힘을 낸다. 이에 그의 단일한 맥락과 외로움에 좀 더 뾰족하게 접근하는 언어를 써야지,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공감이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머리 찧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편적인 언어에 대항하는 이해방식이다. 그렇게 보통의 억압적인 섹스가 아닌 주체적인 섹스를 설계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예"와 "아니오" 또는 어떤 도식화된 말로는 풀어낼 수 없었던 여성의 정동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들춰내면 된다. 요지는 상대의 동의와 거부를 최종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을 함께 밟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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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바둑
“그 당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대만에서 바둑학원 ‘동심원기원(同心圓棋院)’을 운영하는 천치오우홍(陳秋宏) 원장은 2016년 3월을 이렇게 회고한다.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매치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뜨겁게 달궜다. AI가 넘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복잡한 바둑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딥러닝 인공지능 알파고는 AI 시대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총 5국 중 세 번째 대국마저 끝내 패했던 이세돌은 “이세돌이란 한 사람이 패했을 뿐, 인류 전체가 패한 것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드라마처럼 제4국에서 알파고가 오류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AI를 이긴 바둑기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 바둑계는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매치에 함께 참여한 한국기원의 양재호 사무총장은 한 강연에서 말했다. “바둑 역사는 인공지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딥러닝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바둑계는 이전에 좋은 수로 평가받았던 것들이 사실은 승률이 낮은 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국의 ‘절예’를 비롯한 ‘카타고’, ‘엘프고’, ‘릴라 제로’, ‘한돌’ 등 수많은 바둑 AI가 개발됐고, 여러 회사의 인공지능 간 대국도 매해 이루어진다. AI가 얼마나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스스로 진화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둑 해설가들은 인공지능을 참조하지 않고는 좋은 해설을 하기 어렵고, 바둑기사들은 인공지능을 스승으로 두고 있다. 프로들뿐 아니다. 아마추어들도 어느 정도 기초를 터득하고 나면 스스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자신의 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AI가 승률이 높은 곳을 알려주고, 참고도도 만들어주기 때문에, 일종의 답안지를 얻어 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I라는 고수와 대국을 할 기회가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세돌 9단이 유일무이하게 인공지능을 이긴 바둑기사로 남았다는 것은, 이제 이미 어떤 바둑기사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프로 바둑기사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AI만큼 정교하게 계산해낼 수 없다. 바둑 해설가들은 종종 “AI니까 저런 수를 생각해 내지, 인간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다”, “인공지능의 추천 수는 때로 프로선수도 이해하기 어렵다” 는 말을 한다.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보다 앞서고,  바둑의 신처럼 ‘신의 한 수’를 늘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AI 홍역을 먼저 치른 바둑계 바둑계의 변화는 현재 챗GPT등 생성AI와 마주친 우리 세계 일반의 변화를 암시한다. 바둑계와 인공지능 간의 대결과 적응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마주칠 혹은 마주치고 있는 인간과 생성 AI 간의 대결과 적응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둑기사는 전부 은퇴하거나 사라지고,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없으며, 바둑을 새로 배우는 사람이 없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천치오우홍 원장은 말한다. “기초부터 AI로 배울 수는 없다. 기초적인 룰을 익히는 것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인간이 당장 AI의 수읽기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심원기원’에서도 바둑을 배우려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선생님들은 AI를 공부해서 보다 효율적으로 바둑을 가르칠 수도 있다. 인공지능과의 바둑 게임도 도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바둑학원에서 학생들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예전과 다르게 발전 속도를 높일 수 있다. AI를 통해 예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기보(棋譜, 바둑을 두어나간 기록)를 전 세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프로들이 모여 수년 동안 함께 연구했던 것이 이제는 노트북만 가지고 따로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공부하고 해석할 수 있는 몫은 저마다의 기력(棋力, 바둑을 두는 실력)과 이해력에 따라 다르다. 인공지능으로 초반 50수 정도는 어느 정도 포석이 정해진다면, 이후 변화와 수읽기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 설사 바둑으로 인간이 AI를 능가할 수 없더라도 바둑 대회는 열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프로 기사들이 바둑판 위에서 수를 겨루고 있다. ‘신공지능’이라 일컫는 한국의 ‘신진서 9단’은 2023년 5월 현재 세계 부동의 1위로 굳건히 서 있고, 그의 바둑은 여전히 수많은 바둑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성 기사들도 인공지능을 공부해 속속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여성 프로기사 ‘최정 9단’은 세계바둑대회인 <제27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에서 중국과 일본, 한국의 강자들을 차례차례 꺾고 결승에 진출, 준우승을 차지하며 바둑계의 새로운 신화를 썼다. ‘오유진 9단’도 올 3월 통산 500승을 달성하며 국내 여자기사로는 다섯 번째로 500승 고지를 돌파했다. 전체적으로 프로기사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되었다’는 평도 있으며, 20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바둑기사들의 전성기가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역주행하는  ‘강동윤 9단’도 있다. 아시아권에서만 주로 즐기던 바둑을 이제 전 세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한국기원 전 사무총장이자, 현재도 감독과 해설가, 선수로 활약하는 김영삼 9단은 바둑계 인공지능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AI에게 묻고 배우는 시절이 도래했다.  AI가 없이는 성장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 AI를 통한 지난 몇 년간의 발전이 이제까지 이룩해 온 수천 년간의 발전보다 더 크다.“ 물론 인공지능이 좋은 도구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 치팅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한다. 최근 중국에서도 치팅 논란이 일어 중국 바둑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논란의 핵심은 인공지능을 활용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판별해 낼 도리가 없다는 데에 있다. 인공지능의 추천 수를 8, 90 프로 이상 맞추면, 과연 자신의 실력인가 인공지능 치팅인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더이상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바둑을 둔다, 우리는.   이미 인간계를 평정한 인공지능이 있음에도, 아직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대면 대국에 매료된다. 상대의 수를 예측해 보고, 수를 읽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거나 이용해서 새로이 나아갈 길을 내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은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하는 노력, 살얼음판 같은 승패의 갈림길에서 위기를 극복해내고 역전하는 슬기와 끈기, 인간과 인간 서로 간의 심리전 등. 사람이기에 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즐길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 인공지능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아이들은  AI로도 배우지만, 근본적으로는 선생님의 돌봄에서부터, 다른 친구들과의 승부에서부터 바둑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천치오우홍 원장은 말한다. 2016년 느꼈던 충격과 공포가 그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지만, 그래도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 승부를 겨룬다. 승부를 통해 서로의 마음과 인생, 태도를 접하고 읽어내린다. 또 패배를 이겨내고, 승리를 다지는 마음의 굳은 심지도 배워나간다.  바둑 속에 바둑을 두는 사람의 개성이 있어, ‘기풍(氣風)’이라 한다. ‘기풍’은 고유한 성격처럼 그 사람을 반영한다. 그것을 읽어내며 서로 간에 언어가 아닌 손의 대화, 수담(手談)을 나누는 재미는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재 활발히 논의되는 챗GPT 등 생성AI에 대한 충격과 공포는 물론 더 범위가 넓고, 우리가 예측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가장 중심이 될 것이다.  바둑 인공지능을 통해 과거에 좋은 수로 평가받았던 것이 이제는 좋지 않은 수로 평가받는 것처럼, 인공지능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진 편견과 관습, 권력의 위험성, 악의 등을 오히려 감지하게 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지능’ 혹은 ‘인간의 재능‘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인간은 과연 인공지능이 낸 사활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단순히 인공지능을 이겨내거나 이용하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에게 유용하게,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하도록 키를 잡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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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제정, 간호사들의 처우만 개선되면 의료시스템이 개선될 수 있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국민 건강은 다양한 의료전문직역의 협업에 의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며 간호법안이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이유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의결했습니다(jtbc뉴스, 2023.05.16.).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 후 간호사들은 총궐기대회를 열고 정부를 규탄하고 있으며(동아일보, 2023.05.20.), 20개의 의료보건직군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도 사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의료 보건과 관련한 문제는 국민 모두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에 간호법 제정과 관련된 논의는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호법 제정 무엇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만들어냈는지 알아보도록 할까요? [그림2] 의료법 전문(국가법령정보센터) 우리나라에서 “의료인”이란 보건복지부장관의 면허를 받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및 간호사를 말합니다. 이 5개 직역은 모두 의료법에 준하여 면허를 부여받고 관련된 역할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의료법은 1944년 일제가 전쟁에 의료인 급파를 위해 ‘조선의료령’이라는 법을 만들었고, 일제가 패망하고 돌아간 이후에 우리 정부가 ‘조선의료령’을 일부 수정하여 ‘의료법’으로 명명하고 이를 기본으로하여 여러차례 개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김계현, 2001, 한국과 일본 의료법체계에 관한 연구)  제 32대 대한간호협회 회장 신경림씨는 우리나라의 의료법은 의사들의 병원이나 의원의 개설 혹은 운영을 위한 법안이기에 변화하는 우리사회에 수준높은 의료보건 서비스의 확립과 의사가 아닌 다른 다양한 직역의 전문성있는 역할 수행을 위하여 간호법의 제정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YTN, 2022.02.28.) ? 간호법의 논란 지점  대한 간호사협회는 우리나라가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하였으며 2026년이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고령인구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인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의료 및 보건 서비스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이며 COVID-19와 같은 감염병의 신속 대응을 위하여 이번 간호법 제정을 준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의안정보스시템) 2023년 5월 16일 거부권 행사 시점의 논란 조항은 크게 2개의 조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1장 1조 - “지역사회”가 뭐길래..  [그림 3] 간호법 의안원문 발췌  제 1장에 있는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이번 간호법과 관련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입니다.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간호사의 단독 개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라며, 후에 악용될 수 있다 말합니다(연합뉴스, 2023.05.16.). 현재 간호사는 의료법 이외의 다양한 법률에 근거해 어린이집, 장기요양시설, 장애인복지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 체계에서 의사의 지도 없이 혈압·혈당을 체크하는 기본적인 행위조차도 불법 의료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병원 밖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환자에게 적절한 간호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한간호협회는 간호간병시스템 확립을 위하여 ‘지역사회’ 문구가 간호법안에서 빠져서는 안되며, 이미 지역사회에서 지역간호를 시행하고 있는 수만명의 간호사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단독 개원의 가능성을 없애고자 ‘의료법에 우선한다’는 조항도 넣지 않았고, 10조 2항에 ‘진료의 보조’도 추가했다고 말합니다(연합뉴스, 2023.05.16.)  대한응급구조사협회는 응급구조사들은 간호법을 통해 의료기관 밖으로 간호사의 영역이 넓어지면 응급구조사의 업무까지 간호사가 할 수 있게 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합니다. 소수 직역인 응급구조사들은 수행할 수 있는 업무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그들의 고유 영역은 병원 밖에서만 존재하는 업무가 많습니다.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기반으로 간호사의 업무의 영역이 확장되면 응급구조사의 생존권이 위태롭다는 것이 응급구조사들의 주장입니다.  응급조사협회 윤종근회장은 “간호사들이 소방 119 구급대로 유입돼 응급구조사의 업무범위가 아닌 구급대원이라고 칭해 간호사도 구급대원이라는 명분 아래 응급구조사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간호법은 응급구조사 제도의 도입 목적을 훼손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합니다.(의학신문, 2022.07.25.)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곽지연 회장은 “간호법은 사실상 간호사에게는 지역사회에서 의사 지도 없이 방문간호센터와 같은 독자적인 기관을 설립할 수 있게되는 것이며 장기요양기관 등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를 간호사의 보조인력으로 만들어 간호사 없이 업무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곽회장에 따르면 의료법은 의료기관에 국한돼 있지만 간호법은 의료기관 밖 지역사회까지 확대되기에 지역사회에서는 단독으로 간호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의미라 말합니다. 현행법상 장기요양기관의 경우 촉탁의 지도 하에 간호조무사 단독으로 근무할수 있지만 간호법에서 명시한대로 “지역사회”로 간호사의 영역이 확장되면 장기요양기관에서 간호사 없이 간호조무사만 근무할 수 없게 돼 직접적인 피해를 양산한다는 것이 곽 회장의 주장입니다. (의학신문, 2022.07.25.)   둘째, 제5조 2장 - 간호조무사 학력 상한제 논란 [그림4] 간호법 의안원문 발췌  제5조 2장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이상’ 인정자’가 논란의 쟁점입니다. 대한간호조무사협회측에서는 2년제 간호조무사학과를 졸업한 자가 응시자격을 위해 고졸자를 위한 간호학원을 또 다녀야 하는 사항에 대해 반발하였습니다 (뉴스핌, 2023.05.16.). 이 조항에 따르면 전문대나 4년제 대학의 보건·의료 관련 학과를 졸업해도 간호조무사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간호학원에 등록해 1년의 과정을 이수해야만 자격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통상 국가공인시험은 ‘고졸이상’, ‘대졸이상’같은 식의 ‘학력 하한’이 존재하는데, 유독 간호조무사 시험만 ‘학력 상한’이 존재하는 구조가 되는 셈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차별을 구조적으로 명시한 것이라고 간호조무사협회는 말합니다(중앙일보, 2023.04.14.) ? 간호법 갈등, PA간호사 논쟁으로.. 대통령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한 간호사들이 ‘업무 외 의료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현행 의료법에서는 의사들의 업무범위에 있으나 그 업무를 대신해주는 PA간호사들이 불법의료행위를 거부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수면위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전국 의료기관에서 활동하는 PA간호사는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수술장 보조 및 검사 시술 보조, 검체 의뢰, 응급상황 시 보조 등이 주된 역할로, 법의 경계에서 의사의 의료행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주당 최대 수련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 법(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2016년 12월 시행되면서 더 두드러진 인력 공백을 각 병원이 전공의가 아닌 PA간호사들로 메우고 있었기에, PA 간호사들의 불법의료행위 거부는 의료현장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연합뉴스, 2323.05.23.) PA 간호사들의 업무 거부가 의료현장의 공백으로 나타나자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간호사들의 준법투쟁(의사의 불법 지시 거부)을 지지하는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늘어나는 의료 이용에 비해 병원에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히 채용되지 않아 병상당 인력 기준을 만들어 의사와 간호사를 추가 채용해야 한다며, 이것은 의사들이 돈이 되는 분야로 쏠려서 필수의료 분야에 발생한 공백을 해결하는 문제와도 엮여 있다며 또 다른 문제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한겨레 21, 1465호) ?‍♀️ 간호법 입법 필요와 관련된 논의는 [간호법이 쏘아올린 작은 공. 간호법 필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찬반입장과 찬반집단이 보다 명확히 정리되어 있으니, [투표]를 통해 여러분의 의견을 드러내주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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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업은 불법이 아닐까?
왜 파업은 불법이 아닐까?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 화물연대 파업, 노란봉투법 대립. 이 세 가지 이슈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근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노사갈등이 드러난 이슈라는 점, 다른 하나는 노동자 측 쟁의행위의 불법성 여부가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는 점입니다. 쟁의행위의 불법 여부는 위의 세 가지 이슈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노사갈등을 구성하는 거대한 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노동자 측은 대부분의 파업이 불법이 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용자 측은 불법 파업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쟁의행위’와 ‘불법’의 관계에 관해 대화해나가는 것이 이미 엉킬 대로 엉켜버린 노사갈등 문제를 풀 열쇠일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쟁의행위가 왜 ‘합법’인 걸까요? 쟁의행위가 합법이라는 것은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쟁의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처럼 보입니다. 업무를 방해함으로써 상대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합법이 아닌 것이 곧 불법이므로, 특정 쟁의행위가 불법인지 아닌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쟁의행위가 합법인 이유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쟁의행위가 어떤 원리에 따라 합법적인 행위로 인정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쟁의행위의 기반이 되는 법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개별 쟁의행위의 불법성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쟁의행위에 대한 현재의 법리적 해석이 옳은지에 대한 시민 차원의 사회적 대화 역시 가능해질 것입니다. *쟁의행위란? 노동자 또는 사용자가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노동자 측의 파업·태업·준법 투쟁 등과 사용자 측의 직장폐쇄·대체고용 등이 쟁의행위에 해당합니다. 본 글에서 사용하는 쟁의행위라는 단어는 노동자 측의 쟁의행위를 의미합니다. 범죄 성립의 요건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무엇이 범죄인지’입니다. 물론 무엇이 범죄인지는 상식으로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법은 범죄를 훨씬 구체적으로 규정하는데요.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할 때 범죄가 성립한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구성요건해당성입니다. 구성요건은 법에 적혀 있는 범죄의 유형을 말합니다. 예컨대 살인죄 조항에서 “사람을 살해한 자는”이 살인죄의 구성요건입니다. 누군가의 행위가 바로 이 구성요건에 해당할 때 그 행위는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특정 행위가 부도덕하더라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위법성입니다. 이는 전체 법질서의 입장에서 봤을 때 행위가 불법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더라도, 법질서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구성요건해당성을 충족하더라도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유들을 위법성 조각 사유라고 하며, 정당방위, 긴급피난, 자구행위, 정당행위 등이 이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유책성입니다. 이는 행위자에게 법적 비난을 물을 수 있는지, 즉 불법을 행위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지를 묻는 요건입니다. 구성요건해당성과 위법성을 충족하더라도 강요받은 행위라거나 행위자의 나이가 어린 경우 등 행위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어렵다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쟁의행위도 위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 행위로 보지 않는 것인데요. 과연 어떤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 것일까요?    쟁의행위는 정당행위   쟁의행위가 불법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위법성 조각 사유 중 하나인 정당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행위는 형법 제20조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법에 쓰여 있어서 했거나, 업무 때문에 했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정당행위는 전체 법질서의 이념, 또는 그 배후에 있는 사회윤리에 근거하여 정당화됩니다.    정당행위 중에서도 노동자의 쟁의행위는 법령에 의한 행위에 속합니다. 법령에 의한 행위는 법이 규정한 권리 또는 의무를 행사하거나 법을 집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체 법체계는 당연히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형법이 아닌 다른 법에서 적법하다고 인정한 행위를 형법상 위법하다고 평가한다면 법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겠죠. 쟁의행위 역시 다른 법을 통해 적법하다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형법상 허용됩니다. 이 같은 법령에 의한 행위로는 노동자의 쟁의행위 이외에 공무원의 직무집행 행위,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행위, 일반인의 현행범체포 행위 등이 있습니다.   쟁의행위는 헌법에 의한 기본권인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에 따라 정당화됩니다. 노조법 제4조는 “형법 제20조의 규정은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쟁의행위 기타의 행위로서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 정당한 행위에 대하여 적용된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는 정당한 행위로 해석되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여 쟁의행위가 정당행위에 속함을 명시하였습니다.    현재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범죄가 성립하려면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유책성을 충족해야 한다. (2) 정당행위는 위법성이 없으므로 범죄가 아니다. (3) 쟁의행위는 정당행위다. (4) 쟁의행위는 범죄가 아니다!   정당한 쟁의행위의 요건들   쟁의행위는 정당행위로서 적법하다고 인정되지만, 현실에서 전개되는 모든 쟁의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노조법 제4조를 자세히 보면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 정당한 행위”에 대해서만 정당행위로 인정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1조는 노동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항입니다. 결국 쟁의행위는 헌법상 노동삼권의 보장 취지와 쟁의행위의 목적 및 수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정당하다고 판단되어야만 적법한 것입니다.    쟁의행위가 형법상 정당행위가 되기 위한 요건들은 이미 다수의 대법원 판례를 통해 제시되어 있습니다. 크게 네 가지 요건이 있는데요. 첫째, 쟁의행위의 주체가 단체교섭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노동조합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일반 조합원이 아닌 노동조합 집행부가 쟁의행위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쟁의행위의 목적이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노사 간의 교섭을 조정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근로조건과 상관이 없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의 쟁의행위 등 애당초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을 달성하려는 쟁의행위는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실시하는 구조조정, 사업조직 통폐합, 합병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경영 관련 사안으로 보아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의행위도 정당행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쟁의행위를 하기 이전에 우선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시도해야 하고, 쟁의행위를 개시하기 전 조합원 찬반투표, 노동위원회의 조정절차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넷째, 쟁의행위의 수단과 방법이 사용자의 재산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폭력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 또는 사업장 시설의 일부를 점거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지만, 전면적∙배타적으로 점거하여 조합원 이외의 출입을 막거나 사용자의 관리지배를 방해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편 노동조합 차원의 쟁의행위와 조합원 개인 차원의 행위는 구별해야 합니다. 쟁의행위에 참가한 일부 소수의 노동자가 위법행위를 하였다고 해서 전체 쟁의행위가 위법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쟁의행위가 불법이 아닌 이유를 법리적으로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정답이 아닙니다. 법이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끊임없이 토론하며 함께 최선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쟁의행위의 법적 성격, 취지와 이념, 정당성 판단 기준 등은 오늘날의 노사갈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더욱 시민들이 활발히 이야기해야만 하는 주제입니다. 의문, 비판, 제안, 단상 무엇이든 좋습니다.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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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는 과도한 PC?
피씨(PC)라고 하면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언어생활 속에서 인종이나 성별, 성적지향, 출신지 등에 대한 편견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말한다. 한국에서 PC는 ‘PC 묻었다’, ‘과도한 PC’라는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PC라는 말은 한국뿐 아니라 그 말이 탄생한 미국에서도 경멸이나 조롱의 어조로 자주 사용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 성소수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가 나오면 이런 말이 더 자주 등장한다.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올바름이 과도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PC란 무엇인가? PC라는 것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윤리적인 기준이나 태도를 지칭할 때보다는 공적인 담론(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주로 사용된다. PC라고 하면 대체로 ‘~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쓰지 않는 게 좋다/쓰지 마라’ 등의 말을 떠올리기 때문에 PC는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반대로 ‘~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다/낫다’ 등 긍정적인 문장으로 사용할 경우엔 부정적/억압적인 느낌은 줄어들지만 이렇게 선택된 표현이 옳은지/나은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목적은 같다. 특정한 사람들이 넓게는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으로는 여러 기회와 분배 과정에서 소외당하거나 비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언어 생활에서 주의를 하는 것이 PC의 목적이고 이것을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PC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소외나 비하를 당하는 특정 집단을 위해 발언을 한다고 해서 그를 보고 ‘PC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발언이 사회의 특정 집단을 소외시키거나 비하하는 경우, 혹은 그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거나 암시하는 경우에 ‘PC하지 않다/언피씨(unPC)하다’라 평가한다. 즉 PC는 관련된 사람들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기 보다는 모욕이나 혐오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PC는 역사의 산물이다.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는 차별과 배제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적어도 도덕적인 진보에 대해 방해는 하지 말자는 것이고,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 혐오에 대해 최소한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 내재된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PC는 차별과 혐오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사실 우리는 이미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처벌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PC는 왜 공격을 당할까? 전세계적으로 PC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 ‘PC 묻었다’라거나 ‘과도한 PC’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PC를 좌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PC에 대해 단어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 기괴한 단어를 가져오거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유를 억압하고 침묵을 만들어내는 전체주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이나 윤리는 피상적인 것이고 껍데기이며 그 안에는 그보다 더 큰 - 예를 들면 사상통제나 독재 같은 -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PC에 대한 조롱과 경멸, 더 나아가 PC를 파괴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언어는 자유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사상통제에 대한 반항(혹은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넷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인어공주』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의 실사화가 결정되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것은 세바스찬이나 플라운더 같은 동물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플라운더는 현실의 돌돔이 되었고, 세바스찬은 현실의 달랑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나와 달랐다. 사람들은 주인공을 맡은 배우 핼리 베일리(Halle Bailey, 2000~)가 흑인이라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선 안 되는 것일까?  동화건 만화건 『인어공주』는 이제 세계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황인 인어공주, 흑인 인어공주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인어공주가 백인이어야만 되는 이유는 없는 것이고, 30여 년 전 만화에 백인을 그려넣었다고 해서 지금도 인어공주가 백인이어야만 되는 이유도 없다. 시대가 바뀌었다. (외모 비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어공주』 실사판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애초에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보긴 봤을까? 흑인이 아니라 백인 인어공주가 나온다고 한들 그들이 영화 『인어공주』를 보러 갈까? 『인어공주』를 빌미로 PC에 대한 원없는 한풀이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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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창작한다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AI 시대
AI가 뜨거운 감자입니다. 쉽게 삼키기도, 뱉기도 어렵습니다. 쓰긴 해야 하는데, 바로 쓰기엔 챙길 이슈가 많습니다. 오늘은 여러 이슈 중 AI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특별히, AI의 작품을 창작의 영역으로 봐야할지, 도구의 영역으로 봐야할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작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AI와 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지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AI가 그린 그림은 무엇? 먼저 사진을 살펴보죠. 해당 사진은 AI 작품이 위조인지, 예술인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 논문에서 발췌한 사진입니다. 상하단이 비슷합니다. 둘 중 하나는 AI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AI가 학습한 데이터입니다. 즉, AI가 학습한 걸 토대로, 비슷한 걸 창조한 것입니다. 어떤 게 AI의 작품이고, 학습 도구인지 구분이 가시나요? 솔직히 말하면, 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했고, 잘 만들었습니다. 전문가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만, 잘 모르는 저는 둘 다 작품이라 말해도 손색없다 싶었습니다. 정답은 상단 그림이 AI 작품, 하단 그림이 AI가 학습한 데이터입니다.  그림을 잘 그렸냐, 못 그렸냐를 떠나서 향후 인간이 만드는 작품보다 AI가 만드는 작품이 훨씬 많아질 것 같습니다. AI 작업량을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명확하니까요. 지금은 작품성에서 인간이 더 뛰어날지 모르지만, AI의 학습량이 많아지면 부족한 작품성도 보완이 될 거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다보면 AI가 인간보다 더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더이상 알파고를 이길 수 없듯, 너무 멀리 가버릴지도 모르죠. 현재도 AI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고, 실제 현장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그 실상을 살펴보시죠. 활발히 사용중인 웹툰업계 현재 가장 활발한 논의가 있는 곳은 웹툰계입니다. 네이버는 지난 4월 24일 툰필터 상표권을 등록했습니다. 툰필터는 사진을 업로드하고, 원하는 웹툰 작가의 화풍을 선택하면 AI가 작가의 화풍에 맞게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서비스입니다. 즉, AI가 웹툰 작가의 화풍으로 소비자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죠. 위 사진은 네이버에서 운영 중인 툰필터의 한 사진 입니다. AI가 학습한 데이터를 토대로 그림을 그려줍니다. AI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네이버웹툰과 웹툰작가가 계약시, 작가의 그림을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데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했다면 저작권 침해겠지만, 동의했기 때문에 침해는 아닌 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반론도 있습니다. 네이버 웹툰 작가가 되려면, 웹툰 작가의 작품을 AI 학습 데이터로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네이버 웹툰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 영향력 앞에, 어쩔 수 없는 동의를 한 것이고, 이에 대한 불만이 있으나 그 영향력 앞에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고 AI 사용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웹툰 작가의 화풍을 쓸 때 그에 따른 합당한 저작료를 달라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웹툰을 AI가 그린 것 같다는 이슈로 도마에 오른 작품입니다. 지난 5월 22일에 첫 연재가 시작된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이라는 작품입니다. 현재는 수정됐지만, 처음 공개 당시엔 그림 중 일부가 통일성이 없고, 화풍이 일정치 않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AI가 그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웹툰을 그린 업체는 반박했습니다. “AI를 이용해 생성된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며 "3D모델과 각종 소재들을 사용하면서 웹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줄여보고자 작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AI를 이용한 보정작업을 했다.”라고. <툰필터>와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사례를 보고 AI를 창작자로 봐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자는 웹툰작가의 작품을 도구로 AI가 그림을 그린 것이고, 후자역시 논란은 있지만 AI가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 그림, 음악, 영상 등등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저작권이 생깁니다. AI를 창작자라고 본다면, AI에게 저작권이 생길 겁니다. 반대라면 없겠죠. 때문에 저는 AI 작품에 저작권을 부여 하느냐, AI 작품을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슈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성형 AI의 그림 창작일까? 저작권은? 생성형 AI란 인간이 입력한 명령어를 AI가 만들어주는 걸 말합니다. 인간이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이미지를 생성해주는 것이죠. 마이크로소프트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셔터스톡 AI 등등 다양합니다. 저도 실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를 통해 ‘사과 먹는 모습'을 생성한 것입니다. 질문 해보겠습니다. 이 그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제가 이 그림의 저작자일까요? 저는 그냥 명령만 내렸고 그림엔 손 하나 까딱 안했는데도요? 그렇다면, AI가 그런 깃이니 AI가 저작자일까요? 그런데 제 명령이 있어서 AI가 그림을 그린 거 아닌가요? 질문이 헷갈리는 만큼, AI 저작물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AI가 저작권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 AI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작권 법에 따르면,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말합니다. 즉, 설령 AI라 할지라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면 저작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작자를 저작물을 창작한 사람으로 보고 있기에 AI를 저작자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 조연하 교수의 <인공지능 창작물의 저작권 쟁점 - 저작물성과 저작자 판단을 중심으로> 논문에 따르면, 근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문가들이 대체로 AI의 창작물을 저작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합니다. 다만, 저작권 보호 기간을 인간보다 짧게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실제 미국의 경우 AI의 저작물을 저작권이 있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실제 논쟁도 됐습니다. 한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이 알고보니 AI가 그린 작품이었는데, 해당 작품을 출품한 사람은 AI가 해당 그림을 그리도록 미세하게 명령어를 조작한 내 노력이 들어갔다는 입장을 펼쳤습니다. 국내에서도 AI의 저작물에 저작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률 개정안이 나온 상태입니다. 흐려진 경계, 문화는 어떻게 될까?  AI 저작권에 대해 아직 사회적 합의는 없습니다. 앞으로 만들어 가야할 부분입니다. 다만, AI의 등장으로 인간 고유의 것에 금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작품에 한정되던 저작권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흐려지는 것처럼, 인간만이 창작을 한다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AI가 도구가 아닌 하나의 창작자로서 역할을 하게 될지, 아니면 그저 인간의 창작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만 한정하게 될지, 그도 아니면 인간과 AI가 함께 만드는 것으로 흘러가게 될지,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의 창작물이 AI 창작자의 도구가 될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창작의 영역이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주체와 유형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또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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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가 현실이 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영화 <아바타> 보셨나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연출한 <아바타>는 2009년 개봉해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3D 관람이 인기의 한 몫을 했었죠. 13년이 흘러 2022년엔 속편이 개봉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학생이었던 2009년 아바타를 보면서 하반신이 마비된 주인공이 특정 장비에 들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영화의 스토리는 다 잊어버렸는데도 그 장면은 기억이 나네요)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현실이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드실 것 같나요? 오늘은 영화 <아바타> 속 장면을 현실로 만들고 있는 기술 BCI(Brain-Computer Interface)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 있는 영화 <아바타> BCI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영화 <아바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해볼까 합니다. <아바타>를 제작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2009년 시리즈를 처음 선보인 이후 다양한 속편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아바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2022년에서야 개봉했죠. 그 이유는 그동안 움직임을 추적해 기록하는 ‘모션 캡쳐’ 기술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구상을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수중 모션 캡쳐 등 다양한 연출이 가능해지면서 영화의 속편이 감독이 만족할 수 있는 완성도를 가지고 제작될 수 있었습니다. <아바타>의 속편 제작이 미뤄지는 사이 발전된 또 다른 기술이 있습니다. 바로 BCI입니다. BCI 기술의 발전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얼마 전 스위스에서 등장했는데요.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 연구진은 5월 24일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디지털 브릿지’를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로잔 공과대학 연구진은 뇌-척추 인터페이스라는 의미의 BSI(Brain-Spine Interface)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AI타임스 등이 보도한 ‘디지털 브릿지’ 개발 배경을 살펴보면 실험 연구의 과정과 결과가 흥미로운데요. 로잔 공과대학 실험에 참여한 세르트 얀 오스캄은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처럼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그는 이번 실험을 통해 “12년 만에 다시 일어서고 걷고 계단도 오르고, 복잡한 지형도 통과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가디언지의 유튜브 채널에는 그가 실제로 걷고,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올라와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이 장비를 통해 다른 행성의 종족과 연결되어 하반신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면, 현실에선 마비된 하반신을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에서 등장한 장면이 현실에서 재현될 수 있었던 걸까요? 뇌와 컴퓨터의 연결은 우리 삶을 바꾸게 될까요? 마비된 하반신을 움직이게 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뇌에 BCI를 이식하고, 척수에 센서를 이식합니다. 뇌에 이식한 BCI는 다리 움직임과 관련된 활동을 기록하고 신호를 환자의 보행기 혹은 휴대용 컴퓨터에 전달합니다. 그럼 휴대용 컴퓨터가 신호를 분석하고 척수에 심은 센서에 전달해 다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이렇게 끊어진 신경의 역할을 BCI 장치들이 대체하는 것이죠. BCI는 신경 대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분야는 뇌파를 분석해 이미지를 재현하는 기술인데요. 가령 특정 이미지를 볼 때 발생하는 뇌파를 분석해 어떤 이미지를 보고 있는지 역추적하는 기술입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실제 이미지와 매우 유사한 수준의 재현이 이뤄졌을 정도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이 기술은 스위스, 미국, 일본 등 다양한 곳에서 유사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시각 장애인에게 시각적 감각을 제공하거나 뇌 손상 등의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BCI는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 중인데요. 뇌 신호를 이용해 생각만으로 로봇이 물건을 잡거나 들 수 있는 기술을 비롯해 전자기기, 가전제품 등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세한 기술 연구 사례들은 AI타임스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BCI는 우리 삶을 바꾸게 될까요? BCI가 만들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흐르게 될까요? BCI 기술 이대로 괜찮을까요?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이 BCI도 장점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개발 과정의 비윤리성인데요. 전기자동차 제조회사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2016년 뇌신경 과학 벤처기업 뉴럴링크를 설립했습니다.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기술 개발 과정에서 동물 학대 의혹이 지속해서 제기됐는데요. 지난해 말에는 동물권 보호단체 ‘책임있는 의학을 위한 의사위원회’가 미국 연방정부에 뉴럴링크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수백 마리의 원숭이와 양, 돼지 등이 뉴럴링크의 실험 과정에서 학대당했다는 문제 제기였습니다.(의혹을 단독 보도한 로이터 통신, 로이터 통신 보도를 전달한 경향신문 등의 보도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물 학대 실험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발생한 문제도 있습니다. BCI는 뇌 등 신체에 칩을 이식하는 침습형과 이식 없이 외부 장비 등을 이용하는 비침습형으로 나뉘는데요. 침습형의 경우 인체에 장비를 이식하기 때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테크레시피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하바신이 마비된 세르트 얀 오스캄도 두개골에 이식한 장비 중 하나가 감염증을 일으켜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의식은 BCI가 비윤리적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필 울산과학기술원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는 2017년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BCI가 악용될 경우 사회적으로 심각한 윤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김 교수의 우려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아직 먼 얘기같지만 만약 뇌파를 측정하는 사람이 다른 의도를 품고 피실험자의 통장계좌나 현관문의 비밀번호 등을 알아볼 수 있겠죠. 본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치 않는 정보를 집어넣는 범죄도 일으킬 수 있어요. 이를테면 불법적인 사상과 이념을 주입해 세뇌하는 거죠. 또 만일 뇌 자극을 통해 더 우수한 뇌를 만들 수 있게 됐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수천수억원이 든다. 그러면 부유층만 누리는 특혜산업으로 변질될 우려도 있죠. 김 교수는 인터뷰 마지막에 BCI 기술이 끼칠 영향을 파악하고, 윤리적인 연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특히 “인간에게 BCI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등 사회적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법·제도도 구축해야 합니다”라며 제도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교수의 인터뷰로부터 6년이 흘러 BCI 기술은 이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BCI 기술과 관련된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김 교수의 우려를 한국 사회는 잘 해결할 수 있을까요?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은 이대로 괜찮을까요? 캠페이너 여러분은 BCI 기술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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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탈성장
지난 글에서 성장만을 추구하다 결국 기후위기, 인류문명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대표적 성장 지표인 GDP가 늘어날수록 물질발자국이 늘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가면서 지구를 더 뜨겁게 한다는 점도 확인되었습니다. 결국 성장주의를 버려야 기후위기로 인한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가능할까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탈성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탈성장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탈성장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하는 오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탈성장이 아닌 것을 살펴보고, 이후 탈성장의 여러 정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탈성장은 OOO이 아니다. (1) 탈성장은 70년대로의 회귀, 동굴에서 풀만 먹고 살기, 생산활동 없음이 아닙니다. - ‘탈성장’을 말하면 가장 흔하게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물론 현재 엄청난 규모의 기후위기를 막으려면 일정부분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보니 종종 예전에 우리나라가 못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술, 제도 등 인류가 이뤄놓은 성과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위기를 인류가 이룩한 성과들, 역량을 총 동원하여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전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CCUS’나 ‘지구공학’처럼 아직 검증되지 않았거나, 언제 상용화될지 모르거나, 현재 인류가 기대어 왔던 시스템을 성찰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2) 탈성장은 수동적으로 인내를 강조하는 마이너스 성장과는 다릅니다. 탈성장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달라진 경제상황이나 경제위기로 원치 않게 맞게 된 마이너스 성장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선제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면 외부충격 등에도 잘 견디며 번영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3) 성장사회와의 결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형태의 경제성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한국을 비롯한 현재 많은 국가들, 특히 기후위기에 잘 대응하고 있다고 하는 국가들조차 ‘녹색성장’을 주된 방향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녹색성장은 한 마디로 온실가스 배출을 하면서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탈동조화’ 또는 ‘디커플링’이라고 부릅니다. 독일이 탈동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유럽환경국이 발표한 “<폭로된 탈동조화(Decoupling Debunked)>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각국의 사례분석 결과 탈동조화가 되었다고 해도 상대적(relative)이거나 일시적(temporarily)이거나, 아니면 국지적(locally)인 수준에서만 확인되었고, 대부분은 상대적 탈동조화였다는 사실입니다. 절대적 탈동조화가 일어나는 경우에도 단기간이었거나, 특정자원에 국한되거나, 아니면 특정 지역에 한정하거나, 또는 매우 소소한 비율에 불과했다”고 보고서는 결론짓습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 탈동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레디앙, 김병권) (https://eeb.org/library/decoupling-debunked/) 그럼 탈성장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 탈성장은 OOO이다.  탈성장(Degrowth)은 단순히 성장을 멈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전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럼 여러 학자들은 탈성장을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탈성정 개념어 사전』의 저자들은, “탈성장은 무엇보다도 성장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탈성장은 경제 지상주의의 언어로부터 공적 토론을 분리하고, 경제 성장을 사회의 공동 목표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한다. 또한 탈성장은 더 적은 자연 자원을 이용하고, 오늘날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반영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첫 번째는 성장에 대한 비판이고, 두 번째는 영속적인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회 구조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면서 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디그로쓰』의 저자들은, 탈성장은 “물질 사용량·시장 거래량 증대를 억지하는 것, 그리고 경제성장 없이도 잘 살도록 새로운 개인, 관계, 제도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탈성장은 “단순한 경제 축소가 아니라, 의미 있게 살아가고,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관계 맺고 공유하며, 더 평등한 사회에서 더 적게 일하기라는 프로젝트다. 탈성장은 삶의 행복을 개선할 수 있다.”라고도 말합니다. (3)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저자 제이슨 히켈은, 탈성장을 “에너지와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계획적으로 줄임으로써 경제가 안전하고 정의로우며 공정한 방식으로 생명세계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이것이 탈성장의 핵심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급진적인 재분배, 세계 경제의 물질적 규모 축소, 보살핌, 연대 및 자율성을 향한 공통 가치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탈성장은 한 개의 대안 모델이 아닌 다양한 대안의 모태이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탈성장의 주체는 다양한 개인으로서의 모든 사람들이고 특수하고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탈성장 운동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 관련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고서인 IPCC 보고서에서 언급된 ‘탈성장’ 관련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IPCC 보고서에 ‘탈성장’에 대한 언급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매우 놀랍다거나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 전 세계적 흐름   ○ 전 세계 과학자들의 움직임 “2018년 238명의 과학자들은 유럽의회에 GDP 성장을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행복과 생태적 안정성에 집중하라고 요구했다. 2019년, 150개 이상의 국가에서 1만 1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은 세계의 정부들에게 ‘GDP 성장과 과잉으로부터 벗어나 생태계를 지속시키고 좋은 삶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전해집니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p56~57)   ○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6차보고서 IPCC는 기후변화에 관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기관으로, IPCC 보고서는 총 3개의 실무그룹 보고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영향, 적응 및 취약성을 다룬 ‘제 2 실무그룹 보고서’에는 본문에 ‘탈성장’이 15회, 참고문헌에 12회, 총 27회 언급되고 있습니다(「IPCC 6차보고서에 담긴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 민정희). 이 중 몇 가지 구절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방 원칙에 기반한 논거를 사용하여, 탈성장은 GDP와 이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량의 의도적인 감소를 목표로 하며,(중략)” (1장: Point of Departure and Key Concepts, p.67~68)   • 대안적 지속가능성의 세계로서 탈성장 “탈성장, 포스트-성장과 기타 환경주의 학문은 포스트-발전과 같이 개발에 대한 비판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더 나은 지표가 아니라 기후 위기를 계기로, 체계적인 변화를 상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다.” (18장: Climate Resilient Development Pathways, p.21). “탈성장은 경제 성장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회정의, 행복 사이의 교차점을 탐구한다.” (18장: Climate Resilient Development Pathways, p.81-82).   • 지속가능 발전과 경제성장에 대해 “현재 상당히 많은 문헌들이 현재의 발전 패턴과 그 발전을 뒷받침하는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며(Washington and Twomey, 2016), 따라서 기후 변화의 영향을 줄이는 등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경제 성장이 반드시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을 수 있다.” (18장: Climate Resilient Development Pathways, p.80)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자연에서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 중에 성인이 되어도 계속해서 키가 크는 인간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성장이 끝난 후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이 아닌 ‘성숙’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위기는 예전과 달리 ‘결핍’이 아닌 ‘과잉’에서 온 것입니다. 이제 총량을 줄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르게 분배하고, 자원은 적게 사용하며, 함께 사용해야 할 공공재와 커먼즈를 늘리고, 생태계와는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탈성장의 전략과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자료>1. [탈성장 개념어 사전] 자코모 달리사 외, 강이현 옮김, 그물코 (2018)2. [디그로쓰] 요르고스 칼리스, 수전 폴슨, 자카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우석영,장석준 옮김, 산현재 (2021)3. [적을수록 풍요롭다] 제이슨 히켈, 김현우,민정의 옮김, 창비4. 경제성장과 탄소중립, 같이 갈 수 있나? [정의로운 경제] 탈-탄소경제와 불평등 해소의 결합(정의정책연구소장 김병권)5. 「IPCC 6차보고서에 담긴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 민정희   *(이전 글) [토론] 성장주의와 인류의 생존,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가능할까? (시리즈 1)https://campaigns.do/discus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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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시대 민주주의는 어떤 변화를 하게 될까?
인공지능 시대 시민참여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모색                매일 진화하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그동안 공론장으로 소셜네트워크가 자본에 예속된 속성으로 인해 많은 극단화 현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갈등을 보게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우리 시대 공론장 및 민주주의 시스템(입법, 사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우리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를 담고자 한다. 꿈꾸는 통신노동자  김 철회 민주주의도구로서 디지털 정보기술의 우려와 기대 디지털 정보기술은 인간에게 민주주의 도구에 적합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는 정보기술에 의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를 경험했다. 그러한 긍정적 측면에는 인터넷 기술을 통해 소통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이러한 소통을 활성화에 따라 광고수익을 올리는 소셜미디어 기업의 경우 알고리즘기반 데이터 버블을 형성하다 보니 양 극단으로 나눠진 여론지형과 갈등상황이 극대화 된다. 이러한 현상으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주류언론과 반대성향 언론이 활동할 지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기성언론이 독재권력에 충실한 국가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기성언론이 일정 역할을 하는 국가에서는 그 반대 극단주의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각국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며 갈등요소로 확대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소셜미디어에 대한 여론 왜곡에 대한 이슈에 대응도 못할 사이 우리는 Chat GPT-3을 만나게 되었고, 개발자들 조차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할수 없는 변화속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인간과 인공지능 간 협업 인공지능과 인간은 어떤 인식체계 속에서 협력할 수 있을까?   인간의 역할과 인공지능의 역할은 어떻게 구분되고 인간은 어느 수준까지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것이 적정할까?  이러한 단초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인간 의식구조 피라미드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식 구조 피라미드에서 인식 및 기억, 지식 영역에 대해서는 현재 기술 기반 인공지능으로 구현이 가능한 영역이다. 이러한 정보를 통해 어떤 개인들은 주관성의 영역에서 그동안 개인의 경험 축적으로 인해 정보를 해석하는 각자의 관점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과 비전과 같은 영역으로 확산되며, 현재로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들이 나타나는 영역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객관성 영역은 그동안 소위 전문가 영역으로 알려졌던 것이지만 이러한 영역은 최근 인공지능으로 구현 가능한 영역이 되어 가면서 정보의 진실성이 중요해졌다. 정보가 왜곡되는 경우 잘못된 지식으로 왜곡되는 경우 왜곡된 주관성을 가지게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진실 분별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정보 학습에서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나온 지식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주체도 인간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지식영역에 대한 도움을 주는 수준이 되어야 하고 이들 지식에 대한 검증 역시 인간이 해야 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기술에서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가 의식구조 피라미드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주로 지식엘리트 층의 역할로 본 영역이 실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분야에는 주로 변호사, 판사, 기자와 같은 영역과 직종이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상위계층에 해당하는 영역이 인간 주관성 영역이라고 볼 때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면서 인간은 좀 더 인문학적 가치와 인간성회복을 지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수있다. 또한, 이러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왜곡된 가짜 정보에 대해 경계하고 진실을 찾아내는 역할은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할 몫이다.  인공지능 사법시스템 인공지능이 지식영역에서 가지는 강점 때문인지 벌써 인공지능 변호사, 인공지능 기자, 퍼실리테이터 등 과 같은 분야에 인공지능 적용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중 인공지능 기술은 비용대비 효과가 큰 영역에 빠른 도입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변호사 비용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큰 기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지식 기반 인공지능 기술은 특징은 뜻하지 않는 변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나라 사법제도가 유럽처럼 시민참여 재판이 도입된다면 변호사 뿐 아닌 판사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미국 혹은 유럽사회에 해당하는 이야기 이지만 직업판사가 아닌 시민이 참여하는 재판에서 시민판사(게르만 모형 제도) 혹은 배심원 제도(앵글로색슨 모형 제도) 국가에서는 인공지능 도움을 받아 재판에 참여하는 시민법관 또는 배심원을 도와주는 역할로서 시민 법감정을 함께 고려한 판결을 위해 제도화 되어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기술이 제대로 사용 되기 위해서는 제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술보다 제도 변화가 본질이다.) 유럽에서 참심제(시민이 재판장이 되는 제도) 국가에서 시민판사들이 있고, 미국 같은 배심원제국가에서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고 시민들의 법감정이 사법판결에 반영하기 위한 선진 사법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인공지능이 도입되기 전에 제도 선진화가 이뤄져야 하고 제도 선진화 이후 인공지능이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인간의 책임하에 판단되고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운영되어야 한다. 사법제도 측면에서도 긍정적 변화 구조를 생각해 본다면 억울한 약자에 속한 시민들에게도 공정한 사법 시스템을 생각해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아파트 경비노동자 박 씨 아저씨가 시민판사로 겸직을 하면서 억울한 소시민들의 재판에서 판결을 하는 구조로 전환을 생각해 볼수 있다. 그분의 오랜 사회 경험이 오히려 판결에 도움이 될수 있기에 비록 법과대를 나오지 않아도 시민판사로서 인공지능 도우미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면 약자들에게도 공정한 사법정의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이고 제도의 본질은 시민참여가 보장된 사법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전재를 두고자 한다.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인공지능 '숙의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공론장에서 민주적 절차를 기반한 의사결정을 제도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러한 민주적 의사결정방법은 이미 일상생활 속 기업과 학교, 사회 활동단체 등 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보통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수 의사를 모아서 통합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을 활용한 퍼실리테이션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 시도하고 제안하려는 OpenAI의 얼라인먼트 팀 리드인 얀 라이커(Jan Leike)는 사회적 가치 도입을 위한 제안으로 거대 언어 모델로 일관성 있게 추론 가능한 의지(CEV)를 구현하는 제안을 했다. 얀 라이커는 집단 선호도에 대한 의견을 인공지능시스템을 통해 의견을 모을 경우 실제로 인간성을 포함하는 프로세스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업적 인센티브, 즉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조건에 의해 결정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인공지능을 통해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닌 가치 질문에 대한 더 나은 답을 도출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제안한다. 이를 위한 핵심 아이디어로 거대 언어 모델을  숙의(熟議) 민주주의 모방 학습에 사용한다. 숙의 민주주의는 무작위로 선정된 소수의 대중이 명시적으로 숙의하는 의사 결정 또는 정책 결정 과정으로 구성원들은 복잡한 가치가 담긴 주제(예: 국가 정책 질문)에 대해 학습하고, AI 지원을 사용하여 세부 사항을 이해하고, 서로 토론하고, 궁극적으로 의사 결정에 도달한다.   이때 사람들이 가치 있는 질문을 명시적으로 숙의하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이러한 숙의에 대해 대규모 언어 모델을 학습시킨 다음, 다양한 관점을 조건으로 한 모델을 통해 새로운 가치 질문에 대한 토론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처럼 토론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이유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는 항상 사람이 참여해서 시뮬레이션을 검토 후 인간이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얀 라이커는 이 제안의 목표는 인간의 의사 결정이나 민주적 제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비용이 적게 드는 근사치를 통해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얀 라이커의 주장처럼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기능은 시민의회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시민참여를 늘리는 구조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유럽처럼 시민의회 도입과 함께 시민들의 숙의과정에서 나온 많은 토론과 의사결정 내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하고 요약해 주는 과정과 그 집단에서 의지를 학습하여 이를 제도 및 정책에 반영하는 형태로 직접민주주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의 제도에서 시민은 모든 의사결정의 주체이며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본 사상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 시민은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정보에 대한 편향성에 대한 관리 주체로서 의무가 있으며,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 인공지능 활용이 가능하며, 인공지능의 판단이 최종 결과가 아닌 중간 참조할 자료로서 검토 및 채택 등 결정할 부분은 최종적으로 인간이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질 주체가 생기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A proposal for importing society's valuesBuilding towards Coherent Extrapolated Volition with language modelsaligned.substack.com   (https://aligned.substack.com/p...)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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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주의와 인류의 생존,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는 현재의 분배 구조나 산업 발전을 통해 발전된 기술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회에서 태어나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의 분배구조와 고도화된 기술 집약적 삶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가 시작된 것은 불과 60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로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이루어 냈습니다. 원하는 곳이면 먼 곳 이어도 빠르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했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클릭 한번이면 문 앞까지 가져다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층 더 편리해 지고 있고, 우주여행도 현실이 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살고 있는 동안 지구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1.7개가 더 필요한 지구(지구생태용량 초과의날) 1971년 부터 글로벌생태발자국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는 지구가 재생 가능한 생태용량을 정하고 생태용량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날, 바로 ‘생태용량 초과의 날’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처음 계산한 1971년에는 생태용량초과의 날이 12월 25일 이었습니다. 이미 그 때부터 우리는 지구의 생태용량을 넘어서고 있었는데요 이후로 날짜가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작년(2022년)에는 7월 28일까지 앞당겨졌습니다. 지금처럼 지구를 사용한다면 1년에 지구가 1.75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즉 다음 세대가 사용해야할 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균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구를 얼마나 사용하고 있을까요? 바로 4개가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  기준으로 했을 때는 4월 2일에 1년치 생태한계치를 초과해 버렸습니다. IPCC에서는  매년 날짜를 열흘 씩 앞당겨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성장의 한계 제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로 인한 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되던 1970년에, 세계 각국의 과학자, 경제학자, 교육자, 기업가 들이 모여 성장으로 인한 사회의 위기를 연구하기 위해 로마클럽을 결성하였습니다. 로마클럽은 MIT 연구소에 의뢰해서 <성장의 한계> 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과 같은 성장 사회를 지속한다면 인류는 100년 밖에 지속하지 못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음 보시는 표는 1970년 부터 2010년까지 성장의 한계에서 예측한 그래프와 실제 해당지표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표인데요. 놀랍게도 거의 동일한 그래프를 그리고 있습니다. 2030년에는 성장이 멈추고 사회적 혼란이 시작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IPCC 보고서의 예측과도 동일한데요 이렇게 인류의 시스템을 유지하면 2030년에 1.5도를 넘어서고 티핑포인트를 넘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022년은 책이 발간된 후로 딱 50년이 지난해였습니다. 성장의 한계의 저자인 데니스 교수는 지난 50년간 되돌려놓을 시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GDP 성장과 물질발자국 지구를 많이 사용한 것과 성장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전세계는 국가의 성장지표로 GDP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말하는 것인데요. 매년 작년대비 GDP성장률을 얼마나 기록했는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곤 합니다.  아래 왼쪽의 그래프는 GDP성장과 물질발자국을 비교한 그래프입니다. 물질발자국 그래프는 우리가 해마다 물질을 얼만큼 사용하고 있는지를 측정한 표입니다. 표에서는 GDP와 물질발자국이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며 올라가고 있지만 물질 사용도 그에 비례해서 가파른 속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생태용량초과의 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구는 사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오른쪽 그래프는 지구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 수준의 물질 사용 한계치를 50억 톤으로 추산했고 현재 이미 아득히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1900년대의 물질발자국이 10억톤이었던 것에서 한계치인 50억톤이 되는 데에 100년이 걸렸다면 50억톤에서 90억톤이 되는데에는 2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GDP가 증가한다는 것은 소비가 증가하고 기업의 이윤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은 소비자의 구매를 이끌어내기 위해 매번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여야 합니다.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제품의 수명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구매회전율이 높아지게 합니다.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물질을 사용하게 되고 결국 GDP가 증가할수록 물질발자국은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고 그에 따른 물질사용과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습니다. GDP성장과 대기중 탄소농도 아래 그래프는 GDP 성장 그래프와 대기 중 탄소 농도를 나타내는 그래프입니다. 그래프를 보시면 GDP 성장 그래프와 대기중 탄소 농도의 그래프가 거의 동일하게 증가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80만년 동안의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280ppm을 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환경운동가들은 350ppm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고 현재는 420ppm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탄소배출량 또한 성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생산, 유통, 소비 전 단계에서 값싼 에너지가 없이는 유지 될 수가 없습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했지만 에너지원은 한결같이 화석에너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재생에너지 비율이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석탄화력에너지 비중이 높습니다. 전세계 재생에너지 비율은 32%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8%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장의 지표인 GDP는 지구의 물질을 사용하면서 상승하고, 지구의 물질을 사용하여 생산하고 소비할수록 탄소를 배출해 지구는 더 뜨거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국가의 경제성장지표로 사용하고 있는 GDP를 처음 연구한 경제학자 쿠즈네츠는 GDP를 국가의 경제성장지표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쿠즈네츠 박사는 우리가 기업에 돈을 낼 때 GDP는 올라가지만 상품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는 등 자연을 훼손하는 기업 행위는 측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자의 경고도 무시하고 GDP를 경제성장지표로 사용한 결과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당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GDP는 당연히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제성장율이 감소하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야할 지구가 망가지고 있는 지금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성장이 아닌 다른 모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아닐까요?  나가며 | 기술을 통한 성장 집착이 아닌 다른 모델이 필요하다 인간과 모든 생물들을 봐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성장을 멈추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왜 경제성장만큼은 끝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심지어 주류경제의 대표적 기구인 IMF마저 어느정도 경제성장을 이루면 소득이 낮은계층에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효과’는 완전히 틀렸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성장 할 수록 불평등과 환경 문제가 해결될거라고 말하던 쿠즈네츠의 이론도 틀렸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성장할수록 불평등은 심해지고 지구도 망가지고 있습니다. IPCC 6차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과 같은 성장과 탄소배출을 유지한다면 2100년에는 7도 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마크 라이너스는 그의 저서 <6도의 멸종>에서 4도가 넘으면 지구의 대부분이 인류가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6도가 넘으면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고 말하고있습니다.  기술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안으로 제시되는 기술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과 CCUS 기술 뿐입니다. 계속해서 성장하며 필요한 전기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때 필연적으로 더 많은 물질발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CCUS는 탄소포집저장기술입니다. 호주에서 5년간 시도한 결과에 따르면 2조 6600억원을 투자해 저장한 탄소는 130만톤에 불과했고, 탄소 포집, 운송,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과 비교하면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결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장 과정에서 토양 오염과 탄소누출 사고 등 안전성 문제까지 안고 있습니다.  GDP 성장 지표는 매년 복리로 계산됩니다. 때문에 성장의 속도가 매우 빠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점점 빠른 속도로 지구를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지구를 우리는 얼마나 더 사용하게 될까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이제는 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구를 회복시키고 인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다른 모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성장주의에 대한 한계와 비판 속에서 탈성장에 대한 새로운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탈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다음글 : 기후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탈성장 <참고도서> 적을수록 풍요롭다, 제임스 히켈 도넛경제학, 케이트 레이워스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성장의 한계, 도넬라 H. 메도즈, 데니스 L. 메도즈, 요르겐 랜더스 <참고 웹사이트> - 글로벌생태발자국네트워크 https://www.footprintnetwork.org - [한겨레] IMF “하위 20% 소득 늘어야 경제 성장”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economy/696275.html [제주의소리]불편한 진실, 부활한 ‘성장의 한계’의 40년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4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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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을 소유한 국회의원이 문제일까 언론이 문제일까
채널A에서 보도한 김남국 의원 코인 내용입니다. 코인 거래소 빗썸에 있던 위믹스 코인을 업비트 코인 거래소로 옮깁니다. 그날 오후 옮긴 코인을 개인 클립 지갑으로 옮깁니다. 이 과정은 통상적인 이체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채널A는 코인을 옮기기 1주일 전 빗썸 거래소가 개인 지갑으로 돈을 보낼 수 없도록 막아버려서, 이런 제한이 없는 업비트로 김남국 의원이 코인을 옮기고 다시 개인 클립 지갑으로 옮겼다며 검찰이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금융정보분석원으로부터 김남국 의원의 위믹스 거래 내역 등 자료를 받아 위법 행위를 들여다볼 계획이었지만 법원이 두 차례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법원은 거액의 코인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의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했습니다. 즉, 소유한 코인을 다른 코인 거래소로 옮기든 개인 클립 지갑으로 옮기든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채널A도 검찰이 김남국 의원이 코인을 옮긴 이유를 밝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종의 불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주고자 하는 문장만 있을 뿐입니다. 채널A는 김남국 의원의 신고 재산이 11억인데, 코인을 현금화하면 60억이라며 숨겨둔 돈이 얼마냐며 의혹이 폭발했다고 전합니다.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서 김남국 의원은 현재 투자한 금액에서 남아있는 금액을 평가하면 8-9억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가상화폐 실명제 시행 이전 위믹스 코인 60억을 현금으로 인출했다는 내용 관련해 실명제 직전 현금 440만 원을 대선 기간 1월부터 3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부모님 용돈 용도로 인출했다고 밝혔습니다. 나머지 코인은 말 그대로 이체(거래소에서 개인 클립 지갑으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60억 보유에 대해선 코인 시세가 60억을 찍은 적이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현행법상 가상 화폐는 재산 신고나 등록 대상이 아닙니다. 숨겨뒀다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만. 정당을 떠나 불법은 아닙니다. 신고 의무가 없었으니까요. 다만, 이번 김남국 의원 이슈로 가상 자산 보유 내역 신고 법안이 2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역 21대 국회의원은 가상 자산 보유 변동 내역을 다음 달 30일까지 등록해야 한다고 합니다. 채널A 주장에 따르자면, 가상 자산 보유 변동 내역이 최신화되어 이전부터 지금까지 보유한 가상 자산이 신고 내역에 새롭게 기재되는 의원들 모두가 돈을 숨겨두었던 걸로 되겠죠. 국민들의 감정법과 상관없이 김남국 의원 입장에선 충분히 억울할만합니다. 다시 한번 지적하지만, 숨겨둔 돈에 대한 의혹 폭발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채널A는 이 외에도 여러 의혹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내용 말미에 덧붙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 코인 투자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국회의원이 해서 문제인 거죠.“ 이는 결국 아무런 문제 없지만 김남국 의원이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자신들이 의혹을 고의적으로 증폭시키고 있다는 표현으로 봐도 무방하다 생각합니다.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특정 근거 없는 의혹 제기는 합당한 것일까요? 법원까지 두 차례 영장을 기각했는데 말이죠. 그럴 것 같다는 내용으로 의혹을 보도하는 것이 언론 자유이고 책무인가요? 저런 말을 지면에 대놓고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코인 투자를 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었습니다. 국회의원이 코인을 보유한 것이 문제라면 언론은 왜 이준석 전 대표의 코인 투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일까요? 김남국 의원 코인 관련 다른 언론사들의 보도 내용은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국민일보 - ““김남국 코인 137만개”분석한 변창호, 살해 협박받아 파이낸셜뉴스 - “손발 자르겠다” 김남국 코인 비리 폭로한 변창호, 살해위협 받고 있다  보도 내용에 김남국 의원이 보유한 코인이 당초 알려진 60억 원이 아닌 120억 원에 달한다는 추정치가 나왔다며, 현재 김 의원이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언론은 확인된 사실만 보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언론이 어떤 책임을 질지 궁금합니다. 확실한 수치라면 정보의 출처를 밝혀야 하는 의무도 있는데 교묘하게 피해 갑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태도입니다. 또한, 김남국 의원 측 때문에 변창호 씨가 위협받는 느낌을 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한국경제 - 여“세비 받으며 잠행쇼”…김남국 제명 압박 연합뉴스 - 여, 빗썸 업비트 관계자 불러 김남국 ‘자금세탁 의혹‘ 조사 국제신문 - 국회 김남국 코인 의혹 일파만파…’입법로비‘이어 ’자금세탁’까지 암호화폐 업계에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거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국민의힘 코인 게이트 진상조사단 윤창현 의원이 빗썸의 상장 정보 사전 유출 가능성에 대해 빗썸 측이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개인 일탈까지 배제하진 않는다고 밝혔다고 전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머지 제목들을 보면 마치 김남국 의원이 자금세탁을 했고 입법로비에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김남국 의원이 보유한 가상화폐 발행사인 위메이드와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국회 출입 기록 내용에는 국민의힘 윤창현, 허은아, 정희용, 무소속 양정숙,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김성주, 김종민, 김한규 의원실을 방문했다고 나옵니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하면 입법로비는 김남국 의원실이 아닌 이들 의원실을 통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고 봐야 합니다. 가상화폐 발행사인 위메이드가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실에 방문했다는 내용만 짧게 기재될 뿐 윤창현 의원에 대한 입법로비 의혹 기사는 없습니다. 왜 이런 내용은 자세하게 지적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금 세탁에 대한 의혹만 나올 뿐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1도 없습니다. 이런 의혹이 있다면, 업체로부터 사전 정보를 받았을 확률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노렸다느니, 정치자금을 세탁했다느니 로비를 받았다는 가능성에 대한 의혹 보도만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남국 의원의 제명이나 사퇴가 모든 문제의 해결인 양 보도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없는 한국 언론의 전형적인 제목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김남국 의원과 위메이드 측이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김남국 의원이 입법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관련 내용은 밝혀진 게 없습니다. 김남국 의원은 5월 15일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 나와 사전 정보, 로비, 주가 폭등으로 시세차익을 봤는 거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의혹을 가지는 측에서 특정하는 시점에 폭등했는지, 이에 대한 사실, 인과관계를 따져야 하고 위믹스를 띄워주기 위해서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선거 캠페인 정책으로 이용한 정도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한, 미공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만한 핵심 관계자를 알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회사의 말단 직원조차 만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미공개 정보를 얻을 생각도, 평생 살면서 그런 생각도 안 했지만 그런 정보를 얻을 기회조차 없었다고 단언해서 말했습니다. 한국경제 - ‘김남국 코인 의혹’에…넷마블 “사전정보 제공한 적 없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원화 거래가 가능한 가상 자산 거래소 상장은 업계에서 호재로 여겨져 코인이 급등하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김남국 의원이 매수한 넷마블이 발행하는 마브렉스가 그러하다고 합니다. 다만, 마브렉스는 이후 가격이 급락하며 보유분을 분할 매도한 김남국 의원은 손해를 봤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의혹이 실제일 가능성이 있듯 시세차익을 노린 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봤을 가능성도 지울 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왜 이런 가능성은 따져지지 않는 걸까요. 넷마블은 25일 어느 누구에게도 비공개 정보를 사전 제공한 적 없다고 밝혔습니다. 코인 상장의 구체적 시점은 거래소로부터 통보받는 형태라면서 회사 임직원 누구도 상장 시점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없다고 부연했습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미공개 정보를 받기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가능성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미공개 정보를 이용했다는 의혹은 단순한 의혹 수준일 확률도 있습니다. 역시나 이런 내용도 보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남국 의원 관련 기사를 보다 보면 언론이 정치인들이 남발하는 의혹을 퍼나르기만 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황이나, 근거는 보기 어렵습니다. 많은 돈이 오고 간 내역이 있으니 자금 세탁을 했을 것이다 또는 많은 돈을 투자했으니 미공개 정보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 돈을 대선자금에 이용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것 같지만 추상적인 의혹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의혹을 퍼 나르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닙니다. 의혹 제기가 합당한 것인지, 의혹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다른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닌지 취재하여 출처를 밝히고 확인된 정확한 정보를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이슈와 관련해서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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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노동권 보장이 가져올 노동의 미래
“저도 최저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뇌병변장애인인 동섭 씨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는 오랫동안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일했다. 그때도 종일 열심히 일했지만 25만 원 정도밖에 못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장애인권익옹호활동을 하며 최저임금을 받는다. 그때는 본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못 받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중증장애인에게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최저임금법 적용제외조항을 근거로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사업장이 많다. 그가 최저임금을 못 받는 것은 정말 장애인인 그의 잘못일까? 아니면 제도적 문제일끼? 최저임금법 7조(최저임금의 적용제외) 제1호에서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에 대해서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의 취지는 생산성 여부가 기준이 아니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하는 보편적 권리다. 일하는 사람에게 최저임금이 보장돼야 최소한의 생존, 생활 안정이 되며, 노동할 맛(근로 고취)을 줄 수 있기에 보장하는 권리다. 장애인노동자도 최저임금을 받아야 생활이 안정되고 일할 맛이 나는 것은 똑같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최저임금은 헌법에 명시된 헌법적 권리다. 헌법 32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ㆍ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실정법인 최저임금법에는 이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며, 장애인차별 인식을 확산시키는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최저임금 적용제외 조항은 장애인을 빈곤으로 이끈다. 국회에서 국회가 고용노동부와 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저임금 적용 제외 장애인 근로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저임금 적용 제외 장애인 노동자는 2019년 8,971명, 2020년 9,005명, 2021년 9,475명, 2022년 8월 말 기준 6,691명이다. 최저임금 적용 제외 장애인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2019년 38만 169원, 2020년 37만1790원, 2021년 37만461원, 2022년 8월 말 기준 37만 9622원이다. 최저임금 기준으로 보면 20% 수준 밖에 못 받는 셈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생계가 가능하겠는가. 장애인노동자의 시민권 보장  사람은 관계적 동물이다. 인정은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 인정을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시민권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고용조차 되지 않는다. 고용되더라도 최저임금도 못 받거나 장애인만 보호작업장에서 따로 고용(분리고용)된다. 세상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이며,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사회권적 시민권 없이 자유권적 시민권 보장만으로는 온전한 시민권을 누릴 수 없다.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노동, 주거, 교육 등에 동일한 권리행사를 할 수 있을 때 온전한 시민권, 사회권적 시민권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동료 시민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한다면 노동에 대한 동등한 헌법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최저임금도 보장해야 마땅하다. 장애인도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최저임금법에 명시된 장애인에 대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자”라는 표현은 장애인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를 불러온다. 장애인이 일하면 질이 나쁘다는 평가, 장애인은 일할 필요가 없단 편견을 조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애인고용을 꺼리게 하는 데도 일조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집단적으로 일하는 노동과정에 개개인에 대한 노동을 측정하는 일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아니, 과거와 달리 인터넷에 글과 영상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돈을 버는 세상에서 획일적인 생산성 측정이 현실적이고 시대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군사 무기를 만드는 노동이 돈을 많이 번다고 사회적 생산력이 과연 높다고 할 수 있을까. 기업주에게는 생산력이 높겠지만 사람을 죽이는 무기라는 점에서 생산력을 하락시키는 노동은 아닌가. 이제 노동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 이제 장애인이 노동함으로써 생산하는 다양성과 공존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삶,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라는 것을 장애인노동권 보장으로 보여줄 수 있다. 장애인노동권 보장은 우리 사회에 노동에 대한 개념,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함으로써 노동자가 생산성의 노예가 되는 일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협력하는 것을 경험으로써 노동자들이 다양성에 대한 생각, 다름과 존중, 공존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일터가 곧 교육의 장이 된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적인 일터를 장애인편의시설을 들여옴으로써 일터가 변한다. 경사로가 생기고 엘리베이터가 생긴다. 다른 방식의 소통에 대해 배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장애인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 좋다는 것은 지하철 승강기의 설치로 모두가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장애인 노동권 보장은 개별장애인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장애인노동자 당사자는 성취감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정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장애인노동권 보장 투쟁은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실제 필자가 만난 장애인 노동자는 “노동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임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노동을 통해 사회의 배제에서 벗어난 느낌을 즐겁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시야가 생겼다”고 했다. 장애인에게도 인구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람이라는데 동의한다면, 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애인의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 상품 몇 개 더 생산하는 비장애인의 노동만 가치있다고 편협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물질 생산만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장애인의 노동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서로의 삶과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야말로 가치있는 사회가 아닌가.   염전노예, 노동능력에 대한 거짓이데올로기 2014년 신안 앞바다에서 많은 지적 장애인들이 임금도 거의 못 받고 노예처럼 부려 먹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9년이 넘었다. 이 사건은 노동능력이란 말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착취적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정말로 장애인에게 노동능력이 없었다면 비장애인 사업주가 지적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일을 시키겠는가. 생산성이 저하될 텐데 말이다. 염전노예 사건은 장애인은 노동할 능력이 없거나 낮다는 사회적 편견과 달리 노동능력이 있기에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법 7조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제외 조항은 삭제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쉽게 장애인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인식을 갖게 하고 염전노예사건과 같은 비극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최저임금적용제외 조항을 없애자고 시민사회가 요구한 지 20년이 지났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최저임금법 7조는 장애인에게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장애인차별을 공고하게 하고, 장애인노동을 평가절하하며, 최저임금 적용제외 절차를 이용하는 보호작업장 같은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분리고용사업장을 유지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이제는 장애인차별 조항을 없앨 때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맹성규의원안, 정의당 이은주 의원안이 발의된 상태다. 올해는 반드시 최저임금법을 개정하자. 그리고 중증장애인도 일할 수 있는 공공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올해 5월 1일 중증장애인권리중심일자리 지원법이 발의됐다. 공공부문이 장애인 공공일자리를 마련해야 민간분야까지 확산될 수 있다. 최저임금을 주고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함께 갈 때 장애인의 노동권 보장의 포문을 열 수 있다. 2023년은 장애인노동자도 동등한 시민으로서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해로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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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속 당신의 문해력, 안녕하신가요?
 발달된 Ai의 등장, 신기술을 도입한 전자기기의 출시. 이렇게 우리는 점차 발전되고 급변하는 디지털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즉시, 그리고 아주 편하게 제공받을 수 있는데요. 매 순간 전자기기를 통해 읽고 쓰고 말하는 우리 세대가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로 인한 문해력 부족을 겪고 있다는 사실 들어보셨나요?  문해력과 관련된 최근 기사를 찾아보면 금일을 금요일로, 중식 제공을 중국음식 제공으로 이해하며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 속 당신의 문해력, 안녕하신가요? 문해력이란?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단어의 뜻을 아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의도와 맥락을 파악하고, 스스로 적절한 메시지를 만들어 낼 줄 알 때 ‘문해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최소 문해력과 기능적 문해력으로 나누는데요, 여기서 최소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쓰는 기초능력을 말하고, 기능적 문해력 이란 글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EBS 교양 당신의 문해력: 1부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문해력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기에 이렇게 이슈가 되는 걸까요? EBS에서 방영된 ‘당신의 문해력'에서 성인 남녀 880명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문장으로 문해력을 테스트하였는데요, 평균 54점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KTX 요금 계산 안내문, 복약 지도서, 주택 임대차 계약서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글로 테스트가 진행되었음에도 평균 점수가 100점 만점에 54점이라는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EBS 다큐] 당신의 문해력: 1부 읽지 못하는 사람들 (EBS 20210308 방송) 숏폼 콘텐츠  그렇다면 문해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 번째는 숏폼인데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했던 이전과 다르게 영상이 발달한 사회가 되며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양한 형태의 영상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는데요, 이 중에서 짧은 시간 안에 주목을 시키고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이게 제작하는 숏폼은 팝콘 브레인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팝콘 브레인이란, 빠르고 강한 정보에는 익숙하고 현실 세계의 느리고 약한 자극에는 반응을 하지 않는 뇌를 의미합니다. 숏폼을 몰입해 시청하는 습관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긴 분량의 다른 영상을 보기 힘들어져 숏폼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간은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죠. 2022.12.15, 재밌고 자극적인 '숏폼' 시청, '팝콘 브레인' 만든다, 출처 헬스조선 뉴스 강수연 기자  또한 공부할 때 쓰이는 집중력은 능동적 집중력인 반면,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집중력은 수동적 집중력인데 수동적 집중력에 익숙해지면 우리 뇌는 반응적인 뇌로 길들여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숏폼이 무조건적으로 문해력을 저하시킨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다양한 길이와 종류의 콘텐츠를 경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023.03.03, "불필요하게 바쁜 사람, 숏폼 중독에 취약", 출처 미디어스 고성욱 기자 스마트폰을 보는 방식   두 번째는 우리가 스마트폰을 보는 방식입니다. SBS에서 방영된 ‘난독시대'에서 글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시선추적장치를 활용하여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잘 읽지 않는 사람의 시선을 분석해 봤는데, 책을 평소에 많이 읽은 사람은 글을 끊김 없이, 그리고 모든 문장을 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문장을 휙휙 넘기는 식으로 대충 읽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를 시선추적장치 업체에서 분석한 결과,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글을 보는 방식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글이 쓰이는 방향은 가로라서 가로로 꼼꼼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스마트폰은 내릴 때 세로로 의식 없이 스크롤 하다 보니까 시선이 아래로 쭉 내려가면서 문장을 대충 읽고 말게 되는 것이죠. [SBS 스페셜] 난독시대 (SBS 20190721 방송) 어휘 실력  마지막으로는, 어휘 실력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시선추적장치를 활용하여 진행한 실험이 하나 더 있는데요, 평소에 글을 많이 읽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책을 읽는 시선을 비교한 실험입니다. 글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어려운 단어가 나와도 중간에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글을 읽어냈지만 글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은 읽다가 어려운 단어가 나오자 그때부터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읽기를 포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어휘력 부족이 읽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내용을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인 문해력이 당연히 저하될 수밖에 없겠죠. EBS 다큐] 당신의 문해력: 2부 공부가 쉬워지는 힘, 어휘력 (EBS 20210309 방송) 디지털시대, 문해력 지키기  지금까지 문해력이 무엇인지와 문해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그렇다면 문해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흔하게 책 많이 읽기, 글쓰기 등을 대안으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것 외에도 디지털 시대에 문해력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디지털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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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변천사.zip
? 재점화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지난 21일 국민의 힘, 정부, 대통령실은 비공개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개정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당정협의회란 ‘여당’과 ‘정부’가 정책 수립 및 조정을 위해 협의하는 회의체입니다. 이는 국무총리, 여당대표,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참여하는 ‘고위당정협의회’와 부처 차관이나 실·국장급이 참여하는 ‘당정 간 정책조정위원회’로 구분됩니다.) 최근의 집시법 개정 논의를 촉발시킨 사건은 지난 5월 19일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전국건설노동조합(이하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1박 2일 집회로 볼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19일 광화문광장과 서울시청 일대의 세종대로에서 시위를 열었습니다.  (세종대로는 2020년 사람숲길 공사를 하기 전까지 시간당 차량통행량이 약 3000대에 달할 정도인 넓이 100m 규모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길입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시위는 5월 1일 노동절에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지부 간부가 구속 전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분신한 사건을 추모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와 경찰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퇴근길 혼잡을 이유로 도로점거 시위/집회를 오후 5시까지만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주최측은 시위를 지속했는데요, 이 때 교통정체가 심각하게 빚어집니다. 또한 시위참가자 중 일부는 도심 노숙집회를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거리를 점거한 노숙, 고성방가 및 노상방뇨, 음주와 흡연 문제로 주민신고가 잇따랐습니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이 “용납하지 않겠다”며 “건설노조 불법시위에 엄정하게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당정이 집시법 개정안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지난주에 재점화된 집시법 개정안과 당정의 협의내용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대립’된 입장을 보이고 있죠. 최근의 집시법 개정 논의에 대해선 [투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서 구체적인 찬반 입장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컨텐츠에서는 그에 앞서 현 정부에서 집시법 개정 논의가 어떤 맥락으로 진행됐는지, 그동안 집시법에 대해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내려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집시법? 그게 뭐야? 집시법이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로, 대한민국 국민의 적법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고는 동시에, 이 권리가 공공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제정한 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제 1조에서 집시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법은 적법한 집회(集會) 및 시위(示威)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집시법 개정, 뭐가 문제길래? 현정부에서 집시법이 논의된 것은 비단 지난 주의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시위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난 해부터 불거진 문제죠. 시작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근처 집회와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 근처 집회 때문이었습니다. ? 우선, 지난해 4월 집시법 개정안을 먼저 내놓은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2022년 4월부터 문재인 전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근처의 집회를 막기위해 집시법 개정안을 여러차례 발의한 바 있습니다. 작년 4월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근처에서 보수단체 및 유튜브 채널들이 고성과 욕설시위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정안에는 현행 집시법상 규제대상이 아닌 '1인 시위' 또한 집시법의 규제 범위에 포함시키거나, 전직 대통령의 사저 앞 집회를 금지하거나, 혐오표현 등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는 발언을 규제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습니다. 현행 집시법 제11조에서는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장소를 대통령 관저, 국회의장 공관, 대법원장 공관, 헌법재판소장 공관 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전 대통령의 사저’는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MBC 뉴스, 2022.06.17) ? 이후 국민의힘 역시 집시법 개정안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집회가 문 전대통령 사저에서만 문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윤석열 대통령의 서초동 자택 근처에서는 문 전대통령 사저 집회에 대한 맞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고, 용산의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이에 소음과 교통혼잡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죠. 이에 여당인 국민의힘의 집시법 개정안에는 ‘대통령 집무공간’ 주변 집회/시위 금지 조항이 신설됩니다. ‘전직 대통령의 사저’와 마찬가지로 현행 집시법 11조가 규정한 옥외집회 및 시위 금지장소에 ‘대통령 집무공간’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청와대에 집무공간과 관저가 합쳐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항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윤대통령이 관저와 분리된 용산집무실을 마련하며 여당이 ‘대통령 집무실 주변’또한 집회/시위 금지구역에 포함하기로 한 것이죠. 이에 2022년 11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집무실’과 ‘전직 대통령 사저’ 반경 100m 이내를 집회 및 시위금지장소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합니다. 양당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얻은 셈이죠. 상임위는 해당 개정안이 합의됐다는 이유로, 표결도 하지 않고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 하지만 사법부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법원은 경찰이 용산 대통령 집무실 100m이내 집회를 금지한 것에 대해 9차례나 위법결정을 내립니다. 대통령의 직책은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일이며, 현행법상 관저에 대통령 집무실이 포함되지 않는다며 대통령 집무실 100m이내 집회 역시 허용하라고 한 것이죠. 헌법재판소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2022년 12월 헌재는 대통령 관저 인근 100m 안의 집회·시위를 일괄금지하는 집회금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죠. 2024년 5월 31일까지 해당조항을 개정해야한다는 것 또한 덧붙였습니다.  (한겨레, 2022.11.22)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집시법은 지금까지 꾸준히 헌법재판소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수차례 받은 바 있습니다.  (‘위헌’과 ‘헌법불합치’의 차이 헌법재판소는 어떤 법률이 국가최고통치원리를 명문화시킨 헌법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합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리면, 해당 법률은 ‘무효’가 됩니다. 위헌결정과 동시에 해당 법률은 즉시 효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반면 헌법불합치는 위헌결정과 달리 즉시 법률이 무효화되지는 않습니다. 법률의 위헌성은 인정하지만, 즉각적인 법률 무효화에 따른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법의 유효성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사오늘, 2019.04.18)) 2009년 헌재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할 수 없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한 집시법 제10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재의 판단 근거는 해당규정이 ‘침해의 최소성(입법목적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여러 수단 중, 국민의 기본권을 가장 존중하고 최소로 침해하는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헌재결정례에 따르면 “집시법 제10조 본문은 야간옥외집회를 일반적ㆍ전면적으로 금지하여 합리적 사유도 없이 집회의 자유를 상당 부분 박탈하는 것이므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된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는 보충의견도 있었습니다. 또한 헌재는 2010년 6월까지 보완 입법을 요구했고요. (한겨레, 2023.05.22) 이어서 2014년, 헌재는 집시법 23조(벌칙) 3호에 대해 ‘해가진 후부터 같은날 24시까지의 시위에 적용하는 한 위헌’이라고 한정위헌 결정했습니다. 자정까지는 야간집회를 허용하라는 뜻입니다. 헌재는 자정까지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인정해 오히려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한다는 지적에 대해 “국민의 주거 및 사생활의 평온, 우리나라 시위의 현황과 실정, 국민 일반의 가치관 내지 법감정 등을 고려해 입법자가 결정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국회의 입법 영역으로 남겨뒀습니다. 그러나 국회가 보완 입법 요구에 응하지 않아 현재 집시법에는 야간집회에 관한 법률 규정이 사실상 없습니다. 그저 자정까지의 야간집회를 원칙적으로 허용할 뿐이죠. (한겨레, 2023.05.22) 자, 지금까지 집시법이 현 정부에서 어떤 맥락으로 개정의 흐름을 밟았는지, 사법부는 정당과 정부의 결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 기본권을 강조해왔는지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의 집시법 개정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전)대통령 지키기 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두 정당이 발의해온 여러 개정안이 비단 집회 및 시위의 금지장소를 넓히는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정당한 개정인지, 그 필요성을 생각해볼 필요성은 있겠죠.  집시법 개정은 국민의 기본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입니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헌법에서 규정한 기본권 입니다. 이는 헌법 제21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죠. 그러나 헌법은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 또한 명시합니다. 헌법 제35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고 있죠. 이처럼 집시법 개정은 정당간 입장 뿐만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이 결부되었다는 점에서 사법부와 정치권 간의 입장이 갈리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집시법 개정과 기본권 충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집시법 개정은 결국 기본권을 침해하는 결말을 낳을까요? 나아가 집시법 개정은 정말로 필요할까요? 댓글로 여러분의 의견을 가감없이 들려주세요! ?‍♀️ 지난주부터 재점화된 집시법 개정의 가장 최근 논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찬반입장과 찬반집단이 보다 명확히 정리되어 있으니, [투표]를 통해 여러분의 의견을 드러내주셔도 좋겠습니다!
캠페이너분들께 도움을 요청하는 글. -외국인 가사노동자와 관련하여-
안녕하십니까. 항상 캠페이너분들의 여러 글을 보며 감탄하지만 덧붙여드리거나 공유해드릴 지식이 부족해 늘 댓글은 별로 달지 않는 캠페인즈 유저 개똥_민들레입니다.   오늘 저는 다음의 뉴스를 보고 속이 차올라 후다닥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돌봄-저출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간 이슈된 정책 논란들을 조합해 비판하고 돌봄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내용의 글을 쓰던 도중 어떤 고민에 부딪혔고 그 고민에 대해 반박을 해내지 못해 대신 이같은 도움을 구인하는 글을 써봅니다. (혼자 자료를 찾는 게 맞겠지만 한 번 패배하니까 도무지 그럴 의지가 안 서는군요).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고용을 한국의 저출산 대책으로 쓰겠다는 조정훈 의원의 주장을 저출산에 효과 없음으로 반박하거나, 국제적 상황서 말도 안 되는 결례를 범하는(특히 최저임금을 안 준다는 것이) 발상이라거나, 여성의 노동권을 위하는 척하며 여성의 가족화 권리를 외면하기에 문제라던가- 그런 식의 반박은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럼 최저임금 잘 주고, 4대 보험 등 노동 조건 잘 챙겨주고, 한국인 여성도 그걸 원하고 외국인 여성도 가사도우미로서의 자신을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사용 가능한 노동력으로 쓰고자 하며 노동기간이 끝나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에 학대가 없도록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감시와 예방책에 최선을 다한다면 문제없겠네?”라는 재반박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러한 재반박의 실현 가능성 없음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어떤 대안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는 건 그것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뜻이므로 정의나 윤리적 차원의 비판으로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제3세계 담론 등 이른바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여 국제적 차원의 정의를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 담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생활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이 우려됩니다. ‘가졌고, 여유가 있는 자’가 정의나 도덕을 논하며 ‘가지지 못하고 여유가 없는 자’의 노동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인가- 이런 뉘앙스의 우려인데, 이 우려를 스스로 반박하지 못하는 게 방금 오후부터 너무 답답하네요. 답답하다는 건 그것을 반박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이 반박의 필요를 확신하는 제 근거가 무엇일지, 만약 이게 자동적인 PC(정치적 올바름) 반응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다다를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이 고민을 여성에 대한 억압 정치의 세계화 차원으로 넓혀서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 외국인 남성 가사도우미는 괜찮은 것이냐-”라는 반박에 또 넘어졌습니다. 어떤 제도의 금지를 ‘~하기 때문에(제재, 처벌)’와 ‘~하기 위해서는(우회, 다른 길, 더 나은 사회)’로 구분했을 때, 지금 제 고민은 전자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는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고민의 답을 문장으로 뱉었을 때,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도입은 ~하기 때문에 안 된다!”인데, 대체 뭐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지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네요. +여기서 '가족화'란 다음의 인용문 참고(김윤태 엮음, 송다영, 2016) “여성의 노동자화를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가족화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사회권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적정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사회권이라면 임신·출산·양육의 시기에 절대적으로 아동을 돌봐야 할 때 ‘유급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또는 자유)’가 바로 사회권의 핵심이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을 돌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가족권이 노동권과 함께 동반되어야 하겠다. 육아휴직의 제도화, 실질적 소득대체율 보장, 기타 돌봄을 위한 가족휴직 제도화 등이 그것이다. 성 평등 복지국가에서 성 통합적 정책의 핵심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가족을 돌볼 수 있는(또는 가족과 개인의 안녕과 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는) 자유가 성별에 관계없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p319~p320 물론 내일이면 다시 기력을 찾아 여러 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보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도 패배감이 심해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지혜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요?
우리에겐 새로운 '러다이트'가 필요하다
얼마 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한 웹툰이 'AI로 자동 생성한 이미지를 사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독자들은 웹툰의 컷을 하나하나 캡처하여 게시물에 첨부하면서, 작화가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거나 표현이 생략된 부분을 지적했다. 논란이 일자 제작사 측에서는 해당 웹툰의 1화 말미에 해명문을 덧붙였다. 'AI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후보정에만 AI를 사용한 것'이라는 내용이었으나 비판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국내에서 인공지능 윤리가 뜨거운 감자로 촉발된 건 2021년 이루다 AI가 등장하면서였다. 당시 스캐터랩에서 개발한 이루다 AI가 공공연하게 차별과 혐오 표현이 포함된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인공지능 윤리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공지능 윤리는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개발사의 몫이었다. 개발한 AI 서비스가 차별, 혐오 표현을 발신하는지 검수하는 것, 개인들의 데이터를 AI 학습에 사용할 때 충분한 동의를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 등이 'AI 윤리'로서 논의되었다. 2022년 인권위에서 발표한 <인공지능 개발과 활용에 관한 인권 가이드라인>도 △인간의 존엄성 및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 보장, △투명성과 설명 의무, △자기 결정권의 보장, △차별금지, △인공지능 인권 영향평가 시행, △위험도 등급 및 관련 법제도 마련 등 대체로 개발사들이 준수해야 하는 항목을 명시하고 있다. 사용자에게로 확대되는 AI 윤리 그러나 최근 인공지능의 윤리적 이슈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웹툰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AI 서비스를 이용한 웹툰 제작사는 AI 개발사가 아니라 AI 서비스를 활용한 사용자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AI를 사용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 여론을 형성한다. AI 윤리는 확실히 기존까지 흐르던 방향과 다소 다른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AI 윤리는 비단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테크 기업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용자들도 그 활용 목적과 범위에 따라 AI 윤리를 요구받는다. AI 서비스의 사용자는 매우 다양하다. 그저 재미 삼아 AI 서비스를 돌려보는 개인일 수도 있고, AI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혹은 AI 서비스를 이용해 인건비를 절감하려는 고용주일 수도 있다. AI를 누가,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AI 윤리는 제각기 다른 양상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다른 양상이라 해서 경중마저 다르게 매겨지는 건 아니다. 개인이라 하더라도 AI 서비스를 이용해 심각한 수준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인의 얼굴 사진을 이용해 성 착취물을 제작하여 유통하는 딥페이크 범죄 등이다. 이는 물론 윤리만이 아니라 명확히 사법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영역이지만, 이 외에도 미드저니 등 이미지 생성 AI를 통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생성하는 것 등 윤리적 차원에서 논의가 필요한 이슈가 많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논의가 절실한 영역은 AI 서비스를 통해 고용의 영역을 축소하는 사업주에 대한 윤리다. 한 뉴스 기사에 따르면, 중국에 위치한 게임 회사는 생성형 AI 서비스의 출시에 따라 사내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대거 해고했다고 한다. 해고 대상이 된 일러스트레이터는 AI로 인해 해고되었다는 내용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지난 5월 2일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미국작가연합(WGA)이 돌연 파업을 선언한 일도 이와 관련이 있다. 파업 안건 중 하나가 ‘AI 사용에 대한 가드레일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제작사가 시놉시스나 시나리오를 AI로 먼저 제작한 후, AI의 결과물을 수정하도록 지시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창작 전반을 담당했던 이전과 달리 수정만을 맡게 되면 노동의 범위가 축소될 뿐만 아니라 보수 역시 더 낮아진다. AI 서비스를 이용해 작업물의 기초 안을 만든 후 창작자들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일은 국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발견된다. 근래 연구를 위해 진행하는 질적 인터뷰의 참여자 중 일부는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로 제작한 일러스트를 수정해 달라는 일감을 의뢰받았다고 답변했다. 본래 일러스트레이터가 전체적으로 그림을 기획하고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기획 단계는 미드저니를 통해 제작사에서 수행하고 이후 그림을 매끄럽게 만드는 수준의 작업만을 청탁받았다고 했다. 기술로 인한 노동 대체? 기술을 내세운 해고 AI 서비스를 이용해 특정한 프로덕트를 만들어 내는 사업주에 대한 윤리는 아직 모호하다. 실제로 일감이 축소되거나 해고하는 사례가 SNS에 계속 공유되고 있지만, ‘기술로 인한 노동 대체'라는 용어로 사업주의 책임 소재는 교묘하게 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가냐'는 비아냥이 따라붙곤 한다. 물론 이 시점에서 러다이트를 호출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러다이트를 그저 ‘기계 파괴자'로 호명하는 건 아니다. The NewYorker에 Ted Chiang이 기고한 칼럼처럼, 러다이트는 반기술 운동(anti-technology)가 아니라 경제적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이었다. 그의 칼럼 일부를 소개한다. The Luddites did not indiscriminately destroy machines; if a machine’s owner paid his workers well, they left it alone. The Luddites were not anti-technology; what they wanted was economic justice. They destroyed machinery as a way to get factory owners’ attention. The fact that the word “Luddite” is now used as an insult, a way of calling someone irrational and ignorant, is a result of a smear campaign by the forces of capital. 러다이트는 기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지 않았고, 기계의 소유주가 노동자에게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면 기계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러다이트는 기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의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공장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계를 파괴했습니다. '러다이트'라는 단어가 비이성적이고 무지한 사람을 부르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은 자본의 세력에 의한 명예훼손 캠페인의 결과입니다 ‘기술로 인한 노동 대체'라는 말은 현재의 노동 변화를 마치 기술을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지금 물밀듯 들어오는 AI 서비스는 개개인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사업주에게는 이를 명분으로 한 자유로운 해고 권한을 쥐여주었다. 언젠가 ‘대체'될 노동이라 하더라도, 노동자에게는 이후를 준비할 시간과 공적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사업주에게 ‘AI 윤리'를 요구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공지능 시대, 우리에게는 새로운 ‘러다이트'가 필요하다. AI 서비스의 안전한 착륙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더 신속한 기술 발전이 아니라 기존 노동자들의 안전한 존속과 이동을 돕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AI 윤리’는 노동 윤리와 떼어 낼 수 없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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