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항상 캠페이너분들의 여러 글을 보며 감탄하지만 덧붙여드리거나 공유해드릴 지식이 부족해 늘 댓글은 별로 달지 않는 캠페인즈 유저 개똥_민들레입니다.
오늘 저는 다음의 뉴스를 보고 속이 차올라 후다닥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돌봄-저출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간 이슈된 정책 논란들을 조합해 비판하고 돌봄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내용의 글을 쓰던 도중 어떤 고민에 부딪혔고 그 고민에 대해 반박을 해내지 못해 대신 이같은 도움을 구인하는 글을 써봅니다. (혼자 자료를 찾는 게 맞겠지만 한 번 패배하니까 도무지 그럴 의지가 안 서는군요).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고용을 한국의 저출산 대책으로 쓰겠다는 조정훈 의원의 주장을 저출산에 효과 없음으로 반박하거나, 국제적 상황서 말도 안 되는 결례를 범하는(특히 최저임금을 안 준다는 것이) 발상이라거나, 여성의 노동권을 위하는 척하며 여성의 가족화 권리를 외면하기에 문제라던가- 그런 식의 반박은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럼 최저임금 잘 주고, 4대 보험 등 노동 조건 잘 챙겨주고, 한국인 여성도 그걸 원하고 외국인 여성도 가사도우미로서의 자신을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사용 가능한 노동력으로 쓰고자 하며 노동기간이 끝나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에 학대가 없도록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감시와 예방책에 최선을 다한다면 문제없겠네?”라는 재반박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러한 재반박의 실현 가능성 없음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어떤 대안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는 건 그것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뜻이므로 정의나 윤리적 차원의 비판으로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제3세계 담론 등 이른바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여 국제적 차원의 정의를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 담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생활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이 우려됩니다. ‘가졌고, 여유가 있는 자’가 정의나 도덕을 논하며 ‘가지지 못하고 여유가 없는 자’의 노동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인가- 이런 뉘앙스의 우려인데, 이 우려를 스스로 반박하지 못하는 게 방금 오후부터 너무 답답하네요.
답답하다는 건 그것을 반박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이 반박의 필요를 확신하는 제 근거가 무엇일지, 만약 이게 자동적인 PC(정치적 올바름) 반응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다다를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이 고민을 여성에 대한 억압 정치의 세계화 차원으로 넓혀서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 외국인 남성 가사도우미는 괜찮은 것이냐-”라는 반박에 또 넘어졌습니다.
어떤 제도의 금지를 ‘~하기 때문에(제재, 처벌)’와 ‘~하기 위해서는(우회, 다른 길, 더 나은 사회)’로 구분했을 때, 지금 제 고민은 전자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는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고민의 답을 문장으로 뱉었을 때,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도입은 ~하기 때문에 안 된다!”인데, 대체 뭐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지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네요.
+여기서 '가족화'란 다음의 인용문 참고(김윤태 엮음, 송다영, 2016)
“여성의 노동자화를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가족화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사회권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적정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사회권이라면 임신·출산·양육의 시기에 절대적으로 아동을 돌봐야 할 때 ‘유급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또는 자유)’가 바로 사회권의 핵심이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을 돌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가족권이 노동권과 함께 동반되어야 하겠다. 육아휴직의 제도화, 실질적 소득대체율 보장, 기타 돌봄을 위한 가족휴직 제도화 등이 그것이다. 성 평등 복지국가에서 성 통합적 정책의 핵심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가족을 돌볼 수 있는(또는 가족과 개인의 안녕과 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는) 자유가 성별에 관계없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p319~p320
물론 내일이면 다시 기력을 찾아 여러 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보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도 패배감이 심해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지혜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요?
코멘트
3사실 읽으면서도 뚜렷한 대안이 떠오르지는 않는데요.... 여기에 남겨주시는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지혜를 얻어보겠습니다.
조정훈 의원이 해당 법안을 처음 발의했을 때도 굉장한 비판을 받았었는데요. 비판을 받았음에도 아직까지도 같은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비판을 수용할 뜻이 없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이네요.
개인적으로 딱 부합되는 사례는 아니지만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논리의 반박 사례로 가정폭력 범죄가 겹쳐져 보였습니다. 수많은 가정폭력 범죄 사건에선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을 옹호합니다. 양측의 동의로 인해 가해자를 체포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가정폭력의 반복, 심화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정폭력 범죄의 경우 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의무체포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저는 이 논문(링크)을 참고했습니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존중은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자기결정권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죠. 하지만 가정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모두 보장해주었을 때 2차 피해 발생으로 이어진 것처럼 조정훈 의원과 같은 사고방식이 현실로 도달했을 때 벌어질 일들도 우려하는 바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실존하는 국가입니다. 최근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에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답변이 절반을 넘겼습니다.(링크) 이런 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차별없이 가사노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최저임금 100만 원'이란 차별을 이주노동자에게만 두는 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현실인데 차별 없는 노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수많은 제조업 직종에서 고용관계의 갑을 구조로 이주노동자들이 당했던 과거와 현실의 차별 사례의 반복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당사자의 동의가 있었으니 괜찮다'는 논리로 이주노동자 차별을 합리화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유아 교육 전공의 지인은 돌봄의 수요자로서 아동의 입장을 제시하며,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탁아가 아닌 교육으로서의)보육의 전문성이 과연 아동의 그 섬세한 발달 과정에 맞춰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초래할 엄청난 미래 위험을 지적했다. 참 감사한 지인이다.
동시에 그의 지적 이면에는 국내 보육 전문가들의 일자리 및 노동권 문제가 녹아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