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에 열광한 구 동독 지역 사람들
최근 독일의 선거에서 특이한 결과가 나왔다. 구 동독 지역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가 큰 지지를 받은 것이다. 지역마다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호남과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양분화 된 결과는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독일 결과가 놀라운 건 왜 극우 정당이냐는 것.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구 서독 지역과 구 동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가 여전히 심하다는 것. 물가와 임금 등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고, 그때문에 구 동독 지역 사람들은 서독 지역 사람들과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
둘째, 난민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는 것. 메르켈 총리 당시 이백 만이 넘는 난민을 수용한 결과 구 동독 지역 사람들이 오히려 소외를 겪었고, 극단적으로 난민에게 터전을 뺏기는 지경까지 갔다는 것. 이에 대한 반감으로 “난민은 약탈자, 난민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AfD에 표를 줬다는 것이다.
양극단이 비단 독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 선거 결과는 외부적으로는 하나가 됐을지라도, 내부적으로는 하나가 되지 못한 독일의 현실을 보여준다. 남의 나라 선거 결과를 보면서, 서로가 극단적으로 달랐던 집단 간의 융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함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우리나라야말로 정치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 수도권과 지방 갈등, 빈곤층과 중산층 갈등, 근로자와 고용주 갈등, 노인층과 젊은층의 갈등, 종교 갈등이 만연한 나라다. 개인적으로 요즘에는 ‘역사관 갈등'도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러한 갈등은 인식 정도에서도 나타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올해 3월에 발표한 <2023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회갈등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하고 있었다. 사회갈등 인식률을 높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① 보수와 진보(82.9%), ② 빈곤층과 중상층 (76.1%), ③ 근로자와 고용주 (68.9%), ④ 개발과 환경보존 (61.4%), ⑤ 수도권과 지방 (56.8%), ⑥ 노인층과 젊은층(55.2%), ⑦ 종교 (42.3%), ⑧ 남녀(42.2%)
위 내용은 “갈등 정도가 어느 정도 심하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 ‘약간 심하다'와 ‘매우 심하다'는 응답자의 비율'이다. 특히 보수와 진보 등 정치 이념 갈등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또다른 통계에서는 이런 이념 갈등이 서로를 마주치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12월에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조사 및 대응방안(X) - 공정성과 갈등 인식>에 따르면, 전체 조사 응답자 중 58.2%가 “정치 성향이 다른 이와 연애・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33%는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지인과 술자리에 참여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으며, 71.4%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함께 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한국, “나와 다르면 마주치기도 싫다"
통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마주치기도 싫다.” 이다. 우리니라 국민 중 절반 이상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앞서 “심각하다"고 답변한 갈등이 더욱 심화될 뿐이다.
이렇게 갈등만 심해서, 과연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과 양극화,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정말 의문이 든다. 불평등, 양극화, 기후위기 모두 공동체 문제다.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공동체가 없다는 게 통계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서로 마주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알아가야 한다. “이런 삶도 있구나, 저런 삶도 있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이, 저렇게 사는 사람이, 이런 삶에서는 저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혹은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구나.”를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감청하는 사람들
과거 구 동독에는 이렇게 <타인의 삶>을 감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의 신념이 곧 자신의 신념인 비밀경찰들이다. 이들은 자국민들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감청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사상적 오류가 발견되면 곧바로 자택에 침입해 감옥으로 보냈다.
비즐러는 동독 비밀경찰로, 경찰대학에서 자신이 직접 심문한 사례를 들려주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무표정의 비즐러는 학생들에게 “최소 40시간 정도 잠을 재우지 않는 강도 높은 심문을 해야한다.” 라며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진술 내용이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되며, 분노하지도 않고, 오히려 슬퍼한다. 때문에 이런 결정적 증거를 잡았을 때가 더욱 강도를 높여야 할 때”라고 가르친다.
40시간을 재우지 않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나요?” 라는 학생의 질문에 “사상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악랄하다."리며 “여러분은 도청이란 작업에서 항상 사회주의의 적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적들보다 더 악랄해 져야 한다는 의미다.
당에 대한 충성만이 가득한 비즐러에게, 그의 상관이자 친구인 ‘그루비츠'는 ‘햄프셔 장관'이 참관하는 연극에 가자고 한다. 햄프셔 장관은 일찍이 문화계를 ‘정화'했다고 평가받는 권력자다. 그루비츠의 권유로 간 극장에서 비즐러는 서독에서도 명성 높은 극작가 ‘드라이만'이 만들고, 그의 애인인 배우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은 연극을 관람한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의심스럽다며 감시가 필요하다고 그루비츠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감시를 자청한다. “예술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 모두의 신념이 같을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낸 드라이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햄프셔 장관은 이를 승낙하고, 그 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도청 장치를 설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도청한다.
친구들과의 대화, 생일 파티에서의 작은 말다툼, 애인 크리스타와의 육체 관계, 옆집 아줌마에게 한 “넥타이 좀 매주실래요?” 라는 말,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자신에게 한 말 등등 드라이만이 말하고 듣는 모든 것들은 감시되고, 도청되며, 기록된다. 당연히 드라이만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음악을 진정으로 들은 사람이, 과연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감청이 경청으로
비즐러는 자신의 부하와 교대하며 밤낮없이 드라이만을 감청한다. 그러던 어느날 드라이만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의 정신적 지주인 스승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의 스승은 문화계 명성이 높은 연출가였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찍혀 더이성 연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라이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수화기를 내려 놓는다. 스승의 죽음에 비참해진 드라이만은 피아노에 앉아 과거 소련의 레닌이 “이 음악을 계속 듣고 있으면 혁명을 완수할 수 없을 것.” 이라고 했던 베토벤 소나타 제 23번, ‘열정'을 연주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애인 크리스타에게 말한다. “이 음악을 진정으로 들은 사람이 과연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표정 하던 비즐러에게 약간의 표정 변화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스승의 죽음으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잃었던 드라이만은 피아노 연주 이후 다시 글쓰기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를 감청하던 비즐러도 감청의 내용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동독 정부가 숨기는 ‘자살자 수' 통계 발표에 대한 비밀 대화를 공동 작품 집필로 둔갑시키고, 서독 인사와의 불법 내통에 대해서도 “이번만 눈 감아주지.” 라며 넘어간다. 상관인 ‘그루비츠'에게도 “정황이 없는 것에 밤낮 허비하고 싶지 않다. 혼자서 하고 싶다.”며 허위로 보고한다.
비즐러에 대한 그루비츠의 의심은 점차 커지고, 증거를 잡아 오라는 상부의 압박도 거세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한 특단의 조치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게 이루어지고, 그 중심에 있던 비즐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어떤 선택인지는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가 느낀 감정을 느끼는 것
표정처럼 감정도 없을 것 같은 비즐러는 감청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 중간 비즐러는 아무도 없는 드라이만의 집에 혼자 들어간다. 이유는 없었다. 도청 설치와 내부 조사를 위한 긴박함과 긴장감이 없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비즐러는 거기서 시집 한 권을 가지고 나오고, 그 시집을 소파에서 누워 읽는다. 사랑에 대한 시였다. 영화에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비즐러는 그 시를 읽으며 자신만의 사랑에 대한 상상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비즐러는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존경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동독이라는 감시환경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것인지를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아마 이것이 그가 했던 어떤 선택의 이유일 것이다.
듣기만 해도 이해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비즐러는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듣고 지켜봤다. 감청과 감시가 목적이었다 했을지라도, 그저 듣고 보는 행위만으로도 그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갔다. 비즐러의 그런 모습은 갈등이 심화되고, 나와 다른 사람은 마주치기 조차 싫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는 것, 우리에게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이라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야한다는 것. 서로간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놓고 서로의 입장만 계속해서 이야기 해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내가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느낀점이다.
개인적으론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경계없이 모여 안전하다는 느낌아래 서로의 생각과 경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민사회와 시민단체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싶다.
정치적 이념과 경제적 이득에 치우진 정부나 경제, NGO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직면한 공동체 문제에 주목하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자는 그런 시도 말이다. 그런 대화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를 회복하고, 공동체가 직면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아닐까 싶다.
광교를 사이에 둔 세 개의 국기
여담이지만 지난주 일요일(10월 6일) 서울 종각역 일근에서 세 개의 국기를 봤다. 종로타워빌딩 인근 광교를 사이에 두고 두 집단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국기가 펄력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였다.
각자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십중팔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에 관련된 것이리라. 광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이념과 생각으로 펄럭이는 국기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풀려야 되는 갈등이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갈등은 어딜가나 있다. 비극적인 건 그 피해를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치른다는 것이다. 부디 잘 해결되어, 더이상 무분별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코멘트
1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