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그래서 떠났어”
최근 개봉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는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계나는 편도 2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을 견디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다. 계나는 해 뜨기 전 출발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매일매일 열심히 뛰어서 버스에 탄다.
버스가 회사까지 가면 좋으련만, 그녀는 몇 번의 환승을 거쳐야만 회사에 갈 수 있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또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서 온 회사지만, 출근하자마자 드는 생각은 “집에 가고 싶다.”이다. 직장 생활도 맞지 않는다. 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며 자격 미달의 업체를 선정하라는 상사에게, “자격 미달의 업체를 걸러내기 위해 공개 입찰을 하는 거예요.”라며 맞선다.
부당한 상사의 지시에 계나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말은 “퇴사하겠습니다.” 물론 진짜 퇴사는 아니다. 상사의 기를 꺾으려는 것. 팀장 역시 갑작스럽게 팀원이 퇴사하면 인사고과에 좋게 반영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던 말이다. 결국 계나는 팀을 옮기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하지만 계나의 고민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 집은 이사가는 데 적금 깨서 돈 좀 보태달라고 한다. 남자친구와 그의 부모님들은 계나의 사정을 아는지 자꾸 동정한다. 더구나 한국의 겨울은 너무도 춥다. 보일러 안 되는 집에 이불을 아무리 감싸도 추위는 봄이 와야지만 누구러진다. 하지만 이는 계절의 변화일 뿐. 다른 의미에서 계나에게 봄날은 올 기미가 없다.
결국, 계나는 선택한다. 한국을 떠나기로. 저 멀리 남쪽의 따뜻한 나라로 가기로. 시급 높고, 날씨 좋고, 직업과 가진 것으로 판단 안 하는 나라로 가기로. 새로 시작하기로. 그녀의 독백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 못 살겠어서.’”
서울에 사는 것도 스펙이야
6년 전이다. 대학내일에서 유튜브에 한 영상을 올렸다. 제목은 <서울로 취직한 지방러의 속마음>. 2분 30초 남짓의 영상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두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 “민영아, 서울에서는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월급이 반토막 난다? 그러니까 나는 서울 사는 동기보다, 반밖에 못쓰고 못 모은다는 거지. 서울에서 태어나는 거 그거 진짜 좋은 스펙이더라.”
- “우물 안 개구리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거든? 근데 그 우물이 생각보다 안전하고 따뜻했구나 싶은거지. 여기서 안 내려가고 버티면, 나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6년 전, 처음 저 영상을 보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친구들과 한창 대화를 나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각기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내 친구들은 자신들이 내는 월세가 얼마인지, 공과금이 얼마인지, 생활비가 얼마인지 등 숨만 쉬어서 나가는 돈을 소리 높여 말했다. 가볍게 세 자리가 넘어갔다.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초년생들이 내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 금액을 내 친구들은 대학생 때부터 꼬박꼬박 미루지 않고 냈다. 물론 그 돈을 꼬박꼬박 내기 위해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쉬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원해주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친구들의 경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자립심 강했던 친구들은, 부모에게 힘든 소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억센 사투리는 그런 말을 할 때면 화가난 듯 들리다가도, 서글프게 들리곤 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친구들은 개천에서 용난다 정도의 업적은 아닐지라도, 집안에서는 다시 없을 경사였다고 말했다. "내 새끼 서울가는구나"라며 꼭 안아줬다고. 그런 축하를 받았는데, 어떻게 집에 힘든 소리를 하겠냐고 말하곤 했다. 내 친구들에게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서울이라는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고 떨어진 낙오자를 의미했다.
친구들을 보며,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 생활이란 ‘부모에게 조차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삭히며 웃어야 하는 생활'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서울 토박이가 뭘 아나, 뭘 누리고 있는지"
물론 서울도 서울나름일 것
“서울 토박이가 뭘 아나" 라는 친구의 말이 모든 서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서울 사람이라도 거주지와 거주 형태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자가, 전세, 월세의 삶이 다르고, 아파트와 빌라의 삶이 다르고, 강남과 강북의 삶이 다를 것이다. 서울에 살아도 안락함과 안정감은 제각각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자가 보유율은 55.8%, 자가 점유율은 51.9%였다. 수도권은 서울, 인천, 경기권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울 거주자의 자가 보유율과 점유율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자가가 아닌, 전세와 월세는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내 친구들과 영화 속 계나, 영상 속 지방러의 말에 담긴 ‘서울에 사는 것도 스펙' 이라는 말은 서울에 자가를 보유한 집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국토부의 통계는 서울 사람 대부분이 이 ‘서울' 스펙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울로 모인다.
최근 한국은행은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 대응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서울 집중과 그에 따른 문제 원인을 ‘입시' 경쟁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 수혜를 일부 지역만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행, “소득 높으니 대학도 잘가더라"
한국은행 보고서를 요약하면, “서울이건, 지방이건 학생들의 능력 차이는 없다. 다만, 거주 환경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인재는 어디에나 있다. 지방 학생 수에 비례해서 학생을 뽑자. 이것이 그 어떤 경제 정책보다 효과적인 수도권 집중 현상과 서울 집 값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대학교 총장이 결단하면 된다.”이다.
사진의 모습처럼 우리나라는 수도권 특히 서울 집중 현상이 크다. 한국은행은 그 이유를 입시 경쟁으로 지목한다. 내 자녀가 나보다 더 나은 삷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교육에 투자하게 하고, 그 교육열이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이어져 집 값 상승과 사교육비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사교육비는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런 경쟁은 부모들이 직접 수능까지 접수하게 한다. 자녀가 밟고 설 밑바닥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낸 서울대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나, 서울대생 부모야.”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한편, 이러한 사교육 지출에도 상위권 대학에 가는 건 소득 분위가 높은 가정의 학생들이었다. 그 중 서울대의 경우 강남3구 거주 학생들의 진학률이 가장 높았다. 물론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 진학이 결코 사교육에만 의존해서 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 개개인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있을 수 있는 결과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고, 학생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저소득층이나 고소득층이나 사교육비 지출이 높은 가운데, 고소득층의 학생들이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건 안타깝다. 대학이 계급인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던 분노가 8년 전인데, 아직도 진행 중이다.
대학교 간판은 영원한 계급
보고서는 입시 경쟁만이 아니라, 학교 내에서의 계급화도 다룬다. 보고서는 서울대 학교 재학생들이 “지균충 기균충(지역균형전형 기회균형전형 입학생 비하)”라며 서울 외 지역에서 입학한 학생들을 비하하는 걸 직접 다뤘다.
놀랍지는 않다. 과거에도 명문 대학교 내에서 성골, 진골, 6두품 등으로 급을 나눴었다. 그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대학교 간판이 계급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너랑 나는 급이 달라.” 말로 애써 내뱉지 않는 저 말을, 마음속에는 은근히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한국은 이상하게 대학교에 집착한다. 대학원도 아니다. 학부를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서울대 대학원을 나와도, 학부가 서울대가 아니면 소위 쳐주지 읺는다. 유튜브에서 학부의 중요성을 개그 소재로 사용된다. 수능 커뮤니티에도 대학교 서열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입학하고 졸업한 대학교가 내 위치를 말해준다고, 저기에 가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걸 학생들 잘못이라 말할 수도 없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인데,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다.
기업 평가 최하위, 한국 대학생
한국은행의 보고서는 이런 계급을 올리기가 학생들의 창의성과 협동심을 줄이고, 기업의 대졸자 평가에서도 최하위를 기록하게 만듦을 보여준다. 상위권 사람의 능력이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능력은 처참하다.
창의성과 협동심이 하락한 채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기업에서 낮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어느 조직에서, 어느 프로젝트를 하던지 상관없이 중요한 건, 개인 능력보다 팀의 능력이다. 팀 능력이 좋으려면, 팀 원 간 협업이 잘되어야 하고, 타 부서와도 협업을 잘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통과 협동이 필수다. 이는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얼마나 교류했는지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창의와 협동보다, 경쟁과 계급을 배우는 지금의 구조에서 그런 능력이 키워질리 없다.
한국은행, “지역 비례 선발제로 학생들 뽑자"
한국은행은 이 문제의 대안으로 ‘지역 비례선발제'를 제시했다. 이유는 “다양성 확대"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존중하고, 협업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과도한 입시 경쟁과 서울 집중 현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방안이 허무맹랑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만큼, 지금의 현실도 허무맹랑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이없는 세상을 바꾸려면, 어이없는 대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의 대안은 개인적으로 과도한 입시경쟁과 서울 집중 완화, 다양성 확대면에서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꼭 한국은행의 대안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을 타파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고향이든, 타향이든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처지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계나는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디딛고 만난 한국 남자 ‘재인'이 “나는 지잡대 나왔어.”라고 주먹을 내밀자, “나는 홍대 나왔어.”라며 ‘나는 너랑 달라.’라는 티를 낸다. 둘 다 영어 못 한다고 현지인에게 핀잔 듣고, 같은 어학원을 다니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계나의 그런 모습은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이 자신을 동정하자 남자친구에게, “너 나랑 같은 대학교 나왔어. 나도 너처럼 서울에서 좋은 학원 다녔으면 더 좋은 대학교 갈 수 있었다고.”라고 화내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동급의 동정을 못 참는 것처럼, 하급의 동급 취급도 못 참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같은 학교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다른 학교와도 계급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 계나는 재인을 지잡대 나온 양아치로 인식한다.
몇 년이 지나 재인과 통화하던 계나는 어학원 다닐 때의 첫인상에 대해 재인에게 말한다. 양아치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지잡대 나온 양아치여서 아침까지 술 마시다가 어학원에 빠지는 줄 알았던 재인은, 남들이 잘 때 일어나 아침부터 일을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안 계나는 그제서야 진실을 알고 깨달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함께 살아가는 종족이다. 서로가 부족한 걸 채워나가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등을 맞대야 할 같은 처지다. 그런 종족에게 대학이라는 간판으로 만든 계급과 서열은 서로를 양분하여 협업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위계만 만드는 초석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현상으로 저출산과 서울 집중, 집 값 상승 등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서울이 스펙이 되지 않고, 대학이 계급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지방러 고충 영상처럼 “서울 사람 될 수 있을까.”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이 계급이 되는 순간, 어떻게든 올라가려 서울로 올라오는 현상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서울 외 모든 것이 오답이 되어 버린다. 서울이 정답이 될 수 없다. 서울만이 줄 수 있는 계급이란 것도 없다. 과거의 풀이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만 떠날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처럼 말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교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 친구에게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친구와 짧은 대화다.
“나 퇴사 했어.” (친구)
“오, 이직하게?.” (나)
“아니. 이민 준비한다. 더는 안 되겠다.” (친구)
“왜?”(나)
.
.
.
“한국이 질렸어. 이제 싫다.” (친구)
코멘트
8아직도 마음속 깊이 완전히 떨쳐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대학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기제(특히 나 자신에게)를 무력화 하는데 몇 년이나 걸렸던 것 같네요. 그것이 왜 문제인지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례들을 만나고, 그러한 상황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난 후에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존경받던 멀쩡한 선배였는데, '서울대, 연대, 고대는 나와야지 사람 노릇하지'라고 말해서 벙쪘던 기억이 있네요. 그 분은 서울대는 아니었는데, 서울대 나왔으면 연대, 고대는 빠졌으려나요? 어떤 지인은 직장에서 '너가 일 잘하는데 서울대만 나왔어도 끌어줬을텐데, 아니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봤다고 하더라구요. 그냥 하나의 장면들이고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학벌의 계급화가 작동하는 인상적인 일상의 장면들이었네요.
영화가 궁금해집니다
책 <한국이 싫어서>는 저와 제 주변 친구들의 20대를 관통했던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했어서요. 더욱 반가운 글입니다.
더 철저하고 면밀하게 계급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서울중심주의와 계급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어떻게 풀어야할지 너무 어렵네요.
마지막에 나오는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친구분의 사례가 기억에 남네요. 누군가는 한국이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지만 조금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소수의 기득권이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나라라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되네요. 유독 올해에 제 친구들도 유학이나 이민을 많이 떠났는데요. 제 친구들에게, 이글에 당사자가 되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안식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어느정도 인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