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과학분야 이번에도 한국인 수상자는 없었다
매해 10월이 되면 스웨덴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을 발표한다. 노벨상은 모든 과학자와 작가, 경제학자에게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 이후에는 한번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졌다 시피 노벨상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베르나르도 노벨'의 유엔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된다. 노벨상의 의의를 생각하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했다고 인정받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아이러니 하다. 매해 약 5만 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하는 나라가, 연구・개발(R&D) 분야에 가장 많은 예산이 집행되는 나라가, 인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한 과학 연구나 개발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논문과 예산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쓰이고 투입된 걸까.
노벨상은 기초과학 분야 수상이 높다.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은 수 십년에 걸쳐 기초과학 연구를 진행한 사람들이다. 기초과학은 그렇게 수 십년을 연구해야만 유의미한 성과가 나온다. 이러한 기초과학 예산은 정부에 의지하게 된다. 정부 예산이 없으면 연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정부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정부는 헌법에 기초해 국가를 운영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 9장 127조 1항, 과학의 목적은 경제 성장이다
국가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는 헌법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헌법에서 ‘과학'은 딱 두 번 언급된다. 헌법 ‘제 1장 22조 2항’과 헌법 ‘제 9장 127조 1항’이다. 이중 과학에 대한 국가의 역할과 목적을 담은 내용은 후자다. 헌법 제 9장 127조 1항은 이렇다.
- ①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제 9장 127조 1항)
내용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과학에 대한 정부의 역할, 둘째, 과학의 목적이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이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R&D 예산 지원과 투자, 인재 육성 등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민 경제 발전' 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적이다. 결국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내용이다. 헌법 제 9장은 ‘경제' 장이다. 국가가 무엇에 기초해 경제를 운영해야 하는지 명시한 것이다. 그 경제 장에 ‘과학' 단어가 담겨 있다는 건, 결국 과학은 경제 발전을 위한 하위 요소 즉, 도구라는 의미다. 애초 복지 증진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위한 과학이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2024년 노벨상 과학 분야, AI가 싹쓸이
잠깐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을 짚고 넘어가자. 올해 노벨상은 AI가 싹쓸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AI 분야 수상자가 많았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제외하고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모두 AI의 기초를 닦았거나, AI를 통해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은 AI 머신러닝 기법을 개발한 것을 인정 받았다. 머신 러닝은 오픈AI의 ChatGPT로 대중에게 잘 알려졌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에게 데이터를 줘서 스스로 학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머신러닝의 한 방법이 ‘딥러닝'이다. 수상자 중 한명인 ‘제프리 힌튼’은 이 딥러닝 기술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이들 기술의 파생으로 대량언어학습모델(LLM)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ChatGPT 역시 등장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는다.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AI 서비스와 산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AI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한편, 그의 제자들 역시 AI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루고 이끌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론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다. 그 역시 스승을 따라 올해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데이비드 하사비스가 설립한 구글 딥마인드는 2016년 알파고를 만들어 인류 최강 센돌 이세돌을 박살냈다. 알파고는 딥마인드 기술을 통해 수 백년 동안 쌓인 바둑 기보를 모두 학습했고, 이세돌과의 대국에선 학습한 수를 바탕으로 수 만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서 착수했다. 그 결과는 4승 1패. 이세돌에게 당한 1패를 제외하고 이후 끝까지 무패를 달성하며 은퇴했다. 이전까지 AI가 절대로 넘을 수 없다던 바둑이라는 벽을 이세돌과 커제를 박살내면서 깨부순 것이다.
물론 그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건, 알파고를 만들어 이세돌을 박살냈기 때문이 아니다. 노벨 위원회는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그 역시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원이다)가 AI 단백질 구조 예측 모델인 ‘알파폴드(AlphaFold)'를 개발했고, 그 결과 단백질 구조 예측성을 40%에서 90%로 높인 것을 수상 이유로 설명했다.
AI를 기반으로 한 단백질 설계는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고 새로운 단백질을 디자인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신약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코로나19 같은 전 세계를 패닉에 빠트리고, 수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질병으로 부터 빠르게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노벨 위원회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자 세 명에게 준 이유일 것이다.
경제 논리가 아닌 인류 복지 증진의 논리,
인류 복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AI에게 상을 준 것
이상을 종합해 보면 2024년의 노벨 위원회가 AI 연구자들에게 상을 준 이유는, 그들의 연구와 성과가 향후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질병의 발생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이 40년에 걸쳐 머신러닝 기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딥러닝 기술은 있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딥러닝이 없었다면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AI 모델은 나올 수 없었다.
만약, 이러한 기술이 없다면 향후 코로나19 같은 재앙적인 질병이 다시 발생했을 때, 인류는 또다시 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아래 노벨 위원회는 수상자들의 AI의 성과가 인류 복지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학을 인류 복지 증진으로 보느냐, 경제 성장의 도구로 보느냐가 노벨상 수상의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한국은? 돈 되는 산업에 투자하겠다며 과학 예산을 깎았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스필드가 AI 연구를 시작한 게 1980년으로 알려졌다. 약 40년 만에 성과를 인정 받은 것이다. 현재 그 성과를 기반으로 AI 기술이 사용화 됐고,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가 연구를 진행하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AI의 암흑기로 불렸다. 연구 성과는 없었고, 지원도 미비했다. 이처럼 기초 과학은 성과가 나오는 데 오래 걸린다. 그것을 기다려줄 인내와 예산이 필요하다.
과학을 경제의 도구라고 본다고 해도, 과학에 대한 예산 지원은 계속 증가해야 한다. 자원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의지할 건 기술과 인적자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 아래 우리나라는 연구개발(R&D) 예산 투자액을 1990년 이래 한번도 줄이지 않았었다. 2020년부터 매해 약 10%씩 늘려왔다. 2020년은 약 24조, 2021년은 약 27조, 2022년 약 30조, 2023년 약 31조였다.
이러한 예산 증가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현 정부부터다. 2024년인 올해 R&D 분야 예산은 25조 9천 억 원으로 2023년도에 비해 약 5조가 삭감됐다. 정부는 “약 5조 원의 삭감된 예산을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돈이 되는 첨단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단기 성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깍인 예산 5조원 중 기초연구 사업 예산은 약 1,500억 원 가량이 삭감됐다. 1억 미만의 연구가 많아 효율적이지 않다 논리였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기초분야는 기술 발전의 핵심" 이라며 “R&D 예산 삭감은 사다리 걷어차기" 라며 반발했다. 과학계가 예산 삭감을 재고할 것을 요청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분은 계속됐고, 이는 카이스트의 졸업식에까지 미쳤다.
졸업생의 몇 마디 마저 기다리지 않았다
2024년 2월, 카이스트 졸업식 당일 한 대학원생은 졸업식 축사로 참여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R&D 예산을 복원하라"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졸업식 가운을 입고 있던 정부 보디가드가 그 졸업생의 입을 틀어 막았다. 과학계의 분노가 국민의 분노가 된 순간이었다. 대통령이 한 국민의 몇 마디마저 끝까지 들어줄 인내가 없는 모습이었다. 혹은 애초 자신에게 반하는 목소리는 틀어막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애초 경제의 논리는 효율과 효과의 논리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효율과 효과로만 생각하면, 효율적이지 않고 당장 효과를 내보이지 않는 모든 건 비용이 된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기초과학 분야는 더더욱 비용으로 치부된다. 돈은 많이 드는데, 당장 효과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존 홉스필드와 제프리 힌튼이 한국인이었다면, 그들은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제에는 인내라는 게 없다. 그 논리를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과 정부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카이스트 졸업생의 입틀막 사건은 철저한 경제 논리에 입각한(그리고 최소 헌법 제 9장 127조 1항에 기초한) 대응이 아니었나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건대 과학을 경제의 도구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도, 경제 외 것을 위한 과학도 연구 개발되지 못할 것이다.
ESC(변화를 위한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 “제 9장 127조 1항 고치자”
이러한 문제 의식은 국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동의를 얻고 있다. 변화를 위한 과학 기술인 네트워크(ESC)는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도구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활용성은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경제 발전이라는 족쇄를 채워 관련이 적은 분야나 기초연구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라며 “‘9장 경제'에서 ‘1장 총강'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헌법 제 1장 총강은 법치국가로서 우리나라의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항들이 모여있는 장이다. 헌법 제 1조 ①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며 ②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9장의 조항을 폐지하고, 1장 총강으로 옮기자는 의미는 “과학을 경제 성장의 도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원리'로 삼자는 것이다.”1)
헌법은 모르겠지만, 경제 논리로만 과학을 취급해선 안 된다는 데는 동의한다
헌법을 뜯어 고치자는 주장은 내게도 조금 급진적이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이 경제의 도구로 취급되서는 안 된다는 데는 동의한다. 만약, 과학이 경제의 도구로만 활용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과학은 결국 경제 성장을 최대로 이끌도록 작동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환경 파괴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에는 투자가 적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경제의 도구가 된다면, 과학은 결국 경제 즉 돈의 논리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제를 위한 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환경 파괴, 불평등 등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이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녹자라떼처럼 지역에서 발생하는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이다. 지역적이지만, 공동체의 문제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기록해주고, 비과학자들인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해주고, 과학적인 해법을 마련하고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난 과학이 필요하고, 그러한 과학을 통해 마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이러한 과학을 인내하며 지원을 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렇게 됐을 때, 어쩌면 수 십년이 지나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며 2025년도 과학 분야 정부 예산
카이스트 졸업생 입틀막 사건이 크게 화제가 되자 정부도 이를 의식했는지 내년도 과학 분야 예산을 2023년도 수준인 29조 7천 억으로 증액했다. 40% 삭감 전 예산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증액된 예산 항목을 보면 인공지능, 바이오 등 경제에 맞춘 예산 증가폭이 컸다. 전체 예산 중 기초연구(개인 연구 지원 + 집단 연구 지원) 분야 예산은 2조 3,400억 원 수준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이것이 “역대 가장 높은 예산"이라며 강조했다. 후퇴한 걸 되돌리는데도 1년이 걸렸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 지원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생각해 본다.
*글을 올린 2024년 10월 10일(목) 오후 8시,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글 머리에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이후 수상자가 없다고 한 걸 지우려다가 그대로 남겨두고, 글 맨 아래에 한강 작가의 수상에 대해 적어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개인적으로 아주 기쁘다.
1) <사람의 자리> (전치형/ 이음/ 2019) p.190
코멘트
6"한국은? 돈 되는 산업에 투자하겠다며 과학 예산을 깎았다"
이 문장이 제일 눈에 들어오네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만 가득한 나라..
돈이 되게 한다는 것은, 아주 빠른 결실을 원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럴 수록,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들은 손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헌법에 과학 관련해서 이런 내용이 있었군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사회가 해당 영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네요. 법이 바뀌면 억지로라도 시선이 바뀌는 것처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지점인 것 같습니다.
카이스트 졸업생 입막음, 지금 들어도 어이가 없습니다.. 대통령 심기를 건드릴까 경호하는 이들 .. 근시안적 시각을 가장 지양해야 하는 사람들이 제일 근시안적인 시각이라 답답합니다.
본문에 ESC의 관점이 담겨있는데 크게 공감합니다. 과학 기술을 단순히 '돈을 더 많이 벌 기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선 팽배한 것 같습니다. 특히 반도체 분야가 한국에서 그런 시각으로 접근한 기술의 대표인 것 같고요. 수익을 쫓는 기술 발전은 결국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어떤 모습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서도 자리잡히길 바랍니다.
교육 환경의 영향이 확실히 크다고 체감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