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의 말은 엄청 인본주의적이고 또 실존을 결단할 능력이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는 울림도 주지만, 그런데 또 공동체(?)는 그런 개인에게 개입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중독성 약물에 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 규제적 접근이 곧 낙인화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검증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고, 전문가들 역시 '친원전인사'들로만 구성되었다니,, 진짜 구색맞추기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니까요;; 당연 공유해야하는 문제 같은데, 또 플랫폼이 노다지인게 돈 뿐 아니라 데이터셋들도 자산화하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도 자산화하고 있어서, 구글이나 메타 같은 곳도 그렇고, 아주 저런 생각이 상식이어서 '굳이 내가 왜 공유해야함, 우리 기술임'이라는 답이 아주 쉽게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카카오모빌리티 같은 곳도 비슷한 논란을 알고리즘 공개가 아니라, 배차알고리즘을 그들이 설립한 학회, 정확히는 카카오가 세운 재단이었나요... 그 곳의 연구진들을 통해서 검증하는 것이었죠? 허허;; 결국 공개되지는 않은거죠.
읽으며 지지난호였나요, 주간지 <한겨레21>이 생각났어요. 그 호의 특집이 챗GPT와 교육이었거든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교육현장에서의 좀 디스토피아적 전망과는 달리, 실제 실험을 해보니 학생들이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발휘해 AI를 이용했다고 전하더라구요. AI를 정보검색을 위해 활용하고, 알려준 정보를 다시 크로스체크를 한다던지 말이에요. 미디어리터러시, 또는 정보교육과 관련한 문제가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ㅎㅎ 어찌되었건 AI는 상관관계 중심의 정보처리이고, 인과/해석의 몫과 중요성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게되지 않을지, 그래서 AI가 교육현장에서 엄청 새로운 문제 보다는 미디어교육의 연장선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현금사용선택권이라니, 그렇네요. 권리의 문제였네요.. '편리한 지불형식'이 기실 누군가에게는 불편 때론 배제의 경험을 낳는다는 걸 새삼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읽었던 <사이버타리아트>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세탁기, 냉장고, 식기세척기와 같은 가전제품의 발달이 여성의 가사노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빠르게/한번에 처리해야 할 것을 요구했고, 그리고 가정 내 다른 종류의 다른 '돌봄'노동과 병행하게 (육아를 비롯하여 정서적인 차원에 관한 여성의 성역할과 규범이 강해졌다고)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과연 어케될까요. 이 기술의 발달이, 정말 해방적일지? 아니면...챗지피티들이 이제 취약한 노동을 해야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동료가 될지...?
"피해자이자 생존자, 증언자"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네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도 납작한 방식으로 재현해 그를 '피해자'로만 한정치 않으려는 장치들이 보이긴 했는데, 그게 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피해상황에 관한 재현/증언/녹취를 상쇄할 만큼 충분했는지 아쉽습니다. 이런 기록/증언/사실들이 강하게 재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은 JMS가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고, 동시에 사법/행정의 영역을 신뢰할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공론'의 영역에서 더 강한 인상/자극을 줘야 했다는 제작자의 변도, 그래서 변명보다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제작의 과정에서 생존자들과 충분한 의사교류와 그들이 결정할 시간들을 안배했길 바랍니다.
오호 개발주의가 산을 갈아엎는 이유를, 이제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의 접근성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전환시켰네요. 환경, 강산에 관한 문턱의 민주화(?)인가요. 근데,,, 그런 접근성을 말하려면, '산 까지 가는 길', 주거, 노동의 공간에의 베리어들을 먼저 무너뜨리고 부수는 일이 행해져야하지 않나요. 뭐, 직장에 나설 때, 일을 할 때, 친구를 만날 때에 일상적으로 이동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문제는 모른체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대체 2년 만에 어떤 일이 있었던거죠? 앞서 2021년 제기된 조류 등의 생태계 및 안전문제, 그리고 '보존'이 필요한 동굴과 습지, 그리고 주민의 안전의 문제가, 2023년에 이르러 마법같이 해결되었습니다(?).
"개인이 바꿀 수 있다"는 프레이즈가 진짜 멋진 것 같아요. 근데 또 개인의 생활이나 행동이 곧 곧 기업(또는 정부)의 태도를 낳는다는 식은, 같은 종류의 아포리즘 같아요. 기업이나 정부는 소비자/유권자(시민)에 반응할 뿐 아니라, 선택이 이뤄지는 조건들을 조정하며 영향을 주기도 하니까요. 개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정부나 기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후경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건 '기업이 중요해'만큼이나 좀 김빠지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생활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게 꼭 정부나 기업에 관해 말하는 일과의 대당관계 속에서(일상이냐, 구조냐~) 말해질 필요는 없겠다 싶어요~
기후정치가 여전히 어렵고 궁금합니다. 정치영역에서 기후의제가 중심으로 다뤄져야한다거나, 기후의제에 따라 '투표'하는 유권자 집단의 등장에 맞추어, 기후에 관해 말하는 정치를 상상팔 필요가 진짜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이 의제로 어떤 종류의 전선을 칠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어려워요. 의제가 중심일까요? ESG같은 것이 되려나요? (녹색)'당'일까요? 기후가 pop한 의제가 되고 있으니, 한편에서 기후문제라는 한 단어에 동상이몽도 많은 것 같아서요. 기후정치가 좋은 프레이즈라는 데에 동감도 하고 또 의문도 들어요~
진짜 어렵네요;; 비리혐의에 관해서 불체포특권이 과도한 것같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국회의원의 특권 보다는 시민의권리같기도 하구요(대의될 수 있는;;). 이런 권한이 사적 방패막이로 활용되는 것이 온당치 못한 것 같은데, 사실 그 세계(?)는 알기가 어려우니;; 진짜 어려워요.
저도 아래 댓글 달아두신 분들 처럼, 난방비 지원과 리모델링 사업이 투트랙으로 같이 진행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 아직도 이런 사람이...;; 싶다가도 여전히 먹히는(?) 전략이니 그랬겠지요?...
저는 서대문 연세로에 자주 가곤하는데, 읽으며 지난해부터 연세로의 '대중교통전용지구'(?)가 해제된 것이 생각났답니다. 대중교통/교통량/차도 등을 두고 정부가 취하는 이중의 전략이 있는 것 같아요.. 교통량이라는 문제가, 실상 환경과 연결되지만 동시에 상권활성화(성장)과의 관계에서도 거꾸로 다뤄지기도 하니까요. 여기에 보행권과 같은 논의가 다시 들어간다면, 정말 더 풀기 어려운 이해관계들이 섞인 문제임을 다시 생각해보네요. 무엇이 더 시급한지, 지금의 도시계획에서 무엇이 대안인지의 차원에서 본다면 대중교통의 확충과 차량운행/속도제한이 필요하겠죠?
"사실상 그동안 탁상공론 수준에서 논의되어 왔던, 탄소 중립을 위한 협업 내지 거버넌스라는 용법은 철저히 제한적이었다"는 지적에 너무 공감이 됩니다. 시민사회라는 공간이 헐거워질 때, 거버넌스는 아주 가벼운 의견수렴의 창구가 될 뿐이라는 게 동감이 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