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동 의원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온갖 노력을 했지만..
‘시민참여’라는 말을 꺼내기 하수상한 시절입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7월 28일 2019년부터 추진해온 성평등 문화추진단 ‘버터나이프크루’(이하 버나크)사업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부 부처의 예산이 재조정되며, 지난 정부의 사업과 정책들이 사라지거나 변경되는 일은 생경하지 않습니다. 버나크 사업의 폐지 수순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7월 4일 여당인 국민의 힘 권성동 의원이 자신의 SNS를 통해 해당 사업이 지닌 생산성, 공공성 등을 문제시한 뒤, 바로 다음날 여성가족부는 사업의 재검토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28일, 여가부는 버나크 운영사 ‘빠띠’에 사업 중단을 통보했습니다.
여기서 좀 의뭉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버나크 사업은 지난 19년부터, 그러니까 지난 정부부터 진행된 사업이지만, 올해 4기의 경우 윤석열 정부 하에서 선정 및 결재 된 바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이미 출범식까지 진행한 사업을 갑작스럽게 중단해야 할 이유란 무엇일까요? 버나크 운영사와 활동 팀 등으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해당 사업이 한마디 말로 인해 사라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갑작스런 버나크 중단 사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목된 사람, 권성동 국민의 힘 의원입니다. 그가 어떤 이야기들을 했는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의 ‘말’이 낳은 효과란 무언지를 함께 살펴볼까요?
권 의원의 말!
7월 4일, 권성동 의원은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게시합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가부 장관에게 해당 사업에 대한 문제점을 전달했다. 1) 버터나이프 크루의 활동과 프로젝트는 ‘문화 개선’에 효과가 없다. 2) ‘페미니즘’은 갈등을 만들어내는 담론이다. 3) 페미니즘이라는 일개 ‘담론’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공정성에서 어긋난다. 정권이 바뀌었고 윤 정부는 여가부 폐지를 기조로 삼고 있지만, 관성적으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해당 사업을 없애야 한다.
한편, 권 의원은 그 다음달인 8월 13일에도 재차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과 관련해 SNS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재차 밝힌 바 있습니다. 두 번째 글에서 권 의원은 “버터나이프 크루와 같은 사업은 공공성도 생산성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사업의 대상이 된 지원사업들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운동을 하고, ‘페미니즘 연극’을 연습하는 일이, 또는 성평등과 관련한 소모임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무용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권 의원은 말합니다. “연극, 운전, 운동 배우고 싶으면 자기 돈 내고 학원 다니면 됩니다. 이런 것까지 국민 혈세로 하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권 의원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노력했지만…1
- 국가는 여성의 ‘연극, 운전, 운동’을 지원해서는 안될까?
유치하지만, 이런 말들을 마주하면 하나하나 깨주고 싶기 마련입니다. 진일보한 프레이즈와 의제들이 가득한 가운데, 국회의원을 상대할 때는 고루하고 형식적인 방식일지라도 법이나 협약을 거론하는 게 쉬운 일입니다(법적 제도적 담론의 빈틈과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할 국면인 것 같은데 발딛은 현실의 지리멸렬함은 여전히 우리를 여전히 법적 제도적 담론으로 돌아오게 만들곤 합니다)). 소위 여성헌법으로 불리기도 하는 UN의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CEDAW)의 3부 제13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의 권리를 확보할 목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c) 레크리에이션 활동, 체육과 각종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한국은 1984년 해당 협약을 비준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국은 협약이행의 의무가 있는 약 40년차 당사국인 셈이네요.
국내법도 살펴봅시다. 권 의원은 세 활동, 연극, 운전, 운동을 생산활동과의 대조 속에서 문화생활로 언급합니다. 연극하고 운전하고 운동하는 건 생산이 아닌 소비이고, 생산이 아닌 문화이니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2014년부터 시행된 <문화기본법>의 ‘제4조 국민의 권리’는 다음의 내용을 명시합니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정치적 견해,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이하 “문화권”이라 한다)를 가진다.” 그리고 그 아래의 5조 1항에는 “국가는 국민의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문화진흥에 관한 정책을 수립ㆍ시행하고, 이를 위한 재원(財源)의 확충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권 의원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자유이겠지요. 그러나 법이 규정하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에는 문화활동 내에서 ‘차별’을 시정하고 소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여성의 연극, 운동, 운전을 지원해도 된다는 것이죠.
권 의원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노력했지만…2
- 왜 ‘여성의’ 운동, 연극, 운전일까?
차별을 시정해야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지 어디에 ‘여성의’ 운동, 연극, 운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냐 물을 수 있습니다. 운동, 연극, 운전에 있어서 차별이 실재하고 있냐는 것이겠죠. 이것도 참~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먼저, ‘운동’과 관련해서는 통계를 들 수 있습니다(굳이 부연하자면 연극의 경우 성차에 관한 통계 자체를 발견하기 힘들고, 운전에서의 차별은 담론적인 측면이 강해 통계로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인데요). <2021국민생활체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대 남성의 생활체육 참여율은 61.4%대 60.1%로 여성이 더 높습니다. 권 의원이 반가워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생활체육활동 중 참여율이 높은 상위 10개종목 중 팀 스포츠, 혼자서가 아닌 ‘팀’별로 할 수 수행해야 하는 스포츠, 들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축구, 풋살의 경우 남성의 13.5%가 생활체육으로 즐기고 있지만, 그러나 여성의 경우 0.4%에 불과하죠.
더불어 생활체육에 있어서의 격차는 성별에 연령코호트를 덧붙일 경우 더욱 극명히 잘 보이기도 합니다. 전 연령대를 보았을 경우 생활체육참여율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근소하게 앞서지만, 20대와 30대에만 한정했을 경우 이는 거꾸로 뒤집힙니다. 규칙적인 체육활동 참여 여부 및 빈도를 묻는 질문에, ‘전혀 규칙적인 체육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20대 남자에서 27.6%, 30대 남자에서 32.1%인 반면, 20대 여자에서 34.1%, 30대 여자에서 38.6%입니다. 한편, 체육 동호회 조직 가입 여부를 살펴볼 때에도 성별에 따른 격차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입하여 현재 활동 중이라는 응답이 20대 남자가 14.0%, 30대 남자가 15.1%인 반면, 20대 여성의 경우 6.2%, 30대 여자의 경우 5.4%에 불과합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습니다. 팀스포츠를 꼭 해야할 이유도, 체육동호회 활동을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계의 굴곡이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제한됨을 보여준다면, 아니 그 보다 오늘날 몸을 움직이는 ‘운동’의 의미, 동기가 성별적으로 굴절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증상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체육활동 참여 이유’와 관련해 ‘체중 조절 및 체형 관리’라고 답한 비율은 20대 남성이 47.8%, 30대 남성이 46.2%인 반면, 20대 여성의 경우 71.8%가, 30대 여성의 68.5%가 소위 자신의 몸무게와 몸매를 관리하기 위해 체육활동에 참여했다고 응답한 셈입니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를 가꾸고 정돈하는 일이야 중요하지만, 성평등 혼파망의 한국사회에서 마냥 있는 그대로 읽기 힘든 통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동기가 어떻게 성별화되어 있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통계이니까요.
자 그래서, 생활체육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 없다구요?
운전의 경우도 그렇죠. 자주 온라인 상에서 논란이 되곤 했던 운전사고들은 시시비비가 갈려지지 않은 채, 운전자가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미숙한 운전자인 소위 ‘김여사’의 과실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론의 심층 보도를 통해 여성 운전자가 아닌 다른 요인이 사고의 원인으로 밝혀지거나(국민일보.2020.01.22), 실제로 여성운전가 낸 사고는 전체 사고의 약 16%에 불과하기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안전한 운전을 한다는 통계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KBS.2012.06.21). 연극이요? 페미니즘 연극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 2018년 연극계 미투를 비롯한 성폭력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연극인이 예술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력 겪는 단절들, 예술생산자나 행위자의 측면 뿐만 아니라 연극예술과 관련한 문화적 각본의 편협성에 관한 이야기( “여성이 세상을 바꾸는 해피엔딩이 없다. 아니면 바꾸다가 주인공이 죽는다.”)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죠. 지난 5년간, 10년간, 20년간 말입니다.(한국일보.2017.06.26)
자, 그래서 운전과 연극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 없다고요?
이제 그 후크송을 그만 끝내야 하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동의하기 힘든 (정말 동의하려고 노력해봤는데도 어려워요) 고리들을 예시로 활용한 권 의원의 글은 결국 익숙한 돌림노래로 마무리됩니다. ‘공공성이 없다, 생산성이 없다, 세금이 아깝다’는 식입니다.
무구한 후크송들 중에서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구절이 따로 있듯, 짐짓 고루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비판의 후렴구들을 그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죠. 이는 거버넌스 사업들, 민관협력 사업들, 특정한 의제를 스스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시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정책의 빈 공간을 발굴하겠다는 정책들, ‘문화’ 또는 ‘일상’을 바꾸겠다는 많은 사업들에 자주 겨눠지기도 하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정책의 효과성을 진단하는 기존의 지표들, 특히 정량적인 지표들로 살피기 어려운 면면들을 들여다보는 정책으로 스스로를 의미화하기에 ‘대체 어떻게 그 생산성을 증명할 것인지’에 관한 의구심과 물음이란 항상 남을 수 밖에 없죠.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유행한지, 등장한지 어언 20여년 입니다. 강산이 두번 바뀔 동안 우리사회에 축적된 거버넌스의 생산성과 공공성을 측정키 위한 도구들이 무구합니다. 버나크를 비판하기 위해서 권 의원은 무어라도 분석의 틀을 가져와야 마땅하죠. 그것이 비단 행정학의 개념이든UNDP(UN개발계획)과 관련해서이든, 무엇이든지요. 부러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의 다양한 행정부처들, 지자체들 내에서 그 나름대로 거버넌스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들, 거버넌스라는 ‘성과없음이 성과인 정책’의 성과지표에 관한 연구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권 의원은 이와 같은 설명을, 개념을,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권 의원의 막무가내 식의 주장은 ‘시민’과 ‘사회’에 관한 동시대 여기의 어떤 통념들의 아카이브이기 때문인데요 -기술은 인간을 따라갈 수 없죠, 트윗봇이란 역시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었습니다-. ‘시민’과 ‘사회’는 민주당적인 것, 생산적이지 않은 것, 공공을 위한 것이기 보단 특정한 집단을 위한 것, 그래서 중단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통념 덕분에 많은 설명을 소거하고도 버나크와 같은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버나크 사태가 분노와 함께 지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를 울리는 고루한 후렴구와 후크송을 그만 끝내야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현재 집권 여당이 열어젖힌 ‘시민'과 ‘사회’에 관한 공론장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 있죠.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을 포함한 성평등 정책 정상화를 요구합니다.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