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당사자의 '연구자 운동'이라는 인식이 발전해 온 맥락, 2020년 연구자 권리 선언의 내용, 권리 선언 당시에 이루어지는 토론회에서 제기 된 쟁점들, 2023년 연구자의집 중심의 '연구자 공제회 법안' 마련 등 그간의 논의와 역사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공제회'라는 구상이 다방면으로 고민되고 시도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논의를 진전시켜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체뿐만 아니라 단체밖의 연구자들과의 소통과 연대 형성이 관건이라고 하셨는데,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들(그리고 시민들까지도) 많이 모여 논의하고 의견을 모으는 '공론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공론장은 장기간에 걸친 비동기적인 온라인 공론장부터 같은 시간에 한 공간에 모여 압축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오프라인 공론장 행사 등을 포괄합니다. 이에 대한 언론 보도 등 대대적인 홍보 및 확산도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조직의 주도적 행동과 이에 대한 당사자 집단의 지지 및 시민의 지지가 제도정치로 인입되고, 관련 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있어서의 민주적 개입까지 이루어지는 '거버넌스'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제도정치(정당과 정치인)에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연구자의 불안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자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으로서의 기본법이 아닌 공제회법 대안은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데, 글을 읽으면서 깊이 들여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로부터의 종속 가능성을 낮추는 방향일 수 있다는 점에 특히 솔깃하게 되네요. 토론회 당일날 발제 듣고 좀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
[연구자는 불안정한 삶의 조건, 학술지 논문 중심의 평가 제도, 학술전문 단행본에 대한 체계적인 경시 속에서 개인주의적 성과창출에 매몰되는 삶으로 몰리게 되어,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거나 서로의 글을 읽으며 교류·협업하지 못하는 등 체계에 종속되어 자율성을 상실한다. 즉 "'학술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요약하여 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박사제의 도입, 단행본 및 공저 논문집에 대한 평가 개선, 대학출판부 역할 강화 및 학술전문출판 영역의 확대, 서평논문에 대한 평가 개선을 대안으로 제시해주셨는데, 상호비평 및 협업 등이 이루어지는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현 상황에 대한 인식 및 해결 방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위에 정리한 내용 외에 다른 부분에도 눈길이 갑니다. 인문학/이론적 연구들이 의제/삶과 유리되어 있고 대중적이지 않아 위기라는 진단에 반대하시면서, 인문학이 '삶을 위한' 것이 되고 있는 것이 되려 위기의 한 모습이라 말씀하시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저의 경우 이론과 연구가 현장과 괴리되어 훈고학적 경향이 강화되거나 대중적으로 주목 받지 못해 사장되는 것을 아쉬워 하며 '현장·실천과 만나는 이론·연구'를 강조하며 그것의 가장 생산적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반대의 경향으로 이해 될 수도 있는 서술인지라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져서 더욱 깊이 읽고자 애썼습니다.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부분 등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이 글은 일단 같은 연구자분들을 대상으로 중요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제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읽으면서, 혹시나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혼자 괜히 걱정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문학/이론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심층적인 이해 속에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제도정치적 필요/사회운동적 필요/시민적 필요/대중적 필요 등 다양한 층위의 집합적/개인적 행위를 통해 가능성을 실현 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연결 될 때에 그 존재를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구조에 의해 생존을 위해 강제되는 성과지상주의라는 조건 하에서의 인문학의 ‘삶을 위한’ 대중화는 위기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과 만나고 시민과 만나는 비판적 인문학/이론의 필요와 중요성 그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고, 분리해내야만 인문학/이론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인정, 이와 관련된 제도적 조치들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들이 집중해서 연구 할 수 있는 조건의 마련, 연구자들간의 상호비평 및 생산적인 협업만큼이나 그 이론적 진전의 시민적/대중적 지지 확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코멘트가 본 글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 있지만 제 관심사인지라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댓글을 남깁니다.
"시민 참여를 확대, 심화함으로써 전통적인 대의제 정치를 쇄신, 재구성하기 위한 제도, 과정, 운동"을 '민주적 혁신'으로 규정하고, "무작위 추첨 원리에 기반해 구성된 시민들의 의사소통적 토의를 통해 합당한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다양한 숙의적 미니공중들"에 주목하시면서, 참여예산제, 열린민회, 공론조사, 시민의회 , 시민발의, 시민투표 등의 사례를 들어주시는 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말씀하시는대로 대의민주주의제도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 참여, 숙의 기제들을 적절히 연계한 하이브리드 모델"에 주목하자는 차원임에도 공감하게 됩니다. 이는 시민자력화의 관점에 서야 한다는 점, 대의제 정치와의 연계,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연결, 전체 공중과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에도 공감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참여의 증대에 의한 정치의 혁신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반정립(직접민주주의?)로 이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분법적 대립이 정치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참여'에 '숙의'라는 개념이 필수적으로 붙어 있어야 할 것 같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공론장'과 '거버넌스' 등을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소개해주신 사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빠띠가 만들어가는 플랫폼 '데모스X(링크)'와 이 글이 올라온 플랫폼 '캠페인즈(링크)'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참여적 숙의민주주의/역동적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자리매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민 참여를 확대, 심화함으로써 전통적인 대의제 정치를 쇄신, 재구성하기 위한 제도, 과정, 운동"을 '민주적 혁신'으로 규정하고, "무작위 추첨 원리에 기반해 구성된 시민들의 의사소통적 토의를 통해 합당한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다양한 숙의적 미니공중들"에 주목하시면서, 참여예산제, 열린민회, 공론조사, 시민의회 , 시민발의, 시민투표 등의 사례를 들어주시는 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말씀하시는대로 대의민주주의제도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 참여, 숙의 기제들을 적절히 연계한 하이브리드 모델"에 주목하자는 차원임에도 공감하게 됩니다. 이는 시민자력화의 관점에 서야 한다는 점, 대의제 정치와의 연계,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연결, 전체 공중과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에도 공감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참여의 증대에 의한 정치의 혁신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반정립(직접민주주의?)로 이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분법적 대립이 정치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참여'에 '숙의'라는 개념이 필수적으로 붙어 있어야 할 것 같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공론장'과 '거버넌스' 등을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소개해주신 사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빠띠가 만들어가는 플랫폼 '데모스X(링크)'와 이 글이 올라온 플랫폼 캠페인즈(링크)'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참여적 숙의민주주의/역동적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자리매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익부 빈익빈’ 경제구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기술진보’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지역불균등 발전’에 대해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시민적 차원의 대안적 실천이 필요하다"
저는 이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지역불균등발전은 오래도록 문제제기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최근에 와서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노동조건의 변화 맥락 속에서 '기술진보'가 좀더 특수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진보'에 대한 대응도 시민사회와 노동의 차원에서 지금보다 좀더 치열하게 논의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건전한 인간의 행동과 사상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사이의 균형 위에 서야 한다. 사건의 인과적 전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절대적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인과적 전개를 부정하는 절대적 이상주의자는 자신이 변경코자 하는 현실과 그 변경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상주의의 결점은 순진함이다. 현실주의자의 결점은 황폐함이다.”
마지막 이 문단은 백배 공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각자의 생각이나 위치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서로의 구체적인 생각들에 대해 어느 한쪽에 치우쳤다고 평가하기 쉽겠지만,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같이 대화를 나눠야만 집단적인 인식 차원에서 간극을 좁히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후정치를 기후위기에 관한 정치, 기후위기로 인한 정치변화, 기후위기 속 정치의 재구성이라는 다차원적 접근으로 이해함으로써, 기후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다양한 방식의 정치참여의 계기가 형성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인식의 필요가 제기되고, 정치의 주체와 의제가 확장되고 있는 상황을 읽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요약하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핵심 키워드로 제시해주신 “기후위기, 탈성장, 존재 다양성, 내각제 개헌(정당책임제)”를 좀더 되새겨 봐야겠습니다. 발표 전문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뻔한 반응중 한 가지일 수 있겠지만 저를 항상 괴롭히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론과 논리상으로는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데,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좀더 구체적인 제안들을 해주고 계시지만 그것은 말씀하신 전략들을 실체로 구축하기 위한 전략으로 여겨집니다. 기후위기는 제한 시간이 촉박한 일로 이해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여러 민주주의와 관련되어 형성된 제도정치적 조건들 하에서 국가적 차원과 지구적 차원의 대응을 급속히 진전시켜야 하는 과제 앞에 장애물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 비관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 조건들 하에서, 특히 시간적 제약이라는 조건을 유념하면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의 간극,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간극을 좁히며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실천은 어떤 것일까요? 그런 고민을 계속하게 됩니다. 양당제의 한계 속에서 비례대표제로 나아가는 것이나 내각제 개헌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향해야 하는 일일 수 있지만, 당장 변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양당제 하에서의 급진적 조치를 추동하는 실천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사회적 대화나 거버넌스 제도 하에서 가능한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하고 사회운동은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급진화 되도록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등 여러 생각들이 들게 됩니다.
기후위기를 고민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가치 및 비전과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제도화를 위한 힘의 실질적 형성이 만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적의 실천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논의들을 이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구독하고, 뉴스 링크 공유하며 코멘트를 달아, 사회 이슈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사SNS, 캠페인즈!
저도 당일에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위 후기와 겹치겠지만 별개로 인상깊었던 부분만 정리해 보면...
참여연대 박효주 팀장님의 불평등의 심화와 그로 인한 주거 현실, 총선주거권연대의 활동 소개, 잘 들었습니다. 총선주거권연대의 활동이 잘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이주원 한국사회주택협회 정책위원님이 이번 총선이 아무도 주거권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거권 기준 처참한 패배라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 깊습니다. 정치는 세력화 된 주체의 목소리만 듣는다는 제언이 기억이 남습니다.
전효래 나눔과미래 사무국장님께서는 기본권으로서의 주거권, 취약계층의 주거권(비정상거처: 고세원, 쪽방, 노숙, 반지하) 현황, 현금지원, 주택지원 현황을 소개해 주시면서 주거권 보장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는데, 우리들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가원 민달팽이유니온 활동가님은 청년주거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영끌세대'는 호도 된 것이며 '평생임차세대'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출과 소유가 아니라 '민달팽이여도 괜찮은 사회'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말씀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이철빈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의 당사자로서의 진솔한 목소리를 전해주셨습니다. 주거 사다리 복원이 아니라 전세 없는 주거권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말씀을 해주셨지요. 무엇보다 '방치'라는 단어로 당사자들의 상황을 전해주신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네 발제자분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나니 현제 우리 사회의 주거 문제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주거권은 모든 사람이 피해갈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인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서울 집값이 비싸도 너무 비싼 것 같아요. 누구나 주거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공공주택 비율이 늘어야 할 것 같네요. 주거 불평등에 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병행되어야겠구요.
성찰과성장)
점점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우시지 않겠지만, 더욱 많은 분들이 오셔서 서로 지지하고 응원 할 수 있는 시민 활동의 지속가능성이 가능한 플랫폼을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
기본적으로는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근원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사회)과학철학의 영향 속에서 가치와 사실을 분리하여 사실만을 다뤄야 과학적일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 됨에 따라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지향이 희석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적극적인 표명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개발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애자일 방법론'을 언급하시는 것이 흥미롭고도 반갑습니다. "연구는 ‘현장성이 없고’, ‘느리고’, ‘탁상공론만 반복한다’"는 선입견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꼭 참조해야 하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방법론 내에도 유사한 시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상황에서, 현실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실질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일들의 저변에 있는 방법론을 검토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시도는 신선하도고 파격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깐 딴 길로 새자면.. 흔히 과학의 목적을 '설명'과 '예측'이라고 말하지만, 대안적인 과학철학의 한 논의에 따르면 예측이 엄밀히 가능한 경우는 예외적인 소수에 불과하고, 과학의 대상은 예상이 불가능한 복합적인 대상이며, 그것이 과학의 대상이 아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과학의 목적은 '설명'이라고 말합니다. 벌어지는 복잡한 현상들의 원인으로서의 기제를 밝혀내는 것이 설명이고, 그 기제들은 여러 기제들의 부딪힘 속에서 발현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예측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며, 제한적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측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의 대부분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자연은 과학의 대상이고 사회는 철학/해석학의 대상이라는 인간중심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자연이든 사회든 과학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게 되고, 자연도 그렇지만 사회는 더더욱 필연적 기제들의 우연적인 조합에 따른 예측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연이든 사회든 과학의 대상은 인간의 인식 및 언어와 분리하여 실재하고 인간의 인식 및 언어는 이를 파악하고자 하면서도 언제든 틀릴 수 있습니다.(인식론적 상대주의) 인간이 인식을 하든 못하든 대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더 나은 인식 및 언어는 있을 수밖에 없고, 이론/과학/연구는 그것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민주적 토론과 협업이 과학의 발전에 필수적임을 함의합니다.
인간이 대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은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을 밝혀나가는 것이 최선으로 이어져 현대의 주류 관점인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로 이어졌는데요. 이러한 관점은 가치와 사실을 분리하고 사회과학은 (경험적) 사실만을 다뤄야 한다는 가치자유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사실 또한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지향에 필연적으로 결합될 수밖에 없는 가치 또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는 부당합니다.(특정 사회구조가 인간에 대한 억압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밝혀낸다면 그 구조를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 할 수도 있는 이러한 관점은 철학과 인문사회를 다루는 영역에서는 현대의 주류 관점과는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후다닥 써놓고 보니 너무 과하게 멀리 가긴 했네요.. ^^;;)
다시 돌아오면.. 본문에 필요하다고 써주신 ‘액티브 리서치'의 특징들, (1) 현장 중심의 ‘문제해결 지향’, (2) ‘주제중심'의 ‘실패하고 학습’하는 ‘도전적인 연구'의 ‘혁신성’, (3)동료 연구자와 대중과의 ‘소통’과 ‘협력’은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관점과도 상당 부분 조응한다고 느꼈습니다. 연구와 현장, 이론과 실천이 변증법적 종합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철학적 명제는 오래됐지만, 현재는 너무 멀어져 있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현장중심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제안은 반가울 따름입니다. 연구자들을 위한 공간과 연구자들과 지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제언 또한 공감하게 되구요.
그간의 사회를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현장과, 혹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와는 달리 간극이 벌어진 상태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시도들이 그 간극을 다시 좁혀주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시민적 의식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확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 특히 책임이 있는 공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제재는 동의가 됩니다. 하지만 구조적 맥락에 따라 혐오와 차별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현상적으로는 애매한 경우,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 형성 과정에서 본다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론장이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안전한 공론장에 관한 문제의식이 될 것 같습니다. 안전한 공론장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와 차별에 대한 엄격한 기준에 따른 처벌을 통한 ‘안전한’ 공론장과 혐오와 차별에 대한 시민들의 논의를 독려하여 기준을 세워나가고 그 과정에서 역량강화되는 안전한 ‘공론장’ 사이에서의 간극과 지속적인 긴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혐오와 차별 표현을 제재하되, 그렇지 않은 경우 유연한 논의 공간을 확보하여 시민들의 자생적인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독려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재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해서 통과 시키고, 그 외의 영역들과 관련해서 공론장과 거버넌스 등의 시민참여를 통해 시민적 합의 형성을 통해 혐오와 차별 없는 민주사회를 위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캠페인즈가 그런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참동안 상당부분 겹치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업로드 하려고 보니, 연구위원님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심지어 제목도 비슷합니다. ^^;;
"한국판 ‘노동 4.0’,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제 글 밑에 연구위원님 글,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형 노동4.0의 길을 그려 지속가능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추진해 가야"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
환경학습권이 누구에게나 보장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통역 혹은 자막, 환경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공간에서의 장애인 이동권의 확보 등 정말 많은 일들이 있겠네요.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