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인문학술장의 자율성과 재생산을 위한 소고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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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자유대학교 철학과에서 「스피노자와 평등의 문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중이다.
2024년 8월 31일. 연구자 복지를 위한 공동추진위원회가 출범됩니다!

한국의 인문학계는 오랫동안 '위기'라는 말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것을 단순한 '위기'가 아닌 '재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재앙의 근원은 '학술장의 부재'에 있으며, 이는 단순히 학생들이나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 부족 때문이 아니라 연구자들과 학술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술장이 직면한 문제는 그 뿌리가 깊고 복잡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술장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주장들과 달리 나는  인문학이나 이론적 연구들이 한국 사회의 의제나 일상인들의 삶과 유리되었다던가, 학자들이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글을 쓰지 못하여 위기에 빠져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서점 매대에는 인문학을 다룬 대중적인 교양서들이 차고 넘치고, 유투브에는 인문학 셀러브리티들과 그 워너비들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중이다. 지금은 7-80년대처럼 함석헌이나 도올의 강의를 듣기 위해 종로를 찾아가 강당을 채우는 시대가 아니다. 인문학이 교양대중을 찾아가고 있다. 학자들은 ‘자리를 못 잡아서’ 생계의 길을 찾기 위해 교양과 학술상업출판의 영역으로 달려간다. 또 다른 학자들은 ‘자리를 잡은 김에’ 인문학 대중의 셀러브리티가 되어 개인적 평판을 높이려 시도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 위기의 한 모습이다. 학술장 바깥의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 스스로가 인문학을 ‘삶을 위한’ 것으로 여기면서, 인문학은 정말로 ‘삶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학부 교양 수업에서 열심히 가르쳐서 문해력을 길러주고, 비판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인문학’이 된 것이다. 인문학은 삶 전반에 관한 것이고, 인문 이론의 탐구는 누구든 책을 읽을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비싼 장비와 실험재료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도 아닌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하면 된다는 주장이나온다(김우재, “코로나 시대의 인문학”, 한겨레신문 2020년 6월 30일).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일일이 반응할 시간이 없다. 교양, 교육, 학술상업출판 영역의 반대편에선 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KCI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쓰고, 좀 더 노력하여 주로 영어로 SCI나 A&HCI 같은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학술지에 논문을 쓴다. KCI 한편에 100점, A&HCI 한편에 100점에서 600점(학교마다 다르다). 1년에 200점에서 1000점 정도까지, 연구자라면 응당 개인 실적 점수를 채워야 한다. 이 개인점수가 연구재단의 연구비를 신청하거나, 교수 임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혹은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은 현실감각 없는 사람이 된다. 창조적 역량과 체력이 어마어마하거나, 하나의 아이디어로도 여러 편의 논문을 잘 쪼개서 쓰는 훈련이 된 사람들은 1년에 여러 편의 논문을 뚝딱뚝딱 쓰지만 필자와 같은 보통의 인문학자들은 1년에 두 편의 논문을 쓰면 이미 기진맥진이다. 그런데 이 글들은 누가 어떻게 읽을까? 

인문사회분야의 제 영역에도 자연과학의 경우처럼 학술지 논문이 주된 교류 수단이고, 그래서 인용지수를 통해 학문적 퀄리티를논할 수 있는 분야가 있기는 하겠지만, 앞서 말한 이론장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논문들은 그다지 읽히지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상술하자면 여기서 ‘읽는다’는 건 논문을 읽는 행위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논문 출판’의 가장 주된 목적과 관련된 읽기 행위, 즉 동료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재료로 읽고 인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인문학술 이론장의 연구자들의 논문은 그런 의미에서라면 별로 ‘읽히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연구자들의 이론 연구를 읽지 않아도 내 개인점수를 채우기 위한 또 다른 이론 논문을 얼마든지 쓸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별처럼 빛나는 철학 대가들의 저작들이 있고, 영미 학술장엔 내 논문의 논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중견, 석학들의 논문이나 단행본이 많다. 내 영혼이 그들과 직접 교통하는데, 굳이 옆을 돌아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 이론의 대가나 석학이 없기 때문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는 서구 이론의 해설자들만 있지 한국적 상황에서 길러낸 창조적 이론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반응이나, ‘서구에서 인정받는 책을 쓴 (한국 학술장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 이론가가 얼마나 되나’ 같은 반응들이 대표적이다. 확실히 아주 작은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그런 이론가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연구자 개개인의 실력을 문제 삼는 의미에서 대가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에 동의하기도 힘들다. 한국의 이론 대가나 석학은 말하자면 지금 모두 ‘슈뢰딩거의 석학’이다. 많은 이들이 박스 속에서 ‘석학임’과 ‘석학 아님’의 중첩상태에 놓여 있다. 확인을 하려면 뚜껑을 열고 관측적 개입을 해야 하는데, 지금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서로의 저작을 읽고, 인용하고, 토론 주제로 올리고,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이나 책을 쓰지 않으니 슈뢰딩거의 석학들은 지금 계속 박스 안에서 존재하며 비존재한다. 

즉 한국 인문학술 이론장엔 좁은 의미의 ‘학술장’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학술장이 대학 입시, 교육과정, 교원 평가 시스템 등에 종속되어 자율성을 상실했다. 인문학의 가치와 의미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개인주의적 성과창출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구자들 간의 학술적 교류와 협업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인문학계에서 독창적인 이론가나 학파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학문의 발전은 연구자들 간의 활발한 토론과 비평, 그리고 이를 통한 상호 발전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재의 한국 인문학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연구자들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이다. 정년트랙 전임교수 자리는 극히 제한적이며,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단기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장기적인 연구 의제를 추구하기보다는 무한경쟁 속에서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하게 만든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는 깊이 있는 연구나 혁신적인 시도, 동료 연구자와의 토론과 논쟁을 통한 학술장 전체의 발전보다는 당장의 논문실적을 쌓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학술지 논문 중심의 평가 제도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연구자들의 업적을 주로 학술지 논문의 수로 평가하고 있어, 깊이 있는 연구를 담은 단행본이나 공저 논문집 등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연구의 질적 저하와 파편화를 초래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하나의 큰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기보다는, 같은 내용을 여러 개의 논문으로 쪼개어 발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셋째, 위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학술전문 단행본에 대한 체계적인 경시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학술전문 단행본은 한 연구자의 깊이 있는 사상과 이론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한국의 인문학 연구가 국제 학계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현행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사업을 확대한 '국가박사제'의 도입이다. 이는 일정 수의 박사급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고용(재임용)과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연구자들이 장기적인 연구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연구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둘째, 학술전문 단행본과 공저 논문집에 대한 평가 개선이다. 이들 저작에 대해 학술지 논문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연구자들이 더욱 깊이 있고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는 연구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 간의 협업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셋째, 대학출판부의 역할 강화 및 학술전문출판 영역의 확대이다. 대학출판부를 통해 질 높은 학술전문서를 출판하고, 이를 대학 평가에 반영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술전문출판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는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보다 넓은 독자층에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학술 출판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넷째, 서평논문에 대한 평가 개선이다. 서평논문은 학술장 내에서의 토론과 비평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현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인정과 평가 개선이 필요하다. 서평논문의 활성화는 연구자들 간의 상호 비평과 토론을 촉진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인문학이 곧 학술정치이자 학술비즈니스라고 주장한다. 이는 외부의 정치나 비즈니스 논리가 학술장에 침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학술장 자체가 고유의 정치와 비즈니스 논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연구자들은 개인 연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은 학술장을 만드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연구 성과를 높이는 것을 넘어,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특히 어느 정도 명망과 고용안정을 쟁취한 중견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동료 연구자들, 특히 신진 연구자들의 작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비평하며, 상호 인정과 존중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는 학문의 세대 간 전수와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힘을 모아 제도 개선과 예산 확보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연구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 전체의 발전과 그 사회적 가치의 인정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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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자는 아니지만,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5년 째 네덜란드에 살면서 한국과 네덜란드 두 나라에 대해서 비교를 많이 하게 되는데, 한국은 경쟁이 치열하고, 남을 밟고 서라도 이겨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해야 하고, 확보한 후에는 그 자리를 지키는데 골몰하게 만드는 사회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인문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숫자나 실험 결과로 답을 내놓기 어려운 학문이고, 인간에 대한 연구인데, 그걸 과도하게 수치화해서 퐁가하기 어려운 분야라 그에 맞는 평가제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 아내는 생물학자입니다. 26년 간 교제하고 결혼하고 같이 살면서 네덜란드 학자의 삶을 지켜보면서 학자이자 대학의 전임강사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네덜란드 사회가 한국 보다 합리적이고, 학뮨 연구자에 대한 처우나 권리가 더 잘 보장되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사회 곳곳에 근대와 전근대적인 문화가 섞여 있습니다.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공존하고, 파시즘과 자유주의도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17세기에
근대의 문을 연 네덜란드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필요할 것이고, 그를 위한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는 불안정한 삶의 조건, 학술지 논문 중심의 평가 제도, 학술전문 단행본에 대한 체계적인 경시 속에서 개인주의적 성과창출에 매몰되는 삶으로 몰리게 되어,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거나 서로의 글을 읽으며 교류·협업하지 못하는 등 체계에 종속되어 자율성을 상실한다. 즉 "'학술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요약하여 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박사제의 도입, 단행본 및 공저 논문집에 대한 평가 개선, 대학출판부 역할 강화 및 학술전문출판 영역의 확대, 서평논문에 대한 평가 개선을 대안으로 제시해주셨는데, 상호비평 및 협업 등이 이루어지는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현 상황에 대한 인식 및 해결 방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위에 정리한 내용 외에 다른 부분에도 눈길이 갑니다. 인문학/이론적 연구들이 의제/삶과 유리되어 있고 대중적이지 않아 위기라는 진단에 반대하시면서, 인문학이 '삶을 위한' 것이 되고 있는 것이 되려 위기의 한 모습이라 말씀하시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저의 경우 이론과 연구가 현장과 괴리되어 훈고학적 경향이 강화되거나 대중적으로 주목 받지 못해 사장되는 것을 아쉬워 하며 '현장·실천과 만나는 이론·연구'를 강조하며 그것의 가장 생산적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반대의 경향으로 이해 될 수도 있는 서술인지라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져서 더욱 깊이 읽고자 애썼습니다.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부분 등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이 글은 일단 같은 연구자분들을 대상으로 중요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제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읽으면서, 혹시나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혼자 괜히 걱정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문학/이론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심층적인 이해 속에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제도정치적 필요/사회운동적 필요/시민적 필요/대중적 필요 등 다양한 층위의 집합적/개인적 행위를 통해 가능성을 실현 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연결 될 때에 그 존재를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구조에 의해 생존을 위해 강제되는 성과지상주의라는 조건 하에서의 인문학의 ‘삶을 위한’ 대중화는 위기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과 만나고 시민과 만나는 비판적 인문학/이론의 필요와 중요성 그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고, 분리해내야만 인문학/이론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인정, 이와 관련된 제도적 조치들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들이 집중해서 연구 할 수 있는 조건의 마련, 연구자들간의 상호비평 및 생산적인 협업만큼이나 그 이론적 진전의 시민적/대중적 지지 확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코멘트가 본 글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 있지만 제 관심사인지라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댓글을 남깁니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과학고 삶과 맞닿아 있는 영역은 굉장히 활발하고 있지만, 순수 과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요. 적어주신 내용처럼 <학술장 바깥의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 스스로가 인문학을 ‘삶을 위한’ 것으로 여기면서, 인문학은 정말로 ‘삶을 위한’ 것이 되었다>가 오히려 지금 상황을 만들었나.. 하는 아아이러니함에 대해 고민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