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습지에 대해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도 습지는 많지만, 새만금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전의 관점은 약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도심에서요. 습지는 지구의 허파라고 합니다. 비인간생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자연생태계를 위해 습지의 보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불평등, 탄소중립,기후정의, 정의로운 전환과 같은 키워드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큰 단어들이지만, 모두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방향에 대한 공유가 점점더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큰 방향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실천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와 그것을 위한 집중은 미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게 되네요.
지속적으로 공론장 행사가 이어지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같은 주제로 계속하네'가 아니라,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수많은 시민들이 끝까지 논의하고 실천하네'가 되는 지속적인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과 시도들에 있어 '소외의 극복'은 절대 빠질 수 없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소외의 극복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화가 '권리'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화발전 속에서 누군가가 소외되지 않도록 살펴보고 제도화 하여 권리로 보장하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디지털 기술과 기후정의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두 가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를 고민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기술이 쓰이도록 만드는 역량’이다."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기준으로, 규제와 자율 모두를 세심히 갖춰야 한다. 이에 가장 중요한 과업은 무엇이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길인지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문장들에 공감이 갑니다.
기술 혁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회를 위해 기술이 활용 될 수 있도록 생각하면 좋겠고, 기술 혁신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미 겉잡을 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에 최선의 대응을 찾기 위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각기 대안을 그리더라도 현실적인 최적의 대응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 같습니다.
이번주도 비가 많이 온다고 합니다. 빗물받이 캠페인,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전국의 지도를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채워 보겠습니다!
탄소제로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네요. 모든 조치가 극도로 시급한 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실질적인 대응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교권의 '권'이 권리인지 권한(혹은 권력도..)인지.. 불명확하고 섞어버리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더 혼동이 큰 것 같습니다. 학생의 인권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버리면서, 어디 한쪽의 편을 들어야 할 것으로 프레이밍 하고 있구요. 두 집단의 갈등상황으로 치환하고, 선택하기 어렵도록 만들면서 그 해결은 개인들에게 내 맡기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개인이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곪아가는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시스템과 문화의 형성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교권'이 아니라 '노동권'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심히 동의하게 됩니다.
혼자가 아닐 수 있도록, 함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제도가 뒷받침 해줄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양질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네요. 킵해뒀다가 다시 정독하겠습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올려주세요. 항상 쫓아다니며 읽도록 하겠습니다!
근래에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글입니다. 현 시대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내 아시안 차별"이라는 제목을 보니 헛웃음이 나오네요. 물론 글에 대한 헛웃음이 아니랍니다. 한국에서의 (따옴표 치고)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상당히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각자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한국인도 아시안으로 묶여서 차별 받을텐데, 아시아인이 아시아인을 차별한다는게,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며 우월감을 느끼길래 차별하는 건가 싶어서 헛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잃을 것은 특이점이요, 얻을 것은 혁신이고 행복이다. 인간이여 더 놀고, 더 사랑하고, 더 배우라!”
공산당 선언 문구를 수정한 것이 흥미롭네요. 사회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AI에 대해서 어떤 관점과 접근을 취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미 제로성장 시대이고, 기후위기에 따라 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무한성장 추구의 목표는 불가능하고, 지구가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고, 부채와 불평등과 금융위기의 심화하기 때문에 '탈성장'은 필수불가결하다는 말에 동의하게 됩니다.
지표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착취와 불평등)뿐만 아니라 자연적 모순(환경 파괴)의 차원에서 성장의 불가능과 탈성장의 필수불가결함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및 국가들간의 경쟁 속 지구적 자본주의의 성장 지향은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탈성장을 전제로 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대대적인 운동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 격변, 이 힘을 통한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리빙하우스는 처음 들어봤는데, 흥미롭네요. 청년들의 주거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양한 주거 형태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북반구 선진국의 경제적 풍요는 남반구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와 자연에 대한 개발주의적 착취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이제 지구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의 북반구와 남반구에 대한 동등한 개발의 통제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적인 기후위기를 실제로 극복하고자 한다면 남반구에 대한 북반구의 지원을 통한 지구적인 지속가능성의 확보에 노력은 필수적인 관점일 것입니다. 만약 말에 그치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후위기는 위기가 아니라 기후절망이 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의 생물 생태계를 덮치는 결과를 목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집‘이 아무리 투기의 영역이라고 해도, 마음먹은 몇몇의 개인이 무자본으로 수천 채의 집을 소유한 사례는 한국 사회의 집 투기 구조가 극도로 비정상임을 증명한다."
"집은 더이상 개인의 삶의 터전과 같은 안전한 권리가 아니다. 집은 소유자가 세입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되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집은 권력이 아닌 권리가 되어야 한다. 집 계약은 (어찌됐든) 새로운 시작이며 전환점이다. 그 속에서 집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일상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공감하게 되네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은 '편안하게 쉴 곳'이기보다는 자산 증식의 수단이 되고, 그 자산 증식의 수단이라는 말이 합법적 차원을 넘어, 세입자의 사회적 삶을 끝장내는 사기와 강탈의 대상/영역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건설자본주의 사회의 '신'과 '왕'이 강탈을 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근대사회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전근대 사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팩트체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쿠시마산 농산물에 의한 방사능 피폭'은 가능성이 있다면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근거 없는 자료들로 허위정보를 기정사실화 하여 불안을 조정하거나,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파업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목소리를 낼 권리를 실현하는 행위라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시민의 권리인 셈입니다. 시끄럽고 불편하다고 말씀들 하시는데, 민주주의는 때론 시끄러울 수 있고 또 시끄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멈춰서 기업에게 소비자에게 피해가 간다는 반론이 많던데.. 맞습니다. 그게 바로 파업의 힘입니다. 자본에 비해 힘이 없는 노동자가 법적 차원의 대응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대응이 바로 파업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사회적 삶을 위해 다양한 주체들의 조화로운 삶이 지속가능하도록 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