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
[이태원 참사] 국가폭력의 경험을 안고 자란 아이
어른들은 몰라요 서울의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매일 1시간씩 활동 소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혹은 교육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들과 실무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나눴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나누었다. 어느 날 과장님의 질문. 서희 너의 민감성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공책에 나열했다.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폭력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다. 엄마 나 밭을 걷는 것처럼 느껴져. 지뢰가 마구 퍼져있는, 근데 지뢰의 위치는 몰라. 어디서 어떤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밭을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차량이 갑자기 날 박지는 않을까. 뒤에 오는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건넨 주스나 사탕에 약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까. 일상의 불안함은 때론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사회에서, 참사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참사의 맥락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사람들의 목숨이나 인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내가 국가의 쓰임이 있지 않다면 혹은 그만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관리한다. 이 불안함은 과연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나의 조부모 세대, 전후 가난 나의 할아버지, 홍*희, 48년생. 나의 할머니, 전*숙, 49년생.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3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전쟁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군모를 쓰고 있더랬다. 머리가 너무 작아 군모가 자꾸 벗겨져 나가는데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군모 덕에 살았고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3살이면 내가 자주 보는 아기 유튜버의 나이. 완벽한 문장 구사가 어려워 여러 단어를 나열하며 말하는 그 나이. 3살, 만 2살,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였던 할머니가 결혼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가난과 함께 살아갔다. 할머니가 시집간 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옆집에서 수저를 빌려왔다.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모든 일들을 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나보다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게 그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동네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나의 부모 세대, 가난 + 독재 정권 + IMF 나의 아빠, 홍*용, 69년생. 나의 엄마, 김*환, 71년생. 민주항쟁 당시 나의 아빠는 19살, IMF 당시 29살이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그 날, 11살이었던 나의 아빠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빠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당시엔 업적들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고, 다른 것들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 시대엔 전부 다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2살 차이 나던 아빠의 이모 -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 는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옷에는 수류탄 냄새가 항상 배어있었지만, 당신의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 혹은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독재 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사회를 꿈꾸었다. 대학에도 경찰이 있던 그 시대에. 한편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빠 세대까지 이어졌다. 3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의 아빠는, 고등학교 중퇴 후 이른 나이에 친척 집에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나의 아빠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고 나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 해 IMF가 터졌다.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의 넘쳤던 나의 외가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부도가 난 회사에서 가정집에서 쓰기도 힘든 대형 프린터기를 집에 가져왔다. 그 뒤로 나의 아빠는 쭉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민주화, IMF, 이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더 나은 한국 사회를 꿈꾸며. 나라를 살리자는 목표로 금을 모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갔다. 나의 세대, 없음 나, 홍서희, 99년생. MZ세대이자 Z세대의 첫 발을 딛는다. 우리 세대의 세대적 과제는 딱히 없다. 온 세대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목적을 내세울 만한 요인도 동력도 없다. ‘행복하기’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세대적”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행복은 다를 테고 행복하기 위한 방식도 다를 테니.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웠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친숙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이 아침에 일 하러 가면, 아기(나와 동생)은 혼자 남아 TV를 열심히 봤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책보다 TV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잡지식이 상당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살기 진짜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살기 좋아졌다고 불리는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세대적 과제가 없다면, 나의 세대는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줬던 큰 사건들을 돌아봤다. 내가 경험한 참사 내 나이 16살,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니는 학교에서 내가 나고 자란 ‘정선’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정선에 현장체험학습 갈만한 곳을 물어보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니!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의 한 달 전,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떴을 때만 해도, 갈 수 있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불과 몇 시간 후 유가족들에 의해 사실이 전달됐다. 나와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언니 오빠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안국역 근처에 살던 나는 예비 고3이었지만 하야 시위에도 매주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 나이 18살,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살면서 수많은 여성 피해자 사건들을 봐 왔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우리 집에서는 밤에 골목길로 절대 다닐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도 금지됐다.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범죄자들에게 쉽게 표적이 된다는 뉴스 보도로 인해, 나는 밤에도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굳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나와 몇몇 여성을 보며 자위행위를 했고,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마주했다. 두 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극히 꺼렸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 혼자 근무하는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살인’으로 바라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내 나이 24살,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은 마치 폭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누구 하나 품에 껴안는 사람이 없었다. 당일 이태원 근처에서 놀았던 나는, 자괴감과 부채감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뭐가 좋다고 그 시간에 놀았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서서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혐오 표현을 들으면서 고통을 감내했을 거로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여전히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파악 중일 때, ‘국가애도기간’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참사가 아닌 사고로 바라보며 ‘보상’의 맥락으로 축소했다. 그들에게 참사의 고통은 그저 개인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며 보장해 줘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드는 돈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더 효율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 - 보상 - 을 찾고자 했다. 사과는 늦어졌고 진상규명은 진척이 없었다. 국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부채감도 자괴감도 불안감도 고통도 전부 개인의 몫이었다. 내 나이 25살,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남동생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군 내에서의 사망 사건들이 종종 보도되고 있었고 불안함이 커진 건 그해 7월이었다.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수근 일병이 목숨을 잃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임 넘기기는 계속되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결과였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내 동생 또한 호우 피해 지역에 투입되었다. 나의 동생이 다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복무가 끝나길 바라기만 했다. 군에서의 사건들은 매번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매우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기후위기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국내산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그에 대해 얘기를 하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고민이 크게 와닿지 않으신 듯했다.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진정 괜찮을까? 온열질환으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아파트 주차장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데 그런 곳에서 하루 9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에 화가 났다. 위헌 결정이 나자 그제야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났다. 언제 탄소중립이 이뤄질 수 있을지 답답했다. 백날 텀블러 들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가의 부재? 아니, 국가폭력 내가 겪은 참사들이, 국가가 국가의 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나? 국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만 볼 수 있나? 사실 이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다. 사람들의 목숨은 ‘비용’으로 환산하고, 구조하고 예방하는 것에서 ‘효율성’을 찾는 국가의 폭력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호라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폭력을 행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사고’라는 말로 숨겼다. 응당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을 앞선 말로써 축소했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너의 죽음은 오롯이 너의 몫.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나의 세대는 전-국가적인 목표가 없다. 국가가 나서서 이끌만한 요인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보장 능력이 없는, 보호의 능력도 없는, 책임도 지지 않는, 회피하는, 역할과 소임을 축소하는, 심지어는 교묘한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나의 세대는 이 국가 앞에 불안함만이 남는다. 나의 환경에 대한 모든 신뢰가 붕괴되어 언제든 내게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불안함을 주는 저 강력한 권력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극복하거나 비판하거나 변화하고자 하는 행동이 내 삶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파할 여유도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더욱더 ‘나’의 현실에만 몰두할 뿐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생존을 위해 제테크를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하고 다름을 강조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삶의 태도를 택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가는 달라질까? 국민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불안함이 커질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요즘 길거릴 걷는 것도 무서워. 우리는 함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럴 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내 감정이 틀리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과 함께 극복할 수 있음에 기쁨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나는 더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토로한다. 너무나도 자연히 행해지는 국가폭력을 직시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일상의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세대들에게 연대의 손을 건네며 주저앉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
4
·
준틴스(Juneteenth)를 아시나요? (라샨 하가드 Rashaan Hoggard 인터뷰)
2024년 6월 미국 텍사스에서 라샨 하가드(Rashaan Hoggard)를 만났다. 그는 텍사스의 한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유명한 소송사건의 주인공  채리티 사우스게이트(Charity Southgate) *가 하가드의 5대 외증조모이기도 하다. 선조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라샨 그 자신도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체험을 지니고 있다. 그를 통해 준틴스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  Q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미국의 흑인 역사를 한국에 알리는 데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대통령 선거일에 대해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준틴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 같아요. 미국의 준틴스는 무슨 날인가요? A : 준틴스(Juneteenth)란 노예 해방을 기념하는 날로, 6월 19일(June Nineteenth)을 줄인 말이에요. 브런치(Brunch)처럼 축약해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미국 남북전쟁 중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어요. 이 행정명령은 1863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어 남부연합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약속했지요. 그러나 해방선언의 이행은 무척 더뎠어요. 특히 남부 노예들은 해방이 선언됐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고, 전쟁이 노예 해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도는 미국 각주마다 각기 다른 시기에 끝이 났어요. 남부연합주 가운데 가장 외진 텍사스주는 노예를 해방시킨 마지막 주였어요. 1865년 6월 19일 텍사스에서 노예해방령의 최종 시행 명령이 내려졌어요. 이것은 남부연합에서 노예제도의 종말을 의미했어요. 1년 후 1866년부터 준틴스 기념식이 열렸지요.  Q : 남부연합에서 노예제도의 종말이라면 미국 전역에 해당하는 게 아닌가요?  켄터키와 델라웨어는 노예주였지만 당시 남부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어요. 노예제도는 1865년 12월까지 이 주들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때문에 1865년 6월 19일이 노예제도의 명백한 종말은 아니었지만, 미국 전역에서 공유되는 기념일이 되었어요. Q : 준틴스는 하가드 씨 개인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일까요?  솔직히, 저는 준틴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때를 기억하지 못해요. 우리 가족이 기념하는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인 2월에도 제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게 준틴스는 흑인이 해방된 날이란 의미보다 오히려 흑인이 해방됐음에도 오랫동안 노예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부당함을 상기시켜줍니다. 한편, 인종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이후로 흑인들이 얼마나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상기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해요. Q : 제가 알아보기로는 그 날이 공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있었어요. 오늘날 준틴스가 미국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A : 준틴스는 텍사스의 지역 축제로 시작되었어요. 텍사스 이외의 지역에서 준틴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어요. 아마 지금도 그럴 테고요. 바이든 대통령이 연방 공휴일로 지정한 지금, 저는 준틴스가 전국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전국적으로 인정은 하지만, 전국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준틴스는 전통적으로 흑인 축제지만, 흑인은 미국 인구의 약 15%에 불과하니까요.  Q : 지금도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인종차별을 겪은 개인적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  물론 오늘날에도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해요.다만 제 윗 세대가 직면했던 인종차별과는 다른 양상이지요. 부모님 세대에서는 정부가 승인한 인종차별을 감수해야 했어요. 예를 들어, 제 아버지 고향의 음식점은 백인 좌석과 흑인 좌석이 구분돼 있었어요. 어머니 고향 영화관에선 발코니 구역에 흑인이 앉았고 아래 중앙 구역은 백인을 위한 자리였지요. 살면서 제가 인종차별을 당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노골적이지 않은 인종차별이 많았고, 그 경우 누군가의 행동을 인종차별 탓으로 돌리는 것을 항상 조심해 왔지요. 인종차별 때문일 수도 있는 상황들을 참았지만, 확실하게 인종차별이라 말하기도 어려웠어요.   Q :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 경찰이 제 차를 수색하기 위해 무작위로 차를 세운 적이 있어요. 수상해 보인다며 저를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있고요. 제가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지요. 종업원이 가게에서 저를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제 피부색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 : 유감스럽게도 동양인인 제가 보기에는 피부색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 보여요. 하지만 애매해 보여서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 있었을 거 같아요. 일일이 화내거나 지적하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성차별에서도 유사한 부분이 있거든요. 괜한 분란만 일으킬까 봐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요. 아마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이런 인종차별을 걷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한국에는 흑인들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혹시 미국의 반노예제 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 우리가 주목했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 미국의 노예제 반대 운동에 참여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등이 있어요.  이 세 사람은 모두 흑인으로 스스로 노예제도에서 벗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일생을 바쳤어요.  백인 중에는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William Lloyd Garrison)과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노예제 반대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 백인 작가들은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펜의 힘을 이용해 노예제도라는 사악한 제도에 맞서 싸웠지요.  Q : 모두 중요한 인물이군요. 그 인물들과 저작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준틴스 혹은 인종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 최근 미국은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기념했어요. 이 날은 퍼레이드, 불꽃놀이, 바비큐 야외파티로 가득 찬 날이지요. 팡파르 때문에, 7월 4일이 모든 시민들에게 자유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기 쉬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든 사람이 신이 주신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어요. 그러나 위선적으로 이 권리들은 수백만 명의 유색인종에게 거부되었어요.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1852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엇인가?"라는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표현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부정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준틴스가 독립기념일로 인정되는 이유예요.   비록 7월 4일과 같은 방식으로 기념되는 날은 결코 아닐지라도, 6월 19일은 여전히 1세기가 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 깊은 날이에요.  *채리티 사우스게이트(Charity Southgate) : 그녀는 본디 백인 어머니와 흑인 노예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미국의 노예신분은 모계를 따랐으므로 신분상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노예신분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신분을 되돌리려 소송을 걸었다. 이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자유인 신분을 되찾은 채리티는 이후 남편의 신분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
·
회장님은 ‘재벌 연봉킹’ 될 때, 20년 롯데맨은 천막으로 [회사에 괴물이 산다 14화]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 앞.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지하철역에서도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너오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들려오는 언어들도 제각각이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몽골어, 이탈리아어…. 깃발 든 이를 따라가는 관광객들을 쳐다보고, 주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일지 짐작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시간은 더디 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더 무료해졌다. 주변 건물들에 내걸린 LED 광고판과 조명 불빛들로 여전히 거리 위는 화려했지만, 밀려오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거리에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곤욕스러웠다. 이 번잡스러운 곳에 천막을 치고, 한겨울부터 한여름까지 반년 넘게 밤을 지새우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2024년 가을의 선선한 날씨로는, 2년 전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추위도,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더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자나 계단에서 몇 시간 앉아 있는 것과,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리는 거리 위 천막에서 잠을 자는 건 비교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그곳이 꼭 외로운 섬 같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2월 16일, 한낮의 태양도 살을 에는 추위를 녹이지 못했다. 쓸쓸하게 천막을 지키던 이성훈(당시 51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회사에서 내용증명이란 게 왔어. 연차휴가 써서 유감이래. 당신, 그 천막농성이라는 거 그만하면 안 돼? 회사에 미운털 박혀서 지방에라도 가면 어떡해.” 아내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훈도 흔들렸다. ‘내가 괜히 노조를 한다고 했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백화점 명품관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만 봤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23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한겨울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게 될 줄이야. 24년 전 입사 때는 생각도 못했다. 롯데백화점은 그의 첫 직장. 무역학을 복수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98년 ‘유통맨’을 꿈꾸며 롯데, 신세계, LG, 유통 3사에 원서를 냈다. 롯데쇼핑(주) 백화점사업부에서 합격통지를 받은 뒤로는, 최종 합격한 LG도, 면접을 앞둔 신세계도 가지 않았다. ‘업계 1위’ 회사에서 능력을 펼쳐 임원까지 올라가보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Always with you : 언제나 고객과 함께” 백화점에 출근해서 이 슬로건을 볼 때마다 자부심이 차올랐다. ‘언제나’ 그와 ‘함께’할 롯데백화점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해외지점으로 발령 날 때를 대비해, 점심시간에 근처 어학원에 가서 영어회화를 익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롯데카드 채권관리를 시작으로 지원업무 기획, 남성의류, 스포츠의류, 화장품 및 잡화 영업관리, 마케팅 기획, 상품권 판매 등, 여러 지점을 오가며 다양한 부서에서 일했다.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해도, 상부의 매출 목표 달성 압박에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입사 8년 만인 2006년 과장으로 승진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일하던 2013년엔 사내 유공 표창도 받았다. 하루하루 정성 들여 살면 백화점의 화려함만큼 그의 노동도 빛이 날 줄 알았다. “롯데는 일본식 기업이니까 연공서열을 중시하긴 해도 (한번 채용한 직원과) 끝까지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원을 쉽게 자르지 않는 문화가 있으니 회사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죠. 책도 많이 읽고 새로운 시도들도 했죠." 그의 바람과 달리, 다(多)점포 전략으로 업계 1위를 유지해오던 롯데백화점은 온라인 쇼핑과의 경쟁에서 점점 밀리면서 직원들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펼친다. 승진에 누락돼 동일직급에 오래 머물면 기본급 인상에서 제외되고, 성과급, 상여금 등도 제대로 못 받게 됐다. 사원-대리-과장-부장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가 적어지니 승진 누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1년부터는, 인사고과 하위 10%는 기본급까지 삭감하는 ‘신(新)연봉제’를 실시하겠다고 예고했다. 신연봉제는 동료 간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옆 직원을 가르치고 협력을 하겠습니까? 옆 직원이 성과가 좋으면 나는 안 좋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데요. 팀워크를 방해하는 인사평가 시스템인 거죠.” 회사는 직원들에게 신연봉제 도입에 동의하는지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대부분 ‘동의’를 선택했다. 각자 사번을 입력하고 회사 시스템에 로그인해서 응답하는 방식. 사실상 ‘공개투표’라 여겨졌다. 직원들은 혹시 모를 불이익을 걱정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신연봉제 시행에 대해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회사 방침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순순히 따르기만 하는” 노조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입사 4년 선배인 최영철이 그에게 새 노조를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흔쾌히 응했다. “노조 만들려면 100명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두 명만 있어도 되더라고요. 형님(최영철)이 ‘다 만들어놨으니 너는 사인만 해’라고 해서 같이 노동청에 가서 설립신고서를 냈죠.” 그렇게 2020년 12월, 민주노총 서비스일반노조 롯데백화점지회가 생겨났다. 최영철이 지회장, 이성훈이 수석부지회장을 맡았다. 내부 전산망에 노조 설립 소식을 올리자 조금씩 가입 문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 노조에 가입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합원이 되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직원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중에 지회 사무국장을 맡은 한 조합원이 그랬다. 노조에 가입하고 얼마 뒤, 집이 인천인데도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고 3년이 넘도록 못 돌아오고 있기도 하다. 노조 결성 후, 이성훈은 수원점에서 노원점으로 발령이 났다. 품질평가사로 직무도 바뀌었다. 낯선 업무였지만 최선을 다했다. 2021년 식품안전평가에서 91.5점을 받았다. 전체 35개 점포 중 중상위권에 드는 점수였다. 그런데도 그해 인사고과는 하위 10%에 머물렀다. 이선규 서비스일반노조 위원장은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있는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노사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롯데 재벌은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삼성 저리 가라 할 정도입니다. 소위 민주노조가 들어서면, 어떻게든 그 노조를 박살내려고 합니다. 롯데면세점지회 같은 경우는 조합원이 450명쯤 됐는데, 지금은 두 명 남았습니다.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법원에서도 인정해, 대표이사가 징역형(집행유예)까지 받았습니다.”(이선규) 소수 노조인 롯데백화점지회가 활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섭권도 없으니 사측과 변변한 대화 한번 못했다. 신연봉제의 시행도 막지 못했다. 하위 고과를 받으면 기본급이 3% 삭감되고, 깎인 연봉을 기준으로 다음해 연봉이 책정되기 때문에 연봉이 오르기 힘든 구조가 됐다. 또한 3번 누적으로 하위 평가를 받으면 기본급 삭감에 더해 수당에 해당하는 업적가급까지 전액 삭감된다. 승진 누락자가 하위 고과까지 받으면 연봉은 더 깎였다. “신연봉제 전에는 기본급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업적가급도 전액 삭감은 아니었고요. 아무리 자본주의가 누군가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너무 과도하다 이겁니다.” 한번 저성과자로 평가받으면 주요 보직을 주지 않아 다음해에도 인사평가 등급이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될 여지가 컸다. 특히 회사에 청춘을 바친, 연차가 높은 직원들이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성훈도 계속된 승진 누락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아온 터였다. 2006년 서른여섯 살에 과장이 된 뒤로 번번이 승진심사에서 떨어지면서,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TV에 나오는 ‘만년과장’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 언젠가는 승진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안 되니까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죠. 일은 일대로 하는데도 승진이 안 되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싶고….” 과장 직급부터는 본사에서 승진 대상자를 승인하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지점에서 명단을 올리면 그대로 통과가 되는 편인데, 이성훈은 번번이 미끄러졌다. 후배들이 줄줄이 먼저 승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성훈은 팀장이 못 됐는데도 사람들이 예의 차린다고 ‘팀장’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면, 스스로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런데다 연봉까지 깎이니 가장 노릇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성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롯데백화점은 2021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권고사직도 실시했다. 고(高)연차 직원들에겐 승진보다 사직이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연봉제로 연봉이 깎일 게 두려워서, 미리 퇴직금을 정산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반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2019년 연봉은 181억 7800만 원으로, 재벌 총수들 중에서도 ‘1위’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기가 가라앉았던 2020년에도 149억 80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다. 여전히 초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진과 달리, 경영 실패의 후과는 직원들이 감당하고 있었다. 이성훈은 노조를 통해 그 점을 문제 삼고 싶었다. 기존 노동조합은 기능직이나 무기계약직은 가입 대상이 아니었다. 이성훈은 백화점 문화센터‧MVG(VIP라운지)‧상품권‧사은데스크 등에서 근무하는 ‘사내 전문직’들의 처우 개선과 관련해서도 회사와 논의하고 싶었다. 사실상 무기계약직인 사내 전문직들은 임금이 정규직들의 60% 선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 전문직은 원래 정규직이 하던 일인데 회사가 계약직 일자리로 바꾼 겁니다. 이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또 (정규직 전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일에 열정을 쏟겠습니까? 전문직이 일반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조를 설립하고 약 1년 동안 사내 게시판에 글도 쓰고 1인시위도 했지만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더 강도 높은 행동이 필요했다. 최영철과 이성훈은 천막농성을 결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타임오프(노조 전임자의 노조활동에 대한 근로시간 면제)를 인정받지 못해 근무시간 중에 노조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쓸 수 있는 연차를 다 끌어 모아, 2022년 1월 25일부터 휴가를 냈다. 상관들도 별 이견 없이 휴가를 승인했다. 그날부터 롯데백화점 본점 명품관 옆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기본급 삭감‧업적가급 수당 전액 삭감 가능한 신연봉제 철폐”, “직원 갈라 치는 정규직‧무기계약직 차별 반대” 구호를 내걸었다. 롯데백화점 창사 이래 첫 천막농성이자, 그룹 전체로 봐도 1987년 롯데호텔 농성 이후 처음 하는 천막농성이었다. “처음에는 천막에서 (최영철과) 둘이 같이 잤어요. 난생 처음 농성을 하는 건데 혼자 하면 외롭고 두렵잖아요. 며칠 하니까 피로가 누적돼 쉬어야겠더라고요. (낮에는 같이 천막을 지키고) 밤에는 한 명씩 번갈아가면서 남았죠. 거기가 중심가잖아요. 밤새도록 자동차 소리가 들려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그게 많이 힘들었습니다.” 항상 지켜보는 것 같은 보안요원들의 눈빛과, 천막 쪽으로 향한 CCTV 카메라가 부담스러웠다. 회사의 신고로, 구청에서 ‘사유지를 무단 점유했으니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철거하겠다’는 경고장을 붙여놓고 가기도 했다. 언제 철거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누구 한 사람은 항상 천막을 지켜야 했다. 실제로 백화점 주변에 달아둔 현수막이 여러 장 사라지기도 했다. “뭐든지 다 처음이었어요. 노동조합도 처음, 천막농성도 처음. 두려운 거죠. 천막에 혼자 누워 있으면 이걸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막막해서 자꾸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널뛰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농성 소식이 언론에 작게라도 나오는 날이면, 작게라도 성과를 내고 있다는 자긍심이 차올라 웃었다. 반면 농성을 시작해도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회사를 보면서는 끝도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일도 안 하면서 노조는 무슨 노조냐?”“천막농성? 그거 다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다.” 회사 게시판에 농성 소식을 올리면 응원의 댓글들도 달렸지만, 그들의 진심을 호도하는 글들이 올라와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우울감이 그들을 휘감았다. 잠 못 드는 밤이 계속 됐다. ☞ 다음 이야기 <백화점 명품관 앞 ‘천막’ 생활… 막막해서 눈물이 났다>로 이어집니다. 취재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
1
·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고 있는 AI?
AI 윤리 뉴스 브리프 2024년 10월 셋째 주by 🎶소소 1.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을 휩쓴 AI 연구자들의 경고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을 AI 관련 연구자들이 휩쓸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은 AI의 기초를 확립한 딥러닝과 신경망을 개발한 제프리 힌턴, 존 홉필드를 선정했습니다.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AI 모델 알파폴드를 개발한 데미스 허사비스와 존 점퍼 박사 등에게 돌아갔습니다. AI 분야 종사자로서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세상이 너무 AI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AI가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이야기하면서도, AI를 옳은 방향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힌턴 교수는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도 AI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는데요. 그가 말하는 미래 AI 위협이 과도한 불안감을 조성하여 오히려 저작권 침해, 저임금 노동 착취 등 현재의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는 비판도 받지만, 힌턴은 작년 5월 구글을 떠난 이후 계속해서 AI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경고는 노벨상의 창립자인 노벨을 떠올리게 합니다. 노벨이 개발한 안전하게 터지는 폭탄인 다이너마이트는 터널, 광산, 댐 같은 시설 건축에 유용했지만, 동시에 많은 인간을 빠르게 죽이는 전쟁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절망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로 축적한 재산으로 인류 복지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노벨상을 만들 것을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쩐지 노벨과 힌턴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2. 앤쓰로픽이 말하는 자애로운 은혜의 기계, AI 노벨 수상자 이야기로 들썩거리는 동안 앤쓰로픽(Anthropic)의 CEO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가 AI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관한 장문의 글을 썼습니다. 글 제목은 “자애로운 은혜의 기계(Machines of Loving Grace)”입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등장할 강력한 AI가 생물학과 건강, 신경과학과 마음, 경제 발전과 빈곤, 평화와 거버넌스, 일과 의미에 미칠 긍정적 영향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글의 도입부에서 다리오 아모데이 자신이 AI를 바라보는 성향을 해명(?)하는 대목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AI 비관론자 혹은 멸망론자(Doomer)로 보는데, 사실 본인은 AI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위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가 AI 비관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앤쓰로픽은 “안전한 AI”를 강조하지만, 결국 AI를 개발하고 활용하며 돈을 벌고, 엄청난 투자를 받는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AI 낙관론자에게 둘러싸여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글은 오픈AI CEO 샘 올트먼이 쓴 글 “지능의 시대”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 글에서 AI로 만드는 마법 같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픈AI는 66억 달러(약 8조 8,000억 원) 투자 유치 소식을 발표했는데요. 모두에게 열린 AI를 연구하는 비영리 기관으로 시작한 오픈AI는 단계적으로 완전한 영리 기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리오 아모데이가 머지않았다고 말하는 은혜로운 기계에도 조만간 투자 소식이 들려올 일만 남은 건 아닐까요? 3. AI 기업의 AI 안전 연구 현황 그렇다면 오픈AI, 앤쓰로픽, 구글은 AI의 안전한 활용을 위해 어떤 연구를 하고 있을까요? IAPS(Institute for AI Policy and Strategy)에서 세 기업의 AI 안전 연구 현황을 정리했습니다. 2022년 1월부터 2024년 7월까지 3개 기업이 발표한 AI 안전 관련 연구 논문 80편을 분류해보니 집중 연구 분야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 비중은 인간 선호 반영(Enhancing human feedback, 39%), 설명가능성(Mechanistic interpretability, 24%), 견고성(Robustness, 13%), 위험 평가(Safety evaluation, 11%) 순입니다. 대부분 현재의 AI 서비스의 평가 및 성능 향상과 크게 관련 있는 연구로 보입니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를 만들어 줄 강력한 AI가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관련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정렬(misalignment), 다중 에이전트 안전성(multi-agent safety), 신뢰할 수 없는 AI 관리(Controlling untrusted AIs) 관련 연구는 0건에 가깝습니다. 일부 연구는 여러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요. 아름다운 AI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떤 AI 연구가 필요한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일 수 있겠습니다. 4. 지속가능한 AI를 위한 OECD의 지적 AI 기업들은 AI가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 지속가능성을 만들어줄 것이라 자신합니다.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재 분명한 것은 AI 개발과 활용에 엄청난 전기와 에너지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OECD는 데이터와 AI 규모 확장 추세에 따라 에너지 소비는 악화할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했습니다. AI 학습 효율이 좋아지고 있다지만, 그 속도보다 에너지 사용량은 더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2022년에 발간된 ‘AI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AI에 사용되는 에너지와 자원 사용량을 측정하는 표준의 필요성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AI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AI 기술 발전 속도와 비교하면 거의 진전이 없는 셈입니다. 여전히 AI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데이터와 명확한 지표가 부족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기업도 정부도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더 읽어보기- 우리 회사 AI는 에너지 1등급일까? (2024-05-23) #feedback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
·
1
·
[이태원참사]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2014년 4월 16일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도중, 갑자기 뉴스 속보가 뜨기 시작하더니 바로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저게 무엇인가 싶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뉴스 속보가 계속 나오고,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 부상자 수가 점점 늘어나는 걸 보니 “아, 이게 실제구나. 실제로 일어났고, 현재 진행형이구나”라는걸 알아차렸다. 초기만 하더라도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는 많지 않았다.   당시 내가 전해들었던 것은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인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급격하게 변침을 했고, 이로 인해 침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단원고 학생이 8시 51분에 119에 구조요청 신고를 했고, 배는 침몰하고 있었지만, 선내에서는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이 연방 흘러나왔다는 것. 그리고 9시 35분 해경함정 123정이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아, 이제 구조가 시작되나 보다.”라고 느꼈던 나는 안심을 했었다.   하지만 해경 함정이 도착했었던 9시 35분, 기관부 선원 7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해 구조됐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따라 탈출했다는 것과 침몰전까지 172명이 구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선장과 그 밑에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할 수 있겠냐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났고, 결국 10시 30분경 침몰한 세월호는 이후 단 1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현재까지(2015년 4월)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언론은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냈고, 해경 등 구조당국은 구조작업에 우왕좌왕해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의 대상이 됐다.   검찰은 참사 이후,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해 살인, 살인미수, 업무상 과실, 선박매몰, 선원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2014년 5월 15일 구속기소했다.   #그렇게 8년이 지난 2022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다.   4.16 참사가 일어난지 어연 8년, 그 해 4월 16일에 전국민이 4.16 참사 8주기를 추모하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4.16 참사의 표식인 노란 리본과 추모 글이 담긴 글을 올렸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할로윈데이 전전날, 나는 그 당시에 서울시 서대문구에 거주하고 있었고, 구립홍은청소년문화의집에서 서대문구 대표 청소년 축제인 “청청축제” 축제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할로윈데이 전전날인 10월 29일, 나는 우리 축제 기획단이 준비한 2022 청청축제를 신촌 연세로 차없는 거리에서 개최할려고 일찍부터 가서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를 다한 후, 나는 축제 기획단으로서 부스 하나를 맡고 있어 바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2022 청청축제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갈려고 연세대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왜냐면 나도 이태원에 갈려고 했었으니깐.   하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그냥 포기하고 집에 가서 뻗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성당에서 갑자기 “압사 사고로 떠난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라며 기도를 해서 난 무슨 일이 났나 싶었다.   성당이 다 끝난 후, 난 집으로 갔고, 핸드폰을 봤다.   그랬더니 이렇게 긴급 재난안전문자가 와있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 발생. 인근 주민분들과 시민 여러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처음엔 당연히 오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이때도 똑같이 뉴스 속보가 떴었고, 4.16때와 마찬가지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고 했었다. 이때 사망자는 총 158명, 하지만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재현 학생을 포함하면 159명이나 사망했었다. 부상자는 더 많았다. 197명이나 됐으니 말이다.   당시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다 22년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가 가시화되면서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이태원에 몰리면서, 대형 압사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인 KBS가 이태원 참사 속보를 새벽 0시에 처음 보도되자마자, 전 세계의 매스컴들이 숨가쁘게 움직이면서, 같은 시각 KBS 뉴스를 전해 들은 일본 NHK 서울지국도 KBS 보도를 인용해서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각인 후지TV도 정규 방송까지 중단한 채 MBC 뉴스 속보를 인용하여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KBS와 MBC 등 지상ㅍ하 3사가 이처럼 속보 경쟁에서 전 세계적 특종을 하게 된 것은 뉴스를 쫓는 방송인들의 집년 어린 노력의 결과였다.   #압사 사고는 왜 일어났나 압사 사고 이전, 경찰은 인력 부족과 밀집된 인파로 인해 군중 통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건 당일인 10월 29일 18시 17분과 26분 ‘압사’를 언급한 신고 두 건과, 18시 34분 압사 가능성을 제기한 신고 등, 18시에서 사고 직전인 22시 사이 총 79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18시 34분 걸려온 신고 전화는 이태원의 해밀톤 호텔 앞 골목에 이태원 역에서 나온 인파와 클럽에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뒤섞여 압사 사고가 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녹취록도 몇 건 공개되었다.   그 후, 10월 29일 22시 15분경 압사 사고는 해밀톤호텔 서쪽에 있는 내리막 골목길에서 발생하였다. 소방당국은 23시 19분부터 축제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10월 30일 06시 30분 최성범 서울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인명 구조를 위하여 소방 507명, 구청 800명, 경찰 1100명, 기타 14명, 총 인력 2,421명이 동원되었다고 하고, 또한, 장비는 소방 184대, 구청 10대, 경찰 30대, 기타 9대의 총 233대가 동원되었다. 재난의료지원팀 14팀(서울 7, 경기 7)이 출동하였다. 또한 타 시도 구급대에서는 장비 94대, 인력 222명이 지원되었다. #사고 대응은 과연 적절했나? 경찰은 10만 명가량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경찰 137명을 현장 배치했다. 그러나 이는 30만 명의 인파에 비해 매우 적은 인원수로 파악되었다.   용산구청은 당시 이태원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우려하는 ‘핼러원데이 치안여건 분석 및 대응방안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 유지와 인파 통제를 별도로 지시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4시간 전부터 경찰 측에도 압사 위험에 대한 신고가 쇄도했는데, 첫 신고가 발생한 18시 34분으로부터 5시간 뒤인 23시 40분에 첫 경비 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사고 이후, 소방과 경찰이 출동했지만 인파가 몰려있어서 100m 거리를 가는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착했을 때는 아래에 깔린 피해자들의 팔을 잡고 꺼내려 했으나 워낙 많은 사람이 쌓여 있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구조해도 사람들이 뒤엉킨 탓에 핸드폰과 가방 등 소지품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사상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지상파 방송 채널은 특보 체제로 변경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고 발생일 새벽 중앙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여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10월 30일 오전에는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정 최우선 순위를 본건 사고 수습과 후속 조처에 두겠다“라고 밝혔으며, 이태원 사고현장을 찾아 수습 상황을 둘러보고, 정부서울청사 상황실에 설치된 사고수습본부를 방문해 회의를 주재하였다.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오세훈 서울 시장은 네덜란드 출장 중, 사건 보고를 받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사건 당일 개인 일정으로 충북 지역을 방문하여 취침 상태에서, 23시 32분에 사건에 관련하여 처음으로 문자 메시지를 받았으며, 23시 52분에 전화를 받았으나 취침 중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22분 후인 30일 00시 14분 사고를 인지하고, 상황 담당관과 전화통화로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서울로 출발하고, 02시 30분 경찰청에서 지휘부 회의를 갖고 대응 방안을 지시하였다.   # 참사 이후 위반 건축물 다수 존재 사고 발생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173-7 일대로, 이곳은 이태원 해밀톤호텔 왼쪽 50m 길이의 내리막 골목길이다. 길 위쪽은 폭이 5m 이상이지만 아래쪽에는 3.2m로 좁아지며, 사고는 폭 3.2m 골목에서 일어났다.   건축법상 도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폭이 4m 이상이어야 하고, 해당 지역 건축물현황도에도 도로 너비는 4m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해밀톤호텔은 도시계획상의 건축한계선이 설정되기 전인 1970년에 준공되어 건물의 대부분(건물 출입구 포함)이 건축한계선을 넘은 상태였다. 게다가 건축한계선이 설정된 후에도 골목 하단부에 건축한계선을 침범하는 분홍색 철제 가벽을 도로에 바로 붙여 10m가량 무단 증축했다. 하지만 해밀톤호텔은 5억여원의 이행강제금을 납부해가며 무단 증축한 부분을 계속 유지해왔다.   #반응과 여파 1.정부 사건 발생 지역인 이태원동을 관할하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0월 30일 새벽 3시 "구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간들이 제게는 행복이었다"라고 했다가 비판을 받고 오후 4시 "참담할 따름"이라고 수정된 입장을 발표했다.   10월 30일 아침에 대국민담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정말 참담하다, 일어나선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발생했다"라는 소감을 밝히며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또한 31일에는 배우자 김건희와 함께 서울광장 합동분향소를 찾아 헌화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가애도기간을 11월 5일 24시까지로 정하고, 전 공공기관과 재외공관에서는 조기를 게양,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애도를 표하는 검정색 리본을 패용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국가애도기간 동안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다른 사건에서도 사용하던 '謹弔(근조)'가 쓰인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으로 착용하라'는 공문을 다시 보냈고, 왜 글씨 없는 리본으로 바꿔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글자 없는 검은 리본 착용, 누가 무슨 이유와 근거로 지시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2.축제와 행사 추모 분위기로 인해 할로윈 행사를 준비하던 곳들의 행사 취소가 잇따랐다.   에버랜드와 롯데월드는 10월 2일부터 11월까지 진행하던 할로윈 축제와 연계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SM타운 원더랜드 2022' 행사를 취소하였다. 또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이천점은 30일 오후 3시부터 진행할 가수 홍진영의 미니콘서트를 비롯, 모든 이벤트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월드와 대구광역시 남구청, 홍대 앞 클럽 에프에프는 예정되어 있던 할로윈 행사를 전면 취소하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30일 공식 인스타그램에 '자백' 무대인사를 취소한다고 알렸다. 부산원아시아페스티벌은 30일 공지를 통해 "오늘 저녁 7시부터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부산 원아시아페스티벌 K-POP 콘서트가 취소됐다"라고 알렸다.   스타벅스, CU, GS25 등의 음식 업계에서도 할로윈 관련 상품의 판매를 중단하였고, KBS와 SBS 등 모든 방송사 역시, 방청객들이 몰리는 군중 밀집 행사 프로그램 기획 및 제작에 대해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SBS 예능본부의 곽승영 팀장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출연자 및 방청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SBS 가요대전 등 군중 밀집 행사 프로그램 생중계 제작 시에 의료진과 안전 요원을 의무적으로 배치하겠다"라고 설명하였다.   # 정부의 국가 애도 기간 선포 이후   본 필자는 사건이 일어났었던 당시, 해당 장소를 방문할려고 했었지만 안했었고, 필자의 형도 방문할려고 했었고, 사촌누나는 직접 방문을 했지만,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인파가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고 했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정말 다행이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필자는 국가 애도 기간이 끝나는 22년 11월 5일, 이태원역에서 현재 필자가 소속된 단체 중 하나인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이라는 단체와 함께 추모행사(?)에 나섰다. 또한, 인터뷰도 했었다.   #2023년 10월 29일 10.29 참사로부터 어느덧 1년, 10.29 참사 1주기를 맞이했던 날이었다. 이때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 도로가 아예 통제가 되고 있었다. 바로 10.29 참사 1주기 추모 행사 때문이었다.   이 행사에서는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촉구와 관련 내용에 대한 시위가 이루어졌다. 필자도 참석하여 한자리를 빛냈다.   이 행사는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출발해 삼각지역, 시청역까지 가는 행진도 같이 진행되었다.   # 10.29 참사가 일어난 그날, 그 시간부터 현재 2주기에 이루기까지 다가오는 10월 29일 화요일은 10.29 참사가 발생한지 2주기째이다. 2년 동안 정말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일단 경찰의 부실대응 논란부터 안전 매뉴얼 무용지물 논란, 해밀톤호텔 불법 증축 논란, 압사 유발자 존재 의혹, 압사 유발자에 관해서 경찰 수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처벌이 가능/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게 나오면서 더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후, 주점 구조 거부 논란과 남성 시민이 여성 환자 심폐소생술 시도 주저 루머, 사후 시민의식 논란, 서울관광재단 이태원 홍보행사 논란과 일부 구급차 사망자 이송 논란까지. 이 외에도 정부 관련 논란과 특수본(특별수사본부) 관련 논란, 공직자 언행 논란, 정치계 관련 논란, 언론 및 인터넷 관련 논란, 추모 공간 관련 논란과 사후 사건 및 사고, 국정조사에서의 논란까지. 정말 각종 논란들이 2년동안 오갔었다. 현재는 잠잠한 상황이긴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었다. 그리고 참사 이후, 1주기가 되기 전, 23년 6월 29일, 국회법 제85조의2제1항에 따라 박광온, 배진교, 용혜인, 강성희 의원 등 183인으로부터 신속처리안건 지정동의의 건이 제출되어, 제407회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2023.06.20.)에서 신속처리안건 지정동의의 건 가결되어, 국회법 제85조의2제2항에 따라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23.8.31. 행안위 의결 및 법사위에 회부되었고, 국회법 제85조의2에 따라 2023.11.29. 본회의가 부의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2024년 1월 9일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이 법률안에 대해 취임 이후 9번째 법률안 거부권을 사용했다. 다만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민주를 비롯한 야권 측에선 특별법 입안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러다 2024년 5월 2일, 다시 한 번 특별법안이 가결됐다. 이번 건은 여야가 합의하여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이 나와 이전과는 다른 모양새로,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의 패배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에 대한 반동이며, 실제로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의 회담을 통해 여야 간 협치와 정치의 복원이 시작됐는데, 이태원 특별법 합의는 구체적 첫 성과라 생각한다“며 환영 의사를 밝히기도 하는 등 급물살을 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마무리 10.29 참사 이후, 관련 특별법이 가결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합의 하에 가결되었다는게 놀랍기도 하다.   이제 곧 있으면 10.29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다들 10.29 참사 추모위원 및 추모 인증샷과 자기 동네에 현수막 걸기 행동에 동참해주길 바란다. 
·
[이태원참사] 2년 전 10월 29일을 기억하고 행동하기
 2년 전 생일날엔 유독 밤에 연락이 많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생일이지만 기분이 나지 않아서 다음 날 있을 영어 시험을 핑계로 집에 있었던 날, 그래도 시험 전 날인데 모의고사라도 한 번 풀어봐야지 하면서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정작 눈은 랩탑 모니터 속 넷플릭스를 향해 있던 그 때. 연달아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에 그제서야 이 황당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생일이니까 다들 내가 당연히 놀러 나갈 줄 알았던 것 같다. 또 이태원에서 약속잡는 걸 좋아했으니까 혹시나 참사 당일 현장에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하고 밤새 기사를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실감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고 참담한 일인지.  참사 다음 날 시험장에 유독 빈자리가 많았는데, 문제 푸는 내내 그 자리들이 신경쓰였다. 혹시 저 자리에 앉았어야 할 이가 어제 이태원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거면 어떡하지. 시험 끝나고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통수를 보는데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거나, 취업준비를 하거나, 국가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로 보는 시험이라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많아봤자 30대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사람들 중에서 혹시 누군가 어제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면 어떡하나, 어제 나처럼 기사를 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진 않았을까,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 날 입은 옷도, 날씨도 다 기억 날 정도로 2년 전 그 날이 기억나는 게 신기하단 생각을 하면서 마치 세월호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날, 맨투맨 티를 입고 나왔다가 너무 더워서 어깨 위에 걸쳐놓고 걸어다녔던 날, 낮에 중학교 동창 시형이네 아줌마가 하시는 문방구에 갔었다. 아줌마랑 뉴스 속보를 보면서 사람들 다 구조됐다던데 하는 얘기도 나눴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보라는 기사가 떴고, 이후 말도 안 되는 팽목항 영상들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사건도 세월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처럼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크게 온 감정은 무력감. 이만치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인 파악도 안되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도 이뤄지지 않는 걸 보면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놀러갔다 죽었다.’ 기성 세대로서 어린 친구들을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온갖 교묘한 말로 여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정녕 이 사회의 주류라면 내가 이 곳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만약 2년 전 이태원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가 하루하루 고되게 살다 그 날 하루 겨우 숨 돌리려 이태원을 찾았던 거라면? 그게 죄인가? 아니, 이태원의 밤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죄인가? 쏟아지는 인파로 늘 북적이는 할로윈 이태원인데 왜 그 해에만 유독 통제가 안 되었을까? 왜 공적 통제가 그 즈음에만 허술했던 걸까? 다양한 변수들을 찾고 추려서 원인을 알아야내야만 하지 않을까? 그걸 끝까지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이들을 위해서? 눈물 분노 응징의 3단계를 거치는 것 말고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혼자 밥벌이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사회에 조금의 책임감을 가지는 게 성인 된 도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이런 작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지랖이라거나 현생 살라거나 하는 무책임하고 힘빠지는 말들만 돌아왔다. 그런 말을 하는 인간들과는 당최 상종을 하고 싶어지지 않고, 그래서 이런 얘길 아예 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근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이 땅을 영영 떠날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여길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하지 않나, 그게 남은 이들의 책무가 아닐까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는 참사 이후 내 생일만 되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분명 그 날 나도 이태원에 있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즈음 지치지 않았다면 분명 밤에 놀러 나갔을거다. 올 해 10월 29일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을텐데 벌써부터 여러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이런 막연히 미안하고 무력한 마음을 갖는 것 외에 뭐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이태원 참사를 주제로 한 모임에 나가게 됐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모두 이태원 참사에 대한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마음의 빗장을 풀고 편안히 있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머릿수 하나 정도 보태는 소심한 마음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뭔갈 해볼 수 있을까도 싶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더 이상 혼자 하는 고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든든해진다. 
·
대통령경호처의 ‘가방 뒤지기’… 인권위는 “우려” 의견 [우상의 정원]
기각 결정은 아쉽지만, 유의미한 의견이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책임은 피하고 체면은 지키는 판단으로 이름값을 지켰다. 인권위는 지난달 30일, 대통령경호처와 국토교통부, 그리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의견을 밝혔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 시 이용객 소지품 검사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내부 기준을 마련하라는 것.  다만 인권위는 소지품 검사 자체가 인권침해나 차별행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지난해 8월, 용산어린이정원 측의 과도한 이용객 소지품 검사에 관해 진정을 넣은 결과다. 먼저, 위 영상부터 보자.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이하 용산시민회의)’ 대표가 용산어린이정원 측으로부터 소지품 검사를 당하는 영상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7월 13일과 22일 두 차례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했다. 당시 김 대표는 보통의 이용객들처럼 엑스레이 보안 검색대를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용산어린이정원 측은 김 대표의 가방 지퍼를 직접 열고, 소지품을 하나씩 살폈다. 서류 파일까지 꺼내 그 안에 들어 있는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내용을 확인했다. 소지품 검사를 진행한 보안 검색대 직원의 목에는 “대통령실 경호부대” 신분증이 걸려 있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수위 높은 ‘가방 뒤지기’는 1분 가까이 진행됐다. 김 대표와 함께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한 용산 주민 5명 역시 똑같은 수위로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관련기사 : <경찰은 왜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 뒤를 쫓아갔을까>) 김 대표와 용산 주민들은 “용산어린이정원 측의 보안 검색은 통상적인 검색 수준을 넘어서는 행위로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피해자들의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셜록은 지난해 8월 25일, 이 사건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권위 침해구제2위원회(이충상 위원장)는 진정 이후 약 1년 1개월 간의 검토 끝에 결과를 내놨다. 대통령경호처 처장, 국토교통부 장관, LH 사장을 상대로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안 검색을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실시하고, 구체적인 내부 기준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LH는 국토교통부로부터, 용산어린이정원을 포함한 용산 미군기지 반환부지에 대한 유지 관리 및 운영을 위탁받은 주체다. 또 “용산어린이정원은 대통령 경호구역”이라는 이유로 대통령경호처도 관여돼 있다. 인권위는 “대통령실 인접 구역 출입자에 대한 보안검색 등 경호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명백히 위해물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물품까지 검색하고 그 내용까지 확인하는 행위는 경호에 필요한 통상적인 보안 검색 수준을 넘어서 우려가 있다“고 봤다. 이어 인권위는 대통령경호처 등 기관들의 행위가 기본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용산어린이정원의 보안 검색대 직원들이 진정인들이 보유한 문서의 내용까지 열람한 사실이 인정되는데, 육안으로 보더라도 단순 서류에 불과하여 위해물품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도 굳이 열람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이러한 검색 관행이 지속되는 경우 헌법 제17조에서 보장하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등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제한될 소지가 없지 않다.” 다만, 인권위는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진정 자체에 대해서는 ‘기각’을 결정했다. 인권위는 “용산어린이정원은 국가중요시설인 대통령실과 인접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대통령경호법에 따른 경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으로 피해자들을 상대로 한 보안 검색은 법률상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분단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안보적 특수성이 있고 국제적 테러의 증가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점, 최근 발생한 국회의원 등을 표적으로 하는 피습사건 등을 고려할 때 경호활동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점” 등을 언급하며 기각 결정 사유를 설명했다. 피해 당사자인 용산 주민 김교영 씨는 1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겉으로 봐도 위해성이나 규정에 위배될 만한 사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방에서) 서류까지 (꺼내) 뒤져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조치“라면서, “그럼에도 인권위가 (인권침해 여부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린 건 아쉽다”고 말했다. 김은희 대표는 이번 인권위 결정을, 아쉬움 속에서도 다행스럽게 여겼다. “정부 기관이 국민들의 인권 또는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 조심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시정해야한다고 (인권위가) 의견을 말한 거지 않겠습니까.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민들 편으로 보이진 않지만, 일정 정도 국민들의 분위기와 눈치를 보고 이런 의견을 (표명)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은희 대표는 지난해 8월, 이른바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다. 셜록은 김 대표와, 그와 함께 동행한 용산 주민 5명이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한 사실을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관련기사 :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들, 용산정원 출입금지 당했다>) ‘대통령 부부 우상화’ 논란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후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한 시민이 최소 23명이 추가로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관련기사 : <최소 23명 더 있다… 용산어린이정원 ‘블랙리스트’>) 이들 모두 용산어린이정원 토양오염 문제 등 그동안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을 비판해온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출입금지를 당한 시민들은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무효 확인’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오는 17일에도 서울행정법원에서 공판이 진행될 예정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
5
·
[이태원참사] 당신과 약속하는 기억 투쟁: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과 피해자 권리 실현을 향해
#1 2015년 4월 세월호참사 1주기를 앞두고 매주가 투쟁이었다. 국가는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는 것마저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았다. 가족들은 경복궁 앞에서 노숙에 들어갔고, 하늘에서는 매몰차게 비가 쏟아졌다. 화장실조차 제공되지 않아 가족들은 박스에서 일을 처리하는 수모까지 감내했다. 특별법에 따라 독립된 조사 기구를 설치하라는 요구조차 불온시하며 물리력을 동원해 추모마저 봉쇄한 정권에 분노했다.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추모대회 도중에 가족들이 투쟁하고 있는 경복궁으로 달려갔다. 최루액 섞인 물대포가 사람들을 향해 조준되었다. 그런데도 가족들을 만나겠다며 새벽 내내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학우여, 분노의 행진에 나서자!”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2 2023년 10월 29일 8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서 10.29이태원참사(이하, 이태원참사) 1주기 추모대회가 열렸다. 8년 전 대통령은 추모를 뒤로한 채 해외로 떠났다면, 2023년 대통령은 가족들의 추모대회 참석 요청을 ‘정치집회’로 매도하며 홀로 종교행사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이태원 사고 현장이든, 서울광장이든, 성북구 교회든 희생자를 추도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지만, 참사 1주기를 앞두고도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진상·책임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은 점에서 이는 이율배반적 언사였다. 수많은 이들의 꿈과 미래가 한순간에 파괴되었지만, 이를 책임지는 국가는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보다 유흥을 즐겼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을 탓하는 비열한 처사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운동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기억’입니다. 이는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 망자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참사를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망각의 시간을 주도하려는 국가권력에 맞선 저항입니다. 또한, 기억은 시민들에게 애도와 연대를 요청하는 메시지로 등장합니다. 기억은 사라진 존재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고, 기억을 실천하는 존재를 주체로 세움으로써 과거와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과 책임을 끌어냅니다. 우리는 기억이 망자와 나, 그리고 이 절망을 함께한 이들을 연결해주고, 고통 속에서도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가는 강력한 ‘실천’이라 믿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를 앞두고, 저는 지난 1년간 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워 쟁취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과정을 기억함으로써, 당신과 앞으로의 이태원참사 기억 투쟁과 재난참사 운동의 방향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1.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의 시작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는 참사 직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감각을 학습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 이태원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에서 청문회를 비롯한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경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에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1월 17일, 국조특위는 구조 실패와 예방 및 대비의 미비 등 국가 책임 일부만을 확인한 채 활동을 종결했습니다. 그에 앞서 1월 13일, 경찰 특수본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6명을 구속기소 했지만,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고위급 인사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수사조차 진행하지 않은 채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윗선에 대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 정부 기관의 비협조와 위증, 짧은 조사 기간, 그리고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유가족과 시민이 배제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곧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독립적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또한, 피해자와 논의도 없이 일방적 결정으로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바라던 추모분향소와 추모대회에 대한 불허와 철거 시도, 참사 직후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지원 부재 등 애도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행태 역시 부각되면서 ‘피해자권리 보장’을 법제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참사 100일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3월 2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청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청원동의를 얻기 위해 전국 순회에 나섰고, 청원 시작 열흘 만에 5만 명(100%)의 동의를 달성했습니다. 4월 20일, 국회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하게 됩니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 183명이 참여해, 21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이 되었습니다.   -참사 70일 즈음, 이태원 헤밀턴 호텔 골목길 2. 기억하겠다는 약속,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하라!” 한 달이 지나도 국회의 시간은 멈춰있었습니다. 특별법 제정은커녕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도 법안이 상정되지 못했습니다. 6월 7일, 유가족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에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에게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도보 행진에 나섰습니다. 한여름 장대비를 맞으며 투쟁한 가족들의 바람은 임시국회가 종료되는 6월 30일 전에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입법될 수 있도록 국회의 노력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특별법을 ‘정쟁 법안’이라며 계속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고가 사건인지 참사인지를 논하는 것부터, 참사 발생의 원인과 이후 수습의 미비함을 밝히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논의가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여당은 ‘정치적’이라 떼를 쓰며 법안을 반대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강조한 ‘피해자 지원’에는 정작 피해자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정치적 권리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입법 논의가 가로막힌 가운데 6월 20일, 유가족 두 분은 곡기를 끊고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단식농성에 참여한 최선미 씨는 참사 1년을 돌아보며 “이 나라에서 유가족이 되면 겪어야 하는 거의 모든 일 겪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외면당하고, 진상의 실마리조차 차단된 상황에서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슬픔을 회복하기보다 진상을 은폐하려는 국가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습니다. 서명운동, 도보행진, 거리농성, 단식 등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지난 재난참사 유가족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의 요구가 억압되고, 또 다른 비극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혀야 했던 재난참사를 떠올려 보면, 참사는 단순한 인명 피해뿐 아니라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망각과 모욕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현재적’입니다.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6월 30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다짐으로 머물렀던 진상규명이 드디어 법·제도적 차원에서 국가의 역할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가족들은 안건 심의 촉구, 행정안전위원회 법안 통과 촉구, 특별법 본회의 통과를 재차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특별법 제정 투쟁과 동시에, 참사 책임자 엄벌, 추모할 권리를 박탈한 공권력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참사 희생자와 시민을 향한 정치인의 혐오 발언 규탄,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인식 변화를 위한 활동도 펼쳤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태원참사의 진상이 밝혀지길 바라며 2023년 10월 29일 1주기를 맞이했습니다.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특별법 제정'의 요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참사 발생 400일이 되는 12월 2일에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2022년 12월 16일 살을 찢는 추위 속에서 가족들은 황망한 죽음의 이유를 밝혀달라며 49재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투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규명을 지연하고 방기하는 국가의 행태에 책임을 묻기 위해 오체투지를 전개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온몸을 붙여 꽁꽁 언 땅의 냉기를 받아들였던 가족들의 투지는 해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여야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본회의 통과가 세 차례나 미뤄졌고, 가족들은 여러 차례 양보와 법안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특별검사 임명 요청을 삭제하고, 조사에 불응할 경우 제재는 과태료로 완화했습니다. 조사위원회 활동 연장 기간 단축, 유가족 몫의 조사위원 추천권도 삭제했습니다. 이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했을 때 아쉬운 결과였습니다. 세월호특별법은 총 17인의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중 희생자가족대표회의에서 3인을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양보를 택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이 여야의 분열이 아닌 협의와 타협의 결과로 이뤄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총선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가 된다며 법 시행일까지 총선 이후인 4월 10일로 박아두자는 여당의 요청마저 수용했습니다. 2024년 1월 9일 참사 438일 만에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집단 퇴장했고 야당만의 단독 통과라며 비난했습니다(여당 소속 권은희 의원만 특별법 찬성). 여당은 바로 국회 로텐더 홀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이태원참사 더 조사할 게 없다”,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가졌다”, “참사를 정략적으로 악용한다”라며 특별법을 폄훼하였고, 18일 대통령에게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며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분향소에 걸려있던 영정을 내리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까지 행진에 나섰습니다. ‘위헌’이니, ‘정쟁’이니 날카로운 언어를 내리꽂으며 분열의 책임을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비정한 정치에 눈물을 머금고 삭발까지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1월 30일, 끝내 정부는 피해지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특별법을 거부했습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에 나선 가족들, 한겨레신문, 2023.12.20.     3. 진상규명의 첫걸음을 떼다: 이태원참사특별법과 쟁점 4.15총선에서 준엄한 경고를 받은 정부·여당은 야당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다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참사의 진상규명이 피해자와 유가족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유가족보다 야당과의 논의를 우선했다는 점은 여전히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을 진상규명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정부·여당이 삭제를 요청한 것, 즉 쟁점이 되었던 사항은 조사위원회의 ‘압수수색 영장청구 의뢰권’과 ‘불송치·수사중지 사건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입니다. 여기서 영장청구의뢰권의 경우 ‘영장청구권’과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이를 독소조항이니, 위헌적이니 훼방을 놓았습니다. 위의 권한은 과거 조사위원회에도 존재했고, 실제 정부 기관이 자료제출과 진상조사에 성실히 협조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데 무게를 두며, 정부·여당의 삭제 요청을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였습니다. 5월 2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이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찬성 256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습니다. 5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의결되었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뒤틀린 국가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투쟁과, 참사의 고통을 나눈 시민들이 함께 진상규명의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4. 법조문에 내려앉은 ‘피해자 권리’와 다시 시작되는 기억 투쟁   -2024년 5월 2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정식 명칭은 ‘10·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입니다. 10년 전 제정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하면 제목에서부터 ‘피해자 권리보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안 곳곳에 ‘권리’와 관련된 조항도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참사의 법안 중 무엇이 더 좋은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10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이태원참사에서 피해자권리 실현의 과제로 결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고 한 달 뒤인 2014년 12월 10일, 진실 은폐와 국가폭력에 맞섰던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권리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의 존엄을 해하는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것’을 다시 결의하며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4.16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선언문에는 연대할 권리, 참여할 권리, 안전할 권리, 진실을 알 권리, 애도할 권리, 행동할 권리, 저항할 권리,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 등 열세 개의 조항을 통해 세월호참사 이전과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짐들을 적어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란 계속되는 각종 재난과 참사에 연대하는 일임을 밝히며, 피해자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투쟁만큼 권리주체로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약속했습니다. (피해자의 권리) 피해자는 부당한 해를 입었고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정부와 책임 있는 대표자로부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피해자는 사건 해결의 전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8항 특히 4.16인권선언의 8항인 ‘피해자의 권리’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제3조(피해자의 권리)와 연관됩니다. 이는 세월호특별법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조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권리는 총 8개의 호로 ①진상조사 과정 등 참여할 권리, ②혐오로부터 보호받으며 조력을 받을 권리, ③개인정보·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④애도의 권리, ⑤피해지원을 받을 권리, ⑥추모사업·공동체회복 등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⑦배상 및 보상받을 권리, ⑧그 밖에 피해자의 권리로 규정되어 있고, 이 조항들은 4.16인권선언과 깊이 공명합니다. 제6조(특별조사위원회 설치)에서 ‘10·29이태원참사 이후 희생자와 피해자의 권리침해 등 피해 실태 및 구제방안에 대한 조사에 관한 사항(강조: 필자)’을 특조위의 업무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이란 참사의 발생 원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와 희생자가 어떤 권리침해를 겪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또한, 세월호특별법은 피해자를 ‘명예훼손’의 대상이나(제5조, 4항), 단순히 지원받는 존재로 여긴 반면, 이태원참사특별법의 경우 제3장 ‘피해 구제 및 지원 등’ 제55조(피해자 등의 참여 보장) 조항인 ‘국가가 피해자 및 피해지역에 대한 지원계획을 수립·시행할 때에 피해자 등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하여야 한다’를 명문화함으로써 피해자의 참여보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제1조(목적)에서 ‘공동체 회복’을 통한 안전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4장 공동체 회복 지원 등에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국가의 노력과 추모사업 등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즉, 참사의 진상규명을 통해 도래할 안전사회란 재난을 예방하는 것만큼 사회적 성찰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담긴 ‘피해자의 권리 보장’은, 그동안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쌓아온 약속의 흔적이자, 다짐의 결실입니다. 참사의 비통함 속에서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투쟁했던 우리는 ‘피해자권리 실현’이라는 의제를 법 조항으로까지 가져왔습니다. 다만, 이것이 법 조항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또 다른 기억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9월 13일,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따라 조사위원회 9인이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위원장,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특별법 제정과 특조위의 활동으로 참사의 진상규명이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상규명의 과제를 특조위에 맡겨놓기보다는, 아직 듣지 못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 더하여 그들의 말 속에서 우리가 빼앗겼던 권리는 무엇이고, 연대를 통해 되찾아야 할 권리는 무엇인지 발견하는 사회적 실천이 요구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권리는 법조문에 새겨진 문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와 행동으로 실현됩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 그리고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에 함께했던 우리들의 목소리를 모아, 이 시대의 필요한 권리를 끊임없이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 목소리와 우리의 연대, 기억 투쟁 속에는 분명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약속과 다짐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10.29이태원참시2주기시민추모대회,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서울광장
·
3
·
평화 문학에 의해 탄생한 노벨상과 전쟁의 무기가 된 노벨상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이유 2024년 노벨상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AI가 노벨상 과학 분야를 휩쓸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고, 노벨 문학상 역시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수상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5월이 되면 항상 그의 책을 찾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뜻깊은 사건이자 이변이었다.  그 이변에 힘입어 국내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는 일시적으로 마비됐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려는 독자들이 몰린 탓이다. 현재 온라인 서점 인기 순위 1~10위 모두 한강 작가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자가 가득하다. 노벨상을 만든 건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 현재의 노벨상이다. 그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노벨 재단을 만들었고, ‘문학, 평화,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분야에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다. 과거나 현재나 노벨상의 상금이 큰 이유다. 한편, 인류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요하는 노벨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에 공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프레드 노벨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나마이트가 인류를 해치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제정됐다.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다이나마이트는 본래 자본주의가 발달하려던 시기와 겹쳐 도로 건설을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에 사용됐었다. 노벨은 단독 특허권자였기 때문에, 다이나마이트가 쓰이면 쓰일수록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 다이나마이트는 곧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쓰이게 된다. 바로 전쟁이다. 당연하게도 이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로 인해 알프레드 노벨에게 ‘죽음의 상인' 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다이나마이트를 판매한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다이나마이트가 처음 전쟁에 사용된 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때였다. 독일 통일을 이루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1870년 7월 19일부터 1871년 5월 10일까지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각각 약 14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프로이센은 약 45,000명의 사망자와 9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쟁의 승리는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전쟁 승리에는 다이나마이트의 공이 컸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요새를 파괴하는 데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했다. 액체 폭약으로 효율성과 효과성이 좋았던 다이나마이트는 프랑스 요새를 부수는 데 무수히 사용됐고, 그 결과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 전쟁 승리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이뤘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에게 알프레드 노벨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원인인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이자, 이를 돈벌이에 사용한 상인이었다. 때문에 프랑스는 알프레드 노벨을 일컬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렀다.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의 별명을 알게 된 건 어이없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목격한 뒤였다. 프랑스의 한 언론사는 알프레드 노벨의 형의 부고를 알프레드 노벨의 부고로 착각해 아래 제목과 내용으로 부고 기사를 내보낸다.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사람을 더 많이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어제 죽었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에서 낸 기사여서 그런지 감정이 게 많이 느껴지는 제목과 리드다. 노벨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의 발명품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해 큰 죄칙감을 느낀다.  전쟁으로 평화에 대한 국제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인 당시, 노벨 역시 평화와 과학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재산이 이에 평화와 과학의 발전에 이어지길 바랬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유언장을 고쳐 새로운 유언장을 쓰게 된다. 그 내용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노벨 재단을 만들어, 국적과 성별에 상관없이 ‘문학, 평화, 물리학, 화학, 생리학, 의학' 분야에서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만들고, 큰 상금을 주어 그들의 지치지 않고 계속 인류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1901년 노벨상의 탄생이다. 노벨상 수상작들, 새로운 무기로 쓰이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까지 이야기만 보면 노벨상의 탄생에는 전쟁 무기로 변질된 발명품을 만든 과학자의 반성과 회의감, 자책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문득 한 가지가 궁금했다. 노벨의 다이나마이트처럼, 그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전쟁의 살상무기로 쓰이고 있는 노벨상은 없을까?  궁금증을 쫓아 내용들을 찾아봤다.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많이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핵무기부터, 현재도 전쟁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도 쓰이고 있었다. 1921년과 1922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핵무기가 됐다 핵 물리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두 명이다. 첫째는 알버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 물리학상), 니엘스 보어(1922년 노벨 물리학상)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질량 에너지 등가 법칙(E=mc2)은 핵무기 이론의 기반이 됐다. 엔리코 페르미는 핵 분열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 맨허튼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투화지점의 온도는 약 4,000도까지 올라갔고, 해당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흔적없이 증발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4만 명의 민간인이 증발했고, 그 중 3만 명은 한국(당시 조선인)이었다. 군인은 2만 명 정도가 증발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증발했고, 그 중 1만 명은 한국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불필요하고, 끔찍하며, 비참한 희생자들이다. 1919년의 노벨 화학상은 유대인 학살의 무기가 됐다 191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건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였다. 그는 1909년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인 일명 ‘하버법'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9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 발명을 통해 화학 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식량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인류가 기아에서 벗어나는 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임에도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국군주의자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인 독일의 승리를 위해 화학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치명적인 염소가스와 독가스를 개발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데 공헌했다. 덕분에 그를 부르는 또다른 별명인 “화학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때 만든 대표적 무기가 치클론B로, 이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가스로 사용됐다. 한편, 그는 독일인이긴 했으나 유대인으로 나치당에게 홀대를 받았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가족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고, 자시이 만든 치클론B 가스에 의해 죽었다. 1964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2024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무기로 사용 중이다 가장 최근의 전쟁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노밸상의 업적이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이언빔(Iron Beam)이다. 그 바탕은 196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찰스 타운스, 니콜라이 바소프, 알렉산더 프로호로프의 공로인 ‘레이저 기술'이다. 이스라엘 방산 기업 라파엘이 만들었다. 라파엘은 2014년 싱가포르에서 에어쇼에서 처음 아이언빔을 선보였다. 라파엘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언빔은 “100kW급 고에너지 레이저 무기 시스템(HELWS)으로,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범위한 위협 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무력화하며, 빛의 속도로 공격하는 무제한 탄창을 갖추고 있다." 아이언빔은 지난 2020년 팔라스타인 가자지구 인근에 실전 배치됐다. 아이언빔은 이스라엘-하마서 전쟁 당시 수백 발의 하마스 미사일을 요격한 아이언돔의 단점을 보완한다고 여겨진다. 노벨상의 업적이 기존 무기의 보완재의 기본이 된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제시한 사례는 불과 몇 개지만 사실 이외에도 많다.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업적인 트렌지스터는 현대 군사 장비 필수품으로 미사일 유도 시스템, 레이더 기술 등에 활용되고 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업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은 GPS 개발에 영향을 미쳤고, 현재 GPS는 군용에서 정밀 유도 미사일과 드론 운영, 병력 위치 추적 등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2010년도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업적인 꿈의 물질이라 불리는 그래핀은 초경량 방탄복 제작 활용에 착수된 상태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AI는 새로운 다이나마이트가 될까 202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필드와 제프리 힌턴은 모두 “인간 이해 벗어난 AI 기술 발전이 두렵다"고 말했다. 특히 제프리 힌턴 교수는 “앞으로 수년 내에 AI의 위협을 다룰 방법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경고는 AI 기술에 대한 경고였지만, 개인적으로 더 무섭고 두려우며, 경고를 보내야 할 대상은 인간 자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스스로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개발하고 무기로 만들어 나와 다른 인간을 겨냥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앞선 사례들은 그런 인간들이 만든 사례다. 알프레드 노벨의 다이나마이트처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결과다.  무언가가 처음 의도와 달라졌을 때는, 처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제정한 진짜 이유, 그것은 평화였고, 그 평화에 불을 지핀 건 문학이었다. 노벨상 제정의 결정적 역할을 한 평화를 말한 문학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이 만든 다이나마이트로 고민에 빠졌던 시기, 유럽 전역에 한 책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책 제목은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Die Waffen niendr!>. 반전문학*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로 작가이자 평화 운동가였다. 책은 전쟁의 참혹함을 여성의 시선에서 묘사하며 평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당시까지 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당연시했고 심지어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책은 그런 생각과 시각을 비판하고, 독자들이 전쟁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저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는 이 책에 힘입어 오스트리아에 국제 평화 협회를 만들고, 국제 평화운동에 인생을 바친다. 자신의 책이 자신을 평화운동가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라운 건 그는 비록 1주일이었지만 노벨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사후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되는 걸 걱정하던 노벨은, 자신의 전직 비서가 일으킨 국제평화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직접 편지와 성금을 전달하며 그의 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베르타 폰 주트너 역시 노벨에게 편지를 보내며 평화의 중요성을 계속 말했고, 이는 노벨상 제정과 노벨상에 평화부문이 포함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의 무기가 된 상황에서 평화 자체가 노벨이 가장 염원한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노벨상은 1901년 처음 수상을 시작했고, 베르타 폰 주트너는 1905년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쓴 반전문학은 유럽 전역에 평화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고, 이 평화 운동과 베르타 폰 주트너의 설득은 노벨의 노벨상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서 노벨상 제정 뒤에는 평화를 말하는 문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뒷배경은 2년차로 접어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1년차가 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 전쟁들에서 노벨상이 새로운 무기로 변한 2024년에 강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이게 맞나. 이게 처음의 취지였나. 평화를 말할 수는 없는 건가. 평화는 진정 불가능 한 걸까, 라고. 무기를 내려 놓거나, 무기가 안 되게 할 수는 없는걸까 라고. 가장 비폭력적인 저항이라 더욱 값진 노벨 문학상 문학으로 인간을 탐구한 한강 “세계 곳곳에서 전쟁인데, 무슨 잔치"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냈다"며 한강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여기서 말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우리나라에 있었던 5・18 민주화 운동과 4・3제주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책 모두 국가가 개인을 폭력으로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쓰고 있다. 폭력은 한강 작가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계기다. 한강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을 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때문인지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다양한 모양의 폭력이 나오고, 그 안에서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할 수 없었던 인간 말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이 장면이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 창비/ 2014) p.117 쏠 수 없는 총,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건 이런 총이 아닐까 싶다. 절대로 무기가 될 없고, 무기로 쓰는 인간조차 없는 그런 총 말이다. 그런 시대가 되고, 그런 시대가 되기 위해 인간들이 합심한다면 어쩌면, 평화를 말했던 문학에 영감을 받아 제정된 노벨상의 본래 취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또 그런 시대를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 시대를 위해 전쟁이라는 참상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강 작가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인데, 무슨 잔치"나며 노벨 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노벨 문학상의 품격이 이런 건가 싶다. 2024년의 노벨문학상 선정에 주된 이유가 됐던 작품인 <소년이 온다>는 지난 2014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찍혀 사상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종도서(당시 문화부 우수도서) 선정에 탈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역시 국가의 폭력이었다. 그런 국가 폭력에 가장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얻은 승리가 노벨문학상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만큼, 이참에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다행히 내방 책장에는 그의 책들이 여러권 꽂혀 있다. 그간 평화를 생각하면서 한강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노벨상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친, <무기를 내려놓으라!> 역시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도 함께 찾았으면 좋겠다. 부디, 현재도 전쟁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곳곳의 무기가 내려놓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을 소재로 창작되는 문학
·
4
·
[6411의 목소리] 파행적 문화행정과 ‘미인도’ 지키기
파행적 문화행정과 ‘미인도’ 지키기 (2024-10-14) 이채원 |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사무국장 복합문화예술 공간 ‘미인도’를 둘러싸고 성북문화재단이 파행적 행정을 하는 데 대해 지난 6월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 곽병국 서울시 성북구 미아리고개 하부에 있는 공간 ‘미인도’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제안하고 가꿔온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흩어진 삶을 모아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안에서 피어난 ‘시민’이다. 나는 활동가이자, 문화기획자이고, 예술가이다. 나는 발로 뛰어 시민의 권리를 외치기도 하고, 시민이 발붙일 터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시민이기를 노래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2016년 나는 미인도 인근 성신여대를 다니던 신입생이었다. 극회에서 연극을 기획하며 성북문화재단과의 연결을 시도하다가 재단 담당자의 소개로 ‘아름다운 미아리고개 친구들’(아미고·2016년 미아리고개예술마을만들기 워킹그룹 활동의 일환으로 꾸려진 주민 커뮤니티)과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아미고는 미인도 활성화를 목표로 활동하다가 2017년 ‘협동조합 고개엔마을’로 조직화하며 성북문화재단과 미인도 공동운영 협약도 맺었다. 그렇게 나는 미인도를 무대로 내가 하고 싶은 예술 활동을 시작하며 이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간 나름 평안하고 즐거운 미인도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나는 올해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오랜 기간 생태계를 함께 일궈온 성북문화재단이, 서노원 대표의 취임 이후 모든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협동조합 고개엔마을과 성북문화재단은 함께 ‘미인도 공동기획전 동네예술광부전’을 준비 중이었으나, 2024년 5월8일, 성북문화재단 대표는 법적, 행정적 근거가 없는 자의적 판단으로 참여 작가 2명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에 대해 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모여 문제제기를 하자 조합과 맺고 있던 미인도 공동운영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이 권위주의적 행정은 미인도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지 알고나 이뤄졌을까. 광고 수년간 미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미인도에 대한 나의 시각은 네 단계로 변화해왔다. 이 변화는 예술가이자, 문화기획자, 활동가로 나 자신이 변모하고 진화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첫번째 단계, 활동 초기 나에게 미인도는 하드웨어 차원에서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관리하기 까다롭지만, 활동의 터가 되어주는 하드웨어였다. 두번째 단계는 미인도에 모이는 사람들에게서 생성되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담론 생성의 터로서의 역할이었다. 세번째는 미인도를 두고 논의되는 제도, 정치, 정책, 도시권, 커먼스, 시민력 등 미인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이 중요해졌다. 네번째 단계에선 미인도와 미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고 있다. 미인도는 요즘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미인도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미인도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모여 있는 이 순간을, 미인도는 반기고 있는 것 같다. 성북문화재단이 빼앗으려는 미인도를 시민의 것으로 지키려는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할까? 나는 지금 미인도가 주는 양분을 먹으며 예술가에서 기획자로 또 활동가로 변모하며 그 사이 언저리에서 시민이 되기를 외치고 있다. 미인도는 시민을 만들고 연결한다. 연결된 시민의 힘은 다시 미인도를 지켜내고,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된다. 내 일의 전부는 그런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 땅에 시민으로 발붙이고 서기 위한 활동이자 기획이자 예술이다. “우리는 시민이고, 이 도시의 주인이다.”(2024.07.22. ‘성북문화재단의 파행적인 문화행정 규탄 및 예술인 권리 침해에 대한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 신고 기자회견문’) 미인도를 둘러싼 투쟁은 공간을 독점하려는 이익집단의 투쟁이 아니다. 우리는 미인도의 목소리를 빌려 시민이기를 외치고 있다. 미인도, 그리고 미인도의 투쟁에는 그간 쌓아온 생태계, 거버넌스, 시민 되기라는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미인도는 진짜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권위주의는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 돌을 던졌지만, 우리는 깨지지 않고 물결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모이고 성찰하며 그 물결을 퍼뜨리고 있다. 미인도와 함께 우리는 생동하는 도시를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미인도를 지키는 투쟁은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투쟁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
2
·
[연구원정] 노년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과 그들을 위한 디자인 및 교육
왜 이 문제를 선정하게 되었는가? 어느 날엔가 엄마에게 유튜브 사용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그 날 엄마에게 유튜브 사용방법을 가르쳐드리며 나는 노년층의 모바일 사용성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 멘탈모델에서는 당연한 것이 엄마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고 그런 부분들을 디자이너로서 디자인하며 놓칠 수 있겠다는 점이 아쉬웠다. 건강문제로 인해 본가에 와 있는 지금은 매번 엄마의 귀찮은 부탁을 듣게 된다. 보험 서류 제출, 사진 전송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해달라는 부탁부터 뭘 좀 찾아보라거나 동의를 해도 되는지 묻는 것까지. 그럴 때마다 날 잡고 가르쳐드려야하는데,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하지 하며 항상 미루게 된다. 그래서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건 엄마에게 모바일 이용을 잘 가르쳐주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비단 엄마의 의지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디자이너들은 무의식적으로 쓰는 아이콘, 디자인 패턴, 인터랙션 등 기존 디자인들을 참고로 디자인한다. 하지만 노년층은 아날로그 시대에 사용하던 습관들이 몸에 베어있기 때문에 그를 사용하기 쉽지않다. 포용적 디자인으로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노년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3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취약계층(장애인, 노년층, 저소득층, 농어민) 중 노년층의 디지텅 정보화 수준이 70.1로 가장 낮았다. 이는 일반 국민을 100으로 두었을 때의 비교값이다. 어찌 생각하면 노년층은 신체능력이 떨어지므로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떨어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컴퓨터 공학자 제프 존슨Jeff Johnson은 노년층 사용자가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시력, 청각, 운동능력 등 신체적인 기능 저하에만 따른 것으로 여기는 것을 가장 큰 오해라고 꼽았다.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앞서 말한 실태조사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노년층의 소득에 따라 소득이 적을수록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지역에 따라서도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농어촌에 거주하는 노년층이 도시에 거주하는 노년층에 비해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낮은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에 대해서도 탐구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노년층에게 디지털 정보화 교육은 중요해 보인다. 그들은 디지털 교육에 대한 욕구가 높으며 노년층 중 인터넷 사용자들이 비사용자들보다 더 높은 삶에대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또한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이용하기 어려워서라고 응답한 비율이 일반 국민 대비 10% 가량 높았으나 인공지능 기반 헬스케어 서비스에 대한 사용 욕구가 높았다. 이를 보았을 때 인공지능 등의 기술의 변화에 맞춰 노년층의 디지털 정보화 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
9
·
[연구원정] 무너진 학교와 수능
(작성 중) 우리 국민 모두가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꼭 수능의 형태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본고사, 또 누군가는 학력고사 등등으로 그 치열했던 경쟁을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시험 형식과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히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양한 연구자와 정치가, 시민단체들이 이 문제에 여러 답을 내놓았지만 아직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1. 왜 문제인가 수능은 기존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를 개선하여,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 학생들을 선별하기 위해 논리, 통합적 사고력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험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시험이 그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단적인 예시가 바로, 학교 수업으로는 수능을 대비하기 어렵다는 것일 것입니다. 교육부의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결과 분석에 따르면, 사교육 참여율은 78.5%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였습니다. 사교육이 수능 준비에 필수 요건이 되는 이상, 공교육은 단순히 졸업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고,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은 피해를 보는 교육 격차 문제가 심화될 것입니다.   2. 학교의 현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저의 경험을 통해 바라본 학교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입학한 후, 몇 번의 내신 시험과 모의고사를 거치면 어느 입시 전형이 나을지 대략적인 판단이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난 후, 학교 수업과 수능 대비 사이에 충돌이 발생합니다. 특히 입시를 목전에 둔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자습을 요구합니다. 선생님들은 막을 힘이 없습니다. 이 악순환은 계속 됩니다. 더 이상 내신을 신경쓰지 않는 정시 대비자들과 내신 대비자들로 학교가 나뉩니다. 내신 대비자들을 변별하기 위해서 학교 시험 문제는 정시 대비자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결국 이들이 정착하는 곳은 사교육입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수능 대비를 잘 할 수 있도록 수업을 운영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를 염두에 두고 시험에 ‘수능형 문제’를 출제하겠다라는 고등학교의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한가지 사례로 학교 수업이 문제 풀이 형식에만 집중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수능-EBS 연계로 인해서 EBS 연계 교재가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교재는 문제풀이/강의식 수업에 적합하여 다양한 수업을 제공하는데 한계를 보이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 현장과 실제 수능 대비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면, 수험생들은 필연적으로 학교와 수능을 분리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교육은 성행하고 학교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 학교 현장의 상황에 집중해서, 내신과 수능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깊게 파악하고, 차이를 메꾸기 위한 방안이 무엇이 있을지 더 알아가볼 예정입니다. 참고자료 이상원, 기울어진 저울 위 춤추는 사교육, <시사인>, 2023.8.8 (링크) 우옥경. (2023). 문학 영역의 EBS 수능 연계 교재에 대한 교사 인식 연구. 교육과정평가연구, 26(2), 279-301.
·
8
·
[연구원정] 젠더 기반 폭력 예방을 위한 긍정적 남성성엔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치게 될까?
*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1. 내게 질문을 만들어 주었던 사회 현상은 무엇이었을까? '딥페이크 기술 기반의 성적 불법 합성물 제작' 검거된 가해자들 중 70% 이상이 10대 남성들이었던 것에 사회 문제로서 연구하고 싶다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젠더 기반 폭력의 원인은 잘 못된 남성문화/남성성 등의 이유에서 찾습니다. 남성성의 변화, 대안적 남성성의 내용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유사하게 남성으로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가부장제를 경험하지만 어떤 남성은 반성폭력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어떤 남성은 가해자로, 방관자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이를 결정 짓는 경험적, 사회적 요인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걸 고민해보면 다른 남성성을 구성하기 위한 정책, 교육, 시스템의 내용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지금부터는 글을 좀 많이 써야해서.... 다체로 쓰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2. 주제 관련 선행연구, 자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젠더기반 폭력(Gender-Based Violence, GBV)은 성차별적 권력 구조와 불평등에서 비롯된 신체적, 심리적, 성적 폭력을 포함하며,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UN Women, 2020). 젠더기반 폭력은 주로 남성 가해자에 의해 발생하는데, 이는 남성들이 학습하고 내면화한 성 역할과 남성성의 형태와 깊은 연관이 있다(Connell & Messerschmidt, 2005). 기존 정책들은 주로 피해자 지원과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폭력의 근본적 원인인 남성성의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왔다(Heise, 1998). 2-1. 젠더 기반 폭력이란 무엇일까? 젠더기반 폭력은 특정 성별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의미한다. 이는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 폭력, 직장 내 성희롱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여성에게 주로 가해진다(Heise, 1998). 세계보건기구(WHO)는 여성의 약 30%가 일생 동안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보고한다(WHO, 2021). 이는 젠더기반 폭력이 단순히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한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국제 사회는 1993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선언을 통해 젠더기반 폭력을 인권 침해로 규정하며, 각국이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UN, 1993). 최근 유엔 여성기구(UN Women)와 WHO는 피해자 지원뿐만 아니라, 예방 중심의 접근과 남성의 역할 변화를 강조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남성들이 기존의 성 역할과 남성성을 재구성함으로써 폭력을 예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2-2. 남성성/들에 대한 논의와 젠더 기반 폭력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남성성(Masculinity)은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고정된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구성된 성 역할과 규범을 의미한다(Connell, 1995). 이는 남성들에게 특정한 기대와 행동 양식을 부과하며,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한다. 남성성에 대한 연구는 남성의 행위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권력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강조한다. 라윌린 코넬(Raewyn Connell)은 남성성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며, "남성성/들(masculinitie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코넬에 따르면, 남성성은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복수의 남성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남성성들은 상호작용하며, 권력 관계에 따라 특정 남성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Connell, 1995). 가장 대표적인 남성성의 유형은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이다. 이는 사회가 이상화하고 권장하는 남성성으로, 경쟁과 권위, 감정 억제를 강조하며 여성과 비주류 남성성을 지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Connell & Messerschmidt, 2005). 남성들은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단순히 여성 억압에 머물지 않고, 다른 남성들 사이에서도 종속적 남성성(subordinated masculinity)과 소외된 남성성(marginalized masculinity)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Connell, 1995). 다른 학자들은 남성성의 형성과 수행에 있어 남성문화와 강간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Anderson과 Umberson(2001)은 남성들이 특정 문화적 규범을 따라갈수록 폭력적인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심지어 장려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남성들 사이에서 폭력을 사용해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거나 유지하려는 동기를 강화한다. **강간문화(rape culture)는 이러한 규범의 한 형태로,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정상화하거나 축소하며,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한다(Buchwald et al., 2005). 이러한 문화는 남성들로 하여금 성적 폭력을 통해 권력과 지배를 유지하게 만든다. 남성성 연구는 남성들이 폭력을 수행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틀을 제공한다. 남성성은 사회적 기대와 규범을 통해 구성되며, 특히 권력과 지배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동조적 남성성(complicit masculinity)을 수행하는 남성들은 직접적인 폭력에 가담하지 않지만, 기존 성별 권력 구조의 혜택을 누리며 폭력을 묵인하거나 방관한다(Connell & Messerschmidt, 2005). 2-3. 인셀과 남성성(한국성폭력상담소 폭주하는 남성성 강의 참고) 인셀(Incel)은 "Involuntary Celibates(비자발적 독신)"의 줄임말로, 이들은 연애와 성적 관계에서 소외된 남성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을 의미한다. 이 현상은 남성성 연구와 젠더기반 폭력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셀 집단은 주로 여성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며, 자신들의 소외를 여성과 성평등 담론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Kimmel, 2017). 인셀 현상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실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Connell(1995)에 따르면, 사회가 남성들에게 강요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성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을 달성하지 못한 남성들은 분노와 좌절을 느끼며, 자신들의 실패를 외부로 투사하게 된다. 특히, 인셀 집단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욕망과 혐오가 정당화되며,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는 성폭력과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강간문화(rape culture)와 맞닿아 있다(Buchwald et al., 2005). Kimmel(2017)은 인셀 현상을 연구하며, 남성들이 전통적인 남성 규범을 달성하지 못할 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온라인에서 폭력적인 담론을 강화하며, 가상 공간에서 시작된 혐오와 폭력이 현실 세계로 옮겨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1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생한 인셀 범죄는 인셀 집단이 가진 극단적 젠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인셀 현상은 남성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성 역할과 남성성을 둘러싼 사회적 기대가 개인의 실패를 폭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며, 긍정적 남성성의 형성과 젠더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2-4.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하는 긍정적인 남성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최근 연구들은 긍정적 남성성(positive masculinity)이 기존의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긍정적 남성성은 남성들이 감정을 표현하고, 상호 존중의 관계를 형성하며, 돌봄과 협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강조한다(Seidler, 2006). 이는 남성들이 더 나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유도하며, 젠더기반 폭력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Levant & Richmond, 2007). 긍정적 남성성의 형성에 기여하는 또 다른 학자로는 Michael Kimmel이 있다. 그는 남성성의 변화가 단순한 행동 변화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 불평등과 남성 특권에 대한 인식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immel, 2012). 그는 남성들이 성평등을 위해 연대하고,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며 이를 해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감정 표현과 취약성의 수용은 남성들이 강요된 남성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Barker et al.(2011)은 "MenCare"와 같은 글로벌 캠페인을 통해 남성의 돌봄 역할을 장려하는 것이 긍정적 남성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제안한다. 돌봄과 양육에 참여하는 남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규범을 재구성하며, 성평등한 관계 형성에 기여한다. 이러한 참여는 남성들이 폭력적 성향에서 벗어나, 평등한 파트너십을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Terry Kupers(2005)는 긍정적 남성성의 요소로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과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강조한다. 그는 남성들이 기존의 억압적 남성성에서 벗어나, 자신과 타인에게 진정성 있게 대하는 것을 배울 때, 더 평화로운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남성들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할 필요성을 줄인다. 긍정적 남성성은 또한 비폭력적 갈등 해결을 지향한다. 남성들이 협력적 의사소통과 상호 존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때, 폭력을 예방하는 중요한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Buchwald et al., 2005). 이는 가정 내 폭력과 직장 내 성희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법이다. 3. 뇌피셜! 어떤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영향을 줄까 - 긍정적 남성성에 - 가정 내 역할 분담 경험 남성이 가사와 육아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행하는지에 따라 긍정적 남성성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돌봄과 양육 경험은 남성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 상호존중의 관계를 형성하게 합니다(Barker et al., 2011). 예시 변수: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비율", "돌봄 활동에 대한 만족도" -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및 유지 성평등을 지지하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속하거나, 친구와 동료 간의 상호 존중 관계를 경험한 남성들은 긍정적 남성성을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시 변수: "성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교류 경험", "친구 및 동료와의 협력적 관계 정도" - 전통적 남성성 규범에 대한 저항성 전통적인 남성 규범(예: 감정 억제, 권위적 태도)에 저항하는 남성들은 긍정적 남성성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Kupers, 2005). 예시 변수: "감정 표현에 대한 태도", "전통적 성 역할 규범에 대한 동의 수준" 남성성이라는 동태적인 것들의 세대 구분적으로도 살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양적인 통계로 함께 실증해볼 수 있다는 것에도 연구적인 의의가 있을거라 생각됩니다!관련된 격려와 자료, 코멘트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
10
·
[연구원정] 생활지도고시 개정 이후 초등교육의 변화와 과제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생활지도고시 개정 이후 초등교육의 변화와 과제 제가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는 '생활지도고시 개정 이후 초등교육 현장에서의 교육활동 침해행위와 관련된 실질적인 변화'입니다. 특히 개인적,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법률적, 제도적 개선의 측면과 함께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유는 초등교원으로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어려움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입니다. 악성 민원과 교육활동 침해가 교사의 정신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오랜기간동안 목격하였고, 그에따라 교사의 권리 보호와 건강한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한 실질적인 연구가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보호자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교사로서의 역할과 권한이 위축되는 상황은 서이초 사건 이후 생활지도고시 개정과 같은 제도적 개선에도 현장에서는 악성 민원이 계속되어 교실 내에서 수업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으며,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많은 교사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임을 여전히 느끼고 있습니다. 교사가 정신적, 감정적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이는 결국 학생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이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교원지위법 개정과 생활지도고시 개정 등을 통해 교사의 권리 보호와 교육활동 침해 예방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원지위법 개정을 통해 교사를 업무방해나 악성 민원으로부터 보호하고, 위기 학생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는 교사가 교육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노력으로 보여집니다. 2023년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국 유, 초, 중, 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9%의 교사들이 '교원은 감정노동자'라는 데 동의했으며, 98%가 민원 스트레스가 심각하다고 답변하였다. 특히 66.1%의 교사들이 학부모를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교사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생활지도고시 개정 이후 초등교육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변화, 특히 개인적,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법률적, 제도적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부족한 상태입니다. 교원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들이 마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인식 변화가 어떠한지에 대한 연구는 미흡합니다. 또한, 교사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회복 지원 시스템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생활지도고시 개정 이후 초등교육 현장의 교육활동 침해행위와 관련된 실질적인 변화'를 연구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개정된 법률과 제도가 교사들의 일상적인 교육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함으로써,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기 위함 입니다. 특히, 교육 현장의 변화가 법률적, 제도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교사, 학생, 학부모의 인식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하여, 앞으로의 개선 방향을 제안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교총. (2023). 전국 유, 초, 중, 고 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 경기도교육청. (2024). 2024 경기형 교육활동 보호 길라잡이. 경기도교육청. 경기도교육청. (2023). 2023 교육활동 보호 업무처리 길라잡이 및 Q&A 자료집. 경기도교육청. 경기도학교안전공제회. (2024). 교원보호공제 약관. 경기도학교안전공제회. 교육부. (2022). 교육활동 보호 매뉴얼 (2022 개정). 교육부. 경기도교육청. (2024). 2024 경기형 교육활동 보호 길라잡이. 경기도교육청. 교육부. (2023).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 해설서. 교육부. 교육부. (2023). 교육활동 보호 매뉴얼. 교육부.
·
11
·
[연구원정]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연구 핵심 질문 “주거불안을 겪은 당사자의 대응활동은 어떤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냈는가? 특히,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왔으며, 전세사기가 발생하지 않는 제도변화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활동을 지속할 것인가?" 1. 왜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저는 전세사기 피해자입니다. 딱 3년 전에 계약해서 2021년 11월에 입주한 전셋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으로 돌변했습니다. 수개월간 여러 지역의 주택을 보러다닌 끝에 권리관계가 깨끗하고, 제게 중요한 우선순위를 갖춘 집을 찾았다고 좋아했는데요. 계약 당시 보증보험 가입을 약속한 임대인 측은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보증보험 가입을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그러던 2022년 2월, 불안한 마음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보니 계약 당시 없었던 세무서 압류가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죠. 큰 충격을 받아 임대인에게 전화했지만, 임대인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두번 다시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22년 10월 서울 모 숙박업소에서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2년 하반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1,139채 빌라왕 사망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사기를 인지한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문제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중입니다. 전세사기를 인지한 다음 여러 기관의 문을 두드리며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디서도 피해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은행, 지자체, 보증기관, 세무서, 경찰 등 부동산 계약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비정상적인 계약을 막아줄 것이라 기대하며 손을 내밀어도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도와주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아무리 피해자의 절박하고 부당한 현실을 알려도, 허술한 법과 제도 속에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전국 단위의 피해자대책위를 꾸리고, 정부·국회·대통령실 등 책임있는 기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기자회견·집회·온라인 캠페인 등을 통해 전세사기의 실상 알리고, 문제제기를 이어왔습니다. 그렇게 활동한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왔습니다.   2. 연구 계기는 이렇습니다. 2024년 10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전국에 2만 2천명이 넘습니다. (국토부 보도자료) 그리고 전세사기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한 나머지 세상을 떠난 사례도 8명이나 됩니다. 특히, 국토부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의 74% 정도는 40대 미만 청년층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전세사기 피해회복에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의 장기적인 사회경제적 손실을 감당해야하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세사기가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부동산 시장 전반의 불안을 심화시키는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개선이 이뤄졌는지 따져보면 그다지 변화가 없습니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책은 이전보다 일부 진전된 면이 있지만, 전세사기를 예방하는 제도개선은 별로 이뤄진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의 보증금 미반환이 발생한 배경에는 비아파트(ex : 빌라, 오피스텔) 주택의 집값 대비 전세가격이 과도하게 높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2020년 전후에는 집값이 2억인데, 전세가격이 2억원이거나 그 이상이 되는 깡통전세 계약이 속출했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계속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임대인이 집을 팔아도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한 계약이 만연했던 것이죠. 느슨한 보증보험 가입기준과 전세대출은 전세가격을 뻥튀기하는 역할을 했고, 임차인이 애써 모은 돈과 임차인 명의로 대출받은 보증금은 임대인의 쌈짓돈이 되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계약종료일에 보증금을 돌려받기로 했지만, 임대인에게 연락해보면 후속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 돈을 돌려주지 못한다며 알아서 하라는 황당한 상황이 부동산 관행으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제도개선은 이뤄지지 않았고, 임차인을 보호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외에도 시스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전세사기 피해를 더 키운 것을 여러가지 보게 되면서 들었던 의문은 ‘지금껏 이런 문제를 정말 몰랐을까? 이전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던 건가?’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의문을 여러 활동가, 학자, 정치인에게 공유하면 ‘사실 주거 문제로 이렇게까지 활발하게 논의되고, 대책이 빠르게 마련된 전례가 없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이 주거 문제인데,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니 꽤 충격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당면한 전세사기 문제해결을 위해 피해자대책위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이 활동이 나중에는 생각보다 중요한 사례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전대미문의 전세사기 대란 속에서 피해자대책위가 어떤 활동을 해왔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전재산을 빼앗기고, 대출상환 압박과 강제퇴거의 위협, 관리되지 않는 주택 문제 때문에 하루하루 절박합니다. 게다가, 피해자대책위 활동을 하며 문제해결에 앞장서는 분들은 시간적, 체력적으로 장기간 희생하고, 생계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대신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며 효능감을 잃은 채 지쳐가는 것도 많이 느낍니다. 전세사기를 처음 인지하고 활동한 기록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3.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전세사기 대란이 벌어진지 2년이 되면서 우리 사회는 전세사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룬 사례집도 나왔고,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방안도 미흡하지만 진일보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전세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개선을 해야할지 전문가들의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귀중한 자료가 나오더라도, 결국 이런 것들을 실질적인 변화에 이르도록 관철시키는 힘은 당사자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가장 잘 체감하기도 하고, 같은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는 특별법과 지원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가 본인의 사례를 드러내놓으면 조금이나마 진전을 보이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사태의 한가운데 있는 전세사기 당사자들, 구체적으로는 피해자대책위의 활동과 역할을 조명하고, 향후 과제를 진단해보는 것은 앞으로의 전세사기 문제해결에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피해자대책위에 소속되어 있지만, 한발자국 떨어져서 지금까지의 활동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전의 주거불안 사례를 경험한 당사자들의 대응과 구별되는 특성이 있을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또한, 피해자대책위가 앞으로도 문제해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어떤 과제가 있을지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전세사기 피해자의 74% 가량은 청년층 전세사기 피해자인데, 제도개선 및 문제해결을 위한 청년층의 참여도는 오히려 장년층에 비해 떨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전세사기 문제해결을 위한 피해자대책위 활동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고, 청년층의 참여는 정말 떨어지는 것이 맞을까요? 피해자들이 공통의 문제해결을 위해 피해자대책위에 더 활발히 참여하도록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검증가능한 연구영역일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도 한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 연구를 위해 다음 가설을 가지고, 리서치를 해보려고 합니다. <가설> 1) 주거불안 사례(보증금 미반환 포함)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모든 사례가 제도 변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2) 제도 개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꾸준한 문제제기가 필수적이다. 3) 40세 미만 청년층 전세사기 피해자는 40세 이상 중장년층 전세사기 피해자와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4) 전세사기가 관련 근본적인 제도개선을 위해서는 전세사기 피해당사자 다수인 청년층의 피해자대책위 활동을 유도해야한다.   <리서치 과제> 1) 이전의 주거불안, 보증금 미반환 사례는 무엇이 있었고, 당사자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2) 주거불안 당사자들의 대응으로 제도변화를 이끌어낸 사례가 있는가? 3)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 구성현황과 대응 활동 정리하기 4)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에는 청년층 피해자가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가? 5) 40세 미만 청년층은 40세 이상 중장년층과 구별되는 세대 특성이 있는가? 그 특성은 청년층 전세사기 피해자의 피해자대책위 활동 참여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가?   4. 기대하는 것, 그리고 우려되는 점 국토교통부의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추이를 보면 문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몇 년간 전세사기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주거불안 사례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더 이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반드시 정비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국회나 정부에서 전세사기를 예방하고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틈을 만들고, 근본적인 변화는 당사자들의 조직된 활동이 꾸준히 이어질 때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지난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 활동을 정리해보고, 향후 피해자대책위 활동을 장기간 지속하기 위해 어떤 과제가 있을지, 특히 전세사기 피해가 극심한 청년층이 직접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부분을 신경써야할지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우려되는 지점 또한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전세사기’라는 문제 그 자체보다 당사자 운동, 피해자대책위 활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연구가 궤도를 이탈할 수 있겠다는 우려입니다. 청년층의 시민운동 참여는 다소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을 수 있어 연구범위를 잘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전의 주거불안 사례와 제도적 개선에 대한 선행연구가 얼마나 되어있을지 잘 알지는 못하는데, 자료 수집과 사례자 연결 등에서 난항을 겪을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 고민과 숙제를 떠안겠지만, 앞으로 12월까지 연구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
10
·
[연구원정] 부유한 나라와 불행한 청년들 : 불안정 노동을 중심으로
안녕하세요. 복지국가와 사회정책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 연구자입니다. 다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 여름, 연구원정 원데이 클래스 과정에서 ‘복지태도(Welfare Attitudes)’ 등의 주제로 5회 연재 글을 공유드렸는데요. 가을부터 정규 부트캠프에도 참가하게 되어, 앞으로 3주 간격으로 5회 연재를 드릴 예정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토론 남겨주셨던 독자님들 덕에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기쁨을 느꼈답니다. 이 글을 빌려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 이번 연구원정 부트캠프 과정에서는, 한국 청년의 ‘불안정 노동(Insecure Work)’ 실태와 ‘우울(Depression)’ 현상을 연결하여 바라보고자 합니다. 끝으로 연구 키워드로서의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에 대한 내용도 일부 언급할 텐데요. 오늘은 구체적인 연구 계획에 들어가기 앞서 제가 가진 기초적인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습니다.  ☄️ 놀라운 경제성장의 종말, 불안정 노동시장의 탄생 <기적 만들기’(Making a Miracle, 1993)>.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 교수(Robert Lucas)의 논문 제목입니다. 루카스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기존의 경제 이론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기적에 가까운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22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에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한 유일한 국가로, 이와 같은 전례는 1964년 기구 설립 이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한국의 국민총생산(GDP)은 13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세계 최빈국인 나라가 70년 뒤 2022년 약 1300배(1조 6643억달러)까지 GDP 성장을 이륙시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전후무후한 한국의 가파른 경제성장은 1960년대의 권위주의 정부 주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하며 수출 중심의 산업화를 구축하였고, 1980년대 말 ‘삼저호황’을 거치며 경제성장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며, 수출에 의존하던 한국 대기업이 위기를 맞자 전략을 바꾸게 됩니다. 숙련된 노동을 기계와 로봇으로 대체하는 "자동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까지 한국의 산업용 로봇은 390만대로, 압도적인 세계 1위의 높은 로봇 밀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이러한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 커다란  초기 설비비용이 들자, 핵심 부문을 빼고 외주화하게 됩니다. 이전까지의 "복선형 성장방식"에서는 대기업의 성과가 중소기업, 자영업자와 연결되고, 수출과 내수가 함께 성장하였지만, 1990년대부터 대기업만의 성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이 증가하며 좋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의 노동시장 이중구조화는 2000년대를 걸쳐 가파르게 진행됩니다. 게다가,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배달 및 운전 등 플랫폼 노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면서, 한국 사회의 불안정 노동 현상은 보다 복잡하게 심화되었습니다. ⛈️ 청년의 우울을 야기하는 불안정 노동시장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가장 최우선적으로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이승윤 외, 2016).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새로운 취약한 일자리가 나타나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세대는 사회로의 진출을 시작하는 청년들입니다. 청년들은 이들이 고학력임에도 불구하고 실업, 비정규직, 플랫폼 등 불안정 노동을 전전하거나, NEET(교육도 노동도 하지 않는 청년들)와 히키코모리 등 노동을 떠나는 등(이승윤 외, 2016)의 독특한 현상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대’의 문제와 ‘불안정한 삶’의 문제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며 부상하고 있습니다(Dörre, 2010; 곽노완, 2013; 이승윤 2016 재인용) 한국 청년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집단적인 우울감과 높은 자살율입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부동의 자살률 1위 국가이며, 우울증 유병률도 매우 높습니다. 2022년 건강건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국내 우울증 환자 중 20-30대가 35만여명으로 전체 환자의 35.9%를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소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의 양극화와 취업난과 같은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김지경 외, 2018; 박채림 외, 2023 재인용). 한국의 청년들은 마치 의자 뺏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자리라는 의자의 수 자체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력, 또 노오력만으로 정말 의자를 가질 수 있을까요? 재능과 노력을 통한 성공을 강조하는 ‘능력주의’가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한국 청년들은 좋은 의자에 앉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불안정해진 노동시장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부족이라 채찍질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의 우울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씁쓸해집니다. 🛠️ 기존의 대안과 새로운 전환 청년의 노동과 정신건강을 둘러싸고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전통적으로 청년은 가장 ‘일할법한 집단’으로 분류되어 다른 세대보다 가장 빈약한 복지정책이 지원되고 있었고, 그마저도 제한적인 일자리와 취업지원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정부와 지자체도 청년 실업과 노동시장 이탈, 그리고 우울 문제에 경각심을 느끼기 시작하며, 청년 정책들을 확대해왔습니다. 일자리와 취업을 강화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넘어 행복한 삶을 지원하기 위한 청년센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지자체 주도의 마음건강 사업이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국가의 자원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청년 대상의 복지정책의 확충도 분명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변화 없이 청년들의 문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청년세대의 우울은 불안정 노동시장과 여타 다른 요인들이 함께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정 노동을 줄이는 방식으로 한국 경제체제의 거시적인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하며, 사회보장제도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문제를 적절히 보완하는 방식으로 정합(整合)되어야 합니다. 🫂 새로운 아이디어,'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커다란 경제 패러다임과 복지제도를 바꾸는 일은 근본적으로 중요하지만, 얼마나 오래 시간이 소요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회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동안 개인의 삶은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어떠한 대안을 비교적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청년들의 불안정 노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우울을 '사회적 지지' 를 통해 일부 완화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사회적 지지 (Social support)'란가족과 친구 등 사회적 관계와 지역사회 등으로부터 받는 지지를 의미하고, 실제로 도움이 되거나 주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을 포함합니다 (Lin, Dean, & Ensel, 1986; 주유선, 2020 재인용). 또한 물질적 지지와 정서적 지지 등으로 구분되며,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서 적응하도록 돕고 좌절을 극복하는 등의 완충재 역할을 합니다(Cohen& Wills, 1985; 주유선, 2020 재인용).  개인의 사회적 지지 수준은 각각 다를 것이며, 사회적 지지의 충분성에 대한 기준 또한 상이할 수 있습니다. 청년 개인이 느끼는 사회적 지지 보유 수준에 따라, 불안정 노동으로부터 야기되는 우울이 심화되거나 약화될 까요? 만약 그렇다면, 국가, 지자체, 지역사회, 시민단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지지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크게 세 가지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연구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첫째, 다른 인구 사회학적 변수를 통제했을 때, 청년의 불안정 노동은 우울과 정적인 관계가 있는가?둘째, 불안정 노동의 하위 요소 (일자리 불확실, 소득 불충분, 사회적 보호 불안전, etc.) 중 어떠한 요소가 가장 크게 우울에 영향을 미치는가?  셋째, 청년의 사회적 지지(ex. 사회적 관계 만족도, etc.)는 불안정 노동이 우울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조절하는가? 🔖 마무리하며... 이번 시간은 한국의 수출-대기업-자동화 중심의 경제성장 방식이 불안정 노동시장의 배경이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또, 노동시장의 최전방에 있는 청년들에게 이러한 불안정 노동의 확대는 우울을 야기하고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을 논의했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에 대한 연구질문을 공유하였습니다. 3주 뒤에는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학술 생태계와 연구 동향을 설명드리는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241013. KIMDAHYEON,  All rights reserved. 이 글은 향후 작성자의 학술적 연구를 위한 초안으로, 작성자의 허락없이 복사, 인용, 배포, 상업적 이용을 금합니다. 
·
11
·
[연구원정] 공적개발원조 분절화 관한 문제 분석 정리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한때 인기 있었던 방송인 골목식당에서 출연자인 백종원씨가 어떤 식당을 컨설팅해주면서, 과거 출연했던 식당인 연돈의 사장님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골목식당의 최고의 아웃풋이라고 평가받는 연돈은 백종원씨가 컨설팅의 중요한 성과이자 교보재로 다른 식당들에 귀감으로 방송이 종료된 후에도 자주 회자되고 있다. 세계 원조(aid) 역사에서 우리나라는 골목식당의 연돈같은 곳이다. 식민지배와 한국 전쟁을 연속해서 겪은 우리나라를 보고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우리나라가 다시 복구되는데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했었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해외원조를 받을때는 전쟁 폐허에서 반세기만에 세계 경제 상위 10위 안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성장을 할줄 몰랐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드문 케이스 중의 하나이며, 매년 해외원조 규모는 높아져서 2024년는 ODA 확정액 6조 2천억원을 달성하였다. 올해 열린 한-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2030년까지 아프리카에 대한 ODA를 100억달러까지 확대할 것을 약속하는 등 우리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이렇게 규모가 날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ODA의 효율적인 집행과 보다 분명한 성과 달성에 대해서는 다소 간과될 수 있을 것이다. 배정된 예산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체계와 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늘어난 예산은 ODA와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보다는 일회성 선심 활동으로 남을 수 있다. 보다 지속가능한 ODA 확보와 지원을 위해서는 이를 집행하는 정부 및 공공기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할 것이다. 우리나라 ODA 관련하여 많은 비판이 있는 지점은 분절화 문제이다. ODA 분절화는 수많은 공여행위자가 낮은 규모의 예산으로 공통의 체계 및 지원 채널이 부재한 상태로 공여 활동을 하는 것으로 흔히 높은 행정비용을 발생, 전문성 결여, 낮은 지속가능성 등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 ODA의 효율적이고 효과적 사용을 위해 해결이 필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ODA 분절화와 관련해서 2000년부터 국제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다. 2003년 로마선언은 높은 거래비용과 같은 원조효과성을 저해하는 요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2005년 파리선언(Paris Declaration)에서는 공여국이 수원국의 개발전략과 일치시키고 공여국 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지표를 제시하며 보다 구체적으로 분절화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 열린 부산개원조총회에서는 분절화 개선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고 국가의 조정과 역할 구분(division of labor), 그리고 국제기구와 국제기금 등의 효율성 활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국제사회에서의 꾸준한 문제제기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 20년간 공여국과 국제기구는 47개에서 70개로 늘어났으며, 양자기구와 국제기구의 수는 191개에서 502개로 급격히 늘었다.* 물론 그 사이 신흥공여국이 생겼고, 공여 규모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적으로 보았을 때 국제사회에서 분절화에 대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Understanding Trends in Proliferation and Fragmentation for Aid Effectiveness During Crises, WB Group, July 2022 우리나라에서 ODA 분절화에 대한 논의는 2009년 OECD DAC 가입과 함께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010년 국제개발협력기본법이 제정되었고, 국무조정실 산하의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우리나라 ODA를 조정 역할을 하게 된다. 개발협력위원회는 유상을 주관하는 기획재정부와 무상원조를 주관하는 외교부와 함께 정책 및 전략을 수립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홍지영, 정헌주, 손혁상은 우리나라 ODA 분절화의 추세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해당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의 공여행위자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지속적으로 많아졌는데, 이에 따라 공여국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의 분절화는 악화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실제로 2024년 ODA 시행기관은 46개로 2023년 대비 1개 기관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ODA 분절화에 대해서 정부 내 관련 부처 및 기관의 정치 활동에 의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기존의 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기획재정부와 통합을 요구하는 외교부, 한국국제협력단, 시민사회 간의 정치 활동에서 바꾸고자하는 세력의 정치적인 힘과 동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 *한국 원조 체계 분절화에 대한 국내정치적 해석, 숭실대학교, 김지영, 2023.09.26. ODA 분절화는 지금까지 낮은 효과성의 원인으로 제시되어 왔고, 분절화 현상과 원인에 대한 탐색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여행위자의 증가와 공여 채널의 증가가 높은 행정비용을 발생하고 낮은 지속가능성의 원인이라는 것은 자명한 결론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증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다소 부족해보인다. 이에 분절화 및 많아진 공여행위자로 인해 실제 어떤 형태의 문제와 비효율성을 야기하며, 나아가 효과성을 저해하는지에 대한 탐색을 진행코자한다. 한편 우리나라 ODA 분절화는 주로 공여행위자의 증가와 공여행위자에 대한 낮은 조정 체계 및 능력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공여를 받는 수원국 입장에서 접근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많은 수의 공여행위자는 중복 및 조정에 드는 행정 비용, 그리고 낮은 주인의식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공여행위자의 등장은 수원국 입장에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게 되며 가장 최선의 정책 및 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ODA 분절화로 발생하는 결과를 수원국의 입장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에 따른 제언을 도출하고자 한다.
·
10
·
[연구원정] 느린 학습자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 https://naioth.net/bootcamp )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란 매우 힘든 일 인 것 같습니다. 특히 비교적 배움의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하는 느린 학습자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심리적 안녕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 더욱 힘들어 보입니다.   느린 학습자를 아시나요? 경계선 지능인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표준화된 지능검사 결과가 지능 지수(IQ) 전체 평균인 100점을 기준으로 IQ 71점 이상 84점 이하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주의 집중이 어렵고, 적절한 상황 판단이나 대처능력이 부족하고, 감정 표현이나 의사소통에 서투르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 눈에 띄게 학습이나 또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느린 학습자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느린 학습자 아동 청소년의 경우 학교를 가도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느끼며, 이로 인해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최소한의 문해 능력과 문제해결능력, 그리고 사회적 의사소통 기술을 갖추기 위해 이루어져야 할 교육과 상담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현실에서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느린 학습자는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SNS 세상에 몰입하게 됩니다. 특히 남들을 쉽게 믿는 특성을 가진 느린 학습자가 SNS에만 몰두하게 되면 이들이 디지털 성범죄, 보이스 피싱 등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구하거나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적절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낙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소통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또래집단과 섞이지 못해 은둔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느린 학습자의 심리적 안녕감 증진을 목표로 한 걸음 내딛어보려 합니다. 느린 학습자 아동 청소년의 심리적 안녕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감정표현과 의사소통 측면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느린 학습자를 정서적으로 취약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인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소통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개입 방법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본 연구에 의하면, 느린 학습자는 경직된 인지적 기능으로 인해 적절한 상황판단 및 대처능력이 부족하고 이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저항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나거나, 분노조절이 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는 등 극단적인 반응이 초래됩니다. 이외에도 파국화 사고, 인지적 공감 능력 부족이 이들의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사실 저는 위의 문제를 탐구하며 또 다른 문제에도 관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동학대, 유기 등으로 인해 시설 내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들 중에는 성장과 발달에 필요한 자극을 덜 받아 경계선 지능을 갖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자립능력이 충분히 키워지지 않았음에도 성인이라는 이유로 시설을 나가야만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느린 학습자와 시설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행연구에서는 아이들에게 다른 어떠한 능력 보다도 사회적 관계 기술을 키워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저는 가정 외 보호를 받는 느린 학습자 아동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망망대해와 같은 이 세계를 약 한달간 헤엄치며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똑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보다 이 길을 먼저 가신 훌륭한 연구자분들의 고뇌와 통찰을 읽고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정하고 또 조정해 나가며, 이 답답함을 기꺼이 견뎌보고 싶습니다.
·
10
·
[연구원정] 기록되지 않은 여학생,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의 역사를 찾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2018년즈음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다루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자원활동을 했던 적 있습니다. 온라인 문서 사용이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 당시 활동가들이 손으로 쓴 성명서와 가위로 잘라 모아둔 언론 기사 모음을 스캔하는 작업이었죠. 그때 마주했던 한 주먹의 종이뭉치가 준 위로와 충격은 지금까지도 제가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자료였어요.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 앞서 열린 2000년 학생법정 당시에 제가 만난 자료는 2000년에 열린 학생법정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와 준비자료습니다. 흔히 ‘2000년 법정’ 혹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되어있죠. 이 법정의 전체 이름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에요.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 10여 개국이 참가해 2001년 12월 3일과 4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앞서 여성 대학생들은 2000년 학생법정을 기획합니다. 1998년 8월에 기획에 들어가서 1999년 4월에 2000년 법정보다 먼저 학생들끼리 법정을 운영한 것이지요. 이유지님(당시 22세, 경기대 영문과 4학년)과 민승해님(당시 24세), 정은정님이 각각 임시위원장과 준비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운영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 등 국내 50여 대학 여학생 모임과 각 대학 총여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이 행사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죠.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를 담당했던 양미강님의 글을 보면 2000년 학생법정의 운영에 대한 이야기 조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전쟁의 아시아를 여성과 식민주의 시각에서 불러내다, 경인문화사, 2021년 33~35쪽) 학생법정은 원래 전국 5개 대학에서 개최하려고 했지만 호응도가 매우 좋아 이화여대, 조선대, 부산대, 창원대, 동아대, 경희대, 해양대, 원광대, 서원대, 한신대, 전주대, 서울대까지 전국 11개 대학에서 각자 학생법정이나 문화제를 개최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릴레이 수요시위를 열기도 하고 각자 지역단체들과 연대해 독자적인 행사를 만들기도 했지요. 일본의 오비린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 캠프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글로컬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여학생이 만들고 이끌어간 운동의 역사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각 대학 총여학생회와 여성위원회는 여러 여성인권행사를 개최했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는 그 가운데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예컨대 1999년 10월 26일부터 2주간 이화여대 여성위원회는 성폭력 관련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이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광주 민주화운동, 한국전쟁, 동티모르 사태 등 여성 성폭력 피해 사례를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이화여대 여성위원회는 문제해결을 기원하며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강덕경님의 초상을 완성하는 행사를 진행했고 이 지문 초상을 2000년 모의 학생 법정에서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2000년대 초반까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이화여대 여성위원회,홍익대학교 여성모임 ‘딴짓’등 이전부터 여학생 운동을 하고 있던 단위들은 적극적으로 운동을 도모합니다. 수요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하고 각 대학의 총여학생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2000년 학생법정을 홍보하기도 했지요. 일본군성노예제문제에 심각성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제 또래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보다도 다른 문제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떤 외로움의 감각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사를 읽다보니 시대를 거슬러 계속 청년 여성들이 이 운동에 결합하기도 하고 서로 끌고 밀면서 나아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료의 발견은 저에게 잔잔한 위로였습니다. 단절되어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00년 학생법정, 90년대부터 이어진 여성운동의 감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을 하고 있더군요. 운동의 지속성을 여기에서 찾았습니다. 여학생들은 누가 기록했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여학생들을 추적하는 연구는 아직 부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운동에 개입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이 문제를 각자의 자리에서 기억하고 고군분투하며 함께 하고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후원으로, 누군가는 교육으로, 누군가는 활동가로서요. 지난 주 수요일(2024년 10월 9일) 1669차 수요시위가 열렸습니다. 한 연대발언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위 발언문을 준비하며 걱정이 되어 엄마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엄마도 대학생 시절 수요시위 현장에 있었다고요. 시위에 참여했던 한 사람이 엄마가 되고, 그 사람의 아이가 다시 학생이 되어 수요시위에 나올때까지의 시간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는 아무리 지우려는 사람들이 많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오래된 만큼, 누군가는 낡고 오래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운동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외롭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20대 여성들이 만들어낸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을 역사화할 계획입니다. 2000년 학생법정은 저의 첫 시작이 될 거에요. 여학생들을 기사로 쓰지 않던 시대를 거슬러 그들이 손으로 남긴 메모, 오려붙인 종이들,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는 회의록들을 들춰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10년이 걸리던, 15년이 걸리던 이 운동에 참여했던 2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고자 합니다. 제가 외롭지 않게 운동하고 싶어서라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시작한 연구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제 연구가 응원과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봅니다. 문제해결운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이번 주에 1670차를 맞습니다. 길에서, 박물관에서 언젠가 독자 여러분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주세요. 그 마음이 사람과 운동, 연구를 이어가는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저는 다음 칼럼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