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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를 기억하는 법
조금은 잊혀진 참사 1994년 10월 21일. 이 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현재 굳건이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한 날이다. 오전 7시 느닷없이 서울시 성동구외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조금 이른 아침이었지만, 출근과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총 49명이 한강으로 추락, 32명이 사망했다. 건설사의 부실공사,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 감사, 정부의 안전검사 미흡으로 벌어진 참사다.  참사는 또다시 이어졌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지상 5층, 지하 4층 짜리 건물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로 인해 502명의 사망자, 937명의 부상자, 6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해당 인명 피해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원인은 성수대교와 비슷하다. 이 역시 건설사의 부실 공사, 안전 불감증, 공무원 비리가 엮여서 발생한 사고였다. 완공 이후 무리한 증축이 이루어졌고, 백화점은 벽면 균열과 천장 내려앉음 등 붕괴 조짐을 알고 서도 영업을 중단하지 않고, 응급 조치로만 대응했다.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참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나 30년 가까이 된 참사 이외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참사도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다. 이태원 참사 당시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이태원 할로윈 참사, 1995년 삼풍 붕괴 유령을 소환하다”라는 기사를 썼다. 기사는 우리나라가 삼풍 백화점 붕괴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지적, 붕괴 원인, 이태원 참사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는 삼풍 백화점 붕괴를 “현대화 열망 속에 건설업자, 공무원이 안전조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안전불감증과 공무원 무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이태원 참사가 참사 조짐이 보이고 알았음에도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삼풍 백화점 붕괴와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인명 피해를 낸 참사에서 전혀 배운 게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실제 이태원 참사의 경우, 참사 이전에 사람들이 압사할 것 같다고 말하는 신고전화가 11건 이상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이 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됐던 것을 감안하면, 코로나 제한 조치가 풀렸을 때 어느정도 폭발력을 가질지 분명 예측하고 판단하고 대비했었어야 한다. 참사가 발생한 이후,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는 또다시 발생한다.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선,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단순 희생자를 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고, 왜 그 문제를 보지 못했는지 혹은 알고도 외면했는지, 그 문제가 다시금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계속해서 상기해야 한다. 참사가 기록되지 않으면,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처럼 참사의 유령만 계속 떠돌 뿐이다. 참사를 기억하는 법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건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추모시설을 통해 당시 우리가 어떤 참사를 겪었는지 상기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치유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참사 피해자 유족들은 고인을 추모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당장 참사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집 값을 떨어트리는 혐오시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혐오시설이라는 인식 외에도, 공간 부지 마련과 사업비 문제, 행정 절차의 지연 등으로 건립이 안 되기도 한다. 서울시 광화문 광정에 있던, ‘세월호 기억공간'도 행정적인 이유로 철거된 상태다. 다시금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유족들의 외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해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어려운 건 아니다. 해외에서도 오랜기간 논의를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9∙11 테러 추모를 위해 세운 9∙11 추모 광장과 메모리얼 파크다.  9∙11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쌍둥이 빌딩에 두 개의 비행기가 자폭 테러를 한 사건을 말한다. 전 세계가 경악한 사건이다. 두 대의 비행기가 연이어 빌딩에 돌진하고, 쌍둥이 빌딩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게 전세계로 생중계 됐다. 2,996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중 민간인은 2,977명, 테러 주범인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19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25,000명 이상이다. 2006년 3월 13일부터 착공을 시작한 이곳은 2011년 9월 11일 꼬박 10년만에 추모관이 만들어졌고, 2014년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로 기억되는 9∙11테러 마저도 추모관 완공에 10년이 걸린 걸 보면, 어느 나라나 비극을 온전히 추모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 수 있다. 9∙11 메모리얼 파크에는 2개의 사각형 모양의 폭포가 있다. 그 폭포를 둘러싼 테두리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단순히 희생자만 있는 게 아니다. 희생자와 생전에 가까웠던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알파벳순이나 임의로 이름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물어 희생자의 이름을 생전에 알던 동료, 친구, 가족의 이름과 나란히 새긴 것이다. 건축을 맡은 아리드는 이를 ‘의미 있는 이웃들'이라는 개념으로 말했다. 이렇게 조성 된 메모리얼 파크와 박물관은 가족 투어, 현장 학습, 공공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어떤 사건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기억하는 공간이 됐다. 혐오하는 사람도 없고, 혐오 시설이라는 인식도 없고, 집 값이 떨어졌다는 소식도 없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안전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하게 되었으며, 공항 반입 가능 물품 등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테러 이전에 허용되던 조그만 과도를 제한하는 등 물품 하나 하나를 신경쓰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깐깐하게 심사했다. 그 결과 뉴욕JFK 공항은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이 아니다. 어엿한 선진국이다. 9∙11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테러가 발생했다는 건, 선진국이라고 하여 테러나 참사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참사를 받아들이고 다루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슬픔과 악몽, 위험과 재난,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벌어진 참사에 의미를 담는 모습이 선진국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 입장하게 되면 방문자들은 이런 문장을 맞이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시간의 흐름 속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 참사로 희생 된 사람들의 이름은 그 유족들에게 잊혀질 수 없고, 지울 수 없다. 당장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것과 그로 인한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 우리는 다시는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변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온다.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다시금 추모하면서, 부디 우리 사회가 그때의 참사를 다시 기억하고, 사회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출처 : 9∙11 MEMORIAL & MUSEUM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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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참사의 기억을 담습니다
10·29 이태원참사의 기억을 담습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10·29 이태원참사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참사현장은 유가족들에게 트라우마 그 자체입니다. 참사의 공간은 애도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참사현장을 찾고 있어요. 이태원역 1번 출구부터 해밀턴호텔 옆 골목을 따라 가벽까지 추모포스트잇과 추모물품이 가득했습니다. 지역 주민과 자원활동가는 작년 12월 말부터 2만 5천여 점의 조화를 비롯해 추모물품을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12월 23일, 유족과 지역주민, 지역상인, 시민대책회의가 함께 ‘희생자의 온전한 추모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장 및 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연 후,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가 공간을 관리해왔습니다. 수많은 메시지를 모두 수거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2023년 3월 11일부터 문화연대는 피해자권리위원회와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활동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찾아온 한 참여자는 야외 공간에 놓인 추모물들은 금방 훼손되기 쉽상인데, “조금만 방심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같은 추모 기록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한” 우리 활동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지요. △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참사현장을 찾아 추모메시지와 추모물품을 남겨주었다.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는 크게 추모메시지 수거 작업, 추모메시지 분류 및 보존 작업, 현장 정비 활동, 추모메시지 공론화 활동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현장을 찾아 추모메시지를 수거해요. 많은 시민들이 남겨준 추모메시지를 보존하려는 게 첫번째 목적이고요. 가득 찬 벽에 새로운 추모메시지가 붙을 수 있게 여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게 두번째 목적입니다. 아카이빙 작업 시엔 몇 가지 규칙을 따라, 메시지를 1차 분류합니다. 그리고 장기보존을 위해 메시지를 고정하고, 제습제와 함께 서류상자에 보관합니다. 현장 정비 활동 시엔 음식, 술, 꽃 등 추모물품을 수거하고 주변을 청소합니다. 또, 추모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 필요 물품(포스트잇, 펜, 테이프 등)도 마련해두죠. △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추모메시지를 수거하는 자원활동가들 △ 2023년 10월 현재까지 수거한 메시지는 십수만장에 달한다. 기록보존활동에는 연구자, 시인, 음악가, 대학생, 다큐멘터리 감독, 문화공간 운영자,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평소 다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참여자도 있지만, 이 활동을 통해 참사가 주는 무력감을 이겨낸 참여자도 있어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활동가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 참여자 뿐만 아니라, 주변 상인과 지나가는 시민도 이 공간에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공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상인은 자원활동가들이 찾을 때마다, 분류 작업할 공간을 내어주고 마실 음료도 선물해주셔요. 바람이 드셌던 어느 날에는 참사 현장을 지나가던 한 시민이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모아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까지 손수 가져다준 일도 있었어요. 국가의 방기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추모메시지와 사회적 애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기억과 안전의 길'에는 참사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와 구조자, 그리고 희생자의 유가족과 지인을 비롯해 다양한 시민들이 방문하여 포스트잇에 추모의 말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추모메시지에는 추모와 애도를 비롯해 미안함, 자책감, 무력감,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있어요. 희생자와 참사 현장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기도 하지요. 추모메시지를 작성한 사람들은 희생자가 겪었을 고통과 유가족의 상실에 공감하며, 타인의 삶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희생자의 사라진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반성하기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잊지 않겠노라고 되뇌이고,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에 나서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메시지를 살펴보면,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관용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비롯해 "미안하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정작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난 이들에게 사과하고 있죠. 왜 살아남은 우리만 사과해야 하는 걸까,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슬픔과 동시에 분노를 느껴요. 아래에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구조자가 작성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이 메시지들엔 참사 현장의 풍경을 비롯해 희생자의 마지막 기억과 생존자의 트라우마, 다짐이 담겨있어요. 특히 구조자들의 메시지에서 재난대응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이들이 느꼈던 무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 지인을 비롯하여 희생자의 지인들이 그들을 호명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울립니다. 여기에는 생전에 함께하며 느꼈던 행복감과 희생자가 떠나며 겪게 된 상실감, 슬픔 등 세상 모든 진한 감정들이 녹아 있습니다. 비록 일부 미디어와 시민들이 희생자를 비난하고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운다 할지라도, 희생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왔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추모메시지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작성된 메시지도 2할 이상이나 됩니다. 이는 인도네시아, 미국, 일본, 중국, 우크라이나 등 다양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추모현장을 찾아 주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태원이 다양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었음을, 그리고 외국인 희생자도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지요. 안전사회를 위해,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합니다 사회적 애도를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은, 정리되지 않은 추모메시지만큼 쌓여 있습니다. 책임자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늘어놓고 있으며, 국회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지만 아직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지요.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록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함께 기억할지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사현장에 발걸음한 시민들이 남겨준 추모와 애도의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안전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글쓴이 _ 문화연대 박이현 활동가 | 앞산의 불을 끄는 일만큼, 너른 삶의 터를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활동가. 잠든 감각을 깨우고,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씨앗을 심고 있다.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을 비롯해,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다양한 문화/예술 실천을 도모하는 한편 청소노동자의 스포츠권을 위해 운동으로 노동운동하고 있다. 이태원 기억 담기 | 매달 2회씩 정기적으로 모여 이태원역 1번출구 앞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추모메시지를 수거하고, 이를 아카이빙 및 공론화하는 활동을 진행하는 시민 모임. http://bit.ly/remember_1029에서 참가신청할 수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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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의 조속한 건립을 기원하며
기약 없는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 또 사라진 '국가의 의무' - 뉴스 ... “합동분향소 운영 뒤 이전”…“추모공간 논의 시작” / KBS ... 이태원 추모 쪽지 훼손한 상인 기소유예...유족에게 사과 / YTN 조만간 416세월호 참사 9주기가 돌아옵니다. 23년 4월 4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추모 공간을 검색하면 가장 처음 나오는 뉴스의 헤드라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3년 지금 순간의 '검색 결과'를 기억해두고 시간이 흘러 또 어떻게 변화했는지 지켜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제가 기대했던 기사는 416 생명안전공원과 같이 416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 건립에 희망적인 메세지이길 바랬는데 아직은 요원한 모양입니다. 기억의 매개체를 만드는 일에 또 다시 이분법적인 정치적 갈등이나 편파적 주장만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속히 추모공간 건립 계획을 세우고 절차가 이행되기를 응원합니다.  우리는 가슴 아픈 참사의 기억을 저장하고, 기록된 매개체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참사로 인해 상처 입은 공동체가 회복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후대의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다짐과 안전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그 공간에는 희생자와 유족과 남겨진 사람, 시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특정 일에만 찾아가는, 또는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 아닌 일상을 함께 하는 접근성 높은 공간이어야 하겠습니다.  그 공간은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인근지역 상인, 시민,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공공선의 마음으로 참여해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쓰다 보니 추모공간 건립의 방향성처럼 적었는데 결국 정부나 서울시 주도의 추모공간 구성과 위로보다는 시민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지속되어 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시나, 정부, 정치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추모공간은 필요하고, 또 심각하게 비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잊혀지지 않기를 강조하는 비장함보다는 스스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단단한 기억으로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태원 참사 추모와 애도 이후, 차츰 희미해져가는 의미를 붙잡고 지금 어떠한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면, 추모공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고 어때야 할까, 그 형식은 어땠으면 좋을까를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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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윤석열 퇴진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한국사회 전반이 무력감에 빠졌다.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의 무력감이 반복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 전반의 무기력 속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는 집회가 있다. 바로 ‘윤석열 퇴진’ 집회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함을 규탄하고자 하는, 그들이 가진 선의를 의심치 않는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퇴진운동은 결과적으로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문제해결 불능의 사회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공수교대 하듯 정권교체만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 우리 사회는 이미 2016년 촛불 이후 대통령 탄핵,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집권을 경험했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참사 반복의 시대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교훈이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 이후 필요한 사회적 반성과 성찰은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왜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졌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 시점 진행되고 있는 윤석열 퇴진 집회는 가장 게으른 방식의 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 이전 윤석열 퇴진 운동 기본적으로 현 윤석열 퇴진운동은 이태원 참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집회에, 참사 이후 추모메세지가 결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원 참사 이전의 윤석열 퇴진운동을 살펴보아야, 현 시점 퇴진운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퇴진 운동은 2022년 8월 6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거의 매주 촛불집회를 진행 중이다. 초기에는 1천 명 규모로 출발했던 집회가 11월 19일에는 40만 명이 모일 정도로(모두 집회측 추산 인원으로 계산) 규모가 커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규모의 확장이 그 운동의 정당성을 증명하진 않는다. 보다 더 주요하게 봐야할 것은 집회의 성격이다. 아직까지도 윤석열 퇴진운동의 핵심 구호 중 하나는 ‘김건희 특검’이다. 심지어 이태원 참사 이후 집회의 한 웹포스터에는 "이태원참사 진실규명 특검하라, 우리가 이재명이다. 검찰표적수사 중단하라"가 메인 문구인 버전도 있다. 김건희 씨의 주가조작 의혹, 이력 허위 기재 논란에서 출발해서 이재명 민주당 당대표의 검찰수사 중단으로 귀결되는 집회구호가 이태원 참사 추모메세지과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집회에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결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목소리를 연결해내는 큰 줄기의 핵심내용이 그 집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의 가장 큰 줄기는 무엇인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인가? 아니면 김건희 특검과 이재명 수사 중단인가?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이라는 단체를 살펴보자. 아래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출범선언문 일부이다. "2016년 광화문 촛불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적폐정권을 퇴출시켰고 2019년 서초동 촛불은 검찰개혁을 촉구하며 타올랐습니다. (...) 2022년 대선은 정치검찰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촛불항쟁의 과정이었습니다. 촛불혁명 제1차 3단계였습니다. 대선 결과 검찰 파시즘 체제가 도래(...) 3단계로 이어졌던 제1차 촛불혁명은 종료되었으며 이제 제2차 촛불혁명의 막이 올랐습니다.(...) 촛불혁명의 단계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요약하자면, 촛불승리전환행동은 ‘촛불혁명’을 좌초시킨 검찰세력과 싸우는 ‘2차 촛불혁명’이 필요하다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고, 여기에 기반해서 윤석열 퇴진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집회에서 부르고 공연을 했던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노래 가사는 더 노골적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겨우 영점 칠삼프로 이겨놓고마치 점령군이라도 된 것처럼"(...)"조국 온 가족을 도륙해놓고정치검사 측근인사 승진했네" 기본적으로 현 정세를 20대 대선의 연장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대선은 졌지만, 결과를 다시 뒤집을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고, 조국 전 장관 사태를 언급하는 가사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윤석열 정권을 물리치고, 이재명 당 대표와 조국 전 장관을 ‘복권’시키는 것이 정의라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 아무리 민주당과 무관한 집회라고 주장한다고 치더라도, 선명하게 민주당과 이재명 당대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긴 힘들다. 결국 조국 전 장관 사태 이후 발생한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 대립의 연장선에서 태극기 집회와 현 윤석열 퇴진 집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제도권 양당 정치가 거리까지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퇴진운동의 근거 또한 부실하다. ‘김건희 특검’이라는 구호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동일한 선상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대통령과 혼인신고도 하기 전의 주가조작 사건이 대통령 퇴진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려 없는 퇴진운동은 ‘이재명 방탄 집회’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적 조건이기도 하다. 윤석열 퇴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대통령 퇴진 요구 자체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용산참사와 쌍용차 파업이라는 국가폭력 이후 퇴진운동이 전개되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로 출발한 전 사회적 변화의 요구가 퇴진운동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은 출발 지점부터 현재까지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자의 요구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가 결합되었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이유는 사회적 반성과 성찰의 과정이 생략된 퇴진 운동이기 때문이다. 최고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일부 진보적 운동 단체에서는 체제전환을 이유로, 윤석열 퇴진을 외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윤석열 퇴진’이라는 구호가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체제전환 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대통령 퇴진 구호는 체제전환의 요구를 가리고 있다. 윤석열 퇴진 구호는 불평등-기후위기-차별의 문제들이 아니라(혹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재명-윤석열 두 개인 간의 정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선, 지긋지긋한 양당정치의 구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자본주의가 극복되는 것도 아니며,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사회의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정권교체는 ‘도로 민주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도로 민주당’이 정말 ‘혁명’이고 ‘해방’인가? 운동은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제시하고, 대중들을 설득하며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왜 그 노력을 ‘김건희 특검’을 외치는 세력과 함께 해야 하는가? 검찰과 싸우기 위해 모인 세력이 아니라, 현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고 아픈 사람들 곁에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사회운동 세력이 함께해야 할 곳은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옆이다. 추모행동으로 출발하자는 의미 사회적 추모는 단순히 슬퍼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추모를 통해 행동하자는 의미이고, 이 행동에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 결과적으로 윤석열 퇴진운동을 전개하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윤석열 퇴진(민주당 재집권)을 위해 ‘추모’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본말전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아직은 짐작할 수 없지만, 함께 슬퍼하고 감정을 공유해나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참사의 시대는,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회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지금의 청년세대는, IMF부터 세월호 그리고 10.29 이태원참사까지 각자도생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는 것을 살아온 삶 전부를 통해 학습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그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은 첫째는 반성과 성찰이고, 둘째는 고립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메시지는 단순히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잘못을 확인하고 대안을 찾아나갈 수 있는 사회라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또한 언제든 자신이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내재된 사회구성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의 존재의미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윤석열 정부는 이를 포기하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정치적 행동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출발해 국가에 대한 불신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새로운 사회 모델을 탐색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제는 안전하다, 이제는 사회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연결해내는 사회를 제시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퇴진운동을 넘어서야 하는 가장 큰 핵심적 이유다. 게으른 퇴진운동을 넘어 국가담론에 대해 말하자. 누가 대통령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느냐이다. *12월 17일에 있었던 있었던 민교협 토론회 <이태원 참사의 성격과 한국 정치>에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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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공론장 결과보고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기획·준비하고, 청년참여연대가 협력하여 진행한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공론장 결과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안녕하신가요?'라는 말을 건내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였지만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및 대안 마련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퇴진이 추모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추모를 정치화 하지 말라'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된 정치체제는 10.29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반응 또한 양극화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캠페인즈팀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참사에 대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으고자 캠페인즈에 ‘10.29 이태원 참사’ 이슈를 개설하여, 참사와 관련한 캠페인, 투표, 토론, 기사들은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10.29 이태원 참사에 관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함께 추모와 애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이슈 페이지 다행히도 유가족 당사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나누고 사회적 대화를 나누어,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 가자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빠띠가 개최한 작은 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또한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준비했습니다. 발제자로 예비교사 대학생 신유진님, 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연구원 최성용님, 10.29 이태원참사 청년추모행동 공동집행위원장 김창인님, 용산구 의원 함대건님을 모시고 각각 청년, 언어, 정치, 제도의 키워드와 관련하여 발제를 요청드렸습니다. 발제문들은 공론장 행사 전에 사전에 업로드 하여 시민들이 댓글로 의견을 미리 달거나 행사 참가 예정자분들이 미리 볼 수 있도록 제공하였습니다.  ?[발제문] 함대건_10. 29.참사의 현황 및 제도적 보완 방안  ?[발제문] 신유진_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 ?[발제문] 김창인_참사 이후 정치, 우리는 왜 달라지지 못했을까 ?[발제문] 최성용_참사를 대하는 목격자의 태도 신유진 발제자와 최성용 발제자 김창인 발제자와 함대건 발제자 2022년 12월 20일 오후 7시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공론장 행사가 열렸습니다. 공론장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빠띠의 '10.29 이태원 참사 이슈 페이지' 운영을 통해 생산한 캠페인, 투표, 토론 생산 활동 과정에서의 시민 토론 정보를 제공하고, 발제자들의 발제를 제공하고, 캠페인즈에서의 발제에 대한 사전 토론 정보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다채로운 정보의 제공은 짧은 테이블 토론에서의 논의가 좀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테이블 토론 후에는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정리된 의견들을, 캠페인즈의 발제문 게시물에 댓글로 작성하였습니다.  캠페인즈와 공론장 행사에서 이루어진 모든 논의들을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공론장 결과보고서"로 정리하였습니다. 네 개의 테이블에서 이루어진 토의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연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시간 공론장_소모임 토의 전체 요약 및 연결 소모임-1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청년 이번 참사에 대해 청년으로서,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공유해주세요. 다양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파괴 혐오의 사회를 체감 사회적 트라우마의 반복  이야기를 나누며 애도할 수 있는 상황의 부재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분법적으로 서로를 혐오하고 같이 애도하지 못하는 것 죽음에 급을 나누고, 나만 괜찮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타자화 시키는 것 개인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익을 따지게 되는 경쟁 구도가 원인  참사가 반복되고 제대로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사회적 신뢰의 파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참사의 공간을 애도의 공간, 안전한 공간으로 보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애도하는 것 참사를 욕하고 혐오하는 움직임에 대응 정리되지 않은 감정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소모임-2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언어 [1] 주변에서 이번 참사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경험을 공유해주세요. 참사 자체가 공공재가 되기 위해서는 10.29참사로 불러야 함 이태원이라는 장소에 대한 명명을 빼고는 구체성이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태원참사 혹은 10.29 이태원참사라고 불러야함 (어떤 명칭으로 부르더라도) 아픔에 대한 공유와 공감이 있어야함 [2] 나눠주신 경험을 바탕으로,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코로나 시기 동안 청년세대들이 장기간 놀지 못했던 것이 할로윈이라는 축제로 분출. 정부가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함 이태원에는 항상 할로윈 행사가 있었음. 매뉴얼의 유무와 관계 없이 공공 시스템이 잘 작동했어야 했음 [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더 많은 대화를 통한 공론장의 활성화 약자가 중심에 서는 제도 희생자들이 내가 희생자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상황 마련 소모임-3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정치 [1] 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정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정치인들이 힘든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데,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을 돕고 있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정치가 해야할 일 [2] 나눠주신 경험을 바탕으로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지옥철만 봐도 공포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낌 이태원참사는 세월호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에 더 끔찍함 신고 이후에 정부의 처리절차가 더 심각함 [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치적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야함 정치가 참사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함 책임을 지는 사람이 부당하게 비판 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소모임-4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제도 [1] 이번 참사가 벌어진 원인과 관련해 어떤 제도적 조치가 미흡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투입할 수 있는 경찰관 인력 부족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제도적인 프로세스 책임자들의 문제의식 안전에 대한 경각심과 위기의식 [2] 나눠주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도적 인식변화 부재 복구 과정에서 시민의 역할에 대한 매뉴얼 부재 sns에서 참사 현장에 대한 무분별한 공유 2차 가해에 대한 규정 및 사회의 대응  안전관련 공직자 부족 서울 중심의 행사 조례의 사회적 기능 여부 [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사회를 만들지 시민과 함께 논의 지역 상인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 소모임 토의의 연결 참사의 당사자 당사자 주체 희생자, 생존자, 유가족, 목격자, 지역 상인, 청년, 여성, 소수자 그리고 (함께 슬퍼하고 연대하는) 시민들  당사자의 처지‘놀다가 죽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 등의 개인 탓, 폭력과 혐오, 편견과 배제, 슬픔, 무력감, 미안함, 2차 가해  참사에 대한 진단 참사의 원인 책임자들의 문제의식 부족 대응 과정에서의 매뉴얼의 부재 안전에 대한 불감과 제도적 프로세스의 부족 사회적 참사, 사회적 재난 다양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파괴 2차 가해에 대한 규정 및 사회 대응의 부재 사회적 트라우마의 반복 사회적 신뢰의 파탄 이태원 핼러윈 행사는 항상 있었고, 코로나 이후 분출이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매뉴얼 유무와 관계 없이 정부의 대처가 있어야 함 참사에 대한 언어의 형성과 사회적 기억 애도/추모/정치의 부재 혹은 오염상징과 언어의 부재  감정의 공유 → 미안함=연결감 → 연대 사회적 기억의 형성 시민행동 추모와 애도 각자의 방식에 따른 애도 당사자 중심의 대응 혐오에 대한 대응 참사 공간을 안전한 애도의 공간으로 공론장의 활성화더 많은 대화를 통한 공론장의 활성화 정치와 제도 양극화 된 정치 양당의 이분법적 적대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공존 정부의 역할과 책임, (실질적) 대의 좋은 정치의 필요 반성과 성찰, 공감과 위로, 추모와 애도, 희망과 회복, 안전사회 연대, 사회적 대화, 시민들의 공론장  제도적 보완의 필요 사회적 참사/재난, 예방-대비-대응-복구, 안전관리(조례 개정) 참사의 콘트롤 타워 역할 수행 대책 마련 안전 관련 대응 체계 마련 안전 관련 조례의 현실화 +시민의 책무 소모임 토론 행사 개최 전 캠페인즈에 업로드 된 발제문 게시물에서의 사전 댓글 토론과 행사 당일 테이블 토론 후 참가자들이 작성한 댓글 또한 요약 정리했습니다.  ⭐️캠페인즈 댓글 토론, 요약과 연결 참사의 당사자 반복되는 참사 (세월호 이후) 또 다시 마주한 참사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청년의 무기력감 '우리는 늙어 죽을 수 있을까?' '내가 될 수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 재난은 디폴트 우리 모두 당사자 불편함, 슬픔, 아픔 비난과 혐오 희생자 탓을 하는 댓글들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좌절감 책임감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단 참사의 원인 개인의 탓이 아니며, 놀러간 것이 잘못일 수 없음 놀다가 죽을수도 있는 나라가 정상이냐 누구에게나 쉼도 놀이도 필요한게 정상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 집단적인 자기 성찰이 전무한 결과 사회적인 집단 자기 성찰이 없는 우리 사회 사회적 참사, 사회적 재난 정부의 역할이 중요 ‘참사가 끝난 게 아니다’ 계속되고 있다 책임‘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가에 집중하는 사회 시민행동 지향하는 가치 사회적 신뢰 서로에 대한 공감 연결감과 연대 사회적인 반성과 성찰 실천과 행동 정부와 시민의 공적 책무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 애도 애도는 연결을 인지하는 것 일상 속 다양한 방식의 애도 사회적 기억 그들의 일 말고 우리의 일 참사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공유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방법은 공감 표현하는 언어에 고민과 논의를 거칠 때 더욱 잘 기억할 수 있음  공론장 활성화 지속적인 대화와 공감 모두가 모여서 많이 말하고 듣는 공론장과 집담회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공유 할 수 있는 공간들 제도가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논의하는 공론장 정치와 제도의 필요 양극화 된 정치 참사가 각 진영의 수단으로 전락 '추모를 정치화 하지마라' vs '퇴진이 추모다'? 퇴진운동의 기회? ‘퇴진이 추모’라는 구호는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을 차단 나를 대의해줄 정치인이나 정치화된 언어가 없다 정치는 기존 우리 정치의 이항대립으로 녹아들어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함 좋은 정치의 필요 사람들이 모일 때, 정부의 역할이 있는 것 참사의 원인에 정부의 역할 수행 부분이 관련되면 정치적 차원의 접근은 필수적 다양한 주체들의 사회적 대화와 논의에 기초하여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의 책임을 묻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한 제도적 보완을 하고,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추모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정치 양당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사회적 참사로서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확산 속에서 사회적 기억을 구성하고, 안전사회를 위한 사회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추모와 애도의 정치 사회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좋은 정치 제도적 보완의 필요 조례 제정 통해 확실하게 관리 '주최'가 없는 행사의 관리 체제 마련 재난의 예방과 대비 위협과 위험의 촉진 요인 제거 및 억제 비상계획 수립, 대응조직 준비 및 역량 강화 대응과 복구 “‘10.29 이태원 참사’의 당사자는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더 넓게는 이를 지켜보게 함께 슬퍼하는 시민들 모두이기도 합니다. 좀더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청년이며, 여성이며, 소수자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당사자이고 다 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회적 참사로서의 ‘10.29 이태원 참사'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하지만 각자의  차이들을 지니며 ‘사회적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다양한 측면에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공유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참사의 당사자들은 ‘놀다가 죽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 등 개인의 탓을 하는 반응들 속에서 폭력과 혐오, 편견과 배제, 2차 가해를 겪고 있고, 슬픔과 아픔, 미안함과 불편함, 무력감과 좌절감 속에 고통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이후 또 다시 마주한 반복되는 참사에서 '우리는 늙어 죽을 수 있을까?',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재난이 디폴트'가 되는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태원으로 놀러나간 것이 죽어도 슬퍼 할 수 없는 잘못일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쉼도 놀이도 필요한게 정상일 것입니다. ‘놀다가 죽었다'는 이들에게 ‘놀다가 죽을수도 있는 나라가 정상이냐’고 되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는 안전에 대한 불감과 제도적인 프로세스의 부재, 대응 과정에서의 매뉴얼의 부재, 책임자들의 대처에서의 무능 등으로 인해 벌어지고 극대화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참사는 사회의 집단적인 자기 성찰이 없다는 것의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사가 개인들의 탓이 아니고 정치사회적 대비 및 대응의 부재로 인해 벌어졌다는 점에서 10.29 이태원 참사는 사회적 참사, 재난입니다. 참사 이후에도 원인 규명과 책임 처벌의 부재, 2차 가해에 대한 규정 및 사회 대응의 부재 속에서 사회적 트라우마가 반복됩니다. 이는 사회적 신뢰의 파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사가 끝난 게 아니’고,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정치권은 '추모를 정치화 하지마라'는 진영과 '퇴진이 곧 추모'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듯 합니다. 양극화 된 정치는 서로를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상 ‘적대적 공존 상태'에서 참사를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당사자의 목소리,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들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치는 시민들을 실제로 대의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참사의 원인 정부의 역할 수행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원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추모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0.29 이태원 참사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는 기존 정치의 이항대립으로 녹아들어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좋은 정치는 반성과 성찰, 공감과 위로, 추모와 애도, 희망과 회복, 안전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시민들의 연대와 사회적 대화, 즉 시민들의 공론장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양당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사회적 참사로서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확산 속에서 사회적 기억을 구성하고, 안전사회를 위한 사회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추모와 애도의 정치”일 것입니다. “다양한 주체들의 사회적 대화와 논의에 기초하여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의 책임을 묻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한 제도적 보완을 하고,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추모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정치”일 것입니다.  추모와 애도의 정치는 제도적 보완을 지향해야 합니다. 사회적 참사/재난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매뉴얼을 마련하고 관련 법이나 조례 제정 및 재정비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응과 복구를 위한 체계, 안전관리 체계를 마련하고 재정비 해야 할 것입니다. 대응-복구, 안전관리 체계를 마련하고 재정비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최'가 없는 행사의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것 또한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추모와 애도의 정치는 시민들이 추모와 애도를 위한 책무를 다하기 위한 행동을 벌여나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시민들은 서로에 대한 공감 속에서 연결감과 연대의 관계를 맺고 사회적인 반성과 성찰을 지향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한 실천과 행동은 시민의 공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며, 함께 사는 공동체,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며 사회적 신뢰를 형성해내는 일일 것입니다.  추모와 애도를 위한 시민행동은 일상속 각자의 다양한 방식에 따른 애도, 당사자 중심의 대응, 서로에 대한 연결과 연대의 형성,  혐오에 대한 대응, 안전한 애도의 공간의 형성, 더 많은 대화를 통한 공론장의 활성화의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바탕으로 애도·추모·정치의 부재 혹은 오염을 극복하며 10.29 이태원 참사를 잘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일 말고 우리의 일’이라는 관점에서 참사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당사자와 연대하는 시민들의 언어로 참사를 말하고 기억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형성되고,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힘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주도의 공론장'을 만들고 활성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공론장은 시민들의 지속적인 대화와 공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일 것입니다. 모두가 모여서 많이 말하고 듣는 공론장,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공유 할 수 있는 공론장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사를 대비하고 대응 할 수 있는 제도가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논의하여, 시민들이 위험사회가 아니라 안전사회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낼 수 있는 공론장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위의 문장들은 캠페인즈에서의 시민들의 토론과,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공론장에서의 시민들의 토론에서의 의견들을 모아 재구성한 것입니다. 수많은 단어와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약간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은 응축된 하나의 결과인 셈입니다.  시민주도 공론장은 들리지 않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해줍니다. 시민들이 직접 주도하여 자율적으로 열어가는 공론장은 당장에는 제도적 변화까지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다양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더 나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직접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일 것입니다. 목소리를 내고 토의하고 함께 의견을 모음으로써 공적인 삶에 참여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되어가는 과정에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과 중심이 아닌 과정에서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이며, 이러한 수많은 과정들이 쌓여갈 때, 여러 사회문제들을 실제로 다루게 되는 힘을 얻고, 실질적인 제도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행사와 캠페인즈에서 나눈 사전 토론,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이 보고서가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 쌓는 돌탑의 이루는 하나의 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시민들의 진솔하고도 다양한 목소리 전체와 공론장 기획 및 과정 등을 보고서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가 캠페인즈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은, 내가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을 캠페인즈에서 함께해주세요? 빠띠의 더 다양한 소식이 궁금하거나, 다른 활동가들과 소통하고 싶다면? ? 빠띠 홈페이지 가입하기 주목할만한 시민들의 캠페인·투표·토론을 메일로 받아보고 싶다면? ? ‘Today 캠페인즈' 구독하기 빠띠의 소식을 메일로 받아보고 싶다면? ? 뉴스레터 ‘빠담빠담’ 구독하기 빠띠의 든든한 후원회원, 빠띠즌이 되어주세요! ? 빠띠 후원하기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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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건_10. 29.참사의 현황 및 제도적 보완 방안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함대건(서울특별시 용산구의회 의원) part1. 10.29.참사, 왜 발생했는가? 재난관리란? 재난관리 목적 : 인명, 재산, 환경 보호 관리방법 : 재난의 종류에 따라 다름  --> 재난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각종 재난을 관리하는 것 재난관리 방법 재난에 대한 예방 재난으로 인한 위험을 축소하기 위한 활동 대비, 대응, 복구 등과 관련된 일련의 활동 --> 재난의 예방, 대비, 대응, 복구에 관한 정책 개발과 집행과정을 총칭 재난관리의 단계별 유형 예방단계 위협, 위험이 존재하는 곳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결정 재난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험의 정도를 감소시키는 활동 실제로 발생하기 전 재난 촉진 요인을 미리 제거하거나 억제, 예방하는 활동 대비단계 재난에 대비해 필요한 비상계획 수립, 훈련 통해 재난대응조직의 능력을 강화하는 단계 재난의 목표설정으로서의 대비단계(준비 및 계획)의 의미 비상시 효과적인 대응, 작전 능력 향상을 위해 취해지는 사전준비 활동 대응단계 재난 발생 직전과 직후 재난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취해지는 인명구조, 재산손실 경감, 긴급복구 활동을 총칭 실제 재난 발생시 재난관리기관이 수행해야하는 각종 임무 및 기능을 적용하는 과정 복구단계 재난이 발생한 직후부터 피해지역 재난발생 이전의 원상태로 회복할 때까지 지원을 제공하는 지속적 활동 혼란상태 안정되고 응급 인명구조 및 재산보호 이후 재난 이전 상태 회복 위한 활동 단기적 응급복구와 장기적 원상복구로 나뉨 재난관리의 형태 분산관리 형태 재난 발생 유형에 따라 소관부처별 국가재난 관리 기능을 분산 유형별 재난의 특징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 지진, 수해, 화재 등 대응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강조 통합관리 형태 분산관리의 문제점, 여러가지 대응상 문제 제기를 통해 미국에서 제시된 모델 경고, 대피, 구호, 탐색, 구조, 구급, 사망자 처리 등은 개인과 집단에 관계없이 동일한 활동이 취해져야하며 재난대응의 계획과 자원은 동일한 수준으로 이루어짐 재난관리의 형태별 장단점 분산관리 형태 다수의 부처 및 기관이 소관 재난에 대한 관리 책임 부담을 분산시켜 특정 재난에 활동하는 방식 부처 및 기관에 정보전달 다원화, 재난관리 위한 재원 마련의 중복 등 통합관리 형태 소수의 부처 및 기관이 모든 재난에 대한 관리 책임 과도한 부담의 가능성 증가 정보전달의 단일화, 재원 마련 및 배분의 간소화 part2. 10.29.참사,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가? 1029.참사 대처의 문제점 : 국가, 경찰, 구청, 소방 차원에서(미완) part3. 10.29.참사 이후 우리는? 10.29.참사 이후 지방의회 조례발의안 서울시-서울특별시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에 관한 조례안 주최 및 주관자, 단체가 없는 다중운집행사 등에 관한 안전관리조치 조항 명시 서울시장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추진되는 축제 및 행사의 경우에도 안전관리 대책 세워야 함 기존 옥외행사의 안전관리 조례는 서울시 등 주최가 명확한 경우에만 안전관리를 하도록 명시, 주최 미상의 다중운집행사는 제외 조례안 제5조 ▲1일 예상 운집 인원이 5만 명 이상, 행사 장소와 내용이 수시 변경될 수 있거나     ▲1일 예상 운집 인원이 10만 명 이상인 다중운집 행사의 경우, 서울시장이 서울시 경찰청장 및 자치구청장 등 안전관리 관련 기관과 사전 협의해 의무적으로 안전관리계획 수립 안전관리계획은 행사 내용, 다중운집 행사 지역 및 주변의 위험요소에 대한 안전 관리 대책, 안전관리인력의 확보 및 배치계획, 비상시 교통계획, 다중이용장소의 자체 안전 관리 인력 가동 상황 등 포함 제6조에는 시장이 시경찰청장에게 보행자·자동차 등의 통행을 금지 또는 제한하는 조치와 도시철도 운영자에게 지하철의 무정차 통과 조치를 요청할 수 있게 명시 다중운집 행사로 인해 사고·재난이 발생하면 재난안전대책본부를 신속히 설치할 수 있는 근거 조항 마련 제8조에는 통행의 금지 및 제한사항 규정 군집밀도 산정방식, 공간 수용능력 및 군집유동시간 등의 기준을 고려해 특정시간, 구역, 방법을 지정하여 통행을 금지하거나 제한 서울특별시 옥외행사의 안전관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안 옥외행사의 범위에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군중 행사’추가 옥외행사 장소 및 접근 경로 등 주요 통행로 등에서 군중 밀집에 대한 예측과 감지를 안전관리 계획에 포함 주최•주관이 없는 자발적 집단행사에 군중밀집 예측과 감지, 안전관리 대책 수립 시민의 책무 신설, 옥외행사에 따른 시민 안전 확보 도모 옥외행사 질서유지와 재난예방을 위해 자치구청장에게 필요한 협조 요청 *"10.29.참사의 현황 및 제도적 보완사항"(함대건),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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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용_참사를 대하는 목격자의 태도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최성용(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부설 냉전평화연구센터 연구원) 왜 “놀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감각으로 그런 말을 하 는 것일까? 우선은, 세 가지 정도의 맥락을 짚어보려 한다.  1) 상징과 언어의 부재  세월호 참사는 가령 ‘침몰하는 배’나 ‘노란 리본’, “가만히 있어라”와 같이 풍부한 의 미를 담은 상징과 언어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이 해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그러한 은유적인 상징이나 언어가 없어서, 여전히 너무 ‘비현실적’인 일처럼 다가온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지금 이태원 참사를 가장 간단하게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언어 는 ‘놀러가서 죽었다’이다. 그래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언론에서는 인파에 휘말 리게 되면 개인이 어떡할 수 없는 재난의 상황이 된다는 의미에서, ‘군중난류’나 ‘군 중 눈사태’ 같은 개념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2) 오염된 언어와 냉소  “애도를 강요하지 마라”는 목소리는 사실 ‘국가애도기간’의 결과이다. 애도기간을 선포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이지만, 정작 애도기간에 대한 반발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을 향하고 있다. 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책임’을 말하 는 이들은 ‘놀다가 죽었다’는 비난과 함께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보상금은 법 적으로 규정된 것이라 정부가 임의적으로 지급하는 게 아니다. 또한 국가애도기간 은 법적 근거는 없으나 과거 천안함 사태 때 선포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천 안함 침몰 이후 한 달이 지나고 인양이 마무리된 시점에 애도기간이 선포됐다. 반 면, 이번 애도기간은 10월 30일에 선포되었다. 10월 29일 밤 10시에 사고가 일어 났는데, 다음날 아직 피해자들의 사망/생존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도 부터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애도를 정치화하지 마라”는 말도 등장했다. 실제 “퇴진이 추모다” 같은 구호는 참사와 애도를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치’가 특 정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만 사고되고 환원되는 현재의 상황이다.  이렇게 정부와 야당의 정치 언어가 ‘애도’나 ‘정치’와 같은 말들을 오염시키고, 다른 애도의 말들을 봉쇄하거나 도구로 활용하면서 가능한 사회적 언어가 사라지고 있 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침묵과 냉소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놀다가 죽었다”는 그런 냉소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3) 이태원과 혐오  ‘놀다가’의 의미에는 이태원이 ‘위험’하고 ‘문란’한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위험 한 줄 알면서도 ‘그런 곳’에 간 건 ‘개인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근현 대사를 관통하는 이태원의 역사와 관련된다. 이태원 일대는 과거에 큰 공동묘지가 있었던 지역으로, 지금도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종종 유해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일제 시대 용산에 일본군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미군이 용산에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기지촌’으로서 이태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미군의 유흥문화와 미국산 제품들이 흘러나오는 곳이 됐고, 거기엔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군 위안부’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이태원은 각종 ‘미군 범죄’와 관련되어 ‘위험’한 곳으로 취급되어 왔고, 또한 이태원 은 트랜스젠더, 게이 등 성소수자들, 이주노동자와 난민 등이 드나들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근현대사의 여러 모습들이 새겨진 장소이지만, 그렇기에 이태원을 둘 러싼 담론들은 늘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특히 2020년 5월 이 태원에서의 코로나19의 확산은 ‘위험하고 문란한 이태원’이라는 기존의 담론을 반 복하는 것이었다. 2020년 10월 말, 2021년 10월 말, 매번 핼러윈 시즌 때마다 코로 나19 확산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이태원의 성소수자, 외국인 및 이주민에 대한 혐오 담론이 나타났다.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2022년 10월의 핼러윈이 있는 것 이다. “놀다가 죽었다”며 사회적 애도를 가로막는 혐오 담론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바탕에 두고 있다.  생존자와 목격자  생존자들의 호소하는 ‘미안함’은, 한편으로는 트라우마이자 아픔이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희생자들과의 강력한 ‘연결감’을 의미한다. 나는 그 연결감의 아픔을, 먼 거 리에 있었던 목격자들,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격자들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희생자와의 연결됨을 부정하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하며, 아니면 ‘너는 나다’라는 식으로 희생자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 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격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며 그조차도 생존자보다는 희 생자와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감 속에서 목격자가 참사를 대하는 태도란 ‘나일 수도 있었다’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안합니다”라며 “기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다 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는 그런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의 증거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참사가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 다시 참사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현재 생존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말들이 가득 하다. 이미 한 생존자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10월 29일 밤에 살아남은 사 람들은 여전히 ‘길고 느린 참사’를 겪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아직 우리 사회가 구출해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날 밤 생존자들이 사람 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이제 생존자들, 유가족들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 서는 희생자들까지도) 구해내야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참사를 대하는 목격자의 태도"(최성용),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최성용 캠페이너가 작성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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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인_참사 이후 정치, 우리는 왜 달라지지 못했을까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김창인(10.29 이태원참사 청년추모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청년정의당 대표) 국가는 없었다 지난 12월 1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국정조사 특위의 간담회 자리에서 고 이지한씨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진실을 밝혀달라며 울부짖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달라는 그 간절함과 절박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앞집 개가 죽어도 위로를 하는데 하물며 나라 어버이로서 158명 자식들이 죽었는데···”라는 유가족의 이야기는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는 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이태원 참사 당시 국가는 없었고, 참사 이후에도 추모와 애도의 과정에서 국가는 무책임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직후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은 근조 리본을 착용했고, 축제 등 문화공연도 자제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동시에 ‘참사’가 아니라 ‘사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10월 30일은 아직 구조 및 의료 업무가 진행 중이었고, 희생자 숫자조차 확정되지 않은 시기이다. 죽지도 않은 사람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애도기간을 선포한 것이다. 정부에게 국가애도기간은 참사에 대해 함께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망각을 유인해 참사의 성격과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가 투영된 것에 불과했다. 참사 이후 정부가 유가족들을 대했던 모습은 윤석열 정부의 속내를 더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참사 다음날 희생자를 찾기 위해 수많은 병원의 응급실을 쫓아다녀야 했던 가족들의 이야기, 14시간 만에 나온 사체검안서 때문에 이틀이 지나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이야기 등 상조회사만도 못한 정부의 행정절차로 인해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 더욱이 정부는 유가족들이 서로 소통하고 위로하기 위한 만남 자체를 차단해 버렸다. 유가족들은 “우리가 범죄자도 아닌데 같은 유족 만나는 걸 왜 이리 은밀히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참사 유족 간 접촉을 못 하게 하라고 공무원들이 교육을 받았다”라며 토로했다. 윤석열 정부가 유가족들을 정치적 적대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잘못된 정치는 왜 반복되는가 참사 직후 우리 사회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단순히 참사의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참극을 다시 떠올렸다. 더욱이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한 혐오부터 국가행정의 무책임한 태도와 꼬리 자르기 행태에 이르기까지, 현 정부의 대응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회 면면은 세월호 참사 때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14년 4월 27일, 세월호 참사 이후 열흘이 조금 넘은 시기에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는 사임을 표명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사건 수습을 이유로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고, 두 달 뒤 내각 개편 과정에서 마땅한 후보자가 없자 총리 유임을 결정해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도중 사과를 하는 등 공식적 사과를 집요하게 피했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1주기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진도 팽목항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좌절하지 말자”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보였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이상민 행안부 장관 파면은 법적 책임이 드러나면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규모 참사에 대해 정부와 여당 그 누구도 책임감을 통감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중 한 분은 자신이 ‘2찍’이라고 말씀하시며 통곡을 했다. 지난 대선에서 2번을 찍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배우자도, 희생자인 아들도, 온 가족이 ‘2찍’이었는데, 어떻게 정부가 이럴 수 있냐며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어쩌다 우리 정치가 이 지경이 됐는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확하게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말 한 마디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모든 문제를 양당의 적대적 공존에 기반해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태원 참사 이전과 이후, 거대양당의 정치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태원에서 158명이 안타까운 비극을 맞이하고 있을 때, 거대양당은 민생은 뒤로 한 채 김건희 특검과 이재명 특검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참사 이후에도 전 국민이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데, 법무부 장관이 청담동 술자리에 갔느니 마느니, 캄보디아에서 영부인이 조명을 썼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진실공방을 하고 있었다. 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국가와 정치가 국민들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 진실에는 양당 모두 무책임했다. 이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행위가 정치의 전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추모가 퇴진’이라는 두 번째 비극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비극으로만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두 번째 비극은 참사에 대응하는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모습이 세월호 당시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고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김건희 특검’과 ‘윤석열 퇴진’을 구호로 매주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라는 구호가 하나 더 추가된 것에 불과한 정치적 행위가 추모로 둔갑해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들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김건희 특검’ 피켓은, 한국정치의 파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퇴진 촛불 정세와는 다른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재난과 참사 이후, 사회는 ‘반성과 성찰’을 기반으로 변해야 한다. 불평등이 재난으로 심화되지 않아야 하고, 참사를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코로나 재난 속에 비대면-원격사회로 전환을 대안으로 내놓고, 이태원 참사 직후에는 정권교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대안들이다.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 권리는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추모와 애도에서 정치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모와 애도가 정권에 대한 분노로만 귀결된다면, 안전 사회-대안 사회는 누가 만들 수 있는가?   추모에서 정치로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구속해야 정국을 운영할 수 있고,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을 퇴진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가? 왜 이 두 개인을 둘러싸고 우리 정치는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해야 하고, 시민사회 일부도 이 개인 간의 싸움을 정치투쟁으로 곡해하고 있는 것인가? 이 이분법적 정치의 구도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추모가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앞에 서 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박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숨통을 틔우고자 해방의 공간을 찾아간 158명의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참사였다는 것을 전 국민이 확인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그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일종의 ‘사회재계약’을 고민해야 한다.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 권리는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추모와 애도에서 정치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추모의 대화’를 사회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기성국가-기성정치-기성사회를 거부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산발적으로나마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퇴진이 추모’라는 구호는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의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퇴진운동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참사를 마주하지 말자. 어떤 결론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추모하고 대화하고 연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나가야 한다. *"참사 이후 정치, 우리는 왜 달라지지 못했을까"(김창인),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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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_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우린 무사히 30대 생일을 축하할 수 있을까요?  : 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    신유진(가까운 미래에초등학생을 만날 예비교사, 대학생) The scapegoat 뭉뚱그려진 책임 소재와 죄책감의 방향  희생자를 동정하면서도 “희생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자신을 희생자들과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구,” “안타깝지만 저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와 내 가족은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살아있다.  -재난의 세계사(원제: The Big Ones: How Natural Disasters Shaped Us)』(2018) 늦게까지 기사, 유튜브, 트윗을 봤다. ‘사망자 대부분 20 대 여성’, 개인이 다수한테 가감 없이 나르는 이미지들. 잠에 들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게 내 앞에 당도해 있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고의로 기록을 게을리했다. 망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흐릿하게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상실 사진 참가 후기 박서연) '일탈하다 변을 당한 애들' ‘흥청망청 유희를 즐기러 갔다가 죽은 애들'이라는 비난도 귀에 박힙니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때마다 느끼는 이 공포는 왜 공유되지 못하는 걸까요? 간명한 애도는 새로운 정부에서도 반복되고 산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간신히 아문 딱지는 자꾸 벗겨집니다. "팽목항에서 사고가 났는데, 모두 구조됐대. 참 다행이지"라던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두어 시간 만에 "배 안에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데, 물이 차오르는데도 아직 못 나오고 있대"로 바뀌었던 열일곱의 그 날이 머릿속에서 재생됐습니다. 선생님은 그 일이 마치 당신의 오보로 벌어진 것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검은 리본에 '근조'를 지우고 책임자 없는 사고라고 주장합니다. 교육부장관이 전국의 교육청에 노란 리본을 달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고, 끝까지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은 한 대통령이 겹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라는 말과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말이 겹칩니다. 애도는 그 연결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까지 연결되었던 무수히 많은 삶과 노동과 죽음을 기리며 매일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할 때 애도가 곧 무서운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나를 보살피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그래, 애도는 매일 해야 하는 것이구나.”(상실 사진 참가 후기 박서연) 그들을 평생 곁에 둬야 할 존재들처럼 여기며, 소중한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고 싶습니다. 안타깝게 희생된 분들을 끝까지 수호하면서요. 먼 미래에 친구가 될지도 모를 청년들이 새로운 시대를 아픔 없이 맞이하고 싶다고, 포기하지 말아달라 당부하는 듯해서 마음이 저리면서도 그 연약한 약속에 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우린 무사히 30대 생일을 축하할 수 있을까요?: 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신유진),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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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이태원을 세월호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에서 언제나 소수의견으로 살아온 입장에서 보자면 참 이상한 용법이다. 이태원과 세월호를 의미화하는 게 각기 다르니 언어에 어긋남이 발생한다. 가령 이태원을 세월호로 만들지 말라는 사람들은 ‘세월호’를 정쟁화되고 불순해진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민주당의 정권교체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와 그 운동이 가진 모습의 아주 협소한 부분만을 과잉대표하게 만든다. 대책위 내부에서도 이와 관련한 긴장과 논쟁이 존재했고, 유가족들도 운동이 도구화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태원 참사를 아직 덜 오염된 비정치적인 사안으로 본다는 점에서도 참사의 의미를 협소하게 고정하려 한다. 그 반대편에서 이태원과 세월호가 단순하게 동일하다고 하는 이들은 일종의 거울상에 해당한다. 정권퇴진 및 교체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두 참사의 의미를 정권의 문제로 아주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이며, 유가족이나 참사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여러 얼굴을 주변화한다. 이는 보통 참사를 과도하게 ‘정치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권교체의 의미만을 부여한 채 다른 모든 정치적 의미를 제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냉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참사를 탈정치화한다. 나는 이태원과 세월호는 각론에서 다르지만 총론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세월호 참사와는 다르다. 하지만 같기도 한데, 진영론의 정치 사이에 갇혀 있다는 점이 첫 번째 공통점이다. 나는 여기서 연역주의적 사고를 본다. 말하자면 다들 이미 ‘정답’이 있어서 그 정답을 적용하는 것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지적으로 게으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런 연역주의적 사고는 정답을 강요함으로써 ‘질문’을 봉쇄한다. 모든 새로운 사안은 새롭기에 질문을 요한다. 과거의 사안과 완전하게 동일한 새로운 사안이란 건 없다. 다만 참조할 수 있을 뿐, 황망한 참사에 응답하는 태도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박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익숙한 세계에 갇혀 있었기에 우리는 참사를 막지 못한 것이므로.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사고다. 정치의 의미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어 그들이 지배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에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참사의 의미가 정권교체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 혹은 참사의 의미가 정권교체 투쟁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는 것, 둘 모두 정권교체의 문제로 참사의 의미를 고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참사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탈정치화의 정치를 깨부수는 질문이야말로 더욱 정치적인 것이다. 나는 ‘국가’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의 문제에 대한 ‘집단기억’이라는 점에서 세월호와 이태원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본다. 우선 국가는 다시 한 번 ‘배신’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국가와 정부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리 혹은 재현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국가인 것은 아니다. 보수진영이 ‘참사를 못 막은 건 문재인 정권 때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라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 놓았는데, 윤석열 정부의 직접적 책임을 전제한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궤변은 옳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서 시스템 부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부가 오더라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참사’에서 문제인 정부는 유능했지만 어떤 경우엔 무책임하고 무능했다. 나는 여성과 노동자가 겪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한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더군다나 집단기억의 문제가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십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여러 참사들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장면이나 원인이 겹쳐지기도 하니, 보수진영이 세월호와 이태원을 다르다고 윽박지르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두 참사를 부각하면서 다른 약자들의 죽음에는 무관심한 민주진영에게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죽음들을 간에 위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사회적 죽음들이 각각의 성격과 맥락을 간직하면서도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국가의 구조적 배신이 그것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사이에, 2016년 5월에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사람이 죽었고 2022년 9월과 10월에 신당역과 평택SPL 공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외에도 즐비한 죽음들은 모두가 다 참사이며, 서로 다르지만 동등하게 중요한 것들이다. 하물며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코로나19의 상처가 이태원 참사를 짓누르고 있다. 나는 참사의 의미를 좁게 규정하려 하는 모든 담론들에 반대한다. 참사는 그런 의미에서 (명단 공개에 찬동한 사람들의 폭력적 언어를 빌리자면) ‘공공재’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질문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공동의 경험이자 지적 자원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이태원 참사는 ‘퀴어들의 참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 시기의 이슈화된 혹은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죽음들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원과 세월호의 관계에 대한 진영론적인 말들은 다 거짓말들이다. 2022.11.3 [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2022.11.7 [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2022.11.9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3 [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2022.11.24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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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핼러윈에 이태원에 간다는 사람… 어떻게 보시나요?
16강 진출로 온 나라가 뜨겁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응원했습니다. 브라질전이 열리는 새벽 4시에도 붉은악마는 거리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 3도일 것이라는 기상 예보도 거리 응원의 열정은 막지 못했습니다. 거리 응원을 새삼 낯설게 만들었던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연합뉴스, 22.11.21.) 위 캡처는 조별 리그가 진행되던 11월 말에 거리 응원에 관한 기사에 달린 일부 댓글입니다. 군중 응원에 대한 걱정과 경계심이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는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생긴 것뿐만 아니라 ‘밀집’ 자체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합니다. 트라우마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고뿐만 아니라 사고가 난 장소와 배경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사고가 나면 학교를, 물에서 사고가 나면 물을 꺼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를 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도 비슷한 ‘대리 외상’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고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트라우마는 사고와 관계된 것들을 두렵게 만듦으로써 일상에서 유리시킵니다. 일상의 일부 혹은 전체가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트라우마는 일상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꼭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입니다. 이태원 참사가 일상에서 유리시키고 있는 것은 ‘밀집’입니다. ‘밀집’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정쟁에 대한 거부감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차치합니다.) 다시는 밀집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사람이 많아 밀집이 불가피한 한국, 특히 서울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댓글들도 그런 의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밀집을 마냥 불가피한 위험으로만 이해해도 좋을까요. 밀집은 불가피할 때가 아니면 쳐다도 보면 안되는 지뢰밭과 같을까요, 아니면 조심하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요리칼과 같을까요. 밀집은 입체적인 현상입니다. 도시의 불가피한 위험이기도 하지만 흥겹고 즐거운 행사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월드컵 응원, 콘서트 감상, 꽃놀이, 축제 참가 등이 그렇습니다.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하기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보입니다. 2022년 11월 26일, CBS에서 연 토크콘서트 〈마음을 연결하다〉에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출연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나 참여하려고 나온 세대들이나, 아무도 잘못한 게 없다”라며 “내년에도 다시 여기(이태원)에 와서 원래대로 나의 일상대로 즐겨야겠다”라고 했습니다. 뉴스로 소식이 전해지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서울신문, 22.11.29./네이버/다음) ‘사고 나도 당신 책임’ ‘남 탓 말라’라는 말이 보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 하지 마라’와 일맥상통합니다. 참사를 통해 밀집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게 명확해진 지금, 출퇴근길의 혼잡이 아닌 ‘없어도 되는 밀집’을 좋게 볼 수 없고, 사고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났던 바로 그곳에 간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도, 간접적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인식도 보입니다. 물론 현장에 직접 걸어간 것은 개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책임’이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건 죽을 각오를 하고 간 사람은 없기 때문, 죽을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치거나 죽어도 밀집 장소에 간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할 때, 밀집 장소에 가는 행위는 제 발로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몰상식한 행동으로 포장됩니다. ‘밀집 장소’는 일상에서 악마화되고 밀집 장소를 찾는 일은 ‘죽을지도 모를 데로 가는 일’로 죄악시됩니다. ‘안전하게 모여 놀자’가 아니라 ‘모여서 놀지 말자’만 남게 됩니다. 모이지 않는 것도 사고를 막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 안전 대책을 세우기보다 모여 노는 행사 자체를 금기시하는 건 사회적 유희를 크게 잘라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더 큰 문제는 트라우마 치유가 설 자리를 잃고 질책과 분노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일상은 회복되지 못하고 트라우마는 방치됩니다. 노조의 대규모 집회나 파업으로 인한 지하철 과밀에 관해 문제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논의보다 ‘사람이 죽으면 너희 책임’이라는 분노를 더 찾기 쉬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은 일상 회복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요리칼에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요리칼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A’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더라도 다시 ‘A’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삶에서 ‘A’를 지우든 말든 그 선택권은 당사자에게 주고, ‘A 없는 삶’만을 남기면 안된다는 데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개인 책임’을 이야기하며 트라우마를 덧나게 하는 사회, 어쩌면 그 집단적 분노야말로 외면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사회적 트라우마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에 관해서도 밀집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수그러드는 듯합니다. 밀집 트라우마에 관한 다소간의 치유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10월은 오고 이태원은 같은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을 잘라내기보다는 안전 대책을 갖추면서 트라우마를 정성껏 치유하고, 미래의 핼러윈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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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일상’과 구분된다고 믿는 것도 이분법적인 사고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상실의 중력이 없는 일상의 시간으로 얼른 복귀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매년 기념일이 되면 잠깐 일상에서 과거로 돌아가기를 허락받으면서, 다시 산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에서 트라우마는 사라져야 할 병리적 증상이다. 고통스런 과거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고, 그 방문은 어무나 우연한 것이라 통제되기 힘들다. 그러니 트라우마는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슬픔이 표백된 평온한 일상으로 얼른 돌아가도록, 어떤 트라우마적 바이러스도 틈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애도와 일상을 구분짓는 것은 이상한 시간 개념이다. 슬픔에 젖는 것은 예외적 시간이고 일탈이라 재빠르게 일상이라는 정상적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런 이분법이 현실과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상실의 본질이다. 그러니 과거의 평온한 일상으로도 당연히 돌아갈 수 없다.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부재를 의미한다. 상실과 그로 인한 애도는 일상 밖의 예외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천천히 잦아들고 나아지겠지만 가끔씩 떠오르고, 슬프지만 동시에 미소지을 수 있는 때도 찾아온다. 상실된 것은 다시 채워지지 않지만 대신 삶은 그보다 풍부하기에 상실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아마 유물론적으로 얘기한다면 애도와 일상의 이분법은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기억과 망각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애도를 위해 온전하게 자신의 시간과 애너지를 쏟을 수 있는 아주 잠깐의 예외적 시간을 용납받은 다음, 다시 생활을 위해 일하고 돌보며 살아야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타인의 슬픔과 애도를 수용하고 지지하는 데 인내심이 없는 사회의 각박함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사회가 그보단 더 성숙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혐오와 부인의 담론이 기승을 부리지만 그래도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상에서 드문드문 상실이 다시 떠오를 때면 그 곁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런 시간을 허용할 줄 아는, 침묵과 포옹이 따스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사람들 말이다. 상실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지만 상실을 대처하며 일상을 회복해가는 과정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아직 희생자가 확실해지지도 않은, 그러니까 사람이 아직 죽지도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애도를 표한 정부의 방식은 얼른 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이들은 슬픔을 시간을 전혀 허용하지 않은 채 그것을 분노의 땔감으로 전용하면서, 사실상 ‘퇴진만이 추모다’가 되도록 애도의 방식을 독점하려 한다. 그 모든 것들에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상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자기 일상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시간을 허용받을 수 있을까? 2022.11.3 [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2022.11.7 [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2022.11.9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3 [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2022.11.24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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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애도 방식
1.  일상을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맨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가만 있다가도 울컥 울컥 뭔가가 올라온다.  예술가라 예민한게 아니고, 예민한 사람이라 예술가가 된 것 같다.  이따금 나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매이거나 휘둘리는 게 답답해서 프리랜서 예술가가 된 건데, 여전히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휘둘리며 산다.  2. 서른초반까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에너지가 넘쳤던 것 같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20대의 패기가 살아있었다.  그 때에 나는 정치권에서 일하고 있었고, 스스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정부 여당의 후안무치함에 분노하고, 야당의 무능함에 진저리 칠 때였다. 나는 민주당 모 의원실의 비서 나부랭이였고, 야당에게 책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온몸이 말라버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 슈퍼맨이라 믿었던 나의 대장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고, 대장의 발가락도 안 되는 거 같은 나 따위는 땅굴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비도덕적인 정치권력과 여기저기 구멍나버린 국정 운영, 매일매일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들.  차곡차곡 무력감이 쌓였다. 국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하찮은 부품 한 톨조차 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결국 그곳을 떠났다.  3. 어차피 이생망(!), 그냥 막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는 정치와 정책으로 세상을 큼직 굵직하게 바꾸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나는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내 옆의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이나 변화를 줄 수 있는 예술, 그런 예술을 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충분하다고.  프리 선언 8년 차. 돌아보면 참 아등바등 살았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작은 작업실을 내고, 젠더 이슈를 다룬 창작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 청년기획자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기도 하고, 나의 삶과 세상의 안녕을 더불어 도모하며 살고자 나름 애썼다.  그리고 얼마 전, 아마 11월 11일쯤. 인터넷에서 순천향대병원 복도에 시신이 방치돼있는 그 사진을 보고, 펑펑 울며 깨달았다.  아, 2014년 그 때 이후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견디면서’, 살았었구나. 해소되지 못한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버린 것을, 그저 개인의 무력감으로 혼자만의 우울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옛날 왕조시대나 군사독재시대에 비하면 좋은 세상 아닌가? 나의 예술로 조금이나마 세상에 기여하고, 적지만 충분한 소득에 감사하며, 그냥 가끔 사랑하는 사람과 수다 떨면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이 정도 인생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 나의 바람은 소박하고, 나는 내 인생이 제법 만족스러운 면도 있는데, 문득문득 나를 덮쳐오는 이 무력감은 뭐지?  나는 그저. 행복하고, 안전하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  젠더폭력, 불평등, 기후 위기부터, 마흔 언저리의 비혼 퀴어 예술가를 향한 편견어린 시선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매일 섀도우 복싱을 하며 사는 걸로도 버거운데, 아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게 그토록 큰 일인가?  큰 일이었던 거다. 놀러나갔다가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불과 하루 전에 지나쳤던 바로 그 골목에서.  4. 7년 전 쯤 할로윈 때에도 이태원에 있었다. 인도를 넘어 차도까지 점령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다. 그것은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여기에 나온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같이 가자고 떼쓰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가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내가 내린 결론은, 모두들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이 필요했구나, 라는 거였다. 학교에 갇혀있고, 회사에 갇혀있고, 자기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  ‘남의 명절에 왜 난리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다. 하지만 ‘할로윈’은, 어쩌면 핑계였을 것이다.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얼굴에 분장을 하고, ‘나’지만 내가 아닌 상태로, 괴상한 아우라 속에서 안전하게 나의 에너지를 표출하고 싶은 욕망. ‘할로윈’은 그저, 계기이자 통로였을 뿐.  ‘할로윈’ 무드에서는, 서로 암묵적인 약속이 작동하는 것 같다. “내 코스튬 어때 멋지지?” 사진을 찍혀도 좋고, 누군가 기꺼이 말 걸어줘도 좋은. “너 코스튬 멋지다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 처음 보는 사이에도 선뜻 말 걸어볼 수 있는. 모두가 괴상한 복장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마치 ‘We are the world’처럼, 거대한 공감의 지대가 만들어지는. 이태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다양성과 포용의 아우라.  나는 예술가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갈등, 오해, 감정적 변화, 욕망과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해낸다. 나는 할로윈의 물결 속에서, 사탕이나, 호박인형이나, 각양각색의 분장 너머, 사람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목격했다.  ‘자기표현’과 ‘연결감’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할로윈에서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 암묵적이고 거대한 공감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것. 월드컵 거리 응원도 나는 같은 맥락에서 본다. 붉은악마 복장을 하거나, 누군가의 손을 잡고, 굳이 광장에 나와서 많은 이들과 함께 응원하고 싶은 욕구.  5. 내게도 분출하고 싶은 에너지가 있다. 참사의 희생자나 유가족들에 대한 공감과, 분통함과, 답답함 같은 감정들이 일렁인다. 세월호 이후 ‘해소’하지 못했던 슬픔과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2014년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밤마다 야근 뒤에 글을 썼다. 무대에 올리지 못한, 그때에 써내려간 희곡 습작들이 여전히 책장에 있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슬퍼만 하고, 체념하고 말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에 휘둘리면서 살지만, 내가 계속 예술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숨쉬고 살고 싶어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예술적 행위들을 통해, 나도 숨통 트이고, 누군가의 숨구멍을 열어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길 원한다.  나의 예술은 작고, 큰 영향력을 갖지도 못하지만, 흩어져 알 수 없는 마음들을 발견하고, 그런 마음들이 각자의 일상을, 나아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도록, 손내밀어보고자 한다. 미쳐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내가 미친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염려와 고립감을 같이 떨쳐내자고 말 걸고 싶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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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이태원 참사 혹은 10.29 참사. 참사의 명명에 대한 논쟁이 인다. 나는 이태원 참사라는 쪽에 무게를 싣고 싶다. 자세하게 찾아보지 못했고 오피셜한 글을 쓰려면 논의들을 좀 봐야겠지만, 크게 1) 지역에 대한 편견과 낙인, 혐오가 생길 수 있으며, 2) 사고장소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불안과 공포가 생겨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사실 1)의 근거가 이태원 참사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당장 이태원이나 용산 주민이 참사의 직접적인 대상이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피해자에 외국인들도 있는 마당에, 가령 ‘태안 기름유출 참사’라는 명명이 지역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진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예단은 섣부르다.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관계일 것이다. 태안이라든지 혹은 안산(세월호), 광주(5.18) 등에 대한 낙인과 혐오 담론은 그 지역에 대한 인식이 권력관계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지방이라거나 시골이라거나 가난한 지역이라는 등의 인식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한복판의, 그것도 인파로 북적북적한 ‘힙한’ 동네가 기존에 혐오 담론의 대상이 된 지역과 동일하다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이란 명명이 강남역 일대를 우범지역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더 중요한 문제는 2)이다. 트라우마와 치유라는 담론이 너무 기능적인 또는 개인적인 수준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생존자들의 참사 기억이 부각되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은 문제적이다. 하지만 ‘망각’이 치유는 아니다.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중립화’라는 언어가 가진 문제와 유사하게, 이태원이라는 장소성을 제거한 10.29 참사 역시 참사를 추상화하고 중립화하는 뉘앙스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달력을 통해 매해 기념일을 제정하는 관행은 근대국가가 집단기억을 형성해 ‘네이션’을 구성하려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물론 저항 기억 역시 달력에 기반해 매해마다 기억을 기념한다. 하지만 그 저항 기역은 추상적 날짜가 아니라 장소성과 강하게 결부된다. 국가는 5.18이나 4.3이라고 명명(기억의 제도화, 국가의 공식기억화)하지만, 5월이 되면 광주의 어른들은 구도청 일대로 나가 시름시름 앓고, 4월이 되면 제주는 마을마다 같은 날 제사를 지내왔다(마을 사람들을 한 데 모아 한꺼번에 학살했으므로). 추상적인 날짜에는 담기지 않는 장소성의 구체적 감각이란 게 있는 것이다. 장소에 기반한 구체적 감각은 지역이 공유하는 집단기억으로 이어지며, 그 기억으로부터 저항 운동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이태원이 놓인 장소성을 놓쳐선 안 된다. 그곳이 미군기지 옆에 놓인 동네였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인들이 찾는 장소가 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연과 아픔들이 이태원에 녹아들어 있다. 나아가 기독교 세력이 헬로윈 축제를 문란하다고 낙인 찍고 서양문화라고 비난하는 데는, 이태원이 퀴어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라는 점과 떼어놓을 수 없다. 156명의 사망자는 모두 이성애자일까? 모두 ‘한국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장소성의 구체적인 맥락들과 결부될 때, 이태원 참사의 의미는 더 풍부해질 수 있다. 또한 참사로부터 생겨나는 운동들 역시 장소에 기반한 집단 기억과 풍부한 맥락에 기반해 더 많은 상상력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장소 연구, 기억 연구들이 장소와 기억이 얼마나 강하게 결부된 것인지 오랫동안 지적해왔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소를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옅고 흐리게 만드는 것은 ‘고통’을 축소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 하지만 과연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 특히나 이태원 참사를 ‘놀다가 죽었다’며 ‘사적인 죽음’으로 이해하고, 참사의 원인을 희생자와 생존자에게 전가하며, 마치 참사를 ‘남의 일’인양 생각하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 참사를 중립화, 추상화하는 방식의 언어는 오히려 망각과 부인에 일조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참사 현장의 영상과 사진을 공유하거나 보여주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는 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재현의 윤리 문제에서도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잘 감각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비현실적인 참사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가라앉는 배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압사 사고는 정말로 상상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참사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이태원 참사에는 참사의 사회적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상징이 없다. (나는 참사 초기에 현장의 영상과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따봉 받으려는 관종으로 보여서.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언어가 될 수 없는 참담한 광경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말은 영상과 사진이었다.) 이는 온갖 부인 담론이 팽배해지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애도를 강요하지 마라거나 놀다가 죽었다는 식의 위악의 담론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참사와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말한다는 것은, 즉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듣지 않을 수 없도록 말한다는 것은, 그들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도록 참사의 참상을 눈앞에 들이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자극적인 보도를 해서 안 된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진실을 알리고 눈 감으려는 사람들까지도 듣게 하려면 참사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도 필요하다. 미디어의 보도와 재현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좀 더 복잡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겐 ‘고통’이 필요하다.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기억’한다. 목격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응답하려는 책임감을 느끼고 타인과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연루와 책임의 태도를 취하는 방식도 속도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어떤 목격자들은 ‘방관자’이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감각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날 그 현장에 있던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갖는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감각이며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는 그들이 자책하며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선 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느끼는 미안함과 죄책감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이 참사에 강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인해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함’은 그런 의미에서 응답책임을 가능케 하는 연루의 감각 그 자체다. 그렇다면 과연 ‘방관자’들을 그 고통에서 면제시키는 것은 옳은 일일까? 캠페인즈에 관련 이슈로 '투표' 10·29 참사와 이태원 참사,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가 개설되어 있으니 투표하고 댓글로 토론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22.11.3 [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2022.11.7 [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2022.11.9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3 [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2022.11.24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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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난 타임라인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이 기획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 한국의 재난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사망자가 10명 이상 발생한 사건사고를 중심으로 서술하되, 사망자가 10명 미만이어도 기록할 만한 것, 범죄에 의한 것이지만 재난으로 기록될 만한 것을 포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화재/폭발 1953년 11월 25일 부산역전 대화재 사상 29명. 부산 중구 피난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이 부산역, 부산일보, KBS부산방송총국 등을 전소시킨 사건. 1955년 3월 2일 부산역 열차 화재 사망 42명, 부상 14명. 1960년 3월 2일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사망 52명, 부상 39명. 부산 동구 범일동 국제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 직공 이필선이 성냥으로 장난을 치다 벌어진 사고. 통로가 좁아 대피가 어려웠던 것이 인명피해를 키웠다.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호텔 화재 사망 191명. 부상 63명. 서울 중구 명동 소재 대연각호텔에서 일어난 화재. 화재 원인은 1층 커피숍에 있는 LP 가스 폭발. 9.11 테러 이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건물 화재 참사로 꼽히는 화재였다. 다음해에 일어난 서울시민회관 화재, 대왕코너 화재와 함께 서울시 3대 화재라 불리기도 하였다. 1972년 12월 2일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망 51명, 부상 76명.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은 전기합선. 화재 당일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있었으므로 공연 관람객들이 피해를 입었다. 건물은 전소되었고, 6년 후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졌다. 1974년 10월 17일 뉴남산관광호텔 화재 사망 19명, 부상 45명. 호텔의 전기 취급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사고. 1974년 11월 3일 대왕코너 화재사고 사망 88명, 부상 35명.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던 복합상가 대왕 코너에서 발생한 화재. 희생자 대다수는 6층 나이트클럽에 있던 젊은 손님들로 종업원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내보낼 수 없다며 밖에서 문을 잠그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증가했다.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1977년 9월 14일 남대문 시장 화재 사망 1명, 부상 3명. 원인불명의 화재. 인명 피해는 적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소방 시설 확충 되었고 남대문시장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사망 59명, 부상 1,343명.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 소속 화물열차가 이리역을 정차 없이 통과하려고 하자 이리역 공무원들이 열차를 막고 급행료라는 돈을 요구. 돈이 없었던 한국화약 직원 신무일이 결국 정차하여 술을 마시고 열차 안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촛불을 켜다가 벌어진 사고. 신무일은 징역 10년, 신무일을 막은 이리역 역무원 2명은 징역 10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1977년 11월 16일 장성탄광 화재 사망 12명, 부상 220명. 강원도 삼척 장성탄광에서 변압기 누전으로 일어난 사고. 1979년 4월 14일 함백탄광 폭발 사망 26명, 부상 38명. 강원도 정선 함백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 1979년 10월 27일 은성탄광 화재 사망 44명. 경북 문경 은성 탄광에서 일어난 화재. 10.26 사건 다음날 발생하여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1984년 1월 14일 대아호텔 화재 사망 38명, 부상 38명. 원인은 종업원의 석유 취급 부주의. 1991년 10월 17일 거성관 나이트클럽 방화 사망 16명, 부상 13명. 대구 서구 비산동의 나이트클럽 거성관의 발생한 화재. 범인 김정수는 옷차림이 누추하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방화. 1992년 10월 4일 원주 왕국회관 방화 사망 15명, 부상 36명.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여호와의증인 왕국 회관에서 발생한 방화. 범인 원언식이 부인의 종교활동에 불만을 품고 방화. 1993년 4월 19일 논산 정신병원 화재 사망 34명, 부상 2명. 병동 관리인이 여성 환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가 일어난 화재로 추정. 이 사건 이후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는 점이 드러나 원장이 구속되었다.  1993년 6월 10일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망 20명. 경기도 연천 예비군훈련 포사격 중 발생한 폭발. 안전교육이 없었고 군사 주특기와 전혀 상관없는 포사격을 실시한 것도 문제로 제기되었다. 1994년 12월 7일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망 12명, 부상 101명. 서울 마포구 아현1동 한국가스공사 아현벨스스테이션에서 가스 누출로 인해 일어난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대구 달서구 상인1동 상인역 공사 중 일어난 가스 폭발. 대구백화점 공사업체인 (주)표준개발에서 가스공사에 문의 없이 굴착을 하다가 도시가스관에 구멍을 내어 생긴 사고. 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1995년 8월 21일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망 37명, 부상 16명.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발생한 화재. 원인은 방화. 경기여자기술학원은 성매매 여성, 가출소녀, 고아 등을 수용하는 시설로 수용자들의 대한 인권유린이 심각하였고 쇠창살로 기숙사를 잠근 것이 인명 피해를 늘린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화재가 발생했던 자리에는 현재 경기도여성능력개발센터가 들어서있다.  1998년 10월 29일 부산 범창 콜드프라자 화재 사망 27명, 부상 16명. 부산 서구 암남동 냉동창고 내벽에서 발생한 화재. 화재의 원인은 전기합선으로 인한 불꽃이 유증기와 만나 일어난 것으로 추정. 유독가스에 질식으로 숨진 사람이 특히 많았다. 1999년 6월 30일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망 23명, 부상 6명. 직접적인 원인은 누전.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만든 임시 건물에 불에 잘 타는 소재로 가공을 하였고 화재경보기도 불량품이었다. 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유치원 어린이들을 남겨두고 교사들만 먼저 도망간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는 당시 씨랜드 소유주이자 시설 운영자가 야영장을 조성해 영업하고 있다.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화재 사망 57명, 부상 79명. 인천 중구 인현동 상가건물 지하 1층 노래방에서 화재가 시작. 문제업소로 경찰에 적발되어 업소 폐쇄명령을 받은 호프집에서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파는 등 불법 영향을 계속하였고, 화재 예방에도 소홀하였으며 손님을 많이 받기 위해 통로를 막고 장사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 학생들이 화재로 대피하려하자 돈을 내라고 소리치며 학생들을 막고 자기만 비상구를 통해 탈출한 호프집 매니저도 큰 비난을 받았다.  2001년 3월 4일 홍제동 주택 화재 사망 6명, 부상 3명. 서울 서대문구 홍제 1동 다세대주택에서 방화로 인해 발생한 화재. 집주인의 아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도망갔는데 집주인이 자기 아들이 집 안에 있다고 구조를 요청하면서 소방관들이 순직한 사고. 또 도로의 불법주차로 소방 차량이 진입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 이후 의무소방 데가 설치되었으며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2001년 5월 16일 예지학원 화재 사망 10명, 부상 22명. 경기도 광주 송정동 5층짜리 예지 학원 건물에서 수업 도중 담뱃불로 인해 발생한 사고.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화재 사망 192명, 부상 151명, 실종 21명.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김대한의 방화로 일어난 사고. 1995년 아제르바이잔 바쿠 지하철 화재,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과 함께 세계 3대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꼽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시철도 입선용 전기동차의 안전체계 의무화가 실시되었고 철도차량 방염기준이 상향되었다. 철도안전법이 제정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2003년 12월 17일 청도 대흥농산 화재 사망 12명, 부상 5명. 경북 청도 흑석리에 있던 팽이버섯 농장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은 용접 작업 중 불씨. 2005년 1월 8일 칠곡 시온 글러브 화재 사망 4명, 부상 7명. 경북 칠곡 학산리에 있던 면장갑 제조공장에서 누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 이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노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장애인단체 상해보험이 처음으로 생겼다.  2007년 2월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망 10명, 부상 18명. 전남 여수 화장동 여수 출입국 관리소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원인은 수용자 김모 씨가 탈출을 위해 일으킨 방화. 근무일지와 다르게 보호소 직원 없이 용역경비원만 근무하고 있었고, 수용자들의 도주를 우려하면서 시설 개방을 지체한 것이 인명사고를 늘린 이유였다.  2008년 1월 7일 이천냉동창고화재 사망 40명, 부상 9명.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냉동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화재. 직접적인 원인은 용접 불꽃. 관청의 허술한 행정과 안전 교육 미실시,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조급한 공사강행도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같은 해 이천에서는 물류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8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방화범은 채종기. 화재진압이 늦었다는 논란, 문화재를 개방 했음에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용산참사 사망 6명, 부상 23명.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2가 철거현장에서 벌어진 화재. 사고당시의 과잉진압 여부, 안전대책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같은 시기 발생했던 강호순의 연쇄살인을 이용해 이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2009년 11월 14일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망 11명, 부상 6명. 부산 중구 신창동 국제시장에 있는 실탄사격장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화재.  2010년 11월 12일 포항 요양원 화재 사망 10명, 부상 17명. 경북 포항 인덕동에 위치한 여성전용요양원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은 전기합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많아 인명 피해가 컸다. 노인요양시설의 화재 안전 대비와 시설 점검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사건이 되었다.  2014년 5월 28일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망 21명, 부상 8명. 전남 장성군 삼계면 요양병원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환자들을 결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요양병원의 노인학대에 대한 이야기가 제기되었고, 지방 소방 인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2017년 12월 21일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충북 제천 하소동에 있는 스포츠센터 사우나에서 일어난 화재. 1층 주차장의 배관에 열선을 설치하다가 불이 붙은 것으로 판명. 소방관들의 초기 대응 문제가 제기되었고, 건물 구조의 문제, 불법 증축, 소방력 부족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언론에서 대거 보도하였다. 2018년 1월 26일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망 47명, 부상 112명. 원인은 전기합선으로 추정. 화재 직후 정전이 되었는데 비상용 발전기가 가동되지 않은 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2019년 4월 17일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망 5명, 부상 17명. 조현병을 앓고 있던 안인득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계단으로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사건. 이 일을 계기로 조현병 환자에 대한 관심과 정신질환자의 강제 입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2020년 4월 29일 이천물류센터 공사장 화재 사망 38명, 부상 10명. 경기도 이천 소고리 한익스프레스 냉동 냉장 물류창고 공사장에서 발생한 화재.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공사업체 측이 제출한 계획서를 심사 확인해 화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 수차례의 개선을 요구하고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물류창고 측에서 공사를 강행한 것이 드러났다. 교통사고/도로 사고 1954년 1월 31일 오산 건널목 군용트럭 충돌 사망 56명, 부상 100여 명. 육군보병학교 이명구 이등중사가 군용 트럭을 몰고 무리하게 건널목을 통과하려고 하다가 열차와 충돌한 사고. 언론에서 끊임없이 안전사고 위험을 제기한 끝에 1982년 이 지역에 육교가 설치되었다. 1967년 10월 16일 금릉버스추락 사망 42명, 부상 12명. 음주운전과 브레이크 불량이 원인이었다. 1970년 8월 21일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사망 25명, 부상 22명. 경북 금릉군 추풍령휴게소 부근에서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운전 부주의로 버스가 벼랑에서 추락. 고속도로 건설 이후 첫 교통사고 참사, 첫 버스 사고. 운전자가 헤드라이트를 끄고 실내등만 켜고 운전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됨. 1970년 10월 14일 모산 수학여행 참사 사망 46명, 중상 26명. 서울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버스가 통일호와 충돌한 사고. 철도건널목의 안전시설 부재, 안전을 무시한 교육자들이 원인으로 지목. 1971년 5월 10일 청평호 버스 추락 사망 80명. 경기 가평 청평저수지에 시외버스가 추락. 정원 53명의 버스에 94명이 타고 있었던 것이 인명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 1973년 8월 18일 광진교 버스 추락 사망 17명, 부상 28명. 운전기사의 과속, 정비 불량, 교통 여건 악화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통량 분산을 위해 천호대교가 건설되었다. 1976년 2월 28일 춘천호 버스 추락 사망 32명. 춘천에서 화천으로 가던 강원운수 소속 직행버스가 춘천호에 추락, 탑승자 전원 사망. 1976년 5월 18일 양산군 고속버스 추락 사망 23명, 부상 25명. 경남 양산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서 고속버스가 추월운전을 시도하다 낭떠러지에 추락. 1981년 11월 22일 부산 금정산성 버스 추락 33명 사망. 부산 동래구 금정산성 고갯길 급경사에서 승객 70명을 태운 시내버스가 브레이크 파열로 추락. 1984년 12월 27일 나주 완행버스 추돌 사망 15명, 부상 15명. 전남 자주 학산리에서 완행버스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운행하다가 통일호 열차와 충돌. 운전자의 운전 미숙과 주의 태만이 원인. 1988년 4월 1일 천호대교 버스 추락 사망 19명, 부상 35명.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에서 승객 54명을 태운 572번 시내버스가 한강으로 추락. 경비 절감을 이유로 낡은 재생 타이어를 쓴 버스 회사, 배차시간을 맞추기 위한 난폭운전, 천호대교의 결함이 겹쳐진 사고. 이 사건 이후 버스 앞바퀴에 재생 타이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1989년 9월 17일 완주 버스 추락 사망 26명, 부상 60명. 전북 완주 모래재 고개 국도에서 전북여객 소속 시외버스가 브레이크 파열로 내리막길에서 추락. 버스의 정원 초과 운행, 점검 미실시, 운전기사의 과로가 겹쳐서 탄생한 사고. 1989년 10월 27일 논산 버스 추돌 사망 16명, 부상 11명. 충남 논산 연무읍에서 한진고속버스가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며 난폭운전을 하다 차선 도색 작업 트럭을 들이받아 일어난 사고. 1990년 9월 1일 섬강교 버스 추락 사망 25명. 경기 여주 섬강교상에서 승객 28명을 태운 시외버스가 추락. 빗길 과속운전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는데, 승객 대부분이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은 것이 인명피해를 키운 것으로 지목되었다. 1990년 11월 4일 소양호 버스 추락 사망 21명, 부상 21명. 강원도 인제 소양호에서 관광버스가 화물차와 충돌 후 추락. 직접적인 원인은 버스 운전기사의 추월 운전. 버스 회사는 유령회사였고, 버스 운전자는 교통 관련 전과가 여섯 번이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행정당국의 운수업 관리가 허술했음이 지적되었다. 1991년 11월 3일 인제 버스 추락 사망 22명, 부상 21명. 강원도 인제 옥녀2교에서 결혼식 하객 43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내리막길에서 추락. 정비 소홀에 따른 브레이크 고장이 원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망 32명, 부상 17명. 부실공사와 점검 부실 상태에서 과적 차량을 비롯한 교통량의 폭증이 원인. 1995년 4월 11일 화순 버스 추돌 사망 14명, 부상 19명. 전남 화순군에서 군내버스가 비둘기호 열차에 충돌. 버스 운전기사의 신호원인과 건널목 시설 관리 부실이 원인으로 지목. 1995년 10월 8일 천안 화물차 추돌 사망 13명, 부상 9명. 11톤 화물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직행버스와 충돌. 트럭 운전사의 졸음운전이 원인. 1997년 3월 24일 남원 버스 추돌 사망 16명, 부상 16명. 전북 남원 사매면 철도건널목에서 남원여객 소속 시내버스가 무궁화호 열차와 충돌 후 끌려가다가 논바닥으로 추락. 안내원도 없고 차단기도 없는 철도 건널목에서 버스 운전기사가 신호를 무시하고 운전한 것이 원인. 2000년 7월 14일 추풍령 연쇄추돌 사망 18명, 부상 97명. 부일외고 수학여행 버스가 빗길 과속으로 미끄러져 다른 트럭과 충돌한 사고.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2시간 이상 차량 전면 통제를 한 최초의 사고. 2000년 10월 27일 장수 88올림픽 고속도로 추돌 사망 21명, 부상 7명. 전북 장수 88올림픽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추월 운전을 하다가 버스, 승용차와 충돌한 사고. 2001년 7월 24일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망 20명, 부상 20명. 경남 진주 서진주나들목 부근에서 관광버스가 언덕 아래로 추락. 운전기사의 과속 및 난폭운전이 원인이었고, 주행 중인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음주가무를 즐긴 것이 인명피해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2002년 2월 10일 천안 트레일러 추돌 사망 15명, 부상 18명. 음주운전 상태인 트레일러 운전자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고속버스와 충돌한 사고. 2002년 6월 15일 옥천 경부고속도로 5중 추돌 사망 14명, 부상 18명. 충북 옥천군 경부고속도로에서 탱크로리 운전자가 과속을 하다가 가드레일과 추돌하고 차선을 넘어가는 바람에 일어난 추돌사고. 2003년 10월 21일 봉화 관광버스 추락 사망 19명, 부상 12명. 경북 봉화군 청량산 매표소 부근에서 관광버스가 40m 아래 개울에 추락한 사고. 브레이크 고장이 직접적인 원인이고, 안전벨트 미착용이 인명사고를 확대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2004년 10월 20일 평창 관광버스 추락 사망 15명, 부상 18명. 강원도 평창 신약수 인근 8번 국도에서 관광버스가 계곡으로 추락. 브레이크 고장이 직접적인 원인이고, 안전벨트 미착용이 인명사고를 확대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2006년 10월 3일 서해대교 연쇄추돌 사망 12명, 부상 50명. 짙은 안개로 인해 29중 연쇄 추돌 사고 발생. 피해액 약 40억 원으로, 한국 자동차보험 역사상 가장 큰 사고. 2007년 1월 13일 경부고속도로 5중 추돌 사망 10명, 부상 21명. 경기 성남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부근에서 고속버스가 앞서가던 다른 차와 충돌한 사고. 고속버스 운전자의 졸음운전이 원인. 2009년 12월 16일 경주 관광버스 추락 사망 18명, 부상 13명. 경북 경주시 남사재 주변 925번 지방도로에서 관광버스가 30m 아래로 추락. 사고 원인은 운전자의 운전미숙. 무자격 운전자와 교통안전 시설물의 규결 미달, 안전벨트 미착용 등이 지적되었다. 2010년 7월 3일 인천대교 버스 추락 사망 14명. 부상 10명. 안개로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사고 차량을 피하려던 시외버스가 다리 난간을 뚫고 추락한 사고. 2010년 8월 9일 행당동 버스 폭발 부상 18명. 서울 성동구 행당역 인근에서 대기 중이던 241B번 버스의 연료 탱크가 폭발. 원인은 차량의 노후화. 2014년 9월 3일 레이디스코드 교통사고 2명 사망, 4명 부상. 걸그룹 레이디스코드 멤버 2명 사망. 악천후 속에서 매니저가 과속운전을 하여 차 바퀴가 빠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2015년 1월 16일 중앙고속도로 연쇄 추돌 부상 19명. 빙판길로 인한 43중 연쇄 추돌사고. 2015년 2월 11일 영종대교 연쇄 추돌 사망 3명. 부상 65명. 해무로 인해 차량 106대가 추돌. 2015년 7월 1일 지안 버스 추락 사고 사망 11명. 중국 지안시에서 일어난 버스 운전사고. 원인은 악천후 속에서의 과속. 한국인 10명과 중국인 1명이 사망. 2016년 2월 16일 중앙고속도로 35중 추돌사고 17명 부상. 강원도 원주 중앙고속도로 학산교에서 눈길에 차량이 미끄러져 발생. 2016년 10월 13일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사고 사망 10명, 부상 10명. 울산 울주군 언양분기점에서 관광버스가 과속을 하다가 방호벽과 충돌, 화재가 발생했다. 2017년 5월 9일 웨이하이터널 버스 화재 사고 사망 13명.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시 타오쟈쾅 터널에서 일어난 유치원 통학버스 화재 사고. 사고 원인은 고의적 방화. 철도 사고 1962년 1월 30일 수려선 동차 전복 3명 사망, 42명 부상. 내리막에서 과속을 하다 탈선해 전복. 1969년 1월 31일 천안 열차 추돌 사망 41명, 부상 102명. 경부선 천안역 부근에서 정차중인 남원행 서울행 완행열차를 부산발 서울행 청룡호가 추돌. 처음에는 부산발 서울행 열차의 과속으로 원인을 지목하였으나, 폭설로 교통이 마비된 상황에서 정상운행을 지시한 철도청의 문제가 더 큰 것으로 밝혀졌다. 1971년 10월 13일 남원역 열차 추돌 사망 20명, 부상 36명. 남원에서 군산으로 가던 보통열차가 유조화물열차를 들이받은 사건. 사망자 중 15명은 국민학생, 3명은 고등학생이어서 국민들이 분노하였다. 사고의 원인은 기관차의 기관 고장. 1973년 8월 12일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망 32명, 부상 9명. 충북 영동군 영동역에서 벙커C유와 설탕을 싣고 가던 화물열차의 기관사가 졸음운전으로 인해 과속, 이로 인해 탈선하여 화재가 발생하였다. 1981년 5월 14일 경산 열차 추돌 사망 55, 부상 254명. 경북 경산군 매호건널목에서 부산발 서울행 특급열차가 부산발 동대구행 보통급행열차에 받힌 사고. 건널목 위에 정지해 있던 오토바이가 사고의 1차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를 보고도 사실을 알리지 않은 특급열차 승무원, 전방 주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보통급행열차 승무원들의 과실과 열악한 철도 근로환경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1993년 3월 28일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78명 사망, 198명 부상. 부산 북구 구포역 부근에서 선로의 지반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기관사가 급제동을 하다가 탈선. 노선 바로 아래에서 삼성종합건설이 허가 없이 발파작업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1995년 8월 25일 괴산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망 1명, 부상 190명. 집중호우로 철교가 붕괴된 것이 원인이었다. 항공 사고 1967년 4월 8일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사망 80명(탑승자 24명, 지상주민 56명). 원인은 기체 결함과 관제센터 과실. 1980년 11월 19일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 사망 10명. 원인은 조종사 과실. 1982년 2월 5일 공군 제주 C-123 추락 탑승자 53명 전원 사망. 원인은 기체결함, 기상악화. 전두환의 제주 방문으로 인해 경호를 위해 제주도로 가던 육군 제707특수임무대대 수송기가 기상악화로 추락한 사건인데, 당시 전두환 정부는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였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 격추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소련의 요격기에 격추됨.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탑승자 115명 전원 사망.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에 의한 테러. 이 사건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마유미>로도 만들어졌다. 1989년 7월 27일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망 79명. 대한항공 여객기가 트리폴리 공항에 접근 중 추락. 원인은 악천후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조종사 과실. 1989년 7월 27일 울릉도 관광헬기 추락 사망 14명. 원인은 악천후에서의 조종사 과실, 정비불량.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망 68명. 김포공항에서 목포공항으로 가던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전남 해남군 야산에 추락. 원인은 악천후와 공항 시설 부족, 조종사의 무리한 착륙 시도. 1993년 해군 링스헬기 성주 추락 사망 10명. 원인은 기상 악화. 1997년 8월 6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망 228명. 원인은 조종사 과실. 김포공항에서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비행기가 공항 접근 중 추락. 조종사 사이의 권위주의적 문화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2002년 4월 15일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망 129명. 중국국제항공 여객기가 경남 김해 돗대산 기슭에 추락한 사고. 원인은 조종사 과실. 해양 사고 1951년 6월 15일 제13호 침몰 사망 30여 명. 침몰 장소는 전남 목포 부근. 원인은 정원 초과, 적재량 초과. 1951년 7월 11일 제5편리호 침몰 사망 94명. 침몰 장소는 부산 충무동 다대포항. 원인은 정원 초과, 적재량 초과. 1951년 11월 18일 삼해남호 침몰 사망 55명. 침몰 장소는 진도 부근. 원인은 정원 초과, 운전자 과실. 1953년 1월 9일 창경호 침몰 사망 300명 이상. 침몰 장소는 부산 다대포 앞바다. 원인은 강풍으로 인한 침몰, 선박의 노후. 1953년 1월 25일 행운호 침몰 사망/실종 100여 명. 침몰 장소는 충남 서천 앞바다. 원인은 정원 초과, 적재량 초과. 1954년 6월 3일 태양호 침몰 실종 23명. 침몰 장소는 전남 돌산 부근. 원인은 풍랑. 1954년 8월 16일 강화도 범선 침몰 사망 14명. 원인은 조류와 파도. 1955년 4월 23일 삼영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경남 하동 앞바다. 원인은 암초 충돌. 1956년 1월 12일 태신호 침몰 사망 66명. 침몰 장소는 전남 흑산도 부근. 원인은 화재. 1956년 2월 1일 비안도 목선 침몰 실종 18명. 침몰 장소는 전북 비안도 부근. 원인은 풍랑. 1956년 9월 22일 위도 어선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전남 위도면 부근. 원인은 풍랑. 1956년 12월 4일 당진 어선 침몰 사망 1명, 실종 22명. 침몰 장소는 충남 당진 부근. 원인은 풍랑 1957년 4월 14일 강남호 침몰 사망 3명, 실종 31명. 침몰 장소는 인천 월미도 서쪽. 풍랑과 퇴조 속에서 화물선과 충돌해 침몰. 1957년 8월 29일 화성 목선 침몰 사망 1명, 실종 31명. 침몰 장소는 화성군 서쪽. 원인은 과적. 1958년 1월 15일 제87대양호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전남 흑산도 부근. 원인은 풍랑. 1958년 2월 12일 거진 기범선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강원 거진항 부근. 원인은 풍랑. 1959년 4월 22일 통도호 침몰 사망 7명, 실종 25명. 침몰 장소는 전북 고창 부근. 원인은 풍랑. 1959년 9월 17일 완도 어선 침몰 사망 41명. 침몰 장소는 전남 완도 앞바다. 원인은 태풍 사라. 1960년 1월 16일 직영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강원도 판교리 부근. 원인은 안개와 풍랑. 1960년 5월 13일 연평도 어선 침몰 사망 1명, 실종 13명. 침몰 장소는 연평도 부근. 사고 원인은 풍랑.  1960년 5월 31일 백구호 침몰 실종 13명. 제주 성산포와 부산을 오가던 선박으로 침몰 원인은 풍랑. 1961년 11월 10일 광복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경남 통영 부근. 1963년 1월 18일 연호 침몰 사망 120명 이상. 과적과 정원 초과 상태에서 돌풍을 만남. 침몰이 5분 내에 완료되어 구조가 어려웠음. 1963년 11월 8일 속초 어선 침몰 실종 13명. 침몰 장소는 강원도 속초 앞바다. 원인은 돌풍. 1964년 4월 16일 보승2호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소연평도 부근. 납북 후 풀려나 귀환하는 도중 안개 속에서 암초에 충돌해 침몰함. 1964년 7월 29일 서해 어선단 침몰 사망 32명, 부상 62명. 침몰 장소는 연평도 부근. 219명은 북한에 표류했다가 북한측의 인도로 귀환함. 2명은 북한에 억류. 1964년 8월 2일 신성호 침몰 사망 3명, 실종 15명. 침몰 장소는 전남 완도 부근. 원인은 풍랑. 1964년 11월 24일 충남 서산 나룻배 침몰 사망 11명, 실종 13명. 원인은 과적. 1964년 12월 4일 대성호 침몰 실종 13명. 침몰 장소는 충남 서산 부근. 돌풍이 부는 상태에서 기관 고장이 겹침. 1965년 12월 30일 제3영생호 침몰 사망 14명. 침몰 장소는 강원도 삼척 앞바다. 풍랑으로 암초에 충돌 1965년 12월 31일 편리호 침몰 사망 2명, 실종 21명. 침몰 장소는 묵호 앞바다. 침몰 원인은 파도와 폭설.  1966년 1월 13일 전마선 침몰 사망 15명, 실종 10명. 침몰 장소는 충남 삼길포 부근. 원인은 높은 파도. 1967년 1월 14일 한일호 침몰 사망 66명, 실종 27명. 침몰 장소는 경남 가덕도 해상. 해군 소속 구축함인 충남함과 충돌해 침몰. 사건 직후 군의 은폐 시도가 있었다. 1967년 1월 19일 당포함 침몰 사망 11명, 실종 28명. 침몰 장소는 동해 어로저지선 부근. 어선단을 보호하던 해군 당포함이 북한의 포격으로 침몰. 1968년 1월 3일 제5삼양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추자도 남쪽. 암초에 충돌. 1968년 5월 17일 천지호 침몰 사망 3명, 실종 13명. 침몰 장소는 전남 목포 부근. 기름 유출로 해양 오염 피해가 있었다고 기록된 첫 사례. 1968년 5월 24일 서조호 침몰 사망 16명 실종 5명. 침몰 장소는 충남 장항 부근. 노후 선박에 과적과 무허가 운항이 겹쳐져 만들어진 사고. 1969년 3월 27일 제주 어선 침몰 실종 21명, 침몰 장소는 제주 근해. 원인은 돌풍. 1970년 1월 31일 명주 어선침몰 사망 18명. 침몰 장소는 강원도 명주 부근. 원인은 풍랑. 1970년 5월 4일 명신호 침몰 사망 5명,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부산 동남쪽. 원인은 풍랑. 1970년 12월 15일 남영호 침몰 사망 326명 이상. 침몰 장소는 거문도 근처. 원인은 과적. 1971년 1월 4일 흑산도 어선침몰 실종 12명. 원인은 풍랑. 1971년 1월 7일 질자호 침몰 사망 30명, 실종 2명. 침몰 장소는 전남 여수 부근. 화물선이 충돌하여 침몰. 1973년 1월 25일 한성호 침몰 사망 19명 실종, 42명 침몰. 장소는 진도 육지 부근. 원인은 과적. 1974년 2월 22일 YTL30정 침몰 사망 158명, 실종 1명. 침몰 장소는 충무 앞바다. 원인은 정원 초과와 운항 부주의. 1974년 4월 19일 칠성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경남 거제 해안가. 폭우로 저인망 어선이 정박중 폭우로 인해 침몰. 1974년 2월 28일 경비정 863호 침몰 사망 8명, 실종 20명. 침몰 장소는 동해 분계선 부근. 북한 경비정들과의 교전 중 침몰. 1974년 8월 29일 소흑산도 어선 침몰 실종 47명. 원인은 풍랑. 1974년 11월 12일 광진호 침몰 사망 13명, 실종 28명. 침몰 장소는 전남 완도 앞바다. 과적 상태에서 풍랑을 만나 암초에 충돌. 1976년 1월 17일 만덕호 침몰 사망 12명, 실종 26명. 침몰 장소는 울릉도 천부항 부근. 오징어잡이 목선이 풍랑을 만나 침몰.  1976년 10월 28일 동해 어선 조난사고 사망 34명, 실종 293명. 사고 원인은 풍랑. 침몰 장소는 동해 대화퇴 해상. 대한민국 어선 해난사고 중 최대 인명 피해를 낸 사고. 1976년 12월 8일 610광덕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10명. 침몰 장소는 제주도 근해. 침몰 원인은 풍랑. 1977년 12월 2일 제11강원호 침몰 실종 26명. 침몰 장소는 울릉도 서쪽 해상. 강풍으로 인한 파도로 침몰. 생존자 5인이 65시간 동안 표류한 것으로 화제. 1978년 2월 17일 동해안 어선침몰 사망 29명. 침몰 원인은 강풍과 눈보라로 추정되며 정확한 침몰 장소는 모름 1978년 11월 29일 무안 어선침몰 실종 23명. 사고 장소는 전남 무안 부근. 침몰 원인은 풍랑. 1979년 10월 29일 소흑산도 어선침몰 실종 20명. 원인은 풍랑. 1979년 2월 17일 제1선북호 침몰 실종 13명. 침몰 장소는 울산 방어진 부근. 침몰 원인은 풍랑. 1979년 10월 5일 제2병묵호 침몰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전남 홍도 부근. 실종 원인은 풍랑. 1979년 11월 18일 제2영풍호 침몰 실종 10명. 침몰 장소는 제주 남쪽 해상. 원인은 풍랑. 1980년 8월 31일 제5성남호 침몰 실종 14명. 침몰 장소는 전남 거문도 부근. 화물선이 충돌하여 침몰. 1980년 10월 31일 제5종봉호 침몰 실종 35명. 침몰 장소는 동해 대화퇴 부근. 1981년 9월 6일 제1명신호 침몰 실종 18명. 침몰 장소는 통영 앞바다. 화물선이 충돌하여 침몰. 1981년 11월 24일 제36한일호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전남 보길도 부근. 1982년 10월 24일 제2동해호 침몰 실종 36명. 침몰 장소는 울릉도 부근. 원인은 풍랑. 1983년 10월 7일 거성호 침몰 실종 11명. 침몰 장소는 제주 화도 서쪽. 원인은 풍랑. 1984년 1월 12일 제7삼성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12명. 침몰 장소는 제주 우도 부근. 침몰 원인은 풍랑. 1984년 4월 18일 동남점보페리호 조난 사망 12명. 침몰 장소는 거문도 부근. 기관고장 상태에서 풍랑을 만나 선박이 표류된 사고. 1984년 7월 5일 제7동아호 침몰 실종 17명. 침몰 장소는 전남 신안 부근. 암초에 충돌하여 침몰. 1985년 1월 29일 화평에이스호 침몰 사망 3명, 실종 14명. 제주 남동쪽 해상에서 화물선이 갑자기 기울어진 사고. 1985년 2월 1일 제일크리스탈호 침몰 사망 2명, 실종 10명. 대마도 근해에서 한일 정기 화물선이 침몰. 1985년 3월 15일 세진호 침몰 실종 27명. 제주 우도 부근에서 선어 운반선이 풍랑으로 전복. 1985년 4월 11일 제77신성호 침몰 실종 11명. 제주 동쪽 해상에서 장어잡이 통발 어선이 풍랑으로 침몰. 1985년 4월 18일 제11원근해호 침몰 실종 12명. 소흑산도 서남쪽에서 중국 상선과 충돌하여 침몰. 1985년 7월 27일 신안2호 침몰 실종 18명. 신안 홍도리 부근에서 유람선이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암초와 충돌. 1985년 8월 14일 광일호 침몰 실종 12명. 전남 영광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22시간만에 2명이 구조됨. 1986년 3월 16일 604상진호 충돌 실종 10명. 전남 진도 부근에서 불상의 선박과 충돌해 침몰. 1986년 11월 25일 카페리2호 침몰 사망 13명, 실종 14명. 강화 석포리 부근에서 급류를 만났는데 균형을 잃고 전복. 1987년 1월 13일 제224경인호 침몰 실종 10명. 격렬비열도 부근에서 저인망 어선이 풍랑으로 침몰 1987년 2월 12일 제88지영호 침몰 사망 10명. 대마도 동북쪽에서 장어통발어선이 풍랑으로 침몰. 1987년 2월 말 영지호 침몰 실종 35명. 제주도 남쪽에서 오징어채낚기 어선이 침몰. 풍랑 때문으로 추정. 1987년 6월 16일 극동호 침몰 사망 29명, 실종 7명. 충무 앞바다에서 나무로 만든 유람선이 엔진 고장 화제로 20분만에 침몰. 1987년 7월 16일 신안 어선 침몰 실종 53명. 어선 12척이 태풍 셀마로 침몰. 1987년 8월 31일 동익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24명. 울릉도 부근에서 태풍 다이너를 만나 침몰. 1987년 10월 7일. 제31진영호 피격 실종 11명. 백령도 서쪽에서 피격 후 북한 군함에 충돌해 침몰. 추석 연휴였다. 1987년 12월 1일 제11복성호 침몰 실종 13명. 제주항 부근에서 채낚기 어선이 강풍을 만나 침몰. 1987년 12월 6일 제2장영호 침몰 실종 10명. 오륙도 동쪽에서 화물선이 폭풍으로 침몰. 1987년 12월 30일 제101영성호 침몰 사망 4명, 실종 7명. 오징어채낚기 어선이 홍도 남서쪽에서 폭풍으로 침몰. 1987년 12월 30일 제391동영호 침몰 사망 10명. 마라도 서쪽에서 침수로 침몰. 1988년 4월 17일 신안 거룻배 침몰 사망 12명, 실종 2명. 바지락 채취선이 정원초과 상태에서 파도를 만나 침몰. 1989년 1월 5일 원경호 침몰 실종 21명. 어징어채낚기 어선이 대마도 부근에서 침몰. 1989년 1월 14일 제7창명호 침몰 실종 12명. 저인망어선이 전남 여천 부근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 1989년 2월 26일 제3세일호 침몰 실종 12명. 마라도 남쪽에서 장어통발어선이 파도를 만나 침몰. 1989년 6월 5일 신안 어선 침몰 실종 17명. 어선 4척이 신안 재원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 1989년 10월 31일 82근성호 침몰 사망 6명, 실종 6명. 동해안 대화퇴 부근에서 풍랑으로 침몰. 1989년 11월 1일 제26현진호 침몰 사망 10명, 실종 12명. 울릉도 부근에서 풍랑으로 침몰. 1989년 11월 4일 제12일성호 화재 사망 4명, 실종 6명. 동해안 대화퇴 부근에서 실종 선박 수색 중 화재가 발생. 1990년 1월 13일 화영55호 침몰 실종 12명. 서귀포 남쪽에서 화물선과 충돌해 침몰. 1990년 4월 12일 88대성호 침몰 실종 11명. 울릉도 부근에서 침몰. 1991년 1월 21일 88대운호 침몰 실종 12명. 울산 부근에서 풍랑으로 침몰. 1991년 2월 21일 퍼시픽프렌드호 침몰 실종 14명. 원목 운반선이 태안 의항리 부근에서 침수로 침몰. 1991년 6월 5일 제21성진호 침몰 실종 10명. 저인망어선이 제주 서쪽에서 중국 상선과 충돌. 1991년 6월 21일 제102거경호 침몰 실종 10명. 오징어채낚기 어선이 오륙도 남쪽에서 일본 운반선과 충돌. 1991년 6월 28일 옹진 화물선 침몰 실종 32명. JE스카이에이스호와 치아웨이호가 옹진군 울도 부근에서 충돌. 1992년 10월 13일 제3준양호 침몰 실종 18명. 오징어채낚기 어선이 영일군 용한리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 1992년 12월 6일 제52덕성호 침몰 실종 11명. 트롤어선이 양산 대변리 부근에서 침몰.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망 292명. 부안 위도 부근에서 여객선이 악천후 속에서 무리하게 출항하였고, 과적과 초과 탑승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배가 흔들렸을 때 승객들을 가만히 안에 있으라고 한 것이 인명피해를 키웠다. 1994년 3월 29일 제5영덕호 화재 실종 11명. 장어잡이 어선에 전남 여천 부근에서 화재 발생. 1994년 11월 12일 92춘동호 침몰 실종 10명. 저인망어선이 대흑산도 부근에서 대형 상선과 충돌해 침몰. 1995년 6월 22일 미네랄뎀피어호 침몰 실종 25명. 마라도 남쪽에서 대형화물선이 서로 충돌. 1995년 7월 23일 씨프린스호 사고 실종 1명. 원유와 벙커C유를 실은 유조선이 여수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기름 5천여 톤이 바다에 유출. 1995년 11월 17일 호남 사파이어호 사고 유조선이 여수 앞바다에서 부두와 충돌, 원유 173톤이 바다에 유출. 1996년 2월 2일 제7경신호 침몰 실종 11명. 대형 기선저인망 어선이 마라도 남서쪽에서 침몰. 1996년 6월 15일 안나스피라토 침몰 실종 26명. 두 화물선이 충돌, 벙커C유가 바다로 유출. 1997년 1월 7일 261남해호 침몰 실종 23명. 채낚기 어선이 제주 마라도 부근에서 침몰. 1997년 4월 3일 제3오성호 침몰 통영 매몰도 부근에서 유조선이 좌초, 벙커C유 186톤 가량이 바다에 유출. 1997년 9월 13일 98원양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9명. 저인망어선이 충돌로 침몰. 1998년 1월 15일 뉴바론호 침몰 사망 2명, 실종 15명. 울산 울주군에서 좌초. 벙커C유 345톤, 시멘트 5천 톤이 바다로 유출. 1998년 9월 23일 제3대영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10명. 유자망 어선이 인천 울도 부근에서 침몰. 2000년 2월 17일 제5대성호 침몰 실종 10명. 어선이 강원 고성군 부근에서 침몰. 2000년 9월 23일 주원호 침몰 사망 5명, 실종 6명. 소흑산도 남쪽에서 침몰. 원인은 충돌로 추정. 2001년 1월 15일 프로하모니호 폭발 사망 3명, 실종 6명. 유조선이 거제 남여도 부근에서 선내 폭발, 기름 200여 톤이 바다로 유출. 2005년 3월 8일 썬크로스호 침몰 실종 14명. 가거도 서쪽 해상에서 23,000톤급 컨테이너 운반선과 충돌. 2005년 4월 2일 부영호 침몰 실종 10명. 격렬비열도 부근에서 꽃게잡이 통발어선이 침몰. 2005년 12월 1일 한동호 침몰 실종 13명. 전남 병풍도 남서쪽에서 89,000톤 선박과 충돌. 2006년 3월 20일 신하이7호 침몰 사망 3명, 실종 9명. 인천 무의도 남쪽에서 위험물 운반선과 충돌. 2007년 12월 7일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충남 태안 해상에서 홍통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와 삼성중공업 소속 삼성1호가 충돌하면서 12,547킬로리터의 원유가 바다로 유출된 사건. 2007년 12월 25일 이스턴브라이트 침몰 사망 7명, 실종 7명. 화학약품 운반선이 여수 백도 동북쪽 해상에서 과적으로 침몰. 2008년 1월 30일 102소양호 침몰 실종 10명. 쌍끌이 저인망 어선이 제주 마라도 남서쪽 해상에서 침몰. 악천후 때문으로 추정. 2010년 1월 27일 삼봉11, 12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9명. 모래운반선이 통영시 국도 남동쪽에서 침몰.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망 40명, 실종 6명. 한국 초계함이 백령도 서쪽에서 침몰. 어뢰에 의한 피격으로 추정. 2011년 2월 9일 알렉산드라호 침몰 사망 4명, 실종 7명. 액체화물 운반선이 울산 동구 앞바다에서 침몰. 2011년 12월 26일 739건아호 침몰 사망 1명, 실종 10명. 트롤어선이 울산 간절곶 동쪽에서 침몰. 복원력 상실로 추정. 2012년 1월 15일 두라3호 폭발 사망 5명, 실종 6명. 유류 운반선이 인천 자월도 북쪽 해상에서 내부 폭발. 2013년 10월 15일 쳉루15호 침몰 사망 9명, 실종 2명. 영일만 동북쪽에서 화물선이 파도와 강풍으로 방파제와 충돌. 2014년 4월 4일 그랜드포춘1호 침몰 사망 2명, 실종 11명. 거문도 남쪽 공해상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 전원 북한 선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망 295명. 실종 9명. 2015년 1월 23일 기임어00791호 침몰 실종 10명. 제주 차귀도 남서쪽 공해상에서 미확인 상선과 충돌. 2015년 9월 5일 돌고래호 침몰 사망 14명, 실종 4명. 낚시배가 추자도 인근에서 엔진 이상을 일으킴. 2017년 12월 3일 선창1호 침몰 사망 15명. 인천 영흥대교 인근에서 낚시배가 급유선과 충돌. 2019년 11월 19일 대성호 화재 사망 1명, 실종 11명. 제주 차귀도 인근에서 어선 화재 발생. 해양 사고는 10년 단위로 끊어서 보면 사고의 유형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1950년대까지는 강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꽤 많았는데 점점 사라지고, 1990년대부터는 기름 유출 사고가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과적과 초과 탑승 문제는 한국 전쟁 이후 지금까지 나아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유독 실종이 많은 것도 특징이었습니다.  붕괴 사고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사망 34명, 부상 40명.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층짜리 한 동이 무너진 사고. 무면허 건설업자들이 뇌물을 주어 진행한 공사였고, 이로 인해 심각한 수준의 부실공사가 강행되어 벌어진 사고였다.  1982년 4월 9일 서울 3호선 지하철 붕괴 사망 11명, 부상 40여 명.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부근 3호선 공사 현장이 붕괴, 시내버스가 추락한 사고. 1993년 1월 7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망 28명, 부상 48명, 이재민 370여 명. 기초구조 변경 없는 무리한 증축과 설계 변경,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망 32명, 부상 17명. 서울시 성동구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붕괴. 점검 부실과 노후된 교량. 과적차량의 통과가 빚어낸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의 붕괴. 부실공사와 불법 구조변경이 원인이었고, 위험 신호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영업을 계속한 백화점 측의 이기심도 매우 큰 비난을 받았다.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 아크로비스타가 서있다. 2014년 2월 17일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망 10명, 부상 124명. 경북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가 폭설로 붕괴된 사고.  2014년 10월 17일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사망 16명, 부상 11명. 경기도 성남 판교테크노벨리의 야외 공연장 인근 지하주차장 환풍구 덮개가 무너진 사고.  2021년 6월 9일 광주 학산빌딩 붕괴 사망 9명, 부상 8명.  2022년 광주 화정 아이파크 외벽 붕괴  2022년 봉화 광산 매몰  과밀집 사고 1959년 7월 17일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망 67명, 부상 150명. 부산 서구 서대신동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행사 도중 소나기를 피하려다가 참사 발생. 경찰이 군중을 통제하려고 공포탄 20여 발을 발사하여 혼란을 악화시켰다. 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망 31명. 서울역 호남선 승강장에서 인파가 몰려 발생한 사고. 추위로 역사 안이 미끄러운 상황에서 정원보다 많은 표를 팔았고 원래는 발차 35분 전에 하던 개찰을 발차 5분전에 갑자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 발생하였다. 1965년 10월 5일 전국체육대회 압사 사망 14명. 광주에서 열린 제4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쇠문이 부서지면서 연쇄적으로 넘어져 압사 발생. 1974년 9월 28일 용산역 압사 사망 4명. 귀성길에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발생. 1980년 2월 11일 부산 용호국민학교 압사 사망 5명, 부상 21명. 개학 첫날 아침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운동장에 뛰어나가던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지면서 발생. 과밀학급과 비좁은 계단으로 사고 위험이 높은 상황에서 인솔 교사가 없었던 점이 지적되었다. 1985년 1월 17일 안동 신한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 압사 사망 5명, 부상 18명. 경북 안동 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신한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인파가 몰려 발생.  2005년 10월 3일 상주 콘서트 압사 사망 11명. 경북 상주 계산동 상주시민회관 콘서트에서 발생한 사고. 리허설을 이유로 출입구를 폐쇄하고 세 개의 문만 개방했으며 경찰 인력도 부족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사망 158명, 부상 196명 (원래는 노동사고/산업재해, 범죄, 군사충돌도 넣고 싶었습니다만, 시간과 체력 여건상 싣지 못하여 참으로 아쉽습니다.) 비참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참사(慘事)는 비참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건 하나하나를 찾아보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 개개인의 사연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이 모든 사고가 다 참사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참사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만, 굳이 기준을 정해보자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를 못 막아서 일어난 경우가 참사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고 중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사고도 많았지마는, 우리가 제도를 잘 정비했다면, 시설을 잘 점검했다면, 욕망을 조금이라도 줄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겠구나 싶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물론 점진적으로 꾸준히 제도를 개선하고 법을 만들어 가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미리미리 만들었다면, 미리 점검했다면 이라는 안타까움을 지울 길은 없었습니다. 위에 소개된 비극 중 반 이상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책임을 지닌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문제인 경우들이었습니다. 제도 개선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제도만 개선하면 끝인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제도라도 제대로 만들어놓고 개인을 탓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복잡합니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보면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고는 분명 참사였습니다. 예년처럼 안전인력을 배치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10.29참사와 이태원참사 중 무엇이 더 나은가, 혹은 더 옳은가 라는 고민을 했을 때, 아직까지 대규모 참사에서 날짜를 기준으로 명명한 전례는 없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날짜를 중심으로 명명하는 경우에는 그 날짜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얼마나 변화했는가, 혹은 그 날짜를 특별히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고, 장소를 중심으로 명명하는 경우에는 그 일이 일어난 장소의 이름을 지울 경우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흐려지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지, 혹은 그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을 때 그 일을 떠올리거나 추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는 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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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놀다가 죽은 거 아니냐’는 생각이 꽤 넓게 공유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를 좀 구분해서 보자면 냉소하고 비아냥대기 위해 ‘놀다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긴 한데, 놀다가 죽은 건데 너무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인식에는 헬로윈 축제가 주최가 없는 ‘사적인 행사’이기에 국가의 책임이 옅고, 참사 현장에서도 경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근거를 들어 이런 논리를 반박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참사 당일 관료들의 대응 실패와 시스템 부재에 대한 보도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 및 서울경찰청와 용산경찰서, 서울교통공사, 보건복지부 및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등에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참사를 예방하지도 발빠르게 대응하지도 못한 채 피해를 만들고 키웠다. 반대로 과거의 헬로윈 축제 당시 안전통제를 비롯해 참사 3시간 전 시민들에 의한 자발적 통제가 일어났던 사례는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적인 죽음’이라는 프레임을 극복하는 데는 이런 논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공적인’ 문제란 것은 사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수학여행은 학교(국가를 상징하기도 하는)의 공식 행사이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가해와 피해가 너무나 선명했다. 선장과 선원, 진도 VTS와 해경, 나아가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가해자였다. 반면 이태원 참사(10.29 참사라는 용어는 개인적으로 아직 유보적)는 다르다. 직접적인 수준에서의 폭력, 즉 직접적인 가해와 피해만이 가시화된 채 다른 것들은 불투명하고 뒤엉켜 있다. 그날 그 현장에 있던 ‘놀러갔던 사람들’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얽혀 있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시선에서 보면, 서로 (자발적으로) 밀집해서 깔려죽었다는 아주 가시적인 사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로 인해 국가나 관료, 정부나 시스템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은 비가시화된다. 가령,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경찰이 통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경찰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정부가 강제하거나 주최한 것이 아닌데 대체 정부와 참사는 무슨 상관일까?” 라는 질문은 정부의 책임과 시스템 부재의 문제를 가려버린다. 즉, 왜 정부와 관료가 가해자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세월호와 비교해 덜 선명한 참사인 것이다. 또한 언어가 없다. 언어 없이 애도를 가장한 침묵을 강제한 정부도 그 원인이고, 진영화된 구도로 빨려들어가지 않으려 할수록 혹은 거기에 빨려들어갈수록, 언어가 없는 것이다. 이 참사가 대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언어/상징이 없다. 그런 맥락들로 인해 ‘사적인 죽음’으로 이해하는 프레임이 작동하기 쉬운 것이다. 내겐 결국 재현이나 운동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월호 참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투명하고 모호하고 구조적 문제가 비가시화된 상황에서, 어떤 언어와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이 참사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좌절스럽게도 ‘놀다가 죽었다’가 현재로선 가장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이 참사를 설명하고 그려낼 언어/상징과 정치적 상상력(진영구도에 갇히지 않을)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책임자 처벌이나 정권퇴진론을 넘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사회를 두텁게 하는 실천은 무엇이 있을까? 2022.11.3 [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2022.11.7 [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2022.11.9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3 [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2022.11.24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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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사회적 죽음은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의 애도를 필요로 한다. 윤석열 정권이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것은 말하자면 국가가 일종의 ‘사회적 상주’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모두가 시름과 비통함에 빠져 있을 때 애도의 말들을 할 수 있도록 분향소도 차리면서 상주가 되기를 자처했다. 문제는 빈소에 상주가 얼굴조차 비치지 않는다. 근조 리본을 거꾸로 달도록 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재난을 사고로 칭한다. 애도기간을 선포해 상주가 되겠다고 했지만 어디에도 상주가 보이질 않는다. 상주를 붙잡고 울든 화내든 해야 하는데 상주가 없다. 애도를 선포했지만 애도가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선례를 찾으려 하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한 뒤 재빨리 시신을 화장해 부검조차 못하게 했다. 영화 <1987>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가족조차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뼛가루로 남은 상태로 만나야 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는 “종철아 할 말이 없데이” 라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시 국가는 사회적 애도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애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며 애도를 불가능하게 한 윤석열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나온다. 가해자가 상주가 될 수 있는가? 국가가 가해자인데 어떻게 상주를 자처할 수 있나? 그런 의미에서 긴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 천안함 사건 당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 직후 애도기간이 선포됐다. 여전히 조사할 것들, 질문할 것들 투성이다. 왜 경찰 인원 배치가 추가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11건의 신고에도 왜 제대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는지, 경찰 지휘부와 행정안전부는 왜 사태를 늦게 인지했는지, 중상자 이송이 왜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 정황과 문제들이 보도되고 있다. 관료와 행정의 작동방식과 무책임의 문제, 개신교 세력들의 문제 등 짚어야 할 질문들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국가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런 모든 질문들을 통해 이뤄지는 애도는 긴 과정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정권의 수법이다. 국가애도기간은 자연스레 ‘왜 애도를 강요하느냐’는 반발을 낳는다. 나는 이것을 ‘위악의 심성’이라고 말하는 편인데, 이는 강요되는 도덕에 대한 ‘솔직한’ 반발감에 기인한다. 위악의 심성은 도덕과 선함을 말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하며 차라리 솔직해지자고 제안한다. 자신들의 ‘솔직함’이 더 도덕적 우위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 함정에서 도덕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곁가지 얘기이니 패스.) 하지만 적어도 이번의 경우에 ‘강요’는 유가족도 시민사회도 아닌 국가가 한 것이었다. 애도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애도기간을 선포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비판하듯 많은 문화행사들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문화예술만큼 애도와 직결되는 것이 없음에도 ‘애도’라는 명분으로 거의 입을 틀어막았다. 즉, 공허한 애도를 강요한 것은 윤 정부다. ‘왜 애도를 강요하느냐’는 반발은 국가를, 윤 정부를 향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위악의 심성은 내일까지인 국가애도기간이 끝나면 그 방향이 뒤틀릴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선포한 침묵을 강요하는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 그제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애도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러면 앞으로 애도를 말하는 사람들(유가족, 생존자, 지지하는 시민들…)을 향해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하게 될 것이다. 내일이 지나면 윤 정부가 피워놓은 불길이 국가가 아니라 그 반대방향, ‘사회’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애도기간이 가진 예상되는 효과에 더해, 정부는 장례비 및 위로금 지급과 각종 세금 혜택 지원을 발빠르게 진행할 것이다. 이는 세월호 참사의 데자뷰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국가 대상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같은 맥락에서 ‘돈 요구’라는 비난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 담론정치의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얘기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애도의 범위를 넓히자는 것이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위악의 심성도 매끄럽고 균질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애도되지 못한 ‘양가감정’이 있다. 이건 세대가 공유하는 어떤 집단 감각이기도 하다. 헬로윈 참사를 겪은 세대는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세대이고, 마우나리조트 참사가 터지고 대학 OT를 가지 못한 세대이며, 코로나19로 대학 캠퍼스를 밟지 못한 세대다. 이들에겐 재난과 그로 인한 거대한 비극 앞에서 자신들의 ‘작은’ 상실와 슬픔, 아쉬움들이 적지 않다. 배 안에 갇혀 사람이 죽었는데 놀러 가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정말 나쁜 놈들인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이라는 말로 이런 모든 상실과 양가감정까지 다 막아버렸으니.) 그러니, 세월호 이후 또 다시 거대한 비극 앞에서 이제는 좀 더 넓은 애도의 담론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위악’의 심성을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일상에서는 그들이 지닌 상실도 품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대부분 청년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태원 파출소 경찰들이 반발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국가애도기간에 대한 반발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도’라는 글자에 집중에 윤 정부에서 시민들로 그 대상이 옮겨가는 담론의 뒤틀림 대신, ‘국가’에 방점을 찍고서 국가애도기간-이태원 파출소로 이어지는 국가의 무책임과 책임전가를 문제 삼는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2022.11.3 [이태원 참사] ‘상주’ 없는 애도 기간  2022.11.7 [이태원 참사] 상징과 언어가 없는 참사 2022.11.9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3 [이태원 참사] 일상과 함께 가는 애도 2022.11.24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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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명단 보도, 필요한 이야기였을까
'아일란 쿠르디'의 시체가 발견된 건 2015년 9월 2일, 튀르키예 서부의 유명 휴양지 보드룸(Bodrum)이었습니다. 세 살이었던 쿠르디는 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떠난 난민이었습니다. 튀르키예를 거쳐 유럽으로 가던 길에 엄마, 형, 다른 난민들과 보트에 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가 뒤집혔습니다. 보트에 탔던 모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쿠르디의 몸은 해변으로 떠내려 왔습니다. 그 모습이 SNS에 게재됐습니다. 슬픔과 충격이 세계로 번졌습니다. 그걸로 전쟁이 끝난 것도, 각국의 난민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난민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감이 늘었습니다. 사고 후 EU에선 난민 분산수용이 합의됐습니다. 4년이 지난 2019년에는 독일의 한 난민 구호단체가 지중해에서 쓰이던 난민 구조선 이름을 '아일란 쿠르디 호'로 바꿨습니다. 쿠르디의 이야기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남았습니다. "인류가 이야기를 통해 수천 년간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이 그것입니다. 인간이 균형을 잃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되돌리고자 하는지에 관한 것이죠."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닥터'로 통하는 로버트 맥기(Robert Mckee)의 말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떠돌다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이 듣고 곱씹는 과정에 생각과 교훈이 되어 남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로 잘못을 반성하고 위기에 대비하며 삶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움직입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명단에서 이야기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최소한의 이름만이라도 공개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와 책임 규명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주장은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숫자가 글자로 바뀌었을 뿐, 실명과 익명이 어지럽게 혼재된 페이지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엔 명단 공개를 했지 않느냐는데, 지금 사람들은 과거보다 유족 보호를 더 유념합니다. NYT 등도 실명 보도를 하지 않느냐는데, 그들도 동의 없이 마음대로 보도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없는 명단을 보니 오히려 유족들의 이야기는 어떨지 걱정됐습니다. 저 이름 주인의 유가족은 동의를 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어떡하나, 누군가 유가족 행세를 하며 이름을 내렸다는데 그 이름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을까, 이름이 장난질에 이용된 사람과 유가족은 슬프진 않을까. 다시 읽어 본 공개의 변에서는 애도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개를 위한 이야기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세 달 전 고향 스리랑카에서 결혼한 모하마드 지나드(27)는 임신한 아내와 한국에서 함께 사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입사 제의도 받아 10월 31일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29일 밤, 친구 집에 맡겨둔 짐을 찾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사고에 휩쓸렸다. (BBC, 2022.11.3.) “대형참사를 먼저 겪은 가족들로서 그분들(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죠. 숨진 가족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거든요. 그건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일 테고 그러려면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근데 또 참사가 벌어졌으니 ‘상주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반성하게 되네요 .”(윤석기) 국가 안전관리체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동안,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고 고민하는 일은 참사의 상주들이 떠안고 있었다. (한겨레. 2022.11.10.) 참사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평범한 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삶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 삶이 상상치 못했던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떠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일, 그곳에 있던 건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일이 애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 2014년 서해에서 그랬듯 유족에게 마구 달려들어선 안됩니다. 조심스러운 접근과 당사자의 동의 하에 취재되고 보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추모하고, 잘잘못을 반성하고, 남은 삶의 균형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숫자 몇 개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글자 몇 개도 아니며, 이야기입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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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란?: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란? :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참사 직후 우리 사회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단순히 참사의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더욱이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한 혐오, 국가행정의 무책임한 태도와 꼬리 자르기 행태까지 현 정부의 대응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면면들은 세월호 당시와 꼭 닮아있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동일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년세대가 참사를 반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8년 전 시민들이 던졌던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면서 또다시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결국 대통령 개인 말고는 우리사회가 변한 것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참사에 대응하는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모습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초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김건희 특검’과 ‘윤석열 퇴진’을 구호로 매주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라는 구호가 하나 더 추가된 것에 불과한 정치적 행위가 추모로 둔갑해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들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김건희 특검’ 피켓은, 한국정치의 파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의 사회적 경험이 과연 유효하고 의미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감각과 대중들의 감각이 확연히 다르다는 지점을 짚어야 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퇴진 촛불 정세와는 다른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재난과 참사 이후, 사회는 ‘반성과 성찰’을 기반으로 변해야 한다. 불평등이 재난으로 심화되지 않아야 하고, 참사를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코로나 재난 속에 비대면-원격사회로 전환을 대안으로 내놓고, 이태원 참사 직후에는 정권교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대안들이다.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 권리는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추모와 애도에서 정치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모와 애도가 정권에 대한 분노로만 귀결된다면, 안전 사회-대안 사회는 누가 만들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는 어떻게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추모의 대화’를 사회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기성국가-기성정치-기성사회를 거부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산발적으로나마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퇴진이 추모’라는 구호는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의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퇴진운동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참사를 마주하지 말자. 어떤 결론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추모하고 대화하고 연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나가야 한다. 어제(11월22일) 청년정의당과 장혜영 의원실에서 주최한 <참사의 시대을 살아내는 청년세대>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이 글은 제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토론회 영상 링크 : youtu.be/1rQcSdEA52g 토론회 개요 및 자료집 링크(첨부파일) : http://www.justice21.org/153987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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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19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지난 11월 19일 토요일 오후 5시,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 이태원광장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녹사평역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같은 시간의 (숭례문부터) ) 시청역에서의 일에 대해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숭례문 앞 태평로에서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주최로 경찰 추산 3만여 명, 주최 측 추산 20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전광훈 목사,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주최로 주최측 추산 3만여 명이 모여 맞불집회를 개최했다.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과 "이재명, 문재인을 구속하라"라는 이상한(?) 이항대립의 구호가 광화문과 시청 일대를 가득 채웠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시청역 7번 출구 앞에서 숭례문쪽을 바라보며, 집회 분위기를 살펴봤습니다. 숭례문부터 시청까지 거의 모든 도로를 시민들이 꽉 채워 앉아 있었습니다. 저 멀리 숭례문이 보입니다. 거대한 전광판들과  엄청난 크기의 음향 기기들이 맨앞 무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8년 촛불, 2016년 촛불 이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모인 적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 중앙무대의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민생파탄 정치보복 평화파괴 친일매국 윤석열 퇴진",  “주가조작 허위경력 상습사기 김건희 특검!”이 적히 피켓을 들고 정권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외쳤습니다. 중간중간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도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하며, ‘피해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촛불행동 대표의 말을 포함해서, 이태원 참사는 이 집회에서 중요하게 이야기되었습니다. 연단에서 한 시민은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의 책임이라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에게만 딱딱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참사 당일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집회에 경찰을 총동원해서 감시했다”며, “경찰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또 한 시민은 “그날의 참상은 어느 집 자식이었더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한겨레. 2022.11.19) 10차 이상 이어져 온 퇴진운동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었던 것인지, 이태원 참사가 퇴진행동의 급격한 확산에 핵심 계기로 작동했는지 딱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아마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대응은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환원 되느냐, 그와 구별되는 구체적 대응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지느냐의 물음에 직면한 듯 보입니다.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퇴진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퇴진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이 이태원 참사의 대응에 함께 연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절대 아닙니다. 퇴진운동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연대는, 오히려 꼭 필요한 고마운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응이 퇴진을 위한 땔깜으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되고,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대응체계가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시간 반 전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으로 되돌아 가보겠습니다.   이태원 광장 맞은 편, 언덕에 추모 플래카드가 걸려 있네요.  참여연대 주최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이 열렸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참여연대 홈페이지)  어둠이 내리기 전, 시민추모촛불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은 “성역없는 진상규명. 책임자를 처벌하라”, “이태원참사, 국가 책임이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하라”를 핵심 구호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발언들이 이어지고, 추모 공연이 이어지는 사이에 어둠이 내렸습니다. "참사가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사이, '추모하겠다'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눠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박성현 4.16재단 나눔사업1팀 팀장의 발언이 숭례문 퇴진행동과 떨어져 작게나마 이루어지는 추모촛불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파하는 분들의 마음을 보듬고, 2차 가해를 막고, 피해자의 마음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158명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이태원의 주민들, 현장에서 대처한 소방관과 경찰관, 참사의 생존자들까지도 어떤면에서 피해자라는 이야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집회는 이태원 참사 당일 112에 첫 신고 전화가 접수된 시간인 '6시 34분'에 촛불을 일시 소등하며 끝났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3일 후, 2022년 11월 22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이루어졌습니다. 흐느낌과 절규 속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유족의 메세지와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상세한 내용은 기자회견 전체 영상 확인) 이날 유족들은 6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하였습니다.(한겨레, 2022.11.22) 참사 책임이 정부·지자체·경찰에게 있다는 정부 입장 발표 및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 성역 없는 책임 규명 피해자 참여를 보장하는 진상 규명 참사 피해자의 소통 보장, 인도적 조치 등 적극적 지원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추모를 위한 조처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 및 구체적 대책 마련 책임 규명과 사회적 기억·추모,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피해당사자의 참여 보장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나온 셈입니다. 퇴진행동을 주도 해 온 ‘촛불행동'에서는 “10.29 참사 유가족 대책본부를 꾸리”자며, “유가족분들의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제안한 상황입니다.(촛불행동 페북 페이지) 숭례문의 20만 퇴진행동 가운데에 이루어진 녹사평의 100명의 시민추모촛불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퇴진 구호로 환원되지 않는 이태원 참사의 원인·책임 규명 및 사회적 기억·추모, 안전사회를 위한 대안 체계의 마련 등이 이제 가시화 된 피해자·유족 당사자의 직접적·주도적 참여와 함께 이어져 가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는 퇴진행동 참가자들의 이태원 참사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대가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녹사평역 옆 이태원 광장에서 숭례문으로 이동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며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역 방향의 길을 봅니다. 불은 밝지만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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