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가? - 참사의 명명법,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원칙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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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 오지랖 넓은 사회연구자

이태원 참사 혹은 10.29 참사. 참사의 명명에 대한 논쟁이 인다. 나는 이태원 참사라는 쪽에 무게를 싣고 싶다. 자세하게 찾아보지 못했고 오피셜한 글을 쓰려면 논의들을 좀 봐야겠지만, 크게 1) 지역에 대한 편견과 낙인, 혐오가 생길 수 있으며, 2) 사고장소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불안과 공포가 생겨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사실 1)의 근거가 이태원 참사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당장 이태원이나 용산 주민이 참사의 직접적인 대상이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피해자에 외국인들도 있는 마당에, 가령 ‘태안 기름유출 참사’라는 명명이 지역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진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예단은 섣부르다.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관계일 것이다. 태안이라든지 혹은 안산(세월호), 광주(5.18) 등에 대한 낙인과 혐오 담론은 그 지역에 대한 인식이 권력관계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지방이라거나 시골이라거나 가난한 지역이라는 등의 인식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한복판의, 그것도 인파로 북적북적한 ‘힙한’ 동네가 기존에 혐오 담론의 대상이 된 지역과 동일하다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이란 명명이 강남역 일대를 우범지역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MBC는 '이태원 참사'로 부르지 않겠다며, '10.29 참사'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출처는 사진 클릭)


더 중요한 문제는 2)이다. 트라우마와 치유라는 담론이 너무 기능적인 또는 개인적인 수준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생존자들의 참사 기억이 부각되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은 문제적이다. 하지만 ‘망각’이 치유는 아니다.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중립화’라는 언어가 가진 문제와 유사하게, 이태원이라는 장소성을 제거한 10.29 참사 역시 참사를 추상화하고 중립화하는 뉘앙스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달력을 통해 매해 기념일을 제정하는 관행은 근대국가가 집단기억을 형성해 ‘네이션’을 구성하려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물론 저항 기억 역시 달력에 기반해 매해마다 기억을 기념한다. 하지만 그 저항 기역은 추상적 날짜가 아니라 장소성과 강하게 결부된다. 국가는 5.18이나 4.3이라고 명명(기억의 제도화, 국가의 공식기억화)하지만, 5월이 되면 광주의 어른들은 구도청 일대로 나가 시름시름 앓고, 4월이 되면 제주는 마을마다 같은 날 제사를 지내왔다(마을 사람들을 한 데 모아 한꺼번에 학살했으므로). 추상적인 날짜에는 담기지 않는 장소성의 구체적 감각이란 게 있는 것이다. 장소에 기반한 구체적 감각은 지역이 공유하는 집단기억으로 이어지며, 그 기억으로부터 저항 운동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이태원이 놓인 장소성을 놓쳐선 안 된다. 그곳이 미군기지 옆에 놓인 동네였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인들이 찾는 장소가 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연과 아픔들이 이태원에 녹아들어 있다. 나아가 기독교 세력이 헬로윈 축제를 문란하다고 낙인 찍고 서양문화라고 비난하는 데는, 이태원이 퀴어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라는 점과 떼어놓을 수 없다. 156명의 사망자는 모두 이성애자일까? 모두 ‘한국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장소성의 구체적인 맥락들과 결부될 때, 이태원 참사의 의미는 더 풍부해질 수 있다. 또한 참사로부터 생겨나는 운동들 역시 장소에 기반한 집단 기억과 풍부한 맥락에 기반해 더 많은 상상력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장소 연구, 기억 연구들이 장소와 기억이 얼마나 강하게 결부된 것인지 오랫동안 지적해왔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소를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옅고 흐리게 만드는 것은 ‘고통’을 축소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 하지만 과연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 특히나 이태원 참사를 ‘놀다가 죽었다’며 ‘사적인 죽음’으로 이해하고, 참사의 원인을 희생자와 생존자에게 전가하며, 마치 참사를 ‘남의 일’인양 생각하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 참사를 중립화, 추상화하는 방식의 언어는 오히려 망각과 부인에 일조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장소에 기반한 집단 기억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참사 현장의 영상과 사진을 공유하거나 보여주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는 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재현의 윤리 문제에서도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잘 감각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비현실적인 참사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가라앉는 배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압사 사고는 정말로 상상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참사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이태원 참사에는 참사의 사회적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상징이 없다.

(나는 참사 초기에 현장의 영상과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따봉 받으려는 관종으로 보여서.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언어가 될 수 없는 참담한 광경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말은 영상과 사진이었다.)

이는 온갖 부인 담론이 팽배해지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애도를 강요하지 마라거나 놀다가 죽었다는 식의 위악의 담론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참사와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말한다는 것은, 즉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듣지 않을 수 없도록 말한다는 것은, 그들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도록 참사의 참상을 눈앞에 들이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자극적인 보도를 해서 안 된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진실을 알리고 눈 감으려는 사람들까지도 듣게 하려면 참사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도 필요하다. 미디어의 보도와 재현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좀 더 복잡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겐 ‘고통’이 필요하다.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기억’한다. 목격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응답하려는 책임감을 느끼고 타인과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연루와 책임의 태도를 취하는 방식도 속도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어떤 목격자들은 ‘방관자’이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감각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날 그 현장에 있던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갖는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감각이며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는 그들이 자책하며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선 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느끼는 미안함과 죄책감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이 참사에 강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인해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함’은 그런 의미에서 응답책임을 가능케 하는 연루의 감각 그 자체다. 그렇다면 과연 ‘방관자’들을 그 고통에서 면제시키는 것은 옳은 일일까?


캠페인즈에 관련 이슈로 '투표' 10·29 참사와 이태원 참사,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가 개설되어 있으니 투표하고 댓글로 토론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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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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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새 비회원

고통은 그 자체로 피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기는 장치로서 이해할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이 어디까지 얼마나 고통을 감내할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겠냐는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참사의 명명과 관련하여 고민했던 부분들이 다소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10.29 이태원 참사'는 예방 차원에서든 대응 차원에서든 정부에 원인과 책임이 있는 대형 '사회적 참사'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사의 이름은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서의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29라는 날짜는 그것을 잘 드러내주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이태원 참사'라는 명명은 이태원역 옆의 좁은 골목에서 핼러윈 축제 시간에 정부 차원의 예방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라는 의미를 어느정도 함축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0.29 참사'로 명명하고자 하는 분들의 문제의식도 공감이 갑니다. 어떤 이름이든 유가족들의 의사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유가족들의 의사가 확인된다고 그에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0·29 참사와 이태원 참사,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https://campaigns.kr/surveys/2...
에서 댓글로 적은 내용과 동일하게 올렸습니다.

"장소를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옅고 흐리게 만드는 것은 ‘고통’을 축소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 하지만 과연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는 말에 공감합니다. 이런 고통이 기억이 되고, 더 안전한 제도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공간에서 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 10.29 참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그렇게 부르는 편이 좋겠다 싶었지만 이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이를 듣다보니 설득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