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죽음은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의 애도를 필요로 한다. 윤석열 정권이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것은 말하자면 국가가 일종의 ‘사회적 상주’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모두가 시름과 비통함에 빠져 있을 때 애도의 말들을 할 수 있도록 분향소도 차리면서 상주가 되기를 자처했다.
문제는 빈소에 상주가 얼굴조차 비치지 않는다. 근조 리본을 거꾸로 달도록 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재난을 사고로 칭한다. 애도기간을 선포해 상주가 되겠다고 했지만 어디에도 상주가 보이질 않는다. 상주를 붙잡고 울든 화내든 해야 하는데 상주가 없다. 애도를 선포했지만 애도가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선례를 찾으려 하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한 뒤 재빨리 시신을 화장해 부검조차 못하게 했다. 영화 <1987>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가족조차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뼛가루로 남은 상태로 만나야 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는 “종철아 할 말이 없데이” 라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시 국가는 사회적 애도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애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며 애도를 불가능하게 한 윤석열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나온다. 가해자가 상주가 될 수 있는가? 국가가 가해자인데 어떻게 상주를 자처할 수 있나?
그런 의미에서 긴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 천안함 사건 당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 직후 애도기간이 선포됐다. 여전히 조사할 것들, 질문할 것들 투성이다. 왜 경찰 인원 배치가 추가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11건의 신고에도 왜 제대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는지, 경찰 지휘부와 행정안전부는 왜 사태를 늦게 인지했는지, 중상자 이송이 왜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 정황과 문제들이 보도되고 있다. 관료와 행정의 작동방식과 무책임의 문제, 개신교 세력들의 문제 등 짚어야 할 질문들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국가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런 모든 질문들을 통해 이뤄지는 애도는 긴 과정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정권의 수법이다. 국가애도기간은 자연스레 ‘왜 애도를 강요하느냐’는 반발을 낳는다. 나는 이것을 ‘위악의 심성’이라고 말하는 편인데, 이는 강요되는 도덕에 대한 ‘솔직한’ 반발감에 기인한다. 위악의 심성은 도덕과 선함을 말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하며 차라리 솔직해지자고 제안한다. 자신들의 ‘솔직함’이 더 도덕적 우위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 함정에서 도덕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곁가지 얘기이니 패스.)
하지만 적어도 이번의 경우에 ‘강요’는 유가족도 시민사회도 아닌 국가가 한 것이었다. 애도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애도기간을 선포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비판하듯 많은 문화행사들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문화예술만큼 애도와 직결되는 것이 없음에도 ‘애도’라는 명분으로 거의 입을 틀어막았다. 즉, 공허한 애도를 강요한 것은 윤 정부다. ‘왜 애도를 강요하느냐’는 반발은 국가를, 윤 정부를 향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위악의 심성은 내일까지인 국가애도기간이 끝나면 그 방향이 뒤틀릴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선포한 침묵을 강요하는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 그제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애도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러면 앞으로 애도를 말하는 사람들(유가족, 생존자, 지지하는 시민들…)을 향해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하게 될 것이다. 내일이 지나면 윤 정부가 피워놓은 불길이 국가가 아니라 그 반대방향, ‘사회’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애도기간이 가진 예상되는 효과에 더해, 정부는 장례비 및 위로금 지급과 각종 세금 혜택 지원을 발빠르게 진행할 것이다. 이는 세월호 참사의 데자뷰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국가 대상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같은 맥락에서 ‘돈 요구’라는 비난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
담론정치의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얘기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애도의 범위를 넓히자는 것이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위악의 심성도 매끄럽고 균질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애도되지 못한 ‘양가감정’이 있다. 이건 세대가 공유하는 어떤 집단 감각이기도 하다. 헬로윈 참사를 겪은 세대는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세대이고, 마우나리조트 참사가 터지고 대학 OT를 가지 못한 세대이며, 코로나19로 대학 캠퍼스를 밟지 못한 세대다. 이들에겐 재난과 그로 인한 거대한 비극 앞에서 자신들의 ‘작은’ 상실와 슬픔, 아쉬움들이 적지 않다. 배 안에 갇혀 사람이 죽었는데 놀러 가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정말 나쁜 놈들인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이라는 말로 이런 모든 상실과 양가감정까지 다 막아버렸으니.) 그러니, 세월호 이후 또 다시 거대한 비극 앞에서 이제는 좀 더 넓은 애도의 담론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위악’의 심성을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일상에서는 그들이 지닌 상실도 품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대부분 청년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태원 파출소 경찰들이 반발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국가애도기간에 대한 반발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도’라는 글자에 집중에 윤 정부에서 시민들로 그 대상이 옮겨가는 담론의 뒤틀림 대신, ‘국가’에 방점을 찍고서 국가애도기간-이태원 파출소로 이어지는 국가의 무책임과 책임전가를 문제 삼는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코멘트
3애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애도기간이라 정한 것을 보면서 아이러니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니...
국가 차원의 애도기간 선정이 빨랐기 때문에 애도의 마음이 형성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처리해야할 사건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국가에 의해 강요된 사회적 상주 없는, 애도가 불가능한 애도’라는 문제의식에 동의가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애도가 시작되고, 긴 애도의 과정이 필요 할 것이라는 진단에도 공감하게 됩니다. 국가의 책임을 묻고, 애도의 범위를 넓히자는 제안에도 동감하게 됩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 ‘사회적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 그리고 그것에 입각한 ‘안전한 사회를 위한 대안의 마련’이라는 추상적인 과제에 유가족들과 시민들, 그리고 전문가들이 함께 구체적인 내용들을 잘 채워 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