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희생자 명단 보도, 필요한 이야기였을까

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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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보드룸 해변
△튀르키예 보드룸 해변


'아일란 쿠르디'의 시체가 발견된 건 2015년 9월 2일, 튀르키예 서부의 유명 휴양지 보드룸(Bodrum)이었습니다. 세 살이었던 쿠르디는 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떠난 난민이었습니다. 튀르키예를 거쳐 유럽으로 가던 길에 엄마, 형, 다른 난민들과 보트에 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가 뒤집혔습니다. 보트에 탔던 모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쿠르디의 몸은 해변으로 떠내려 왔습니다. 그 모습이 SNS에 게재됐습니다.

슬픔과 충격이 세계로 번졌습니다. 그걸로 전쟁이 끝난 것도, 각국의 난민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난민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감이 늘었습니다. 사고 후 EU에선 난민 분산수용이 합의됐습니다. 4년이 지난 2019년에는 독일의 한 난민 구호단체가 지중해에서 쓰이던 난민 구조선 이름을 '아일란 쿠르디 호'로 바꿨습니다. 쿠르디의 이야기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남았습니다.

"인류가 이야기를 통해 수천 년간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이 그것입니다. 인간이 균형을 잃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되돌리고자 하는지에 관한 것이죠."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닥터'로 통하는 로버트 맥기(Robert Mckee)의 말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떠돌다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이 듣고 곱씹는 과정에 생각과 교훈이 되어 남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로 잘못을 반성하고 위기에 대비하며 삶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움직입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명단에서 이야기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최소한의 이름만이라도 공개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와 책임 규명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주장은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숫자가 글자로 바뀌었을 뿐, 실명과 익명이 어지럽게 혼재된 페이지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엔 명단 공개를 했지 않느냐는데, 지금 사람들은 과거보다 유족 보호를 더 유념합니다. NYT 등도 실명 보도를 하지 않느냐는데, 그들도 동의 없이 마음대로 보도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없는 명단을 보니 오히려 유족들의 이야기는 어떨지 걱정됐습니다. 저 이름 주인의 유가족은 동의를 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어떡하나, 누군가 유가족 행세를 하며 이름을 내렸다는데 그 이름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을까, 이름이 장난질에 이용된 사람과 유가족은 슬프진 않을까. 다시 읽어 본 공개의 변에서는 애도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개를 위한 이야기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공개된 희생자 명단

△공개된 명단. 확인할 때마다 더 많은 이름이 비공개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세 달 전 고향 스리랑카에서 결혼한 모하마드 지나드(27)는 임신한 아내와 한국에서 함께 사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입사 제의도 받아 10월 31일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29일 밤, 친구 집에 맡겨둔 짐을 찾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사고에 휩쓸렸다. (BBC, 2022.11.3.)

“대형참사를 먼저 겪은 가족들로서 그분들(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죠. 숨진 가족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거든요. 그건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일 테고 그러려면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근데 또 참사가 벌어졌으니 ‘상주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반성하게 되네요 .”(윤석기) 국가 안전관리체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동안,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고 고민하는 일은 참사의 상주들이 떠안고 있었다. (한겨레. 2022.11.10.)

참사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평범한 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삶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 삶이 상상치 못했던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떠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일, 그곳에 있던 건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일이 애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 2014년 서해에서 그랬듯 유족에게 마구 달려들어선 안됩니다. 조심스러운 접근과 당사자의 동의 하에 취재되고 보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추모하고, 잘잘못을 반성하고, 남은 삶의 균형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숫자 몇 개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글자 몇 개도 아니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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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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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이 많은 논의를 덮은 케이스로 보입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지 잘 동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회적인 합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잘 지켜보고 싶습니다.

유가족 동의 없는 명단 공개도 문제지만 실명을 인증하면 지워주겠다는 말이 마치 유가족 인증처럼 들려서 불편했습니다. 도대체 저 단체는 왜 명단을 공개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말씀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숫자 몇 개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글자 몇 개도 아니며, 이야기입니다."

공감갑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 애도와 추모를 위한 이야기들이 이어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