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최성용_참사를 대하는 목격자의 태도

20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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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슈가 모이는 디지털 시민 광장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최성용(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부설 냉전평화연구센터 연구원)


왜 “놀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감각으로 그런 말을 하 는 것일까? 우선은, 세 가지 정도의 맥락을 짚어보려 한다. 



1) 상징과 언어의 부재 

세월호 참사는 가령 ‘침몰하는 배’나 ‘노란 리본’, “가만히 있어라”와 같이 풍부한 의 미를 담은 상징과 언어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이 해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그러한 은유적인 상징이나 언어가 없어서, 여전히 너무 ‘비현실적’인 일처럼 다가온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지금 이태원 참사를 가장 간단하게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언어 는 ‘놀러가서 죽었다’이다. 그래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언론에서는 인파에 휘말 리게 되면 개인이 어떡할 수 없는 재난의 상황이 된다는 의미에서, ‘군중난류’나 ‘군 중 눈사태’ 같은 개념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2) 오염된 언어와 냉소 

“애도를 강요하지 마라”는 목소리는 사실 ‘국가애도기간’의 결과이다. 애도기간을 선포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이지만, 정작 애도기간에 대한 반발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을 향하고 있다. 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책임’을 말하 는 이들은 ‘놀다가 죽었다’는 비난과 함께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보상금은 법 적으로 규정된 것이라 정부가 임의적으로 지급하는 게 아니다. 또한 국가애도기간 은 법적 근거는 없으나 과거 천안함 사태 때 선포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천 안함 침몰 이후 한 달이 지나고 인양이 마무리된 시점에 애도기간이 선포됐다. 반 면, 이번 애도기간은 10월 30일에 선포되었다. 10월 29일 밤 10시에 사고가 일어 났는데, 다음날 아직 피해자들의 사망/생존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도 부터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애도를 정치화하지 마라”는 말도 등장했다. 실제 “퇴진이 추모다” 같은 구호는 참사와 애도를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치’가 특 정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만 사고되고 환원되는 현재의 상황이다. 

이렇게 정부와 야당의 정치 언어가 ‘애도’나 ‘정치’와 같은 말들을 오염시키고, 다른 애도의 말들을 봉쇄하거나 도구로 활용하면서 가능한 사회적 언어가 사라지고 있 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침묵과 냉소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놀다가 죽었다”는 그런 냉소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3) 이태원과 혐오 

‘놀다가’의 의미에는 이태원이 ‘위험’하고 ‘문란’한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위험 한 줄 알면서도 ‘그런 곳’에 간 건 ‘개인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근현 대사를 관통하는 이태원의 역사와 관련된다. 이태원 일대는 과거에 큰 공동묘지가 있었던 지역으로, 지금도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종종 유해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일제 시대 용산에 일본군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미군이 용산에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기지촌’으로서 이태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미군의 유흥문화와 미국산 제품들이 흘러나오는 곳이 됐고, 거기엔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군 위안부’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이태원은 각종 ‘미군 범죄’와 관련되어 ‘위험’한 곳으로 취급되어 왔고, 또한 이태원 은 트랜스젠더, 게이 등 성소수자들, 이주노동자와 난민 등이 드나들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근현대사의 여러 모습들이 새겨진 장소이지만, 그렇기에 이태원을 둘 러싼 담론들은 늘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특히 2020년 5월 이 태원에서의 코로나19의 확산은 ‘위험하고 문란한 이태원’이라는 기존의 담론을 반 복하는 것이었다. 2020년 10월 말, 2021년 10월 말, 매번 핼러윈 시즌 때마다 코로 나19 확산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이태원의 성소수자, 외국인 및 이주민에 대한 혐오 담론이 나타났다.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2022년 10월의 핼러윈이 있는 것 이다. “놀다가 죽었다”며 사회적 애도를 가로막는 혐오 담론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바탕에 두고 있다. 



생존자와 목격자 

생존자들의 호소하는 ‘미안함’은, 한편으로는 트라우마이자 아픔이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희생자들과의 강력한 ‘연결감’을 의미한다. 나는 그 연결감의 아픔을, 먼 거 리에 있었던 목격자들,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격자들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희생자와의 연결됨을 부정하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하며, 아니면 ‘너는 나다’라는 식으로 희생자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 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격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며 그조차도 생존자보다는 희 생자와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감 속에서 목격자가 참사를 대하는 태도란 ‘나일 수도 있었다’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안합니다”라며 “기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다 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는 그런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의 증거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참사가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 다시 참사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현재 생존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말들이 가득 하다. 이미 한 생존자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10월 29일 밤에 살아남은 사 람들은 여전히 ‘길고 느린 참사’를 겪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아직 우리 사회가 구출해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날 밤 생존자들이 사람 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이제 생존자들, 유가족들을 (그리고 어떤 의미에 서는 희생자들까지도) 구해내야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참사를 대하는 목격자의 태도"(최성용),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최성용 캠페이너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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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0.29 이태원 참사

구독자 49명
배미원 비회원

518, 416, 1029의 희생자, 생존자, 목격자 모두가 우리이다. 어느 누구도 타자가 될 수 없다. 재난은 한국인이라면 살아 있는 한 디폴트다. 슬픈 국민에게 필요한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공론화 직업이 시민을 깨웠으면 좋겠다.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참사에 대한 감정 공유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감합니다. 생존자, 전해들은 사람이 아픔을 함께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공간과 건강한 추모와 공유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김문건 비회원

사회적인 집단 자기 성찰이 없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오늘 모임처럼 반 걸음씩이라도 내딛기를 기대해 봅니다

로즈마리 비회원

공론화가 자주 되고, 서로 공감하는 기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미루 비회원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희생자분들은 기억하는 방법은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여 발제자님이 말씀하시는 언어들에 대한 논의와 고민의 과정이 담겨있을때 더욱 기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문건 비회원

혐오의 언어가 여과없이 쏟아지면서 세월호 이후 사휘적이고 집단적인 자기 성찰이 전무한 결과라고 봅니다ㆍ오늘 빠띠가 작지만 큰 한 걸음을 뗀거 같습니다..

'내가 될 수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말들이 몇 년 사이에 자주 보이는데요. 글에서 언급된 '연결감'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참사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참사들을 목격한 사회가 지난 다짐을 보다 책임 있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일깨우고 그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놀다가 죽었다'
  • 놀면 죽어도 괜찮은 건지라고 되묻고 싶네요. 누구에게나 쉼도 놀이도 필요한게 정상인데요. 핼러윈이든 집회든 다른 이유든 사람들이 모일 때, 정부의 역할이 있는 것이겠지요.

'추모를 정치화 하지마라' vs '퇴진이 추모다'

  • 참사의 원인에 정부의 역할 수행 부분이 관련되면 정치적 차원의 접근은 필수적인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정치는 기존 우리 정치의 이항대립으로 녹아들어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 다양한 주체들의 사회적 대화와 논의에 기초하여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의 책임을 묻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한 제도적 보완을 하고,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추모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정치일 것입니다.

참사 이후의 백래시인 ‘놀다 죽었다’는 반응과 말이 어떤 정치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맥락 위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연주 비회원

놀다가 죽은건데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놀다가 죽을수도 있는 나라가 정상이냐’고 따져묻습니다. 애도기간 지정과 피해자 지원금이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차더라구요.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본문 마지막의 '참사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 사회에 사회적인 참사가 계속 일어나는데요. 그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의 말도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보상금만 주고 털어내려는 존재로 보는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사상자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악성댓글 때문에 댓글창을 닫아두었다는 마지막 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최성용 님의 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의 반응을 생각했을 때 '놀다가 죽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불편하고 슬프면서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잘 몰랐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하나 잘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