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일상’과 구분된다고 믿는 것도 이분법적인 사고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상실의 중력이 없는 일상의 시간으로 얼른 복귀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매년 기념일이 되면 잠깐 일상에서 과거로 돌아가기를 허락받으면서, 다시 산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에서 트라우마는 사라져야 할 병리적 증상이다. 고통스런 과거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고, 그 방문은 어무나 우연한 것이라 통제되기 힘들다. 그러니 트라우마는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슬픔이 표백된 평온한 일상으로 얼른 돌아가도록, 어떤 트라우마적 바이러스도 틈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애도와 일상을 구분짓는 것은 이상한 시간 개념이다. 슬픔에 젖는 것은 예외적 시간이고 일탈이라 재빠르게 일상이라는 정상적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런 이분법이 현실과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상실의 본질이다. 그러니 과거의 평온한 일상으로도 당연히 돌아갈 수 없다.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부재를 의미한다. 상실과 그로 인한 애도는 일상 밖의 예외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천천히 잦아들고 나아지겠지만 가끔씩 떠오르고, 슬프지만 동시에 미소지을 수 있는 때도 찾아온다. 상실된 것은 다시 채워지지 않지만 대신 삶은 그보다 풍부하기에 상실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아마 유물론적으로 얘기한다면 애도와 일상의 이분법은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기억과 망각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애도를 위해 온전하게 자신의 시간과 애너지를 쏟을 수 있는 아주 잠깐의 예외적 시간을 용납받은 다음, 다시 생활을 위해 일하고 돌보며 살아야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타인의 슬픔과 애도를 수용하고 지지하는 데 인내심이 없는 사회의 각박함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사회가 그보단 더 성숙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혐오와 부인의 담론이 기승을 부리지만 그래도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상에서 드문드문 상실이 다시 떠오를 때면 그 곁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런 시간을 허용할 줄 아는, 침묵과 포옹이 따스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사람들 말이다.
상실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지만 상실을 대처하며 일상을 회복해가는 과정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아직 희생자가 확실해지지도 않은, 그러니까 사람이 아직 죽지도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애도를 표한 정부의 방식은 얼른 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이들은 슬픔을 시간을 전혀 허용하지 않은 채 그것을 분노의 땔감으로 전용하면서, 사실상 ‘퇴진만이 추모다’가 되도록 애도의 방식을 독점하려 한다. 그 모든 것들에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상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자기 일상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시간을 허용받을 수 있을까?
코멘트
3과거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개인에게도 큰 짐인데요.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일상과 구분할지 말지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더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의도적으로 일상과 분리하려고 했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계속해서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애도는 필요하고, 일상과 분리 할 수 없다는 말에도 동의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슬프지 않은 이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에도 일면 공감합니다.
하지만, 슬픔과 애도는 참사를 기억하고 이겨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부이지만 많은 분들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면에서는 슬픔과 애도 이후의 분리와 일상으로의 복귀는 그것을 위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슬픔 및 애도와 일상의 분리가 책임있는 자들의 외적 강제로 인해 벌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