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진출로 온 나라가 뜨겁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응원했습니다. 브라질전이 열리는 새벽 4시에도 붉은악마는 거리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 3도일 것이라는 기상 예보도 거리 응원의 열정은 막지 못했습니다. 거리 응원을 새삼 낯설게 만들었던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위 캡처는 조별 리그가 진행되던 11월 말에 거리 응원에 관한 기사에 달린 일부 댓글입니다. 군중 응원에 대한 걱정과 경계심이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는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생긴 것뿐만 아니라 ‘밀집’ 자체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합니다.
트라우마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고뿐만 아니라 사고가 난 장소와 배경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사고가 나면 학교를, 물에서 사고가 나면 물을 꺼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를 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도 비슷한 ‘대리 외상’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고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트라우마는 사고와 관계된 것들을 두렵게 만듦으로써 일상에서 유리시킵니다. 일상의 일부 혹은 전체가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트라우마는 일상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꼭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입니다.
이태원 참사가 일상에서 유리시키고 있는 것은 ‘밀집’입니다. ‘밀집’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정쟁에 대한 거부감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차치합니다.) 다시는 밀집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사람이 많아 밀집이 불가피한 한국, 특히 서울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댓글들도 그런 의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밀집을 마냥 불가피한 위험으로만 이해해도 좋을까요. 밀집은 불가피할 때가 아니면 쳐다도 보면 안되는 지뢰밭과 같을까요, 아니면 조심하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요리칼과 같을까요.
밀집은 입체적인 현상입니다. 도시의 불가피한 위험이기도 하지만 흥겹고 즐거운 행사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월드컵 응원, 콘서트 감상, 꽃놀이, 축제 참가 등이 그렇습니다.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하기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보입니다. 2022년 11월 26일, CBS에서 연 토크콘서트 〈마음을 연결하다〉에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출연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나 참여하려고 나온 세대들이나, 아무도 잘못한 게 없다”라며 “내년에도 다시 여기(이태원)에 와서 원래대로 나의 일상대로 즐겨야겠다”라고 했습니다. 뉴스로 소식이 전해지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사고 나도 당신 책임’ ‘남 탓 말라’라는 말이 보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 하지 마라’와 일맥상통합니다. 참사를 통해 밀집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게 명확해진 지금, 출퇴근길의 혼잡이 아닌 ‘없어도 되는 밀집’을 좋게 볼 수 없고, 사고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났던 바로 그곳에 간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도, 간접적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인식도 보입니다.
물론 현장에 직접 걸어간 것은 개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책임’이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건 죽을 각오를 하고 간 사람은 없기 때문, 죽을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치거나 죽어도 밀집 장소에 간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할 때, 밀집 장소에 가는 행위는 제 발로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몰상식한 행동으로 포장됩니다. ‘밀집 장소’는 일상에서 악마화되고 밀집 장소를 찾는 일은 ‘죽을지도 모를 데로 가는 일’로 죄악시됩니다. ‘안전하게 모여 놀자’가 아니라 ‘모여서 놀지 말자’만 남게 됩니다.
모이지 않는 것도 사고를 막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 안전 대책을 세우기보다 모여 노는 행사 자체를 금기시하는 건 사회적 유희를 크게 잘라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더 큰 문제는 트라우마 치유가 설 자리를 잃고 질책과 분노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일상은 회복되지 못하고 트라우마는 방치됩니다. 노조의 대규모 집회나 파업으로 인한 지하철 과밀에 관해 문제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논의보다 ‘사람이 죽으면 너희 책임’이라는 분노를 더 찾기 쉬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은 일상 회복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요리칼에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요리칼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A’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더라도 다시 ‘A’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삶에서 ‘A’를 지우든 말든 그 선택권은 당사자에게 주고, ‘A 없는 삶’만을 남기면 안된다는 데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개인 책임’을 이야기하며 트라우마를 덧나게 하는 사회, 어쩌면 그 집단적 분노야말로 외면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사회적 트라우마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에 관해서도 밀집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수그러드는 듯합니다. 밀집 트라우마에 관한 다소간의 치유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10월은 오고 이태원은 같은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을 잘라내기보다는 안전 대책을 갖추면서 트라우마를 정성껏 치유하고, 미래의 핼러윈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코멘트
4놀러가는게 죽음을 각오해야 할 죄라면 그 사회는 뭔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사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밀집되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은 국가적 차원에서 안전을 위해 예상하고 대비하고 관리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10.29 이태원 참사에도 불구하고 2023년 핼러윈데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태원에 핼러윈 파티를 즐기러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안전사회로 가는 방향일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참사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밀집 행사를 해야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 중요한건 '안전'이지 '금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이 글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개인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겠지만, 사회적 트라우마는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하나둘 씩 금기되는 것보다는 더 솔직하게 열어놓고 회복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번 참사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이 "걷다가", 혹은 "즐기다가" 난데없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싸우려고 나선 자리도 아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곳에 간 것도 아니고 단지 "즐기기 위한", "당연한 삶의" 자리에서 생명을 잃게 하다니, 저는 그래서 정부의 책임이 더 무겁고. 시민은 "당연한 삶의 공간"을 안전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민들에겐 더 "놀 공간"이 "안전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이태원이란 공간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함께 즐길 당연한 권리를 안전하게 누릴 수 있음을 시민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대책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전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권리"를 위협받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화를 내어야 합니다. 이런 측면을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그런데 정말 우리가 어쩌다가 함께 모여 놀 권리마저도 위협받고 쟁취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을까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
"트라우마를 정성껏 치유하고, 미래의 핼러윈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