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이태원과 세월호, 같은가 다른가?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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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 오지랖 넓은 사회연구자

이태원을 세월호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에서 언제나 소수의견으로 살아온 입장에서 보자면 참 이상한 용법이다. 이태원과 세월호를 의미화하는 게 각기 다르니 언어에 어긋남이 발생한다.

가령 이태원을 세월호로 만들지 말라는 사람들은 ‘세월호’를 정쟁화되고 불순해진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민주당의 정권교체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와 그 운동이 가진 모습의 아주 협소한 부분만을 과잉대표하게 만든다. 대책위 내부에서도 이와 관련한 긴장과 논쟁이 존재했고, 유가족들도 운동이 도구화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태원 참사를 아직 덜 오염된 비정치적인 사안으로 본다는 점에서도 참사의 의미를 협소하게 고정하려 한다.

그 반대편에서 이태원과 세월호가 단순하게 동일하다고 하는 이들은 일종의 거울상에 해당한다. 정권퇴진 및 교체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두 참사의 의미를 정권의 문제로 아주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이며, 유가족이나 참사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여러 얼굴을 주변화한다. 이는 보통 참사를 과도하게 ‘정치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권교체의 의미만을 부여한 채 다른 모든 정치적 의미를 제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냉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참사를 탈정치화한다.


이태원 사고 현장 찾은 4·16 가족들
이태원 사고 현장 찾은 4·16 가족들(출처는 사진 클릭)


나는 이태원과 세월호는 각론에서 다르지만 총론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세월호 참사와는 다르다. 하지만 같기도 한데, 진영론의 정치 사이에 갇혀 있다는 점이 첫 번째 공통점이다.

나는 여기서 연역주의적 사고를 본다. 말하자면 다들 이미 ‘정답’이 있어서 그 정답을 적용하는 것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지적으로 게으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런 연역주의적 사고는 정답을 강요함으로써 ‘질문’을 봉쇄한다. 모든 새로운 사안은 새롭기에 질문을 요한다. 과거의 사안과 완전하게 동일한 새로운 사안이란 건 없다. 다만 참조할 수 있을 뿐, 황망한 참사에 응답하는 태도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박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익숙한 세계에 갇혀 있었기에 우리는 참사를 막지 못한 것이므로.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사고다. 정치의 의미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어 그들이 지배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에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참사의 의미가 정권교체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 혹은 참사의 의미가 정권교체 투쟁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는 것, 둘 모두 정권교체의 문제로 참사의 의미를 고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참사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탈정치화의 정치를 깨부수는 질문이야말로 더욱 정치적인 것이다.

나는 ‘국가’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의 문제에 대한 ‘집단기억’이라는 점에서 세월호와 이태원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본다. 우선 국가는 다시 한 번 ‘배신’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국가와 정부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리 혹은 재현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국가인 것은 아니다. 보수진영이 ‘참사를 못 막은 건 문재인 정권 때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라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 놓았는데, 윤석열 정부의 직접적 책임을 전제한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궤변은 옳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서 시스템 부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부가 오더라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참사’에서 문제인 정부는 유능했지만 어떤 경우엔 무책임하고 무능했다. 나는 여성과 노동자가 겪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한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더군다나 집단기억의 문제가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십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여러 참사들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장면이나 원인이 겹쳐지기도 하니, 보수진영이 세월호와 이태원을 다르다고 윽박지르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두 참사를 부각하면서 다른 약자들의 죽음에는 무관심한 민주진영에게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죽음들을 간에 위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사회적 죽음들이 각각의 성격과 맥락을 간직하면서도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국가의 구조적 배신이 그것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사이에, 2016년 5월에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사람이 죽었고 2022년 9월과 10월에 신당역과 평택SPL 공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외에도 즐비한 죽음들은 모두가 다 참사이며, 서로 다르지만 동등하게 중요한 것들이다. 하물며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코로나19의 상처가 이태원 참사를 짓누르고 있다.

나는 참사의 의미를 좁게 규정하려 하는 모든 담론들에 반대한다. 참사는 그런 의미에서 (명단 공개에 찬동한 사람들의 폭력적 언어를 빌리자면) ‘공공재’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질문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공동의 경험이자 지적 자원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이태원 참사는 ‘퀴어들의 참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 시기의 이슈화된 혹은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죽음들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원과 세월호의 관계에 대한 진영론적인 말들은 다 거짓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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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구독자 48명

저 같은 경우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삶의 관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태원 참사를 겪고 착각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더 조직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력이 많아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때문에 본문 작가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계속 질문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정부가 오더라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는 말에서 공감이 되네요. 결국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니까요.

'죽음의 위계'라는 표현에 공감합니다. 각 진영은 사회적인 죽음을 어떻게든 도구화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양 진영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이고, 국민들도 양 진영에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관하여 살펴보고 따져봐야 할 것도, 이야기나눠야 할 것도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의 진영론적인 단정의 접근들이 우려되고 걱정됩니다.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를 연장선상에서 사유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진영론적인 단정의 틀안에 갇혀버리게 되면 그 또한 끔찍한 일일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