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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만 보면 화나는 사람 모여라!
 📰 여러분은 하루에 몇 가지 뉴스를 접하나요? 신문과 방송 위주로 뉴스가 생산되던 시절과 달리 포털사이트, SNS, 유튜브, 뉴스레터까지… 오늘날 뉴스를 접하는 경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어요. 😵‍💫 쏟아지는 뉴스에 피로감을 느낄 법도 하죠.  😨 그런가하면,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는 언론의 태도에 화가 날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의혹은 '조그마한 파우치'로 포장한다던가요. 언론 또한 정파성, 편파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에 시민의 실망이 커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공정하고, 있는 그대로 보도할 '책임'이 있는 언론. 하지만 이런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볼 때, 우리는 왜곡되거나 편파적인 뉴스를 접하게 되죠. 나에게 필요한 뉴스, 내가 원하는 공정한 뉴스를 판별하는 능력이 어느때보다 중요합니다. 흔히 이런 능력을 "미디어리터러시"라고 부르곤 합니다. 🧐 미디어 리터러시란? 다양한 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에 접근하여 메시지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미디어 리터러시는 단순히 어떠한 기술의 습득이 아니며, 미디어 산업 혹은 일반적 미디어 내용의 패턴, 매체 효과와 관련된 지식구조의 습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지만 미디어리터러시 언제,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미디어 다변화 시대, 시민에게 필요한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기 위한 방법, 댓글로 함께 고민해주세요 🍀  🔻이런 행사도 있어요! ⭐️ 참여신청 👉 https://forms.gle/V6EZ9LQXcp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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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무지개도 비가 그쳐야 뜬다🌈
폴라리스 항해도 vol. 120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오늘은 캐릭터 이야기로 레터를 열어볼게요. 혹시 ‘감자도리’를 기억하시나요? "도리도리도리도리 감자도리 / 빨간 망토 작은 눈에 감자도리 / 고구마가 되고 싶어 꿈을 꾼다 / 모험을 떠난다!" 멜로디를 흥얼거리셨다면 반갑습니다. 저와 동년배이실 것 같네요. 감자도리는 고구마가 되고 싶은 감자예요. 자라면서 자신이 주변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죠. 가족, 친구, 선생님, 심지어 마트 종업원까지 모두 고구마인 세상에서 자신만 감자라는 사실은 그를 외롭게 합니다. 그래서 감자도리는 고구마가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요.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갈망,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이죠.  한국에도 정체성을 이유로 소외를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퀴어는 한국 주류 사회로부터 마치 감자도리처럼 여겨져요. 이성애, 성별 일치감이 당연한 세상에서 성적 지향,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립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퀴어의 분투가 점차 사회적 목소리로 확산하면서 긍정적인 변화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최근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퀴어 의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판결>,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교실>, <2024년 미디어 콘텐츠 속 퀴어>를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퀴어를 미루는 정치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해 볼게요. 감자로 태어난 사람이 고구마가 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면서요. 질문으로 꽉 찬 레터를 보낼 때면 독자님 의견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댓글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中 - #1 법정에서 삶과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퀴어 끝이 보이지 않는 폭염을 뚫고 비가 온 7월 어느 날, “사랑이 또 이겼습니다.” 동성부부의 사회보장제도상 권리를 인정한 첫 대법원판결이었습니다. 2019년, 동성부부이자 실질적 혼인 관계인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는 “인정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김용민 씨는 소성욱 씨를 피부양자로 등록했습니다. 공단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 배우자에 대해서도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얼마 지나고 등록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담당 건강보험공단 직원은 ‘착오 처리’였다고 설명하며 소성욱 씨의 피부양자 자격을 상실시켰습니다.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착오’가 만든 8개월간의 피부양자 자격은 없는 셈이 됐습니다. 담당 직원은 소성욱 씨가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였음을 전제로 8개월분의 건강보험료 등 합계 115,560원을 납입할 것을 고지했습니다. 소성욱 씨는 위 처분에 2021년 2월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소 씨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사실혼 배우자 집단과 동성 결합 상대방 집단은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결과는 원고 승소였습니다. 그러나 공단의 상고로 판단은 다시 대법원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올해 7월 18일, 대법원장은 “동성 동반자를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평등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며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 보험가입자가 납부하는 보험료와 국고 지원을 재원으로 하여, 국민에게 발생하는 질병ᆞ부상 등 사회적 위험을 보험의 방식으로 대처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과 소득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로서 국가가 헌법상 국민의 보건에 관한 보호의무를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한 사회보장의 일환이다. 이는 국가공동체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한다. *피부양자제도: 건강보험제도의 취지에 따른 것으로서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 스스로 보험료를 납부할 수 없더라도 직장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에 기반하여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이다. 이번 대법원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명시적으로 성소수자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사실상 혼인 관계의 집단과 동성 동반자 집단을 달리 취급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이번 판결은 공단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한 것을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고 보았고, 이는 헌법상 평등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되어 왔는데요. 이번 판결은 동성 동반자의 사실혼을 인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아래는 판결문 발췌입니다. “동성 동반자를 직장가입자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 그가 지역가입자로서 입게 되는 보험료 납부로 인한 경제적인 불이익을 차치하고서라도, 함께 생활하고 서로 부양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통적인 가족법제가 아닌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에서조차도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  박한희 공익변호사는 위 판결문의 구절이 문제의 본질을 짚어낸다고 설명합니다. 즉, 대법원은 피부양자 자격 불인정이 경제적 손실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침해’라고 판결했기 때문이죠. 애당초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소성욱 씨가 월 소액을 부담하면 지역가입자로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굳이 소송함으로써 얻을 이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했던 동성부부에게 실질적, 금전적 손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법적 잣대로 자신들의 삶이 지워지고 재단당하는 경험, 즉 ‘존재가치의 침해’가 이들 부부에게 더 큰 손실이었습니다. 다만, 이번 대법원의 결정에 기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판결의 보충의견은 법원이 “미래의 일을 앞당겨 현재의 법으로 선언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입법부의 역할이 도드라지는 대목입니다. 대법관들은 “후속 판결과 입법을 통하여 동성 동반자들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더욱 포괄적이고 명확한 법리나 제도가 축적되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지는 글들은 정치권과 사회의 역할을 살펴봅니다. 🧭글 보러 가기 #2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라고요? 퀴어 문제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선무라 했던가요? 누군가에겐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퀴어 청소년의 경우 더욱 위태로운 생사의 비탈길에 서 있습니다. 청소년 퀴어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하듯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퀴어를 부정하는 학교와 가정의 반응 때문이죠. 청소년성소수자지원센터 띵동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걱정한 이유로 '가족, 친구의 부정적 반응'을 꼽은 응답자 비율이 평균 80%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는 대구MBC의 ‘들어보니’는 기댈 곳 없는 청소년 퀴어의 현실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우선 성 정체성에 관련된 고민을 교사에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환경입니다. 교사를 대상으로 한 퀴어 관련 교육이 부족하다 보니, 퀴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교사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학교 밖 청소년 상담 기관도 좋은 선택지가 못 됩니다. 실제로 상담 기관을 이용해 본 청소년 퀴어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나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다시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올해 4월 폐지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학교의 퀴어들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했으니까요. 학생인권조례마저 사라진 학교에서 청소년 퀴어의 존재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학생인권조례는 특정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주류적 경향과 다른 성적지향을 가진 개인, 그리고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들 또한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의 동등한 주체라는 점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도록 교육하려는 것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맨 처음 시행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한 지역에서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의 숫자가 급증했다는 자료가 있지도 않습니다. - 학생인권조례, 오해 넘어 이해로, 국가인권위원회(2023) 존재의 부정은 제도권이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 밖으로 내몰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청소년 퀴어는 자살 위험군이지만, 이들만을 위한 국가의 자살 예방 대책은 전무합니다. 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019년 7월 도입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는 성소수자 괴롭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실태조사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실시한 실태 조사가 전무한 탓에 퀴어가 얼마나 있는지, 퀴어가 겪는 차별은 무엇이며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논의를 시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퀴어가 없는 존재가 되는 건 현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가상의 세상을 그리는 미디어에서도 퀴어의 존재는 부정당하곤 합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글 보러 가기 #3 원작 속 퀴어 캐릭터, 드라마에선 사라졌다고? 대중문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했던가요.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정년이>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퀴어가 지워지거나, 납작하게 재현됐습니다. 두 작품 원작은 모두 작중 캐릭터의 퀴어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워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죠. 웹툰 <정년이>는 여성 국극단 속 여성들의 경쟁, 연대, 사랑을 다뤘는데요.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주인공 정년이와 연인 관계였던 캐릭터 ‘부용’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속 인물 ‘흥수’는 게이지만, 영화 예고편에서는 마치 여자 주인공의 연인처럼 비쳤고요. 이처럼 퀴어 서사는 상업성과 맞물리며 종종 삭제되거나 감춰지곤 합니다. ‘도둑맞은 퀴어’라는 칼럼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만큼이나 퀴어 서사를 이성애 서사, 혹은 퀴어가 등장하는지 알 수 없는 서사로 둔갑시키는 행태를 지적할 만한 ‘헤테로(heterosexual, 이성애)베이팅’ 같은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이죠. 먼저 ‘퀴어베이팅(Queer-baiting)’이라는 용어에서 ‘베이팅(baiting)’은 미끼를 의미합니다. 본편에 퀴어 서사가 등장할 것처럼 편집한 예고편은 퀴어베이팅의 대표적인 예시예요. 퀴어 팬덤의 구매력을 노리고 퀴어 친화적으로 편집한 예고편을 공개한 다음, 정작 본편에서는 예고편과 다른 서사를 보여주는 미디어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가 생겼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의 폭발적 증가, 퀴어 문학 팬을 만든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영화로 각색되면서 인물의 정체성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왜 캐릭터의 게이 정체성이 예고편에는 나올 수 없었는지 질문이 남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퀴어 서사는 단순히 삭제되는 것을 넘어 노골적인 혐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곧 공개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교회 단체로부터 ‘동성애 미화를 중단하라’는 반대에 부딪혔죠. 이에 박상영 작가는 “혐오의 민낯은 겪어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한편 퀴어 콘텐츠가 양적으로 많아졌고, 법적 권리를 위한 투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건 그만큼 퀴어 이슈가 중요한 사회적 갈등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퀴어 의제의 ‘속도’와 ‘방향’을 고민하며 변화를 만들어 나갈 때가 아닐까요? 대중문화에서는 퀴어가 그저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일상임을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논문이 있습니다. <한국 성소수자들의 넷플릭스 퀴어 콘텐츠 수용에 관한 탐색적 연구>입니다. 하단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논물을 정리한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37명의 성소수자에게 앞으로 보고 싶은 콘텐츠를 물었더니, 많은 이들이 ‘한국판 논스톱’ 같은 시트콤을 꼽았습니다. 그동안 퀴어는 주로 특수한 사랑이나 비일상적인 존재로만 재현되어 왔습니다. 가족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서로의 끔찍하고 귀여운 면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시트콤 속 인물들의 일상성은 지금껏 주류 미디어가 담아내지 않는 것이었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퀴어들도 이미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하고, 밥을 먹으며, 평범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 보러 가기 #4 퀴어에게 뒤로 가라는 정치, 이제는 뒤안길로 세상에서 가장 퀴어 프렌들리한 것은? 정답, 번호표 기계. 밀릴 일 없이 순번 정확하니까. 퀴어 인권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란 말이 지겹도록 따라붙습니다. 최근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대표의 입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더 급선무’라고 변주되기도 했습니다. 정치는 퀴어가 궁극적으로 차별받는 무대입니다. 번번이 다수 집단에 밀려 동등한 권리를 얻을 기회가 지연되곤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8년째 국회를 체류 중인 차별금지법이죠. 주된 원인은 종교계의 영향력이 꼽힙니다. 특히 많은 인구와 조직적인 행동력으로 한국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는 대대적으로 성소수자 차별을 주창합니다. 정치인들이 성소수자에 연대하다 이들의 항의를 받거나, 주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해 돌연 입장을 철회하는 사건은 비일비재합니다. 명확히 퀴어의 편에 서는 정치인이 부재하다 보니, 극우·보수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에서도 퀴어들은 배제됩니다. 퀴어 의제보다 우선해야 할 의제가 있다며 퀴어혐오 발언을 한 후보자나 정당에 눈물을 머금고 투표하도록 압박합니다. 선거 패배를 대의보다 개인을 우선한 퀴어들의 이기심으로 탓하는 경우들도 있죠. 퀴어를 차별하는 정치, 그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때도 된 것 같습니다. 정치철학자 박이대승 씨는 퀴어 차별의 원인을 종교계의 혐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절대다수의 무관심’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이 감각하지 못하는 타인의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무관심하고, 구조적 개선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기도 합니다. 시민을 길러내는 가장 기초 현장인 교육계부터 돌아봅시다. 최근 서울을 포함해 여러 지자체 학생인권조례가 잘못된 성 인식을 주입한다는 이유로 폐지되었습니다. 교육청에서 페미니즘, 성교육 등 다양성 도서를 유해 도서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조전혁 보수 진영 교육감 후보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교육을 폐지할 것’이며, 교원의 사상을 검열할 것임을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종교계, 정치인, 시민 모두가 퀴어에게 새치기를 했습니다. 결여된 민주 의식으로 성소수자의 권리를 뒤로했습니다. 그 결과는 성에 대한 그릇된 교육, 규정, 자유 탄압의 메시지가 사회를 잠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비단 성소수자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다른 소수자들의 운동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연대 대신 혐오와 소수의견 취급이 만연합니다. 퀴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차별에 동조했던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보고, 평등을 위한 행보에 함께할 때입니다. 🧭글 보러 가기 에디터가 남긴 편지 이번 레터를 준비하며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을 공유합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인 건강보험제도의 보호에서조차 공식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사회와 국가의 공인된 보호를 받을 존재가치를 부정 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퀴어는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가 따로 존재하는 분열의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강요당할 수 있다.” 저에게도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 따로 존재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이 ‘간극’을 떠올리니 1년 중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날은 과연 몇 일이나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손에 꼽는 ‘나다울 수 있는 날’을 묘사하면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요. 을지로 일대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행진하던 날, 울면서 춤추며 애도하던 날, 친구와 스탠딩코미디쇼를 관람하며 웃은 날, 바바라 해머 감독의 영화 속 관객의 모습에서 나를 본 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본 날.  위처럼 '예외적인 시간'과 사회와 불화하는 일상을 살다보면 모순적인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행정, 제도적 인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가령 판결문의 내용처럼 '숨겨진 나'가 제도적인 현실때문에 미래의 배우자를 부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래전부터 국가는 돌봄과 부양의 책임을 가족이라는 경제공동체에 맡겨왔고 '숨겨진 나'는 그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데, '드러내는 나'로 살면 최소 나라는 존재와 내가 맺는 관계를 국가에게 소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렇게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분노하길 반복하면, 퀴어를 비롯한 ‘국회 정치’에서 밀려난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최근엔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매주 화요일 국회 앞에서 사랑하는 자식이 “평등히 살길” 바라며 권리중심 지원체계를 요구하는 시위를 자주 봅니다.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돌봄과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야 하나' 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자고, 쉬고, 친밀함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상은 삶의 가장 필수적인 부분일테지요. 돌봄/부양 체계가 더 다양한 가족과 관계의 형태를 포함하길, 그리고 돌봄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회 제도적 돌봄을 차별없이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레터를 마칩니다.  2024.10.21 에디터 산호🐠 드림 만든 사람들: 해안🌊, 모래🏖️, 푸릇🌿, 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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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엄마 덕에 ‘가짜스펙’… 고려대, 입학취소 안했다 [교수 엄마와 가짜 고대생]
서울 서초동 회색빛 빌딩 숲. 그사이 빛바랜 외벽의 아파트 단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재건축” 관련 현수막이 걸려 있는 아파트 입구를 지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일터에 가 있을 평일 낮. 집에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예상과 다르게 집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누구세요?”“따님 이해린(가명) 씨가 사는 곳 맞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여성의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누구세요!?”“(이전에) 전화로 연락드렸던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김보경 기자입니다.” 기자라고 소개하자, 이번엔 여성의 대답이 달라졌다. “아닙니다!”“이수희(가명) 선생님 댁 아닌가요? 이수희 선생님이시죠? 잠깐만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아닙니다!” 애타게 불렀지만, 여성의 대답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17일 오후의 일이다. 기자가 집까지 찾아가 만나려 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만든 ‘가짜 스펙’으로 딸 이해린(가명)을 의사로 만들려 한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이수희(가명). 교수 엄마의 엇나간 모정(?) 이야기는 약 10년 전부터 시작한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은 2013년 7월 ‘제4회 국제청소년학술대회(ICY)’를 열었다. 9개국 청소년 500여 명이 참가하는 큰 규모의 대회였다. 당시 해린은 양재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해린은 고등학생 안서윤(가명)과 함께 팀을 꾸려 학술대회에 참여했다. 내로라하는 전국 각지의 우수 학생들이 모여도 해린은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결과물이 알아서 나오는 마법. 엄마 이수희 교수가 해린의 뒤를 ‘든든히’ 지켰다. 이 교수는 노골적으로 지시했다. 본인이 지도하던 병태생리학연구실 소속 대학원생들에게 ‘스트레스 비교 동물실험’ 최종보고서와 대회 발표용 PPT 자료를 만들라고. 사실상 대필이었다. 막상 해린과 서윤이 연구실에 방문한 횟수는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이수희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PPT 자료를 만들었다. 당시 또 다른 대학원생 B가 위 실험을 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원생들이 진행한 위 실험으로 이해린은 삼성 휴먼테크 논문대상(2012년 12월)에도 출전했었다.” (1심 판결문 중 대학원생 A 진술) 이 교수가 직접 나선 적도 있다. 딸 대신 연구일지를 작성했다. ‘친구’ 서윤의 엄마도 딸을 대신해 연구일지를 만드는 데 합심했다. 해린과 서윤은 직접 쓰지도 않은 최종보고서와 연구일지를 한국교육개발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우수청소년학자상’을 받았다. 대필 보고서를 제출한 고등학생들이 ‘우수청소년학자’로 불리다니. 고등학생 해린은 끝까지 대범했다. 대회 심사위원들도, 학교도 감쪽같이 속였다. 해린의 동아리를 담당하던 양재고 교사 C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해린이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스트레스와 호르몬 관련 실험을 한다고 찾아왔고, 해당 실험과 관련하여 그 어떠한 활동도 양재고에서는 전혀 진행된 바 없으며, 나중에 이해린이 최종 보고서를 갖고 와서 수정 의견 정도 준 적이 있었을 뿐이고, 이해린이 국제청소년학술대회에 참여하는지도 몰랐고, 해당 대회에 제출된 ‘연구일지’ 표지에 지도교사 C라고 수기로 기재되어 있으나 자신의 글씨도 아니다.” (양재고 영재과학동아리 담당교사 C, 수사기관 진술) ‘교수 엄마’와 그의 제자들은 대필 보고서와 연구일지를 합작했다. 심지어 학교 담당교사 서명까지 조작한 상황. ‘비장의 무기’는 대학 입시 때도 빛을 발했다. 이 교수는 ‘우수청소년학자상’ 내역을 포함해 해린의 자기소개서를 대신 작성했다. 그러곤 또 다시 대학원생 제자들을 소환했다. 이들에게 해린의 자기소개서를 수정·보완하게 지시했다. 이번에도 통했다. 해린은 2014학년도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과학인재특별전형에 최종 합격했다. 당시 고려대 안암캠퍼스 수시모집 전체 경쟁률은 22:1(정원내 기준)이었다. 그러나 고려대 입학은 이 교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의 더 큰 목표는 ‘의사 만들기’. 해린이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도, 제자들을 향한 이 교수의 ‘대필’ 지시는 이어졌다. 오히려 더 과감해졌다. 대학원생 제자들에게, 딸 대신 SCI(과학기술논문 인용 색인)급 연구논문을 쓰게 했다. 자기소개서도 마찬가지였다. 효과는 확실했다. 해린은 2018학년도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치전원) 수시모집에 합격했다. 하지만 해린의 ‘대필 인생’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한 대학원생의 제보로 교육부는 특별조사를 실시했다. 검찰은 2019년 5월 업무방해와 사기 혐의로 이 교수를 재판에 넘겼다. 딸 해린도 수사선상에 올랐다. 1심 재판 결과는 기소로부터 약 5년 만에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9단독(판사 김택형)는 올해 7월 18일 이 교수에게 징역 3년 6개월, 딸 이해린에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다만, 이 교수는 법정구속은 피했다. “피고인들의 입시비리 관련 범행은 해당 교육기관이 원하는 인재를 공정한 절차에 의하여 선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기관의 업무를 방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탈감과 실망을 야기하고, 우리 사회가 입시 관련 시스템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그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 (1심 판결 양형이유 중) 2019년 5월 이 교수는 구속기소됐다. 교육부는 그해 3월 이미 성균관대에 이 교수 중징계(파면)를 요구했고, 서울대 치전원도 그해 8월 딸 해린에 대해 입학취소를 결정했다. 이 교수가 구속기소된 때를 전후로 몇 달 사이, 모녀와 관련된 세 대학 중 두 곳은 발 빠르게 그들에 대한 조치를 단행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곳은 어떨까? 바로 해린이 ‘대필 보고서’를 활용한 가짜 스펙으로 입학에 성공한, 고려대 말이다. 셜록은 지난 8월 교육부 인재선발제도과에 질의했다. 이해린의 고려대 입학허가가 취소됐는지 물었다. “고등교육법 제34조의6에 따라 대학의 장은 해당 학교에 입학을 허가한 학생이 입학전형에 위조 또는 변조 등 거짓 자료를 제출하거나 다른 사람을 대리 응시하게 하는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정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그 입학의 허가를 취소하여야 합니다. 이에 고려대학교 학부생 입학허가 취소 절차 및 특정 학생의 입학허가 취소 여부는 해당 학교에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칙적으로 부정행위가 있을 경우 대학교에서 부정입학자의 입학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는 답변. 하지만 교육부가 그 결과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셜록은 이번엔 고려대에 문의했다. ▲학부생 이해린을 대상으로 한 고려대학교 입학취소처리심의위원회 구성 여부와 ▲이해린 입학허가 취소 여부에 대해 물었다. 고려대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해당자에 대한 입학허가 취소/미취소는 심의되지 않았습니다. 해당 사안은 법원의 최종 판단을 근거로 본교 학칙과 규정에 의거하여 처리할 예정입니다.” 고려대는 아직 ‘부정입학자’ 이해린의 입학허가를 취소하지 않았다. 다른 대학들이 이들 모녀에 대한 조치를 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1심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도. 셜록은 지난달 10일 이수희 전 교수의 반론을 듣고자 전화를 걸었다. 이 전 교수는 “기자”라는 소개에 “지금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달 18일 현재까지 11번에 걸쳐 전화를 걸었지만, 이 전 교수는 계속 받지 않았다. 기자는 다른 번호로도 이 전 교수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지난 15일 해린의 고려대 입학취소가 이뤄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입장을 문자메시지로 물었다. 하지만 이 전 교수는 전화와 문자메시지 모두 응답하지 않고 있다. 딸 이해린 측에도 접촉을 시도했다. 지난 16일 항소심 담당 법률대리인을 통해 인터뷰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해린의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에도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기사 서두에 이야기한 대로, 모녀의 주소지로 찾아갔을 때도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의 장본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특혜입학 문제로 이화여대 체육학과 입학이 취소됐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딸 조민도 입시 비리로 고려대와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됐다. 셜록이 지난 2022년 ‘유나와 예지 이야기’로 보도한 미성년 부당 저자 최지희(가명)도 고려대 입학이 취소됐다. 하지만 교수 엄마의 부당한 도움으로 고려대에 입학한 해린은 예외다.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엄연한 ‘고려대 졸업생’이다. 성실히 노력하며 공정하게 경쟁해온 모든 사람들을 조롱하고, 온 세상을 속여서 손에 넣은 ‘가짜 고대생’ 타이틀. ‘자유’, ‘정의’, ‘진리’를 표방한다는 고려대는 언제까지 그의 ‘불의한’ 인생을 두고 볼 건가. 한편, 해린과 함께 대필 보고서로 ‘우수청소년학자상’을 수상한 고등학생 안서윤은 어떻게 됐을까.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준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시정) 도움을 받았다. 안서윤은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다만 그는 정시전형으로 입학해, 문제의 수상 내역을 입학자료로 활용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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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 구축 모델 개발 -사회자본의 형성 및 확산 중심으로-
⚖️ 교육격차 = 소득격차 교육격차는 인지적 측면의 학업성취 격차와 정의적 차원의 성취발달 격차, 학교 간, 지역 간, 사회계층 간 격차, 표출지점에 따른 교육기회, 교육과정 수준, 교육결과의 격차 등 다양한 교육격차 유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 격차’의 개념은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이나 기회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학업 성취 결과의 차이 ’를 말합니다. 교육 격차의 개념을 단순히 가치중립적이고 현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교육 격차는 이념적, 사상적, 상징적 관점에서의 교육 불평등일 것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성행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이 교육의 격차로 인해 무기력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말도 안 되게 비싼 사교육비라고 합니다. 내 아이는 남들만큼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아이에게 미안할 바에 안 낳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소득에 따른 교육 격차는 아이들의 등급을 결정지으며 대학을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만연하는 학벌주의로 암묵적으로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회를 결정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득 격차가 곧 교육 격차를 만드는 자본주의의 특성과 경쟁 사회에서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개인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 격차는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협력'을 중심으로 교육 자원의 인프라 구축 및 공동체 형성을 통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문제해결 관점 :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인적자본투자 관점에 따르면 인적자본은 주로 후천적으로 학습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이에 대한 투자의 형태는 학교교육에 대한 투자가 대표적입니다. 한국의 상황에서 본다면 사교육의 투자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는 교육수준을 높이고, 그 결과 개인의 소득 및 경제성장의 원천을 이끄는 데 이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Becker & Tomes, 1986)고 말합니다.(박주호, 백종면, 2019) 이는’ 부모의 소득격차가 아이의 교육격차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반면, ‘사회자본’이 이러한 교육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 지역 사회와 연결될 때, 그 지역 사회의 공고한 유대망이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Coleman은 사회자본이 준법질서 그리고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회자본의 개념과 의도는 경쟁적 교육환경으로 인해 붕괴된 교육공동체의 회복과 계층 간 학력격차 축소를 통해 불평등의 재생산을 완화하는 데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을 자극하였습니다.(전현곤, 2011) ‘사회자본’은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는 관계 자원(relational resources facilitating social cooperation)으로, 생산적인 사회적 관계망(productive social network)을 형성합니다. 이는 개별 행위자나 생산 수단에 국한되지 않고, 특정 사회 구조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신뢰, 정보 채널, 규범 형태로 존재합니다. 사회자본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자본의 특성] 신뢰 구축: 사회적 자본은 지역 사회 내에서 신뢰를 형성하여 학생, 학부모, 교사 간의 협력을 촉진합니다. 신뢰는 정보 공유와 자원 배분을 원활하게 하여 교육 환경을 개선합니다. 자원 접근성 향상: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는 교육 관련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높입니다. 학습 지원, 멘토링 프로그램, 정보 제공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돕습니다. 공동체 참여 증진: 사회적 자본은 주민들이 교육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합니다. 커뮤니티의 참여가 활성화되면, 교육적 요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경험이 쌓입니다. 정서적 지원 제공: 사회적 자본은 학생들에게 정서적 지원을 제공합니다. 서로 연결된 관계망은 학생들이 힘든 상황을 겪을 때 필요한 지지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정책 개선 기여: 사회적 자본이 발달한 지역 사회는 교육 정책에 대한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협력 증진으로 이어져, 교육 지원 프로그램의 질과 효율성을 높입니다.  사회자본이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저소득 계층의 사회자본을 풍부하게 할 전략적 방안들이 도출되어야 합니다. 이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어야 하며, 학업성취에 미치는 가정의 경제적 힘이 최소화될 수 있는 구조적, 정책적 전략이어야 합니다(전현곤, 2011).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교육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인프라 구조 설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자본의 인프라 구조 설계 방법] 커뮤니티 기반 협력 네트워크 구축: 교육 자원과 지원을 공유하는 플랫폼을 개발하여 학생, 학부모, 교육 기관 간의 연결을 강화합니다. 공동체 참여 유도 프로그램 개발: 정기적인 워크숍이나 포럼을 통해 주민들이 교육 문제 해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정부민간 협력 강화: 교육 정책에 지역 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교육 지원 프로그램과 인턴십 기회를 제공합니다. 기술 활용한 해결책: 디지털 플랫폼과 온라인 도구를 통해 교육 자원과 정보 접근성을 높이며, 개인 맞춤형 학습 환경을 조성합니다.  저는 교육격차에서 사회자본의 중요성을 명확히 하고, 이러한 인프라 구조 설계 방법을 적용하여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문제해결방안: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 구축 모델 개발’을 통해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거버넌스(Governance)의 개념은 여러 범주에서 적용되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거버넌스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이후 세계화, 정보화, 분권화가 증대되면서 거듭된 정부 실패와 통치능력에 대해 시민, 기업 등 민간부문의 도전을 직면하면서 대안적인 국정운영방식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신현석,정양순, 윤기현, 2018).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는 국가중심성이 많이 작용하는 계층제 거버넌스와 달리 사회중심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각 행위 주체 참여와 파트너십을 토대로 한 의사소통과 네트워크 조정을 강조하여 상호협력을 통해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신현석, 2018).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구조입니다. 정부, 교육 기관, 지역 사회, 기업 등이 참여하여 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자원 배분과 협력을 증진하는 효과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현재 국내외에서 교육과정 개편 중심의 교육개혁을 위한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들이 시행되고 있지만 이는 10년 이상의 지속적인 변화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협력적 거버넌스의 쟁점 및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협력적 거버넌스의 쟁점 및 문제점] 이해관계자의 조화 및 신뢰성: 다양한 이해관계자(정부, 민간, 시민사회 등)가 참여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목표와 이해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한과 책임 분배: 협력적 거버넌스에서 각 참여자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가 어떤 역할을 맡고, 그 결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자원 배분의 공정성: 교육 자원이나 지원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을 경우, 특정 그룹이 과도한 이익을 얻거나 소외될 위험이 있습니다.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지속 가능성: 협력적 거버넌스의 효과가 일시적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참여자 간의 신뢰를 유지하고, 협력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과정에서 정책 결정의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도 큰 쟁점입니다. 불투명한 결정 과정은 참여자 간의 불신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과 측정의 어려움: 협력적 거버넌스의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과 방법이 필요합니다. 명확한 성과 지표가 없으면 협력의 효과를 평가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쟁점들은 협력적 거버넌스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며 이를 보완하고 사회자본의 형성 및 확산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 구축 모델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이 연구 주제를 통해 교육 격차를 해소하고 모든 개인이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합니다. (큰 틀에서 연구 주제를 잡았으나,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의 구축 원리 및 사례들을 분석하고, 사회자본과 거버넌스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방안이 좀 더 세부적으로 첨예화되거나 방향성과 방법론이 조금은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전현곤(2011), 교육학에서의 사회자본 논의에 대한 비판적 탐색: 가정의 사회적 자본을 중심으로, 한국교육학연구 제17권 제3호 박경호(2018), 교육격차의 이해를 통한 개선방향 탐색, 교육비평 Vol.-No.41 신현석,정양순, 윤기현(2018), 국가 교육과정 정책에서의 협력적 거버넌스 적용: 쟁점과 과제, 교육행정학연구, 제36권 제2호 박주호, 백종면(2019), 교육격차 실증연구의 체계적 분석, 한국교육문제연구 제37권 제1호, 21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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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참사를 되돌아보는 한 사람의 이야기
Intro.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그들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참사와 분리되어 자연스러운 망각의 흐름 속에서 그 날을 잊어갔던 것이 최근 나의 모습이었다. 참사가 큰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성적 판단으로 알 수는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의 진심으로 알지는 못하였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참사에 대한 이미지와 감정이 내면에 뿌리내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태원 참사 관련 다큐를 찾아서 시청하였고, 이태원특별법 관련 입안 자료들을 프린트하여 읽어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무작정 2일간 “참사” 키워드에 관련된 장소를 다녀왔다. 평소 관심이 있던 삼풍 백화점 참사, 세월호 참사 관련하여 추모장소를 방문하였다. 이태원 참사 관련 장소는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체력의 한계 때문에...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참사의 당사자들만큼 사건에 대하여 깊은 진심으로 말하기에 부족하겠으나 알량한 마음으로 느낀 바에 대하여 글을 써내려본다. 마음 한 켠의 무심함을 반성하며 사람들 곁으로 나아가는 여정으로 봐주면 좋겠다. 첫 여정,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 첫 방문 장소는 93년 삼풍 백화점 참사 위령탑이다. 양재시민의숲으로 들어가 다양한 위령탑을 지나 깊숙이 자리한 삼풍 참사 위령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탑 뒤로는 유가족들이 놓은 꽃들이 있었고, 주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읽었다. 참고로 위령탑은 실제 참사 장소와 멀리 떨어져 있다. 참사 장소는 현재 아크로비스타라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당시의 현장을 경험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참사를 대하는 방식이 많이 부족하였다고 생각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참사를 대하는 자세는 이때보다 많이 발전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둘 여정, 단원고 4.16 기억교실 단원고 4.16 기억교실의 모습이다. 교실에 붙여진 대학교 진학 포스터가 마치 고등학교 학창시절로 시계를 돌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참고로 글을 쓰는 본인은 97년생으로, 학년은 차이가 나지만 참사의 희생자들과 동갑내기이다. 단원고 416 기억교실은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의 교실을 기술적으로 최대한 보존하여 옮겨둔 것이었는데, 책상 위 추모의 글들을 하나씩 읽어보며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왼쪽 손목에 차고 다니는 세월호 팔찌에 새겨진 REMEMBER, 기억해야 한다는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서 존재하였을까.  학생들을 추모하며 사람들이 적어둔 글을 읽어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누구든 죽음 앞에 서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죽은 자들의 몫일진데, 그렇다면 우리들은 산 자들의 세계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마주한다.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 본 ‘기억하고 기록하고 행동하라’는 문구를 곱씹어본다. 어떻게 하면 망각해가고 무심해져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셋 여정, 다시 그날로. 2022년 10월 29일의 나는 캠핑장에 있었다. 교회 형, 누나들과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 담소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가을 사진도 찍고, 분위기도 즐기며 말이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서 교회 형이 “어제 밤에 이태원에서 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는 말로 운을 떼었던 것이 처음 참사에 대한 인지였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뉴스 댓글에 있던 링크를 통해 모자이크되지 않았던 원본 동영상을 접하며 숨막힘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교회로 돌아가 예배를 드렸고, 하루가 저물었다. 그해 11월 이태원을 방문하였고, 다음 해 9월 즈음 이태원을 방문하였다. 무슨 마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2024년 10월의 나를 생각해본다. 요즘의 나는 무심했던 것 같다. 간간히 관련 뉴스를 접하며 알량하게 분노하고 지켜보는 사람이었을 뿐, 실상은 굉장히 무심했던 것 같다.  마무리하며 이태원 참사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 마음이 많이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망각의 커브를 자연스레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와 동년배, 혹은 같은 나잇대에 속하는 이들이 죽었음에도... 나는 무심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고 관심 있었다는 듯이 글을 쓰는 것이 죽은 이들을 기만하는 일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한 마음이다. 참사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여정을 통하여 다양한 질문들을 해보았다. 우리가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디쯤 와 있을지, 산 자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당장 답을 내리지 못할 것들일지라도 질문을 던져본다. 앞으로의 삶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추모의 방식이 될 것 같다. 그 이후에야 무심했던 나의 마음 한켠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삶과 별개로, 이 사회가 참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알찬 답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p.s. 최근 뉴스를 통해, 이태원 참사 최고 책임자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떳떳한 답일까 곱씹어본다. 양심적인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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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10/17) 후기 with 고통 구경하는 사회
*후기를 작성하다가 제게 많은 영향을 준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김인정 저, 웨일북,2023)가 생각났습니다.  이 책을 토대로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 후기와 언론의 역할과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되짚는 방향으로 후기를 맺고자 합니다. 모두에게 초면인 고통 10.29 이태원 참사(이하 ‘이태원 참사’)는 인재였다. 복합적인 요인이 엮였다. 경찰의 통제가 미미했고, 희생자 중 외국인들도 있어 외교 문제도 얽혀있다. 하지만 책임자의 부재, 미흡한 대처로 인한 참사의 확대는 책임자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그러나 이 곳에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참사 당일까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코로나를 제외한 시기에 으레 이태원은 할로윈 행사로 북적거렸으며 더러는 민페와 부정적인 시선을 지닌 채 기피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의 ‘상민’ 님이 발제를 했을 때, 저마다의 기억하는 이태원의 모습은 달랐음을 보았다. 이주민의 입장에서  상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가가 기억하는 이태원은 너무 달랐다. 포용과 환대의 공간(이주민) 할로윈 주만 되면 길거리에 고주망태되는 이들과 버려지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애증의 공간(상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날 한 시에 참사가 빚어졌다. 더러는 이태원에 간 이들에게 손찌검했다. ‘놀다 죽은 이들’ 이라며 죽은 이들을 쉽게 조롱했다.  이태원 희생자들을 두고 ‘놀다 죽은 이들’, ‘민폐’ 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 혐오 장치가 강화된 이유를 최성용 사회연구자의 발제에서 알 수 있었다. 자의적 기준으로 희생자들을 푸코의 이론을 빌려 죽게 내버려두었다. 국가 및 행정기관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축소시켰다. 이태원이라는 평소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 단어에 풍속이라는 자의적 기준으로 이들을 ‘놀다 죽었다’ 로 타자화 했다. 놀다 죽었건, 혹은 그러지 않았건. 이미 비극은 일어났다.  2023년 기준 1㎢당 15,533명(출처:지표누리) 의 빽빽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서울은 어딜가더라도 사람에 둘러싸여 피로하지 않던가. 특히 행사가 몰리는 연말이나 할로윈같은 특별한 날엔 타지역에서 서울로 인파가 몰려 그 밀도는 배가 될 것임을 모를 이는 없을 터.  10만 명 인파가 몰릴 것도 예측했지만 참사 당일 경찰 배치 및 인력도 137명에 그쳤다. 경찰이나 용산시는 충분히 인원 예측을 했고 그에 따른 인력 배치와 전략도 예상 했다. 그런데 결과는? 대응에 실패했다. 사전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왜 2022년에 참사가 빚어졌느냐는 의문이다. 이태원이 유흥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어도 해마다 이태원 할로윈 행사를 열었고 죽어서 돌아간 이는 없었다. 그런데 2022년 10월 29일 저녁,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왜? (심지어 희생자들 중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집계되지 못한 분들도 계신다) 개인은 무얼 할 수 있나요? 뚜렷한 답은 없지만 죄책감에 매몰되어선 안된다. 29쪽 저널리즘은 목격 자체를 전달한다. 사진과 영상은 때로 너무나 직접적이라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을 목격자의 자리로 끌어온다.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그에 따른 죄의식이나 부채 의식, 때론 지켜보는 우리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면죄부 역시 함께 전달하거나 위임한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참사 당일 언론 보도는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들도 이 상황은 초면이어서 그랬던 걸까. 언론사는 SNS에 올라온 참사 사진과 영상은 2차 가해와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어 올리는 것을 지양했다. 그게 옳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희생자를 영상과 사진을 통해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맞물리며 보도 윤리를 고민하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참사 이후, 정부의 소극적인 대책에 사람들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라고 했을 때다. 증거가 없어 진상규명이 어려웠고 정부를 설득할 힘을 잃고 견제할 수도 없었다. 이를 두고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을 다룬 뉴스타파 홍주환 기자는 ‘공공의 목적 달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로나 애도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고 말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보도한 것이 과연 모두를 위할 수 있나, 불가능한 영역 아닐까. 보도 윤리라는 모호한 정의에 보도는 축소되고 진상규명 역시 어려웠다. 특별법과 진상규명을 유족들이 원하지만, 정부를 압박할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연례 행사처럼 추모하고 기억하자고 말하지만 자칫 막연한 감정에 그쳐버릴 수 있다. 그 사이에 놓인 개인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위 책 37쪽) 던 존 버거의 말을 상기한다. 참사 앞에서 ‘무얼 할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꺼냈어도 뚜렷한 답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개인의 경험 테두리 안에서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1.본질을 잊어버린 보도 15쪽 머뭇거림으로 가득 찬 취재였지만 ,일단 인터뷰와 화면을 확보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다급했다. 모든 주요 방송사가 관련 뉴스 특보를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엇을 가릴지에 대해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앞다투어 보도하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었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조선희 저널리즘 연구 활동가는 뉴스 제작의 문제적 관행을 지적한다. [속보], [단독] 이라는 타이틀 경쟁으로 현장의 사실과 핵심 사실보다 누구보다 빠르게 또 정부의 발표에 기댔으니까. 문제는 비극이 언론에서 드러날 때마다 알아야할 것들이 많아진다. 혹은 언론사는 다르지만 타이틀과 내용이 똑같은 기사를 읽으며 피로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나도 이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라기 보다 쟁정에 휩쓸린 피로감이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기억할 게 많아 기억하기 힘겨워보였다. 하지만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위 책 96쪽) 는 맹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2.공감 피로 '잊지 않을게.' 하며 감정을 소환하고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크고 작은 참사가 빈번해지고 있는 시대다. 일반 시민들이 모두가 참사의 작동을 심도있게 파악할 수 없지만 내가 지켜본 바, 참사 양상은 아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참사 ->피해자 추모-> 책임자 소환-> 여야 간 쟁정 소모 -> 책임자 진상규명 부재 -> 책임자 무혐의  굴레를 끊어내려고 참사 유족들이 손을 맞잡고 국회로 나와 시위하고 목소리 높였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관계자는 책임을 회피했다. 혐오세력은 죽음을 정치로 이용하지 마라고 조롱했다. 이중으로 지쳐가는 건 유족들이었다. 굴레에서 파생된 보도 역시 너무 많아 공감 피로를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본질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책임자를 비롯한 여야간 책임인데 이건 옳다 그르다는 식의 댓글 전투처럼 소모전이 장기화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사이 2주기를 맞이했다. 달라진 건 딱히 없었고, 전 서울경찰청장은 1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저널리스트 제시 싱어는 저서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언급한다. 123쪽 노스이스턴대학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디스테노는 대규모 사고가 유발하는 충격과 공포의 규모 자체가 그것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를 ‘공감 피로’ 라고 부른다. “한 사건이 일으키는 비극의 규모는 커지는 반면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수준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제시 싱어,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_저널리즘과 개인의 역할 153쪽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중략)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걸까?(중략)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 260쪽 파편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 정도다.  256쪽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은 애도와 정교하게 얽혀있는 단어다.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사적인 애도의 순간을 맞이한다. 모두가 태어남과 죽음을 몸 안에 품고 있고, 인간의 생몰에는 시차가 있다. 상실은 그 시차 안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흔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간직 되어 왔다. 애도는 그리하여 고독이나 고립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한 개인의 고유성 안에 자리 잡는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애도와 추모엔 상실과 슬픔이 깔려있고 저마다의 추억 역시 얽힌 맥락의 언어다. 생사가 나란히 마주하는 곳이고 그것은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처럼 추모가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 으로 간직된 것 같다. 슬픔은 묻어야만 하고 어쩔 수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재촉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애도를 성숙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것 같달까.  이번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에서 회복/기억/언론/인식 4가지 섹션을 나누어 각 섹션 별로 신청한 참여자들과 발제자 그리고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4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식 섹션에서 '참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SNS에서 삭제해야 했나' 라는 질문에 한 참여자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 트라우마가 되지만, 사회로 돌리면 사태의 심각성을 같이 인식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울러 유족들 중에서 방송에 나온 사진 외에 본 적이 없어 당사자의 아버지로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언론 섹션에서는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언론 보도가 공동체 회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란 질문에 피해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같은 관점, 진정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피해자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 참사 보도에서 언론의 역할'의 질문에는 실제로 해결되지 않은 현황을 계속해서 알리고, 참사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추모하는 것의 중요성을 나눴다. 기억 섹션에서는 '사고 당사자가 아닌 '나' 는 피해자 인가라는 질문에 참사를 목격한 우리 모두 피해자일 수 있지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스스로를 당사자로 이야기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명명함과 동시에 가해자가 누구인가 규명하고 책임 지우는 일의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태원의 부정적인 시선을 치유와 회복의 공간으로 나아가고, 지역의 의미가 회복됨과 동시에 참사 책임을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필요함을 이야기 나눴다. 회복 섹션에서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모두가 참사 피해자라면, 어떻게 함께 치유할 수 있는가' 란 질문에서 직면하고 정치에서 문제 해결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용만 하는 것 같아 시민 피로감이 크다. 계속 토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다. '일상과 추모는 분리되어야 하나' 는 질문에선 참여자 모두 일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추모가 슬프고 힘들어도 아물고 회복하는 과정이 있으니 일상에서도 추모할 수 있어야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눴다. 나에게 이번 시민 회의에서 참사 이후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배경에서 나고 자란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도 생각을 공유한 것 만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지점에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즘은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한 사람을 보다 나은 생각과 세상을 향하도록 안내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인 만큼(위 책 120쪽)’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면서도 관심을 놓아선 안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울러 저널리즘은 나와 다른 이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이 지향하고 인간은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애쓰는(위 책 215쪽)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역할도 한다.  무언가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 아울러 이런 목소리가 모여 성숙한 애도의 자세,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만나 나은 사회를 그려볼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졌을지언정, 나와 닮은 점은 분명히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린 그들과 이어져 있다는 공명을 잊어선 안된다. 참사 후 파편처럼 일상이 조각난 이들의 마음을 이어붙이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끝으로 이 구절로 후기를 맺고자 한다. 36쪽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효용과 오용을 잊지 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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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 "야생동물 개체군 73% 감소", 그 뒤에 다국적 기업과 자본이 있다
WWF “야생 동물 개체군 73% 감소했다" 세계자연기금(WWF)가 지난 10월 10일 ‘2024 지구생명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20년까지 지난 50년 간, 전 세계 야생 동물 개체군 규모가 73%가 감소했다. 이는 현재까지 관찰된 야생동물 개체군의 규모가 50년간 평균 약4분의3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WWF는 이를 지구생명지수로 표현했다. 지구생명지수(Living Planet Index, LPI)란, 전 세계 5,495종을 대표하는 약 35,000개의 개체군을 대상으로 1970년부터 2020년까지의 추세를 분석한 결과다. WWF는 담수 생태계의 85%, 육상의 69%, 해양의 56%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감소한 생물 개체군 자신들이 속한 생태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시스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체군이 감소하면, 그 시스템은 본래의 시스템 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이는 먹이사실 시스템, 자원 순환 시스템, 토양 회복 시스템 등 다양하다. 이 시스템은 지구 전체 시스템을 움직이는 또다른 일부로서 작동한다. 어느 한 개의 시스템이 오작동하면,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생물 개체군 감소를 어물쩡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번 사라진 종은 영영 되살릴 수 없고,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 복원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Stockholm Resilience Centre)의 소장인 요한 록스트룀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지구 한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총 9가지 영역이 있다.  이는 ①기후 변화, ②생물 다양성, ③담수 사용, ④토지 시스템의 변화, ⑤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⑥해양 산성화, ⑦생지화학적 유량(인과 질소 순환), ⑧대기권의 에어로졸 부하, ⑨진기한 물질이다. 각 9가지 시스템이 지구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하며, 넘어선 한계를 되돌리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는 이 한계를 주기적으로 추적한다. 가장 최근인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이미 9개 중 6개가 한계를 넘었다. 요한 록스트룀은 이 9가지 한계 중 가장 시급한 문제를 생물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생물다양성의 손실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생물다양성이 생태계 복원력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지조차 모른 채 빠른 속도로 생물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¹ 라며 “종의 상실은 다른 지구 한계들과 달리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독 비극적이다. 한번 사라진 종은 영영 되살릴 수 없다.”¹고 경고했다. 농업과 식량 시스템, 생태계 파괴의 주범 WWF는 73%의 개체군 감소 원인으로 식량 시스템을 지목했다. WWF는 “현재 식량 시스템은 서식지 파괴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전 세계 물 사용량의 70%, 온실가스 배출량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으로 전환하고, 식량 손실과 낭비를 줄이는 정책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식량 시스템은 농업을 위한 농지 확장과 개간, 국내 및 해외 수출, 가공, 유통, 소비, 폐기 등 모든 시스템을 아우루는 말이다. 농지 확장은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한다. 또한, 수출과 유통, 소비 단계에서 수 억 톤에 달하는 음식물이 폐기된다. WWF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매년 12억 톤의 식량이 농장에서 폐기됐고, 소매업체와 소비자가 낭비하는 음식물까지 합산하면 약 25억 톤이 폐기 됐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CED)와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2023-2032 농업전망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4%의 식품이 수확 및 소매 단계에서 손실되고, 약 17%의 식품이 소매 및 소비 단계에서 폐기 된다. 한편, 향후 10년 간 식품 수요는 인구 증가에 따라 15%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요 증가는 생산 확대를 불러오고, 이는 농경지 확대를 불러온다. 농경지 확대는 동식물 개체군이 살아갈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확장되고, 이는 곧 생물 개체군 감소로 이어진다. 끊임없는 악순환이다. 이런 농경지 확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전 세계적으로 많았다.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농업혁명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이자 인류 희대의 사기극"²이라고 말했으며, 영국 역사가이자 빅히스토의 개척자로 불리는 클라이브 폰팅은 “농업은 인간이 원하는 작물과 동물을 기를 인공 서식지를 위해 자연 생태계를 없애 버리는 것”³이라고 말했다. 클라이브 폰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농경지 확대는 곧 인공 서식지의 증가였고, 이는 자연 생물군의 서식지 감소와 멸종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생물 개체군 감소를 막기 위해선 농경지 확대를 막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경지 확대를 줄이기 위해선 식량 공급과 소비 시스템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낭비 줄이기와 단년생 작물(1년만에 생산하고 농지를 갈아 엎어야 하는 생물) 수확에서 벗어나 다년생 작물 생산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농민의 변화가 필요하다. 농민이 당장 수익을 위해 단년생 생물만 심고 기르는 것을 멈춰야 하며, 동시에 다년생 식물을 길러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득이 온전히 보전되어야 한다.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변화는 이루어질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바로, 농업 산업 전반을 쥐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들이 농민의 몫을 쥐고 놔주지 않는 한 변화는 요원하다.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 25억 명의 소득을 쥐고 있는 30개 다국적 기업 프랑스의 ‘시민을 위한 사회 영향 연구소(BASIC)’은 ‘Who’s Got the Power’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는 국내에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로 번역됐다.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 농산물 생산의 공급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다국적 기업이 농경 산업을 쥐고 있는지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30개 미만의 다국적 기업이 약 25억 명의 농민의 몫을 쥐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선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이 좁은 길은 판매된 생산품이 농민에게 얼마나 적게 돌아가지 나타낸다. 이 좁은 길을 통과해 농민에게 떨어지는 값은 동전 몇 푼 되지 않는다. 이 좁은 길을 윔켜쥐는 건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들은 좁은 길을 더욱 좁게 만들 수도 있고, 넓게 만들 수도 있다. 30개 미만의 다국적 기업은 농산물 가격 통제와 인권,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체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이들 기업이 전 세계 대부분의 소매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눈에 봐도 수 백개에 달하는 브랜드가 대략 10개 기업에 속해 있다. 유니레버, 네슬레, 코카콜라, 펩시코, 켈로그, 다논, 마스, 몬델즈 등등이다. 이들의 변화가 없다면, 농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결코 많아질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코코아(카카오+초콜릿) 산업을 살펴보자. 그림에서 보듯 아래로 내려갈 수록 공급망 전체에서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걸 알 수 있다. 소매단계(retail)에서 35%의 몫이 돌아가고, 5개 회사의 브랜드 제품 대량 생산에서 40%의 몫이 돌아간다.  또한 3개 기업이 초콜릿 가공 단계에서 10%를 가져가고, 2개 기업이 코코아 가공 그라인딩 단계에서 5%를 가져간다. 또한 현지 트레이더가 5%를 가져가고, 농민이 나머지 5%를 가져간다. 그리고 이 농민의 수는 1,400만 명이다. 즉, 1,400만 명이 코코아 산업의 5%를 나눠갖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이들 농민들이 이러한 산업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소득이 없고, 실업자가 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국적 기업의 요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농민의 경제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경작지 증가를 막을 수 없다 경작지 증가를 막지 않으면, 생물 다양성 감소를 막을 수 없다 다국적 기업에 종속된 산업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경우,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은 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 5%의 이익마저 줄이고, 더 많이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년생 작물만 기르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단년생 작물은 1년만에 경작지를 개간하게 하고, 토양 휴식 없이 또다른 식물을 심고 경작하고, 개간하게 만든다. 또한, 단년생 작물만을 생산해 “토지의 생산성이 떨어지면, 새 농토를 얻기 위해 자연의 숲을 잠식한다.”⁴ 유발하라리와 클라이브 폰팅이 경고한 농경지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산업에 맞춰진 농경지의 변화를 산업화 된 농경지라고 한다. 농경지의 산업화가 진행되면, “토양 침식, 삼림 파괴, 단작 재배와 산업적 생산 방법으로 인한 오염, 취수, 탄소 격리의 감소, 그리고 포유류를 포함한 동식물 종 다양성의 감소 등 자연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도 확대”⁴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작지의 증가를 막지 않으면 생물 다양성 감소도 막을 수 없다. 인류가 인공적으로 만든 경작지는 모두 생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삶의 터전을 망가트리는 건 인간이었고, 그 인간을 움직인 건 자본의 논리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 메스를 가져다 대야 한다. 고쳐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버려야 한다. 무언가를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버리고,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장의 한계에서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 보고서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바꾸지 않았을 때 이루어지는 파국을 예고했다. 그들이 제시한 시나리오는 총 10개다. 그 중 시나리오2는 인류가 피해야 할 시나리오에 우리가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성장의 한계 발표 후 30년이 지난 2002년 새롭게 업데이트한 내용이다. 2000년대 초 기준 지구의 재생 불가 자원(석탄이나 석유 등) 사용을 2배로 늘리는 동시에 자원 채굴 기술 발전으로 채굴 비용 상승 시점을 늦춘다고 가장하면, 산업은 20년 더 성장할 수 있다. 또한, 꾸준한 인구 증가로 2040년 인구는 80억 명으로 정점을 이룬다. 산업이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한 만큼 소비도 동시에 증가한다. 하지만, 오염(Pollution) 수준도 함께 폭등한다. 위 사진에 따르면 오염은 도표 밖으로 나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며, 식량은 꾸준한 하향 곡선을 그린다. 이는 오염 증가가 토양 황폐화와 생산성 감소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토양 황폐화와 생산성 감소는 인구를 먹여살릴 농작물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기아 발생과 사망률 증가가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실제 시나리오2를 보면 식량 감소가 나타나고 머지 않아 인구가 감소한다. 시나리오의 변인 요소는 총 5가지다. ‘①인구 증가, ②지속적인 경제성장, ③(재생 불가능한) 자원 소비, ④오염물질 배출, ⑤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식량 생산’이다. 이 5가지 요소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이 5가지 요소를 모두 통제하지 않으면 인류가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결과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다섯 가지 전환과 세 가지 단계 성장의 한계 이후 50년, 로마클럽은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한다. 바로 ‘모두를 위한 지구 Earth 4 All’이다. 이는 앞선 성장의 한계 주요 모델이었던 월드3 모델을 업데이트해서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말해주는 보고서다. 그들은 전 세계가 합심해서 참여한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5가지 영역에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①빈곤 전환, ②불평등 전환, ③권한 부여, ④식량 전환 ⑤에너지 전환’⁵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식량 전환만 아주 간략히 소개한다. 식량 전환을 위해선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①새로운 농업 기법 도입, ②식량 시스템 효율성 개선, ③식단 변화이다.  새로운 농업은 재생 농법을 말하며, 이는 곧 단년생 식물이 아닌 다년생 식물로 전환하고 토지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식량 시스템 효율성 개선은 유통과 소비 단계에서 낭비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국제 교류가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작 식단 변화는 현재 육류 위주의 습관에서 벗어나 채소 과일 등을 고루 섭취하는 변화가 만들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⁵ 어렵다. 아주 어렵다. 개인의 변화가 일어나야 함은 물론이고, 산업의 변화 역시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소작농들의 경제성을 보전해 주어야 하고, 이들이 마땅히 재생 농법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투자해 줘야 한다. 이걸 누가할까? 정부가 할까? 기업이 할까? 재원은?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 데 납득할까? 개인과 기업이? 식량 시스템 효율성도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 게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장 전 세계로 걸쳐져 있는 유통망을 지역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전 세계 유통망의 혜택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커피와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다. 혹은 아주아주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는 의미다. 이걸 소비자가 납득하고, 기업이 감당할 수 있을까? 또한 음식물을 버리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만 먹는다는 게 가능할까? 식단 변화는 가장 개인적인 변화를 불러와야 한다. 육류를 줄이고 채소와 과일, 콩 등으로 줄인만큼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개인의 변화가 가장 어렵다.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개인의 변화를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걸 모든 인류가 다 같이 할 수 있을까? 결국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야지만 가능하다. 자본의 논리는 항상 대량 생산해서 싸게 공급하고, 싼 공급을 통해 끊임없는 소비를 조장한다. 현재 인류 중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살았던 사람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논리를 너무 당연시 하고, 절대 바꿀 수 없는 성역으로 여긴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게 가능 할까? <모두를 위한 지구> 팀은 “낙관적인 사고 방식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지구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야 한다. 경제란 우리 인간이 설계한 시스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⁵ 자본의 논리 역시 인간이 만든 경제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논리'일 뿐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논리가 있고, 과거에 맞았던 논리가 시간이 지나 전혀 맞지 않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노예제가 당연했고, 그들을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듯이 말이다. WWF가 발표한 생물 개체군 감소의 가장 이면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 그 논리에 가장 앞장서는 다국적 기업이 생물 개체군 감소에 가장 크게 이바지 하는 농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또한 자본의 논리는 인간을 움직여 현재의 기후위기와 생물 다양성 감소, 양극화, 불평등 등 각종 문제를 야기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는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생각할 시간도 없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말이다. 1)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요한 록스토룀 외/ 에코리브르/ 2017) p.101  2)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 p.129 3)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민음사/ 2019) p.110 4)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 (르 바지크/ 따비/ 2017) p.127 5) <모두를 위한 지구> (다수 공저/ 착한책가게/ 2023) p.17, 17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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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 속에서 웃음 버튼을 찾았다.
‍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나요? 저는 <나의 쓰레기 아저씨>라는 채널을 빠짐없이 챙겨봐요. 잔잔한 라떼(?) 토크, 구슬픈 배경음, 시종일관 진지한 출연자와 그런 진지함을 유쾌하게 받아치는 자막 때문에 웃으며 보기 시작했어요. 제 딴에는 환경, 기후 위기 이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했어요. 하지만 이 채널을 계속 보면서 제 지식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느꼈어요. ‍유익한 콘텐츠는 많아요. 유쾌한 콘텐츠는 그보다 더 많고요. 그러나 유익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갖춘 콘텐츠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이 특별한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진을 만나보았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유쾌함 속에 숨겨진 진지한 고민, 공감을 얻는 스토리를 만드는 법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면 좋겠어요. | <나의 쓰레기 아저씨> 채널을 소개해 주세요. 쓰레기, 환경, 버려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에요. 배우 김석훈 님이 진행을 맡고, 세 명의 PD(김다영, 김수인, 이현정)가 기획·편집·촬영을, 한 명의 작가(한수현)가 구성·섭외 역할을 하며 제작하고 있어요. ‍ | ‘환경 예능’이라고 해도 되나요? 보통 "환경 콘텐츠를 다루는 채널"이라고 소개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환경을 다룬다고 말할 때 부담감도 있어요. 저희 모두 환경 전문가가 아니고, 완벽하게 친환경적인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려워서요. 환경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지나치게 무겁거나 계몽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저희 채널은 시청자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환경 상황을 알려드리는 거예요. 알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김석훈 배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가 주로 환경과 관련 있으니 편의상 ‘환경 콘텐츠’라고 부르고 있어요. ‍ | 쓰레기, 환경 소재의 유튜브 채널을 기획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부터 환경을 주제로 삼은 건 아니었어요. 회사(미스틱스토리)에서 김석훈 선배를 주인공으로 한 유튜브 채널을 구상했는데요. 김석훈 선배가 "나는 쓰레기 문제를 다루고 싶다. 버려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고,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했어요. 저희 제작진도 처음에는 솔직히 망설였어요. 유튜브 채널은 먹방이나 여행을 주로 다루잖아요. 과연 ‘쓰레기’라는 소재가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고,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죠. 하지만 김석훈 선배의 진심이 느껴졌어요. 정말 이 주제에 관심이 많고, 열정적으로 임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잘 표현한다면 그 진심이 시청자에게도 잘 전달되리라 생각했죠. ‍ | 영상 콘텐츠는 어떤 과정을 거쳐 기획하나요? 일단 아이템 선정에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요. 어떤 아이템을 다뤄야 시청자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죠. 제작진은 물론 김석훈 선배도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요.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다 함께 회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요. 이 과정에서 작가의 역할이 중요한데, 여러 의견을 조율하고 실제 섭외와 구성 작업을 담당해요. 아이템이 정해지고 섭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구체적인 구성 작업에 들어가고 준비된 구성을 바탕으로 촬영을 나가죠.‍ ‍ | 채널 구독자가 20만 명이 넘었더라고요. 이 정도 인기를 예상했나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어요. 쓰레기라는 소재가 과연 통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김석훈 선배의 진심이 잘 전달된 것 같아요. 본인이 관심 있고 하고 싶은 주제다 보니 그 매력이 화면을 통해 전해져요. 또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고요. | 제작 과정에서 가장 놀랐던 쓰레기 관련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북악산 줍깅 편이에요. 산 중턱에서 여성용 위생용품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어요. 몇 걸음 간격으로 계속 위생용품이 나와서 너무 놀랐어요. 어떻게 이런 곳에 있을까, 누군가 일부러 버린 건가 등 온갖 추측을 다 했죠. ‍ | 쓰레기 처리 과정, 재활용 과정을 자세히 다루더라고요.‍ 맞아요. 김석훈 선배의 초기 기획 의도와 맞닿아 있어요. 쓰레기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정말 궁금해 했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그 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어요. 시청자도 평소에 잘 몰랐던 부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처리되는지, 재활용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을 보여드림으로써 새로운 정보도 제공하고 경각심도 일으킬 수 있다고 봤죠. 물론 때로는 '이 정도까지 필요할까?'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채널의 정체성을 위해 최대한 자세히 담아내려고 노력했어요. ‍ | 시청자의 반응은 어떤가요? ‍보통 유튜브 댓글에는 재미있는 드립이나 짧은 감상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희 채널은 달라요. "이 영상을 보고 이런 걸 실천해봤어요", "김석훈 님 덕분에 이런 걸 새롭게 알게 됐어요" 같은 댓글이 정말 많아요. 저희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 시청자분들이 스스로 실천하고 경험을 나누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초반에 어떤 분이 남겨주신 댓글이에요. "자극적이고 유해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이렇게 무해하고 메시지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말 한마디가 저희에게 큰 힘이 됐죠. 지금까지도 그 댓글을 떠올리면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해요. ‍| 재미와 의미의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시나요? 정말 어려운 부분이에요.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아무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해요. 저희만의 방법이라면, 우선 김석훈 선배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해요. 워낙 재미있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선배가 직접 체험하고 몸으로 부딪히는 장면을 촬영에 많이 담으려고 해요. 그 과정에서 나오는 재치 있는 멘트나 리액션이 웃음 요소가 되죠. 또 편집할 때 자막이나 효과음을 적절히 활용해요.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조금 더 가볍게 풀어내는 거죠. 최근에는 아이템 자체에서 웃음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카약을 타고 쓰레기를 줍는 활동 같은 걸 촬영했는데, 이런 새로운 시도가 시청자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 | 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앞서 얘기한 재미와 의미의 균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워요. 환경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매번 숙제예요. 또 하나는 섭외 문제예요. 다루고 싶은 주제나 장소가 있어도, 실제로 섭외가 성사되기까지가 정말 힘들어요. 특히 쓰레기 처리 시설이나 업체들은 노출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서 더 어렵죠. 촬영 환경도 쉽지 않아요. 깨끗하고 편한 곳보다는 힘든 현장을 많이 가게 되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쓰레기차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진흙탕이나 벌레가 많은 곳에서 촬영하기도 해요. ‍ | 환경미화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어요. 어떻게 섭외하셨을까 궁금했어요. 촬영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업을 가진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저희 콘텐츠 제작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리고 있죠.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분들 중에서 화면에 얼굴이 나오는걸 부담스러워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세요. 저희는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 알기에 더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카메라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으실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쓰레기를 처리해 주는 분들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환경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 힘든 촬영 환경에서도 좋은 영상을 만들어내는 비결이 있나요? 사실 비결이라고 할 건 없어요(웃음). 15분짜리 영상 하나를 위해 10시간 넘게 촬영하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이런 과정이 있어야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팀워크가 정말 중요해요. 힘들 때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극복해요. 김석훈 선배도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로 저희를 이끌어주시고요. 이런 팀워크가 있기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좋은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 | 채널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책임감이나 부담감은 없나요? 책임감과 부담감이 정말 커요. 특히 구독자 수가 늘면서 더 강하게 느껴요. 예를 들어, 촬영 중에 일회용 컵을 사용하면 댓글로 지적을 받곤 해요. "오늘은 텀블러 안 쓰셨나 봐요"라는 식으로요. 처음에는 이런 반응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이런 관심이 오히려 저희를 더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시청자가 그만큼 저희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촬영할 때나 일상생활에서도 더 신경써요. 또한 환경이라는 주제를 다루다 보니, 관련 지식이나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어요. 전 세계의 환경 이슈나 최신 정책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부분은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중요해요. 환경을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고, 아직 모르는 것도 많다는 걸 솔직히 인정해요. 이런 솔직함이 어떤 부분에서는 구독자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 |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기획하고 계신가요?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특정 기업에 찾아가서 그들의 환경 정책이나 실무자의 노력을 보여주는 콘텐츠를 기획 중이에요. 실제로 기업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환경을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지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요. 또 하나 큰 계획은 '아나바다' 팝업 스토어예요. 김석훈 선배나 저희 지인들의 물건을 모아서 구독자와 함께 나누는 행사를 열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재사용, 재활용의 가치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만들려고 해요. 그리고 해외 촬영도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나라의 쓰레기 문제나 환경 정책을 취재하고 싶어요. 전 세계적인 환경 이슈를 다루면서 우리나라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등을 알아보려고 해요. ‍ | '나의 쓰레기 아저씨' 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희가 이 채널을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 조금씩 관심을 가져보자"예요. 환경 문제가 너무 거창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조금만 관심을 두고 노력하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어요. 김석훈 선배도 항상 강조하는 지점인데요. 우리가 완벽해져야 한다거나 모든 걸 바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저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렇게 조금씩 문제를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거라고 믿어요. 또 환경을 생각하는 삶이 결코 불편하거나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오히려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어요. 저희 제작진도 이 채널을 만들면서 많이 변화했어요. 이제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게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져요. 환경을 생각하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 글 | 최성욱‍ ‍ 오늘의 ‘뷰 테이블’에서는 제가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을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유머가 넘치고 친근한 채널로만 골랐답니다. 🎥 알TV <썰준> 척수장애인 이원준과 시각장애인 안승준의 수다가 돋보이는 시리즈입니다. 이들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재치 있게 패러디해 <마비되면 비로소 움직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내보자고 제안하고, 누구의 장애가 더 힘든지 ‘장애 배틀’을 벌이기도 합니다. 장애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농담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두 어른의 ‘티키타카’가 압권입니다. 채널 살펴보기 ‍‍ 🎥 네온 밀크(Neon Milk) 드랙 아티스트와 LGBTQ+ 컬처를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입니다. 성소수자의 삶을 어둡고 무거운 주제로만 다루는 건 현실의 한 단면만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채널은 그들의 일상적이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성소수자를 ‘다른 존재’로 여기는 편견을 깨는 데 한몫하고 있죠. 채널 살펴보기 ‍ 🎥 EBS 지식채널e <어른도감>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다루는 시리즈예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며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는 다양한 이웃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민과 성찰의 과정을 보면서, 문득 ‘나는 어떤 어른일까?’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채널 살펴보기 ‍ 🎥 씨리얼 사회 문제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질 때면 찾아보는 채널입니다. 소외된 사람, 덜 주목받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입니다. 특히 태권도장이라는 공간과 젊은 남자 사범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돌봄’의 문제를 들여다볼 때는, 그 참신한 접근에 무릎을 탁 쳤어요. 채널 살펴보기 ‍ ❗이 콘텐츠는 'Table Talk(테이블 토크)'의 기사를 가공하여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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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에 임산부 좀 먼저 가고, 먹고, 앉게 하자는 게 그렇게 아니꼽나?
“임산부한테 그걸 왜 해주냐" 최근 대전의 유명 빵집인 성심당에서 임산부 프리패스 서비스를 내놨다. 임산부의 경우 기다릴 필요 없이 빵을 고를 수 있고, 빵 가격도 5%를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행사를 알리는 성심당 안내판에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비맘들을 응원해요.”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해당 사례가 알려지자 두 가지 부류가 나타났다. 첫째는 “임산부가 벼슬이냐며 프리패스는 역차별"이라는 부류, 둘째는 “임산부 뱃지 삽니다"라는 부류였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늘어나고 이슈가 되자, 성심당은 “임산부 뱃지만으론 불가능하며, 산모 수첩 또는 임신 확인증을 지참하고, 출산예정일 확인 후 신분증과 대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빵집 서비스가 역차별이고 불공정하다고? 가소롭다 성심당의 임산부 프리패스에 대해 역차별을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말을 인용한 기사들을 보던 중, 이런 문구를 봤다. “성심당이 사기업인데, 역차별이다. 모든 고객에게 공정한 대우를 해야 한다.”. 가소롭다. 성심당은 그냥 빵집이다. 손님이 많고, 지역에서 유명할 뿐이다. 그런 빵집에서 임산부가 줄 없이 들어가도록 해주고, 고작 5% 할인해 준 걸 차별이고 공정하지 못한다고 하면 세상에 저런 혜택을 누가 줄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5% 할인도 만 원 짜리 500원 할인해 준 것 뿐이다. 껌 한 통이 1,200원이고 자판기 커피가 500원인 요즘에, 고작 그 500원이 그렇게 아니꼽게 보였을까. 저 글을 쓴 이의 생각대로라면, 가장 공정하게 빵을 팔기 위해 성심당은 손님들에게 제비를 나눠주고 당첨된 사람에게만 빵을 팔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마저도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역차별이다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임산부 뱃지 삽니다? 가엽다 임산부 뱃지를 산다는 사람도 살펴보자. 정부가 주는 임산부 혜택은 뱃지가 있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임산부로 등록이 되어야지만 받을 수 있다. 임산부가 아니면서 임산부 뱃지를 산다는 사람들은, 세심히 확인하지 않는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성심당 혜택처럼 말이다. 전형적인 체리피커다. 체리피커는 상품 구입은 하지 않고 부가 서비스 혜택만을 취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스스로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소비생활을 영위한다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좋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꼼수를 잘 부리는 사람들이다. 드러나는 그 작은 임산부 혜택을 누리려고 뱃지를 산다는 사람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안 되고 처연하다. 가엽다는 의미다.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임산부들일 것 임산부 뱃지 구매의 악순환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임산부 당사자들일 것이다. 임산부 뱃지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위해 뱃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배가 부르지 않은 이상 누가 임산부이고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초기 임산부들은 이런 위험이 더 많다. 실제 임산부 뱃지는 당장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들이 마땅히 임산부임을 알리고, 배려와 양보, 혜택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일상 곳곳엔 이런 임산부들을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일례로 지하철의 안내 방송에서는 “지하철에는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초기 임산부들을 위해 임산부석을 비워주시고, 임산부 뱃지가 있는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라고 방송을 한다. 물론 이런 안내 방송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실제 앉아서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임산부석, 민원만 7,000건, 임산부 54% 일상에서 배려 받지 못했다 “여성전용석이다, 남성이 앉았다” 개랑 원숭이 같은 한심한 웹상 싸움 현재 서울시에서 운행 중인 1~9호선에는 칸 마다 두 개의 임산부 배력석이 설치되어 있다. 1~8호선은 7,226개, 9호선 636개, 우이신설선 72개, 신림선 전동차는 96개다. 하지만 실상 임산부가 이 자리를 제대로 앉아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이다. 2023년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 접수된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은 총 7,086건이었다. 민원 대부분은 임산부석을 이용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임산부석이 아니라 여성전용석이라느니, 남성이 앉아 있었다느니 갈라치기해서 싸우기 바쁘다. 한심하다. 웹상에서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른채 키보드로 개랑 원숭이처럼 싸우는 싸움으로 임산부 당사자들이 받는 배려가 도대체 뭔가 싶다. 저렇게 웹상에서 싸운다고 하여 임산부 당사자들에게 배려나 자리가 생기는 게 아니다. 지난 2020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임산부 1,500을 대상으로 조사한 임산부배려 인식 및 실천수준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임산부 54.1%가 배려를 받지 못 했다. 또한, 2021년 조사에서도 51,9%가 배려받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배려를 받지 못한 이유로 “임신 초기라 배가 나오지 않아서"가 2020년 54.3%, 2021년 49.4%였다. 2021년 조사에서는 가장 부정적인 배려받지 못한 경험으로 44.1%가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석 이용 불편을 꼽았다.  임산부가 배려받지 못했다는 수치는, 우리 사회가 임산부애 대한 배려와 존중의 점수다. 한편, 일상에서 배려와 존중을 받지 못하는 건 임산부만이 아니다. 배려를 못받는 건 임산부만이 아니다, 소방관, 경찰관, 군인도 마찬가지 흔히 우스갯말로 경찰관을 짭새라고 부르고, 군인을 군바리라고 부른다. 어떤 민원인은 “지하철에서 군인이 앉아서 간다"며 민원을 넣었다. 민원 내용을 보면 “군인들이 왜 자리에 앉아 있나요? 방송 요망"이라고 보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6년에는 스타벅스에서 군인에게 무료 커피를 나눠준 것을 두고 “성차별"이라고 했다. 이게 칭찬할 일이지, 어떻게 이게 성차별이 될 수 있을가. 어떻게 이렇게 배배꼬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2023년 군인들의 직업 만족도는 44%로 조사됐다. 2020년대비 27% 하락한 수치다. 사회적 평가는 12.9%였다. 소방관은 어떤가, 헬기로 출동했더니 “김밥에 모래 들어간다" 라며 민원을 넣고,  소방차 사이린이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고 있다. 점심 도시락을 사기 위해 나온 소방관에게 “공무원이 12시 전에 왜 나오냐"며 민원을 넣고, 소방관에 불법 주차한 외제차 차주가 소방관에게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는 “구급대원 향한 폭언과 폭행을 멈춰달라"고 소방관들이 직접 말하고 있다. 경찰은 말해 뭐하나. 공무집행 방해를 받는 대상 93%가 경찰이다. 현장에서 경찰들은 “조폭시켜 죽이겠다"고 말하지 않나 “나 조폭 알아 감당하겠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조폭을 잡는 게 경찰인데,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성단체에서 시작됐네, 남성단체에서 시작됐네 따지는 인간들도 똑같다 개인적으로 여성・남성 커뮤니티에서 노닥거리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키보드로 노닥거리며 비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말들을 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림돌림 하는 걸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저런 사례를 들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각종 여성・남성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을 하고 있다. 여성들이 어쩌고, 남성들이 어쩌고. 언론들도 그런 반응들을 각종 커뮤니티에서 퍼다 나르고 있다. 그걸 통해서 경찰, 군인, 소방관에게 돌아가는 이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배려 없는 사회에서는 공동체 참여와 활동도 없다 UCLA Social Relations Lab에서 발표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룹 구성원으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인식은 공동체 활동 참여 의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공동체에 겪고 있는 사회적 딜레마에 협력하고 연대하려는 의식이 강화된다. 반면, 존중이 부족하면 무관심과 폭력, 적대감 같은 부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Urban Public Space and Social Cohesion: A Systematic Review (도시 공공 공간과 사회적 응집력의 관계 이해 : 체계적인 리뷰)라는 보고서는, 시민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공간(Open Space)의 중요성을 말하며, “사회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균형을 겪는 사회에서 공동체 결속력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소외감과 존중 부족 증가로 이어져 공동체 유대와 집단 행동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임산부, 경찰관, 소방관, 군인에 대한 우리 사회 배려의 모습은. 공적인 공간이든 사적인 공간이든 상관없이 그저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며, 존중 하려는 마음과 태도 조차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심당 같은 사적인 곳과 지하철 같은 공적인 곳에서 몸이 아파서, 몸이 무거워서, 공적(소방과 치안 등)인 일을 하다가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좀 앉고, 먹고, 가게 하자는 것조차 “이건 공정하지 않아. 역차별이야"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것 자체를 우리 사회가 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적인 곳에서는 그럴 수 있다. 모든 시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성심당 같은 지극히 사적인 사업장에서 하는 것까지 “좋다, 모범적이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역차별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더욱 더 말이다. 임산부석에 대한 개인적 생각 배려라는 말 자체가 잘못 됐다. 임산부는 배려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누려야 하는 사람 나 역시도 지하철에서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안 좋게 본다. 그런 걸 볼 때면, “저렇게 앉아 있으면 임산부가 퍽이나 와서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고 하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배려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배려는 해도 되지만 안해도 된다. 안 한다고 해서 뭐라 그럴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선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배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건물 10층에 만들어놓고, 엘리베이터 없이 올라오라고 하면 그게 과연 배려일까? 공간을 만들었으니 배려 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가 올라올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충분히 설치 해 놓거나, 애초 올라올 필요 없이 턱이 없는 1층에 만들어 놓는 게 배려일 것이다.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임산부 석을 보면서 “저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니라, 임산부 권리석 이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배려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권리는 침해 해선 안 된다. 내 권리를 누리기 위해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 라는 말 조차 안할 수 있도록 임산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석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임산부 만이 아니라, 소방관, 경찰, 군인 등 내 이익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일하는 모두 그런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그런 권리를 지켜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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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건국 설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자본
텔레그램 건국 설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자본 by 🍊산디 텔레그렘은 매혹적인 건국설화를 갖고 있습니다. 기개와 시련, 용기, 망명, 이상향을 모두 담고 있죠. 설화는 러시아에서 시작됩니다. 미래에 텔레그램을 설립하게 되는 청년 파벨 두로프(Pavel Durov)는 2007년, 브콘탁테(VKontakte)를 창업합니다. 사실상 페이스북을 모방한 서비스였죠. 브콘탁테는 단숨에 러시아 최대 규모 소셜 네트워크로 발돋움합니다. 2012년 초, 위기가 닥칩니다. 러시아에서 반 푸틴 운동이 벌어진 것이죠. 두로프는 시위 참여자들이 브콘탁테를 활용해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고, 반-푸틴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블로그를 폐쇄하라는 요구에도 불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친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반대 혁명(유로마이단 혁명) 참가자 정보를 제공하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청도 거부합니다. 일련의 결정으로 파벨 두로프는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동시에 시련 또한 시작됩니다. 크렘린과 연관되어 있는 인사들이 브콘탁테의 경영권을 조금씩 잠식해오기 시작한 것이죠. 2014년, 그는 만우절 농담이라며 사의를 밝혔고, 이후 사의를 철회했으나, 만우절 농담은 현실이 되어 그는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잃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세계에 입성합니다. 두로프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당국에 협조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이후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견딜 수 없다”라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이 받은 박해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나아가 “불행히도, 그 나라(러시아)는 현재 인터넷 사업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의 비전을 드높이죠. 당시 그의 용기는 ‘깨끗한 양심’이라 불리며 큰 울림을 전했습니다. 이런 울림은 2013년 감시 자본주의의 속내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트위터, 구글 등 빅테크가 미국의 적대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방국, 심지어 자국민까지도 포함한 전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통신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 NSA)에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전지구적 충격에 휩싸인 시기였죠. 9.11 테러 이후 반테러리즘에 기댄 감시 국가의 부상과 자본주의의 결탁 속에서 파벨 두로프의 결단은 자유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독일 망명 후 그는 본격적으로 텔레그램을 서비스하기 시작했고, 세계는 그의 다음 도전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자유의 공간 텔레그램이 건국됩니다. 이러한 건국 설화를 배경으로 텔레그램은 빠르게 이용자를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텔레그램은 ‘지구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였습니다. 두로프는 자유의 선봉에 있는 신비로운 사람이었죠. 실제로 텔레그램은 반체제 인사들이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피난처로 기능합니다. 많은 한국 이용자들도 통신 자유를 위해 텔레그램으로 ‘망명’했죠. 그가 망명길에 떠난지 10년여가 지난 지금, 텔레그램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문제를 증폭하고 해결을 어렵게 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텔레그램이 약속한 ‘통신의 자유’는 비밀 채널에서 아동성착취물(Child Sexual Abuse Material, CSAM)을 비롯한 성착취물의 거래를 사실상 방조했습니다. 스탠포드 인터넷 감시소(Stanford Internet Observatory, SIO)는 텔레그램이 사적 채널을 통해 아동성착취물 거래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개인 간 통신에 대한 텔레그램의 정책은 다른 빅테크 플랫폼에 비해 너무도 자유로워서, 아동성착취물 유통과 어린이에 대한 성애화, 그루밍 등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텔레그램은 익명성과 보안, 사법 공백을 적극 활용해 수익을 좇는 이용자를 만들어냈습니다. 프랑스 당국은 아동 포르노물 유포, 유해 콘텐츠 방치뿐만 아니라 조직범죄 활동 공모, 마약 밀매 조장 등의 혐의로 두로프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이상은 여성 인권을 적극적으로 희롱하는 이용자들의 피난처로 전락했습니다. 혹자는 범죄를 저지른 이용자의 잘못을 텔레그램에게 돌릴 수 없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통신 자유는 텔레그램이 성장할 수 있는 기폭재이자 수익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텔레그램은 광고 시스템을 도입하고, 활성화된 방의 개설자에게 광고 수익의 50%를 주었습니다. 통신 내용에 대한 규율은 없었습니다. 다국적 해외 사업자로서 국가의 관할권을 교묘히 이용하며 적극적으로 사법 공백을 만들어냈습니다. 두로프는 텔레그램을 통해 20조원이 넘는 부를 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부는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되었습니다. 2018년. 두로프는 인스타그램에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포스팅했습니다. 자유를 구하기 위해 내달리는 백마 탄 왕자가 되고자 했던 텔레그램의 신화는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자유를 내세워 쌓아 올린 그의 나라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착취의 구조 위에 쌓아 올린, 철저히 체계적인 억압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전세계가 목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대한 그의 이상은 무너지고 있고, 무너져야 합니다. 🦜 더 읽어보기- 산업화하는 딥페이크 성착취물(2024-08-26)- 딥페이크 성착취물 논의, 어디로 흘러가는가(2024-09-02)- 사진 내리기 말고 할 수 있는 일: AI 기업에 요구하기(2024-09-04)- 정말로 대안이 없을까?(2024-09-11)- 처벌법 개정, 딥페이크 성범죄를 끝낼 수 있을까(2024-10-02) 💬 댓글- (🤔어쪈) 자유라는 가치는 결코 유일하거나 모든 것에 우선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딥페이크 성범죄와 같은 문제에 대해 텔레그램과 같은 메신저 또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책임이 언급될 때마다 종종 표현·통신의 자유를 강조하며 사전 검열, 과잉 규제 등을 우려하는 주장을 접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한 것인지와 함께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이용되거나, 또 다른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feedback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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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 멘 군인이 케이블타이로 결박… “계엄군 떠올라”
청년들이 국방부 후문 앞에 모였다. 그곳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검은 제복의 사내들. 소총을 메고 무장한 모습이었다. 삼엄한 경계 너머 외딴 섬 같은 건물이 서 있다. 청년들은 그날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을 작정이었다. 백륭(22, 남) 씨 등 네 명의 청년은 지난 4일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대통령에게 면담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그들의 계획은 금세 좌절됐다. 양손이 뒤로 꺾이고 케이블타이에 묶인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청년들 중 가장 선두에서 달린 백 씨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군사경찰로 추정되는 사람이 총을 (몸) 앞으로 갖다 대면서 옆으로 확 쳤어요. 그러니까 옆에 주차돼 있던 차에 부딪혀서 앞으로 넘어졌어요. 그는 후문으로부터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얼굴이 뭉개졌다. 까만 제복에 검은 조끼를 입은 남자는 단숨에 백 씨의 등에 올라타 팔을 뒤로 꺾고, 머리와 등을 짓눌렀다.남자는 “왜 왔냐”며 윽박질렀다. “케이블타이 꺼내!”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 옆에 있던 소총을 멘 사내가 손목을 뒤로 고정했다. 케이블타이였다. 저항할수록 통증이 느껴졌다. 백 씨는 그때부터 구호를 외쳤다. “김건희를 특검하라! 거부권 남발 중단하라!”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눈앞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내들이 달라붙었다. 장갑차 여러 대가 도착하더니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네 명의 사내들은 그를 일으켜 세워 후문을 빠져나갔다. “그때 양복 입은 사람들(경호원으로 추정)한테 저를 넘겼거든요. 그러면서 ‘테이저건 준비해. 얘(백 씨) 뒤로 뛰어가면 쏴라.’ 이런 식으로 지시하더라고요. 문을 통과하자 발길질이 쏟아졌다. 벽을 보고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것. 위에서 체중으로 짓누르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쪼그려 앉았다. 양복 입은 남자들은 백 씨의 사지를 들어 스타렉스 승합차에 태웠다. 차 안에는 구한이(29, 여) 씨가 먼저 타고 있었다. 옷이 벗겨져 한쪽 팔에 걸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후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제압됐다. 그를 붙잡고 끌고 가는 과정에서 구 씨는 속옷이 그대로 노출된 채 차에 태워졌다. 현장에는 지나가는 시민들, 군인, 경호원, 경찰들이 있었다. 윤겨레(20, 여) 씨는 진압 과정에서 다리에 멍이 들었다. 그 역시 무릎에 등이 눌리고, 머리가 바닥에 짓눌렸다.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무게였다. 윤 씨의 손목에도 케이블타이가 채워졌다. 이들은 그 상태로 용산경찰서로 끌려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24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김건희 특검법이랑 채상병 특검법이 통과 안 됐어요. 2년 반 동안 (거부권) 24번이라는 숫자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국민들의 목소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면담 요청 하려고 간 거죠.” 이들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일 김건희특별검사법을 비롯한 3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24차례 거부권이 발동됐다. 지난달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조사기관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김건희 특검법’에 65%가 ‘찬성한다’고 답변했다. 지난 6월 여론조사꽃이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62.1%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권력 남용’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계획대로라면 면담요청서 전달하면서 면담하고 싶다 요구하는 거였죠. 그런데 몇 발 떼지도 못하고 붙잡혀서 바로 끌려간 거예요. 달렸다는 이유로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국방부 영내는 ‘경호구역’에 해당한다. 당시 국방부 후문은 서울경찰청 202경비단과 국방부 근무지원단 50군사경찰대 소속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케이블타이로 청년들의 손목을 결박한 건 군사경찰이었다. 이날의 진압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제압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졌는가. 대통령실 진입을 시도했던 이들은 총 4명. 각 서너 명의 병력들이 달라붙어 청년들을 끌어냈다. 현수막을 펼치거나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니었다. 국방부 영내에 뛰어들었다는 이유로 아스팔트에 얼굴이 짓눌리고, 팔이 뒤로 꺾이고, 손목이 케이블타이에 묶였다. 백 씨는 포박 과정에서 “계엄군이 떠오르기도 했다”며 분노했다. 최석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는 과정상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맨몸으로 들어가 아무 폭력행위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물리적으로 제압한 상황이 의문스럽다”며, 특히 “어떠한 장구로 사람들을 무조건 묶어도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고 꼬집었다. 둘째는 ‘케이블타이’가 군사경찰장비로 구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군사경찰의 직무수행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는 군사경찰장구가 명시돼 있다. 수갑, 포승, 경찰봉, 전자충격기, 전자충격총, 방패, 헬멧 등 보호장구 및 고무탄총까지. 여기에서 케이블타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과잉진압’ 논란을 피하려고 수갑 등의 장구가 아닌 케이블타이라는 ‘비공식 장구’를 쓴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못 들어가게 제지를 할 수는 있는데, 수단이 과도했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장구들이 있을 텐데, 케이블타이로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죠.”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도 같은 지적이다. 그는 “케이블타이는 일할 때 사용되는 것이지 상식적으로 사람한테 쓰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후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 병력의 수가 (청년들보다) 더 많았을 텐데, 상식적이지 않은 도구로 사람을 묶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비상식적인 도구로 사람을 묶은 사건. 몇 해 전 크게 이슈가 됐던 이른바 ‘외국인보호소 새우꺾기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2021년 모로코 난민 A 씨는 외국인보호소에서 손발이 뒤로 묶인 채 독방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이 논란이 되자 법무부는 “법령에 근거 없는 방식(‘새우꺾기’)의 보호장비 사용행위, 법령에 근거 없는 종류의 장비 사용 행위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A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나섰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5월 “강제력을 행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보호장비로 케이블타이나 발목 수갑, 박스테이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법령에 근거가 없는 방식으로 장비를 사용한 행위는 위법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이날 국가가 1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2년 헌법재판소도 “과도한 계구사용은 신체의 자유,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의 침해가 될 수 있다”며,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을 한 바 있다. 계구(戒具)란 ‘피고인이나 죄인이 도주, 폭행, 소요 또는 자살을 할 우려가 있을 때에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쓰는 기구’를 통틀어 말한다. “포승, 수갑 등을 사용한 신체의 결박은 자연스러운 거동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매우 불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종종 심리적 위축까지 수반하며 장시간 계속될 경우 심신에 고통을 주거나 나아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인간으로서의 품위에까지 손상을 줄 수도 있다.”(헌법재판소 2004헌마49 판결 2005. 5. 26. 일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진짜 갈 데까지 갔다, 이 정권은 정치적인 목소리 내는 국민들을 무차별하게 탄압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입틀막’은 윤석열 정부의 상징이 됐다. 강성희 당시 국회의원(진보당, 전주을)은 지난해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에서 대통령경호처 경호원들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채 들려 나갔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생 신민기 씨도 지난 2월 학위 수여식에서 R&D(연구개발) 예산 관련 구호를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지난해 대통령 경호처가 용산어린이정원에 일부 시민의 출입을 제한하고, 압수수색에 가까운 과도한 소지품 검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관련기사 : <대통령경호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우리가 요청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단체는 오늘(17일)로 27일째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백 씨는 “윤석열 정권이 위기를 느끼고 대학생들의 목소리까지 틀어막은 게 아니냐”며,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될 때까지 농성장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절차에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지난 8일, “경계 근무자가 폭력을 가했다는 대학생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케이블타이 사용 근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용산경찰서 역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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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 식성부터 성격까지 자신을 꼭 빼닮았던 딸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는 아버지는 딸을 위해 투사가 되었다.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위로도 받는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정민 위원장의 이야기.        -2년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활동을 돌아보면 늘 주축에 위원장님이 계셨어요.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여러 투쟁에서도 앞장서시고 언론 인터뷰도 맡아오셨죠. 이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냥 뉴스만 보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이걸 겪으면서 깊숙하게 블랙홀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겪고 알게 됐어요. 어느 순간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사안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되니까요. 차라리 모를 때가 나은데, 알고서 쳐다보면 너무 괴로운 거야. -위원장님의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참사 당시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퇴직하고 2년째 되는 시점이었어요. 사업을 준비하다가 어느 정도 다 갖춰져서 23년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 거죠. 의미를 부여할 게 없는 거예요. 돈을 벌어서 뭐 할 거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게 돼요. 그게 부모거든요.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너무 허망하죠. 사람들이 돈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분노를 해요. 내가 내 아이 키우면서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알아? 감히 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내가 얼마를 받을 건데?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심리적인 상실감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환산해요? 그렇게 내 사업은 다 접고 포기 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던 사업이 있었어요. 그건 못 없애겠는 거예요. 캐릭터 사업을 했는데, 특허도 내놓고 많은 준비를 했단 말이에요. 그걸 없애는 순간 아이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체 대표를 제가 인수인계 받아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아이가 만들어 둔 상품도 엄청 많은데 한 번씩 찾아와주시는 분들에게 무료 나눔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위안과 위로를 삼아요. -주영 씨가 아버지를 굉장히 든든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무뚝뚝해서 아이한테 위로의 말이나 따뜻한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본인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볼 때마다 나랑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너무 많이 들었죠. 식성부터 생각하는 거나 모든 것들이요. 그래서 많이 다퉜어요. 성향이 같으면 나의 단점이 보이거든요.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죠.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 자리를 몇 번 가졌어요. 보통의 아빠들이 그렇게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작에 친구들 불러서 같이 밥도 먹고 이름도 알고 뭐 이렇게 하면 참 좋았겠다 싶어서 후회가 되더라고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요.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 역할을 했대요. 친구들이 힘들 때 인생 상담도 해주고, 들어주고. 아이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부분이 참 많아요. 내가 좀 더 세심하고 배려 있게 관찰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자녀의 꿈을 마음껏 지지하지 못해 미안했던 아버지 아이가 직장 생활 접고 사업 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 물정도 모르고 무슨 사업을 한다고 그러냐 했어요. 너 굉장히 후회할 거다. 책임 질 것이 많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여러 번 만류 했죠. 설득이 안 될 것은 알지만 ‘너 내가 예전에 힘들다 이야기했지?’ 이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한 밑밥이었던 거죠. 그렇게 실패를 단정 짓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한테 말한 게 있으니 힘들다고 이야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계속 무시했어요. 누구 한 명이라도 좀 져주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정리 하면서 보니까 힘들어했던 흔적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아빠가 돼가지고 딸하고 신경전만 펼치고.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인들한테 자녀들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얘기해요. 자식을 보내고 그런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고 한심한 건가 깨닫는다. 너 힘들지? 너 힘들 거야. 그래도 이제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런 위로의 말을 한마디라도 해줄 수 있으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한테는 엄청나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참사 이후 마음이 지치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실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지친 마음을 다루고 계세요?  처음에 심리상담센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심리 상담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저한테 ‘지금 어떠세요?’ 묻는 거예요. ‘괜찮아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게 끝이었어요. 그 뒤부터는 전화를 안 받았어요. 심리 상담을 받는 다른 가족 분들도 있어요. 아직도 잠을 못 이루고 수면제 같은 거 처방받는 분도 있고 사람마다 달라요. 트라우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원봉사 상담사를 만나봤더니 참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분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한 1시간을 같이 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라우마는 어느 순간 ‘탁’ 하고 왔다가 사라져요. 한 번씩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화도 냈다가 막 울기도 하고. 별의별 희한한 감정이 밀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요, 이런 흐름이 주기적으로 오는 게 트라우마의 특징인데, 지금 아무 이상 없다니까 이상 없는 줄 알면 어떻게 심리 상담을 하겠어요. 결국은 공감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공감하고 있구나 느끼면 그때부터 치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떤 심리 상담사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가족들끼리 앉아서 이야기할 때 훨씬 나은 치유가 된다고 느껴요. 유가족과 많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 속에서 공감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보면 시민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이 받으시는 압박이나 부담이 굉장히 큰 것 같더라구요. 위원장님도 대표자로서 느끼실 무게가 결코 가볍진 않으실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가족들하고 다른 부분이 있어요. 앞장서서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가족보다는 훨씬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어요. 제가 단단하지 않으면 못 하거든요. 못 끌고 나가거든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스스로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습관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인터넷에 위원장님을 검색해보니까 직업에 사회활동가라고 뜬 걸 봤어요. 순간 그걸 보고 위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요? (웃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집회에서 발언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유가족이 아니야, 저 사람은 활동가야, 그런데 유가족처럼 행세하고 있어.’ 이런 댓글들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어처구니 없어가지고. 하하. 도대체 뭘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막 웃었거든요. 저는 ‘깜’이 안 되죠. (웃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 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일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대책위 상황실이나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워요. 저는 제 일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그 분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하잖아요.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인정을 받아야 될 분들이에요.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거든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일본의 아카시시 불꽃놀이 압사사고 유가족들이 우리와 연대하기 위해서 찾아왔었어요. 그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하나가 시민단체였어요. 일본은 그게 없대요.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할 수밖에 없대요. 누군가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국 오니까 정말 많은 단체들이 도와주고 지원하는 거 보고 너무 부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시민단체가 참 잘 작동되는 것 같아요. 시너지를 많이 얻고 또 그렇게 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저런 시민운동가, 활동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요. 스스로에게 이익은 되지 않아도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자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떤 끈끈한 무언가. 이웃에 대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거요. 오지랖이 넓은 민족? (웃음) 그런 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겠다고 결심하시기까지도 큰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다들 나하고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불안하고 노출되는 게 싫으니까. 뒤에서 서포트하는 역할만 하겠다 해서 (처음에는) 부대표를 맡았어요. 처음엔 거절을 했었어요. 왜냐면 제 어머니가 이 일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계시거든요.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알게 되면 안 된다. 나는 초상을 두 번 치러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극구 사양을 했었는데 그땐 나서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죠. 가족들끼리도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애 엄마나 아들이 뭘 망설이냐 무조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게 더 우습지 않느냐고 해서 그렇게 결심한 거죠. 오히려 야단을 맞았어요. 왜 주저 하냐고. 한 번은 어쩌다가 어머니가 뉴스를 본 거예요. ‘저기 나오는 사람이 엄청 많이 닮았네.’ 하고 말했는데. 누나가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왜 뉴스에 나오겠어? 뉴스에 나올 일이 없는데.’ 했었죠. (웃음) 1기 운영진 임기가 끝나고 2기에 들어서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뽑는데, 이제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등 떠밀려가고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는데 사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생전 없던 병이 생기더라고요. 다리부터 시작해서 붉은 반점이 생겨서 올라왔어요. 병원에 가봤더니 자가 면역에 이상이 생겼대요. 외부로 드러나는 것들은 괜찮은데 내부로 나타나면 그때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의사가 충분히 쉬면 가라앉을 거라고 해서 작년 10월 1주기 행사를 끝내놓고 쉬었어요. 쉬니까 싹 사라지더라고요. 1주기 땐 여기저기 불려 다녀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언론이나 각종 행사 등 정말 숨 쉴 틈이 없었어요. 그때 하루에 두 건, 세 건씩 인터뷰 하러 다니니까. 저는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 한 번도 없는 굉장히 건강한 체질이라고 생각 했는데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특별법 통과 이후에는 임기도 끝났고, 이제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해야 되겠다 했더니 주위에서 질타를 하는 거예요. 특조위 출발하는데 지금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떡하냐 무조건 책임을 지셔라. 힘들어도 지금까지 해왔으면 끝장을 봐야 될 거 아니냐. 지금 포기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등 떠밀더니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고 이러니까 이제 안 해도 된다. 고민했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 했느냐, 내가 왜 힘든 고행을 겪어가면서까지 이걸 하려고 했던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다른 거 다 제쳐놓고 그냥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을 한 거예요. 내가 유가협 대표로서 일을 한 게 아니다 거기에 의미 부여 해선 안 된다. 나는 어떤 대표나 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로서 부모로서 내가 이 역할을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요. 앞으로도 내 아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우리 아이가 불명예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 그만둬도 되겠다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족들은 안 그랬어요. 투표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반대표를 찍었대요. 아군이 아니고 적이구나 싶었죠. (웃음)   -역사를 보면 대형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 대책이 마련되고 관련 법안들이 만들어져요. 항상 유족들의 목소리와 노력이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에 이러저러한 법들은 다 피해자들이 만들어놓은 법들이에요. 안전과 관련된 법들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죠. 왜 대한민국의 모든 참사 관련 법안들은 피해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몸으로 던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게 참 안타깝고 답답하죠. -지난 2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해오셨어요. 이태원 참사와 유가족 분들의 여러 활동들로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안전해졌다고 느끼시나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못 느낄 수 있지만 저는 확실히 느껴요. 원래 강서 쪽 지하철이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막 끼어서 탄다. 숨이 막힐 정도로 꾸역꾸역 탔었는데, 참사 이후 인원이 다 찬 것 같으면 안 타는 거예요. 그 변화가 있었다는 걸 제가 듣고 그래도 사람들 인식이 심어져 있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최근 열린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잖아요. 경찰 병력이 2500명 이상이 투입이 됐고, 주최 측 인력까지 합하면 인파 관리 인력이 만 명 정도가 됐어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인식이 잠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참사 이후 주는 영향은 크다고 생각을 해요. 일반 사람들은 못 느끼겠죠. 당연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하나하나 바뀌어갈 거라고 믿어요.   -말씀처럼 하나하나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위원장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아직 남은 과제들이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신다면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 드릴게요. 시민들께 한 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왜곡된 정보와 싸워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글을 보고 판단해요. 왜곡된 정보만 있으면 그것만 보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같이 목소리를 내주시는 분들이 잘못된 정보와 싸워주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파할 수 있게 노력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어요. 진실한 부분과 거짓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거든요. 진실의 목소리를 많이 내 주십사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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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⓷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⓷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유족들은 때때로 무인도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공허한 외침으로 느껴질 때, 그들을 일으키고 힘을 북돋은 것은 시민들의 연대와 서로를 향한 공감이었다. 2년 동안 곁에서 든든히 함께해준 사람들 덕분에 유족들은 지치지 않고 더욱 강해졌다. 유가족들이 느낀 뜨거운 연대의 순간들.     -지난 2년 동안 유족들이 거리에 나가있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곳곳에서 투쟁하셨는데 그 시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 활동하면서 느낀 건데 몸을 많이 던질수록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더라고요. 더 격렬하게 몸을 던져야만 그만큼 관심을 가져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심이 적어지고. 그런 마음에 오체투지, 3보 1배, 단식, 삭발 등 많은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울광장으로 분향소를 이전했을 때예요. 참사 직후 녹사평에 분향소가 설치됐는데, 그때는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집에 있으면 못 견디니까 슬픈 마음만 갖고 거기서 지내다시피 했죠. 분향소 옆에서는 보수단체가 마이크 들고 우리를 괴롭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저 사람들은 우리 애들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지? 대한민국의 사회에 대해 점점 눈을 떠가는 시점이었죠. 49제 이후 녹사평 분향소에 시민들 발걸음이 점점 떨어지는 걸 느끼게 됐어요.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많이 알리고 이야기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 때 분향소 이전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참사 100일 추모제를 하는 날 녹사평에서 행진을 하면서 분향소도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죠. 다들 광화문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거기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했어요. 여기서도 이렇게 시달리는데 사람 더 많은 광화문 가서 시달릴 생각하니 엄청 괴로운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들어가지고 후보지를 찾으러 나갔어요. 어디가 좋을까 하다가 세종문화회관 그 뒤편에 공간이 있더라고요. 거기가 도로에서 안으로 더 들어가 있어서 약간 외지면서도 너무 좋은 거야.   -외진 곳이 오히려 좋으셨군요. 공격당할까봐요. 그때는 사람들한테 알리는 것 보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너무 상처를 많이 받으니까 못 견디겠다는 마음이 많이 들어가지고. 게다가 그 앞에는 집회 신고를 낼 수 없대서 더 좋았죠. (웃음) 그렇게 서울시에 협조 요청을 했는데 펄쩍 뛰더라고요.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다가 새 공간을 제안했어요. 녹사평역 지하 4층. 원하면 오세훈 시장이 와서 브리핑도 해 주겠다고요. 그 때가 추모제 열리기 며칠 전이었거든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그래도 제가 혼자 한 번 가봤어요. 지하라 내려가는 시간도 엄청 걸려요. 그런 건 뭐 다 좋았어요. 영정 걸어둘 수 있는 공간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쭉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지나갔어요. 순간 이내 그 공간이 막 흔들리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났죠. 아이들 영정을 걸어둬야 하는데 이렇게 흔들리는 곳을 제안 할 수 있느냐. 그 이후부터 서울시하고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이후 우리가 분향소로 정해둔 (세종문화회관 옆) 공간에 화분 같은 걸 엄청 갖다 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분향소 설치를 못하게요. 광화문에도 100일 추모제를 하려고 돈 많이 들여서 무대를 만들어놨는데 거기에 경찰 병력과 차벽을 엄청나게 동원 시켜놔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울시에 괜히 이야기했구나 후회가 물밀듯이 왔죠. 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는 뒤가 없었으니까 분향소 설치를 못하면 그냥 거기서 죽자. 뒤가 절벽이라도 일단 가자고 결정 했어요. 그래도 막연하게 있을 순 없으니까 후보지를 한 세 군데 정해서 상황을 봐가면서 들어갈 수 있는 후보지에 들어가자고 했고, 그 계획은 딱 다섯 사람만 알고 있었어요. 말이 새어 나가면 경찰이든 또 와서 막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건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 100일 추모 행사 당일, 영정 들고 녹사평에서 서울역까지 와서 잠깐 쉬는데 시민대책회의에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시청에 경찰 인력이 적은 거 같다. 잘하면 서울시청 광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결정을 해달라고 연락이 온 거죠. 우리가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할 처지도 아니니 가능성만 있으면 합시다, 했죠. 우리가 광장에 들어가는 것은 다른 유족이나 행진하는 시민들 아무도 생각을 못했고요. 경찰들도 광화문에 밀집해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엄청 불안하더라고요. 그러다 서울시청에 도착한 순간, 선두 차량에서 마이크에 대고 우리 대책회의 이미현 실장님이 ‘여기에 분향소를 설치합니다.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외쳤어요. 다들 얼떨떨해 했죠. 이게 무슨 소리야? 막 우왕좌왕했어요. 그러다가 몇 명이 트럭에서 천막을 꺼내고 ‘지금 우리가 분향소를 설치할 겁니다. 시민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소리 치니까 그제서야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경찰들도 깜짝 놀라가지고 달려와서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시민들이 전부 다 밀려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대치가 되고 몸싸움이 일었어요. 행진에 함께한 많은 시민들이 달라붙고, 그렇게 천막을 내리고 한쪽에 겨우 설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와중에 유가족과 시민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서 경찰들이 못 들어오게 했죠. -조마조마하면서 그 장면을 봤던 기억이 나요. 영상이랑 사진이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해졌거든요. 시청에서도 철거 인력을 파견했어요. 그런 와중에서 시민들께서 아무도 가지 않고 그걸 지켜주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데 우리 유가족 중 한 분이 경찰들을 향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밀집된 상황에서 아이들을 잃었는데, 우리 아이 또래인 너희들도 이런 걸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좀 비켜줬으면 좋겠다.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경찰 몇 명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경찰 한 명도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이건 안 된다. 이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유가족들의 눈을 보고 판단한 거예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 물러나더라고요. 이후 분향소에 아이들 영정을 놓으니 그 이후에는 경찰들도 손을 못 댔죠. 그 고비를 넘기면서 시민들께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졌어요. 유가족들이 녹사평 분향소에서 굉장히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그때 완전히 에너지를 얻었죠. 왜냐하면 삭발하거나 오체투지 하거나 3보 1배는 그냥 제가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시민들이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단 말이에요. 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마치 우리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무인도에서 아무리 외치고 소리지른다 한들 뭔 소용이 있겠어요. 막 살려달라고 아우성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 편이 이렇게 많구나 깨닫는 순간 사고가 완전히 달라져버리는 거죠. 그 전까지는 정말 연약하고 누가 툭 던지면 상처 받아서 구석가서 울고 막 이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부터 이제 싸워도 충분히 견딜 수 있겠구나 하면서 버티고 훨씬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 정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과 에너지로 계속 싸워나갈 것 같아요. -유가족 분들끼리 더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되었을 것 같아요.  많이 끈끈해졌죠. 그때 유가족들이 시민들과의 연대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 끈끈해지게 됐죠. 사실 우리들의 공통점은 유가족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거든요. 어떻게 보면 모래알 같기도 하죠. 이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제 오랜 친구들이 다 떠나갔어요. 그들도 이 참사를 이해 못해요. 그런데 서로에 대한 친분도, 정보도 없는 유가족들은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깊이 오래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있다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서로 서로 포기를 해버리거나 돌아서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제가 사진으로만 본 이 (희생자) 아이들이 왜 엄청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친숙할까 싶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 속 아이들을 보면 부모들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거예요. (웃음) 이게 참 희한하더라고. 그래서 친분이 뭐가 필요해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필요가 뭐 있어? 아무 필요 없어.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이런 인연으로 같이 마주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지. 다른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아무리 심리치료 심리 상담을 해도 치유가 안 되는데, 유가족이 서로 대화하고 이야기하면 치유가 돼요.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거든요. 세월호나 다른 참사 유가족들과 만나도 똑같아요. 그 분들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고 공감하기 때문에 만났을 때 오래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요. 지금 세월호, 오송 참사, 대구 지하철,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참사 등 대한민국의 각 참사 피해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분들도 많은 활동을 하시고 행사 때마다 같이 연대해서 목소리도 내고 있는데 그러면서 더욱 크게 느껴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요.   -10월 5일 남산 둘레길 걷기 행사에서 떠나기 전에 호주에 계신 유가족 분하고 현장에 모인 분들이 영상통화를 하시더라구요. 그게 참 인상 깊었어요. 이태원 참사의 경우 외국인 희생자가 26명이나 돼요. 그런데 외국인 유족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기 어려워요. 정부에서도 알려주는 것이 없고요.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정보를 주고 뭔가 하려고 노력하죠. 1주기 행사 때 이란에 있는 유가족들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했었는데 대사관에서 이유 없이 비자를 안 내줘서 못 온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너무 안타까워서 1주기 행사 때 외국인 유가족 분들이랑 영상 통화를 했었어요. 줌을 열어서 같이 영상으로 이야기했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올해 2주기에도 할 예정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지난 5일에도 우리가 시민들이랑 둘레길 걷기 행사를 한다고 하니 호주에 있는 유족분들이 인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었어요. 환경이나 국적이 다 다르지만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셨을 것 같아요. 한국에는 유가족들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분들은 자기 나라에서 홀로 계셔야 하니까요. 그렇죠. 여기 와서 내 동지를 만난 느낌을 가지니까. 우리 분향소에 있을 때 해외 유가족들도 많이 오셨었어요. 한 가족은 우리가 행사할 때 입는 보라 조끼, 보라 잠바를 나눠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같이 입고 집회에 나가고, 유가족들과 만나서 허그하고 여러 가지 함께 하고 돌아갔는데 가서도 메일을 보내와요.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느끼는 공감과 연대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이야기했던 시민들과 함께하는 둘레길 걷기 행사가 작년에 이어 지난 10월 5일에 2주기를 맞아 또 다시 열렸어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셨고, 밝고 따뜻한 분위기여서 참 좋더라구요. 작년하고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작년 10월에는 맑은 날에 밖에서 걷는 게 힘들었어요. 그 때는 많이 힘들 때라 왜 여기서 이걸 하고 있지 왜 걷고 있지 별의 별 생각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다르더라고요. 함께하는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어요. 저도 조금 놀랐는데 유가족들도 활발하게 웃고 시민들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고요. 그래서 아마 시민들도 편하지 않았을까. 같이 어울리고 함께하는 것이 좋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동안에 유가족들도 이전보다는 편안해진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올 해 2주기 행사를 많이 준비하셨어요.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행사가 있으실까요? 우선 오늘부터 (9일) 매주 수요일에 별들의 집에서 함께 보라 팔찌와 리본을 만드는 행사가 열려요. 그리고 12일, 19일 주말에는 우리가 2주기 추모제와 10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포스터를 붙이면서 서울 둘레길을 시민들과 함께 걷습니다. 함께 연대해 줬던 시민단체나 또는 청년단체, 정당 분들을 초청을 해서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연대와 공감의 시간도 가지고요. 저희가 그동안 받기만 해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가지고요. 24일에는 2주기 159분 콘서트, 26일에는 시청 광장 시민 추모대회를 열고, 29일에는 국회에서 추모제를 엽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 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가 있어요. 청년들과의 나눔 행사인데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힘든 청년들이 이태원에서 압사를 당하고, 전세 사기로 돈 잃고..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위해서 해주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봐요.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을 잃었지만 모든 유가족들이 부모의 마음으로 청년들을 위로해 주고 같이 공감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대역 근처에 카페를 하나 빌렸어요. 음료랑 유가족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 나눔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청년들하고 나누고 연대하고 공감하면서 서로서로 위로받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올 해 10월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처음 기획한 행사인데 반응이 괜찮으면 해마다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에서 ‘별들의 집’으로 오신 게 6월 16일이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가 애도의 공간이었다면, 별들의 집은 어떤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기억과 소통의 공간이에요. 시민들과도 소통하고 유가족끼리도 소통하고요. 우리가 가족끼리 여기서 월에 한 번씩 간담회를 하거든요. 다 모여서 소통도 하고. 애초에 참사 이후 우리가 정부에 요청했던 게 이거였어요. 기억의 공간과 소통의 공간을 좀 마련해달라. 만약에 이 공간이 진작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분향소를 안 만들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도 필요했었다는 거죠. -이 곳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은 11월 2일이 지나면 옮겨야 한다고 들었어요. 이 건물이 재개발 예정이라 무조건 이전을 해야 해요. 이곳이 몇 개월 밖에 못 쓰는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온 이유가 있어요. 특별법이 통과됐으니 야외 분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고, 이제 우리는 특조위 활동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실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아마 이번 주 토요일에 가족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결정을 할 거예요. 어디로 옮기는 게 좋을지.   -평소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다가 참사 관련된 키워드를 보면 맞다, 이태원 참사가 있었지,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분들도 많으시고요. 그런 분들이 어떻게 유가족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연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어요. 오늘 행사처럼 이렇게 와서 같이 팔찌 만들기를 한다든지 같이 한다던지, 기억 공간에 와서 아이들 사진을 한번 보고 또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하나 남기고 간다던지 이런 게 다 연대의 마음이고 하나하나 굉장히 소중해요. 그것까지도 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뉴스 기사에 댓글이라도 하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남겨주시는 것도 굉장히 커요. 제가 녹사평 분향소에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에만 빠져있었어요. 그 때 시민 분들이 와서 같이 애도하면서 저의 손을 잡고 ‘함께하겠습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함께하겠다는 이야기가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저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그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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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명품관 앞 ‘천막’ 생활… 막막해서 눈물이 났다[회사에 괴물이 산다]
[지난 이야기] 이성훈에게 ‘롯데맨’이란 이름은 자부심이었다. 20년 넘는 세월 청춘을 바친 롯데백화점. 하지만 회사는 그런 직원들을 베테랑이 아니라 ‘정리 대상’으로 여겼다. 신동빈 회장이 재벌 총수 ‘연봉킹’에 오르던 그때, 직원들은 ‘신연봉제’란 이름으로 일자리를 위협받았다. 이성훈은 노조를 만들고, 롯데백화점 창사 이래 최초의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난 2월 4일. 그들이 일하는 지점의 지원팀장들이 와서 ‘연차 휴가 변경 요청’ 공문을 전달했다. 이미 승인했던 연차 휴가를 2월 8일까지로 변경하라는 내용이었다. 휴가를 변경하지 않고 출근하지 않을 경우 무단결근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협박성’ 멘트도 달려 있었다. 근로기준법 제60조 제5항은 ‘사용자는 규정에 따른 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회사가 마음대로 연차 휴가를 변경하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회사가 보낸 공문은 두 사람에게 큰 심적 부담을 줬다. “너무 큰 압박을 느꼈습니다. 천막농성을 하면 기본적으로 긴장된 상태인데 거기에 관리자까지 와서 압박을 하는 거 아닙니까? ‘위에서 보냈구나,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더 심각해지겠네, 잘못하면 징계 받아서 해고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거죠.길거리 천막에서 자면서 몸도 피로하고 심적으로도 힘든 상태에서 그런 공문을 받으니까 호흡곤란도 오고 그랬습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두 지점 점장 명의의 공문은 내용이 똑같았다. 공문을 전달한 다음 날부터 각 지점의 관리자는 이틀 간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복귀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복귀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담당자한테 전화를 해서, 계속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니까, 자신도 위에서 시키는 거여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뒤 집에도 내용증명이 도착했다. 내용은 천막에서 받은 공문과 비슷했다. “내용증명까지 받으니까 아내도 걱정이 되는 거죠.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데 굳이 왜 노조를 하려고 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안 하겠나. 당신만 왜 계속 하려고 하느냐. 이러다가 지방으로 전출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런 얘기들을 들으니까 심적으로 더 힘들어졌죠.” 아내와 부모님께도 많이 미안했다. 스트레스를 계속 받자 점점 더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울화가 병이 된 겁니다. 노동조합이 회사와 소통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멸시만 당하는 거죠.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면 굉장히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돼요. 사람들이 왜 분신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거든요. 근데 (저도 천막농성을 하고 나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죽하면 그랬겠는가….’울분을 해소 못한 사람들은 생각이 극단으로 흘러요. ‘회사가 듣는 척이라도, 그런 성의라도 보여줘야지, 어찌 이리 꿈쩍도 안 할 수가 있나. 분신이라도 해야 회사가 변할까. 롯데타워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면 이성훈은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딸을 떠올렸다. 마흔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해, 유산의 아픔을 겪은 뒤에 얻은 귀한 딸이었다. 유공 표창과 상위 인사고과를 받고서도 승진이 안 돼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르자, 그는 가정이라도 튼튼히 하자며 2015년 9월, 1년 동안 무급 안식년 휴직을 했다.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를 다니며 정성을 다한 끝에, 안식년 휴직 마지막 달에 딸을 임신한 터였다. 안식년이 끝나고 직장에 복귀해, 그동안 그의 빈자리 때문에 힘들었을 동료들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혼자 육아를 하던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다. 마침 롯데그룹이 남성 육아휴직을 의무화한 첫해였다. 동료들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2017년 5월, 6개월 육아휴직을 했다. 육아휴직 중에도 중국어 공부만큼은 계속했다. 중국 지점으로 갈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인사고과에 영향이 있었겠죠. 위에서는 ‘안식년도 쓰고 육아휴직도 썼네, 승진도 안 됐는데 쓸 거 다 쓰네’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육아휴직 직전에는 인사고과가 평균으로 나왔어요. 복직 후에는 하위 고과가 나오더라고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동안 하위 인사고과를 받았다. 그때는 그 사실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딸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천막농성으로 힘들 때도 딸을 생각하면서 버텼다. 연차휴가가 소진되자 두 사람은 회사로 복귀해 근무를 하면서 천막농성을 이어갔다. 퇴근 후와 휴무일에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6개월 동안 천막을 지켰다. 끝까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회사를 보면서 울분과 걱정, 무기력 등 정의하기 힘든 기분들에 휩싸였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죠. (천막) 주위에선 맨날 보안요원이 보고 있고, ‘사유지를 점거하고 있다, 영업방해로 고소하겠다’ 하지…. 손배‧가압류 뉴스 보면 그 금액이 엄청나던데… 불안감이 말도 못하죠.” 밤에 잠이라도 제대로 자고 싶다는 마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2022년 3월 ‘기타 미분류형 우울장애’ 진단을 받았다. 산재 신청을 떠올렸다. 상담을 한 법무법인에서는 산재 승인 확률이 20%도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산재를 신청했다. 결과는 해를 넘겨 나왔다. 2023년 7월과 11월, 이성훈과 최영철은 각각 산재를 인정받았다. 노조활동 과정에서 얻은 정신질병을 산재로 인정받은, 흔치 않은 사례였다. “노사분쟁 문제해결 과정에서의 진정절차, 천막농성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회사와 갈등관계에 노출되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점, 인사평가를 통한 수당 삭감, 익명게시판을 통한 비난과 노조탄압, 천막농성 철거와 관련된 심리적 압박 및 사업장에서 연차휴가 신청 관련 공문을 자택으로 보내는 등의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불안, 우울, 불면 등의 증상이 나타난 점 (…)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이성훈 요양보험급여결정통지서, 근로복지공단, 2023. 7. 24.) 이선규 서비스일반노조 위원장이 그 의미를 설명했다. “산재 심사하는 사람들이 (이성훈과 최영철) 두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결정했겠습니까? 아니면 민주노조에 무슨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여기를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었겠습니까? (산재가 인정됐다는 건) 심각한 정도가 그들도 인정할 정도로 심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죠.”(이선규) 이성훈은 지난해 9월 심리검사를 다시 했다. 우울, 불안, 자살사고, 사회적 불편감 등 모든 항목에서 정상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산재 승인을 받고 2개월이 지났지만 그의 심리상태는 여전히 불안했다. 올해 초 80일 정도 산재 요양을 신청해, 자연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연봉이 줄어든 상태에서 병가까지 내니 생활이 안 돼, 예정보다 빨리 회사에 복귀했다. 이성훈의 산재 인정 기간은 올해 5월로 끝이 났다. 이제 산재보험을 통해 병원비를 지원받는 건 불가능하다. 이성훈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산재 승인받는 데 1년 4개월이 걸렸습니다. 비용 생각하는 사람은 병원 상담이나 요양 같은 걸 잘 못해요. 돈을 미리 끌어다 쓰는 건데, 나중에 산재가 나오면(승인되면) 다행이지만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산재 인정(기간)도 1년 6개월로 짧고요.” 노조 활동도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최영철이 지난해 명예퇴직을 받아들여 회사를 떠난 뒤, 이성훈이 지회장을 맡았다. 1인시위 등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사측과의 논의 테이블은 아직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냥 (회사를) 나가라는 건데, 나이 들어서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신연봉제 전에도 고과 따라서 성과급 깎고 그랬거든요. (저희 입장은) 그 정도로 하자는 겁니다. 기본급 깎고 수당을 전액 삭감하는 건 너무하다는 거죠.젊은 직원들도 의욕이 없어요. 우리들을 보면 자신들 미래가 보이겠죠.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될 거야. 기회 있을 때 빨리 이 회사에서 탈출해야 돼.’ 이렇게 기업문화도 망가지고 있으니 함께 논의해보자는 겁니다.” 이성훈의 정신질병 산재와 노사관계 전반에 관해 롯데백화점 측에 반론을 구했다. 지난달 3일 이메일 회신을 보내왔다. 기본급까지 삭감하는 신연봉제를 실시한 배경에 대해 사측은 “신연봉제는 저성과자 관리보다 고성과자 보상 확대로 인한 인재 관리 및 직원 동기부여에 초점을 맞춘 제도로서 고과 상위자 비율이 하위자 비율보다 3배나 많게 운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육아휴직 사용 사실이 고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한 고과 불이익은 없다”면서, “매년 300여 명의 직원들이 자유롭게 육아휴직과 출산휴직을 사용 중”이라고 답변했다. 이성훈이 노조 간부가 된 뒤 품질평가사로서 식품안전평가 등에서 중상위 평가를 받고도 인사고과상 하위평가가 이뤄진 부분에 대해서는 “단순한 위생 적발 건수 외에도 품질평가사로서 업무성과 및 역량(위생 법규 이해, 관련 업무계획 수립 및 구조화, 식품안전 시스템관리, 정보 수집 및 활용, 업무 완결성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롯데백화점지회와의 노사관계 개선 계획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을 해왔다. “특별히 대립하는 등의 갈등관계 없이 적법한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대표노조인 롯데쇼핑노동조합과 교섭파트너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복수노조 사업장이 준수해야 할 교섭 원칙 및 공정대표의무와 같은 노동법령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사측의 답변을 다시 읽으면서, 롯데백화점 본점 건물에 붙어 있던 팻말이 떠올랐다. ‘2023 노사문화우수기업.’ 사측도 갈등 없이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고, 나라에서 상도 탔다는데, 왜 이성훈과 최영철은 “회사와 갈등관계에 노출되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점” 때문에 정신질병 산재를 인정받은 걸까.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성훈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는다. 그리고 매주 가는 등산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대학교 때 산악부였거든요. 젊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게 등산이고, 또 지금 돈이 없잖아요. 비용도 안 드니까 좋죠. 처음엔 동네 야산도 못 올랐어요. ‘예전에 암벽등반까지 하고 아마추어 전문가 소리도 들었는데 이걸 못할까.’ 악착같이 달려들었습니다.한번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엄청나게 나요. 그게 그냥 지워지겠어요? 등산은 매주 다른 산을 가면서 다른 도전을 하잖아요. 늘 110%, 120%에 도전하는 거죠. 힘든 산을 오르고 도전하면서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지금 사회에선 거의 쓸모없는 존재가 됐지만, 아직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 위로 같은 거요.” 등산을 갈 때면 기본 6시간 이상 걸리는 아주 힘든 코스를 택한단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또, 돌아오면 쓰러져서 자기 때문에 2·3일은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잘 수 있어서 좋다고.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최소한 성년이 될 때까지는 보살펴줄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그가 의지를 다졌다. 지난 6월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곧 설악산에 도전한다고 했다. “(정상까지) 가긴 가겠죠. 중간에 포기할 것 같진 않아요. 얼마나 힘들게 가느냐, 그런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가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 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대청봉’이라고 쓰인 바위 뒤에서 주먹을 불끈 쥔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상까지 내리 11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 나오는 대사를 빌려왔단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요!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국어사전은 ‘존중’을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이라고 정의한다. 강자가 시혜를 베풀 듯이 말하는 존중은 언제든 철회될 수 있고, 기울어진 권력관계는 변하기 힘들다. 하지만 약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힘을 갖는다면, 그렇게 제도와 구조를 바꾼다면 말 그대로 ‘높이어 귀중하게 대해’질 터이다. 이성훈은 거대한 재벌에 맞서 작지만 큰 힘, 두려움을 조직하고 있었다. <끝> 취재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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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잘못된 거짓 정보는 계속해 퍼지고 모욕적인 막말과 혐오성 발언이 댓글 창에 쏟아진다. 이들의 가슴을 찢어놓는 이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이 '2차 가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또,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 희생자·유가족·생존자를 향한 '2차 가해' ○ 참사를 향한 '2차 가해' 논란? 정치권부터 반성해야  -저는 기사를 보면 댓글을 항상 읽게 되더라고요. 이 기사에 어떤 댓글이 달렸나. 지난 1주기에 유족들이 언론사에 댓글을 막아달라고 먼저 요청하기도 했잖아요. 2차 가해성 막말, 댓글이 여전히 달리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쳐야 될 부분이 이거라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큰 병폐예요. 정치인들이나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이 병폐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댓글로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요. 어떠한 의지와 인식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가스라이팅이 되어서 하는 거예요. 물론 완전하게 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태원에 갔던 애들이 잘못이지 왜 정부를 탓하냐. 걔네들이 무지해서 그런 거 아니냐' 이런 것들이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이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내서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 거다'라고 결심했어요.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인지 그런 말을 한 게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깨닫게 해 줄 거야 하는 각오를 가졌는데 그만큼 생각이 없이 댓글을 달고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생각 없이 2차 가해를 하게끔 만드는 사람들이 정치권이에요. 많은 국회의원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생각 없이 메시지를 던지고, 그걸 받아들인 사람들이 결국 그 메시지로 남을 공격하거든요.  저는 그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정치인부터 반성해야 해요. 자기들이 만들어내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거죠.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이런 사회적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찾아보고, 모든 것에 자기의 주관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거의 뉴스에 나오는 거 보고 '야, 아니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언론 매체나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가를 그들 스스로 깨달아야 되는데, 그게 안 되면 이건 고쳐지지 않아요. 2차 가해는 완전히 정치적인 논리에 빠져서 하는 거란 말이에요. 참 비열한 사람들이다.. 2차 가해를 정말 고치기 위해서는 법적인 제도를 두고도 별로 의미가 없다고 봐요. 그러면 또 언론의 자유를 막니 안 막니 그런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런 것보다는 먼저 정치권이나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거다. 우리의 말이 정말 조심성 없었고 그렇게 깊은 판단을 하고 말하지 못한 것들이 여파가 크게 작용해서 2차 가해로 가는 모습도 있었다' 이렇게 반성하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정치권에서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고칠 거 아닙니까. 2차 가해를 한 사람들한테 무조건 '너의 잘못이니까 너희가 고쳐'라고 해버리면 소용없어요.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죠. 정치권 발언으로 국민 여론이 휩쓸리는 것도 사실이에요. 일부에서 '유가족의 활동이 정치적이다' 발언해 버리고 그때부터 정치적 폭동으로 몰리고 낙인이 찍히더라고요. 지금까지 역사가 그래 왔어요.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그래요.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한테 전파가 되죠. '특조위를 할 필요 없다. 세금 낭비다. 이걸 왜 하냐' 다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유가족들이 돈을 원한다? 모든 게 정치인들 입에서 나오고 확산이 됩니다. 일반 국민들이 그대로 받아들이죠. 국민들에게 잘못된 왜곡된 정보를 주지 않으면 일반 시민들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요. 뭘 알아야지 판단하죠.  ○ 정치인들에게 '공감'을 호소한다 저는 그게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2차 가해의 발생이나 근본 원인이 정치인의 당리당략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있다고 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지탄받아야 되고요. 그런 사람은 배지를 달면 안 되는 사람들이죠. 제가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공감 능력이 없는 정치인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요.  예를 들어서, 정말 이태원 참사가 밉고 인정을 못하는 거라면 다른 참사 유가족들에게는 손을 내밀어야죠. 많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요. 그것은 공감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불행이고, 그런 사람들은 절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공감 능력이 없는 국회의원들 정말 많이 봤어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를 하지? 저는 그게 굉장히 잘못됐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삭발하고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할 때 많은 국회의원들이 찾아왔지만 참 공감 능력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속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여야를 떠나서 그런 마음을 많이 느꼈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그래도 국민들이 믿음을 가지고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공감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해요. 저는 그런 분위기가 정치계에서 좀 있어야 되지 않는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도약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거고.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맨날 죽자 사자 싸움박질만 할 게 아니라, 입으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우리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정치가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것들을 자성해야 합니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요?  아픔을 가진 국민들한테 위로의 이야기 한마디 하는 것. 영향력 있는 사람이 와서 그런 위로를 많이 하면 다른 사람들도 보고 저렇게 해야 되는구나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걸 못하게 막으면 사회가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 이슈만을 먹고 산다? 언론은 언론다워야 -참사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그동안 지내오면서 언론에 대해 느꼈던 것은 언론은 이슈를 먹고사는 집단이라는 겁니다.  저는 그런 판단이 들더라고요. '이슈가 없는 곳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이게 과연 맞는 건가? 언론은 장사가 아니잖아요. 뭔가를 팔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의 언론도 고민해 봐야 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저희가 작년 봄, 여름 오기 직전에 한 3개월 동안 완전히 언론에서 외면당한 적이 있었어요. 기사가 단 한 줄도 안 나왔어요. 3개월 동안. 완전히 소통이 막혔던 시점이 있었어요.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이슈화를 시키지 않는 거예요.  우리를 자극하고 나서면 이슈화가 되잖아요. 아무런 자극도 없고 말도 안 하고 완전히 외면해 버린 거예요.  기사 한 줄 안 나오는 숨이 탁탁 막히는 그런 시기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작정을 했죠. 어떤 언론이든 어떤 인터뷰든 무조건 하겠다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때 느꼈어요.  그때 너무 답답해서 한 매체를 찾아갔는데, '왜 한 줄도 보도 안 해주냐' 그러니까 '이슈가 없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구나 한계구나라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 이후로 언론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이슈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야겠다. 우리 필요에 의해서 할 수밖에 없잖아요. 욕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현실이라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야겠구나 고민을 계속했던 거죠.  그 연장선상에 삼보일배도 있었고 오체투지도 있었던 거예요. 유가족들이 처절하게 몸을 던져야만 언론에 나가는 거예요. 노출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한 거죠. 물론 그렇게 하니까 언론에 많이 노출이 되긴 하더라고요.  서글픈 마음이 있었어요. 언론이 이슈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변화를 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고 봐요. 꾸준하게요. 저는 그 꾸준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슈가 있든 없든 어떤 상황에 대해 꾸준하게 돌아보고 짚어보고 확인하고. 현시점에 여기는 어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데 또 여기는 어떤가. 계속 되짚고 되짚어보고. 이런 것들을 꾸준히 해야 사람들한테 각인도 시켜주고 거기에서 변화하려고 노력되어지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건데, 그때 반짝하는 그거 하면 딱 끝이잖아요.  그러면 멈춰버려요.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언론으로서의 어떤 기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고, 민생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게 뭐 하는 짓인가. 언론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절대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언론도 있겠죠. 그러나 전부 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전부가 그래요. 이슈가 되니까. 이슈를 먹기 위해 모두가 매달려서 그것만 하는 거예요. 언론들이 반성을 해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MBC 라디오 <시선 집중>에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우리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유일하게 보내는 매체 프로그램이었어요. 특별법 통과되기 전까지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전하겠다고 했어요. 꾸준히 목소리를 내보내줘서 그것만 듣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유가족들이 방송을 엄청 부담스러워했어요. "내가 무슨 방송에다가 이야기를 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진솔하게 있는 이야기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해서 힘들어하면서도 했어요. 그래도 나가서 또 다들 잘하더라고요.  연말에 시선집중이 상을 받았어요. 유가족 이야기를 듣는 이 프로그램 때문에 상을 받아서 작가님들이 우리 분향소에 찾아왔더라고요. 음료수랑 잔뜩 사 와가지고. 참 고맙죠. 그 꾸준함. 꾸준하게 목소리를 내주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언론이 해야 될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태원 참사가 끝났으면 더 이상 안 해도 괜찮지만 끝나지 않았어요. 사안이 진행 중일 때는 언론들이 계속 꾸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게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참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게 너무 많아요. 너무 많은 걸 깨닫고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돼서 차라리 모를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 "저희는 연대의 마음을 바랍니다."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각, 사회의 시각에 대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저희가 시민들한테 무슨 당부를 드리겠습니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단지 이런 건 있습니다. 저희는 항상 연대해 주길 바래요. 저희의 마음은 항상.  사실 별들의집 공간에 이전하고 난 뒤에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오지는 않거든요. 분향소에 있을 때는 시민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다가 여기 오니까 발걸음이 뚝 끊기는 거예요. 그걸 굉장히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유족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그냥 우리 잊혀지는 거 아니야? 이런 마음을 가지는 분들이 많았는데. 제가 그때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시민들한테 우리의 슬픔이나 아픔을 강요해선 안 된다' 예요. 아픔과 슬픔을 자꾸 공유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시민 스스로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야겠다. 이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었을 때만 가능하다. 절대 억지로 해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항상 해요. 도로 앞길에 수많은 인파가 왔다 갔다 해도 여기에 들어올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 마음이 가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만 오는 거지. 지나가다가 여기 기억의 공간이 있는데 한번 가볼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전혀. 그걸 서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해요. 왜냐하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니까요.  예를 들어,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가는데 여기 들어가서 한번 구경해야지. 이렇게 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어요? 내가 오늘은 전쟁기념관에 가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야만 가지는 거지. 그 앞을 지나간다고 다 가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시민 분들이 불현듯 한 번씩 생각날 때가 있어서.. 언론 매체를 통해서든 어디서든 이태원 참사가 생각날 때, 그때만이라도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생각해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걸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매체를 통해서나 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한 번씩 떠오를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왜곡된 정보 말고 정확한 정보를 좀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정확한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알고자 해 줬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그래야만 많이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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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10. 29 이태원 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2주기를 앞둔 지금, 유가족들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지난 9일, 서울 중구 부림빌딩에 마련된 임시 기억·소통 공간 '별들의집' 에서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났다.  ■ 다시 돌아온 10월, '참사 2주기' 맞는 유가족 -어느새 10월이 됐네요. 언젠가 '우리에게 10월은 굉장히 아프고 시린 달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 있어요. 참사 2주기를 맞는 마음.. 어떠실까요?   10월은 유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달이에요. 사실 1년 중 너무나 좋은 한 달이잖아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고요. 이렇게 좋은 한 달이 우리한테는 굉장히 아프게 다가오는 달이라 너무 서글프기도 하죠. 놀러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는 집 안에만 있고요.  10월을 기억하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게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도 밖으로 나오자. 나와서 뭔가 하고 사람들한테 10월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라도 하자. 그런 마음으로 10월을 보내고 있어요. 지난주부터 <시민들과 주말걷기> 행사를 시작했는데, 만나서 함께하다 보면 웃을 수도 있고 참 좋은 것 같아요.   -1주기와 2주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까요?   많이 다르죠. 1주기 때는 10월이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어요. '10월을 어떻게 보내지? 어떻게 해야 되지?' 10월 29일이 다가올수록 당시 기억들이 자꾸 되살아나기 시작하니까 많이 힘들더라고요. 그때는 오로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만 견디려고 했었는데 올해 10월은 달라요. 우리가 해야 될 목표가 뚜렷해졌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지가 명확해졌으니까요.  아이들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다 날아간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에요. 아이들이 자기들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없애주는 것. '너희 잘못이 아니야. 국가와 정부가 잘못해서 만들어진 참사야. 너희들은 정말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들이야' 라는 것들을 밝히기 위한 것이요. 그래야 아이들의 명예가 고스란히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 특별법 통과부터 특조위 출범까지... 유족이 전하는 숨겨진 뒷 이야기 ○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회 통과…긴박했던 순간들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얼마 전,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우여곡절이 참 많았지요. 특별법 통과 목표가 지난해 12월이었는데, 올 5월에야 통과 됐더라고요? 야당 단독으로 통과됐지만, 일단 법안이 통과됐어요. 특별법이 통과되는 시점에서 참 묘한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1년 동안 특별법 통과를 위해 길거리를 헤매고 목소리를 내고 몸을 다 던지는 고행을 했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했고 완전히 외면하고 거부해버렸었잖아요. 굉장한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거든요. 아이들한테 '우리가 법안을 만들어서 올렸어' 했는데, 거부당하니까 어찌할 줄 모르겠는 거야. 이 막막한 심정을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했어요. 유가족들이 절망감 때문에 포기할까 봐 걱정이 됐어요.  재의요구권이 거부돼 다시 국회로 돌아오면 여당 국회의원들 찾아가서 '찬성표를 많이 확보해서 다시 거부권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설득하고 희망을 주려고 했어요. 끈을 놓지 말라고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고. 유가족들은 절망감에 빠져있고, 저도 기진맥진 탈진한 상태에서 집에 멍하니 있었어요. 그런데 전화가 온 거예요. 지금 특별법 관련해서 여야가 합의를 하려고 한다. -갑자기요? 그때가 언제였어요? 지난 5월이었죠. 굉장히 생뚱맞았어요. 처음엔 신뢰 못 했어요. 계속 그래왔으니까. 협상만 하다가 서로 안 맞으면 어그러지는 식이었으니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와 영수회담을 할 때 말을 잘못한 게 있었어요. 법리를 잘못 해석하더라고요.  '영장 청구권'과 '영장 청구 요구권'은 완전히 다른 사항이거든요. 특별법에는 영장 청구 요구권이 들어있었어요. 대통령은 영장 청구권이 들어있어서 위헌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영장 청구는 오로지 대한민국에서 검사만 할 수 있는 권한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특별법에 있는 일반 민간인 특조위원들이 그 자격을 갖는다는 것은 위헌이고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아니거든요.  영장 청구 요구권은 검사한테 우리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검찰에 '영장 청구를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거란 말이에요. 검사가 판단을 해서 '이거 가지고는 안 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검사가 '오케이' 하더라도 판사한테 영장 청구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판사가 '아니야' 하면 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요구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대통령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걸 보고 저 실수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통령이 영장 청구 요구권을 비롯한 독소 조항만 없애주면 특별법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니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자. 이걸 삭제시키면 특별법 통과시켜 줄 것인지 강하게 정부 여당에 푸시하자고 했죠. 그런 상황 과정 속에서 여야 협상을 다시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했어요. 이게 뭘까?  믿을 수가 없으니 좀 지켜보자. 그런데, 한 30분 있다가 다시 전화가 온 거예요. 여당에서 요구하는 조항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요구를 받으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한다.  조항이 뭐냐 물었죠. 아까 말한 대통령이 실수한 부분 ① 해당 조항을 빼 달라. ② 특조위 기간을 (1년+3개월 연장) 9개월+3개월 연장으로 해 달라. ③ 특조위원장 추천을 여야 합의로 하자. 이 3가지 조항을 이야기했어요.  급하게 운영위원들과 대책회의가 줌 회의를 통해 논의하고 결정을 했었어요. 판단했을 때 '대통령이 실수한 부분은 없어도 큰 관계없다. 오케이 그거는 빼줄게' 그런데, 기간은 1년+3개월 연장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무조건 1년은 지켜야 된다고 했죠.   특조위원장 자리는 여야 합의로 해서 하자고 제의했는데, 합의는 애매모호한 거예요. '합의가 아닌 협의로 하라'고 했어요. 협의는 기한이 있어요. 계속 논의하다가 기한이 넘어가면 그냥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협의로 하자고 전달한 거죠.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한 1시간 있다가 전화가 왔는데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우리가 얘기한 것들을요. 깜짝 놀랐어요. 전혀 기대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유가족들이 오케이만 하면 바로 여야 원내대표가 기자회견하고 발표할 거라는 거예요. 고민할 시간이 길지 않았어요. 1시간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 시간이 저한테는 가시방석이었죠. 모든 유가족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고, 설명을 들을 수도 없고, 오로지 내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 무거운 짐이 나한테 온 거예요. 그런데, 머리를 딱 비우고 딱 이것만 생각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어떻게 선택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했어요. 어떤 선택이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선택일까.  삭제한 조항은 특조위 활동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이 있는 항목들은 아니라고 판단되었고, 지금 법안 통과시키지 못하면 앞으로를 장담할 수 있을까, 입법이 어떻게 될지, 정치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고민하다 전화했죠. 오케이. 그리고 잘못되면 모든 책임에 대한 돌은 내가 맞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정세가 보이잖아요. 상황이 점점 눈에 보이면서 이때 특별법 통과 안 됐으면 큰일 날 뻔했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법이 통과 안 됐으면 사실 이 공간으로 오지도 못했어요. 분향소에 계속 있었어야 했어요. 지난여름 얼마나 폭염에 시달렸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어떻게 견뎠을까요.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했냐면요. 이번에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무죄를 선고받았잖아요. 만약 법이 통과 안 된 시점이었다면 모두 다 절망에 빠졌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특조위가 있잖아요. 그게 굉장히 큰 위안이 되는 거예요. '그래. 무죄받았어? 알았어. 특조위에서 조사해서 더 큰 죄를 받게 할 거야'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 경찰은 유죄, 구청은 무죄? '엇갈린 판결'   -아, 그렇죠. 얼마 전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의 1심이 있었어요. 박 구청장은 무죄, 이 전 서장은 금고 선고받았더라고요. 유족들이 법원 앞에서 울부짖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어요. 네. 유족들은 박희영 구청장에게 형사적 책임을 떠나서 구청장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묻고 싶은 거예요. 자신의 지자체에서 일어난 사고잖아요. 지자체장으로서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책임을 느끼고 구청장직에서 물러나야 맞는 이치인 거죠. 그런데, 너무나 당당하게 직을 수행하는 걸 보고 우리는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정권의 실세 라인이에요. '방탄하는구나'라고 느꼈거든요. 재판 과정에서도 똑같았어요. 유족들은 재판하는 중에도 굉장히 많이 분노하고 느꼈어요.  -위원장님은 전 재판과정을 직접 지켜보셨잖아요? 네. 검사가 제대로 역할을 안 하는 거 같았어요. 판사가 몇 번이나 증거 자료 좀 확보해 와라 해도 안 하는 거예요. 판결이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예상을 깨고 징역 7년을 구형했어요. 깜짝 놀랐어요. 웬일로 7년을 구형하지? 의아했는데 무죄가 나왔어요.  간극이 너무 크잖아요. 이건 형식적인 언론 플레이다. 보여주기 위한 거다. 검찰은 열심히 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구나 생각해서 그때 굉장히 분노했거든요. 어떤 판단과 기준을 가지고 검찰이 징역 7년을 구형했고, 판사가 판단했을 때는 죄가 안 된다는 것인지.  징역 7년과 무죄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계속 인터뷰하면서 검찰이 항소하고 제대로 다퉈주지 않으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되고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해야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7일에 항소를 했어요.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텐데 안 할 수 없죠. 항소 시작되면 특조위 조사하고 병행해서 가게 될 텐데 다들 도망갈 길이 없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밉고 괘씸한 건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죄를 씌우고 싶지는 않아요. 죄가 없는 사람을 밉다고 무조건 넣어야 된다? 이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만약에 죄가 없더라도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책임이 있다면 직을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해요.  형사적인 책임을 떠나서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 무죄에 대한 그 의미가 '일을 안 하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예요. 이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 했어, 인파 관리도 안 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무죄인 거야. 그런데, 일을 했던 사람, 무언가를 한 사람, 경찰이든 뭐든 뭘 했던 사람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거죠. 이런 메시지가 공무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한번 고민해 봐야 될 부분이에요. '나 일 안 할래. 가만히 있으면 아무 죄도 안 되는데 괜히 나서 가지고 책임지라고 처벌받으면 나만 손해지. 왜 해?'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죠. 이건 잘못됐고 부적절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혀 없죠. 외국 언론들도 참 이해할 수 없다고 해요. 159명 사망자. 얼핏 듣기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사망자가 많은 참사라 들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성수대교 붕괴됐을 때 국무총리, 국토부 장관 다 그만뒀어요. 그 사람들이 대교 만들 때 무슨 책임이 있었겠어요? 없어요. 그렇지만 여파라는 게 있기 때문이죠.  관료들이 있는 이유가요. 그런 상황 생기면 대통령이 그만둬야 돼요. 하지만, 대통령이 그만둘 수 없죠. 국가에 혼란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국무총리, 장관이 있는 거예요. 대통령을 대신해 책임지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안 져요. 그러면 책임은 대통령한테 계속 가 있는 거예요. 사라지지 않는 거죠. 우여곡절을 겪었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고, 참사 22개월 만인 9월 비로소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송기춘 위원장의 약속처럼 특조위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원을 풀어줄 수 있을까. 특조위가 조사하고 밝혀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꼼꼼히 짚어본다. ■ "진상규명 이제 시작" 특조위 출범과 해결 과제 -지난 9월 23일,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수사를 위한 별도의 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유가족 측 입장이었죠?  특수부 수사 때부터 부실 수사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부가 방탄하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조사할 수 있는 기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목매달았던 거죠. 얼마 뒤면,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선고 나올 텐데 사실 기대가 없어요. 검찰에서 김  청장은 불기소해야 된다고 1년 동안 방탄을 했어요. 죄가 없다. 수사심의위에서 기소 의견이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기소했는데 금고 5년을 선고했어요. 불기소해야 된다고 떠들더니 금고 5년을 때린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거잖아요.  박희영 구청장 재판과 똑같이 기대치가 없어요. 겉보기로만 해놓고 직접 선고는 전혀 다른 각도로 나올 확률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직접 팔 걷어붙이고 하지 않으면 그냥 덮여 버리고 말 거다. 진실을 밝힐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 가지, 특조위에 대해서 정부 여당이 무용론을 많이 주장했거든요. 세금 낭비니 어쩌니. 국정조사나 특수본에서 다 했는데 왜 또 하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 시각으로 국민들도 보고 있어요. 특조위에서 무언가를 밝혀내지 못하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어떤 재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영원히 특조위를 꾸릴 수 없을 거예요. 무용론이 되어버리고 말 거예요. 그래서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겁니다. ○ 특조위가 반드시 밝혀야 할 과제들 -유가족들이 특조위에 '1호 진상규명 조사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나요?  (*진상규명은 특조위의 자체 직권조사, 유가족 등 관련자 신청으로 이뤄지는 신청 조사로 나뉨.)  유가협 차원에서 공통된 과제예요. 모든 가족의 공통된 의문점을 1호로 접수한 거고요. 11월쯤 2주기가 끝난 후에는 각 가족 개개인들이 가진 의문점에 대한 진상 조사 신청을 할 거예요.     -추가 신청은 개별적으로 하나요? 네. 희생자들마다 의문점이 달라요.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개개인의 기록은 다르니까요. 어떤 유가족은 내 아이는 계속 살아 있었다, 체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의문이 드는 것들을 찾아봐 달라고 하는 부분이 있겠죠. 사망자 시신이 소방 기록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그때 당시 영상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녔는데. 길에 아이들 시신이 눕혀져 있는 게 있어요. 7~8명 정도. 그런데, 하의 탈의를 시켰어요. 얼굴만 옷으로 덮어놓은 게 있었어요. 너무나 의아했던 부분이죠. 하의 탈의를 왜 시켰지?  누워 있다가 생존한 애도 있어요. 자기가 기절해서 누워 있는데 너무 추워서 깼대요. 그런데, 옷이 다 면도칼로 찢어져 벗겨져 있었다는 거예요. 그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대체 왜 이유가 뭐지? 왜 그렇게 했지? 의문이 드는 거죠. 보통 시신을 그렇게 방치하지 않거든요. 덮어 놓아야 맞는 건데.  또 사진 찍는 걸 제재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재해야 되는 거예요. 경찰도 한 명 서 있었어요. 그렇게 두면 안 되거든요. 미스터리인 거죠.  계속 유류품도 조사했었잖아요. 만약, 마약이 발견되거나 연루됨이 나타나면 아이들을 그 매개체로 삼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사 발생 초반에 SNS에 잘못된 정보가 많이 돌았어요. 클럽에서 마약 하다가 사고가 났다, 클럽에서 화재가 있었다.   모든 게 왜곡되어 퍼진 거예요. 희생자 159명 중 단 한 명이라도 마약을 가지고 있었거나 연루됐으면 모두가 마약 사범으로 매도 돼버릴 수 있었죠. 이런 사진이 아마 증거 자료가 되었을 거예요. 나중에 가족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정말 성실한 아이들 밖에 없는 거예요. 이태원에 그냥 구경 갔던 애들이에요. 핼로윈을 체험하고 싶어 왔던 애들. 한편으로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어요.  우리가 의문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게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잖아요? 경찰들이 와서 희생자들 유류품을 다 뒤졌어요. 마약 관련된 게 있나 없나 계속 찾고 있었던 거예요. 마약을 한 흔적이 있나 없나. 만약 희생자 중 한 명이라도 마약을 소지하고 있거나 마약과 연루된 무언가가 있었으면 다 뒤집어 씌웠을 거예요. 이게 마약 때문에 생긴 사건이라고. -참사 원인에 많은 의문들 중 '대통령실 용산 이전도 영향이 있다' 지적하는 의견도 있잖아요? 특조위 조사에서 나올 거예요. 참사 전과 후, 그 후 대처. 이렇게 세 가지.  참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데 용산 이전이 굉장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요. 청와대에서 용산 이전할 때 충분한 기간을 가지지 않았어요. 집을 이사하더라도 충분히 준비를 갖춰주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대통령 집무실을 졸속으로 이전할 수 없는 거죠. 공간만 이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가장 핵심적으로 잘못된 것은 대통령실이 이전하면 대통령 경호의 문제가 따르는 거예요. 청와대에 있을 때는 그 역할을 종로경찰서가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청와대에 있었기때문에 종로경찰서가 모든 노하우를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용산으로 와버렸어요. 용산경찰서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거예요. 옮기기 전에 예상해서 인력을 보충시켜 준다든가 용산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고 진행해야 됐어요.  가장 1순위가 대통령 경호란 말이에요. 그런데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가버렸어요. 용산경찰서는요. 재판 과정에서도 증언했지만 대통령실이 이전하면서 업무량이 1.5배가 늘었대요. 능력도 안 되는데 대통령 경호에 대통령실 앞 집회까지 경호하려니까 일정 외 업무량이 늘어나고 견딜 수가 없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인원 보충을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는데 그것도 안 됐다. 재판관이 '대통령실을 이전한 것이 참사에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하냐' 물었더니 그 사람이 '그런 것 같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집회 때문에 발생된 거다, 집회만 없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집회가 없는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니에요. 보수 정권이 집권하든 진보진영이 집권하든 집회는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그게 문제라고 하면 공산국가죠. 모든 국민들도 알고 대통령실도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했다는 게 얼마나 무능한 일인지 근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다 이야기를 하거든요. 용산서 담당 과장이 재판 나와서 증언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자기들은 이태원의 인파 관리에 대한 것들을 지시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상부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빨리 가서 인파 관리하고 구조하라고 했으면 30분이면 갔다는 거예요. 그만큼 대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지시를 받은 게 없다는 거죠.       아이들이 압사당한 채, 길에서 기절해 있는 상태로 무려 50분을 멈춰 있었단 말이에요. 심각한 상황을 인지했으면 빨리 경찰을 보내서 구조 활동을 시켰어야 되는데.. 그러면 많은 아이들이 살 수 있었어요. 지시하면 30분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아무런 지시를 안 했어요.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용산으로 대통령실 이전한 게 영향을 안 끼쳤다고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당연히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김광호 서울청장이 국정조사에서도 이야기했고 법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곳에 경찰 병력이 한 160명인가 140명인가 이렇게 있었다. 예전보다도 훨씬 많은 경찰 병력이 있었다고 했거든요. 경찰 병력 중 50명은 마약 수사대 병력이었어요. 나머지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범죄, 성추행 사건 등에 배치 돼 있었고 인파 관리를 위한 병력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만약, 정보 경찰이 있었으면 사태 심각성을 보고 빨리 전파해서 구조해야 된다고 했을 텐데, 정보 경찰조차 한 명도 없었단 말이에요.   마약 수사대 병력은 사법경찰이란 말이에요. 아무도 경찰인 줄 몰라요. 사법 경찰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듣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경찰이라는 것을 인지 못하니까. 이 사람들은 과연 참사가 벌어지고 수습되는 동안에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가 핵심인데,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요. 국정조사에서 증인으로도 채택 안 됐고, 특수 수사에서도 조사가 안 됐고, 이 사람들만 이상하게 빠져나가 있어요. 아무런 증언도 확보가 안 돼 있잖아요 가장 핵심 인물들인데. 그래서 이번 특조위에는 꼭 그걸 밝혀야 된다고 하고 있어요.  국정조사 때 이야기 나왔던 게 마약 수사대는 한 팀이 5명으로 수사하는데, 당시 50명. 10개 팀이 투입 돼 있었던 거예요. 이 사람들이 생생히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는데 상부로부터 인파 관리를 해야 된다, 뭘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거예요. 자기 직무에만 충실하라고.  경찰 특성상 마약 수사를 하고 있잖아요? 살인사건이 나도 개입 못해요. 그게 경찰의 특성이고요. 직무를 팽개치고 다른 걸 하잖아요? 그럼 징계 대상인 거예요. 눈앞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사람이라면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지금 심각하다.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되냐' 상부에서 뭐라고 지시했느냐가 핵심이에요.  마약 수사대 팀장들이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자기들끼리 회의를 했대요. 그 자리에서. 그래서 마약 수사대 조끼를 갈아입고 그때부터 구조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때는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상태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느 장소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보고를 했는지 이게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에요. 그리고 누구한테 지시를, 보고를 했고, 누구한테 지시를 받았느냐 이게 굉장히 큰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참사가 벌어진 이후, 상황 대처 문제도 지적하고 싶다고요? 제가 오전 12시쯤 현장에 갔는데 그때까지도 도로 통제가 안 되어 있었어요. 살아있는 아이들이 119에 실려서 응급실로 가야 되는데 못 가는 거죠. 도로에 사람이 꽉 차있는데.. 이건 그냥 길에서 죽으라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짚고 싶었던 것은. 당시에 응급환자를 보내기 위해서 병원 응급실에 연락했는데 안 받았다는 거예요. 그것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재난 상황이에요. 전시 상태 같은 상황이라고요. '받을 수 있다, 없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조건 받아야 되는 거죠. 선택적으로 우리 병원은 안 돼?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제도도 분명히 고쳐야 되는 부분이죠. 전시 상태에 준하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무조건 가까운 병원 어디든 응급실은 무조건 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가장 최우선적으로 되어야 되는데, 너무나 부실하고 어이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겉포장은 선진국이라고 해놓고 실상은 완전히 후진국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분명히 살 수 있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굉장히 분노하는 지점이고요. 특조위에서 꼭 이걸 밝혀내야 된다고 유족들은 강조하고 있어요.   -희생자들이 가족에 인계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의문이 많이 드신다고요. 초기부터 공통된 의혹들이 있어요. 제가 현장을 갔을 때 이태원 골목 옆 빈 상가에 아이들 시신이 쭉 눕혀져 있었어요. 거기서 아이를 발견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못 들어가게 막는 거예요. '내가 부모인데 왜 못 들어가게 하냐' 그랬더니 '여기 다 치료 중이라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면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방해되면 안 되지 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시신들이었어요.  왜 부모인데도 못 가게 막았나 굉장히 화가 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아이의 손을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렇게.. 부모들이 찾아왔는데도 인계해주지 않고 계속 놔두고. 우리 아이 같은 경우는 다목적 체육관에 들어가 있었는데, 신원 확인도 되었고 내가 사실관계 확인하면 인계해주면 되는 걸 안 하고 의정부로 보냈더라고요. 의정부 가서 찾았거든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거리로 외곽으로 보낸 이유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재난 대응 시스템을 만드는 데 1조가 넘는 돈을 들여서 만들어놨단 말이에요. 완전 무용지물이에요. 그 많은 돈을 들여 만들어놨던 게 아무 쓸모가 없고 하나도 쓰지를 못했어요. 너무 답답하고 갑갑한 거죠.  -9대 과제에 담긴 유족들의 추가 요구사항은 무엇인가요? 9대 과제 8번은 피해자 지원 체계의 부분인데요. 참사 초기에 정부로부터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하나도 받은 게 없이 방치돼 버리니 그런 문제를 지적하는 거죠.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의 권리라는 게 당연히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던 거고. 당연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이야기 할 수 없는 시스템, 상황.  그리고 주위에서 우리를 억누르게 했던 유가족다움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이 있었어요. 2차 가해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되짚어봐야 될 사회적인 병폐이고요. 한 두 사람의 문제가 되는 게 아니죠. 특조위에 이런 2차 가해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특조위가 출범한 날, 유족들과도 만났죠. 그 날 송기춘 위원장이 '유족과 희생자의 한을 꼭 풀어주겠다' 말을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한'이 진정으로 풀릴 수 있을까요?  가지고 있는 한은 유족들 마다 다를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참사가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만 밝혀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아이들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무질서했다. 자기들이 잘못했다' 또는 '왜 거기를 갔느냐' 이런 왜곡된 시선에 묻혀버리면 영원히 그냥 하지 말아야 될 짓을 했던 아이들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거예요. 그것만큼은 해명하고 싶어요.  열심히 일상을 살아왔던 아이들이에요. 단 한 번의 휴식을 위해 갔던 곳에서 엄청난 일을 당해버린 거잖아요. 도대체 왜 아이들에게 책임이 있냐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휴식할 권리도 있는데. 열심히 일은 해야 되고 휴식은 하면 안 된다? 그런 문제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제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태원을 관광특구에서 해제시켜라' 왜 관광특구를 만들어 놓고 와서는 안 되는 공간처럼 이야기를 하느냐고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거 아니냐고. 관광특구로 지정한 건 오라고 하는 거잖아요. 왜 여기를 갔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하는 걸까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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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캠페인을 끝내며 9월 27일, 글을 시작하기 전 이태원 거리에 카메라와 함께 답사를 나왔다. 금요일이기에 다소 사람이 몰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했고 내가 기억해온 활기 넘치는 상가가 가득했던 거리에는 임대인을 구하는 종이만이 남아 많은 이들에게 쓸쓸한 단상을 남기고 있었다. 사실 이태원은 코로나로 전국이 통제되었던 시절 전부터 꺾여가고 있었다. 문화거리를 불온한 이들이 배회하는 장소라고, 젊은이들이 일탈을 벌이는 장소라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물건이 유통되는 장소라고, 손가락질 하던 이들의 소원대로 거리의 상권은 다양한 이유로 무너졌다. 거리에 큰 상처를 남긴 첫 문제는 코로나였고, 다음으로 발생한 문제는 이태원 참사. 두 사건이 짧은 숨으로 연달아 발생하면서 많은 상인들의 숨통을 조였고 이제는 아무도 생기 넘치는 젊음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태원을 떠올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이태원은 살아날 수 있을까. 이 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거리의 미래를 상상해봤다. 역사에서 나와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참사 당시의 거리였다. 참사가 발생한 장소는 1번 출구에서 불과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도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을까. 역사와 바로 연결된 곳, 세계음식거리의 초입부에 속하는 골목, 짧게만 생각 해봐도 많은 인파가 있었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7일 당일, 유달리 거리 주변에서 순찰하는 경찰차들이 눈에 띄었다. 3번 출구 앞에 보이는 작은 파출소가 이 거리의 모든 치안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날만큼은 파출소 인근을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다. 길을 건너 3번 출구 근처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커피숍에 붙어있는 임대문의 딱지였다. 축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근방은 공실이 된 건물로 가득했다. 참사의 시간을 이겨내기에 2년의 시간은 아직 모자란 건지. 이 조용한 건물들을 보고 과거 평일 낮, 사람으로 가득한 이태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거리의 페인팅을 싫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할렘가의 문화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거리의 특색을 만들어준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애초에 이런 도시였다. 이 건물은 3번 출구를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건물이다.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 초입에 바로 보이는 건물, 이태원하면 문화, 술, 음식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겠지만 이태원에는 꽤 오래전부터 앤틱 가구거리가 있었다. 앤틱 가구거리도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갔던 날 축제가 있어서인지 상인들은 거리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오랜만에 밖에서 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리에 진열된 수많은 가구, 도기, 그림 액자, 그리고 이 물건들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 앤틱 가구라는 개념 자체가 인기가 없어진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앤틱 가구거리를 둘러보고서는 이태원 시장에 잠깐 들렀다. 예전에는 여기 시장도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코스 중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해방촌 신흥시장이 젊은 인구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가 되어서인지 유달리 한산해보였다. 옷을 구경하러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거리에는 이 근방이 익숙한 현지인들만이 남았고 외부인의 발길은 끊겼다. 옷을 인터넷으로 가장 많이 사는 젊은 세대에게 건물 지하에 내려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옷을 사라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쉽게 하려고 하지 않겠지. 시장 밖 거리에서는 저마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당일에는 앤틱&빈티지 축제가, 방문했던 날로부터 며칠 후에는 세계문화음식거리에서 축제가, 그리고 10월 말에는 할로윈 축제가 열릴 것이다. 퍼레이드, 코스튬 파티, 다양한 음식과 음악까지 다들 그간의 불황을 잊고 즐거운 한때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실이 되어버린 상가는 거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간 서평을 쓰면서 2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과거를 추모하는 형태에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돌을 던지는 시민들도 바뀌어야 하고, 정부도 언론도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 이 말은 이태원을 향한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작년 이맘때쯤 이태원 방문자 수가 코로나 이전의 80%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그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말도 있었다. 이미지 회복은 아직이라는 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1년 전에도,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도 말이다. 유튜브에 이태원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이태원 참사 이후 거리에 대한 지적을 하는 내용의 영상들이 여럿 나온다. AED가 부족했다는 지적, 상권의 발달 형상과 안전장치 미흡에 대한 지적, 적은 통제 인원과 이에 대한 한계에 관한 지적까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이태원은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다소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다소 무식한 접근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속칭 군대식으로 해결한다고 표현하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흉을 없애는 방식 같은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고 이태원 거리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축제를 금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전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더욱이 모색하는 것이 정답 아닐까? 거리를 걷고, 축제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다 결국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1번 출구로 가야했고, 나는 이 거리를 떠나기 전에 3번 출구 앞 파출소에 다시금 멈춰 섰다. 파출소 앞 주차장에는 경찰차가 멈춰있는 경우가 없었고 잠깐 들렀다가 나가는 차, 멈췄다가 출발하는 차로 입구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고 있을까. 이들이 이번 축제에도 안전한 이태원을 만들어줄까. 시민들에게는 즐거운 이태원, 활기찬 이태원도 물론 필요하지만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는 이태원이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3번 출구로 들어가 1번 출구로 나가며 그날의 100m는 얼마나 멀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 캠페인을 함께한 후 길과 거리에 관심이 생겨 서울의 거리와 관련된 책을 읽고, 또 강연을 듣고 있다. 최근에 들었던 강연은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들은 <<서울의 골목길에는 산이 보인다>>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 서울의 골목길과 산에 대한 강연이었다. 나는 골목길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대로에 기업인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진다면 골목길에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화가일수록 대로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프렌차이즈가 놓이고 골목길에는 성공을 꿈꾸는 시민들의 가게가 놓인다. 최근 이태원에서 술집보다 카페의 성공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는 문화가 젊은 세대에서 없어지고 있는 점, 신흥시장의 부흥으로 인근 데이트코스라 부를 수 있는 카페들이 얻는 반사이익, 다양한 카페 문화 형성까지 아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요소들로 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상권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죽고 살며, 몰락과 발전을 반복한다. 이태원은 잠시 꺾였지만 다시금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공이다. 이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리의 이미지가 아닐까. 께름직한 이태원, 안전하지 못한 이태원이 아닌 과거를 이겨낸 새로운 이태원이라는 이미지, 안전한 이태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평소부터 축제까지 앞으로도 안전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올해도 이태원 축제가 크게 열린다는데 이번 행사도 부디 안전하게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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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국가폭력의 경험을 안고 자란 아이
어른들은 몰라요 서울의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매일 1시간씩 활동 소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혹은 교육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들과 실무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나눴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나누었다. 어느 날 과장님의 질문. 서희 너의 민감성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공책에 나열했다.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폭력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다. 엄마 나 밭을 걷는 것처럼 느껴져. 지뢰가 마구 퍼져있는, 근데 지뢰의 위치는 몰라. 어디서 어떤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밭을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차량이 갑자기 날 박지는 않을까. 뒤에 오는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건넨 주스나 사탕에 약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까. 일상의 불안함은 때론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사회에서, 참사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참사의 맥락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사람들의 목숨이나 인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내가 국가의 쓰임이 있지 않다면 혹은 그만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관리한다. 이 불안함은 과연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나의 조부모 세대, 전후 가난 나의 할아버지, 홍*희, 48년생. 나의 할머니, 전*숙, 49년생.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3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전쟁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군모를 쓰고 있더랬다. 머리가 너무 작아 군모가 자꾸 벗겨져 나가는데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군모 덕에 살았고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3살이면 내가 자주 보는 아기 유튜버의 나이. 완벽한 문장 구사가 어려워 여러 단어를 나열하며 말하는 그 나이. 3살, 만 2살,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였던 할머니가 결혼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가난과 함께 살아갔다. 할머니가 시집간 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옆집에서 수저를 빌려왔다.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모든 일들을 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나보다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게 그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동네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나의 부모 세대, 가난 + 독재 정권 + IMF 나의 아빠, 홍*용, 69년생. 나의 엄마, 김*환, 71년생. 민주항쟁 당시 나의 아빠는 19살, IMF 당시 29살이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그 날, 11살이었던 나의 아빠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빠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당시엔 업적들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고, 다른 것들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 시대엔 전부 다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2살 차이 나던 아빠의 이모 -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 는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옷에는 수류탄 냄새가 항상 배어있었지만, 당신의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 혹은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독재 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사회를 꿈꾸었다. 대학에도 경찰이 있던 그 시대에. 한편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빠 세대까지 이어졌다. 3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의 아빠는, 고등학교 중퇴 후 이른 나이에 친척 집에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나의 아빠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고 나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 해 IMF가 터졌다.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의 넘쳤던 나의 외가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부도가 난 회사에서 가정집에서 쓰기도 힘든 대형 프린터기를 집에 가져왔다. 그 뒤로 나의 아빠는 쭉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민주화, IMF, 이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더 나은 한국 사회를 꿈꾸며. 나라를 살리자는 목표로 금을 모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갔다. 나의 세대, 없음 나, 홍서희, 99년생. MZ세대이자 Z세대의 첫 발을 딛는다. 우리 세대의 세대적 과제는 딱히 없다. 온 세대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목적을 내세울 만한 요인도 동력도 없다. ‘행복하기’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세대적”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행복은 다를 테고 행복하기 위한 방식도 다를 테니.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웠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친숙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이 아침에 일 하러 가면, 아기(나와 동생)은 혼자 남아 TV를 열심히 봤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책보다 TV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잡지식이 상당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살기 진짜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살기 좋아졌다고 불리는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세대적 과제가 없다면, 나의 세대는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줬던 큰 사건들을 돌아봤다. 내가 경험한 참사 내 나이 16살,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니는 학교에서 내가 나고 자란 ‘정선’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정선에 현장체험학습 갈만한 곳을 물어보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니!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의 한 달 전,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떴을 때만 해도, 갈 수 있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불과 몇 시간 후 유가족들에 의해 사실이 전달됐다. 나와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언니 오빠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안국역 근처에 살던 나는 예비 고3이었지만 하야 시위에도 매주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 나이 18살,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살면서 수많은 여성 피해자 사건들을 봐 왔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우리 집에서는 밤에 골목길로 절대 다닐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도 금지됐다.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범죄자들에게 쉽게 표적이 된다는 뉴스 보도로 인해, 나는 밤에도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굳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나와 몇몇 여성을 보며 자위행위를 했고,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마주했다. 두 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극히 꺼렸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 혼자 근무하는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살인’으로 바라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내 나이 24살,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은 마치 폭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누구 하나 품에 껴안는 사람이 없었다. 당일 이태원 근처에서 놀았던 나는, 자괴감과 부채감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뭐가 좋다고 그 시간에 놀았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서서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혐오 표현을 들으면서 고통을 감내했을 거로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여전히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파악 중일 때, ‘국가애도기간’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참사가 아닌 사고로 바라보며 ‘보상’의 맥락으로 축소했다. 그들에게 참사의 고통은 그저 개인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며 보장해 줘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드는 돈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더 효율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 - 보상 - 을 찾고자 했다. 사과는 늦어졌고 진상규명은 진척이 없었다. 국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부채감도 자괴감도 불안감도 고통도 전부 개인의 몫이었다. 내 나이 25살,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남동생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군 내에서의 사망 사건들이 종종 보도되고 있었고 불안함이 커진 건 그해 7월이었다.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수근 일병이 목숨을 잃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임 넘기기는 계속되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결과였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내 동생 또한 호우 피해 지역에 투입되었다. 나의 동생이 다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복무가 끝나길 바라기만 했다. 군에서의 사건들은 매번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매우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기후위기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국내산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그에 대해 얘기를 하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고민이 크게 와닿지 않으신 듯했다.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진정 괜찮을까? 온열질환으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아파트 주차장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데 그런 곳에서 하루 9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에 화가 났다. 위헌 결정이 나자 그제야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났다. 언제 탄소중립이 이뤄질 수 있을지 답답했다. 백날 텀블러 들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가의 부재? 아니, 국가폭력 내가 겪은 참사들이, 국가가 국가의 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나? 국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만 볼 수 있나? 사실 이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다. 사람들의 목숨은 ‘비용’으로 환산하고, 구조하고 예방하는 것에서 ‘효율성’을 찾는 국가의 폭력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호라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폭력을 행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사고’라는 말로 숨겼다. 응당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을 앞선 말로써 축소했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너의 죽음은 오롯이 너의 몫.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나의 세대는 전-국가적인 목표가 없다. 국가가 나서서 이끌만한 요인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보장 능력이 없는, 보호의 능력도 없는, 책임도 지지 않는, 회피하는, 역할과 소임을 축소하는, 심지어는 교묘한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나의 세대는 이 국가 앞에 불안함만이 남는다. 나의 환경에 대한 모든 신뢰가 붕괴되어 언제든 내게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불안함을 주는 저 강력한 권력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극복하거나 비판하거나 변화하고자 하는 행동이 내 삶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파할 여유도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더욱더 ‘나’의 현실에만 몰두할 뿐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생존을 위해 제테크를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하고 다름을 강조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삶의 태도를 택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가는 달라질까? 국민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불안함이 커질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요즘 길거릴 걷는 것도 무서워. 우리는 함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럴 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내 감정이 틀리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과 함께 극복할 수 있음에 기쁨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나는 더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토로한다. 너무나도 자연히 행해지는 국가폭력을 직시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일상의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세대들에게 연대의 손을 건네며 주저앉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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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틴스(Juneteenth)를 아시나요? (라샨 하가드 Rashaan Hoggard 인터뷰)
2024년 6월 미국 텍사스에서 라샨 하가드(Rashaan Hoggard)를 만났다. 그는 텍사스의 한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유명한 소송사건의 주인공  채리티 사우스게이트(Charity Southgate) *가 하가드의 5대 외증조모이기도 하다. 선조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라샨 그 자신도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체험을 지니고 있다. 그를 통해 준틴스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  Q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미국의 흑인 역사를 한국에 알리는 데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대통령 선거일에 대해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준틴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 같아요. 미국의 준틴스는 무슨 날인가요? A : 준틴스(Juneteenth)란 노예 해방을 기념하는 날로, 6월 19일(June Nineteenth)을 줄인 말이에요. 브런치(Brunch)처럼 축약해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미국 남북전쟁 중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했어요. 이 행정명령은 1863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어 남부연합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약속했지요. 그러나 해방선언의 이행은 무척 더뎠어요. 특히 남부 노예들은 해방이 선언됐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고, 전쟁이 노예 해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도는 미국 각주마다 각기 다른 시기에 끝이 났어요. 남부연합주 가운데 가장 외진 텍사스주는 노예를 해방시킨 마지막 주였어요. 1865년 6월 19일 텍사스에서 노예해방령의 최종 시행 명령이 내려졌어요. 이것은 남부연합에서 노예제도의 종말을 의미했어요. 1년 후 1866년부터 준틴스 기념식이 열렸지요.  Q : 남부연합에서 노예제도의 종말이라면 미국 전역에 해당하는 게 아닌가요?  켄터키와 델라웨어는 노예주였지만 당시 남부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어요. 노예제도는 1865년 12월까지 이 주들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때문에 1865년 6월 19일이 노예제도의 명백한 종말은 아니었지만, 미국 전역에서 공유되는 기념일이 되었어요. Q : 준틴스는 하가드 씨 개인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일까요?  솔직히, 저는 준틴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때를 기억하지 못해요. 우리 가족이 기념하는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인 2월에도 제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게 준틴스는 흑인이 해방된 날이란 의미보다 오히려 흑인이 해방됐음에도 오랫동안 노예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부당함을 상기시켜줍니다. 한편, 인종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이후로 흑인들이 얼마나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상기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해요. Q : 제가 알아보기로는 그 날이 공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있었어요. 오늘날 준틴스가 미국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A : 준틴스는 텍사스의 지역 축제로 시작되었어요. 텍사스 이외의 지역에서 준틴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어요. 아마 지금도 그럴 테고요. 바이든 대통령이 연방 공휴일로 지정한 지금, 저는 준틴스가 전국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전국적으로 인정은 하지만, 전국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준틴스는 전통적으로 흑인 축제지만, 흑인은 미국 인구의 약 15%에 불과하니까요.  Q : 지금도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인종차별을 겪은 개인적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  물론 오늘날에도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해요.다만 제 윗 세대가 직면했던 인종차별과는 다른 양상이지요. 부모님 세대에서는 정부가 승인한 인종차별을 감수해야 했어요. 예를 들어, 제 아버지 고향의 음식점은 백인 좌석과 흑인 좌석이 구분돼 있었어요. 어머니 고향 영화관에선 발코니 구역에 흑인이 앉았고 아래 중앙 구역은 백인을 위한 자리였지요. 살면서 제가 인종차별을 당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노골적이지 않은 인종차별이 많았고, 그 경우 누군가의 행동을 인종차별 탓으로 돌리는 것을 항상 조심해 왔지요. 인종차별 때문일 수도 있는 상황들을 참았지만, 확실하게 인종차별이라 말하기도 어려웠어요.   Q :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 경찰이 제 차를 수색하기 위해 무작위로 차를 세운 적이 있어요. 수상해 보인다며 저를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있고요. 제가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지요. 종업원이 가게에서 저를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제 피부색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 : 유감스럽게도 동양인인 제가 보기에는 피부색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 보여요. 하지만 애매해 보여서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 있었을 거 같아요. 일일이 화내거나 지적하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성차별에서도 유사한 부분이 있거든요. 괜한 분란만 일으킬까 봐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요. 아마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이런 인종차별을 걷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한국에는 흑인들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혹시 미국의 반노예제 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 우리가 주목했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 미국의 노예제 반대 운동에 참여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등이 있어요.  이 세 사람은 모두 흑인으로 스스로 노예제도에서 벗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일생을 바쳤어요.  백인 중에는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William Lloyd Garrison)과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노예제 반대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 백인 작가들은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펜의 힘을 이용해 노예제도라는 사악한 제도에 맞서 싸웠지요.  Q : 모두 중요한 인물이군요. 그 인물들과 저작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준틴스 혹은 인종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 최근 미국은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기념했어요. 이 날은 퍼레이드, 불꽃놀이, 바비큐 야외파티로 가득 찬 날이지요. 팡파르 때문에, 7월 4일이 모든 시민들에게 자유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기 쉬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든 사람이 신이 주신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어요. 그러나 위선적으로 이 권리들은 수백만 명의 유색인종에게 거부되었어요.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1852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엇인가?"라는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표현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부정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준틴스가 독립기념일로 인정되는 이유예요.   비록 7월 4일과 같은 방식으로 기념되는 날은 결코 아닐지라도, 6월 19일은 여전히 1세기가 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 깊은 날이에요.  *채리티 사우스게이트(Charity Southgate) : 그녀는 본디 백인 어머니와 흑인 노예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미국의 노예신분은 모계를 따랐으므로 신분상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노예신분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신분을 되돌리려 소송을 걸었다. 이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자유인 신분을 되찾은 채리티는 이후 남편의 신분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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