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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과 기억교실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세월호참사 10주기를 기억하기 위해, 4월 16일 오후 3시 안산 단원고 인근의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기억식이 열렸다. 세월호 희생자 250명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식을 시작으로,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과 추도사, 97년생 동갑내기의 기억편지, 기억 영상과 시 낭독, 노래 공연과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합창 공연 등으로 이루어졌다.   세월호를 기억식이 거행되는 사이에 불현듯 사이렌이 울렸다. 안산에서는 매년 4월 16일 오후 4시 16시에 이렇게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416을 기억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 짧은 사이렌과 묵념의 순간에 416 세월호참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사이렌 같은 사건이란 생각이 스쳤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우리들의 요구>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이행하라!  세월호참사 및 그 이후 발생한 국가폭력에 대해 국가책임 인정하고 사과하라! 대통령은 세월호참사 지우기 중단하라! 정부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권고 이행하라! 정부는 세월호참사 기억/추모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라! 세월호참사 대통령 기록물, 국정원, 군 등 정부 기록물 모두 공개하라! 부재했던 재난 컨트롤타워, 피해자 사찰했던 정부기관, 국가책임자 처벌하라! 대통령은 진상규명 추가 조치, 성역 없는 추가 조사 이행하라!     (세월호 참사 102주기 기억식 팜플렛에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국가폭력 및 사찰, 대통령이 사라진 시간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불러세운다. 기억은 사진첩에 끼워지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다음번 또다른 희생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 다음번 재난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막기 위해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사이렌을 계속 울려야 한다.  왜냐하면 팽목항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세월호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이태원참사 등 다른 참사와도 맥이 통하고, 419 민주화운동과도 맥이 통한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억은 사회적 기억으로서 의미가 깊다. 또한 세월호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은, 이 사회 어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재난참사 이후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잘못된 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자들에게 어떻게 사법적, 사회적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단원고 416 기억교실 기억식이 끝나고 근처에 10년 전 희생자였던 단원고 2학년 교실을 보존해 놓은 기억교실을 찾았다. 가는 길에 문 닫을까 걱정되어 택시를 탔다. 안산 택시들이 팽목항과 안산을 오가며 피해자 가족을 도왔다는 게 생각나 물어보니, 기사님은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그러면서 기억식에 대통령은 왔던가요? 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기억교실 건물을 둘러싼 울타리에 걸린 “10년, 당신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보였고, 노란 바람개비가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기억교실에는 남자반 여자반으로 2, 3 층으로 나뉘어 있는 교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란 등받이와 방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자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반 전체에 서너 자리를 빼곤 모두 노란 자리로 뒤덮여 있어 가슴이 턱 막혀왔다. 교무실 역시 희생자 선생님들의 사진과 평소 쓰던 출석부 학생기록 수첩 등이 남아 있었다. 안내하던 한 여자분이 간곡히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 아이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세요.”  그제야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애썼다. 지금 살아 있었다면 27살의 청춘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었을 아이들. 나는 기억교실 안에서 부표처럼 떠 있었다. 한 책상 위에 낙서로 적혀 있는 글귀를 보았다.   단 한번 뿐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의 키워드는 ‘기억’ 뿐만이 아니었다. 기억과 약속, 그리고 책임이었다. 기억은 힘이 세다, 는 말처럼, 기억이 약속을 만들고, 약속을 통해 책임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이 이제 10년을 맞이한 셈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진실규명과 책임 처벌, 앞으로를 대비한 관련 법률과 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인재(人災).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회적 참사.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들. 그것을 해낼 수 있어야지만 이 기억식의 의미는 뚜렷해질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노란 리본은 반짝거리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아직 더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뜨겁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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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이들을 보낸 지 벌써 10년입니다. 당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며 고시공부를 전전하는 25세 대학생이었던 제게 4월 16일은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 울면서 다짐하게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3년상을 치르듯 너희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찾겠노라 버둥댔고 2017년 4월, 의미는커녕 스스로의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세월호 기억공간이 보이는 광화문 카페에 홀로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낸 지 10년이 되었을 때에는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영정 앞에 내어놓고 싶었는데, 매서운 세월의 바람 앞에 속절없이 풍화되어 온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그 간의 마음을 매듭짓고 새롭게 다짐을 기록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1. 2014년 4월 16일 : 우리 모두의 실패  돈과 물질, 권력과 허세로부터 인간과 생명, 자유와 평등을 향한 새 기풍을 진작하지 않는다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팽목은 이미 한국의 압축판이고,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박명림 교수 한겨레 기고문 중 사실 그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위기상황인지, 얼마나 붕괴의 조짐들이 많이 보이는지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10대 시절 중고등학교를 보내며 교육구조가 얼마나 처참하고 그 구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신음하는지를 보아왔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 여러 학문과 글,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삶의 경험들을 통해 무언가 잘못된 거 같고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은 사회의 단면들을 바라보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감각하는대로 정말 사회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으레 어른들이 이야기하듯 아직 10대의 순수함을 벗어나지 못한 청년의 시절에 바라보는 순진한 시선이었는지 스스로조차 잘 알지 못한 채.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외치기엔 자신이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나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건의 당일에는 그저 당황했던 거 같아요. 뉴스를 뒤덮은 수많은 속보들과 서로 맞지 않는 이야기들. ‘설마…’ 라는 말줄임표로 끝나던 생각이 시간이 흘러 ‘정말?’ 이라는 놀람의 물음표로 바뀌던 시간들. 하루이틀이 지나며 우려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이내 무너져내렸던 시간들. 긴급히 생겨난 여러 모임들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울던 시간들. 점차 드러나는 여러 정황과 실체들… 제가 무너져 내렸던 자리는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라는 자리였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실려 있었던 화물들, 짐을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줄여버렸던 평형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내고는 제일 먼저 도망쳐버린 리더십들, 침몰 당시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위기상황체계, 서로 다른 정보가 뒤섞이며 엇갈리는 언론,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지만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어느 누가 책임자이고 죄인이라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모든 프로세스 중에 현실과의 타협이 있었고 좀 더 이득을 취하고자 저지른 꼼수가 있었고 별 일 없을 거라며 눈 감던 관행이 있었고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안일함이 있었어요. 그것들이 만분의 일의 확률, 십만분의 일의 확률로 연결되었을 때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을 사회와 공동체가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깐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이 사실 일상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어요. 운명의 주사위가 다른 숫자를 내보였다면 그것은 2014년 4월 16일의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사실 이미,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었고 죽음의 주사위를 던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 대가를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를 그리도 무너지게 했어요.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깨닫고 모르지 않았었는데. 가시화된 죽음을 목도하고 난 후에야 그것이 진실이었구나, 그리고 그 주사위를 막지 못하고 결국 굴리고 말았구나 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죽음에 저의 책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생각했어요. 나와 우리의 안일함이 모이고 모여 이 주사위를 굴리게 만들어버린 것이니깐요.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10년. 10년 뒤에는 너희 앞에 부끄럽지 않을 나라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결심이 말이죠. 그렇게 10년이 흘러, 오늘 다시 아이들 앞에서 되묻고 있네요. 정말 우리는 그런 나라와 사회를 만들었을까 하고 말이죠. #2. 2024년 4월 16일 :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2021년 어느 봄날 저녁, 청와대 앞 광장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텔라데이지호 이등항해사 허재용 씨의 어머니 이영문 씨였다. 그날은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실종된 지 4년이 되는 날로, 정부에 2차 심해수색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회에서 이영문 씨가 증언할 차례였다.73세 노모의 울음소리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침묵했고,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이 정적 속에 정지한 것 같았다.그때 정적을 깨며 누군가 이영문 씨를 향해 달려갔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한 기도회에 참여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창현 어머니였다. 그는 이영문 씨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두 엄마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 <포기할 수 없는 약속>,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 엮음 중 사실 2014년 당시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너무 컸던 거 같아요. 구하지 못해 미안하고 살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후 2016년에 마주했던 사건들.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건을 지나면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실체가 점차 가시화되고 알지 못하던 여러 곳에서 사회적 모순이 죽음의 사건으로 공론화되는 것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아직, 배 안에 있구나 라는 사실을 말이죠. 죽음의 주사위는 여전히 굴려지고 있었고, 도처에서 신음과 울부짖음이 터져나오고 있었어요. 사건들이 터져나올 때마다 절망감이 스스로를 뒤덮었습니다. 사실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수 번 아니 수십 번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기회들을 모두 비껴나면서까지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마치 겹겹이 설치 해둔 창문들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와 같았어요. 추위를 막고자 설치한 유리창들이 번번히 깨져 있었고, 바람은 그 깨진 유리창들 사이로 뚫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죠. 추위야 그저 견디면 그만일텐데, 확률의 유리창들을 뚫고 엄습한 사건은 가장 연약한 사람부터 공격해 들어왔어요. 그건 그저 사고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겹겹이 형성한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였고 멈춘 시스템을 틈타 죽음의 주사위가 굴려지고 있다는 증거였어요. 자연의 위협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고, 사고의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회의 시스템과 공동체의 규율이 붕괴될 때에 공동체의 가장 약한 사람부터 확률적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난거죠. 하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깨진 유리창들로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을 보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시스템이라는 것은 비단 정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관여하는 개개인의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마저도 붕괴된 현실을 살고 있으니깐요. 동시에 그런 윤리를 지키지 않은 개인에게만 탓을 하기에는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를 지키면서는 도무지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사회였어요. 경쟁에 내몰리고 원칙이 비웃음 당하고 순수함이 순진함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이 문제들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음이 점차 피부로 와닿아졌어요. 국가의 실책, 제도의 실패 등에 대해서 당연히 이야기하고 바꿔야 할 문제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점차 깨달아지고 있었죠.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조금은 절망스러운 마음과 체념을 가지고 이번 10주년을 지나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메타노이아metanoia : 마음의 전환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의 전환shift of mind, 즉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그리스인에게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근본적인 전환 또는 변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음의 초월meta을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전통에서 ‘메타노이아’는 지고의 존재, 즉 신을 직접적으로 알고 깨우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세례 요한 같은 초기 기독교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단어였으리라. 가톨릭 자료에서 ‘메타노이아’는 ‘회개’로 번역된다.- <학습하는 조직>, 피터 센게 지음 중 참사가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이 때에, 이 비극의 연쇄작용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사회운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한 두 개의 정책이 세워지고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의 종류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의 특정 부분, 구조의 어떤 영역에 특이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깔려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거 같았어요. 박명림 교수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 기고하신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에서 사회의 숨과 바람과 호흡의 방향, 정신과 영혼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라 예견하셨던 것 처럼 말이죠. 그러던 중 제가 발견하게 되었던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개념이었어요. <학습하는 조직>이라는 책에서 시스템 사고의 권위자인 피터 센게 교수는 특정 조직이 위대한 팀으로 거듭나면서 조직에 속한 구성원들이 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과, 그 경험이 구성원 각자의 인생과 방향성 자체를 바꾸어놓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리고는 그 경험을 설명하는 단어를 찾던 중 ‘메타노이아’라는, ‘마음의 전환’이라는 단어에서 찾았어요. 사실 이 단어는 종교를 가진 분들이라면 더욱 친숙한, ‘회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단어죠. 종교를 가지지 않던 이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이었죠. 이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국 사회가 참사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한국 사회의 ‘메타노이아’ 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각자가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으로부터 원칙과 생명, 공동체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전환하는 것’. 그렇게 각자의 깨진 유리창들을 모두가 보수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이 더 이상 죽음의 주사위가 구르지 않고 그 죽음의 확률을 함께 힘을 모아 막아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피터 센게 교수는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메타노이아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고 그것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심하게 되었죠. 하지만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비단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하루하루, 순간순간 속에서 원칙보다 편의를, 전체의 순리보다 나 자신 혹은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기를 강요받죠. 그러려고 하지 않는 마음조차 무색하게 그로 인해 당장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와 손해가 막심하거든요.설령 누군가가 그러한 마음의 전환을 하기로 결심하더라도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1명의 변화는 그 사람의 생존과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에요. 세상의 룰은 바뀌지 않았지만 홀로 그런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사람들은 도리어 ‘이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순진하다’ 혹은 ‘이상적이다’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밖에 없을 거에요. 심지어 모두가 바뀌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행동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니깐요. 우리는 여러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 그 상황들을 지켜보고 왔었죠. 그럼에도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가 아니고서는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조직을 넘어 생태계로 발전된 새로운 운동과 흐름에 대해 역사를 뒤적이기도 하고, 제도와 조직, 문화에 대해 씨름을 하면서 어떤 가능성의 단초들을 찾아나서고자 했어요. 하지만 긴 씨름의 끝에 제가 발견한 것은, 이미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시작되었고 이 질문의 시작이야말로 그 증거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었습니다. #4.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사건이 촉발하는 사회의 메타노이아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돌베개>, 장준하 지음 중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개>에 나오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생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에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나라를 잃은 조상들과 다르게 우리 세대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그 마음이 척박한 여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과 ‘더 이상 어른들을 닮지 않겠다’는 세월호 세대 아이들의 말이 겹치게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 온 나라였다는 사실을 말이죠.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내 일어난 1919년의 3.1운동과 이후 벌어진 독립운동은 모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라를 다시 독립시키겠다는 열망이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죠. 그리고 우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합니다. 다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었죠. 하지만 이내 1950년 우리는 6.25 전쟁을 경험합니다. 전쟁은 또 다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고 광복과 독립의 정신을 계승할 새도 없이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기근과 가난 속에 태어난 세대는 전쟁의 충격 위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사회 전체가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 사이 1980년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군부독재 속에서의 억압 속에 살던 세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게 되고 1987년 6월 항쟁을 넘어 직선제 개헌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게 되죠.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항상 이전 세대의 실패가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왔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라고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그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회가 경험한 사건이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키면서 사회 전체가 그 반작용의 활동에 몰두하게 되는 일들을 다름아닌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겪어왔더라구요.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은 앞선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어서 촉발한 비극이었습니다. 경술국치가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그러했죠. 그렇기에, 이 모든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기본적으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헌신한 세대들의 발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아이러니이자 일종의 비극인 이유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 자체에 있습니다. ‘못난 조상’이라는 표현 자체에서 우리는 사회 전체에 있어 마음의 전환이 일어났지만 그 전환의 방향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또 다른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는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앞선 세대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지만 독립 이후의 혼란과 나라 형성을 제때 하지 못한 아픔이 남았고, 그 아픔을 딛고자 경제성장에 몰두하던 세대는 군부독재를 허용하고 민주화를 놓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됩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는 결심으로 일어난 세대는 기어이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국가를 만들었지만, 세월호 세대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을 그들의 언어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주했던 2014년의 참사가 우리 세대의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는 안타깝게도, 과거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이전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 전체의 ‘마음의 전환’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가진 ‘참사의 되풀이를 막기 위한 방법’에 대한 질문 자체조차 세월호 참사로부터 촉발된 제 마음 속의 ‘메타노이아’였던 것이 깨달아지게 된 것이었죠. #5. 상처 입은 세대 :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타자의 비판이 한갓 타자의 부정에 머물러 적극적 자기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이 자기 형성을 통한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통해 결속된 우리는 그 적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남남으로 흩어지게 되고 지배 권력은 그렇게 원자화된 시민을 끊임없이 상호 경쟁으로 내몲으로써 자신의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다시 그런 봉기가 일어난다 한들, 그것이 단지 독재적인 통치 권력에 대한 부정과 반발에서 촉발된 것이라면,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봉기하고 적대적 권력을 타도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온전한 의미에서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교수 씀 중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발견했고 우리나라의 현대사 속에서 메타노이아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참사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주요한 원인이 다름아닌 이전 세대의 메타노이아 그 자체라는 것에 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혹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은 이 일을 촉발시킨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항거였습니다. 동시에 경제성장을 향한 전국민의 노력도 전쟁의 트라우마를 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구요. 민주화운동 또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참혹함에 대한 충격이 가지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세대의 모든 노력들, 그리고 모든 메타노이아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어주었지만, 그 에너지들 자체가 ‘이전 세대가 가진 모순의 누적으로 치른 대가에 대한 트라우마’의 성격이 강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어느 세대 하나 없이 모두 상처입은 세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상처로 촉발된 마음의 전환은 그 자체로 큰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만한 힘을 보여주지만, 그 힘의 방향이 필연적으로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 혹은 극복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균형 있는 자기형성과 성장을 만들어내기보다, 사회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이전 세대의 모순에 대한 극복에 몰입되는 나머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모순을 눈감게 만들고 맙니다. 그것이 누적되고 축적되다보면 결국 다음 세대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또 다른 참사를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죠. 김상봉 교수님은 최근 내신 저서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타자의 부정에서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현대사가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트라우마를 딛고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새롭게 사회 전체에 일어난 마음의 전환을 목도하지만, 그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한계인 트라우마의 측면 또한 마주하게 됩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세대로 하여금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노어린 다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경험한 이러한 마음의 전환이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을 넘어 적극적 자기형성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모순이 축적되어 벌어지는 참사를 넘겨주는 ‘못난 조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6. 비판에서 형성으로 :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낸다는 것 “오로지 대학만 바라보고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세월호를 보면서 어른들과 사회체계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어떤 어른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됐다. 한편으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 믿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세월호 10년, 97년생이 온다” (오마이뉴스 2024.04.16.) 중 97년생의 증언 나라 잃은 아픔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독립운동’이라면, 전쟁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경제성장’이었고, 국가의 폭력 앞에 일어난 시대정신은 ‘민주화’였음을 봅니다. 그런 우리 앞에 세월호가 웅변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어쩌면 ‘주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막연한 신뢰를 바탕으로 앞선 세대, 앞선 리더십, 앞선 이들이 해오던 대로, 하라는 대로 따르던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결과를 우리는 보고야 말았으니깐요.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하는 시스템과 권위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실제로 이 새로운 세대는 분명하게 주체성의 경험들을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맨바닥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그러하고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서로의 필요를 위해 완전히 새롭게 생겨난 청년 단체들이 그러하고, 완전 새로운 판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아티스트들이 그러합니다. 동시에 이전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직장인들이 그러하고 학생들이 그러합니다. 디지털 전환이 만든 새로운 공간 위에 같은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이 세대는 이전 세대에 의존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가 앞선 세대들이 해왔던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우리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직면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세대는 더 이상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지금의 시스템과 지금의 사회에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변화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제3자인 누구에게, 어른인 누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우리 세대에서 정치인이 나오고 있고 우리가 직접 가정을 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고, 우리 스스로가 사회를 형성하고 선택하며 동시에 직접 책임지는 자리에 서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믿지 말자“라는 데에서 더 나아가 ”각자의 깨진 유리창을 책임지고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트라우마로 우리 사회가 쌓아온 모든 유산과 축적된 경험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내는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기획한 세월호 세대에 대한 조사에서 나온 저 증언에 저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세월호가 상처가 아닐 수 없고, 우리 안에 불신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불신을 넘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믿음의 연대를 회복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일상으로 녹아들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거창한 정치나 시민운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의 도움, 배려, 때로는 약자에 대한 도움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리창의 보수이자 치유의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에 다른 선택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비판이자 대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택들의 대가 중 일부를 우리의 다음 세대가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또한 앞선 세대의 부채를 껴안으면서 이러한 사건 앞에 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앞선 세대의 대가를 치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또한 다음 세대가 어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사회를 이용한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또 다른 참사를 낳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트라우마에 우리 스스로가 지배되어 우리의 동생들과 자녀들을 해치는 것에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주도적인 세대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다음 세대에 대한 고려가 있는 판단이 있어야 하고, 다음 세대를 우리보다 더 나은 세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판단과 선택들, 그리고 책임들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연쇄고리가 아닌,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사회가 진보하는 선순환의 연쇄고리를 만드는 첫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입니다. # 닫으며 : 위대한 세대가 되기를 소망하며 미국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1901~1927년 태생이다. 이 세대는 청년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이겨냈고, 1950년대에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널리 알린 〈나 홀로 볼링〉을 썼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질이 왜 갈수록 나빠지는지, 사회적 자본이 왜 갈수록 쪼그라드는지 추적했다. 답은 의외였다. 사회적 자본을 유난히 풍부하게 가졌던 윗세대가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쟁을 겪은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였다(퍼트넘은 1910~1940년생까지로 좀 더 넓게 잡는다). 이 세대는 후속 세대보다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더 많이 투표하고, 시민적 결사와 공공업무에 더 많이 참여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고, 동료 시민들을 더 신뢰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시민이다.위대한 세대는 가장 가혹한 전쟁의 자식들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응집력을 극적으로 높이므로, 때로 전쟁은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용광로다. 퍼트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결론으로 이렇게 쓴다. “1945년(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다)에 절정에 달했던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과 전시(戰時)에 불붙은 애국심이 시민정신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 힘은 이 세대가 살아 있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오래갔다. 이들이 주도한 시대에 미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천관율 기자 씀 중 천관율 기자님이 코로나 시기에 썼던 기사에서 나온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은 그 또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사로부터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퍼트넘에 따르면 이 메타노이아를 통해 위대한 세대는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공적 업무에 헌신하고 동료와 연대하는 ‘더 나은 시민’이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물론 이 세대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앞선 세대의 트라우마까지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고, 현재의 미국을 볼 때에도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또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를 하게 만듭니다. 사실 이 글에서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요한 일로 ‘앞선 세대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트라우마조차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대가 겪은 상처에 대한 용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날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한 가해자가 되어 앞선 세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완전히 우리 안의 상처를 모두 회복한 후에, 상처로 인해 어찌할 수 없었던 지난 세대의 과오를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가 우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앞선 세대를 용서하고 다음 세대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세대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세대로부터 우리 나라의 온전한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 또한, 미국조차 온전히 이루지 못한 ‘위대한 세대’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많이 성공했거나 가장 화려한 세대여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후대 세대에게 롤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그런 세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떠나 보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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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 가슴에 노란 리본, 마음에 새긴 약속
2016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참사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했다. 10주기 세월호 기억식은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 유가족분들과 여러 인사들이 기억식에 참석해 주었다. 기억식 순서 식전 공연 이름을 불러주세요 추도사 기억 편지 기억 영상 상영 기억 공연 기억 합창 4.16 안전 문화 창작곡 수상자들의 공연으로 식전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을 불러주세요’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이민근 안산시장,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은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면서 추도사가 시작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재해로부터 자유로운 바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달라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의료지원 등 12가지 주요 건고에 대한민국은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했다. 늦어지고 있는 기억공원 건립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국민의 안전이 뒷전인 현재 대한민국을 지적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며 추도사를 마쳤다.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님과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에서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지만, 10.29참사와 오송참사가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이 높을수록, 함께 힘을 모아 장벽과 부딪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추도사가 끝나고 난 뒤, 97년생 동갑내기 김지애님의 기억 편지 낭송이 있었다. 4.16참사를 겪은 후, 자신의 다짐과 생각을 별이 된 친구들에게 전했다. “하늘이 맑을 때 너희를 기억하고, 비가 올 때 너희를 기억하고, 별이 많은 날 너희를 기억하고, 꽃이 피면 너희를 기억하며 살아가려고 해. 너희 부모님들 곁에 서서 진실도 밝히고, 책임자도 끝끝내 찾아냈다고. 이제 이 땅에는 무책임한 정부로 인해서 벌어지는 참사는 없게 만들었다고 자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가수 박창근님의 ‘별되어 내리네’와 ‘미련’을 불러주셨다. 바로 이어서 배우 박원상님의 정호승 시 낭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널 가슴에 묻으라고 한다 세상에! 너는 언제나 내 가슴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을 수 있겠느냐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못한다 아빠도 너를 황량한 가슴의 들판에 묻지 못한다. - 왜 돌아오지 않느냐 정호승 - 마지막으로는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기억 합창으로 기억식을 마무리했다. 기억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로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합창단은 노란 비행기를 날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10년이 지날 미래에도 노란 비행기처럼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듯, 진실은 침몰하지 않듯, 세월호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쁜 와중에도 20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4월은 따뜻하고 꽃이 피는 봄의 시작이지만, 304명이 별이 된 달이기도 하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들이 많이 오갔고,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 생명안전법 제정과 같은 요구도 잇따라 들렸던 기억식이었다. 기억식에서의 다짐과 약속이 기억식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면 좋겠다. 김지혜님의 편지 중, ‘나는 그저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나도 김지혜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이,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오송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여전히 단단하지 않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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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년, 정치가 한 일
정치란 무엇일까요?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권력에 의한 자원의 분배입니다. 그 방식에서 권력의 가치관을 엿보게 됩니다. 정치 권력은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볼지 결정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만들며, 그에 따른 자원 분배의 규칙을 만듭니다. 따라서, 세월호는 정치적인 사안입니다. 참사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들을 둘러싼 자원의 분배를 고려해 만들어집니다. 각자의 관점에서 담론과 규칙이 제시되고 시민들은 그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난 10년 간 그래왔습니다. 애증의 정치클럽에서는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세월호를 둘러싼 정치를 살펴봅니다. 10년 간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참사와 정치가 만날 때 드러난 권력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10년 전에 있었던 일 선원과 해경의 책임회피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배가 기울자마자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은 살았고, 남아서 승객 유도 의무를 수행한 선원들은 사망했습니다. 해경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승객 퇴선 결정을 선장에게 미뤘고, 구조 작업에도 소극적이었죠. 한편 청와대의 책임은 가려졌습니다.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청와대가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현장의 영상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당시 청와대와 해경의 연락 내역을 살펴보면 남아있는 승객의 구조 여부를 묻거나 즉각적인 구조를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날 오전 쉬고 있어 곧바로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건 발생 1시간 후에 보고를 확인했고, 이후의 7시간 동안에도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질문을 반복했고, 구조 논의는 미뤄졌습니다. 이후 청와대는 책임 회피에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참사 2주 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이 재난 컨트롤타워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해 7월 비서실장 김기춘은 국정조사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는 사고 상황과 구조를 지휘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는 ‘청와대(국가안보실)가 재난 대응에 대한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청와대는 이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뤄진 무단 변개였습니다. 정부는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라는 유병언에게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압수수색을 생중계하고 검거 상황에 대해 검찰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이례적으로 요란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언론은 이에 응해 관련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세월호는 관리대상 정부는 세월호와 관련된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지방선거를 한달 앞두고 참사가 벌어졌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로 떨어졌습니다. 각계에서 비판 시국선언과 추모행사가 진행되자 정부는 ‘관리’에 나섰습니다. 세월호참사 시국선언 참여 교수 명단을 작성해 정부 위원회 위원 임명 과정에서 부정평가를 주었고, 문화예술인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기무사와 국정원은 유가족을 불법 사찰했습니다. 유가족의 정치적 성향, 경제적 형편, 관심 사항 등을 파악했고, 이를 기반으로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관련해 일부 관계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기무사는 참사 일주일 뒤부터 유가족을 대상으로 한 ‘반정부 종북좌파’의 동정을 확인하겠다고 계획했고, 5월엔 세월호 피해자 대책위를 종북세력으로 규정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과 특검 요구가 본격화되자, 정치권은 유가족의 ‘순수성’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법에 “순수한 유가족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언론에선 유가족이 요구한 적 없는 보상금과 특례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유가족들이 ‘정치적’이라고 비난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2014년 하반기부터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가 이어졌습니다.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 김재원은 특조위 설립 단계부터 “세금도둑”이라 비판했습니다. 설립 이후에는 청와대의 총괄로 관계 부처들이 역할을 나눠 방해 행위를 펼쳤습니다. 청와대에서 특조위를 축소하기 위한 시행령을 마련해 통과시켰고, 여당 추천위원들은 조직적인 행동으로 조사를 무력화했으며, 예산 압박도 계속됐습니다. 한겨레21 안영춘 기자는 세월호에 대한 정부여당의 대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진상 조사 요구에 대한 국가의 탄압과 진상 조사에 대한 조직적 방해, 하위직만 수사하고 처벌하는 수사기관,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배·보상에 눈먼 존재로 낙인찍기는 촘촘히 엮여 있다.” 핵심은 정부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기관은 집권 세력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목적 하에 일심동체로 움직였고, 유가족은 그 판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0년 후에 달라진 일 그럼에도 유가족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조위가 해산되자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진상규명을 계속했고, 안전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 개선을 말해왔습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 통과 1️⃣ 재난 컨트롤타워 명시 재난 예방, 대응, 수습을 총괄하는 국민안전처가 생겼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임을 부인했기에, 다른 컨트롤타워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임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민안전처는 폐지하고,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와 행정안전부에 컨트롤타워 기능을 넘겼습니다. 2️⃣ 대응 체계 정비 대응 체계 혼선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긴급구조 활동을 할 땐 우선 소방서장의 지휘를 따르고, 이후 시·군·구 부단체장이 수습하게 했습니다. 경찰·소방·해경이 신속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했습니다. 3️⃣ 재난 조사·평가 의무 정부가 재난 발생 원인과 대응 과정을 분석한 재난백서를 국회에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이외에도 학교 생존수영 교육 도입, 현장체험학습 매뉴얼 제정, 중대재해처벌법 신설 등의 제도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상규명 앞서 설명한 청와대의 개입은 2018년 출범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밝혀낸 것입니다. 사참위는 재난 역사상 최초의 독립조사위원회로, 특조위 강제 해산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진상규명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사참위의 진상규명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침몰의 직접적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조사 과정에서 음모론의 개입도 있었습니다. 수사권 없이 비협조적인 일부 기관을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은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이 진상규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다고 평가했습니다. “진상규명이라는 것이 ‘위법하냐, 위법하지 않느냐’만을 가리는 조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도 세월호를 계기로 알게 됐다. 법 위반만 없으면 검찰은 기소할 수 없고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러나 재난·참사가 일어나는 데는 구조의 문제, 행정상의 공백, 문화적 측면이 모두 작용한다. 이제는 가족분들 사이에서도 ‘법적인 부분만 따져선 안 됐던 거구나,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관행을 바꿔야 했던 부분이구나’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책임을 묻는 것도 사법적 책임만큼이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형사처벌 세월호 참사 관련 형사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크게 1️⃣민간 업체의 침몰 원인 제공, 2️⃣ 해경의 구조 실패, 3️⃣ 유가족 사찰 등 2차가해 관련으로 나뉩니다. 선장과 청해진해운은 2016년 유죄가 확정됐고, 해경은 말단 인사 1명만이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해경 지휘부 9명은 무죄를 받았습니다. 유가족을 사찰한 기무사 간부는 지난해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10주기 당일에는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특조위 설립·활동 방해 혐의가 일부 유죄로 확정됐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하지만 10년의 변화는 부족했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에서 세월호의 문제는 반복됐습니다. 여전히 컨트롤타워는 뒤늦게 작동했고, 재난안전통신망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행안부의 재난 원인 조사도 없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책임자가 지키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됩니다. 책임질 의무를 넘어 책임을 실질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세월호 유가족들이 실질적 변화를 위해 요구하는 법안입니다. 안전권 명시: 기본법에 안전권을 명시해 국가와 기업의 책무를 강화합니다. 피해자 권리 보장: 현 재난기본법에 빠져있는 피해자 개념을 정의하고, 안전사고 시 피해자의 권리와 피해지원 원칙을 명시합니다. 진상규명: 상시적인 독립조사기구를 설치하고, 예산 및 인사의 독립성과 피해자 참여를 보장합니다. 안전영향평가: 국가 사업을 계획할 때 안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미리 분석하게 합니다. 또한 안전사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핵심은 피해자 중심적 시스템의 마련입니다. 세월호 이후 벌어진 참사에서도 피해자들은 체계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응 기관 간의 협업 부실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생존자 병원 호송과 시신인계 등의 과정에서도 혼선이 발생했습니다. 법안은 2020년 발의됐지만 21대 국회에서 아직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22대 국회로 넘어가게 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됩니다. ✅사참위 권고이행 사참위 보고서는 최초로 피해자 관점의 재난 방지 권고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총 12개의 분야로 이뤄졌는데요. 416연대의 분석에 따르면 정부가 이행한 분야는 하나 뿐이었습니다. 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입니다. 국가의 책임인정과 사과, 피해자 사찰 및 조사방해 행위에 대한 추가 조사 및 감사, 재난 피해자의 알 권리 보장과 정보 제공·소통 방식 개선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재난 피해자의 인권침해 및 혐오 표현 확산 방지책 개선, 선사·선원 안전 운항 능력 제고 및 책임 강화, 여객선 등 선박 안전관리 체계 개선, 세월호참사 희생자 추모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 사회적 참사 기록 폐기 금지 및 공개·활용 방안은 부분적으로 이행됐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치는 있었습니다. 피해자 관점의 참사 대처와 제도적 예방책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와 안전을 위한 자원의 분배를 말하는 정치입니다. 유가족과 관련 단체에 색깔론을 씌우고, 정작 유가족 사이에선 언급된 적 없는 보조금을 쟁점으로 띄우며, ‘안전불감증’을 참사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실무자의 책임만 얘기한 것도 정치입니다. 여전히 참사는 정치적 사안입니다. KBS는 ‘4.10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방영을 취소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대회가 정치 집회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태원 유가족과 세월호 유가족은 총선을 앞두고 “생명안전 국회를 만들겠다 약속한 후보에게 투표해달라”고 함께 외쳤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분명 변화를 일으켰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참사를 왜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냐”는 질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봅니다.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일까요.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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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교육보다 안전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강화된 안전교육의 의미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는 “철저한 진상규명, 강력한 책임자 처벌,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참사 재발방지대책 수립,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건설”만이 304명의 죽음을 거룩한 희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말을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교육‘은 안전사회로 가는 길목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이 사회가 안전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밖에도 너무 많다고 생각됩니다. 왜 아이들이 안전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막연한 사회적 공포감을 근거로 한 이런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너무 분명해 보입니다. 반복되는 안전 교육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참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하위 공무원 몇 명이 처벌을 받는 것으로 거의 대부분이 마무리되는 것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야말로 피해자였고, 앞으로도 그런 위험에 놓여질 아이들을 대상한 ‘안전교육’도 꾸준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재, 유치원과 초중고 학생은 학기당 51시간 이상, 교사는 연간 15시간 이상 안전교 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모든 초등학생은 의무적으로 생존 수영도 배우고 있습니다...김병욱 국민의미래 의원이 2022년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에 수영장을 보유한 초등학교는 81곳으로 전체 학교(6157개) 대비 1.3%에 불과합니다. 생존 수영 이론 및 실습교육에 참가한 초등학생은 전체의 57%에 불과했고 물에서 실기교육을 이수한 학생은 전체의 2%뿐이었습니다. (경향신문 2024.4.1. 보도 자료) 이와같이 안전교육이 이론 위주의 반복적인 교육형태만으로 남아지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말 보호해야 할 이들은 피해자인데,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은밀히 그리고 넌지시 ‘너희들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점이 제일 큰 잘못이야’라고 반복하여 주문을 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반복 주문 행위는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충분한 탈출 가능시간이 있었음에도(약 2시간) 승객들은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무책임한 방송을 듣고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와같이 정작 중요한 안전법칙을 무시한 체, 각자도생의 방법만을 가르치는 안전교육은 우리에게 여전히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것만을 기억해라, 오로지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누구도 책임질 사람은 없다’는 주문을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문제가 리더들의 판단착오와 책임감 부재로 만들어진 분명한 인재(人災)입니다. 사고 당시 해경에 구조요청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시기적절한 유효 조치가 없었다는 점, 선장 이준석 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뒤로 하고 1차 탈출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현재와 같은 반복적인 안전교육만으로는 세월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고 봅니다. 심지어, 세월호 선원들이 침몰사고 직전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배에서 탈출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고, 당시 청와대에서는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의 명시적 규정에 따라 국가위기상황에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안전교육’은 각자 도생을 근본으로 하는 재난 탈출 방법을 배우게 하는 것인데,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크게 2가지 의문이 듭니다. 하나는 정작 배워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점, 또, 아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배워야 할 게 이것 말고 또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사회구조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몰래 도망하는 형국에서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항의하는 일이 진정한 용기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런 불의한 일을 대면할 때에 그렇게 많은 용기를 갖지 않은 채로도 당당히 담담히 ‘아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말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격려하는 일이 더 우선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안전교육”보다 더 중요한 “안전사회를 만드는 일”에 진심인 분들의 소리에 답이 있습니다. (사)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정식 명칭은 “(사) 4.16 세월호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입니다. 그분들의 목표는 이런 겁니다. “다시는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포기하는 일이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만 내 아이에게 덜 부끄럽고 덜 미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반복하여 안전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 땅에 안전사회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 분들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정기적으로 꼭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래야만 안전교육이 반복 구호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생한 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전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이 사회가 아직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함께 일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이야기 속 어디에도 “우리 아이가 미처 안전교육을 잘 받았더라면...”, 혹은 “우리 아이가 인공호흡법을 미리 잘 알았더라면...”이런 말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 우리가 늘상 해 오고 있는 안전교육 시작 전에 “진상규명은 어디까지 되었으며, 책임자는 어느 정도 처벌을 받았고, 참사 이후로 국가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떤 대책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는지” 에 대한 설명이 꼭 주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미완이면, 미완인 채로 말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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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개인의 아픔에서 공동체의 기억으로, -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한 시민의 상황에서
안녕하십니까, 이 글을 적으면서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 저는 대학교 학생으로서 대학 생활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학과 공부를 마치고 레포트를 준비하며 여러 시험과 토론, 논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대학 생활을 하는 시점에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저의 스마트폰에서 지속적인 재난 문자 알림이 오더라고요. 지금은 관련 지역만 뜨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떴으니까요. 그 당일에는 저도 잘 몰랐고,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이라 뉴스 속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확인을 하려는데 굉장히 슬픈 소식들이 연이어 올라오더라고요. 그 시점쯤 됐을 때 저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 제 몸과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시력 시각장애인이었고, 진행성으로 인해 그때 당시에 막 중증 장애로 진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중증장애인의 재난대피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재난에 취약한지 더 많이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수학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여 참사를 피했다는 그 학교 장애 학생분들의 이야기를 어느 경로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장애 학생들의 그 마음은 어떨까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자신들이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배제됨으로 인하여 안전을 확보했다는 것으로 인해 희생자들을 포함해 그곳에 갔던 수많은 사람에게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저는 중증의 시각장애인 당사자로서 그 학생들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재난 시기 거주 시설에서 집단생활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사망하는 일이 여러 지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매우 위험하고 장애 당사자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해야만 그나마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지는 상황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면서 모든 이의 인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면서 안전하여지는 사회, 그리고 가장 약하고 소수인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말하며 중증의 최중증 복합 장애인에게 여러 이유로 이 한국 사회 자체가 여러 차례 침몰해 가는 선박과 같은 재난사회였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안전을 공감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세월호와 관련된 주변인들의 아픔들이 그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잘 보듬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보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 구호를 다시 한번 모든 사회문제에 대입해 봅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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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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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당신에게 세월호란
당신에게 세월호란? -현(hyun) 질문자 : 현 장소: 니트생활자 사무실 *인터뷰이: S, H(닉네임으로 작성했습니다)  *인터뷰이는 니트컴퍼니 모임 닛커넥트 에서 만난 멤버들로, 2시간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니트컴퍼니 : 무업 청년들이 모인 가상회사로, 해마다 상/하반기 기수를 모집하고 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에서 업무 인증과 주간 회의, 전시 등의 활동을 합니다. Q1. 10년 전 4월 16일, 그 날 여러분은 어떤걸 하고 있었나요? S: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세월호 참사에 관한 연락을 받았고, 도서관에서 내내 기사에 대해 찾아봤다. 토론 시간마다 세월호가 소환됐다. 언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외국인들 앞에서 나는 한국인으로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H: 그 날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첫 날이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 길에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한 주가 우울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참사를 목도할 수 밖에 없어서 충격이 컸다. Q2. 어떤 것을 기억해왔나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유학 시절 기숙사 화재경보기 알람이 울렸을 때, 모두 1층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안전불감증이라 알람이 꺼질 때까지 귀를 막고 잠을 잤다. 그 정도로 안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를 겪고 나서 내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은 건널목에서도 멀리 떨어져서 기다릴 만큼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H: 말도 안 되는 참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참사 원인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여러 참사를 지나며 생겨난 리본을 4개나 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리본을 달게 될지 무섭다. S: 이태원 참사 때 주변에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참사 소식을 접했다. 그날, 밤새도록 SNS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 참사 현장을 봤다.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살아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Q3.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H: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없구나, 각자도생 사회구나,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구나,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참사로구나. 수장이라는 표현이 세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큼 세월호를 잘 표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416재단에서 만든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문을 열어 개소 강좌를 듣고 왔다. 김일란 영상감독, 홍은전 기록활동가, 그리고 김승섭 교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올해가 세월호 10주기라 책도 많이 나오고 영화도 많이 나올 테니 관심을 갖고 함께 해달라고 하셨다. S: 요새 친구들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도 지켜주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한다. 축하한다는 반응조차 나오지 않는다.   Q4.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월호를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 또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정치가 묻을 수 없다.  H: 앞서 들었던 김승섭 교수님 강연에서 해주신 말씀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했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꼭 용기를 내주세요" 이 말을 듣고 교수님이 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세월호를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담지 못한 인터뷰 비하인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여과없이 참사 현장을 전하는 SNS의 보도윤리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겐 일상 곳곳이 참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성 위계에 의한 여성 피해자의 사망사건과 더불어 여전히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죽음이 가려지는 이유와 문제도 짚어보았습니다. 참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를 떠올린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신림역• 서현역 칼부림, 동작역 침수사고는 큰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덮어둔지라 언제 사고로 이어질 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해결되지 않고 넘어간다면 안전한 사회는 멀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전을 원한다면 참사를 기억하라’   작년 이태원 참사 1주기 기억식에 나온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선 책임을 좌시해선 안될 것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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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 시민이 기억하는 모습, 시민이 해야 할 질문
🎗 시민이 기억하는 모습, 시민이 해야 할 질문 기억하자는 말에서 출발한 질문 2014년 이후 4월 16일마다 “기억하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궁금했다. 무엇을 기억하겠다는 걸까?, 어떤게 미안하다는 걸까?  기억하자와 미안하다는 말에 주어가 없는 느낌이었다. 기억하겠다는 사람이 많을 수록 내 의문은 더 많아지고 깊어졌다. 그 의문은 두 개로 좁혀졌다. 저 말로 참사를 막을 수 있을까? 참사 원인을 드러내고 있을까?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참사 방지다. 만약, 기억하겠다와 미안하다는 말이 참사 원인에 접근도 못 하고, 제거도 못 하고, 행동하게 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같은 참사를 또 겪을 게 뻔하다. [함께 기억] 프로젝트로 세 편의 글을 썼다. 그 중 두 편은 인터뷰였다. 모임도 참여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모임에 참여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세월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었다. 둘째, 기억하자는 말에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고 싶었다. 셋째, 그 기억이 참사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었다.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기억은 참사 예방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번 글은 이렇게 생각한 이유와 내가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 원인, 시민이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시작은 떠내려오는 아이들부터다. 떠내려 오는 아이들 두 사람이 강가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강 쪽에서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진 것이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서둘러 아이를 구했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아이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엔 한 명이 아니었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이 보이고, 보이고, 또 보였다. 아이들이 계속 떠내려오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만으로는 구하기 벅찰 만큼 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때 한 친구가 물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물에 있던 사람이 “너 어디가?!”라고 물었다. 친구가 답했다. “상류(Upstream)로 올라가서 아이들을 물속에 던져 넣는 놈을 잡으려고.” 업스트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는 여정 해당 사례는 행동 경제학자 댄히스가 ⟪업스트림⟫에서 소개한 사례다.1) 업스트림이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거나, 그 문제로 인한 피해를 체계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반면, 다운스트림은 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댄 히스는 업스트림으로 올라가며 문제 원인을 찾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1) 문제 발생 후 해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애초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탓하는 게 아니라, 소가 왜 탈출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앞선 사례는 아이들이 떠내려오는 상류(Upstream)로 올라가서, 애초 밑(Downstream)에서 아이들을 구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예시다. 참사 발생 이후 인명 구조, 피해자 수습, 책임자 처벌에만 집중하지 말고, 참사 근본 원인을 찾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 수습, 배 인양, 책임자 처벌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참사를 예방하는 건 아니다. 문제불감증, 업스트림으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방해물 업스트림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어렵고 오래 걸린다.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감춰진 문제와 원인이 보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문제와 원인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문제불감증'이다. 문제불감증이란, 부정적 결과가 자연스럽고 통제할 수 없으며,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이다. 어떤 문제에 무지할 때, 마치 그것을 날씨 대하듯 “어쩔 수 없지"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것이다.1)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는 문제와 원인을 못 보게 한다. 원인이 그대로인데, 문제가 사라질 리 없다. 때문에 문제불감증은 업스트림으로 가는데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기억하자는 말은 참사 당시 우리의 문제불감증을 기억하고 경계하는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재한 문제를 볼 수 있다. 기억의 현주소를 보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문제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기억의 현 주소 모임에 참여하고, 인터뷰하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그렇다’였다. 무엇을 기억하냐고 물으면, 참사 날짜, 타고 있던 사람들, 목적지, 언론 오보, 정부 대처, 선장의 탈출 시점과 선내 상황 등이었다. 또한, 참사 당일 자신들이 하던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수업 듣고 있었다, 일하고 있었다, 카페에 있었다. 낮잠을 잤다. 식사 준비를 했다” 등등 다양했다. 선명하고 깔끔한 기억이었다.  그 외 기억은 그날의 감정이었다. 분노와 슬픔, 비참함, 죄책감 등이다. 한 사람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알게 됐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어.”라고 말했다. 표정은 침울했고, 일부는 울었다. “2024년 4월 16일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면, 뭘 할 거야?”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 말이 없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참사 현장에 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직장인은 일을, 학생은 수업을, 부모는 자식을 위한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잠시 멈출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부는 팽목항에 간다고 할지도 모른다. 서울시청부터 팽목항까지는 약 420km다. 시속 80km로 가도 5시간이 걸린다. 물에서 숨을 가장 오래 참은 기록은 24분 33초다. 도착했을 때 생존자가 있을까. 아마 도착해서 10년 전과 똑같이 분노와 슬픔, 죄책감만 느낄 것이다. 참사 후 느낀 감정은 참사의 원인이 아니다 참사 후 느낀 감정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건 참사 예방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사 희생자가 나온 뒤 느낀 감정과 참사 이전 상황은 인과관계가 없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참사 방지다. 때문에 참사 후 감정이 아니라, 참사 원인과 막지 못한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시스템 부재를 원인으로 말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큰 원인은 참사 이전 누구도, 시스템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챘다면, 우리는 배가 뒤집혀도 바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이고, 304명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 챈 문제불감증 앞서 "2024년 4월 16일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면 뭘 할 거야?"라는 질문에 기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돼지."였다.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또다시 참사를 마주해서, 2014년 4월 16일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하는 것일텐데. 왜 이런 질문을 그대로 받아 들일까. 기억하겠다 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참사는 발생해, 라며 체념한 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한 체념 속에서, 질문 자체가 '발생하면'을 가정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질문이 발생하면인데, 당연하다 반문할 수도 있다. 그 당연하다는 태도가 문제 불감증이다.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 챈 이유는, ‘시스템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비됐고, 작동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작동 안 했는지, 없었는지 모를 시스템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 자체가 문제임을 알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그 시스템이 있었고, 작동했나? 답은 바로 나온다. 문제불감증은 “눈앞의 문제가 문제인지 모르는 무지”1)에서 비롯된다. 문제를 모르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태도는 세월호 이전부터 만연했고 참사 후 드러났다. 다큐멘터리 <그레이존>이 보여준 모습이다. 세월호 오보는 왜 발생했나 다큐멘터리 <그레이존>은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 상황을 보여준다. 전원 구조로 보도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그대로 보도됐다. 자막을 쓴 사람도, 보도를 본 기자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레이존>에서 가장 심각하게 들렸던 대사는 “정부가 다 구했대.” “그래서 그걸 믿었죠.” 였다. 상부 지시와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부 지시는 당연히 맞겠지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다. 질문하고 확인했다면 막을 수 있었지 모르는 오보였다. 우리 주변에 이를 막을 신호가 없었을까? 국내 언론은 세월호 이전부터 질문하지 않았다. 2010년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국내 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했다. 손을 든 건 중국 기자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내 기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국내 기자에게 손들어 질문하라고 했다. 손든 기자는 없었다.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다.  강남순 교수는 이를 보고 “질문하기가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저널리스트조차도, 왜 제대로 질문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가.”2)라며 비판했다. 모두가 똑같이 행동했다는 건, 그게 당연한 문화였다는 것이고,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방증한다. 외부에도 질문 안 하는 기자가, 내부 지시에 질문할 리 없다. 국민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태도가 기자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국민도 다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보고 처음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은 없었다. 언론 보도가 당연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구조 오보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다. 만약, 2010년 질문하지 않는 기자들을 보고 “왜 질문하지 않냐”, “내부에서 질문하지 말라고 했냐”,  “질문하지 않는 걸 문제라고 생각한 적 있냐”, “질문하지 않는 문화는 언제부터 왜 만들어졌냐”고 물었다면 오보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존> 출연 기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①왜 지시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았는지. ②질문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거나 문제라고 생각한 적 있는지. ③질문하지 않는 모습은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졌는지. ④같은 참사가 있을 때, 더는 오보를 안 내도록 바뀌었는지. 세월호 이후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불렸다. 항상 붙는 말은 “기레기 니들이 그렇지"다. 이는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다.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원인이 뭔지 찾고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래 그렇지"라는 말에 머무는 건 방관일 뿐이고, 쓰레기가 쌓이는 걸 지켜만 보겠다는 말이다. 시스템 부재가 문제일까? 부재에 무지했던 게 문제일까?  어떤 게 참사를 예방하는 기억일까? 세월호 참사로 구조 시스템이 없었고,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이 자체로 큰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부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알아차렸다면, 시스템을 만들고,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스템 부재를 모르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애초 시스템이 뭔지도 모르게 된다. 시스템이 있다고 믿으면, 참사가 벌어질 때까지 부재를 모르고, 참사가 발생해야 알아차린다. 비극이 있은 뒤에야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스템 부재를 눈치 못채고 있다. 그게 세월호 행사여도 말이다. 화재 발생시 대피 경로가 무엇인가요? 누가, 어디로, 어떻게 대피시키나요? 장애인, 비장애인, 남녀노소 중 누구를 최우선 순위로 대피 시키실 건가요? R&R 어떻게 분배되어 있나요? 세월호 행사에 가면 묻는 질문이다. 답변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행사 기획자와 참여자 모두 생각지 못한듯 당황한다. 난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4월 16일마다 노란리본을 달고,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게 현실이 아니라, 시스템이 없는데, 아무도 그 부재를 눈치 못채는 게 진짜 현실이라 생각한다. 세월호가 이렇다면 다른 행사는 불보듯 뻔하다. 개인적으론 안전이나 대피 계획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대피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계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창필 필요도 없다. 119에 누가 신고할 것인지, 누가 비상구로 안내할 것인지, 장애인이나 노약자 혹은 부상자가 있다면 누가 전담할 것인지 등만 사전에 대비하고 R&R만 분배해도 되는 일이다. 그 어느 조직과 개인도 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후 1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10년 동안 뭘 배우고, 변한건지 의문이든다. 만약, 안전부터 신경 쓴다면 어떤 모임이든 참여자 모집부터 달라질 것이다. 특이사항으로 장애나 부상 등 도움이 필요한 점을 반드시 남기게 했을 것이다. 누가 오는지 알아야, 그에 맞게 준비할 수 있다.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참석자가 파악되면, 행사 좌석 배치 부터 달라질 것이다.  기억의 주소는 감정과 상황이 아니라 부재를 몰랐다는 것, 부재를 몰라서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 세월호 참사는 배만 안 뒤집히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들을 살피고, 개선해서, 새로운 유형의 참사를 예방하자고 말한다. 문제 원리를 알면 어떤 문제도 풀 수 있지만, 유형만 알면 다른 유형을 풀 수 없다. 핵심 원리는 안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대비 시스템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 원리를 기억하고 모든 유형의 참사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모습은 ①시스템의 부재 ②시스템 부재를 못 봤다는 점 ③ 시스템 부재를 못 본 이유, 이 세 가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스템 부재를 못 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① 문제가 문제인지 몰랐던 무지 ② 문제가 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은 무관심 ③ 만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체념 ④ 만연한 문제에 대한 방관  ⑤ 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①~④번은 무능함이고, ⑤번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간 우리의 모습이다.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함께 기억] 프로젝트 중 성현이 내게 한 질문이다. 그렇다는 답변에 성현은 다시 물었다. “어른들은 뭘 했나요? 10년 동안.” 10년 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놓친 위험요소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 위험 요소들을 봤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게 놓친 기회가 몇 번일까. (사)4・16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총괄팀장 장동원 씨는 이태원 참사 뒤에 “유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참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싸웠는데, 결국 또 희생자가 나왔잖아요.”라고 말했다. 미안해야 할 건, 기억하겠다고 한 모든 사람이지, 가장 앞에서 싸우는 한 사람이 아니다. 안전은 일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다면, 일부에게만 맡겨서 안 된다. "기억하겠다, 위로한다, 안전에 투표하겠다"에 멈추고, 그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 세월호 유족과 일부 법조인, 정치인, 기자가 해결할 거라며 맡겨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정치인도 내가 서 있는 곳의 문제와 위험요소를 모른다. 故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발간 된 책, ⟪운명이다⟫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종료 후 고향인 김해에 내려가 화포 습지를 복원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엉망이 된 화포천을 보고 탄식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했다. "어디 화포천만 이렇겠는가. 온 나라가 다 이럴 것이다. 대통령을 하면서 강의 지천과 실개천, 습지들이 이토록 처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3)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대통령도 가장 밑의 현실은 알지 못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시의원이, 구의원이 아무리 국민과 내 지역을 생각한다고 말 해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문제는 알 수가 없다. 내 주변 문제를 알고, 알아차려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참사는 일상에 있다. 기억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일상의 참사 위험요소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문제를 알아차리기 위해 가장 쉬운 실천은, 질문이다. 일상에 녹여야 할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과 질문 “현실 세계의 변화는 단순한 해답을 가져오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각자의 정황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좋은 질문은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하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도 이끄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준다.”2) 앞서 세월호 행사에서 대피경로와 우선순위를 질문했을 때, 비로소 그 어떤 안전 시스템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이처럼 질문은 보이지 않던 문제를 드러나게 한다. 드러난 문제는 해결하고 예방해야 하며, 그 순간마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말해야하는 순간 5가지는 이렇다. ①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②문제가 없는지 의심이 들 때 ③문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때 ④문제 개선 중에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할 때 ⑤ ①~④을 다 알고도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할 때. 세월호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한번에 의미와 중요성을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은 많지 않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은 그 일을 해내는 소중한 표현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도 이 표현을 자주 써야 한다. 1년에 한번 말하는 “세월호를 기억하자”가 아니라, 일상에서 말하는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말이 304명의 죽음에서 반성하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태도다. 은유 작가는 “우리가 의심 없이 행했던 일을 의심하는 순간 해방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을 것입니다.”4)라고 말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우리들이 더욱 안전하기 위해서는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신호를 찾아서 그 신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1)  세월호 유족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지겹다"가 아니라, “어차피 참사는 또 발생해"라는 말이며, 가장 모욕적인 태도는 ‘문제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의심 없이 행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것들에 의심하고 질문하면, 10년 뒤 우리는 더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세월호를 기억하면서, 10년 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냐는 질문과 10년 동안 뭘했냐는 질문에,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해졌고 모두가 일상의 위험을 알아 본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업스트림⟫ (댄히스/ 웅진지식하우스/ 2021) p.15, 41, 140 2) ⟪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행성B/ 2021) p.63, 65 3) ⟪운명이다⟫ (노무현, 노무현재단/ 돌베개/ 2022) p.311 4) ⟪해방의 밤⟫ (은유/ 창비/ 2023) p.250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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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참사와 함께 살아가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이것은 내 기억 속에 찌꺼기처럼 남은 문장.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참사가 일어난 지는 꼬박 2년이 지났었고, 검고 촌스럽기로 유명했던 우리 학교 교복, 내 재킷에는 노란 리본 배지가 매달려 있었다. 누가 내게 저런 말을 했었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블러처리 된 영상을 보는 것처럼 흐린 얼굴의 누군가가 내게 저 말을 건넨다. 어쩌면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짓고 빻던 동창일 수도, 너희가 지금 뭘 할 수 있느냐며 공부나 하라던 선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찌꺼기처럼 남은 문장은 언젠가부터 새로운 질문이 되어 나를 두드린다.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야만 하느냐고, 언제쯤이 되어서야 4월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이 종종 멈추는 일을 그만할 수 있느냐고.   오랫동안 나를 두드리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참사의 순간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에서야 짧은 대답을 하고자 한다. 참사가 일어난 뒤 몇 년간은 참사 자체에서 오는 비통함도 있었지만, 참사로 인해 생긴 슬픔과 애통, 분노의 감정들에 자꾸만 어떤 의도가 있다는 듯 덧씌워 비난하는 말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입에 담기는커녕 생각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을 보면서 그들과 내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더욱 피부에 와닿는 공포는 그런 상황을 목격하며 ‘언제까지 슬퍼할 거야.’ 하며 점잖은 체를 하는 이들이었다. 언제까지라니, 우리가 제대로 슬퍼할 수 있었던 순간도 없었는데. 참사가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리본을 다 떼겠다느니, 노란 리본을 이용한다느니 하던 기억들은 모두 휘발된 채 멈춰있을 수 없다며, 산 사람은 살아야 함을 운운하는 이들을 보며 막막한 심정으로 자문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전히 참사와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자크 데리다는 애도는 어떤 순간을 두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실된 대상을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지 않지만, 그 존재를 문득 느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애도의 대상으로부터 멀어져, 이들을 잊고 살아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애도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 애도의 부채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온다. 그것이 분노나 원망의 이름을 빌리는지, 혹은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이라는 이름을 달고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반드시 돌아와 우리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사 앞에서 너무나 빨리 애도를 거두어 왔다. 심지어는 ‘애도 기간’이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시작도 전에 끝을 정해두기도 했다. 이 또한 우습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리석은 짓의 결과는 늘 참사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상처로 귀결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날 선 비판을 지껄인 주제에 나 역시 지난 몇 년간 참사와 오롯이 함께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4월 16일이 되면 버릇처럼 착잡한 마음을 끄적이고, 시간이 멈춘 듯한 하루를 보냈지만, 마치 그날의 의식처럼, 연례행사처럼 지나갔을 뿐이다.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언제까지 할 것이냐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떠난 참사의 자리에서 여전히 애도의 부채와 맞서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참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몇 년이 더 지나고 나면 이 슬픔과 비통함을 오롯이 아로새길 수 있을까. 대답을 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기억의 잔재에 남아있던, 이 오랜 질문의 원본에는 이제야 답할 수 있겠다.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참사에 온전한 애도를 보내고, 언젠가 이 참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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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나
1.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나는? -속보와 오보 -실시간 생중계 -침몰하는 세월호와 오열하는 가족들 -외신과 기레기     2.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10년 -재난보도준칙 제정 -꾸준함과 연대 -애도와 책임 -<시사IN> 시리즈 보도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   “이태원 참사를 보며 유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그런 참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싸워왔는데 결국 또 희생자가 나왔잖아요(세월호 생존자 장애진씨의 아빠 장동원씨).”   “10년이 지났는데, 저는 몇 년밖에 안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현재 우리는 진행형이잖아요. 10주기를 계기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간절해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멈추면 안 될 것 같아요(세월호 생존자 장애진씨 엄마 김순덕씨).”     3. 지난 10년 사이 한국 사회는 얼마나 나아갔나? 그럼에도…   【운항관리규정, 비상 부서배치표에 나타난 선원들의 임무와 실제행동】 직위 이름 비상사태 시 역할 실제 행동 도주 여부 (나이) 선장 이준석 선내총지휘 승객들에게 선내대기 지시만 하고 도주   (69) 승무경력 27년9월 선원들과 도주, 승객들을 선내에         갇히게 만듦   1등 강원식 현장지휘 최초 구조요청을 진도VTS가 아닌 제주 도주 항해사 (42) 우현 미끄럼틀 VTS로 해 사고 전파에 차질 빚음       승무경력 20년5월 청해진해운 직원과 통화만 함               신정훈 1등항해사 보조 제주운항관리실과 교신, SSB 도주   (34) 우현 슈트 투하 도주하는 선원에게 구명조끼 전달       승무경력 3년7월 다른 선원의 진도VTS와 교신에 끼어들어         원활한 교신방해   2등 김영호 선장보좌, 좌현 미끄럼틀,구명뗏목 진도VTS와 교신   항해사 (47) 승무경력 2년4월 여객부에 선내대기방송 무선지시 도주 3등 박한결 선장보좌 비상부서배치표상 의무 실행하지 않음   항해사 (26) 비상통신 힐링펌프 조정하다 실패 보고 도주     승무경력 2년1월 조타실 좌현 출입구에서 울고 있었음   1등 박경남 조타수, 구명뗏목 진도VTS와 교신   조타수 (60) 승무경력 5년9월 조타실 좌현 출입구에서 바깥쪽 쳐다만 봄. 도주 2등 오용석 좌현 구명뗏목 2등항해사가 VHF 교신 시 통신기기 전달   조타수 (58) 승무경력 9년11월 GPS 위치를 알려줌 도주       도주하는 선원 위해 출입문에 고무호스         묶어줌   3등 조준기 우현 구명뗏목 조타기 잡고 있었음   조타수 (56) 사다리투하   도주 기관장 박기호 기관실 총지휘 조타실에서 엔진정지     (54) 승무경력24년11월 기관실에 있던 기관부 선원도주 지시 도주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1등 손지태 우현 미끄럼틀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기관사 (58) 구명 뗏목, 승무경력21년3월     3등 이수진 기관장 보좌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기관사 (26) 승무경력1년4월     조기장 전영준 우현 미끄럼틀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61) 구명 뗏목 승무경력23년11월     1등 이영재 좌현 미끄럼틀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조기수 (56) 구명 뗏목 승무경력28년8월     2등 박성용 우현 비상사다리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조기수 (59) 승무경력27년7월     3등 김규찬 우현 비상사다리 3층 기관부 객실복도에 대기하다 도주 도주 조기수 (62) 승무경력10년4월     사무장 양대홍 승객유도 5층, 4층, 3층 다니며 승객탈출유도 사망   (45) 안내방송     사무원 강혜성 승객유도 선내대기 안내방송 탈출   (32)   4층으로 승객유도     박지영 승객유도 3층 안내데스크에서 조타실에 무전 사망   (22)   3층 좌현 출입문으로 승객탈출 유도         4층으로 승객이동 대피유도     정현선 승객유도 4층에서 승객들 좌현 출입문 탈출유도 사망   (28)       이벤트 안현영 선원 아님 승객들 3층에서 4층으로 이동대피 유도 사망 담당직원 (28) 비상시 역할 없음     조리장 최찬열 승객유도 곧바로 도주 도주   (58)       조리수 김문익 승객유도 3층 기관부 객실 복도로 떨어짐 사망   (61)       조리원 이묘희 승객유도 3층 기관부 객실 복도로 떨어짐 사망   (56)         김종임 승객유도 곧바로 도주 도주   (51)       출처: <책임을 묻다>     “책(<책임을 묻다>)을 덮고도 유난히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다. 승객 탈출 업무에 나선 선원은 숨졌고, 도망간 선원은 살았다는 사실을 정리해둔 일지다. '구조'과 '도주'로 나뉜 세계에선, 해야할 일을 한 사람만 희생당했다. 선원만이 아니다. 고위공직자가, 대통령이, 국가가 책임자 자리에서 내뺐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 감히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기, 온몸으로 그 세계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 이들이 있다. 세월호 가족과 변호인들이 수사·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지난 10년을 치열하게 복원해놓았다. 깊은 감사를 전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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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가 기억하고 제도가 기억하게 하라
2013년 10월 30일,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었습니다. 교실 내에서 티격태격하던 친구들과 함께 우정도 다지고 한라산도 올라가며 즐겁게 지냈었습니다. 항상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떠돌던 구름을 바로 옆에서 직관하던 그 황홀한 광경과 정상까지 올랐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저의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그러고 6개월 후 같은 섬에 가던 단원고 학생들은 전 국민이 보는 긴급 속보 방송 앞에서 300여 명이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 한 번뿐인 이런 추억들을 만들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와 미래에 대한 계획, 소망들은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TV를 보며 가족들은 “다행이다,” 네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라” 정도의 말만 했지만 저는 슬픔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그 수많은 동년배들이 왜 그렇게 처참히 희생되어야 했을까? 바다 위에 완전히 누워있는 세월호를 전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데 왜 정부는 가만히 있었을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있었던 추모 공간을 지나칠 때마다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 극단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망언들을 볼 때마다 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도 공감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도와야지 하는 생각에 헌금, 헌화도 해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그 의지와 기억마저도 저물어 갔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함께 기억 프로젝트를 통해 잊혀졌던 기억을 돌이켜 보며 저는 기억이라는 단어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기억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모두가 트라우마를 갖고 악몽에 잠을 못 이뤄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물이 무서워서 배를 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함께 기억한다는 것은 개인 기억의 집합체보다는 사회적 기억으로 봐야 합니다. 사회가 기억하고 제도가 기억해야 세월호 사건과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국가가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상황에서 개인만의 기억과 노력은 한없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담은 기자들의 증언을 담은 영화 “회색 지대”는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누구는 단순히 특종을 위해, 더 좋은 카메라 구도를 위해 뛰는 기회주의자로 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있어 주세요”라는 안내방송과 대비되는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이기주의만으로 이 사진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내 동생 돌려내!”라는 유가족의 울부짖음과 아비규환 속에서 가족의 생사를 알고자 하는 몸부림, 이 상황을 하나라도 더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기자들의 고군분투 모두 그 당시 경찰들의 저지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사회적인 기억을 만들라는 그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기억은 개인들의 트라우마만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규명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며 이 제도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사회가 공감하고 감시·감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기억이 형성되지 않으면 참사는 되풀이됩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고, 세월호 참사 때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2022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끊을 때입니다. 모든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관련자 처벌 및 제발 방지 법률의 제정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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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모두의 10년, 다시 찾아온 봄
모두의 10년, 다시 찾아온 봄 초등학교 5학년 봄방학식이었다. 5학년 교실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 정리를 도와달라고 하셔서 친구와 함께 학교에 남아 책상을 옮겼다. 교실에 돌아오니 꺼져있던 텔레비전에 뉴스가 틀려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보고 있던 뉴스에는 지하철에 불이 났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대구에 사는 누구든 자주 놀러가던 그 지하철역까지 불이 옮겨붙었다고 했다.  6학년이 되던 봄, 동네는 지하철 참사로 어수선했다. 관계망이 좁은 대구에는 조금만 건너면 아는 이가 참사 피해자였고, 유가족이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어떤 이야기는 소문처럼, 가십처럼 동네를 떠다녔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도 우리는 방과후에, 주말에 중앙로역에 갔다. 참사를 잊고 살다가도 중앙로역 벽에 새까맣게 남은 재와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 그 날이 다시 떠올랐다. 속보를 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의 뒷모습, 정신없이 나오던 참사 장면, 그리고 텅 빈 교실, 그런 순간들이….  10년 전,  4월의 기억 10년이 지나, 나는 사범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교사를 꿈꿨다. 임용고시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학생으로 경험했던 학교는 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공간이었다. 퀴어인 내가, 여성인 내가 지켜지는 학교에서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졸업 직후, 나는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삶을 이어갔다. 2014년이었다. 처음 교사가 된 나는 기쁘고 신나는 마음으로 가득찬 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우리반, 우리학교, 아직 교사로서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하고픈 것은 많은 3월이었다. 그저 학교에 가고, 교실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직 잘 몰랐기에 함께 웃을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 더 좋았다.  4월 16일, 어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날이었다. 우리학교는 전자기기 사용이 금지되어있었다. 학생들은 전자기기 대신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온 지 2달째, 나 또한 전자기기 사용에 대해 눈치를 보며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휴대폰과 노트북과 멀어졌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선배들이 저녁을 사줬다. 굽이 굽이 산길을 따라가야있는 작은 산골마을에 온지 2달밖에 되지 않은 초임교사를 선배들은 매일 저녁 챙겨줬다. 그날도 그러했다. 맛난 밥을 먹으며 학교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집, 그제서야 처음으로 휴대폰을 켜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밤 늦게서야 세월호 참사를 알게 됐다. 우리끼리 농담삼아 사회와 동 떨어져 있다고 했지만 그걸 몸소 경험한 날이었다. 너무나 많은 기사들이 흩어져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지? 배가 가라앉았다고? 근데 구조를 하지 못했다고? 어째서? 그 시간부터, 며칠간 기사를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러다 두려워졌다.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내가 함께하는 학생들과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학생들을, 그리고 나를 지킬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는 타인의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다가올 수 있는 참사였다.  2016년, 학생들과 함께 만든 노란 리본 (사진 :유랑) 우리 모두의 10년,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10년이 지났다. 이제 곧 4월 16일이 온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한 10년을 돌아보면 몇 개의 장소들이 떠오른다. 팽목을 오가는 셔틀을 타기 위해 새벽에 모인 이들, 세월호와 구조현장이 모이지 않았던 팽목항, 잊지 않기 위해 갔던 화랑유원지, 리본을 함께 만들었던 광화문. 주변에 함께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을 때, 이 곳에 가면 함께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보고, 함께한 시간을 들으면 지치지 않고 함께 기억하고 진실을 향해 계속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마주한 5번째 4월이었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1,000명의 시민이 모였다. 천명의 시민은 합창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있음을,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화랑유원지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는 노래의 힘을 느꼈다. 노랫말로 우리의 마음을 전하고, 한 목소리 내며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이 곳에 함께 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합창을 하기 위해 서로의 입과 시선을 맞추는 것,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음과 박자를 맞추는 것, 곁에 있는 이의 온기를 느끼는 것. 그 감각들로 우리의 연대를 느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천인 합창 현장 (사진 :유랑)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것, 우리가 연대하는 것, 그리고 추모한다는 것. 그 기억과 행동이 그저 무겁지만은 않은 일임을 처음 깨달았던 날이다. 함께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서로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힘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 희망을 만들어가는 길이 하나의 방법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이제 11일 뒤,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올해는 화랑유원지에 4,160명의 시민이 모인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기억하고, 진실을 향해 목소리내려 한다.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는 또 다른 사회적 참사와 재난을 마주한다.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18개월 전에도, 사회는 시민을 지키지 못했다. 국가와 정부가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두려움은 무력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떠한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감, 그리고 나 혼자 생존하기도 급급한 일상을 우리는 보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리고 사회는 더디지만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무력해졌을 때, 희망을 놓고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할 때 사회는 더 속도를 늦춘다. 혼자인 것 같을 때, 나 혼자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을 때, 각자의 기억 공간에 찾아가자. 팽목항에, 광화문에, 화랑유원지에, 그리고 내 주변에 있을 노란 리본에. 그 공간 속에 있는 10년의 기억과 함께했던 이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조금씩 나아가자, 안전한 사회를 향해, 그리고 그 누구도 죽임 당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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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들 2014년 TV 화면에서 세월호란 이름을 처음 마주했다. 가라앉는 배와 그 주변을 둘러싼 헬기와 구명보트, 기자의 브리핑 등 분주한 화면 속에 사고 현장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있으니 배는 가라앉더라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히 구출되지 않을까. 그렇게 뉴스에 나오는 교통사고같이 세월호는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소식이었고 그렇게 ‘문제없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생존자 구출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고 여러 이유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만 쏟아져나오며 배는 점점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1년 뒤 TV 화면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시위하고 있었다. 이를 보던 아버지는 혀를 차며 유가족 흉을 봤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나라의 경제가 어렵게 되었다고, 보상도 받았다고 하던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거 아니냐고. 혼잣말이었지만 내 귀에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런 생각을 옳다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 경제와 보상의 진실 여부를 떠나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만약 세월호 희생자가 나였어도 아버지는 혀를 차실까? 죽은 애들 가지고 장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17년 박근혜 퇴진 시위 때 다시 세월호를 마주했다. 퇴진 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인파 사이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눈과 우연히 마주쳤다. 몸이 얼어붙고 저절로 눈물이 났다. ‘슬프다’는 표현 외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했다. 나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 유가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거짓으로 선동된 지식에 맞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나의 소극적인 태도에 죄책감이 들었고 매주 거리를 나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화문 거리를 걷고 걸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큐 <장기자랑이>이 기억하는 애도의 방식 누군가는 진실을,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며 진실 전쟁이 거듭되었다. 그 사이 4.16 세월호 참사도 10년이 흘렀다. 10년 동안 유가족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22년 10월 세월호처럼 사고가 예견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여전히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부채감과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 속에 작년 이소현 감독의 <장기자랑>을 봤다. 세월호 엄마들 중심으로 수학여행 속 장기자랑을 배경으로 한 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였다.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 엄마들의 욕망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이들의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준다는 의미에서 의욕적으로 임하는 사람이 있지만, 누군가는 웃으며 연극을 참여하는게 맞는지 의문을 품는다. 또한 배역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극단을 떠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큐의 마지막은 어느 한 고등학교에서 연극 <장기자랑>이 펼쳐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엄마가 대신 그 무대에 서서 한 번 놀아볼게." 아이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무대 위에서 웃고 즐기는 엄마들의 모습은 참사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줘 반갑다. 아픔을 아픔으로만 남기지 않겠다는 결심이 낳은 애도 방식이다. (출처 : 노컷뉴스) 10년이 흐르는 동안 죄책감이 희미해지고 세월호를 다루는데 피곤함이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다큐 <장기자랑>이 반가웠다. 참사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 엄마들이 실천하는 애도의 방식은 이소현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좀 더 가까운 이웃으로, 욕망을 가진 주체로서 내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란 사람도 죄책감으로 세월호를 남겨두는 것이 아닌, 내일을 위해 ‘무엇을’을 기억할 것인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을 다시 묻게 되었다. 여전히 세월호 참사에 풀리지 않는 문제의 실타래가 있고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더 넓게 가져보는 순간도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 꼭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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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당신이 안겨준 세월로 한 걸음 더 내디뎌 보려고요 -4·16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이하여
당신, 잘 지내나요? 10년이라는 묵직한 세월에 순간 먹먹함이 밀려오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안부를 먼저 묻고 싶었습니다. 봄과 함께 꽃망울 맺힐 때면 심장이 아려오고,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애간장을 시꺼멓게 태웠을 당신이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문제해결은커녕 여전히 매정한 국가에서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10년에 다다랐네요. 어찌할 바 몰라 눈물만 훔치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 싸웠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2014년 4월 16일, ‘구조 0’ 우리는 검은 바다에 쓰러져 있는, 그리고 끝내 침몰하는 세월호를 실시간으로 목격했습니다. ‘전원구조’라는 짧았던 안도는 오보로 뒤바뀌고, 늘어만 가는 희생자를 보며 절망이 켜켜이 쌓였어요. 그래도 구조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대통령은 모든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하여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고, 언론은 에어포켓 가능성을 설파했으니까요. 그때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들의 말뿐이었어요. 소위 골든타임이었던 당일 오전 9시 34분, 승객 476명을 구조하기 위해 현장에 출동한 배는 ‘해경123정’ 단 한 척이었습니다. 선내에 진입하여 탈출하라고 지시만 내렸어도, 유리창만 내려쳤어도 수십 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테지만, 해경은 탈출한 선장과 선원을 싣고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오전 9시 39분에서 10시 25분까지 국가안보실(청와대)은 해경 상황실과 총 5회의 통화를 나눕니다. 국가안보실은 구조를 위한 지시·지원이 아닌 VIP 보고를 위한 영상을 촬영해달라 독촉했습니다. 그 사이 세월호는 선수만 남긴 채 바다 아래로 모습을 감췄습니다.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을 펼치겠다던 국가의 말은 어선을 빌려 사고 현장에 직접 다녀온 가족들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족들이 지켜본 현장에서는 어떠한 구조 작업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에어포켓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낱같은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 말고는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배가 급격히 기울여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신고한 사람은 단원고 학생이었습니다(오전 8:52). 단원고 학생들이 찍은 영상에는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며 두려움을 이기고자 했던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반복적으로 들립니다. 그때 단원고 학생 한 명이 말합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데’. 생존 학생 유가영님은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선내에서 자신을 끌어준 친구의 손을 잡고 간신히 갑판 위로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침몰 이후 수습과정에서 구명조끼에 달린 끈으로 서로를 묶었던 학생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얼어붙을 것만 같이 차가운 4월의 바다에서, 그들이 파국에 남겨진 우리에게 전한 것은 ‘희생’이 아닌 ‘연결의 온기’였음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3,650일 당신의 걸음 속수무책 무력감에서 환멸과 분노로 바뀌던 당신을 봅니다. ‘제발 구조해달라’는 간절함이 ‘내 새끼 살려내라’라는 절규가 되어 터져 나왔습니다. 진도체육관에서 벗어나 청와대로 가겠다며 당신이 떼었던 그 걸음이 10년을 지나 오늘에 이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2014년 4월 16일, 거대한 기만을 목격한 순간, 우리의 걸음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거리에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350만 국민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했지만, 국가는 꿈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당신이 곡기를 끊었을 때, 그 옆에서는 당신을 조롱하기 위한 ‘폭식’이 전개되었어요. 표현의 자유라는 갑옷을 두르고 경멸과 적대로 당신의 목소리를 굴절시키고자 했던 이들을 보며, 난파된 것은 세월호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책임 규명과 함께 배·보상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당신은 ‘OO팔이’라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잔인한 모욕을 들어야 했습니다. 국화꽃 한 송이 올려두는 일이 차벽에 가로막혔고, 애도와 책임을 요구하는 걸음에 물대포가 조준되었던, 가방에 노란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불심검문도 진행되었던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세월이었어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가 있는데도, ‘세월호를 바닷속에 묻어버리자’, ‘그만 슬퍼하라’ 등의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졌어요. 끝도 없이 추락하는 양심을 바라보며, 서러움만 삼켰던 나날이었습니다. 참사의 진실을 찾겠다며 나선 여정인데, 나아갈수록 진실과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구조에 실패한 국가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데 유능했어요. 특별법을 통해 조사를 시작해야 했던 특별조사위원회는 대통령의 시행령으로 발족하기도 전에 손발이 묶였습니다. 국정원, 기무사, 정보기관은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진도체육관에 상주하며 당신을 미행했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했어요. 우리의 걸음을 주저앉히기 위해 당신을 국론분열·불순·종북 집단으로 매도했어요. 국가는 2014년 4월 16일 구조를 실패한 것과 함께 참사 이후 진실과 책임마저 훼손하고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세월호참사의 진짜 범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었어요. 어느 날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이 기억나요. ‘이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어도 나의 아이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다시는 나와 같은 아픔을 우리 사회가 겪지 않았으면 한다. 세월호 유가족이 마지막 유가족이 되고 싶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고도 당신이 건져 올린 말은 ‘우리’였어요. 세상이 절망적일수록 서로를 더욱 연결하고자 했던 당신의 노력은 결국 수백만의 촛불을 밝혀 불의를 심판하는 데에 이르렀고, 깊은 바닷속에 묻혀있던 세월호를 끌어 올렸어요. 당신과 함께 다시 걸을 세월을 약속하며 사회적 아픔에 연대하는 자리에서, 주름이 한 줄 두 줄 늘어난 당신을 바라봐요. 멈추기는커녕, 당신은 한국 사회에 ‘생명 존중’, ‘안전 사회’, ‘피해자 권리’ 등의 새로운 언어를 조직하며, 숱한 사회적 죽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10·29이태원참사가 발생하자 당신은 사고를 예방하고 사고 발생 후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던 국가에 책임을 촉구했어요. 무엇보다도 세계인의 축제인 핼러윈을 즐기고자 했던 시민들에게 참사의 책임을 돌리는 행위를 경고했어요. 모두가 비통한 마음으로 참사를 마주하고 있을 때, 앞장서서 사회적 애도와 성찰의 방향을 잡는 당신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는 ‘지난 10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범벅된 봄이에요. 비열한 정치와 형편없는 국가에서 위태로운 삶이 계속되고 있어요.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설령 저들에게 처벌이 내려졌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10년 전 그날에 멈춰 서버린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들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당신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오늘까지 걸어왔고, 내일로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버텨줘서, 아니 걸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진실로 향하는 길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어요. 기억이 옅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뒤로해도 괜찮아요. 당신과 나의 새로운 약속과 다짐들로 우리는 하루하루 기억의 겹을 쌓아갈 거에요. 잊지 않고 있어요. 다시 노란리본을 가방에 달고, 우리 4월 13일 오후 5시 30분 서울시청 광장에서 만나요.   <세월호참사 10주기 일정>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 4.16기억문화제 일시: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장소: 서울시청 앞   <참고자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4·16세월호참사종합보고서 본권Ⅱ󰡕, 2022. 미류, <우리는 국가를 바꾸는 길 위에 서 있다-사참위 보고서와 분석자료집 읽기를 제안하며>, 《4.16연대》, 2023. 유가영,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 다른, 2024.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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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세월호 참사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방법 - 함께, 기억 OT 후기
0. 세월호 참사가 언제였더라..? 우리가 평소에 기억하고 다니는 날은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공휴일이나 기념일, 그리고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날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나 삼일절, 빼빼로데이 같은 날이나 부모님의 생신, 내 생일, 애인 혹은 배우자와의 중요한 기념일들은 때론 일부러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각자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기억에 잘 남는다. 사실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충격이 컸던 사건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참사가 발생한 2014년에는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된 상태였고, 단원고와 연결점이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부모인 상태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캠페인즈의 [함께, 기억]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는 세월호 참사가 4월에 발생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무슨 달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도 모르는 사람이 왜 [함께, 기억]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는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서 국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때는 ‘가만히 있으라’더니, 가만히 있어도 될 때는 ‘대피하라’는 재난 문자를 보내는 ‘문자 사고’와 할로윈을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백명이 넘게 길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는 ‘이태원 참사’는 모두 2023년인 작년에 발생했다. 10년 전과 1년 전이 나아진게 크게 없다는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그리고 무엇을 해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기억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함께, 기억]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게 됐다. 1. 세월호 참사를 함께 잘 기억하려면 3월 14일 목요일 저녁 7시30분, 노무현시민센터 1층에서 진행된 [함께, 기억]오리엔테이션은 우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됐다. 빠띠는 ‘열린 기술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플랫폼 협동조합’이라고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 빠띠는 (열린)기술이 필요하다고 하고, 플랫폼 형태를 띄고 있는가? 과학(디지털) 기술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긍정적 도움을 많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 기술은 언제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인터넷의 특성상 정보가 쉽고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에 가짜 뉴스가 판치고, 때로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보의 홍수에 파묻힌다. 또한 사람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익명성의 방패 뒤에 숨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바쁘다. 하지만 가짜뉴스만큼 좋은 글 역시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으며, 오프라인 공간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의견을 주고받고, 서명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뜻을 모을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년 역시 디지털 공간이기에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이 함께 기억할 수 있다. 빠띠에서 연속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함께OO’시리즈를 통해 주제별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함께’해나갈 수 있다. 참사와 관련해서는 각자 왜,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는지부터, 참사와 관련된 유가족들의 깊은 이야기도 공유할 수 있고,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글들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참사 10주기 전국시민행진’이나 ‘세월호참사 10주기 영화’등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컨텐츠들은 또 다른 디지털 공간인 SNS, 메신저, 언론 등을 타고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함께 잘 기억하기에 빠띠, 캠페인즈라는 디지털 공간이 적합한 이유들이다. 2. 세월호 참사 피해자는 내 친구, 내 자녀, 내가 가르치는 학생. 빠띠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 후, 본격적으로 [함께, 기억] 프로젝트의 구체적 참여 방법 안내와 참여자들의 자기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위해선, 세월호 참사 10주기와 관련한 글이라면, 정해진 양식에 따라 어떤 글이든 써도 상관이 없다. 소소하지만 원고료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여자들의 자기 소개 시간이 인상깊었는데, 우선 참여자들의 연령대가 상당히 다양했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생부터 세월호 때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던 사람, 나이가 더 많은 노인 분까지 넓은 연령대의 참가자분들이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러 오셨다. 이보다 더 인상깊었던 건 어떻게든 참가자분들이 세월호 참사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비슷한 나이대였던 참가자, 자녀가 있어 당시 피해자와 유가족에 이입이 더 잘 된다는 참가자, 주기적으로 안산에 가서 추모하고 오려고 하는 참가자, 현직 교사라서 학생들과 함께 참사를 기억한다는 참가자까지. 나이와 배경이 모두 다른 참가자들이 세월호 참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연결되어 있다. 유가족, 안산 사람, 고등학생이었던 사람, 고등학생이 될 사람 등.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참사의 정의를 찾아보면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라고 한다.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라는 뜻인데, 세월호 사건이 사회적 참사가 된 이유는 사회에 있는 모두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자기소개 시간에 느꼈다. 우리 혹은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었음을 알기에, 유가족과 피해 학생들의 슬픔과 한을 공감할 수 있기에, 세월호 참사가 비참하고 끔찍한 일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다. 3. 10년 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하기 – 최성용 청년연구자 강의 참가자들의 자기소개에 이어서, 최성용 청년연구자님의 ‘10년 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하기’라는 제목의 강의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단순히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고 하는 걸 넘어,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강의 내용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간단히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 세월호 참사를 소극적으로 단순히 기억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해야 연구자님의 강의의 핵심 주장을 한 줄로 압축하면 ‘세월호 참사를 적극적으로 기억하자’이다. 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적극적으로 기억하자’는 말이 쉽게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기억하기’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극적으로 기억하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소극적으로 기억하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면서 가장 많이 쓰인 문구 중 하나인 ‘기억하겠습니다’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겠지만, ‘소극적으로 기억하기’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소극적으로 기억하기는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참사를 망각시키는 정부 등의 압력에 저항하여 참사를 제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군사 정권 시절부터, 대구 참사,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강도는 시대나 참사마다 다르지만 국가가 참사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지속되어왔다. 세월호 참사에 집중해보면, 세월호 추모 공원이 제대로 지어지지 못하게 하거나, 최근들어선 총선 이후에 방영되는 세월호 10주기 다큐가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4월 방영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제작까지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압력에 대항해 참사를 잊지 않고, 참사를 제도화하겠다는 소극적 기억 역시 참사를 기억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적극적으로 기억하기’는 ‘소극적으로 기억하기’의 단순히 잊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기억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성용 청년연구자는 참사를 소극적으로만 기억할 경우, 기억이 제도화되게 되면서 경직되고 의미가 줄어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기억하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억의 제도화의 대표적인 예시로 박물관을 이야기해주셔서 더 와닿았는데, 중요한 역사를 박물관에 기념하고 전시하여 제도화하는 순간, 잊혀지지는 않더라도 뭔가 더 딱딱한 느낌이 들고 재미가 없다. 우리가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참사로부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기억의 제도화가 아니라 기억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기억의 사회화를 위해 대표적으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안전’과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다.  - 함께 만들어 가는 ‘안전’과 ‘세월호’의 의미.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사람들은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하였다. 하지만 그 ‘안전’의 범위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당시에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어른들은 결과적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해 대구 지하철 참사,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고들을 만들어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께서 ‘안전’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게 쉽지 않은 작업임을 이태원 참사의 예시를 통해 설명해주었다. 당시 경찰 인력을 마약수사에 많이 배치한 것도 일종의 ‘안전’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폴리스라인 등 거리 안전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안전’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또한, 최성용 청년연구자님은 ‘세월호’의 의미는 포괄적이고 유동적임을 설명해주셨다. 세월호 참사의 의미는 단순히 세월호 참사 순간, 피해 학생들에게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해 열리는 세월호 집회, 유가족들의 운동, 4월 16일에 맞춰 노란리본을 달고 기억하는 시민들까지 포함한다. 즉, 사회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의미는 더 넓고, 지속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월호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 나가고, 그 기억을 토대로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느냐에 따라 세월호 참사의 의미는 바뀔 수 있다. 이번 ‘함께, 기억’을 포함한 시민들의 노력이 세월호를 단순히 아팠던 참사를 넘어, 반성하고 성장하는 토대로 바꿀 수 있길 바란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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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록을 기록하다, 다큐 <그레이존>
2024년 3월 22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다큐 <그레이존>(주현숙 감독) 상영회가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10층에서 열렸다. ‘4.16재단’과 ‘사랑의 열매’의 지원을 받아 캠페인즈가 주관한 이 상영회에서는 "함께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모인 캠페이너들 및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란 무엇인가 세월호 다큐 <그레이존>은 흑백 사이 모호하게 연결된 기자들의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는 언론에게 화살이 몰렸던 사건이다. 상황이 어떠한지 언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현장의 팩트를 명확히 전달했어야 했던 언론이 우왕좌왕했던 것을 우린 기억한다. 세월호 침몰이란 속보로 심장을 철렁이게 했다가, 모두 구조되었다는 엉성한 안심을 주다가, 다시 침몰이라는 절망을 던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피해자 마음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위해 몰래 혹은 억지로라도 카메라를 무기처럼 들이밀었다. 결국 2차 가해자가 되어 버린 뒤, 그들이 만난 것은 유가족들로부터 오는 강력한 불신의 벽, 그리고 섣불리 정부 눈치를 봐 버린 자신의 무능, 이도 저도 할 수 없던 무기력이었다. 그들은 취재의 사명이 있었으나, 바다 너머를 볼 수 없었고, 해경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유가족 제보보다 정부의 ‘구조하고 있다’는 말을 믿었다. 의심할 수 없었던 자신에 실망하고, 아비규환의 현장에 절망했던 기자들. 자신을 기자라 말하기조차 어려웠던 순간. 메타적으로 보기 영화는 기자들의 참회록으로 보인다. 기자들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돌려, 자신을 카메라 앞에 두고 그날을 고통스럽게 떠올려 본다. 그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동시에 관객은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하게 된다. 기자들은 10년이 지난 이제야 당시 상황을 떨어져서 가늠해보고, 어디서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반추한다. 유가족들이 보고 온 현장(“구조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을 기자들이 서울 보도국에 명확히 전달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정부가 말한 ‘세월호 승객들을 구하는 중’이란 빈말을 전하면서, 진실과는 한참 어긋나 버렸다. 배 안에서 ‘당신들을 구하고 있으니 가만히 기다리라’는 방송과 ‘정부가 세월호 승객들을 구조하고 있으니, 가만히 기다리라’는 언론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럼에도 기자들은 세월호 참사를 제 3자의 눈으로 직접 본 유일한 목격자이다. 2차 가해자이자 2차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현장을, 자신들의 고백을 통해 가까스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세월호의 진실을 기자들의 입장에서 되묻는다. ‘참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024년의 우리는 10년 전 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나 자신은 유족도, 현장 기자도 아닌, 같은 나라의 국민이지만 달리 보면 행성처럼 동떨어진 일반 시민에 불과한데, 이 기억과 기록을 어떻게 끄집어내고 드러내야 하는가, 고. 감히 나의 펜 끝을 세월호 참사에 댈 수 있는가, 고. 하지만 그래야만 한다. 회색지대에 선 자들은 어쩌면 당시의 기자들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정 팩트인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도 팽목항의 어디쯤인가, 우리 역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보다 ‘왜’를 물어야 한다. 왜 비슷한 참사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가. 왜 진실은 아직도 정치적인 이유로 가려지거나 전달되지 못하는가. 나는 왜 기록하는가. 그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누구나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도, 유가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재(人災)로 인한 참사의 희생자는, 구해질 수도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담으려는 노력이다. 기억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보려는 것은 단지 10년 전이 아니라 지금이고 10년 후이고, 30년 후이다. <그레이존> 안에서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는 한 기자의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수십 번이고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세월호 선실에 앉아 있다. 죽은 이들 사이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을까.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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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 공감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며
10년 전, 그 날의 나는?   2014년 4월 군대를 전역하니 23살이었습니다. 8월에 학교를 복학해도 됐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부모부터 주위에서는 전부 1년 늦게 학교를 들어가는 게 아주 큰 일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휴학을 했습니다. 무작정 신문배달, 편의점, 택배,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음악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드럼과 작곡을 배우면서 행복했습니다. 첫 사회 생활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시절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4. 4. 16일 그날도 아침일찍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누우며 자려고 하는 순간 버스 TV에서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제 삶 살아가기도 바빴던 저에게는 세월호 참사의 사건이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났구나’정도였습니다. 이후에 TV와 언론 보도에 사망자와 유가족들의 모습과 진상규명을 외치는 모습이 계속 나와 그때 조금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아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하고 인식은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슬플지,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큰지는 애석하게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조차도 제 것,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시대가 그런 거 일수도 있지만, 세상이 점점 자기 일이 아니면 큰 관심이 없는 개인주의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때 조금이라도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 참사 피해자가 과연 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이 그때는 왜 들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노란 리본을 메든, 후원금을 전달하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30대가 되어서 어느 한 계기는 아니지만, 점점 주변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아픈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 성장해서 다행이고 나름 뿌듯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기를   세월호 참사 가족 중 한 딸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딸의 영정 사진을 보며 딸을 기억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많이 슬펐습니다. 부모에겐 자식이 세상의 전부 일텐데, 한 순간에 딸을 잃어버린 슬픔이 얼마나 클지 쉽게 가늠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치의 예고도 없이 떠나버린 딸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리울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공감되어 한편으로 많이 슬프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우리 삶에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나 정부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나 피해자들의 보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혐오와 갖은 욕설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전부였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그들을 위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일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보며 20,30대를 살아가는 저로서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떠나버린 아이들도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고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았을까요.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는 안전망과 피해자 보상, 진상규명에 대해 다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픔과 슬픔이 나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의 일로 생각하며 도와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공감과 연대로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여러 장점도 있지만, 너무 빠르게 성장한 부작용이 점점 우리 사회에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빈부격차, 혐오, 성차별, 저출산, 일자리 문제, 인간성 상실, 정신적 질환, 전쟁과 평화, 환경 문제 등등 여러 문제가 많이 나타나 고통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 되기 위해서는 정부나 국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위로하며 정부와 국가에 의견을 내고 호소해야 합니다. 일어난 모든 사건은 남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건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저항하며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연대와 공감의 정신이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10주년, 다시 한 번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떠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하루 빨리 유가족들의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 한 켠에 여유와 행복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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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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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인연은 이어져 돌아온다- hyun "잠수부 자격증 있는 장병. 지휘통제실로.“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온 방송을 잊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육군 훈련소 가입소 기간 사흘 째 되던 날인 오전 6시. “지휘통제실에서 전파합니다. 잠수 자격증이 있는 장병이 있으면 지휘통제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육군에서 숱한 자격증들 중에 왜 하필 잠수부 자격증을 찾는걸까. 그 의문은 훈련소 연대로 넘어갈 때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맞이한 첫 주말 종교행사 날이었다.  연무대 교회는 1주차 훈련병부터 5주차 훈련병 모두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1주차에 막 접어든 나는 4~5주차 전부터 온 선임(?) 훈련병들과 함께 있었다.  선임 훈련병에게 있어 우린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었다. ‘우리는 갈게! 너희들 각개!((훈련소 수료 후 자대로 가니까 너네들은 남아서 각개 전투(훈련소 5주차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훈련)나 해라는 의미)’ 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연무대 교회의 꽃 ‘실로암’ 찬양에 맞춰 이들은 ‘각개전투!’ 외치며 자극하기 바빴다. 이 곳만의 환영방식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게 있던 찰나 군종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 훈련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웃고 떠드는거야!”  무슨 시기이기에 이토록 그는 분개한걸까. 요 며칠 동안 꼬리표처럼 붙은 잠수부 자격증의 정체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그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산에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웃을 때가 아니다.“  세상과 단절 된 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스크린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여 400여 명이 실종되었고, 잠수부들은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다. 기자는 눈시울 붉히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고 택시와 버스기사들은 유가족들을 진도까지 실어나르는 장면이 스쳤다. 입대한 지 불과 이틀 사이에 배에 탄 470여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사는 “제발 0.0001% 라도 기적이 있다면 이들이 전원 구조되길 바랍니다.” 라며 애통한 심경으로 기도와 함께  “부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 는 말로 예배를 마쳤다.  안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은 애도의 분위기였다. 자대배치받고 간 교회에서도 기도제목 말미가 세월호 무사구조로 맺곤 했다. 하지만 사회와 군대 사이 해소할 수 없는 단절감이 존재했다. 군대는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유로 애도가 들어설 틈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도 꺼낼 수도 없었다. 바쁜 일과도 한몫했다. 선•후임 심지어 나조차 당장 주어진 일상과 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월호는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빚은 참사" 그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날이면 혼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답답함만 커졌던 것 같다. ‘배가 왜 침몰했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나?’  원망의 마음도 따라서 커졌다. 파편처럼 끊긴 기억은 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선명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2015) 중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t. 객실 증설을 위해 개조하여 선박의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윤에 눈 멀어 생명을 버린기업과 비상사태에 부재한 국가가 빚은 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침몰 사실에 충격만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물밀듯 밀려오니 또 다시 세월호 생각은 진전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자대에 정착한 지 1년이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후임이 들어왔다. 그의 고향은 안산.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던 그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으나, 고향에서 전해진 슬픔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게만 느껴진 안산이 가까이 스민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 안됐나? 안산 출신 후임과 대학 동기의 죽음을 통해 슬픔은 외면할 수 없어"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의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인양해야할 진실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러는 이제 그만하라며 날선 비난과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죽음을 결코 외면해야할까. 한 사람의 죽음은 가능성이 소멸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그와 관계된 세계도 줄줄이 무너지는 비극이다. 그 고통이 국가의 외면으로, 이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는 타자화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을까. 나와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체감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2월 토요일 아침. 대학교 동기의 비보를 접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여름방학 중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창호 작업 중 6층 높이에서 추락사한(이 또한 안전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채 빚어진 참사였다) 대학교 동기의 소식을 그와 인연도, 연고도 없던 지인에게서 접할 줄은 몰랐다. 슬픔은 결코 나와 먼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죽음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인연의 고리는 어떻게든 닿아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기의 죽음을 접한 이후 변화가 필요했다. 살아가면서 인연은 어떻게 맞닿을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내가 만난 누군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칠 인연이 될 지도 모르니까.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고 이들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기에.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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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이들에게
돌무덤이 있는 풍경 나의 풍경에는 몇 개의 돌무덤이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돌무덤, 빵 공장 노동자의 돌무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이다. 거대한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로 지어진 무덤들은 문득 기억처럼 그곳에 있다. 익숙한 이 기억에 가끔 가까이 다가가  매만지고 바라보며 현재 내가 서있는 풍경을 돌아본다.  돌아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구태여 선언할 필요도 없이 세월호 참사는 이미 일상의 작은 조각이다. 나를 형성하는 요소이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돌무덤이 지어지던 역사 속, 나는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생이자 목격자였다. 세월호 참사 목도의 경험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정치화하지 말라’는 정치인들의 말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청년들이 놀다가, 일하다가 참사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이토록 도처에 있던가. 참사가 유난히 각인되는 이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예방을 강조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참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교통사고’에 비유를 들면서. 그러나 이 죽음에는 ‘안전’의 개념을 허술하게 다룬 구조적 배경이 깔려있고, 죽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안전을 ‘구조’ 속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 어떤 참사도 책임자들에게 처벌과 사죄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구조 속 최고 책임주체인  정치세력은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10년째 말이다.  정치인들의 방어기제에 무색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6일 전인 4월 10일, 22대 국회 총선이 있다. KBS는 4월 18일에 방영 예정이었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총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방영할 수 없다”라고 제작진에 통보했다. 참사의 최고 책임자인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하면 참사를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소거하고,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정치화하지 말라’는 단언이다. 참사 책임자에 대한 비판적 발언에 앞서 ‘내가 사회적 비극을 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가’하는 검열하도록 만든다.  ‘정치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맥락에서 ‘정치화’는 ‘단순 사고’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을 특정 정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치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단순 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이 ‘사고’가 사회적 참사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풍경에는 돌무덤이 없다. 혹은 지워버리거나 보지 않으려 회피하는 것이다. 회피와 부인은 ‘권력’이다.  회피하는 권력은 응당 두려움에 떨기를 그러나 돌무덤들이 있는 풍경 속의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무덤, 희생자, 유가족과 동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생존 해내기’다. 살아내는 것은 정치 그 자체다.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내는데, 어찌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사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 요구인 진상규명과 후속 조치로서의 책임자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정치며, 즉 살아내는 방식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3년 6개월가량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조사기간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조사에 있어서 비협조와 방해 요인이 많아서인지 석연치 않은 결론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세월호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참사를 기억하는 마음은 굳은 돌이 되어 무덤에 쌓인다. 10년이 부족하다면, 20년 30년이라도 얼마고 돌을 쌓으리라. 돌무덤 풍경 속 나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서 이야기할 것이다.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이여, 돌무덤을 쌓는 우리를 응당 두려워하라. 또한 나의 풍경을 공유하는 이들아, 우리 부디 함께 생존해 내자.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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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10년 전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한 사회인가요?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그 사이 세월호는 흐릿해졌다. 교과서로 배운 사람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이 흐려지고, 모른다고 슬퍼할 건 아니다. 나무랄 일도 아니다. 기억하고 나무라는 사람도 세상의 모든 참사를 기억하고 아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나 역시도 내가 어릴 적에 발생한 참사는 잘 모른다. 성수 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모두 교과서로 배웠지만, 그걸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교과서에 담겼다고 사회가 그걸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두 번의 붕괴는 건설사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고는 2022년 광주에서 발생했다. HDC 산업 개발이 만든 아파트가 건설 도중 부서진 것이다. 건설사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만약, 성수 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방하고, 내재화했다면 광주의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교과서에 기록해야 하는 참사다. 그 참사를 계속해서 후대에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어디서 알려줘야 할까, 뭐라고 알려줘야 할까.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 세대의 무능함을 답습하지 않게 하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성현(가명)은 세월호 참사 당시 8살이었다. 올해 18살이 됐다. 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같은 나이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성현을 만나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성현은 인터뷰 도중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제가 살아갈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 Q. 인터뷰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하다 해줄 수 있느냐고 하셔서 참여했다. (웃음).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대화하고 싶었다. 부모님 말고, 학교 선생님 말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게 다다. Q. 인터뷰 주제가 편안한 주제는 아니다. 안다. 세월호 아닌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300명이 죽은 참사가 편안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 있던 가장 큰 참사 중 하나가 아닌가. Q. 세월호를 묻기 전에, 어떤 참사들을 알고 있나 이태원 참사가 내게 가장 가깝고, 알고 있는 참사다. 가장 최근이기도 하고, 유튜브와 SNS에 참사 현장이 많이 공유됐었다. 직접 이태원에서 본 건 아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그 비극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 잔상이 떠다니기도 했다. 참사를 직접 겪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이 안 된다. Q. 사실 세월호 참사 자체를 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안다기보단 배웠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참사를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2014년에 8살, 지금은 18살이다. 8살 때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나 발달한 게 많으니까, 알고리즘에 걸리면 계속 나와서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Q.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내에 안전교육이 강화된 것으로 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강화된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그게 원래 것이다. 세월호 참사 전 사람들이라야 변화를 알겠지만, 우리는 그게 원본이었다. 그래서 말하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를 떠올려 보면 안전교육을 한 것 같다. 비디오 시청이나 야외 교육 등을. 그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내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전학을 많이 다녀서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다. Q. 학교 내 안전 의식은 많이 늘어났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그런 의식이 증가했었다.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이 과연 안전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가 묻고 싶다. 내가 알기엔 세월호 학생들은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정말 가만히 있었던 걸로 안다. 말을 너무 잘 들었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죽을 상황에 가둬둔 건 어른들 아닌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던 학생들의 문을 두드린 건, 어른들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정확히 모르지만, 그랬을 것 같다. 진짜 사람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몇 년이 지난 뒤였을 것이고. 이게 과연 학생들이 안전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발생한 건가? 오히려 어른들이 안전교육을 안 받아서 생긴 사고 아닌가 묻고  싶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건 어른들 아닌가. Q. 세월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많이 물어보셨다. 이태원 참사 이후 더욱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도 말씀을 안 하셨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보고 함께 돌아온 후, 부모님께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알고 보니 두 분다 세월호 관련 봉사활동도 하셨다고 그랬다. 그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부모님은 세월호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 뉴스에서 하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예를 들어 어디서 발생했다, 언제 발생했다, 몇 명이 사망했다 등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때 본인들이 느낀 게 무엇인지를 많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걸 느꼈어. 아빠는 이런 게 비참했고, 이런 점에 분노했었어. 그래서 이런 걸 했어.” 라고. 그 끝에 항상 내 생각을 물어보셨다. “부모의 감정과 생각을 알 필요도 없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Q. 부모님께서 생각 자체를 강조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께서 강조하셨던 게 있었다. 세월호 학생들이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과연 내 자식에게 말 잘 들으라고 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고 부모인가를 대뇌였다고 하셨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말 들어야지 라고 말했을 때, 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 옳은 말인지 생각하고 말했었나 돌아봤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을 학생들이 얼마나 신뢰했을지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어른이 “부모 말 잘 들어야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학생들을 배 안에 가둬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셨다. 또 그 안에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도리어 나눠주며,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데 헌신한 선생님들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무능한 어른의 비겁함 때문에 구할 수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떠났다고 하셨다. 세상엔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능인지 비겁함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설령 부모의 생각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하고, 부모든 선생이든 그 누구든 간에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 때문에,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다. Q. 부모님 말씀에 동의하는지 세상 모든 어른을 만나본 게 아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부모님, 친척들이 전부다. 그래서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세월호 당시 어른들이 무능하고 비겁했다는 건 알겠다. 나도 곧 어른이다. 몇 년 지나면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거다. 그때 나는 당시의 어른들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했으면 좋겠다. Q. 세월호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학생들이 있었고,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학생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건 정말 어른들이 무능한 거로 생각한다. 묻고 싶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 내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 Q.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온다. 어른들은 기억하자고 한다. 학생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억하자는 말이 뭘 기억하자는 건가 싶다. 그냥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지.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싶었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다. 제삿날에 제사상에 절은 하지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다. 그런 제사가 내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부모님한테만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런 말을 하니까 부모님도 “네 말이 맞다.”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어른들의 구호나 외침이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근데 뭘? 이라고 느낀다. 물론 이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억을 알기엔, 내가 그 참사의 슬픔과 분위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 제사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 부모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돌아가셨을 때 분명 슬펐겠지만, 아무 기억이 없는 내게는 사실 와 닿지 않는다.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서 부모님이 계신다 정도지. 그 외에는 사실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의 문제다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되는 현상 같다. Q. 진로는 정했는지 고민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부가 너무 싫다. (웃음) 공부 안 해도 원하는 걸 할 수는 없는 건가 싶다. 왜 모든 걸 공부로만 정하는지 모르겠다. — 인터뷰가 끝나고 성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성현은 족발이라고 말했다. 족발이랑 매운 족발,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하니, 성현은 동생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했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성현의 동생이 왔다. 셋이 함께 근처 족발집에 가서 족발을 먹었다. 후식으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구호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모른다. 참사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유족들의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 내게 성수 대교를 기억하자,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뭘 기억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보다는 성현의 부모님이 그랬듯,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해야 하는 것 같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을 분명히 알려주되, 거기서 끝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억하자는 말을 잠시 떠올려봤다. 그 말을 듣고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참사 유족들의 감정인지, 참사 자체인지, 참사 원인인지, 참사 때 느낀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한 다짐인지, 그 생각들로 내린 결론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성현의 생각에 세월호 참사는 “무능한 어른들의 비겁함.”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입을 막는 자(者)들이 있는 게 떠올랐다. 성현의 말이 계속 곱씹어진다. “세상에 아직도 비겁하고 무능한 어른들이 많은가요? 제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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