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갈등, 투쟁의 역사
피라미드 같은 고대의 거대 건축물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대 도시나 유물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외계인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고대인을,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힘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지만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걸 보면서 그런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음모론에는 유럽인들이 세운 게 아닌데 대단해 보이면 그것을 외계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근대 이후 세계의 기본 마인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떤 이들은 1945년 이후의 분쟁은 국가와 국가의 분쟁 보다는 비-국가적 분쟁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후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기만적인 말이다. 1, 2차 대전의 당사자 강대국들이 자기네 땅에서 안 싸웠다고 이 세상을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강대국들 자신이라는 점을 쏙 빼놓고 말한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책임감도 없고 반성도 없는 문제가 많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평화였는가? 베트남전쟁은 평화였는가? 자기들이 만들지 않았는데 좋아 보이는 것은 죄다 외계인이 세운 것이고 자기들이 한 나쁜 일은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태도.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이 오랜 시간 가져왔던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제 분쟁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은 자원이 많거나 전략적 요충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원이 많아서 어리석고 악한 독재정권이 이를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거나(이른바 자원의 저주),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서 분쟁은 정말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들 말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우리는 독도의 자원 때문에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독도에 별 자원이 없으면 우리는 독도를 일본인들에게 그냥 넘겨줄 수 있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순전히 지정학적인 이유로 알박기를 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슨 지정학적인 이유로 죽어가면서도 그 땅을 나가지 않는 것일까?
가끔은 우리 세계와 우리 지구가 사실은 ‘세계들’, ‘지구들’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엄연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지구는 당연히 단 하나지만, 그 지구를 바라보고 그것을 각자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만들어낸 세계/지구는 수십억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만들어진 세계/지구의 일정 부분, 특히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개념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줄 세우기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그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길어야 백년인 우리네 인생에서 그렇게 남이 만들어둔 안경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앎을 얻는 과정을 배움이라고 표현한다. 배움은 나의 앎이 어떤 위치에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의 앎이 수많은 인과관계 중 일부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사회, 세계, 우주의 일부에 불과하며 나의 앎, 타인의 앎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며,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구조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끝없이 돌아보며 고민해야 한다. 그게 바로 공부다. 우리의 앎에 그런 조건, 인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작게는 잘못된 앎을 가지는 것이고 태도가 오만한 것이지만 크게는 윤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국제 분쟁들에 대해서 대강의 원인과 결과를 정리해두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분쟁/학살의 원인과 형태에 의한 분류
#영토 영토의 통치권, 개발권, 점유 등을 두고 싸우는 경우
#민족 민족, 부족 단위의 갈등, 학살
#종교 종교 혹은 종교관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학살
#이념 이념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갈등, 학살
#자원 석유, 천연가스, 광물, 토지, 수자원 등을 두고 벌어진 갈등, 학살
#식민지와분할통치 갈등, 학살의 원인이 강대국의 식민통치, 분할통치 등과 관련이 있는 경우
#역사적갈등 1900년 이전, 즉 전근대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갈등
#전쟁범죄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집단 학살, 약탈, 방화, 강간 등
#재난 갈등, 학살의 원인 중에 자연재해가 있는 경우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사막화 등의 기후변화로 인해 생겨난 갈등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러시아, 쿠릴열도) #영토 #역사적갈등 러시아와 일본이 조약을 맺어 아이누족이 살던 땅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일본은 쿠릴 열도(일본 이름 치시마)를, 러시아가 사할린 전역을 가지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1905년에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이 사할린을 수복하고 쿠릴 열도까지 점령했다. 당시 소련의 수장 스탈린은 홋카이도 북부까지 러시아 땅으로 삼고 싶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쿠릴 열도를 가지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 벌어진 도쿄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조약을 새로 맺게 되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중국 등 실제로 일본에게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독도 문제도 이와 걸려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이 다시 국세를 회복하자 일본은 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 쿠나시르 섬, 이투루프 섬이 쿠릴열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에게 다시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쿠릴열도 분쟁, 일본에서 말하는 북방영토 분쟁이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 네 개 섬을 모두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 공산당 등 좌익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만이 유효하고 그 이후의 조약은 모두 문제가 있는, 무효에 가까운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쿠릴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홋카이도가 비교적 비-자민당 세력이 강세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아이누족과 일본인, 러시아인들이 널리 걸쳐살고 있고,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살고 있다. 이 문제까지 겹치면서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1894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영토 #민족 #종교 1894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을 원하던 여러 민족과 종교를 탄압한 사건들을 총칭해 부르는 말이다. 아르메니아 인이 기독교인으로 가장 많은 학살을 당했지만 그 이외에 그리스정교회나 가톨릭, 튀르크 족 이외의 다른 이슬람교 부족들도 대규모 학살을 당해 근대 최초의 제노사이드라 불리기도 한다.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튀르키예와 다른 이슬람국가, 동유럽 국가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아직도 가해의 주체가 누구인가(국가인가 민간단체인가 둘 다인가), 피해의 규모가 얼마인가 등을 두고 다투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과 튀르키예 사이에 우호 분위기가 일자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슬람 국가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일본-중국/대만, 센카쿠열도혹은조어도) #영토 #자원 센카쿠 열도, 댜오위다오(조어도)는 무인도다.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진 지도에 중국 땅으로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의 중국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류큐 왕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결국 오키나와 현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894년~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패배했다. 중국의 직예총독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가 이토 히로부미와 조약을 체결하며 대만과 요동의 통치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 조어도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바로 직전인 1895년 1월, 후쿠오카 출신의 오키나와 상인 코가 타쯔시로(古賀辰四郞)가 조어도가 주인 없는 섬임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문제는 1960년대 이후 이 땅에 상당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이 땅이 고대 중국 지도에도 표시된 중국 땅인데 청일전쟁 중에 일본이 불법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애초부터 이 땅이 류큐 열도의 일부인 암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04년 독도(한국-일본)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은근슬쩍 편입한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원래 무인도였으니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 아니냐는 주장(무주지 선점론),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1904년~1098년 독일의 나미비아 학살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나미비아에는 원래 코이코이족, 반투족, 산족, 헤레로족, 나마족 등이 살고 있었는데 1884년에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인들은 이곳에 광산을 건설하고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가축, 토지를 빼앗았다. 독일의 폭력으로 삶의 기반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이 지역 원주민들은 결국 독일인들의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남성들은 폭행, 여성들은 성폭행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헤레로족의 사무엘 마하레로가 사람들을 이끌고 독일인들을 공격해 폭력/성폭력의 가해자 140여 명을 처형하고 그 이외의 독일 남성과 여성, 어린이 등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군대를 보내 나미지아 원주민들을 토벌하게 했다. 독일군은 무차별적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는데 1904년 8만 5천 명 가량이던 헤레로족이 1908년에는 만 오천 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무기를 이용한 살해는 물론 사막이나 바다에서 아사를 시키거나 맹수에게 사람을 산 채로 던져주기, 생체실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지역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나미비아에서는 독일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 배상을 요구했지만 독일은 이 일이 히틀러 이전의 일이므로 사과나 배상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정치인 개개인이 사과 발언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정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아일랜드-영국, 북아일랜드)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식민지와 분할통치 #역사적 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랜시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를 둘로 나누어 개신교 신자가 많이 사는 북아일랜드를 영국 땅으로 남기고 가톨릭 신자가 많이 사는 나머지 땅을 독립시키게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문제를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과 비식민, 착취와 피착취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종교 갈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과 종교, 역사 문제, 식민지 문제에 더해 왕정을 지지하는 사람과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도 존재하고 아일랜드에 주재하는 영국인들이 대체로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한편 오랜 기간 착취에 시달렸던 아일랜드인들은 진보, 개혁, 더 나아가서는 맑시즘(IRA)을 지지한다고 하는 이념 문제도 존재한다. 1972년에는 영국에서 비폭력 아일랜드인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실시해 14명을 죽인 일이 있었고(피의 일요일) 1982년에는 IRA 활동혐의로 체포된 정치범들이 자신들을 일반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해달라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아일랜드 단식투쟁). 과거 식민시절부터 현대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해 영국 정부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영국의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재난 #민족 #이념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관동지역 전역에 진도 6의 강진이 발생해 대규모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진 이후 사람들이 혼란한 와중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들을 죽이고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정부는 이를 방관하며 조장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소문은 언론을 타고 계속 확대 재생산 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거나 지진의 원인이 조선인이라는 말까지 돌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3~4주 동안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를 관동대학살이라 한다. 같은 해 12월 5일 <독립신문>에서는 학살에 의한 사망자 수를 6,661명이라고 했고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는 2,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매년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고 1945년 이후로는 도쿄도지사도 이곳에 참석하거나 사과 문구를 보냈지만 2017년부터는 코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에 의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함락 #영토 #민족 #전쟁범죄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고 군대의 질과 양 모두 수준이 낮다고 판단해 중국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많은 시간과 자원, 인명피해를 발생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내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게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난징을 지키겠다는 열의를 보였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난징 수비 사령관 탕성즈(唐生智당생지, 1889~1970)는 결국 12월 12일 오후 다섯 시에 10만 명의 군인들과 25만 인민들을 그대로 두고 핵심 참모들만 대동한 채 난징을 빠져나갔다. 12월 13일 오전 네 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정부청사를 점령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난징대학살이다. 일본인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칼이나 몽둥이로 사람을 죽였고 학살 대상은 군인에서 민간인, 성인 남성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에서의 약탈과 방화를 교범에도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교육 방식에 더해 일본군 내에 만연해있던 가혹한 군기 문화,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강한 적개심 등이 학살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6주 동안 벌어진 대학살에 대해 일본에서는 지금도 중국이 학살자 수를 부풀린다거나 학살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1990년대에 이후 사회가 우경화되면서 직접적으로 이를 조롱하는 일본인들까지 존재한다.
1941년~1945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전쟁범죄 1932년, 나치당은 총선을 통해 독일의 제1 정당이 되었고, 1933년 1월에는 히틀러가 정권을 받아 독일을 통치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희생양을 불태우며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뜻한다. 나치독일에서는 이를 엔틀뢰중(Endlösung; 최종해결책)이라 불렀다. 가장 많이 수용되고 사망한 것은 역시 유대인이다. 유대인 이외에도 집시, 소련의 군인과 민간인, 정치범, 여호와의 증인 신도, 남성 동성애자, 장애인, 폴란드인 등이 강제수용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1944년 5월 타타르 족 이주 정책 실시 #민족 #영토 타타르 족은 몽골고원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걸쳐 살던 유목민이고 이 중에서 크림 반도에 사는 이들을 크림 타타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이들은 크림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세속주의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 잠시 독립을 했지만 곧 볼셰비키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들을 3일만에 전부 화물칸에 싣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버렸다. 이 과정에서만 8천 명이 사망했고 그 전후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최소 3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크림 타타르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주로 살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 가나안, 시나이반도) #민족 #종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열강들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나안 영토, 시나이 반도에 대한 분쟁은 물론 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 문제, 골란 고원의 실효지배를 둘러싼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사이의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정부 수립,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 #이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전쟁범죄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國府遷臺) #영토 #이념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졔스가 이끌던 국민당이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사건.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대만(중화민국)이 성립하였고 지금까지 두 나라의 문제를 양안(兩岸) 문제라 부른다.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17조 협의 #영토 #이념 #민족 #자원 #종교 티베트는 고대부터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며 살았다. 고대에는 선비족이 이곳에 살았고 기원후 633년이 되어 지금의 티베트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티베트 왕국을 송첸캄포가 건국했다. 당시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를 상대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던 티베트 왕국은 1750년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청나라의 보호령이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열강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향해 진격하자 티베트와 중국은 17개 협의를 맺어 티베트는 자신들이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중국은 티베트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똥의 정책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공산당 내에서도 마오의 정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자 마오는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선동을 시작해 과거의 구습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자는 명목을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을 벌이게 되었다.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한 환경파괴는 물론, 종교 탄압을 위해 사원 파괴, 종교인 학살, 공개된 장소에서의 강제 성관계 지시 등을 벌였다. 이 과정을 다룬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1997)>이다. 티베트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와 정치적 탄압은 지금도 진행중이며 핵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으로 생겨난 방사능 물질을 이 지역에 버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만 정부도 티베트는 중국 영토이며 티베트인은 중국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전쟁 발발 #민족 #식민지 #역사적갈등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30년대의 일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 1945년 5월 8일에 나치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 인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벌어진 프랑스인들의 알제리인 학살을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알제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학살과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던 중 호치민이 중심이 된 베트남 독립은 알제리인들에게 매우 큰 자극이 되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하고 1962년 3월 19일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에서는 물론 프랑스 본토의 알제리인에 대해서도 학살과 강제수용을 자행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도 프랑스인과 온건파 알제리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59년 르완다 내전 시작 #민족 #식민지 #전쟁범죄 1959년 르완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에는 후투족과 투치족 등이 자유롭게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문제는 벨기에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벌어졌다. 벨기에 사람들은 키와 콧대의 길이 등을 이유로 투치족을 더 우월한 부족이라고 평가하고 이들에게 권력을 주며 이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벨기에는 소수의 투치족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다수의 후투족들의 권력을 빼앗고 후투족 족장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재편했다. 부룬디에서도 이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지만 두 민족의 사람수나 재산에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르완다는 달랐다. 권력은 투치족이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수는 후투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권력을 쥔 투치족과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계속되는 내전 끝에 1994년 4월 7일, 르완다 학살이 벌어졌다. 후투족 민병대가 약 3개월 동안 투치족을 최소 50만 명 이상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제의 양극화 속에서 대체로 직업이 없었던 후투족 젊은이들이 이곳에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가 최소 천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다.
1960년 11월 13일 과테말라 내전 발발 #민족 #정치 #자원 #식민지 과테말라는 1954년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 군부가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크리오요라 불리는 유럽 이주민들의 후손과 친-군부 인사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대다수의 과테말라 국민들은 소작농이나 빈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11월 13일 젊은 좌익 장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금방 진압되고 실패했지만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좌익 단체들이 결성되어 과테말라 정부와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1996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는데 이 사이에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 이스라엘, 대만 등의 지원을 받아 좌파 지식인, 노동조합에 가입된 사람, 종교인, 언론인, 학생, 기타 반정부적으로 보이는 사람 약 20만 명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62년 3월 2일 버마 군사반란과 네윈의 집권 #민족 #종교 #식민지 버마(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지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그 지역 부족에게 토지의 경영을 맡겼는데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바로 로힝야족이었다. 버마족을 비롯해 미얀마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로힝야족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또 대체로 불교를 믿는 다른 민족과 달리 로힝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점도 있다. 영국이 미얀마를 떠나고, 네윈이 무혈 쿠데타로 집권을 하면서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던 로힝야족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네윈의 집권 이후 버마족의 힘이 강대해지자 다른 민족들은 버마족에 대한 경계를 하는 편인데 로힝야족의 탄압에 대해서만은 동일하게 같은 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2012년 로힝야족 남성이 라카인족 여성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추방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1962년 10월 20일 중인전쟁 발발 #영토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역사적갈등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은 사실상 티베트 땅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가 히말라야 주변에 있던 작은 부족국가들을 정복하고 달라이라마가 중국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티베트의 종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티베트 근처에서 군사행동을 벌이려 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만만해 하던 인도는 설마 중국이 전쟁을 일으키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중국군은 오랜기간 국민당, 일본과 싸웠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1962년 10월 20일 중국이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은 뛰어난 화력을 갖춘 인도군을 재래식 보병으로 정밀타격하고 보급로를 끊으며 계속 승리를 거뒀다. 중국은 인도 국경까지 밀고 들어갔고 세계 열강들은 한국전쟁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냐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계속 밀리던 인도는 결국 비동맹 원칙을 깨고 미국에게 중국에 폭격을 가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도 이를 승인했다. 결국 중국은 11월 21일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제3세계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인도는 이 일로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인도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인정하고, 중국도 인도가 네팔과 부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는 이 이후에도 티베트, 히말라야 지역을 두고 계속 국경 분쟁을 벌이고 있다. 1967년에는 시킴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이 군사행동을 벌였다가 인도에게 패했고 2017년에는 부탄을 두고 중국과 인도가 서로 심리전을 벌이다가 투석전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고 2020년에는 카슈미르에서 주먹과 돌, 몽둥이 등을 이용해 백병전을 벌였고 2022년에도 인도 타왕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들의 싸움에 대해 부탄과 네팔, 티베트 사람들의 입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66년 5월 26일 가이아나 독립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자원 1966년 영국령 기이나라 불리던 지역이 독립하면서 과야나에세키바(Guayana Esequiba)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과거 베네수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과 영국은 과야나에세키바를 두고 싸움을 거듭하며 뺏고 빼앗기기를 거듭했는데 가이아나가 독립하면서 이 땅을 두고 가이아나와 베네수엘라 사이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이아나가 이 영토를 개발하려고 하면 베네수엘라에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시행해 방해를 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진행되었다. 과야나에세키바는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도 하며 가이아나 영토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집권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캄보디아의 극좌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했다. 과격한 방식으로 집권을 하고도 국가의 발전이나 민생의 안정을 이루지 못했고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괴상한 정책들을 쏟아내자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갔다. 이에 크메르루주와 지도자 폴 포트는 캄보디아 민족주의와 자신만들만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추방해 강제노동을 시켰고, 스포츠 선수, 연예인, 학자, 학생, 공무원, 의료인, 종교인, 외국인 등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필드다. 심지어는 안경을 쓰거나 손이 부드러운 사람, 배가 나온 사람,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책을 똑바로 드는 사람 등을 지식분자로 몰아 그 가족들까지 고문하고 살해했다. 또 10세 미만의 아동들을 부모와 떼어놓고 고문기술, 사격 등을 가르쳐 사람들을 죽이게 했고, 지방 간부들은 모든 여성을 성폭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대학살극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하면서 끝이 나게 되었지만,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크메르루주 정권을 지원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부터 2022년까지 크메르루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주동자인 폴 포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매년 5월 20일은 킬링필드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 사태 #영토 #민족 #자원 #전쟁범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 강제 병합했다. 이 당시 동티모르인 18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를 취재하던 호주인 기자와 뉴질랜드 기자들도 인도네시아군인들에게 처형당했다. 이 이후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은 이 지역에서 최소 10만 명 이상의 동티모르인을 죽였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학살 계획을 사전에 입수한 김대중 한국 대통령이 이를 APEC에 긴급 안건으로 제기해 인도네시아에 대한 선진국들의 경제적 원조를 하면서 동티모르의 학살을 막고 독립을 지원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동티모르는 2002년에 완전히 독립했다.
1976년 2월 27일 서사하라 독립 선언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민족 서사하라 지역은 고대부터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여러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점령했는데 잠시 모로코 왕국이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가 스페인이 다시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때 스페인령 사하라라고 했다. 서사하라 원주민들은 계속 독립을 요구했고, 모코로에서는 스페인이 자신들에게 이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UN에 스페인을 제소하기까지 했다. 1974년, 스페인이 민주화 운동으로 어지러워지면서 식민지들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이 틈을 타 모로코가 이 지역을 군사점령했다. 이에 앞서 1973년 서사하라인들이 중심이 되어 폴리사리오 전선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진행했는데 모로코가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자 1976년 폴리사리오 전선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지금도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은 독립운동을 진행중이다.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전쟁 발발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근처, 남극 바로 위에 있는 영국령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누가 여기에 살았는지, 정확히 언제 누가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810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 땅은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영토가 되는가 했는데 영국이 실효지배를 했고 1833년에는 군대를 보내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추방하면서 완전한 영국 땅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악화되고 민심이 악화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군대를 일으켜 포클랜드 제도를 공격했다. 당시 포클랜드에는 소수의 영국군이 주둔중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이 섬을 점령하고 포로로 잡은 영국군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영국의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은 즉시 군대에 명령을 내려 포클랜드 탈환을 지시했다. 영국이 승리한 후,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자국 국민들에게 아르헨티나가 승리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패전 소식이 아르헨티나 내부로 빠르게 전해졌다. 결국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는 악화되어 거의 2년 동안 네 명의 대통령이 바뀔 정도로 불안정해졌고, 인기가 떨어지고 있던 대처는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일조하게 되었다.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 독립 선언 #영토 #민족 #종교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키프로스는 8할 정도가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 인이었다. 이를 이유로 1974년,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통합을 추진하는 그리스인 중심을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군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 인들이 모여 사는 키프로스 섬 북부를 ‘보호’라는 명목으로 점령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키프로스 전체에서 튀르키예 인들은 키프로스 섬 북부로, 그리스 인들은 그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키프로스 섬 북부 사람들이 키프로스 연방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UN에서 중재를 시작했지만 남 키프로스 사람들은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북 키프로스 사람들은 공화국의 승인을 요구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가 완전히 독립을 선언하면서 중재는 결렬되었다. 지금까지도 연방제 방식의 통합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남북 각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1990년 11월 2일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발발 #영토 #이념 소련 몰도바 공화국의 일부였던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독립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중재를 통해 1992년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화해를 했지만 지금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원래 같은 지역이었던 두 나라는 소련의 성립 이후 친소련 성향의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루마니아 왕국에 속해 있었던 몰도바로 나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991년 11월 27일 소말리아 내전 발발 #역사적갈등 #영토 #민족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원래 소말리아 땅은 에티오피아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지금의 소말릴란드 땅에는 아달 술탄국이 있었다. 1880년대 들어서 소말릴란드 해안가는 영국이 점령하고 내륙은 에티오피아가 점령하게 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 시기 이 지역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라 불렀다. 1945년 이탈리아가 패전을 하고 무솔리니 부부와 그 일당들의 시체가 거리에 매달릴 무렵에는 영국이 잠시 이 지역을 지배했다가 1950년부터 다시 이탈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소말리아 지역이 독립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직후 소말리아에는 대-소말리아 주의가 퍼지면서 에티오피아와 국경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1969년 시아드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셰르마르케 대통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시아드 바레는 마레한 족 출신 아버지와 오가딘 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 발전과 영토확장을 국시로 삼고 국내의 불만을 억누르며 독재를 하던 시아드 바레는 소말리아가 군사적 요충지임을 이용해 소련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외교를 행했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티오피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에티오피아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아 소말리아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프리카를 휩쓴 금융위기와 시아드 바레의 자기 부족 중심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결국 소말리아는 시아드 바레와 반 시아드 바레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1987년에는 작은 규모의 내전에 불과했지만 1991년, 반 시아드 바레 파인 통일 소말리아 회의(USC)가 모가디슈를 점령하면서 바레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가 조인성, 김윤석 등이 출연한 <모가디슈(2021)>이고 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소말리아 내부의 갈등을 소말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각 부족, 씨족 사이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93년에 벌어진 모가디슈 전투를 다룬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2001)>이다. 내전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소말리아 청년들은 해적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이 내전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한국의 청해부대도 피랍된 한국 선박을 구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친 바 있다. 그 와중에 소말릴란드 지역은 1993년에 부족간의 화해를 이루며 독립하고 자신들끼리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소말리아 측에서는 소말릴란드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은 내전으로 인해 소말릴란드에 대한 행동은 없는 상태다.
1992년 8월 14일 압하지야(Аԥсны)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압하지야는 압하지야인들이 사는 땅이다. 이들은 이전부터 조지아(그루지아)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지만 조지아가 이를 묵살해왔다. 결국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조지아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였고 사실상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압하지야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조지아인들에 대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는데 1989년 525,000명이었던 압하지야 인구가 216,000명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전쟁 자체는 1993년에 끝났지만 인종청소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조지아는 이에 대한 복수와 영토 수복을 위해 지금까지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과 서유럽세계에서는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3년 10월 21일 부룬디 내전 #영토 #민족 #자원 #정치 #식민지 #역사적갈등 부룬디에는 트와족, 투치족, 후투족 등이 살던 왕국이었다. 독일과 벨기에가 차례로 브룬디 왕국을 점령했는데 벨기에는 항상 부족들을 이간질 시미켜 식민지를 다스렸다. 1962년 부룬디가 독립하고 투치족 중심의 독재정권이 서면서 후투족을 탄압해 왔다. 1972년 이후로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해 왔는데 1993년 드디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후투계 민주정당인 부룬디 민주전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쿠데타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런데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사건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를 계기로 후투족과 투치족 극단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되었고 서로 학살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2005년 5월에 종료되었는데 이때까지 최소 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2월 28일 코소보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코소보는 원래 세르비아의 발상지였지만 후에는 오스만 제국 휘하로 편입되었다. 이 이후로는 세르비아인이 아니라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게 되었다. 1815년, 세르비아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후 발칸전쟁(1912)을 거쳐 코소보를 차지하였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코소보를 세르비아화 시키고자 하였는데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서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화를 중지하고 모든 민족의 생존권과 거주권을 자유롭게 보장하려 하였다. 티토라는 지도자 하에서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듯 했지만 티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분리되었고 과격파 세르비아인인 밀로셰비치가 유고의 대통령이 되면서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역사적 성지라는 이유로 자치권을 박탈하고 다시 세르비아화를 추진했다. 결국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급진파를 중심으로 코소보 군대가 결성되면서 상황이 험악해졌다. 문제는 코소보 독립군이 인신매매, 마약밀매, 장기매매 등으로 자금을 마련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코소보와 알바니아인의 자유를 외치는 코소보와 코소보를 범죄집단으로 보는 유고 군대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코소보 전쟁(혹은 코소보 사태)이다. 코소보, 세르비아, 그리고 인접국인 몬테네그로는 물론 NATO가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고 밀로셰비치는 이 기회를 빌려 알바니아에 대한 인종청소를 시행했다. 이 전쟁은 살짝 특이하게도 서구 학계에 화제가 되었는데 전쟁범죄를 일으킨 밀로셰비치에 대한 NATO의 공격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 수전 손택 등이 지지를 표시했고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벌인 NATO에 대해서 노엄 촘스키가 비판적인 입장을 표시하여 학자 개개인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03년 2월 다르푸르 학살 시작 #영토 #민족 #자원 #기후위기 #전쟁범죄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이 지역에는 이전부터 아프리카 흑인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 왔다. 또 유목민인 바가라족과 농경민족은 푸르족, 자가와족, 마살라이트족이 있었다. 문제는 기후위기였다. 인구의 증가와 토지의 사막화로 인해 유목민들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목초지를 만들려는 유목민들과 경작지를 유지, 확대하려는 농경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랍계 유목 민병대들은 정부와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의 비호하에 약탈, 방화, 강간 등을 벌였고 2003년 2월에 이에 대항해 흑인 반군이 조직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핑계 삼아 흑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 내전/학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최소 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2008년 8월 26일 남 오세티야(South Ossetia, Хуссар Ирысто) 독립 #민족 #역사적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세티야는 오세트 인들이 사는 땅이다. 러시아 제국이 오세티야를 러시아 땅의 일부로 병합했고, 소련 혁명 직후에는 오세티야를 둘로 나눠 북 오세티야는 소련의 일부로, 남 오세티야는 그루지야(조지아) 공화국의 일부로 삼았다. 소련이 해체된 후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오세트 인들이 반발하면서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 통치령과 오세트 자치령으로 나뉘게 되었다(1991~1992 오세티야 전쟁). 이후 남 오세티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성립하고 독립을 선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와 손을 잡은 남 오세티야는 군대를 일으켜 조지아가 통제하던 지역을 전부 탈환했지만 지금도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남 오세티야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2011년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건설 #기후위기 #자원 에티오피아는 2011년부터 청나일강 부근에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댐을 짓고 있다. 하지만 사막화로 인해 나일강 하류의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댐이 건설되면 청나일강에 수자원을 의존하고 있는 이집트는 수자원이 급감하고 오염된 물을 마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이 댐을 두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수단이 계속 협상을 진행했지만 지속적으로 협상재개와 결렬을 반복 중이다.
2014년 야지디족 학살 #민족 #종교 #전쟁범죄 이라크,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ISIL은 야지디족에 대한 학살을 시행했다. 야지디족은 야지드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야지드교는 야지단이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인 ISIL은 이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다. ISIL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4년 2월 28일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영토 #민족 #이념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러시아계 주민이 60%,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계 주민들은 군사력도 강하고 경제력도 높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길 원했고, 15% 정도를 차지하던 타타르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크림반도에서 추방했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불안정이 늘 존재하는 곳이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재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를 지지하는 친서방 과도정부가 들어섰다(유로마이단 혁명).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쿠데타에 의한 불법적인 정권탈취라고 비난했는데 그 해 2월 25일,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국기를 들고나와 우크라이나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틀 뒤, 세르게이 익쇼노프라는 범죄단체 수장 출신의 정치인이 갑자기 등장해 20여 명의 무장병력으로 크림반도의 관공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크림반도 총리가 된 세르게이 익쇼노프는 푸틴에게 크림반도의 치안과 안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푸틴은 2월 28일에 러시아 군대를 크림반도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결국 3월 17일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투표가 벌어졌고 크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2014년 4월 6일 돈바스 전쟁 #영토 #민족 #이념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인해 친러 성향이 강하던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돈바스 지역은 원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가 강한 곳이었지만 우크라이나의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는 돈바스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다. 돈바스 지역의 평균임금은 1993년에는 소련 독립 시기(1991년)에 비해 80%나 하락할 정도였고 헐리우드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으면 이곳을 촬영해간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이후로 돈바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도 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로마이단 혁명이 벌어졌고 이 기회를 틈타 우크라이나 안에서 자치를 원하던 지역들이 모두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시위나 군사행동을 벌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사행동을 벌인 곳이 바로 돈바스였다. 이 전쟁은 결국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이것이 확대된 것이 바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2014년 4월 30일 우루무치 역 테러 사건 #영토 #민족 #식민지 시진핑 주석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시찰한 직후 벌어진 위구르족의 자살 폭탄 테러다. 총 79명 사망. 원래 위구르 땅에는 몽골계 유목민인 준가르라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면서 청나라를 괴롭혔고, 건륭제는 준가르 사람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메운 것이 준가르 이전에 원래 살던 위구르족과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등이다. 근대에 들어서 청나라의 힘이 약화된 후에는 독립과 병합을 반복하다가 1955년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 때부터 독립 혹은 이슬람 문화권과의 병합을 원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중국 정부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렇게 밀려난 빈민, 농민공들이 신장 지역까지 오게 되면서 선주민들과 한족 빈민/농민공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2014년의 테러를 기점으로 시진핑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고 이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재교육 수용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위구르인들은 강제 노동은 물론 폭행, 성폭행, 강제 개종, 강제 결혼 등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23년 9월 19일 아르차흐 분쟁 #영토 #민족 아제르바이잔과 아르차흐 공화국 사이에서 일어난 20시간 동안의 군사충돌. 이 일로 아르차흐 공화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ый Караба́х)라 불리는 이 지역은 원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스탈린 시절에 소련의 침공을 받고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면서 이 지역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곳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벌어졌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1차 전쟁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승리해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했지만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아제르바이잔이 승리하면서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2023년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아르차흐 공화국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아제르바이잔 땅이 되었다.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강 댐 건설 #영토 #자원 중국이 이 지역에 향후 댐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티베트 지역에서 시작해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흘러가는 이 강의 수로가 댐 건설에 의해 바뀔 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고 물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인도와 중국이 이 문제로 다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