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헨리 키신저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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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연구자. 일어/중국어 교육 및 번역. => 돈 되는 일은 다 함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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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9일,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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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알프레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1923년 5월 27일에 독일에서 태어나 1938년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3년에 완전히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군인이 되어 독일어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뉴욕시립대학 시티 칼리지 경영-행정관리학부에 입학했다가 2차대전을 맞아 군대에 간 키신저는 1946년에 다시 하버드에 입학, 1950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얜델 엘리엇(William Yandell Elliott, 1896~1979)이었고, 윌리엄 교수의 지도 하에 1952년에 19세기 유럽 외교사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에는 빈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빈 체제란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었다가 완전히 패배한 후, 메테르니히 등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국경, 국제질서 등을 전부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을 말한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나폴레옹 이후 백년 동안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징벌을 내리지 않고,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주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많은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빈 체제에 대해 서술할 때 나폴레옹이 퍼트린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저버리고 메트리니히 등이 중심이 되어 나폴레옹 이전의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서술하며 그 보수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키신저를 빈 체제를 균형의 회복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박사 과정을 졸업한 후에는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외교 정책에 대해 다양한 발언을 쏟아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핵’에 대한 이야기다. 키신저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핵전략은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하면서 핵무기와 기존의 무기를 단계적으로 운용하면서 무슨 전쟁이든 일단 최대한 안 일어나게 하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는 제한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케네디 정권의 고문이 되어 외교 정책에 잠시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확실히 정치인이 된 것은 닉슨 대통령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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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예비선거에 입후보한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의 외교정책 고문이 되었다. 1964년, 1968년 대선에서도 그를 지원하면서 록펠러 가문과 연을 맺게 되었다.

록펠러가 선거에서 완전히 패한 후에는 196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차드 닉슨에게 직접 스카우트되어 국가안보문제 담당 보좌관이 되어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무장관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으나, 닉슨 정권 때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키신저는 이에 앞서 「관료와 정책입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미국 외교의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무실한 존재인 NSC가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키신저는 젊은 외교관, 장교, 국제정치학자들을 스카웃해 NSC 특별 보좌관에 임명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무성 등과 권력투쟁을 벌여 닉슨 정권 하에서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는데, 국무장관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배제시킬 정도였다. 이 시기 미국의 대사, 주재 군인, CIA 지국장 등은 NSC, 어떻게 보면 키신저의 수족들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이룬 최대 업적인 미중교류 개시 역시도 키신저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주재군인, CIA 지국장들을 활용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을 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국무장관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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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중국에 극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도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과의 화해와 외교 관계 수립을 도모했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교섭 카드로 삼아 북베트남을 만나 베트남 전쟁 종전 교섭을 하고, 소련과도 제1차 전략무기제한조약(SALT1)을 체결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데탕트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키신저는 소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중국과 함께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고, 키신저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동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강간을 외교적으로 엄호해 주었다. 동 파키스탄은 훗날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3년에는 마오쩌똥(毛澤東) 주석을 만나 미국,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이란, 튀르키예, 서유럽이 함께 소련을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키신저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중국, 소련과 관계를 맺으며 또 해결한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 종전이다.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베트남이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압박을 했고, 동시에 대규모 폭격과 봉쇄라는 군사적 압박을 진행해 결국 베트남과 평화적인(?) 종전을 타협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보급선 역할을 하던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비밀리에 폭격을 지시해 최대 수십 만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제4처 중동전쟁 후에는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슬람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조정하기 위한 셔틀 외교를했다. 1974년에는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소련과 분리시키고 미국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원유를 달러로 결제하기로 약속해 미국의 자원 공급을 원활히 하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워싱턴-리야드 밀약).

1973년.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되어 포드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미국의 외교를 장악했다.

이 시기, 키신저의 지휘 하에 있던 NSC에서는 [국가안전보장과제각서 200(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200)]이라는 것을 작성했는데 이를 흔히 키신저 리포트라고도 부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인구가 증가하는 나라의 정권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는 미국의 불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에 대해 인구를 억제하는 의학적, 정치적 개발원조를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1989년에 기밀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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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학생들의 격한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조지타운대학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 가서 자신이 공직에 있었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트라는 국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주로 중국 대상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해주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큰 부를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수많은 기업은 물론 트럼프 정권에 이르기까지 외교/무역 관련 자문을 계속했다.

2007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계(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핵무기는 더 이상 전쟁 억제가 불가능하니 미국 정부는 핵무기를 없애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이란, 북한의 핵실험이 화제가 되던 당시, 이 논문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9년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며, 전쟁이나 분쟁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해 전쟁을 하는 게임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코로나로 인한 건강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국제 장벽이 생겨날 우려가 있으며 이런 장벽이 세워지면 앞으로 몇 세대 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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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교정책을 흔히 현실주의라 평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이 맹주가 된 상태에서의 국제 안정을 꾀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논문에서 빈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뿐이었다. 말로는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상을 잔혹한 독재자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미국 외교의 한 측면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결정은 닉슨이 한 것이고 키신저는 ‘사신’에 불과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을 제3세계라 부르며 마치 미-소-중 삼국이 강대국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중화민국의 UN 탈퇴와 중화인민공화국이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에도 그의 활약이 있었다. 현재 중국을 만드는데에 어느 정도 키신저의 공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는 미국을 위해 캄보디아 폭격을 감행해 수십 만을 죽였고,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하게 만들었다. 칠레 사람들은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 정치 하에서 고통을 받았는데 1989년에 미국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피노체트를 바로 버렸다. 1975년에는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는데 동티모르 해방전선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걸 묵인했다.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인 학살을 묵인한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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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고, 그의 현실주의적 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그의 전쟁범죄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강약약강처럼 보이는 것은 나 뿐일까?

이렇게 또 한 시대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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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물이 사망했길래 이렇게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나 궁금했는데, 이런 인생을 산 사람이었군요. 평화상을 받기는 했지만, 철저히 미국의 이익에 따른 선택이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해보면 핵 대신 제한전쟁을 전개해야한다는게 '이게 차라리 낫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괴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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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이름이었는데.. 20년 전쯤 [키신저 재판]이라는 책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뭐 이런 악마 같은 사람이 있나?'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긴 한데.. 그런 사람이 또 지구적인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대립보다는 평화의 방향을 만들어냈다고 평가 받을만한 부분이 있다는게 또 '정치현실주의'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읽는데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등장하네요. 사는동안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군요. 강자/승자의 역사에서 그려질 모습과 약자/패자의 역사에서 그려질 모습이 전혀 다르겠네요. 수많은 피해를 낳은 폭격을 지시했는데 노벨 평화상을 탔다는 게 놀랍습니다.

의견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항상 객관적이거나 일관적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역사적 사실과 함께 토론하며 배울 수 있는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