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예의를 가르칩시다: 한국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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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연구자. 일어/중국어 교육 및 번역. => 돈 되는 일은 다 함

(MBC 에브리원 성지순례. 이미지 출처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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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일이다. 안동 사람 퇴계 이황이 한참 어린 학자 고봉 기대승과 인간의 감정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편지를 주고 받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우선 두 사람의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였고 자기보다 서른 살 어린 젊은 학자 기대승의 반론에 예의를 갖추어 성실하게 대답하는 퇴계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 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퇴계와 동년배이고 퇴계와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천재로 불리던 합천 사람 남명 조식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고향인 경상도에서만 거처를 옮겨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의 세도정치에 대해서도 서슬퍼런 비난을 퍼붓기도 했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나 재상을 지낸 이산해 같은 인물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조식은 퇴계와 기대승 사이의 논변에 감탄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近見學者。手不知洒掃之節。而口談天理。計欲盗名。而用以欺人。反爲人所中傷。害及他人。豈先生長老無有以呵止之故耶。如僕則所存荒廢。罕有來見者。若先生則身到上面。固多瞻仰。十分抑䂓之如何。伏惟量察。
지금 공부하는 자들을 보면 손으로 마당에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하늘의 이치를 입에 담으니 명성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속이려 하는 것이라, 도리어 사람에게 중상을 입을 것이고 그 해는 타인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선생은 큰 어른이 되어서 어찌 그런 것을 꾸짖어 그만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성격이 거칠고 독선적이라 찾아오는 이가 드물지만 선생은 몸이 남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어 많이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들을 이제 그만 진정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남명의 말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간단한 예의도 차리지 못하는데 하늘의 이치며 인간의 도덕이며 올바른 정치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도리어 본인도 해를 입고 남에게까지 해를 입힌다는 말이 요즘 사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은 커녕 자기 몸 하나, 자기의 본능 하나 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러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떠올렸는가? 얼마전 우연히 접한 한 TV 프로그램 내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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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에브리원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성지순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김제동, 김이나, 풍자, 송해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고 불교 승려, 개신교 목사, 천주교 신부가 속세를 체험하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관찰 예능이라고 한다.

지난 11월 14일에 방송된 3화에서 송산 스님, 유경선 신부, 차성진 목사가 출연했다. 세 사람이 이태원을 지날 때 차 목사가 LGBT에 대한 각 교단의 입장을 물었다. (방송 중 해당 내용)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흘러갔다. 주제를 먼저 꺼낸 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경을 따르는 사람이고 어쨌든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거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을 하거든요. 예를들면 이성애는 항상 올바른 형태로만 존재하나? 그렇진 않단 말이죠. 결국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던가 아니면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 조차 부정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저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이 말을 들으며 ‘목사가 할만한 말이네’, ‘목사치곤 진보적이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도 말 자체도 예의가 없거니와 당사자 앞에서 한다니 더 예의가 없는 말이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저는 기독교 믿는 분들이 제정신 같지가 않아요. 그치만 그분들의 인권을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진보적인 듯이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말이라는게 늘 이런 식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믿을 자유, 종교와 신앙을 강제로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종교의 교리랍시고 세상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를 두고 굳이 레위기나 로마서의 구절을 들고 와 논쟁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교리나 사상의 문제 이전에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당사자 앞에서 죄가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하면 당사자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피하거나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아 보자.’ 내게는 이 정도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과 헌법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해가며 논쟁을 할 만큼의 체력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가장 웃긴 건 이거였다. 유경선 신부의 말이다.

“저는 종교인들한테는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종교한테 물어 보는 사람들도 계속 돼요 안 돼요를 물어 봐요. 그런데 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기 나가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반대해서 나간거예요. 종교 안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론에서도 종교인들에게는 항상 답을 바라는, 종교인들 한테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에요. 종교는 항상 윤리적인 답을 내려 줘야 하는 그런 게 싫다고 여러분이 말하면서도 자꾸 저희한테 그런 답을 요구 하는, 그런 사회적 통념이 저는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사랑할 수 있어요? 이런 방법을 물어 봤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들은 작사가 김이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거는 진짜 생각지도 못한. 성직자들에게 그런 걸 굳이 물어 보는 게 폭력적인 거라는, 성직자 입장에서는 우리한테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거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정말 기가 찼다. 유 신부는 본인이 신부이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나온 이상 좁게는 가톨릭, 넓게는 기독교를 대표해 방송에 나온 사람이다. 애초에 그 종교에서 죄를 운운하지 않았으면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을 일도 없다. 자기들이 원인을 제공해 놓고 이제와서 자기들한테 묻는 게 폭력적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이런 말에 답을 안 한다면 그들이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소수자 반대 시위에 나간 것도 ‘자연스럽게’ 나간 거라니, 이 말도 정말 웃기다. 성소수자를 치료한답시고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언어적/물리적 폭력과 감금, ‘교정’이라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성폭행들을 생각하면 저런 일을 자연스럽다고 평하는 유 신부의 말과 저런 말에 공감해주는 김이나 씨의 말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도 한다지만, 나는 그 말도 아니라고 하고 싶다. 무식도 때로는 죄가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나쁜 길로 끌고 가는 무식은 죄다.

(기독교 교리 내에서의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두고 다시 논하고 싶다. 한국에서 종교나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들도, 성직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성경과 교리를 제대로 공부한 이가 드물다. 그들과의 논쟁은 내 체력 낭비일 뿐이고, 조만간 종교적 측면에서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다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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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대화는 서구화이고 기독화였다.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이거나 기독화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창궐을 겪으면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며 기독화라는 등식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가치관에 동의하건 말건 한국, 특히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 자체를 서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고 인류의 역사가 오로지 그런 유럽적 체계가 지향하는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의 근본은 우선 무지(無知)다. 이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고 배우지 않아 생기는 무지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가치, 지식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아 생기는 비의도적인 무지다. 이런 비의도적인 무지는 한 문화권 안에서 상식이 되고, 이런 상식은 아무 막힘 없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버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짧게는 70년, 길게는 백여 년 정도 동안 유럽 중심의 사고 방식과 그 우월성이라는 가치를 유무형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늘 이집트 이야기를 하고 서유럽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근대 이전의 우리 삶은 전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어도 서술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스스로를 변방으로 만들고 있고, 이런 사고 방식은 K-POP이 유행하고 한국 정부와 한국 문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을 무슨 약소국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각설하고, 나는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다가 왜 또 근대 이야기를 하는가? 성소수자에 대한 시각도 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없다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없었을까 하면 그건 아니다.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가치관에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기 때문에 음양이 결합하는 게 법칙이며 그러므로 음양의 결합이 아닌 동성애나 음양을 뒤바꾸는 혹은 음양이 뒤바뀌었다고 하는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것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모든 인간은 음양 이전의 태극이며 음양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각자의 행동에 달려 있으므로 음양으로 성性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세계에 기독교처럼 성소수자에 대해 혐오적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종교는 없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권의 성소수자 혐오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럽 근대 문명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도 많다. 전근대 일본 역시도 남성간의 동성애와 동성 성관계가 매우 성행했으며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일본의 민속을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한 민속학자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 1875~1962)는 동성애를 비롯해 비-이성애, 비-일부일처제 적인 성풍속에 대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비판이 있다.

근대 이후 한국(조선)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비-이성애적 성행위는 점점 음지로 향해갔다. 특히나 1920~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에로/구로/난센스(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의 준말)’라는 흐름은 ‘엽기’라는 말을 유행시킴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안심시키고 비정상과 접촉했음을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로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조선에도 퍼지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에로/구로/난센스’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특히 여성 사이의) 동성애, 비정상적 성행위, 정신질환, 성적 암시 혹은 노골적인 성묘사가 들어간 글이나 그림, 사이비 종교, 매우 특이한 범죄 등이었고, 이것이 사실상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향을 결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조선에 퍼지고 조선 내에서는 어떤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2018년에 나온 박차민정 선생의 『조선의 퀴어』라는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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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한 게 2000년 9월이다. 그 이전에는 훈련소에 간 여장남자 이야기나 동성 성매매/원조교제, 여학생들 사이의 로맨틱/섹슈얼한 분위기 같은 것을 자극적인 흥미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밀레니엄 이후, 한국 언론에서는 나름대로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다룬 적도 있고, 영화 <왕의 남자> 이후 일어난 드라마, 영화 작품에서의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동성애 붐은 수많은 작품 속에 동성애자(주로 게이) 캐릭터를 존재하게 했다. 하지만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게이 혹은 남성답지 않은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 와중에 여성 성소수자들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퀴어 퍼레이드를 둘러싼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 이후부터는 퀴어축제는 물론이고 동성결혼/시민결합 합법화, 더 나아가서는 동성애에 대한 찬반을 다루는 방송도 많아졌다. 하지만 다루는 방식은 늘 비슷하다. 동성애는 변태성욕이며 죄악이고 불법화/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와 기독교 계열 운동가가 등장하고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비-성소수자가 등장하고 이름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성소수자(홍석천, 김조광수 등) 한 명을 등장시킨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단 한 명의 성소수자는 어떤 기분일지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는 이렇게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류의 방송을 보게 될 때마다 ‘저 한 명’, ‘저 한 명만’을 섭외한 이유가 무엇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 한 명은 방송 앞에서 너무 과격한 이야기를 자제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이 겪었던 피해 이야기 중에서 방송에서 언급해도 될 것과 언급해선 안 될 것, 도저히 언급하기 싫은 것을 계속 상기하며 구분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섭외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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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는 믿을 권리와 믿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종교 교리랍시고 아무 언행이나 일삼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한다. 이와 동시에 말하는 사람, 특히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종교인들에게도 교리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 줬으면 좋겠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도 성소수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특정 종교의 거친 언행을 여과없이 내보내는 일을 삼가줬으면 좋겠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이 혹시 상처 받지 않을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처 받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매너라고 하고 비속어로는 싸가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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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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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성소수자의 일을 다루려는 시도를 했다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섬세한 접근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느껴지네요. 비슷한 방송들을 보면서 소수자가 다수자를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구도가 불편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는데요. 오랜 기간 권리를 침해당한 소수자가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 다수자를 설득해야 하는 방식이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주신 방송에서도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비슷한 문제가 벌어진 것 같네요.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시도는 좋지만 혐오와 차별이 담긴 메시지를 대등하게 다뤄주어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답답한 상황을 참 재미있게 엮어주셔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인용해주신 프로그램 속 출연진들의 발언에 놀랐습니다. '자연스럽게' 라는 표현을 저렇게 사용되어지다니 특히나 괴이하네요. 출연진도 여과 없이 내보낸 제작진에게도 예의가 필요하겠어요. 써 주신 모든 문장에 공감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이제 일반적으로 욕을 안먹을 정도의 발언을 찾아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큰 목사님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그런가보다, 이정도면 중립적인 스탠스처럼 보이겠지 같은 것들이요. 본문에 언급하신 것처럼 말을 조금만 바꾸어서 들으면 시위하고 화를 낼 분들이 이렇게 얌전한 척을 하시니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믿을 권리와 믿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종교 교리랍시고 아무 언행이나 일삼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말씀에 굉장히 공감합니다...!

한국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몇몇 방송에서는 성소수자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다루기도 하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방송국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노력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보여주는 방송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 이어져서 성소수자들이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