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에 기반한 해석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사실 여부는 이미 여러 매체에 걸쳐 나왔으니 거길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와 관련해, 영화 유튜브 <거의잡스럽다> 거의없다님의 발언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역사 영화의 용도는 (역사적)사건을 알려준다기보단, 사건에 흥미를 갖게 만드는 거다.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곱씹어 보는 거지“
*전두환과 전두광 이름을 편하게 혼용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전두환과 하나회 신군부가 등장했다. 그 후 44년이 흐른 2023년 11월 22일 전두환이 직접 등장하는 최초의 영화가 마침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픽션이 가미된 영화다. 영화적 연출이 가미되었으니 역사적 디테일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대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전두광’은 ‘전두환’이라는 것이고 악마라는 것이다.
"그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까? 밖에 나가 보세요. 바뀐 거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야!!"
박정희 사망 후 김재규를 조사하던 전두광의 대사가 영화 초반부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박정희 사살로 세상이 바뀔 줄 알았겠지만 내가 있는 이상 세상은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까지 바뀐 게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때는 군부 독재 세력이 있었다, 지금은 검찰과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 세력이 권력을 휘두루고 있다. 검찰의 시대. 대통령부터 검사 출신이니까. 검찰 세력은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 이전부터 등장했다. 1992년 검사 출신 김기춘이 자리한 초원복국집 사건의 ”우리가 남이가“부터. ”검사동일체“라는 말까지. 한국 역사의 중심에는 늘 권력을 지닌 세력이 항상 있었다. 슬프게도 한국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왔다. 전두광의 "세상은 그대로야라는 발언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전두광과 하나회의 소신 : 떡고물
전두광과 하나회는 박정희가 사망한 틈을 타 명분을 만들어 정부를 장악하려 애쓴다. 명분은 단순하다. 박정희가 사망한 장소에 참모총장이 같이 있었으니 수상한 점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니 참모총장을 체포해야 한다는 것.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이지만, 사실 아무런 확증 없는 명분이다. 하지만, 이 명분을 앞세워 대통령 재가를 받아 합법적 절차를 만들어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학연, 지연, 혈연 가용한 모든 끈을 동원한다. 그 중심은 하나회다. 이들의 목표는 정부 장악을 통해 출세, 편안함, 생존 등의 사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전두환은 떡고물을 쥐여주고 완벽한 독재를 꿈꾼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건네줄 떡고물을 기대하며 어떤 일이든 한다. 떡고물 앞에서 무너진 인간의 양심은 얼마나 가벼운가. 인간의 자격도 없다는 말이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적절하다.
사사로운 선택의 누적
영화는 전두환과 하나회 패거리들의 작당에만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 역사의 진행 방향이 거대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기보다는 권력을 지닌 사사로운 개인들 선택의 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또 다른 초점을 맞춘다. 한국 역사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독재의 길로 빠지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각성시키게 한다. 전두광과 하나회에 속한 군인들이 이태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가졌다면 그날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도 다르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은 다수의 욕망이 모여 이명박이라는 권력자를 만들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이명박은 다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보단 자신을 위해 국가를 수익 모델로 삼았다. 권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 당시 다수의 욕망이 부자 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명박은 그저 그런 정치인이나 기업가 명함을 단 채로 사장되지 않았을까.
한 명의 권력자가 내리는 선택도 역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만, 다수 개인들의 사사로운 욕망이 모여진 선택도 역사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숱한 사사로운 욕망들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서울의 봄이 던지는 생각해 볼 만한 또 다른 메시지다.
이태신의 소신 : 사즉생(死卽生)
이태신은 전두광과 하나회와 달리 책임감 넘치는 참된 군인이다. 두려움도 없다. 전두환과 하나회 쪽으로 전세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군인답게 싸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두광 무리를 복도에서 마주치는 장면과 바리케이드를 혼자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행주대교에서의 이태신 모습은 뇌리에 박힌다. 영화적 연출이 과장되긴 했지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매우 어울리는 장면이다. 천안문 탱크 앞 중국 청년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사람이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이태신의 사무실에 사즉생(死卽生)이라는 족자가 걸려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두광 패거리 대갈통을 뭉개주러 출동하는 장면이 사즉생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군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 수경사령관 직책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방법이 없어도 어떤 식으로라도 끝까지 맞서고자 바리케이드를 하나하나 넘어가는 이태신의 모습이 주는 울림. 한국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의 리더라는 자들은 과연 이런 모습을 보여줬었던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이순신이 자신의 책임을 다했던 것처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모티브로 했지만, 사실 이순신 장군에 더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현재, 우리의 리더에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절망적 모습 아닌가.
대화는 사람끼리
전두광이 위병소에 잡혀있을 때 헌병감이 전두광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참모차장이 명령을 철회한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위한 대화 시도를 하다가 전두광을 놓친다. 육본의 별들은 전두광을 체포하기 위해 진돗개를 발령한 후에도 전두광과 신사협정을 맺으며 갈팡질팔 하다가 전두광과 하나회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사람이 아닌 악마들과 대화한 결과다. 반면에 이태신과 헌병감, 특전사령관은 전두광 패거리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라며 그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서로의 입장을 교환하고 이해하는 행위가 대화다. 하지만, 상대방이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주장과 태도를 견지한다면 대화가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상대를 위해서 대화라는 끈을 끝까지 이어가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본 바로는 영화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대화를 하면 안 될 상대들과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조차 한심하게 그리고 있다. 대화와 타협이 허울 좋은 단어로만 이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대화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두환과 하나회가 쏘아 올린 ‘신세계’
서울의 봄은 조명과 빛을 사용한 연출, 역사적 고증 등 전체적으로 영화적 연출이 우수한 영화다. 영화에서 길게 나오지 않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하나회와 전두환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그들 스스로가 그리는 신세계(新世界)를 완성하기 위해 총력을 펼칠 때. 이에 제동을 걸고자 이태신이 마지막까지 분투하며 출동하는 순간 빨간색의 신세계(新世界) 백화점 글자가 스쳐지나 가는 장면이다. 빨간색 신세계 글자는 전두광의 ‘세상은 그대로야’라는 말처럼 박정희 시대와 같이 핏빛으로 물든 세상을 의미한 것으로 보였다. 한국 역사에 큰 흉터를 남긴 그들만의 신세계 였기에 빨간색으로 그린게 아닐까.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原則)
김염삼의 하나회 해체로 신군부 세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군부세력을 잇는 다른 권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1992년 대선을 앞둔 시점으로 돌아간다. 당시 검사 출신인 김기춘 법무부장관 및 부산 기관장들이 초원복국집에 모였을 때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발언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라는 발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사와의 대화’ 시간 그리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과 2022년 검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검찰 권력은 한국 사회 중심부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로 군부 세력을 사조직화해 권력을 잡았다. 지금 검찰은 검사동일체 원칙을 구호로 하고 있다. 대통령부터 검사 출신을 밀어주고 당겨주며 검사가 정부 주요직을 차지하게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일개 공무원 조직이 요직에 진출해 나랏일을 맡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웃픈가. 신군부 세력은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에 한 번에 사라졌지만. 검찰 권력은 그렇지 않았고, 않고 있다. 무소불위 검찰 권력이 하나회보다 더 하면 했지 덜하진 않다. 그들의 권력은 언제쯤 무너질까.
여담이지만, 하나회가 참모총장 납치를 위해 합법적 절차를 만들려고 애쓰는 과정을 보면 검찰의 야당 대표 압수수색이 떠오른다. 합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은 지금이나 이전이나 다르지 않다.
시민이 도와줘야 돼
무소불위의 권력이 나대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어디에 기대야 하는 걸까? 그 정답은 이태신의 대사에 묻어있다.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대사다. 이태신이 서울로 진격하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전화를 돌리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다. “시민이 도와줘야 돼”이다. 이 대사에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깨어있는 시민들이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막을 수 있다고. 어떤 권력도 시민을 넘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몸이 뜨거워지는 <서울의 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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