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티가 뭐냐구요? 아마도 길을 오가며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가슴팍에는 “R.O.K.A”가, 왼쪽 소매에는 태극기가, 등에는 큰 글씨로 “KOREA ARMY”가 새겨져 있는 (주로 검은색이 제일 흔한) 반팔 티셔츠죠. 인터넷을 찾아보니 최소 2019년부터는 이미 유행이 시작된 듯합니다. 젊은 남성들이 주로 입고 다닐 땐 소위 ‘깔깔이’처럼 군대에서 입던 편한 옷 제대 후에도 그냥 입는다는 느낌이었죠. 그러다 언젠가부턴 같은 또래의 여성들도, 나아가 조금 더 어린 중고등학생들까지도 이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된 것 같았죠. 물론 통기성이 좋다든지, 빨래 후에 잘 마른다든지 하는 기능적인 칭찬도 들어보았고요. 비슷한 디자인의 로카 후리스(플리스) 집업도 겨울이 되면 종종 눈에 띄곤 했습니다. 처음엔 PX에서나 판매하는 사제 군용 물품이었던 것이, 언제부턴가는 인터넷 어디에서나 구입할 수 있는 흔한 아이템이 된 겁니다. 온라인에는 PX 제품을 선물 받은 후기나 인터넷 구입 후기, 심지어 업체로부터 제품을 협찬받은 광고성 후기도 적지 않게 보입니다.
얼마 전, 한 열한 살 어린이가 이 ‘ROKA’ 옷을 상하의 세트로 입고 나타나서는 제게 자랑을 했더랬어요. 아빠가 새로 사주셨는데, 사람들이 많이 입는 그 인기 있는 옷이라면서요. 입어보니 너무 시원하고 멋있다면서 잔뜩 신이 나서 조잘거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종 짓궂을 때가 있습니다. 이어질 상황을 조금은 예상하면서 “거기에 써진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알아?”하고 물었죠. 어린이는 입은 옷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저를 보고는 뭐냐고 되물었죠. 저는 ‘ROKA’를 풀어서 써주면서 이건 ‘군대’를 뜻하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어요. 역시나, 조금 전까지 신나있던 어린이는 조금 덜 신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열한 살 어린이는 그 무엇보다도 너프건(장난감 총)을 제일 좋아했던 일고여덟 살에도 군대에 가는 것만큼은 무서워했던 남자 어린이거든요.
물론 어린이는 금세 다시 ‘아빠가 사준 맘에 드는 선물’에 기분 좋은 어린이로 돌아왔습니다. 흔들리던 눈동자와 끝이 흐려진 말은 다행히도 잠깐이었어요. 그렇지만 어린이의 머릿속에서 군대나 군인은 마냥 좋아하기 어려운 무언가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사실 어린이는 그동안 종종 제게 묻곤 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그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전쟁은 어떤 것인지, 군인은 무엇인지 같은,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들을요. 꼭 무언가를 묻지 않더라도 어린이는 자기가 본 재미있고 흥미로운 혹은 무서운 이야기들을 제게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여러 번의 대화가 쌓이고 쌓이면서 저는 어린이가 들어왔을, 그리고 접해왔을 전쟁과 군대의 모습들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조금 더 어렸을 적 어린이는 너프건을 정말 정말 좋아했었습니다. 장난감 상자에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멋진’ 총들이 가득했어요. 그때만 해도 장난감의 세계에 무지했던 저는 이 어린이를 통해 장난감의 세계가 얼마나 ‘고도화’ 되어있는지, 얼마나 ‘진짜같은’ 무기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비싼지도 알게 됐죠. 어린이는 새로운 총이 생길 때마다 이번 총은 탄창을 채우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탄환을 얼마나 많이 넣을 수 있는지, 얼마나 빨리 연발이 가능한지 같은 이 총의 ‘멋진’ 점들을 제게 설명해 주곤 했어요. <귀멸의 칼날>이 유행하던 무렵에는 플라스틱부터 대나무까지 온갖 종류의 ‘멋진’ 칼들도 등장했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검술을 따라 하거나 칼춤에 가까운 움직임을 몸소 보여주기도 여러 번이었죠. 이 작은 어린이의 세계에 수많은 ‘멋진’ 것들이 상대를 다치게 하고 죽이는 무기들을 원본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는 동시에 알았습니다. 남을 다치게 하거나 무엇이든 죽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를요. 그래서 열심히 탄창을 채우다 말고도 짓궂은 제가 “그걸로 누구 쏠 거야?” 물으면 어린이는 놀라서 손사래를 쳤던 겁니다. 이 어린이는 어쩌다 어깨 한 번만 잘못 부딪혀도 화들짝 놀라서 ‘미안해요’를 내뱉는 선하고 바른 어린이였어요. 남에게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남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고, 남과 싸워도 안 되고, 남을 때려도 안 된다는, 어른들은 쉽게 모른 척하는 사람의 도리를 잘 알았으니까요. (비록 장난감이더라도) ‘무기’를 좋아하면서, 폭력과 힘의 논리에서는 가장 멀리 서 있었습니다.
그런 어린이는 요즘 들어 고민투성입니다.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친구들 사이에 생겨나는 힘의 질서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듯해요. 힘이 세거나 덩치가 커서, 목소리가 커서, 성격이 거칠어서, 여러 이유로 다른 친구들을 압도하는 친구를 보게 된 겁니다. 가끔은 그 친구들이 무섭거나 두렵다고 느끼면서도 또 그런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교실에서의 에피소드를 말해줄 때면, 어린이는 몇몇 친구들의 행동이 과하다고 토로하면서도 어딘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함께 털어놓아요.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어린이의 마음에 생채기가 늘어났고요. 어떨 때는 자신이 속상했던 경험을 말하다가, 또 그렇게 자기를 속상하게 만든 친구들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대신 변명하기도 합니다.
어린이의 혼란에는 폭력과 힘, 위계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녹아있는 듯합니다. 싸우지도 말고, 때리지도 말고, 다치게 하지도 말라다가, 맞고 오지도 말고, 맞느니 차라리 때리라든가, 지고 오는 꼴은 보이지 말라는 식인 것이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는 없고, 강자의 위세에 반기를 들기도 어렵습니다. 평화는 좋고 전쟁은 나쁜 거라면서, 전쟁이 난다면 절대 이겨야만 합니다. TV에서 유튜브에서 전쟁의 소식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어디에선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고 있지만 내가 사는 세상만큼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이고, 그러면서도 폭력의 이미지는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어린이는 TV도 유튜브도 익숙하니까요.
ROKA의 뜻을 들은 어린이는 군대에 간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머뭇거리는 것이 당연하죠. 어린이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나중에 크면 (싫어도) 군대를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군대는 싫은 곳, 무서운 곳이라고 여기게 됐습니다. 동시에 ‘모름지기 진짜 남자라면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라는 말도 함께 들었죠. 군대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군대는 안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냐는 체념 섞인 말을 꺼낼 때도 있었습니다. 만화, 애니, 영화에 나오는 무기들은 갖고 싶고 써보고 싶은 멋진 장난감이지만, 그건 장난감일 뿐입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두렵죠. 그런데 군인은 적을 죽여서 전쟁에 승리해야 하는 사람이고요. 이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로카티를 입은 어린이가 ‘ROKA’의 뜻을 알게 되더라도 멈칫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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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엘림
언론정보학과 북한학에 발을 담그고 미디어, 사회, 젠더, 통일, 평화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화를 더 배워보겠다며 시작한 국제정치학 공부 중에 전쟁과 젠더의 교차에 눈길이 머무르면서, 6.25 전쟁기 여성의 전쟁 경험을 연구했다.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 연구소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웹진 <다양성+Asia>에 함께하고 있다.
코멘트
7깔깔이나 군식량도 유행했던 기억이 나는데 주기적인 이런 상황이 뭔가 씁쓸하네요
저는 지하철에 가끔 이 티를 보고 왜들 입고 다니는 거지 했는데, 유행이었군요! 몰랐네요..
트렌치 코트 등 군대에서 시작된 용품이 패션의 일환으로 자리잡는 건 사실 과거부터 있어왔던 일인데요. 이 글은 그것과 별개로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어떤 것을 넘겨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네요.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가장 기초적인 마음을 잘 이해하는 어린이가 언젠가는 남을 공격하거나 공격에 맞써 싸우는 것이 일인 군대를 겪어야 되는 한국의 현실을 언제까지 물려줘야 할까요? 뉴스에서 자주 나오는 '선제타격', '맞불 작전' 등의 용어를 보면 결국 현실의 다음 세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이 다음 세대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게 문화의 중요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의류 문화는 전쟁 이후에 급격히 발전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아예 밀리터리룩 이라는 부류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 주변 미성년자들도 로카티를 자주 입어서 본문과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요. ‘그냥’이라는 대답이 많았네요.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경쟁사회인 모순... 어쩌면 내 아이는 그렇게 살지 않길 바라며 했던 조언들이,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었을 수 있겠네요. 무심코 뱉었던 말들이 부끄러워집니다..ㅠㅠ
정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면서 비슷한 고민으로 ‘무기’의 형태를 한 장난감은 최대한 지양했었거든요. 어린이집 행사로 ‘물총’을 사오라는 공지를 받았을 때는 도라에몽 모양 물총을 사보냈다가^^;; 자기 물총 위력이 제일 약했다는 불평도 들어보았더랬죠ㅎㅎ 무기, 전쟁, 힘, 군대 등등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끝없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함께 고민해나가다보면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가 성장해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