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자살위기 청(소)년들-'굳이' 살아야 할 이유의 습득 및 제공은 가능할까요?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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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술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읽거나, 시청, 접한 콘텐츠에서 주제를 뽑아 고민하는 걸 좋아합니다.

-실제 자살 사망자가 사망 직전 인스타 라이브를 통해 시청자들과 나눈 대화 일부가 있습니다. 해당 내용에 트라우마가 있거나 내성이 약한 분은 주의해주세요. 

원래는 다른 주제로 토론글을 쓰려다, 오늘 아침 지인을 통해 비참한 뉴스를 접한 뒤 착잡한 마음으로 급하게 글을 씁니다. 변명의 목적이 가미됐지만 급하게 쓰다보니 내용의 전문성은 좀 떨어질 겁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목차

1. 들어가는 글

2. 죽지'말아야 할' 이유와 '굳이' 살아야 할 이유

3.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의 가능성

4. 맺으며



1. 들어가는 글


"여러분 2시에 뛸게요. 2분 남았어요. (웃음). ... (중략) ... 여러분, 여러분은 꼭 꿈을 찾으시고, 꿈을 찾으세요. 그리고 꼭 꿈을 이루세요. 저처럼 병신처럼 살지 마시고, 인생 허비하지 마시고, 울갤(우울증갤러리) 접으시고, 어 잘 사셔야 해요.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카메라를 어따 설치하면 좋을까요. 어... 참 무섭네요.(웃음). 무서워요 솔직히. 여러분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따가 투신할 때 라방(라이브방송) 킬게요. 애들이랑 전화 좀 하다가. ...(중략)..." 

이후 조금 더 담소를 나누다가 휴대폰을 고정하고 "간다?"라 말하고는 실제로 투신했다. 

-

2023년 4월 16일 오후 2시 30분쯤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고층 건물 옥상에서 10대 여학생 A씨가 떨어져 숨졌습니다. 

사망한 학생은 직접 인스타 라이브로 자살 시도 전 자신의 '인터넷 친구들'과 담소를 나눴고(이미 자살을 예고했습니다), 자신의 투신 영상을 인스타 라이브로 찍었습니다. 관련 영상은 빠르게 삭제되고 있는듯 보이지만 지금도 검색하면 충분히 시청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사망한 학생이 왜 자살을 단행했는지 그 사정을 추적, 고발하는 글 역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그 사정과 관련해서도 물론 토론의 주제를 잡을 필요가 있지만, 오늘은 다른 주제로 토론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2. 죽지'말아야 할' 이유와 '굳이' 살아야 할 이유


 "아니 얘들아 솔직히, 이성적으로, 존나, 존나 감정 잡지 말고...나 죽어도 니네한테 피해 좆도 없잖아?"


여러분은 만약 힘들어 하고 있는 주변인이 저렇게 주장한다면 뭐라고 반박하실 건가요? A)종교가 있으신 분은 신을 얘기할 것이고, B)가족 또는 친구를 생각하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권고되지 않지만 C)"나도 힘들다-"거나, D)"죽을 용기로 아득바득 살아라-"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고요. 또는 E)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로, 해소해주고자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F)그분의 손을 잡고 병원이나 상담소로 뛰어가 우울증의 치료를 도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위 모든 시도는 그 사람에게 있어 결국 '나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A~F 중 어떤 과정을 통해 당장 그분이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있어서 여러분 '덕분에 안' 죽었다-가 될 수도 있지만, 여러분 '때문에 못' 죽었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살위기 청(소)년의 입장에서는 자살로 증명(또는 목격)되는 '우리 사회의 실패'를 예방하고자, 또는 그런 '불완전'을 목격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들'의 이기심의 시도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살든 죽었든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그저 가식적인 말들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구하지 말라-를 얘기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인이 저렇게 주장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죽지말아야 할 이유(don't)는 얘기할 수 있어도, '죽고싶은 그가 그럼에도 굳이 살아야 할 이유(won't)'는 얘기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설령 얘기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을 그 사람이 채택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1) 외부로부터의 위험, 예컨대 폭행이나 성폭행, 학교폭력, 경제적 좌절 등에 의해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과, 2) 더 이상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유인을 느끼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1)은 외부로부터의 위험에 의해 벼랑끝까지 내몰리고 내몰리다가 끝끝내, 또는 도피하듯 죽음을 저지릅니다. 이들은 현재의 상태가, 또는 그가 바라보는 미래가 괴롭고 힘들고 수치스러워서 차라리 죽음을 저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가(우리가) 도울 수 있었는데도 도와주지 못해 '놓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살의 예방법으로는 사회안전망 따위의 제도를 발전시키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것과 가해자를 처벌하는 정도와 밀도를 강화하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 태도를 체화하는 노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는 다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이유가 아닙니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득바득 일해서 살아내고자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몸이고 내 권리, 나는 그냥 죽으련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울증 치료를 권하는 걸 '나를 기어코 못 죽게 하려는 시도'로 읽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2)의 사람들도 처음부터 죽고 싶어하는 유전자를 강하게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고, 그러므로 2)의 상태에 놓이는 걸 막는 방법들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이미 시도 또는 노력되고 있고, 대개 사후적인 조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2)의 상태에 놓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앞으로도 발생하고, 그때에 그들에겐 사후적인 조치는 대부분 '헛소리' 내지 '간섭'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나를 삶에 묶어두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사람들, 삶에 질린 사람들, 주변의 "삶에 남으라-"는 호소를 '팩트'로 비웃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기대를 제공하는 방법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 질문이 이번 토론글의 핵심입니다. 


3.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의 가능성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ㄱ) 교육입니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사람의 목숨이 가지는 숭고함'이라던가,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끼치는 악영향'  또는 '삶의 철학'따위를 교육하는 겁니다. 이른바 가치관의 확립을 도모하자는 건데, 저는 이 방법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우선 '삶에 대한 기대'라는 가치를 국가가 교육이라는 제도로 획일적으로 주입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삶에 대한 가치'라는 건 개인이 생애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주조해내거나 다른 곳으로부터 채택하는 거지 교육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종교를 가짐으로써 삶에 대한 어떤 사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ㄴ) 주변인들과 또는 혼자서 사회에 놓여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을 향유하며 '재미'를 느끼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ㄴ)의 콘텐츠들은 화폐 등을 교환해 소비할 수 있고, 화폐 등을 얻기 위해 탄생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콘텐츠 개발을 나라나 지방정부가 지원하고, 그런 콘텐츠로의 접근과 소비를 진작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탈상품화 정도를 높이고 가처분소득을 늘리거나 바우처의 형태로 소비를 지원해야겠죠. 기본소득이나 참여소득을 지지하는 몇몇 주장이 이런 내용을 담고있죠. 

ㄷ) 보다 끈끈하고 정다운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소외나 고립 따위의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 개인들을 더 자주 사회에 노출되거나 나오도록 기획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몇몇 조례들이 제정되고 있죠. 광주를 선두로 다양한 은둔형 외톨이 지원센터가 설립되는 건 이런 시도의 한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https://gjtory.kr/). 

ㄹ) 자기 삶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아 '무료한' 또는 '부끄러운'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무런 직업도 없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에게 주민자치경비의 형태로 역할을 수행시킨 결과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소논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논문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어떻게보면 ㄴ)과 ㄹ)은 같은 갈래로 묶일 수도 있겠네요. 애초 ㄴ)의 콘텐츠에는 시장이나 공공에서 공급되는 '물건'이나 '서비스'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과 창출해내는 '경험'일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이유는 사회가 '생산적 인간'을 강조하고 '잉여인간'은 멸시하는 구조가 작용하는 것이니 ㅁ) '생산적 인간'을 강조하는 흐름에 대한 비판 및 개혁도 간접적이나마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을 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더 떠오르는 방법이 없습니다. 

위 방법들 중 ㄷ)ㄹ)은 '인터넷'의 존재가 있어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개인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기 방 안에서 인터넷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교류를 발전시켜 실제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친구관계는 A) 범죄 따위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고, B) '많지만 느슨한' 관계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많지만 느슨한 관계의 인간관계는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부를 수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4. 맺으며

사실 '삶에 대한 기대의 제공'을 얘기했지만 그 기대는 개인이 스스로 살아가면서 주조하거나 채택하는 입니다. 이 '꿈'은 개인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꿈의 기획에 제약이 걸릴 겁니다. 가) 자본주의 사회냐 공산주의 사회냐 사회주의 사회냐, 나) 남자냐 여자냐 성소수자냐, 다)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 라) 부자냐 빈곤층이냐, 마) 가족이나 주변 지역사회의 구성과 성질은 어떠하냐 등등.

저는 여기서 가)와 라)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꿈을 기획하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획할 수 있는 꿈의 성취는 '자본' 또는 '노동'이라는 틀, 도구, 경로를 반드시 필요로 할 겁니다. 비유하자면 그 어떤 요리사라도 식재료 없이 자신만의 요리를 기획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옹호하면 옹호했지, 그 스스로의 붕괴를 초래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평등을 옹호하는 체제는 아니죠(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체제 속에서 개인들이 그 체제의 제약을 뛰어넘는 꿈을 기획하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해야 할까요?). 이 문제도 더 고민해 보고 싶지만, 저는 아는 게 거의 없어 이만 여기서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일부 내용이 누락되어 2023.04.24.월요일에 추가했습니다. 2번 목차에 원래는 사망한 학생의 말이 있었으나, 현재 영상을 찾을 수도 없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아 유사한 문장을 따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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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2)의 자살 시도 유형을 분류해주셨지만, 두 유형은 전부 사회구조적인 자살 유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문제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안해주신 해결책 역시 사회구조적인 접근이구요.
물론 스스로 철학적 숙의 과정을 거쳐 생과 사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사례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사례는 개인의 온전한 선택처럼 보일 지라도 사회적 영향이 큰 경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노력이 분명 중요할 것입니다.
다양한 해결책을 각각 제시해주셨지만, 각각이 완전히 독립적인 해결책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능한 모든 접근(언급해주신 체제의 전환을 포함하는)을 통해 사회적인 자살 유인을 최대한 줄이고, "때문에 못" 죽었다 느끼는 사람들도 "덕분에 안" 죽었다고 느낄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되네요. 여러 가지 갈래로 정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구요. 하지만 슬프게도 저는 지금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고, 웃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합니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첫 걸음처럼 느껴지는 글이네요.
이 사건을 보면서 떠오른 키워드는 '무의미'였습니다. 글에서 이야기 하신 것처럼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이 사건도 그 일환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치환할 수 없듯이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어가는 원인도 하나의 이유보단 사회의 구조에 있을 것입니다. 제도나 구조를 바꾸는 해결책이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ㄴ,ㄷ,ㄹ로 생각을 해보자면.. 현시대의 조건에 맞게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그 내외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임파워/독려하고, 그와 연관되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배치하면 좋겠네요. 그런 프로젝트들이, 제도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좀더 아래에서 사회구조적으로 자살이 늘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은데, 저도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논의와 실천도 함께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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