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째 옷 만들었는데…내 노동을 증명할 수 없다 (2024-07-01)
전소영 | 재봉사·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대의원
‘2024 봉제인 5대 요구 실현’을 촉구하는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결의대회가 6월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개최됐다. 필자 제공
6월1일 뜨거운 오후였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노랑과 파랑의 피켓에는 굵고 큰 글씨로 △4대보험 일부지원 요구 △공정임금·공정단가 전수조사 △봉제인 실업수당 지급 △사업자·노동자·정부 3자 상설합의기구 설치 △봉제종사자 노동이력증빙제 도입 등 봉제인 5대 요구가 적혀 있다.
나도 그렇고, 이날 모인 200여명의 봉제인들 대부분은 생애 첫 집회다. 손가락에는 늘 잡던 쪽가위와 원단 대신에 피켓을 들고, 매일 듣는 라디오와 ‘미싱’ 소리 대신에 사회자의 구호에 맞춰서 봉제인의 5대 요구안을 서울시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 초여름 햇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만큼 마음속에서 뜨거운 뭉클함이 올라왔다. 옆자리의 동료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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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곳을 ‘우리 회사’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숙녀복 바지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봉제공장이다. 원단 재단은 재단사가 하고, 옷의 형태가 나오기까지 미싱기계로 꿰매는 일은 재봉사가 하는데, 재봉사인 나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저녁 7시 퇴근한다.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고는 휴식시간이 없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잠깐씩 하는 스트레칭 정도가 유일한 휴식이랄까. 급여는 일당제다. 봉제 일은 월급제, 일당제, 옷을 만드는 개수대로 받는 개수임금제가 있다. 대부분이 일당제 아니면 개수임금제다.
‘우리 회사’에 다니지 않는 내게 누군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옷 만드는 일을 한다고 답한다. 그들 대부분은 ‘기술자라서 너무 좋겠다. 노년에도 건강하면 할 수 있으니’라고 하는데…. 봉제 일 자체는 멋진 프로페셔널 평생기술직이겠으나 프로는 페이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하지 않는가. 현재의 봉제 현장은 1970년대와 다를 바 없는 임금체계와 공임으로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열악한 환경 탓에 신규 인력이 유입되지 않아 50대인 내가 막내뻘이며 봉제계의 아이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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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지 않고, 프로페셔널한 전문기술직도 아니지만 나는 계속 노동하고 있다. 미싱 모터가 돌아가며 한땀 한땀 박히는 바늘땀만큼 마음을 다해 옷을 잇고, 소복이 쌓인 원단의 먼지같이 깊은 세월 연마한 기술로 35년째 매일 옷을 짓는다.
패션 대한민국의 위상은 주문한 원단이 오전에 공장에 도착하면 그날 오후 6시까지 제작을 마쳐 출고까지 하는 시스템으로 가능했다. 여기에 공헌했다는 자부심을 갖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내가 만든 옷을 입고 경기를 뛰는 국가대표 선수를 볼 때는 저절로 환호와 박수가 나오고, 멋진 연예인들이 내가 만든 옷을 입으면 가슴이 설레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거리에서 평범한 이들이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마주할 때의 기쁨도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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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의 노동 이력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울 때도 분명 직장을 다녔고, 수십년에 이르는 긴 노동 이력에도 불구하고 재직증명서 한장 뗄 수 없다. 4대보험 미가입자에게 직장인 대출을 해주는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탈하고 참담했다. 비록 실낱같았지만 내 직업의 자부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그때 처음으로 전업을 염두에 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한 업계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일해온 사실을 증빙할 수 없어서 국가의 긴급지원은커녕 은행의 직장인 대출도 받기 어려운 현실이 과연 정상인가.
봉제인 모두가 잘못된 현실을 알고 있지만, 바꿀 방법을 몰라 묵묵히 참고 견뎌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을 뒤로하고 6월1일 드디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서울봉제인지회라는 단체가 먼저 방법을 제안하고, 참여할 기회를 마련했다. 처음으로 집회를 하면서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졌다. 모두가 전태일다리까지 행진하고 우리의 요구를 적은 리본을 달았다. 봉제인 모두 이런 행사는 처음이라서 신기하고 재밌어하며 뿌듯해했다. 우리의 목소리에 서울시가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바란다. 서울시에는 올해 제정된 패션봉제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가 있다. 봉제인을 배제하고 패션봉제산업을 어떻게 육성한다는 말인가. 봉제인이 자긍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고, 작업 환경이 개선되기를 꿈꾸며, 오늘 아침도 출근길 첫발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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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는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코멘트
2집 근처 산책 코스에 봉제 노동자들의 작업 공간이 있는 걸 봤는데요. 밤에도 계속 불이 켜져있더라고요. 다 읽고나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런 문제가 한 두 곳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봉제 노동자에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방치되고 있다는 게 당황스럽습니다.
단순 노동에 대한 가치도 충분히 크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되는 사회가 안타깝네요..